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월터스토프 “하나님의 정의”
2018-12-24 19:20:15
1부 각성
1. 두 가지 각성 경험
1975년 남아공 포체프스트룸 대학교가 주최하는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아파르헤이트에 저항하는 흑인과 유색인들의 정의를 향한 외침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늘에서 어떤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 체험을 통해 내가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했고 내가 하나님께 충성한다면 나는 그런 불의의 희생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1978년 시카고에서 열린 팔레스타인 권리에 관한 학술대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거기에 참석한 150명의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들이 격렬한 언어로 자신들의 원한을 토로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정의에 대한 거대한 열정으로 부르짖었고,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금 이렇게 학대를 당하는 자들을 위해 내가 적절한 방식으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하나님의 소명을 느꼈다. 이 두 가지 경험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정의라는 어떤 추상적인 이야기를 읽은 것도 아니고 불의의 희생자들을 보도하는 신문기사를 읽은 것도 아니다. 나는 학대받는 사람들을 직접 대면했다. 이 사람들은 나에게 자기 삶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일상적 삶을 이야기했다. 조직적으로 학대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자극을 받아 나는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사회정의론에서 롤스는 학대받는 사람들로 시작하는 대신 정치적 윤리적으로 다양한 문제들로 시작했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체험 때문에 정의를 생각할 대 학대받는 사람들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아프리카너들이 아파르헤이트를 옹호하며 이 경우는 정의가 적합한 범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시에 아파르헤이트 문제로 남아공이 무질서의 위협 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경우 질서와 무질서가 적합한 범주라고 생각했다. 왜 아프리카너들은 정의와 불의란 관점에서 그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질서와 호의란 관점에서 아파르헤이트를 옹호한 것인가? 흑인과 유색인이 부당하게 취급받는다고 인정하면 그들의 질서에 대한 열정과 자기중심적 호의에 제동을 걸어야 하고 결국 아파르헤이트 자체를 거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2. 암만에서 어느 날 저녁
팔레스타인 계 아랍인은 알리야 코우리 신부는 성공회 예루살렘 교구 부감독이었다. 몇 년 전 이스라엘 당국은 동족에게 자행된 불의를 강력히 비판하던 그를 8개월간 구속 후, 발언 기회도 주지 않고 이스라엘에서 추방했다. 그는 세계 교회가 왜 중동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버렸느냐고 물으며 이렇게 말했다. 무슬림들은 서양 기독교 국가들을 이스라엘의 배후로 간주한다.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인과 무슬림 사이에 끼어 압박을 받고 있다. 그들은 시온주의 정책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추방되고 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교회를 파괴하고 있다.
3.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에 대한 질문들
남아공과 중동에서 학대받는 사람들과 만남으로 나는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게 되었다.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정치철학은 롤스에 대한 주석의 연속이었다. 롤스의 후기 저작에서 그가 사로잡힌 질문은 자유민주주의 시민들이 다양한 종류의 종교적, 철학적 관점을 고수할 때 어떻게 자유민주주의가 안정되고 정의로울 수 있을까? 라는 것이었다. 그런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은 어떻게 잘 형성된 자유민주주의 시민들이 함께 사고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론의 형태로 나왔다.
4.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만든 한 가지 차이
우리가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면 어떤 차이가 생길까? 정의의 두 형식을 구분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해보겠다. 하나는 기본적 정의, 다른 하나는 반응적 정의라고 부르겠다. 학대받는 사람은 학대하는 사람에게 분노할 수 있는 권리, 혹은 그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된다. 이것을 허용권이라고 부르자. 학대받는 사람에게 허용된 것은 때때로 그 사람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학대받은 사람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학대를 다시 반복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요구할 때, 공동체 구성원들은 학대받은 사람이 학대한 사람을 처벌하거나 처벌을 지지하는 권리를 지닌다. 그들은 학대받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청구권을 지닌다. 학대로 인해 발생한 허용권과 청구권을 함께 묶어 반응적 권리라고 부르자.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것들이 학대받은 것에 대한 반응으로 획득된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모든 권리는 기본적 권리라고 부르자. 반응적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 반응적 정의이며, 기본적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 기본적 정의다. 처음에 나는 남아공에서 유색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정의에 대한 절규를 기본적 정의에 대한 절규로 들었다. 이제는 명백해 보이지만 나는 그들의 절규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기본적 정의의 실천에 대한 절규이자 동시에 기본적 불의의 교정에 대한 절규였다. 이 두 차원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정의론 서두에서 롤스는 자신의 작업이 잘 정돈된 사회를 위한 사회적 정의의 원칙을 구성하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그는 사회적 정의란 사회의 기본적 제도들에 권리와 의무를 부여하고 사회적 협력의 혜택과 부담의 적절한 분배를 정의하는 원칙이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기본적 정의를 발전시킬 때, 학대받은 사람들로 시작한다면, 분명히 롤스가 말하는 이상적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학대받는 사람들로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 정의론을 발전시킬 때, 사회의 기본적 제도뿐 아니라 개인 상호 간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을 염두에 둘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기본적 사회제도들에 의한 권리와 의무, 혜택과 부담의 정당한 분배를 위해 도달하는 원리는 상상속의 이상적 세계를 위한 원리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를 위한 원리가 될 것이다. 플라톤은 이상사회를 위한 정의론을 발전시켰고 롤스는 플라톤의 길을 따랐다. 부당하게 취급받는 사람들로 정의론을 시작하는 것은 내가 다른 길을 걸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5.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생긴 또 다른 차이
내가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정의론을 시작한 것 때문에 또 다른 차이도 생겼다. 서양에는 정의에 대한 생각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두 가지 사유방식을 하나는 바른 질서 개념, 다른 하나는 생득권 개념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바른 질서 개념은 한 사회가 바르게 질서를 유지하는 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정의에 대해 생각한다면, 권리는 어떻게 되는가? 어떤 바른 질서 이론가들은 권리에 대한 일체의 생각과 발언을 거부하거나 혹은 법과 사회적 관행에 의해 부여된 권리에 대해서만 말한다. 생득권 이론가는 사람들이 대우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본래의 모습대로 대우받을 때, 그 사회에 정의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개념들 간에는 핵심적 차이가 있다. 바른 질서 이론가들은 어떤 객관적 기준에 시선을 집중한다. 반면에 생득권 이론가들은 인격과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그들은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사람에게, 사람 상호간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이론의 핵심적 차이는 우리가 도덕질서의 심층구조라고 생각하는 것 안에 있다. 기본적 정의론에서 바른 질서 이론은 하향식 이론이고 생득권 이론은 상향식 이론이다. 남아공과 팔레스타인에서 자행된 불의는 사회가 어떤 추상적, 객관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을 그들의 존엄성에 적합한 방식으로 대우하지 않은 것이다. 20세기의 모든 위대한 사회정의운동가들은 권리의 언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아동, 노동자, 여성의 권리에 대해 말했다.
2부 정의와 권리
6. 권리 담론에 대한 반대
많은 사람들이 권리 담론에 적대적이란 사실이 드러났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반대했고 현상유지 옹호자들은 권리 담론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권리 대신 책임과 우정과 충성의 사회적 연대에 대해, 정돈된 사회를 위해 필요한 것에 대한 말한다. 다른 이들은 권리 담론이 자주 과장된 요구에 사용되므로 반대한다. 권리 담론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반대는 그런 담론이 근대 사회의 가장 광범위하고 심각한 질병 중 하나인 소유적 개인주의를 표현하고 조장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권리 담론이 개인을 도덕적 우주의 중심에 위치시키며 이기적 자아를 강화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남아공과 팔레스타인에서 학대받는 자들이 권리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들이 소유적 개인주의를 표출하고 조장한다고 비난할 수 없다. 여기서 검토해야 할 점은 권리 담론에 대한 반대가 그 담론이 피할 수 있는 남용에 대한 것인가 아니면 권리담론에 고유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권리 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권리 언어를 포기할 경우, 어떤 중요한 것이 상실되는가를 거의 묻지 않는다. 권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때, 우리는 권리 담론에 대한 반대가 피할 수 있는 남용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권리 담론 자체가 가진 고유한 어떤 것에 대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다.
7. 권리란 무엇인가?
고대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는 정의는 어떤 사람의 권리나 몫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울피아누스는 권리를 소유하는 것과 권리가 분배되는 것(혹은 향유되는 것)을 암묵적으로 구별한다. 어떤 사람에게 모욕당하지 않을 권리가 정당하게 분배되지 않은 것은 그 사람에게 그런 권리가 없다는 뜻이 아니고 그 사람이 그 권리를 향유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권리를 소유한다면 그 사람에게 그 권리가 정당하게 분배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그에게 그 권리가 분배되지 않는다면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다. 권리는 형이상학적으로 신비로운 어떤 존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권리는 항상 어떤 것에 대한 권리, 즉 어떤 것과 특정한 관계 속에 있다. 어떤 것에 대한 권리를 소유한다는 말은 우리 자신과 그 “어떤 것” 사이의 규범적 관계를 전제한다. 특별히 어떤 것에 대해 청구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합법적 청구권과 규범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울피아누스가 옳다면(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정의는 우리가 권리를 소유한 어떤 것이 정당하게 분배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사회 구성원들이 대접받을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므로 서로에게 대접받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 있다면 그 사회에는 기본적 정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8. 가치에 근거한 권리
우리의 권리 중 어떤 것은 입법이나 사회적 관행에 의해 부여된다. 하지만 모든 권리가 이런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자연권이다. 법률, 사회적 관행, 언어 행위와 완전히 별로로 모든 사람은 살해되지 않을 권리, 고문 받지 않을 권리, 모욕이나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다. 그렇다면 어떤 것에 대해서는 자연권을 갖지만,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권리를 갖지 못하거나, 겨우 사회적으로 부여되거나 언어적으로 생성된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권리는 가치를 존중함으로서 요구되는 방식으로 대접받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권리는 우리 삶에서 선이 되도록 대접받는 방식과 우리 자신이 소유한 가치의 결합을 대표한다. 우리 삶에서 선이 되도록 대접받는 방식은 동시에 인간 자신의 가치, 존엄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오직 삶의 선에만 작동하고 인간의 가치나 존엄에는 작동하지 않는 윤리 이론은 결코 자연권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9. 왜 권리 담론이 중요한가?
아프리카너들은 각 민족이 각자의 문화적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분리된 사회가 좋다고 생각했고 아파르헤이트라는 민족 분리정책을 도입했다. 그러나 그런 정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흑인과 유색인들에게 가해진 엄청난 불의는 그런 식으로 그들의 생각을 성취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음을 뜻했다. 우리가 권리 언어로 그런 정책에 도덕적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것은 바로 권리 언어가 압도적이고 결정적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권리가 이런 압도적인 힘을 갖는가? 우리는 권리와 의무의 관계에 주목함으로써,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관계는 상관관계의 원리 속에서 구성된다. 예를 들어 A가 B에게 어떤 행동을 할 의무가 있다면 B는 A에 대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의무가 있다면, 내가 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혹은 내가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면, 내가 그 행동을 하는 것도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우리가 권리의 언어로 행하고 말하는 모든 것이 의무의 언어로 행하고 말해질 수 있을까? 그것들은 동일한 규범적 관계를 선택적으로 표현한, 즉 같은 사실의 다른 표현일까? 그런 제안은 거부되어야 한다. 권리 담론이 우리의 도덕적 어휘에서 사라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받는 대접에 도덕적 의미에 주목하게 하는 언어, 어떤 사람이 학대받아왔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하는 언어를 상실할 것이다. 권리 언어가 거의 언제나 사회적 저항운동들이 선호했던 언어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 억압받는 사람들의 도덕적 상황에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아파르헤이트를 옹호했던 아프리카너들의 문제는 그들이 너무나 자신들의 선과 덕으로 충만해서, 흑인과 유색인들이 받았던 대접의 도덕적 의미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만적 자애를 사람들이 감사하며 받아들이길 원했으며 흑인과 유색인들이 똑바로 행동하지 않으면 자애는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권리 담론과 의무 담론은 동일한 도덕적 사실을 선택하지 않는다. 내가 당신을 대접해야 하는 방식대로 대접하지 않은 죄를 지은 것은 당신이 나에게 대접받은 방식에 의해 상처를 받았다는 것과 동일한 사실이 아니다. 나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과 당신에게 권리가 있는 것 사이의 관계는 동일하지 않다. 만약 우리가 의무 언어는 보유해도 권리 언어를 잃어버린다면, 도덕 질서의 피해자에 대해 더 이상 발언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심각한 상실이다.
10. 권리 담론은 소유적 개인주의를 위한 존재하는가?
권리 언어가 소유적 개인주의를 표현하고 조장한다는 일반적인 비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조직적 억압에서 자유로운 어떤 사람의 관점에서는 그런 비난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남아공 유색인들이 아파르헤이트의 불의에 저항하면서 권리 언어를 사용했을 때, 그들이 소유적 개인주의 정신을 표현한 것일까? 미국에서 시민권 운동이 소유적 개인주의의 거대한 분출이었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권리 담론이 소유적 개인주의를 표현하고 조장한다는 비난은 그 언어에 내재된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그 언어의 남용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소유적 개인주의 정신이 강한 사람은 대접받을 자신의 권리를 강조하고 타인의 권리는 무시할 것이다. 그것은 분명 권리 담론의 남용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범인은 권리 언어가 아니라 권리 언어를 남용하는 소유적 개인주의 정신이다. 소유적 개인주의를 위해 자연권을 사용하는 것은 권리 담론의 남용이다. 권리 담론에 의하면 당신의 가치 때문에 당신은 나에게 당신을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해 합법적인 요구를 할 수 있고, 나는 나의 가치 때문에 당신에게 나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지에 대해 합법적인 요구를 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갖고 있는 권리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면 당신은 나에게 학대를 당한 것이고, 마찬가지로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당신에게 받지 못했다면 나도 당신에게 학대를 당한 것이다. 권리 담론은 이런 현실에 강력한 발언권을 제공한다.
3부 성경적 정의
11. 세 교부들의 자연권
자연권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들은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아니라 12세기 교회법 학자들이었다. 라틴 교부인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는 당신은 당신의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의 것을 본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방교부인 가이사랴의 대 바실리우스도 같은 주제를 말했다. 안티오크와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설교자인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들 교부들은 인정머리 없는 부자의 도덕적 상황을 지적하기보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의 도덕적 상황에 발언권을 부여한다. 이들이 염두에 둔 것은 당시 사회가 부여한 권리가 아니라 자연권이다. 빈곤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이렇듯 놀라운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그들이 발명한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로마의 유산에서 가져온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온 것이다.
12. 구약의 정의
성경은 정의에 대해 자주 강하게 말하지만 정의에 대한 어떤 정의(definition)나 이론도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정의에 대하 잘 안다고 전제하고 불의를 고치라고 명령한다. 정의를 행하라는 성경의 명령의 신학적 배경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혹은 기억하기 위해, 혹은 기억의 한 방식으로, 자신들 안에 있는 과부, 고아, 객을 정당하게 대우하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억은 무언가를 마음에 담거나 회상하는 사적이고 내적인 행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기념물로서 어떤 일을 한다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 요약자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에 대한 언약적 반응으로 이해해야 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온통 정의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정의를 과부, 고아, 이방인 그리고 가난한 자의 운명과 연결한 곳은 없다. 그 이유는 플라톤의 주된 관심이 롤스처럼 이상적 이론을 개발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믈론 구약성경의 저자들도 사법적 정의와 제도의 중요성에 대해 결코 무지하지 않았다. 모세는 고별 연설에서 공정한 사법제도를 설립하도록 이스라엘에게 교훈한다. 하지만 과부, 고아, 이방인 그리고 가난한 자는 일반적으로 범죄자가 아니므로 그들에게 적합한 정의는 사법적 정의가 아니라 기본적 정의, 그리고 기본적 불의의 교정이었다. 구약성경은 과부, 고아, 이방인, 가난한 자들을 그저 불행한 사람들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을 불행한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은 누구도 그들의 상황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그래서 누구도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들의 곤경은 불의의 결과가 아니므로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일에는 불의를 고치려는 노력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침으로 그들의 곤경을 완화하는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다. 그들의 곤경을 완화하는 것은 선택적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된다.
13. 신약성경에서 정의가 대체된다는 주장
신약성경에서 구약의 정의가 사랑으로 대체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주장을 지지하는 사상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사상은 이렇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고 약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사회구조의 개혁이나 정부에 압력을 가해 정의를 행하도록 만드는 일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억압적이고 부패한 사회구조의 변화는 오직 이 구조 속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바뀔 때만 가능하다. 신약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의 변화를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천국에는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고 모든 억울한 자들이 신원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을 위해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고 기다려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일을 가능케 하신다. 이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의 기본적인 입장은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새 창조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신약성경의 근본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 이런 사상의 정당성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본다. 고려해야 할 질문은 우리의 기다림이 취하는 형태다. 우리는 이 세상의 불의에 침묵하면서 기다려야 하는가? 아니면 새 창조가 우리의 노력에 열매를 맺어주길 기다리면서 그런 불의를 줄이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가? 두 번째 사상은 이렇다. 1930년대 초반 스웨덴의 루터파 주교, 안데르스 니그렌은 아가페는 동기는 신약에서 지배적이며, 예수가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한 것, 그리고 우리에게 이웃을 위해 명령하는 것이 바로 아가페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니그렌은 정의라는 구약의 동기가 신약에서 아가페적 사랑의 동기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들과 교제를 하신 것은 정의의 원리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대체하려는 일련의 시도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니그렌은 예수가 보여주고 명령했던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를 포함하거나 보충하지 않고 정의를 대체한다고 결론짓는다. 그는 구약의 동기가 있는 정의는 신약의 동기가 없는 사랑으로 대체된다고 주장한다. 왜 니그렌은 신약에서 사랑이 정의를 대체한다고 생각했을까? 니그렌은 신약에서 사랑에 대한 전형적인 모범은 바로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하나님의 정의는 죄인을 용서하실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정의와 사랑은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의는 사랑으로 대체되어야만 했다.
14. 신약의 정의
니그렌 식의 사상은 지지할 수 없다. 그의 사상은 체계적인 면에서 일관성이 부족하다. 그는 항상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모범 삼아서 사랑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무작정 용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할 수 없다. 오직 누가 내게 악을 행했을 때, 그리고 내가 그것을 인지한 경우에만 나는 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런데 누구에게 잘못하는 것은 그 사람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 즉 그가 권리를 갖고 있는 어떤 것을 빼앗는 것이다. 용서는 정의와 불의에 무관심할 수 없다. 용서는 불의 그리고 그것의 인식에 대한 반응이다. 정의와 불의를 망각하는 것은 용서를 망각하는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면서 그를 부당하게 대우하면 나는 그렇게 대접받지 않을 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잘못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내가 그를 어떤 식으로 대우하지 않을 것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면 나는 그에게 그런 식으로 대우하지 않을 의무를 지닌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의무가 있다면 내가 그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니그렌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 즉 누군가에게 잘못을 범하는 일을 가끔은 사랑 때문에 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관성이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신약을 세심하게 읽는 사람은 결코 신약에서 정의가 대체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정의는 신약 전체를 관통한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정의에 의존한다. 이런 정체성 해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누가복음 4장에 예수는 정의의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구절이다. 마태복음 12장에도 예수에 대한 매우 비슷한 정체성 해명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예수와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분명히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을 정의 실천에 대한 구약의 표준적 예들로 인식했을 것이다. 복음서는 하나님이 정의로 다스리기 위해 임명하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의 신분과 정체성을 밝히고 있다.
15. 영어성경의 번역들
구약에서 정의가 두드러진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신약은 이 문제에 관해 구약과 연속성상에 있는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가? 구약의 저자들은 하나님이 정의를 사랑하신다고 선언하는데, 왜 신약의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가? 신약의 그리스 원전에서 정의( 디카이오시네; dikaiosyne)는 대부분 영어번역에서 정의(justice)보다는 의(righteousness)로 번역되어 있다, 오늘날의 영어로 righteousness는 결코 justice와 동의어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righteousness라고 묘사될 때, 그것은 그가 도덕적 정직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는 뜻으로서, 자기 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대화에서 의로움(righteousness)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적 담론에서 의로움이 하나님에 적용될 때, 그것은 전형적으로 하나님의 보복적 정의를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플라톤의 영어번역본들에서는 같은 단어들이 대체로 정의(justice)로 번역되는 반면, 신약성경의 영어번역본은 의로움(righteousness)으로 번역되는 이유는 뭘까?
16. 신약의 정의에 대해 몇 가지 더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발견하는 팔복 중 하나는 디카이오시네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5:10)이다. 대부분 영어번역본들은 여기 디카이오시네를 righteousness로 번역한다. 이것은 용납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박해를 받지 않는다. 그들이 도덕적으로 청렴하다고 박해를 받지는 않는다.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고치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다. 팔복 중에 다른 하나는 디키이오시네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5:6)이다. 대부분의 영어번역본들은 이 구절도 역시 righteousness로 번역한다. 예수는 그들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축복하시는가?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는 정의, 올바른 것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축복하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예수는 세례 요한에게 “우리가 이렇게 하여 모든 다카이오시네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마3:15)고 말한다. 여기서도 다카이오시네를 사람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예수가 실현하는 것은 정의이며 요한이 그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실현하는 것도 바로 정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다카이오시네를 구하라(마6:33) 예수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와 우리의 내적 자아가 올바른 관계에 있도록 구하라고 하신 것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의 청중들은 구약성경에 익숙했기 때문에,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고치는 것을 자동적으로 하나님나라와 연결했을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마25:31-46)는 전통적으로 기독교적 친절과 자비의 위대한 특성으로 간주되었다. 이 비유에서 디카이오스란 단어가 두 번 나온다. 축복이 선포되고 그 이유가 주어진다. 예수가 자기 우편에 있는 의인들에게 그들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비유의 맥락을 고려할 때,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여기에 등장하는 디카이오스한 행위들의 예에 주목하자. 그것들은 굶주린 자들에게 음식을 주고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고 나그네를 영접하고 헐벗은 자들에게 입을 것을 주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감옥에 있는 자들을 방문하는 것이다. 예수가 회당에서 인용한 이사야 본문(사61:1-2)에서 디카이오시네를 행하는 예도 마찬가지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주린 자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며 유리하는 빈만민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는 것이다. 결국 양과 염소의 비유는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바로잡는 것에 대한 대헌장이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약자들에 대한 구약의 우선적 선택이 신약으로 옮겨지는 점이다. 신약에서 몇 개의 디크(dike) 어근 단어들에 대한 영어번역들은 정의의 압도적 중요성을 감추고 있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영어성경 독자들이 정의가 신약에서 사랑으로 대체되었다고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17. 정의와 사랑
신약에서 사랑이 정의를 대체한다는 일반적 견해는 거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랑과 정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니그렌은 자신의 사랑 개념을 정의의 요구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자기희생적 관대함으로 이해했다. 복음서에는 예수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명령한 이야기가 나온다(마22:34-40, 막12:28-34, 눅10:25-37). 두 개의 사랑 명령은 단지 토라의 핵심이나 중심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 토라를 인용한 것이다. 첫 명령은 신명기6장에서 인용한 것이고, 두 번째는 레위기 19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예수의 청중들은 그 명령을 자신들이 토라에서 읽은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레위기 19장에는 사랑 명령으로 끝나는 여러 가지 상세한 명령들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랑 명령은 앞에 나온 구체적인 내용들의 일반화된 요약인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정의가 서로 적대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레위기19장은 이웃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한 예로 인용하고 있다. 정의가 요구하는 대로 사람을 대우하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의 한 예가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사랑을 이해해야 할까? 정의는 권리에 근거한다는 나의 주장을 기억하라. 예수가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면서 우리에게 명령하는 사랑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것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증진과 타인의 가치에 대한 존중을 모두 포함한다. 사랑은 어떤 사람의 가치나 존엄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 사람을 대우하면서 그 사람의 복지를 증진시키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을 학대하면서 복지를 추구하는 것은 용납된 수 없다. 온정주의적 자애가 틀린 것은 행위자가 대상자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의 선을 증진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남아공에서 발견한 상황이었다. 예수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기희생적이지만 정의에는 둔감한 자애로 이웃을 대우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18, 정의, 사랑 그리고 샬롬
구약에는 샬롬이란 말이 매우 빈번하게 등장한다. 샬롬은 신약에서 에이레네로 번역되는데 이는 평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샬롬은 평화나 적대감의 부재를 넘어선다. 샬롬은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의 번영, 즉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와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우리와 창조 일반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남아공과 팔레스타인에서의 울부짖음은 모두 샬롬에 대한 요청이자 그것의 부재에 대한 탄식이었다. 사회가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일 때, 샬롬은 존재하지 않는다. 불의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곳마다 샬롬은 존재하지 않는다. 샬롬은 정의를 넘어서지만 정의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이사야는 공의의 열매가 화평이며 정의의 결과는 평안과 안전이라고 말한다.(사32:16-17) 예수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샬롬은 긴밀하게 연결된다.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샬롬을 추구하듯이 이웃의 샬롬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공동체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성경적 사랑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샬롬이 정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정의를 대립시키는 복음주의 진영의 일반적인 생각은 매우 잘못이다. 샬롬이 정의를 포함하고 사랑이 공동체의 샬롬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랑은 정의를 포함한다. 샬롬을 추구하는 사랑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의 소명이다.
19. 성경은 바른 질서 개념으로 정의를 말하는가?
성경은 자연권의 존재를 전제한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전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복종에 대한 권리, 하나님의 가치에 대한 인정의 권리 등.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권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처벌하기도 하시고 용서하기도 하신다. 용서나 처벌은 권리를 전제한다. 성경은 인간에게도 자연권이 있다고 전제한다. 정의에 대한 두 개의 근본적으로 다른 사유방식이 바른 질서 개념과 생득권 개념이다. 생득권 이론가는 개인과 인류에게 어떤 특정한 권리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그들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가 권리를 갖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가치, 우리의 존엄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바른 질서 이론가는 존엄성을 지닌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권리를 부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직간접적으로 권리를 부여하는 외적 기준이 항상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외적 기준과 그것을 특정한 경우에 적용하는 것이 없다면 누구도 자연권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럴 권리를 가지고 계심을 전제하는 것이고 우리는 그 명령에 순종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가진 권리는 누가 준 것이나 임명한 것이 아니라 그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라는 자연적 관계서 나오는 자연권이다. 이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식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리는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자연적 허용권이다. 우리에게 명령할 하나님의 권리는 생득권이지 바른 질서가 아니다.
4부 불의 바로잡기
20. 인권
인권이란 무엇인가? 유엔의 인권 문서들은 인권이 무엇인지 설명하지 않고 권리 목록을 제시한다. 인권에 대한 일반적 설명은 그것이 인간이 됨으로써 소유하는 권리라는 것이다. 암브로시우스, 바실리우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사람이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적절한 생존수단에 대한 공정하고 합리적인 접근의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권리를 갖기 위해 꼭 덕스러운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엔이 제시하는 인권 목록의 권리를 갖기 위해서는 인간이라는 사실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일할 수 있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일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유엔 인권 선어는 모든 인간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 같다. 대개의 경우 그들이 인용하는 권리는 정상적인 성인이나 어린이의 권리다. 권리 일반을 고려할 때 다른 조건이 같다면 소유하는 권리와 모든 것을 고려할 때 소유하는 권리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전자는 일반적으로 조건적 권리로, 후자는 일반적으로 궁극적 권리로 불린다. 일단 우리가 인권이라는 인류의 권리를 확인했다면, 우리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그런 권리의 근거가 무엇인가? 이다. 우리는 근거나 설명을 제시할 수 없지만, 인권이 존재한다고 분명히 믿을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며 더욱이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다. 유엔의 권리선언문도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하지만 그 존엄의 근거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인권의 토대에 대한 거의 모든 세속적 제안들 대부분은 우리가 능력 설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는 인권의 토대가 되는 가치가 인간이 소유한 특정한 능력에 동반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그런 능력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의 존엄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한 인간이 아무리 손상되었어도 그 인간적 본성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이 인간적 본성은 진실로 고귀하다. 왜냐하면 인간 이외에 어떤 동물도 그렇게 주목할 만한 본성이 없기 때문이다. 인권의 토대가 되는 존엄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인간의 본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인권의 토대가 되는 존엄성을 우리에게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기독교 전통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제안들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특정한 능력들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닮은 것으로 구성된다는 이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부여된 창조 속의 특정한 역할들, 예를 들어 지배하는 역할처럼 하나님을 닮거나 대표하는 것으로 구성된다는 이해다. 그런 역할은 분명히 특정한 능력의 소유를 요구하게 되고, 이 경우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부족하게 된다. 나는 대안적인 세속적 근거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특정한 능력에 대해 하나님을 닮은 것으로, 혹은 창조에서 특정한 역할과 관련해서 하나님을 닮거나 대표하는 것으로 형상이 구성된다고 이해하기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하나님을 닮은 본성을 갖는 것으로 구성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전통적인 능력유사 혹은 역할 유사 설명 대신 본성 유사 설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기독교적 설명이 세속적인 것만큼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권의 근거가 되는 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인간과 친교와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하나님의 욕망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영광스러운 일이고,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토대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친구로 삼고 싶어 하는 어떤 사람으로 누가 선택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철회할 수 없는 영구한 가치가 부여됨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친구가 되려면 인격적 존재의 본성이 필요하다. 모든 동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인격적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다. 기독교는 예수 안에서 삼위일체의 제2위가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취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특별한 영예다. 심위일체의 제2위는 우리의 본성을 취함으로써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는 영예를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다. 우리 각자에게 그것보다 더 큰 영예가 없다.
21. 남아공에서 보낸 6일
정부는 엘런 부삭의 여권을 돌려주라는 판사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로써 자신들의 눈에 좋게 보일 때는 법과 질서의 가치를 큰 소리로 떠들던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법보다 질서, 그들의 질서를 더 중시한다.
22.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의 기술
남아공에서 머물면서 나는 아파르헤이트의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에 대해 많이 보고 배웠다. 나는 그 저항운동에서 예배의 중심적 역할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목격한 것은 노래, 구호, 이야기 등이 맡은 역할이었다. 나는 미학을 가르치던 초기에 순수예술에 관심을 집중하고 예술과 삶의 분리라는 교리를 수용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라디오에서 노동가요를 들으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 노래는 단순하지만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그 노래들을 부른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평일의 일상생활에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일하면서 노래하는 행위가 어떤 음악을 미학적으로 감상하는 행위보다 열등한 것인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할만한 아무 이유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아파르헤이트 저항운동에서 관찰했던 노래하기, 구호 외치기는 이런 주장의 생생한 표현이었다. 일하면서 노래하는 것이 때로는 그 일을 고귀하게 만들고 고양시키며 품위를 부여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은 그 운동의 회원들을 연합시킨다. 음악은 말을 고양시키며 함께 노래할 때 신비한 연합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예술 작품도 아파르헤이트 투쟁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파르헤이트에 관한 소설들은 아파르헤이트 아래 있는 삶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를 우리 앞에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들은 아파르헤이트 아래 있는 삶의 실체를 세상이 알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나는 “행동하는 예술”에서 철학자인 우리가 예술이 삶에 근거하는 다양한 방식에 주목해야 하며 순수예술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이후의 발걸음을 내딛지는 못했다. 특히 사회적 저항운동에서 예술의 역할에 대해 논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그런 작업을 할 것이다.
23. 감정이입의 장벽과 마음의 굳어짐에 대해
내가 남아공과 팔레스타인에서 사람들의 정의에 대한 외침에 반응한 이유는 거기서 조직적 불의의 희생자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직접 대면했기 때문이었다. 이 경험에서 나는 사회정의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힘을 모으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학대당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대중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음으로 그것은 내 안에 감정이입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단순한 동정이나 공감을 넘어 나 자신이 그들과 하나 되는 것, 정서적으로 일치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분노했고 그들과 함께 모욕을 느꼈다. 어떤 방식으로 감정이입이 촉발되든지, 불의를 바로잡는 투쟁에 기운을 불어넣는 것은 바로 학대받는 자들을 향한 감정이입이다. 나는 자신들의 억압 경험을 이야기하고 정의를 간절히 요청했던 사람들과 정서적 일치를 이룸으로서 큰 자극을 받았다. 하지만 학대받는 자들의 얼굴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정이입이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 얼굴과 목소리가 아파르헤이트를 옹호하는 아프리카너들에게는 감정이입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내게 감정이입을 촉발시킨 그 얼굴과 목소리가 대부분의 이스라엘인과 미국인들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희생자들의 얼굴과 목소리 때문에 감정이입이 생기도록 허용하면 자신이 그들의 곤경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삶도 변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데, 결코 그럴 생각이 없으므로 오히려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마음이 강퍅해지고 감정이입이 가로막히는 또 다른 이유는, 희생자들을 열등한 인간으로 혹은 그들을 역겹게 생각하거나 희생자들의 고난이 그들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그것은 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현재의 정책들이 위대한 선을 성취할 것이며 거기에는 고통이 수반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아프리카너들과 이스라엘인들이 이런 이념을 받아들임으로 감정이입이 가로막혔다고 생각한다. 특정한 개인의 고통이 불의의 결과인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내가 그들을 돕도록 정의가 요구할 때가 있고, 때로는 정의가 요구하지 않을 때가 있다. 정의가 우리에게 행동을 요구하는데 내가 돕지 않는다면 불의를 저지르는 일이 될 것이다. 정의가 요구하지 않는데도 내가 돕는다면 그것은 정의를 초월한 자선의 행위다. 불의의 희생자를 돕는 방법은 그의 고통을 완화하거나 불의를 바로 잡기 위한 투쟁을 후원하는 방법이 있다. 때때로 감정이입은 불의를 교정하기 위한 투쟁을 지원하도록 자극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대상들의 곤경이 사실상 불의의 결과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것은 고통 받는 사람의 곤경이 불의로 인한 것이란 사실을 인정하기를 꺼려하는 경우다. 그 이유는 불의를 바로 잡으려는 투쟁이 갈등과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 사람들은 불의한 상황을 무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곤경을 완화시키는 일에만 몰두하려고 한다. 기독교인들에게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만약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사랑이 정의를 대체한다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은 불의한 상황을 정의의 행동에 대한 부름이나 불의를 교정하는 투쟁을 후원하라는 부름으로 해석하는 대신 단지 자애로운 사랑의 부름으로 해석하고 자선에만 관심을 보이게 될 것이다.
24 사회정의 운동의 구조
사회정의 운동의 목적은 사회적 관행, 법, 혹은 그런 법이 집행되거나 집행되지 않는 결과로써 발생한 학대에 관심을 갖고 그런 학대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첫째로 각성이 필요하다. 희생자들은 가해자들이 그들의 곤경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해 알아야 하며 자신들이 처한 곤경의 원인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둘째로 정서적 불만과 연대가 필요하다. 희생자 입장에서 정서적 불만과 그 일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가 필요하며 후원자들은 정서적 불만 및 분노와 함께 희생자들에 대한 감정이입도 필요하다. 셋째로 희생자들은 가해자들과 그들의 옹호자들이 행동을 멈출 수 있게끔 무언가를 하도록 활성화되어야 한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억압자들에게 분노하며, 대중들은 희생자들에게 정서적 연대를 하지만 그들은 개념적 소극성으로 침몰하기 쉽다. 이런 소극적 문화의 원인은 편만한 부패다. 즉 권력자들 사이에서 부패가 너무 만연하여 불의를 바로 잡으려는 일체의 노력이 소용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희생자와 대중이 사회적 소극성 속으로 침잠했을 때, 그런 소극성 문화가 분명하게 극복되지 않으면 그것을 활성화하려는 지도자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다. 희생자 운동이든 후원자 운동이든 사람들은 무언가가 이루어질 수 있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활성화 단계에서 적대감, 저항이 분출되기도 한다. 공적인 사회적 관행들, 법과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게 도덕적 비판을 가할 때, 그 비판은 대개 비판을 당하는 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킨다. 또한 사회정의운동은 억압자들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갈등과 적대감을 양산한다. 왜냐하면 그 운동이 제기하는 사회정의비평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단계는 상황에 대한 사회정의 분석과 비평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권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언제 권리가 침해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5부 정당한 처벌
25. 온두라스 방문기
나는 온두라스에서 학대받는 약자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목소리를 들었으며, 불굴의 의지, 용기, 상상력으로 정부가 범법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한 자생 기관의 활동을 직접 목격했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연합회”(ASJ)는 온두라스 사람들로 구성된 자생적 기독교 단체다. 이 연합회는 세 가지 핵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그것은 평화와 정의 프로젝트, 노동권 프로젝트, 토지권 프로젝트였다. 평화의 정의 프로젝트는 폭력범죄의 희생자들의 사례를 살피고 그들에게 법률적, 심리적 도움을 제공하며 정부 관리들이 이런 희생자들에게 그들의 책임을 수행하도록 돕는다. 노동권 프로젝트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교육하고 노동관련 소송에서 승리하도록 돕는다. ASJ는 정의로운 법 체제를 확립하고 그런 법을 집행하며, 그 법을 위한 한 자들을 처벌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정부의 몫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ASJ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변호하고 도움을 주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공무원들이 법을 집행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일을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돕는다.
26. 보복적 처벌에 대한 바울의 거절
ASJ는 구제나 개발조직이 아니라 사회정의 조직이다. 이 단체는 사회정의를 확립하는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단체는 희생자들을 보호하는데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지 않고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사회정의를 유지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를 자극하고 돕는다. 이런 식으로 ASJ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국가업무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정당하게 반영하고 있다. 국가에 대해 기술된 로마서 구절(로마서12-13장)로 인해 지난 수백 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소극성이 정당화되어 왔으며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관행이 바울의 말을 오해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적 처벌을 내리는 것이 하나님이 국가에 부여한 과업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나는 여기서 보복과 처벌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처벌은 누가 한 짓을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희망과 예상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한 짓을 반복하지 못하도록 그를 변화시킬 희망과 기대 속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보복은 단지 빚을 되갚아주는 것, 그 악행이 초래한 선과 악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다. 나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은 보복을 반대하는 것이지 처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보복적 처벌’과 구분되는 ‘책망적 처벌’이란 표현을 쓰고자 한다. 나는 로마서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이 ‘책망적 처벌론’에 부합하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보복적 처벌을 수행하도록 권위를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책망적 처벌을 수행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다.
27. 국가의 임무와 권위에 대한 바울의 생각
로마서 13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국가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국가는 국민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며 국민들은 권위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불의에 직면해서 지난 수백 년 동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파르헤이트를 옹호했던 아프리카너들의 공통된 주장은 저항자들이 국가에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 나는 권위의 두 개념을 구분하고자 한다. 하나는 무언가를 행하는 도덕적 권위를 의미하는 “수행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의 자리에 있음을 의미하는 “제도적 권위”다. 로마서 13장 첫 두절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제도적 권위에 근거하여 국가 자체가 권위의 자리에 있으므로 백성들은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국가에 권위를 부여하신 목적이 불의를 제어하고 정의를 북돋기 위함이며, 그러므로 백성들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국가가 ‘권위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국가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할 권위를 주신 것이지, 국가에게 악을 행하는 권위를 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는 국가 자체가 악을 행하는 자가 되거나, 국가가 악한 의도로 강제력을 사용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바울이 하나님이 국가에 주신 권위를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수행 권위’의 개념으로 사용한다고 본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의미는 권세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임명된 일을 할 때 우리는 저항하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국가가 국민에게 특정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면 국민은 국가에 복종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국가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을 때 국가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것이란 뜻이다. 사회의 불의를 제어하고 정의를 확보하는 일은 하나님이 정부에게 부여하신 임무다. 정부는 정당한 법과 사법제도를 확립하여 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온두라스의 ASJ는 불의의 희생자들을 돕는 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국가에 행하도록 권위를 부여하신 암무, 즉 정의를 확보하고 불의를 제어하는 일을 국가가 제대로 수행하도록 돕고 지원하는 일을 중요시한다.
28. 정의, 용서, 그리고 처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논하지 않은 채, 기본적 정의에 대해 논의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용서가 반응적 정의 및 처벌과 관계가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반응적 정의 일반 특히 처벌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용서는 어떤 사람의 권리를 빼앗았다는 것, 그래서 불의가 발생했음을 전제한다. 더 나아가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이 자신이 해를 입었다는 사실, 불의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인지함을 전제한다. 용서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용서는 악을 행한 자와의 관계, 즉. 그 사람이 한 짓이 그의 도덕적 역사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그와 관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와 회개는 쌍방관계다. 신학적, 철학적 전통에서 회개는 용서에 대한 초청이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제기하는 문제는 심지어 회개하지 않을 때에도 용서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것이 보통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말로 인용된다. 그러나 신약성경 어디에도 예수께서 회개하지 않는 악행자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더 심각한 질문은 악을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 심지어 가능한가라는 점이다. 악행이 사소한 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사과의 형태로나마 어떤 보상도 없는 상태에서 희생자가 그 행위가 결코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인간관계를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서로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을 때도 선한 인간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6부 아름다움, 희망, 그리고 정의
29. 정의와 아름다움
우리가 대접받을 권리가 있는 방식으로 우리가 대접받는 한,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 정의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사람이 대접받을 권리가 있는 방식으로 대접받는 것은 사람의 가치에 적합한 방식으로 대접받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미학적 기쁨과 정당하게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사람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은 그의 가치에 적합하게 그를 대우하는 것이다. 미학적 기쁨이나 즐거움은 사람의 이런 가치에 주목하고 그 가치에 주의를 기울일 때, 경험하는 즐거움이다. 인간이 미학적 불결함 속에 살도록 강요된다면 그는 무례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사회적 상황이 우리 동료 가운데 어떤 사람을 빈곤 속에 살도록 강요한다면 그들은 학대받고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상황이 어떤 이들을 미학적 불결함 속에 살도록 강요한다면 그들도 학대받고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미학적 품위의 환경에서 살 기회는 선택적 사치가 아니다. 정의가 그것을 요구한다.
30. 희망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대의 속에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만성적인 위협은 탈진이다. 그런 대의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에는 희망이 요구된다.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낙관주의가 아니라 희망을 요구한다. 그것은 특별한 종류의 희망이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기독교적 희망은 완성에 대한 희망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완성은 초자연적 형태의 합일로 이해된다. 아퀴나스가 말하는 기독교적 희망은 역사에서 발생하는 희망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불의를 교정하기 위한 투쟁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역사를 초월하는 행복한 상태에 대한 희망이다. 이런 식으로 희망을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사상의 한 오래되고 탁월한 흐름을 대표한다. 그러나 나는 기독교적 희망을 이런 식으로 한정하는 것이 신학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성경이 제시하는 희망은 완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한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에 대한 성경의 중심주제는 백성들을 불의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래서 성경의 구원주제에서 하나님이 정의롭고 정의를 행하시며 정의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규정된다. 구원자와 구속자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주제는 정의와 불의에 대한 개념 없이 진행될 수 없다. 기독교적 희망은 두 가지다. 한 가지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완성에 대한 희망이다. 이 두 개의 희망은 서로에게 동화되지 않고 구별된다. 전자는 현재의 창조세계 내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희망이고 후자는 미래의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이다. 불의를 교정하려는 기독교적 희망은 창조의 잠재력에 근거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정의롭고 거룩한 왕국을 세우신다는 약속에 근거한 희망이다. 이런 희망은 우리 스스로 불의의 교정을 위해 일함으로써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의에 참여하는 형태를 취할 것이다. 자크 엘룰은 불의를 교정하는 기독교적 희망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나라에 정의로운 통치가 도래하도록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과 우리가 행한 것을 사용하신다고 확신하며 불의의 교정을 위해 일하는 형태를 취한다고 말한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우리가 성공적으로 성취한 것이 실망스러울 만큼 전혀 해방적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경우도 있고, 때로는 실패로 보였던 것이 놀랍게도 해방적인 것으로 입증되기도 한다. 불의를 바로잡는 일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의 경우, 그 희망의 토대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통치가 실현되도록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쉽게 말할 수 없다.( 요약자주: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행동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신자들의 행동의 결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된다.)
31. 재정리
내가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도록 자극했던 것은 바로 내가 사회적 불의의 희생자들과 직접 대면한 일이었다. 내가 학대받는 사람들로 시작했다는 점은 롤스와 그의 거대한 추종자들을 맹종하면서 이상적 사회에서 기초적 사회제도들에 의한 권리와 의무, 이익과 부담의 정당한 분배를 구성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뜻이다. 대신 나는 우리의 실제 사회 안에서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 사회들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그 안에서 조직적으로 학대를 당한다.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내가 사유를 시작하는 것은, 처음부터 ‘바른 질서’ 개념보다는 ‘기본적 권리’ 개념의 방식으로 정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내가 정의에 대한 이런 두 가지 사고방식 간의 차이를 명백하게 구별하게 된 것은 남아공과 중동에서 학대받는 사람들을 대면한 후 약20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나는 그 첫 만남을 통해 학대받는 그들에게 자연권이 없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감지하게 되었다. 자연권은 어떤 객관적 기준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에 의해 주어지기 때문이다. 자연권은 현재 우리의 상태 속에 내재한다. 나는 정의에 대해 사유하면서 ‘기본적 정의’와 ‘반응적 정의’를 구분했다. 남아공과 팔레스타인에서 정의의 외침은 기본적 정의를 위한 외침이었다. 나는 그들의 외침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이후 나는 반응적 정의가 아니라 기본적 정의에 초점을 두고 정의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온두라스를 방문했을 때, 나는 반응적 정의에 대한 외침을 들었다. 그곳에서 학대받는 사람들도 기본적 불의의 희생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주로 말한 것은 온두라스의 총체적인 형사사법 제도의 붕괴였다. 법은 훌륭했지만 제대로 집행되지 못함으로써 사람들은 학대받고 악행자들에게 정의의 심판이 내려지지 못했다. 온두라스의 경우는 반응적 정의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기본적 정의도 불가능함을 잘 보여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이익과 부담의 공정한 분배, 그리고 상호간 교환에서 공평이나 평등으로 구성된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서양에서 지배적이었다. 정의를 분배의 공평성으로 본 롤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확고히 서 있다. 내가 율피아누스로부터 인용한 정의는 대우의 평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율피아누스에 따르면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은 각 사람의 권리와 몫을 각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내가 발전시킨 기본적 정의에 대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 전통보다는 율피아누스 전통에 확고히 서 있다. 남아공과 팔레스타인에서 학대받은 사람들이 단지 불공평의 희생자들이었다면 나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으로 정의를 사유했을 것이다. 현대 철학에서 권리와 자율성을 연결하여 자연권을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권리를 존엄성과 연결하여 기본적 정의론을 전개했다.
『하나님의 정의(Journey toward Justice)』 -N. 월터스토프
월터스토프는 자신의 복잡하고 난해한 윤리적 담론을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개인들의 가치와 존엄성을 서술한다는 점에서 ‘이상적 이론’인 존 롤스의 정의론과 다르다. 월터스토프는 정의를 ‘권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입증한다. 그는 서구의 정의론을 설명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울피아누스적 사고방식을 지지한다. 즉 각자에게 자신의 권리와 몫을 제공하는 것이 정의다. 정의가 기본적 인권에 대한 인식에서 기원하며, 이런 권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존엄성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성경과 교부의 글을 통해, 정의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놓는 월터스토프는 ‘희망’에 대한 서술로 글을 마무리하는데, 이성적 사유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구약의 정의와 신약의 사랑을 구별하는 이분법적 사상가들을 비판한다.
제1부 각성
제1부 ‘각성’은 월터스토프가 어떻게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지금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서술한다.
1장 두 가지 각성 경험
1975년 남아공 포체프스트룸에서 아프리카너들을 만났던 경험과 1978년 사카고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만나면서 정의에 대한 망각에서 깨어났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과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이 조직적으로 학대와 모욕을 당했는지와 관련한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벌어진 에피소드가 아닌, 존재의 일상적 상황을 묘사했다. 조직적으로 학대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것에 자극을 받아, 정의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하게 되었다. 아프리카너들이 아파르트헤이트를 옹호하며 흑인과 유색인들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놀랐다. 그들은 그것이 선한 의지의 발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본 것은 호의가 억압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며, 그것은 물론 자기중심적 호의였다. 정의와 불의란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고 오직 질서와 호의란 관점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프리카너들에게는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흑인’과 ‘유색인’이 부당하게 취급받는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질서에 대한 열정과 자기중심적ㆍ온정주의적 호의에 제동을 걸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아파르트헤이트 자체를 거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지배하며 안락하게 살고 있을 뿐이었다. 온정주의적 호의에 제동을 건다는 것이 정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왜 선의와 호의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당시 나는 답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정서적으로 감동받았을 뿐 아니라 이렇게 학대받는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라는 하나님의 소명도 받았다.
2장 암만에서 어느 날 저녁
코우리 신부의 증언을 소개한다. 그는 세계 교회가 왜 이곳 중동에 있는 우리 기독교인들을버렸느냐고 물었다. <왜 미국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형제자매인 우리 대신 시온주의자들을 지지하는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에서 교회를 파괴할 때, 왜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을 지지하는가?>
3장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에 대한 질문들
멀리 떨어진 남아공과 중동에서 학대받는 사람들의 곤경 때문에 정의와 불의의 문제를 깨달은 것도 값싼 자유주의가 아니었을까? 아프리카너들이 남아공에서 유색인들에게 한 일이나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저지른 짓에 대해 비판했다고 한들 나는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값싼 것이다. 포체프스트룸의 유색인들과 시카고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그들을 제쳐두고, 그들의 일을 가로채지 않았다. 내가 그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소명을 느꼈다고 말할 때는, 그들이 스스로 목소리를 높일 때 내가 그들 편에 서도록 부름받았다는 뜻이다. 철학적 주제와 씨름하는 우리는 우리의 관점에서 씨름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의 관점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자리에서 사물이 어떻게 보이는지 분명하게 설명한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들의 진지한 반대에 신중하고 책임 있게 경청하면서 말이다. 나는 이런 식의 철학을 대화적 다원주의라고 부른다.
4장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만든 한 가지 차이
우리가 학대받는 사람들로 시작하면, 어떤 차이가 생길까? 다시 말해, 내가 이렇게 학대받는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동일시 하면서 시작했다면, 나에게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정의의 두 형식을 구분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해보겠다. 하나는 기본적 정의, 다른 하나는 반응적 정의라고 부르겠다. 학대받는 사람은 전에 없던 권리를 획득하는데, 이제 그는 학대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처벌하거나 처벌받도록 원할 권리가 허용되는데, 이를 허용권(permission-rights)이라고 부르자. 또 학대받은 사람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학대한 사람이 다시는 학대를 반복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공동체 구성원들은 학대받는 사람이 학대한 사람을 처벌하거나 처벌을 지지하는 것에 대해 요구나 권리를 지닌다. 그래서 그들은 학대받은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청구권(claim-rights)을 소유한다.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학대하기 때문에 획득된 허용권과 청구권을 함께 묶어 반응적 권리라고 부르자. 그리고 다른 모든 권리는 기본적 권리라고 부르자. 진료소 안내원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기본적 권리다. 그것은 사람이 학대받아서 생긴 권리가 아니다. 반응적 권리는 기본적 권리가 침해되어서 생긴 권리다. 반응적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 반응적 정의 이며, 기본적 권리에 상응하는 것이 기본적 정의다. 나는 남아공의 유색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나타내는 정의에 대한 절규를 반응적 정의에 대한 절규로 듣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기본적 정의에 대한 절규로 들었다. 한참 후에 발생한 온두라스의 경험 전까지, 나는 반응적 정의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이제는 명백해 보이지만, 두 가지 차원의 정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기본적 정의의 실천에 대한 절규이자, 동시에 기본적 불의의 중단과 그 효과의 취소에 대한 절규였다. 한마디로, 후자를 기본적 불의의 교정(the righting)에 대한 절규라고 부르자. 내가 들은 절규는 기본적 정의의 실천에 대한 절규와 기본적 불의의 교정에 대한 절규였다. 이 두 차원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 중요하다. 존 롤스는 어떤 체계적 방식으로 일상생활의 더 “긴급하고 절박한 문제”를 다루는 것에는 결코 관심이 없었다. 그에게서 받은 인상은, 이상 사회를 위한 정의론과 반응적 정의를 결합하려는 것인데, 이것이 치명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기본적 정의를 발전시킬 때 학대받는 사람들로 시작하면, 분명히 이상적 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사회의 기본적 정의와 불의는 그 사회의 기본적 사회제도들이 권리와 의무, 혜택과 부담을 어떻게 배분하는가에 한정되지 않는다. 개인 상호 간의 관계에도 정의와 불의가 존재한다. 둘째, 정돈된 사회에서 기본적 사회제도에 의해 특정한 원리들이 분배의 정의를 만들어낼 것이란 사실로부터, 우리의 실제 사회에서 그런 제도들에 의해 분배의 정의가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학대받는 사람들로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본적 정의론을 발전시킬 때 사회의 기본적 제도뿐만 아니라 개인 상호 간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는 이론을 염두에 둘 것이란 뜻이다. 상상 속의 이상적 세계를 위한 원리가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사는 실제적 세계를 위한 배분의 원리가 될 것이다.
5장 학대받는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서 생긴 또 다른 차이
내가 기본적 정의에 대해 숙고할 때, 서양에서 정의에 대해 생각하는 두 가지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됐다. 하나는 정의에 대한 바른 질서(right order)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생득권(inherent rights) 개념이라고 부른다. 바른 질서 이론가는 한 사회가 바르게 질서를 유지하는 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바른 질서 이론가들 사이에도 견해들이 다른데, 존 롤스는 기본적 사회제도들에 의한 권리와 의무, 혜택과 부담의 분배를 위해 사회 구성원들이 공정하게 동의한 원리들로 객관적 기준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가톨릭의 바른 질서 이론가들은 전형적으로 객관적 기준이 자연법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의 경우 그것은 정의로운 것 그 자체라고 부른 추상적 형상(form)이나 관념(idea)으로 구성된다. 현대 신학자 조안 록우드 오도노반은 “의무의 객관적 모체(the objective matrix of obligation)”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객관적 기준을 의무의 객관적 모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능동적 권리뿐 아니라, 자연권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녀의 입장은 그것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하지만 나에게 길을 건너 당신을 도와줄 자연적인 주관적 의무가 있다면, 당신은 내가 길을 건너 당신을 돕는 것과 상관있는 자연권을 소유할 것이다. 즉, 내가 당신을 돕는 것에 대한 당신의 자연권은 내가 당신을 도와야 하는 의무와 상관이 있다는 말이다. 이제는 생득권 개념에 대해 살펴보자. 각 개인과 관련해서, 또 동료들 간의 관계와 관련해서, 그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어떤 외적인 기준은 필요 없다.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당신의 권리는 당신 안에, 그리고 우리들 상호 간의 관계 속에 있는 어떤 것 내부에 본래부터 존재한다. 여기에 두 개념들 사이의 핵심적 차이가 있다. 바른 질서 이론가들은 어떤 객관적 기준에 시선을 집중한다. 플라톤의 형상, 자연법, 의무의 객관적 모체, 정당하게 도달된 분배의 정당한 원칙 등.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이 그런 기준에 순응하는 한 사회는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생득권 이론가들은 인격과 사람에게 집중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권리를 부여하는 어떤 것이 이들에게, 이들 상호 간의 관계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인격과 인간이 본래 받아 마땅한 방식으로 대우받는다면 사회가 정의롭다고 생각한다. 유색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은 객관적 기준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자신들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말했을 뿐이다. 그들은 모욕을 당했다. 아프리카너들과 이스라엘인들은 이들의 존엄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것이 불의의 뿌리였다. 사회가 어떤 추상적ㆍ객관적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들을 그들의 존엄성에 적합한 방식으로 대우하지 않은 것이다.
2부 정의와 권리
6장 권리-담론에 대한 반대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인 이유로 권리-담론에 적대적이었다. 현상유지 옹호자들은 권리-담론 자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옹호한 아프리카너들은 권리가 아니라 질서에 대해, 서로를 향한 책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며, 권리를 요구하는 흑인과 유색인보다,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권리절대주의’ 라고 부른 것이 권리-담론에 자주 동반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특정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하고, 후에는 그 문제를 더 깊이 다루지 않으면서 어떤 반대도 허용하지 않고, 그런 주장을 절대적이고 오류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면서 사람이 실수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는 일반화된 관행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권리-담론은 자주 과장된 요구에 사용되어, 이상의 추구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라고 주장함으로써 그런 이상이 지금 성취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현실주의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권리-담론은 근대사회의 가장 광범위하고 지독한 질병 중 하나인 ‘소유적 개인주의 정신’을 표현하고 부추기라는 주문 때문에 생겼다. 권리-담론은 이타적 자아를 약화시키고, 이기적 자아는 강화시킨다. 겸손한 자아를 약화시키고, 오만한 자아를 강화시킨다. 오직 권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할 때, 그것이 권리-담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남용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고유한 어떤 것에 관한 것인지 우리가 분별할 수 있다. 그리고 오직 권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이해할 때, 권리 및 그것과 비슷한 언어가 우리의 도덕적 어휘에서 사라질 경우, 어떤 중요한 것이 상실되는지 우리가 판단 할 수 있다.
7장 권리란 무엇인가?
고대 로마의 법학자 울피아누스의 정의 공식에 따르면, 정당하게 행동하는 것은 각자의 권리를 공정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우리가 타자들에게 그들의 권리를 공정하게 분배할 때, 우리의 관계를 특징짓는 것이 정의다. 권리를 소유하는 것이 권리라고 할 때, 이것은 권리를 반대하는 토대가 된다. 이것은 완전히 틀린 말이다. 우리가 그냥 권리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권리는 항상 어떤 것에 대한 권리다. 권리를 소유하는 것은 어떤 것과 특정한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어떤 것과의 권리 관계는 규범적 관계다. 특별히, 어떤 것에 대해 청구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합법적 청구권의 규범적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이다. 혹은 제3의 방식으로 그런 생각을 표현한다면, 어떤 것에 대해 청구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어떤 것’에 대해 그것이 정당하게 분배되는 것과 규범적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권리는 규범적인 사회적 관계다. 그래서 우리가 청구권을 갖고 있는 것은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대접받는 선이다. 정의는 우리가 권리를 소유한 어떤 정당하게 분배되는 것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대접받을 수 있는 권리를 소유하므로 서로에게 대접받는 규범적인 사회적 관계 속에 있다면, 그 사회에는 기본적 정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8장 가치에 근거한 권리
우리가 우리 삶에서 선이 될 수 있는 방식으로 대접받는 것 중,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권리를 갖지만 다른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연권이란, 법률, 사회적 관행, 언어 행위와는 완전히 별도로, 나는 살해되지 않을 권리, 고문자의 쾌락을 위해 고문 받지 않을 권리, 모욕이나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갖는 것이다. 자연권이 개인적 자율에 대한 근본적이고 자연적인 권리, 즉 개인이 스스로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근본적이고 자연적인 권리의 보호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권리는 가치를 존중함으로써 요구되는 방식으로 대접받는 것이다. 만일의 경우, 당신이 나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대접받을 권리를 소유하지만, 당신이 나에게 그런 방식으로 대접받지 않는다면, 당신의 가치, 당신의 존엄에 적합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접받는 것이다. 권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면,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진행되는지, 즉 그의 웰빙과 그의 가치, 혹은 중요성을 구별해야 한다. 권리는 우리 삶에서 선이 되도록 대접받는 방식과 우리 자신이 소유한 가치의 결합을 대표한다. 권리를 인정하려면 우리 삶에서 선이 되도록 대접받는 방식을 인정해야한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그것은 인간 자신의 가치, 존엄, 존경스러움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오직 삶의 선에만 작동하고, 인간의 가치나 존엄에는 작동하지 않는 윤리 이론은 결코 자연권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삶의 선을 축적한다고 해서 사람이 권리를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9장 왜 권리-담론이 중요한가?
정의가 권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또한 우리는 개인의 권리가 개인의 가치에 근거하기 때문에 중요하며, 동료들에게 개인의 가치에 적합한 방식으로 대접받는 것이 중요하다. 온정주의적 자애가 오히려 학대를 초래한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서적들은 권리가 ‘압도적인 힘’ 혹은 ‘결정적인 힘’을 갖는다고 한다. 그 뜻은 만약 내가 당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대접하는 선에 대한 권리를 당신이 갖고 있다면, 내가 당신을 그렇게 대접하지 않음으로써 아무리 많은 유익을 얻을지라도, 나는 반드시 당신을 그런 식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당신을 그런 식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이길 포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도덕적으로 허락할 수 없는 선택이다. 그것이 바로 온정주의적 자애라는 악에 대해 도덕적 브레이크를 걸게 하는 권리의 압도적인 힘이다. 20세기는, 어떤 사람들을 짐승처럼 취급하거나 더 심한 짓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좋은 사회를 가져올 수 있다면 얼마든지 용납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정권들로 가득했다. 그렇다면 왜 권리가 이런 압도적인 혹은 결정적인 힘을 갖는가? 그것은 ‘상관관계의 원리’ 속에서 구성될 수 있다. 내가 어떤 일을 행할 의무가 있다면, 내가 그 일을 하지 않는 것도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혹은 내가 어떤 일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면,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권리언어가 거의 언제나 사회적 저항운동들이 선호했던 언어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 억압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도덕적 상황에 주목하게 만들 수 있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을 단지 행위자 차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과 그것에 대해 피해자 차원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을 단지 당신의 의무와 관대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과 타인들의 권리란 입장에서도 생각해보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자신의 자녀와의 관계를 오직 자신의 의무란 입장에서 생각하는 부모와 그것을 자녀의 권리,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자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을 가능성이란 입장에서 생각하는 부모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학생이나 자녀의 가치에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런 인정이 나에게 부과하는 요구에 개방적 태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자애는 선택적이며, 관대는 조건적이 될 수 있다. 내가 당신의 가치에 합당한 존경을 적절히 표해야 한다는 요구사항에는 어떤 조건도 달 수 없다. 내가 당신을 대접해야 하는 방식대로 대접하지 않는 죄를 범한다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대접받은 방식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는 것과 동일한 사실이 아니다. 나에게 의무가 있다는 것과 당신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 사이의 관계는 …의 남쪽에 있다는 것과 …의 북쪽에 있다는 것 사이의 관계와 같지 않다.
10장 권리-담론은 소유적 개인주의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권리언어로 우리는 도덕질서의 피해자 혹은 수취인 차원에 목소리를 부여할 수 있다. 그리고 권리의 압도적인 힘을 통해 우리는 무분별한 자애에 도덕적 브레이크를 걸도록 목소리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된 권리언어가 소유적 개인주의 정신을 표현하고, 그런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정신이 고무된다는 권리-담론에 대한 공통된 비난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소유적 개인주의를 표현하고 부추긴다는 권리-담론에 대한 비난은 그 언어에 내재된 어떤 것이라기보다 그 언어의 남용을 지적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 상황에서 범인은 권리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위해 권리언어를 왜곡하는 소유적 개인주의 정신이다. 권리-담론은 자신의 DNA 속에 소유적 개인주의를 담고 있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권리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자율해석이라고 인정한다.
스트라우스는 자연적ㆍ주관적 권리 사상이 개인주의적 정치철학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했고, 빌리는 철학적 유명론에서 탄생했다고 이해했다. 자연권 사상은 중세 기독교 세계의 모판에서 기원했다. 그것은 홉스와 로크와 더불어 계몽주의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다. 홉스와 로크는 자신들이 물려받은 것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 사상은 자신의 DNA 속에 소유적 개인주의를 담고 있다. 소유적 개인주의를 위해 자연권을 사용하는 것은 권리-담론의 남용이다. 다른 사람이 가치의 피조물로서 나의 존재 속으로 들어온다. 비슷하게, 나도 가치의 피조물로서 그녀의 존재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가치 때문에, 그녀는 나에게 내가 그녀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해 합법적인 요구를 할 수 있다. 나의 가치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나를 어떻게 대우해야 하는가에 대해 합법적인 요구를 할 수 있다. 만약 그녀가 갖고 있는 권리대로 대접을 받지 못한다면, 그녀는 나에게 학대를 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그녀에게 받지 못한다면, 나도 그녀에게 학대를 당한 것이다. 권리언어는 이런 현실에 발언권을 제공한다.
3부 성경의 정의
11장 세 교부들의 자연권
티어니는 자연권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들이 12세기의 교회법학자들이었다고 저서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자연권이 12세기 전에는 체계적으로 개념화 되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좀 더 일찍 인정받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방교부인 카이사레아의 대 바실리우스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보관하고 있는 빵은 가난한 사람들의 것이다. 당신이 타인들을 도울 수 있는데도 거부한 것만큼 당신은 그들을 학대한 것이다.” 안디옥과 콘스탄티노플의 설교자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소유를 나누지 않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려고 맡긴 돈의 청지기입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궁핍한 사람들의 항구입니다. 항구는 난파당한 모든 사람을 받아들여, 그들을 위험에서 구해줍니다. 이 땅에서 빈곤으로 난파당한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판단하거나 설명하지 말고 불운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의 가치는 단지 필요(need)뿐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추천장을 들고 찾아오면, 더 이상 쓸데없이 관여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 사람을 위해 제공하는 것이지 매너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의 덕이 아니라 그의 불행 때문에 그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우리 자신이 하늘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그분의 위대한 자비를 얻기 위해 말입니다. 우리의 부를 타인들과 나누지 않는 것은 가난한 자들로부터 도적질하는 것이요, 그들의 생계수단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교부들인 암브로시우스, 바실리우스, 요하네스는 가난한 자들이 게으름 때문에 가난해졌다고 믿었지만 가난한 자들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교부들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는 가난한 자들의 도덕적 상황에 발언권을 부여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 옷과 음식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즉, 합법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재산을 타인과 나누지 않는 것은 절도, 사기, 사취라고 요하네스가 말한다. 바실리우스는 가난한 사람을 돕지 않는 부자는 그를 학대하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교부들이 염두에 둔 것은 지방법이 부여한 권리가 아니라 자연권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방법에 호소하지 않는다. 요하네스는 생계수단에 대한 가난한 자들의 권리가 그들의 선한 행동에 달려 있지 않다고 덧붙인다. 빈곤의 파선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들을 판단하는 대신, 우리는 그들을 그런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덕이 아니라 불행 때문에 그들을 돕는 것이다. 빈곤의 도덕적 의미에 대한 이렇듯 놀라운 사고방식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성경에서 온 것이다. 권리의 계보학은 우리를 계몽주의 정치 사상가들에서 출발하여 기독교 성경으로 이끈다. 나를 히브리 성경과 기독교 성경의 정의로 인도한 것은 이런 계보학이 아니라, 내가 만난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였다.
12장 구약의 정의
성경은 정의에 대해 자주 말하지만, 정의에 대한 어떤 정의(definition)나 이론도 제공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정의에 대해 잘 안다고 가정한다. 성경이 반복적으로 하는 일은 독자들에게 정당하게 행동하고 불의를 고치라고 명령라는 것이다. 정의를 행하라는 명령의 신학적 배경은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불의를 미워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교정하라는 하나님의 명령 배후에는 정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놓여 있다.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교정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대한 신학적 배경의 또 다른 측면은 모세의 고별연설에서도 드러난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종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을 구속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위해, 자신들 안에 있는 과부, 고아, 객을 정당하게 대우해야 한다.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혹은 그들이 기억하기 위해, 혹은 기억의 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정의를 행하라고 명령하신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그 답의 실마리는 기억에 대한 언급이 무언가를 마음에 담거나 회상하는 사적이고 내적인 행동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일종의 기념물로서 어떤 일을 행한다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에 대한 언급이라는 것이다. 과부, 객, 고아의 복지가 고대 이스라엘에서 심각한 위기에 처했고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그들을 위험에서 구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하는 것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념하기에 적절했던 이유다. 그들을 정당하게 대우할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한 것이다. 즉, 애굽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구한 것의 기념으로서 힘없는 사람들을 공평하게 다루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닮는 것. 반복해서, 정의의 실천과 불의의 교정이 과부, 고아, 객의 운명과 연결된다.
몇 십 년 전, 남미의 해방신학자들은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고 주장했다. 왜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혹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과부, 고아, 이방인을 위한 우선적 선택인가? 그것은 바로 이 네 그룹이 힘없는 자들, 힘없는 사인조 그룹이기 때문이다. 옛 이스라엘에서 과부, 고아, 이방인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일상적 상황은 불공평하거나, 불공평에 너무나 취약했다. 특히 조직적으로 불공평했거나, 조직적 불의에 너무나 취약했다. 간혹 벌어지는 사건도 무시할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조직적 불의에 우선순위를 둘 것이다. 일상적 상황이 부당하거나, 특히 부당한 대우에 취약한 사람들에게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는 것이 힘없는 사인조 그룹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존재했던 이유다. 예언자는 힘없는 사인조 그룹을 “학대받는 자들” “짓밟힌 자들”로 묘사한다. 이사야와 시편기자는 그들을 “불행한 사람들”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을 “불행한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은 누구도 그들의 상황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그래서 누구도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들 곁을 그냥 지나침으로써 그들의 곤경을 완화하기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학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의 곤경을 완화하는 것은 선택적 자선이 아니라 정의의 문제가 된다. 그들을 짓밟힌 자들로 묘사하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불의의 결과라고 의미하는 것이다. 역으로, 그것은 누군가가 그들의 상황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의미다.
13장 신약성경에서 정의가 대체된다는 주장에 대해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바로잡으라는 신약성경의 명령이 폐지·대체되었다는 대중적 견해가 있다. 이런 결론을 지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두 가지 다른 사상의 흐름을 발견한다. 하나는 하나님이 계속해서 정의를 사랑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시지만, 사회구조의 개혁이 나와 당신의 일은 아니며, 인내와 소망 중에 지금의 악한 세상에서 풀려나서 천국에 들어가길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새 창조가 모든 것을 쓸어 버리도록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이 세상의 불의에 침묵해야 하는가? 아니면 새 창조가 우리의 노력에 열매를 맺어주길 인내하고 기다리면서 그런 불의를 줄이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가? 두 번째 사상은 예수가 뜻했던 아가페는 정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상의 자기희생적 자애였다는 것이다. 스웨덴의 루터파 주교 안데르스 니그렌은 예수가 하나님의 것으로 간주한 것, 그리고 우리에게 이웃을 위해 명령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랑 아가페라고 주장했다. 니그렌은 정의라는 구약의 동기가 신약에서 아가페적 사랑의 동기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예수의 아가페적 사랑은 정의를 포함하거나 보충하지 않고, 정의를 대체한다. 그는 신약에서 사랑의 전형적인 모범, 즉 사랑에 대한 우리의 모든 생각을 형성하는 모범은 바로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용서라고 주장했다.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용서를 모방하는 것이다. 그것은 타자의 복지에 대한 자기희생적 관심일 뿐으로 철저하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니그렌은 포도원 농부 비유를 들어 아가페적 사랑이 때로는 불의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근대 아가페운동의 주요 인물은 미국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였다. 니버는 사랑과 정의 간의 충돌 가능성에 대한 니그렌의 반응이 사회적·정치적으로 순진하다고 생각했다. 정의는 이해가 충돌하는 현재의 타락한 세상을 위한 것인 반면, 사랑은 “알력이 없는 조화”의 종말의 때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해법이다.
14장 신약의 정의
용서는 정의와 불의에 무관심할 수 없다. 용서는 불의에 대한 관심을 전제로 한다. 정녕, 용서는 정의의 요구를 넘어선다. 니그렌의 입장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 즉 누군가에게 잘못을 범하는 일을 가끔은 사랑 때문에 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관성이 없다. 만약 내가 그것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런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이론적 비일관성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니그렌 식의 생각이 주석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신약을 세심하게 읽는 사람은 결코 신약에서 정의가 대체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 없다. 정의는 붉은 줄처럼 신약 전체를 관통한다. 복음서에서 예수의 정체성은 본질적으로 정의에 의존한다. 예수는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단히 초조하고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자신의 정체에 대해 말하고, 복음서 저자들은 그들의 목소리로 우리에게 그의 정체에 대해 들려준다. 이런 정체성 해명 중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정의의 시대를 시작하기 위해 예수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는 자신과 이사야가 이야기했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동일시하신다. 예수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준 답변은 회당에서 언급했던 정체성 해명과 비슷하다. 마태도 이사야를 인용하며 예수의 정체성을 밝힌다. 성경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예수와 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분명히 그랬듯이, 즉각적으로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자들을 놓아주는 것을 정의 실천에 대한 구약의 표준적 예들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 통치를 시작하기 위해 임명된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자신과 복음서 저자들에 의해 예수의 신분이 밝혀진다.
15장 영어성경의 번역들
정의에 해당하는 라틴어는 유스티티아justitia다. 역으로, 대부분의 신약 영어번역본들은 justice, just, unjust 같은 단어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신약을 영어로 읽는 사람들에게 신약은 정의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 신약의 그리스어 원전에서, 우리는 자주 형용사 디카이오스(dikaios, 의로운), 명사 디카이오시네(dikaiosynē, 정의), 동사 디카이오오(dikaioō, 의롭게 하다) 등을 만난다. 이들은 모두 디크(dik, 정의, 관습)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대부분의 신약성경 영어번역본들에서 그 형용사가 거의 대부분 ‘정당한’just 보다는 '의로운‘righteousness로 번역되었다. 오늘날의 영어로 righteousness는 결코 justice의 동의어가 아니다. 물론 명사 righteousness와 형용사 righteous는 표준영어에 속한다. 하지만 오늘날에 그것들은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담론 외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righteous라고 묘사될 때, 그것은 자신의 도덕적 정직에 대한 관심이 지나치다는 뜻이다. 그 단어는 자기-의를 의미하게 되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대화에서, ‘의로움’righteousness은 매우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적 자아의 문제로 이해된다.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의 영어번역들에서 의로운righteousness이란 단어를 만날 때, 그들은 그것을 개인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구약성경에서 짝으로 나오는 미쉬파트와 체데카, 미쉬파트는 법정에서 기원한 것이며, 명백하게 정의를 의미한다. 반면에 체데카의 본래적 의미는 곧고 정확하며 올바르다는 것이다. 대담히 분명하게, 그 단어들은 동의어가 아니다. 하지만 둘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에 틀림없다. ‘정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미쉬파트이고, ‘공의’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체데카이다.
16장 신약의 정의에 대하여 몇 가지 더
마5:10과 5:6에서 “디카이오시네”를 의(righteousness)로 번역한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내적 자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고 박해를 받지는 않는다.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고치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이다. 예수는 올바른 일을 행하기 때문에, 즉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고치려 하기 때문에 박해받는 사람들을 축복하는 것이다. 예수는 정의에, 올바른 것에 박해 받고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축복하신다. 예루살렘 성경은 이를 '올바름 혹은 올바른 것'으로 번역한다. 마 3:15-17, 6:33에서도 디카이오시네를 의로 번역하나 정의로 번역하는 것이 바른 번역일 것이다. 예수의 청중들과 마태복음의 일차 독자들은 구약성경에 정통했기 때문에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고치는 것을 자동적으로 하나님나라와 연결했을 것이다. 마20:4에서 RSV는 형용사 디카이오스를 'right'로 번역하나 예루살렘 성경은 '정당한 임금'fair wage(개역개정 '상당하게')로 번역한다. 마25:31-46에서 righteous란 단어가 두 번 나온다. 37절에서 의인으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의 형용사는 디카이오스다. 예루살렘 성경은 '덕스러운'로 번역한다. 하지만 디카이오스한 행위들의 예에 주목하며 예수가 회당에서 인용한 이사야 본문(61:1-2)을 보면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자에게 감옥의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아 그 비유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 올바른 일을 행하는 것에 관한 것일 것이다. 영생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바로 의인들이다. 이것은 정의를 행하고, 불의를 바로잡는 것에 관한 대헌장이다. 여기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연약한 자들에 대한 구약의 우선적 선택이 신약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바울의 로마서가 지속적으로 개진하는 것은 첫째 외모를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란 구약의 주제이고, 둘째는 예수의 사역과 베드로가 본 환상의 신학적 의미를 확대하여 밀도 있게 묵상하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정의'라는 구약의 주제를 거절하는 대신, 그 주제를 새롭게 적용한다. 예루살렘 성경은 바울의 진술을 이렇게 번역한다. "나는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먼저 유대인에게, 하지만 헬라인들도 마찬가지로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몇 개의 디크(dik) 어근 단어들에 대한 영어번역들을 살펴볼 때, 내 요점은 영어번역들이 신약에서 정의의 압도적 중요성을 감춘다는 것이다. 신약의 영어번역들은 정의를 자주 언급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당히 많은 영어성경 독자들이 정의가 신약에서 대체되었다고 믿게 된 이유를 설명해준다.
17장 정의와 사랑
신약에서 사랑이 정의를 대체한다는 일반적 견해는 거부되어야 한다. 공간복음은 예수가 두 가지 사랑을 명령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마22:34-40, 막12:28-34, 눅10:25-37) 첫 번째 명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전 존재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명령은 사람이 자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명령은 자기사랑self-love의 현실성뿐 아니라 합법성도 전제하고, 우리에게 자신뿐 아니라 우리 이웃도 사랑하라 명령한다. 자기 사랑은 분명히 자기희생적 무상의 자애가 아니다. 칼 바르트는 아가페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묘사한다. 하지만 자기사랑은 타자를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존재다. 예수 및 그의 대화자들은 그 명령을 자신들이 토라에서 읽은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했을 것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가 바로 토라의 핵심이었다.
나는 성경에서 사랑, 정의, 의 등은 기본적으로 같다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올바른 관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올바른 관계가 단지 좋은 관계인가? 아니면 정당한 관계인가? 우리가 사랑과 정의를 올바른 관계로 뭉뚱그린다면 요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요점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사랑과 정의를 구분해야 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모두에게 칭의를 제공할 때, 하나님이 정당하게 행동하신다는 것이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정의'에 관한 것이다. 개인의 가치나 존엄이 사상과 함께하지 않고 오직 삶의 행복이란 사상으로만 작동하는 윤리체계는 권리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제공하지만 정의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제공하지 못한다. 내 주장은 예수의 사랑은 타인의 선을 증진시키는 것이고, 타인의 선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데, 즉 타인의 복지(웰빙)와 타인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다. 사랑은 어떤 사람의 가치나 존엄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그 사람을 대우하면서 그 사람의 복지를 증진시키지는 않는다. 온정주의적 자애가 틀린 것은 행위자가 자애 대상자의 가치를 적절히 존중하지 않으면서 그 사람의 선을 증진시키려 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복지를 증진시키려고 애쓰면서 그가 적절한 존중 속에 대접받도록 만드는 사랑의 말은 바로 'care'다.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염려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함이고, 그 사람이 자신의 가치에 합당한 존중을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우리에게 자기희생적이지만 정의에는 둔감한 자애로 이웃을 대우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웃에 대해 염려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18장 정의, 사랑, 그리고 샬롬
구약의 시문학과 예언서에서 샬롬이란 말이 빈번하게 나온다. 70인역에서도 히브리어 샬롬이 그리스어 에이레네로 번역되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 번역본에서 샬롬과 에이레네는 '평화'로 번역된다. 그리고 샬롬은 정말로 평화를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샬롬이다. 하지만 샬롬은 평화를 넘어선다. 샬롬은 단지 평화가 아니라 번영이기도 하다. 우리 존재의 모든 차원에서 번영, 즉,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우리와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와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서, 우리와 창조 일반과의 관계에서 말이다. 선지자들은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섬김 속에서 번영의 날을 예언한다.(사2:2-3) 샬롬은 우리 서로 간의 관계 속에 번영을 포함한다. 사회가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개인들의 집합일 때, 불의가 존재하고 사람들이 부당한 대접을 받는 곳에, 샬롬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정한 번영은 단지 감정적 만족이 아니다. 진정한 번영은 오직 우리가 더 이상 서로를 부당하게 대하거나 억압하지 않을 때 존재한다. 샬롬은 정의를 자신의 토대로 삼는다. 샬롬은 정의를 초월하지만, 정의만큼 중요하다. 끝으로 샬롬은 우리와 자연환경과의 관계 속에 번영을 포함한다. 육체가 없는 영혼이 아니라 육체를 가진 피조물인 우리가 지구 및 피조물과의 관계에서 번영할 때 샬롬이 존재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샬롬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샬롬을 추구하듯이 이웃의 샬롬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 공동체의 번영을 추구하는 것이다. 샬롬이 정의를 포함하고 사랑이 공동체의 샬롬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랑은 정의를 포함한다. 샬롬을 추구하는 사랑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의 소명이다. 우리가 애쓰고 분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샬롬 속의 정의다.
19장 성경은 정의의 바른 질서 개념을 말하는가?
암브로시우스, 바실리우스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이들 중 그 누구도 우리의 '권리'와 비슷한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어떤 것이 누구의 것이나 누구에게 속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그것에 대한 권리, 합법적 요구가 있음을 전제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해석에 근거해서 빈민의 권리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켜 가난한 자들이 옷과 먹을 것에 대한 권리 즉 자연권을 갖는다고 전제한다. 나는 정의가 권리에 근거한다는 견해를 제시했고 방어했다. 우리의 사회적 관계들은 우리가 대접받을 권리가 있는 그대로 대접받을 때 정당한 것이다. 기독교 성경은 자연권의 존재를 의미하고 전제한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전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전에 들어갈지어다."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시96:8). 하나님이 이런 권리를 갖는 것은 어떤 인간적 행동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적 인권이 아니라 자연적 신권이다.
우리의 찬양과 복종에 대한 권리가 하나님께 있다는 전제는 그에게 찬양과 복종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처벌하실 때 하나님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다고 선언할 때는 하나님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대접받았다는 뜻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동료들에 대한 자연적 의무가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나에게 동료들에 대한 자연적 의무가 있다면 상관관계의 원리를 고려해서 그들에게도 나에 대한 자연적 권리가 있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청구권 이론은 하나의 생득권 이론이며 우리가 권리를 갖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가치, 우리의 존엄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요 구속자이기 때문에 그런 권한을 소유하신다. 우리에게 명령할 하나님의 권리는 생득권이다. 이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최소한 개인과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허용권의 일부는 부여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란 사실이다.
4부 불의 바로잡기
20장 인권
사람들은 자주 인권과 인간이 소유하는 권리를 혼동한다. 인권은 인간이 소유한 권리 중 하나다. 인권보다 권리가 훨씬 더 광범위하다. 나는 내 권리 이론이 단지 인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청구권 이론이 되길 원했다. 인권에 대한 일반적 설명은 그것이 인간이 됨으로써 소유하는 권리이다. 인권은 오직 인간이란 지위만으로 충분하게 소유할 수 있는 권리다. 그것이 무엇이든 특정한 종류의 인간, 심지어 인격적 존재로서 기능할 수 있는 인간이 될 필요도 없다. 인간이라는 지위만으로 충분하다. 한 인간이 아무리 심각하게 손상되었어도, 그의 인간적 본성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아무리 인간이 훼손되었을지라도, 그는 인간적 본성을 소유한다. 그런 본성을 소유할 때, 그는 특정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닮는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전통적인 능력유사 혹은 역할유사 설명 대신 본성유사(nature-resemblance) 설명이라고 부른다. 나는 인권이 인간 본성에 근거한다는 제안에 대해 의심을 표현했다. 사물에 대한 기독교적 비전에서 인권의 근거가 되는 것은 자신이 지으신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모든 인간과 친교와 우정을 나누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욕망이다. 인격적 존재가 되는 이유가 인간 본성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과 우정을 나눌 잠재력이 있다. 인권은 종교를 초월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 안에서 삼위일체의 제2위께서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떠맡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간을 위한 특별한 영예다. 삼위일체의 제2위는 우리의 본성을 떠맡음으로써 우리와 본성을 공유하는 영예를 우리 각자에게 부여하신다. 인간을 고문하는 건 삼위일체의 제2위의 본성을 공유하는 피조물을 고문하는 것이다.
21장 남아공에서 보낸 6일
개혁 전통주의 출신인 엘런 부삭의 연설이 폭력을 부추겼고, 이 폭력이 국가의 안전을 위협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2만 란드의 벌금과 허용할 수 없는 보석 조항을 걸었다. 정부는 부삭의 연설이 폭력을 유발했다는 결정적 증거 너 댓 가지를 댄다. 부삭의 변호사 빌륜의 반대심문을 보면서 월터스토프는 아프리카너들의 무능함을 보았다. 권력의 오만에서 흘러나오는 무능이었다. 청문회는 부삭에게 유리하게 끝났지만 결국 판사들도 상급자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판결은 벌금만 내고 보석 조항을 모두 철회했다. 부삭은 이 소송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을 질책했다. “나는 개혁주의 전통 출신입니다. 그 전통에서는 정치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분리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속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에서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판사의 명령을 거부했다. 이로써 자신들의 눈에 좋게 보일 때는 법과 질서의 최고 가치를 큰소리로 떠들던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법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법보다 질서, 그들의 질서를 더 중시한다.
22장 불의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의 기술
근대 예술철학의 주된 주제 중 하나는 예술과 삶의 분리다. 이 주제에 대한 영국 비평가 클리브 벨의 말, “예술은 우리를 인간의 활동 세계로부터 미학적 고양의 세계로 이동시킨다. 잠시 동안 우리는 인간적 이해관계에서 단절되고, 우리의 기대와 기억은 억제되며, 우리는 삶의 흐름 위로 들려진다. … 나는 가끔씩 예술을 삶의 정서에 대한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그 속에서 삶의 관념을 읽어낸다” 초창기에 순수예술에 관심을 집중하고 예술과 삶의 분리라는 교리를 수용했지만 일상생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일하면서 노래하는 행위, 노동가요, 구호 외치기, 운율 만들기 등 이러한 것들은 회원들을 연합시킨다. 음악은 말을 고양시킨다. 행동하는 예술에서 철학자인 우리가 예술이 삶에 근거하는 다양한 방식에 주목해야 하며, 순수예술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이 인간 활동에서 담당할 수 있는 역할의 다양한 방식들에 주목해야 한다.
23장 감정이입의 장벽과 마음의 경화에 대해
사회정의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힘을 모으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학대당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대중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남아공과 중동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읽었지만, 그것이 내 안에서 감정이입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감정이입이 발생했다. 실제의 얼굴과 실제의 목소리 말이다. 감정이입은 단순한 동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유감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정말로 동정심을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이상이다. 감정이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⓵자신이 희생자의 곤경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자신이 변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데 그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⓶마음이 강퍅해진 사람이 비인간화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때로는 그들을 감성이 덜 발달한 인간으로, 때로는 그들에 대해 역겹게 생각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⓷희생자들의 고난이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⓸정책이 성취될 때(마음이 강퍅한 사람들은 이것을 위대한 선이라 생각함) 고통이 수반될 것인데 정책을 반드시 이루기 위해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고 감정이입에 대한 자연적 충동을 억제해야 하고 정책이 이루는 바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관적 자선과 객관적 자선을 구분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주관적 자선은 정의에 의해 요청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누군가의 복지 증진을 바라는 것으로 구성된다. 단지 사람이 정의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그런 입장에서 생각하지만 자기 스스로 정의의 요구를 초월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말이다. 반면 객관적 자선은 누군가의 복지를 증진시키고자 할 때 정의가 실제로 요구하는 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왜 일반적으로 감정이입이 그토록 자주 정의의 실천에 대한 인식과 불의의 교정을 위한 투쟁을 후원하기보다 주관적 자선만을 자극할까?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감정이입 하는 대상들의 곤경이 사실상 불의의 결과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만 보고, 고통의 원인인 불의는 감지하지 못한다. 감정이입이 정의의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갈등과 위험을 피하고 싶어 한다. 불의를 바로 잡으려는 투쟁이 항상 그 불의에 대해 책임 있는 사람들과 갈등을 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적지 않게 갈등을 초래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신약성경에서는 사랑이 정의를 대체한다고 해석한다면, 우리는 모든 상황을 정의가 요구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 단지 자애로운 사랑에 대한 부름으로 해석할 것이다. 아프리카너들이 옆집 흑인을 도와주는 것에 대하여 그들은 어떤 소박한 방식으로 흑인들의 삶을 개선함으로써 그들에게 선을 행한다는 측면에서만 생각했다. 그들은 흑인들의 품위가 손상되고 있다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했다.
24장 사회정의운동의 구조
학대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사회정의운동과 조직의 관심사는 아니다. 사회정의운동과 조직은 공적인 사회적 관행, 법, 혹은 그런 법이 집행되거나 집행되지 않는 결과로써 발생한 학대에 관심을 갖고 그런 학대를 교정하는 것이다. 사회정의운동과 조직 안에서 그 회원들이 희생자들인 경우와 후원자들인 경우, 서로 다른 차이를 보인다. 남아공의 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은 전자의 예이고, 19세기 잉글랜드의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운동은 후자의 예이다. 미국에서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시민권 운동의 경우, 그 회원들은 거의 동일하게 인종차별의 희생자들이자 후원자들이었다. 서양전통에서 최초의 위대한 사회정의 비평가들은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었다. 다윗에 대한 나단 선지자가 그렇다. 이사야의 관심은 사회적 불의의 교정이다.
사회정의운동의 최종 목적은 그런 공적인 사회적 관행에 관여하는 사람들, 혹은 그런 법이 집행되거나 집행되지 않는 방식에 대해 책임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멈추고 단념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런 목적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즉 가해자들과 그들의 보호자들이 자신들의 일을 멈추고 단념하게 만들려면, 첫째로 각성이 필요하다. 희생자들은 가해자들이 그들의 곤경에 기여하는 방식에 대해 알아야 하며 자신들이 처한 곤경의 원인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지도자들은 대중 안에서 각성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한데, 대중은 문제가 되는 사회적 불의와 그 정도에 대해 대체로 잘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각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에는 반드시 정서적 반응이 수반되어야 한다. 둘째로 정서적 불만과 연대가 필요하다. 희생자 입장에서 정서적 불만과 그 일을 저지른 자들에 대한 분노가 필요하며 후원자들은 정서적 불만 및 분노와 함께 희생자들에 대한 감정이입도 필요하다. 행동은 정서적 연대를 요구한다. 각성과 정서적 연대 후, 셋째 단계가 활성화다. 희생자들은 가해자들과 그들의 옹호자들이 행동을 멈출 수 있게끔 무언가를 하도록 활성화되어야 한다. 희생자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들의 억압자들에게 분노하며, 대중들은 희생자들에게 정서적 연대를 하지만 그들은 개념적 소극성으로 침몰하기 쉽다. 이런 소극적 문화의 원인은 편만한 부패다. 즉 권력자들 사이에서 부패가 너무 만연하여 불의를 바로 잡으려는 일체의 노력이 소용없다고 믿는 것이다. 이렇게 희생자와 대중이 사회적 소극성 속으로 침잠했을 때, 그런 소극성 문화가 분명하게 극복되지 않으면 그것을 활성화하려는 지도자들의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다. 희생자 운동이든 후원자 운동이든 사람들은 무언가가 이루어질 수 있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활성화 단계에서 적대감, 저항이 분출되기도 한다. 공적인 사회적 관행들, 법과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게 도덕적 비판을 가할 때, 그 비판은 대개 비판을 당하는 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킨다. 또한 사회정의운동은 억압자들뿐 아니라 대중에게도 갈등과 적대감을 양산한다. 왜냐하면 그 운동이 제기하는 사회정의비평에 동의하지 않는 대중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단계는 상황에 대한 사회정의 분석과 비평이 제공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의가 무엇인지, 권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언제 권리가 침해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
5부 정당한 처벌
25장 온두라스 방문기
나는 온두라스에서 학대받은 약자들의 얼굴을 직접 보고 목소리를 들었으며 불굴의 의지, 용기, 상상력으로 정부가 범법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돕는 한 자생 기관의 활동을 직접 목격했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연합회”(ASJ)는 온두라스 사람들로 구성된 자생적 기독교 단체다. 이 연합회는 세 가지 핵심 프로젝트를 수행하는데 그것은 평화와 정의 프로젝트, 노동권 프로젝트, 그리고 토지권 프로젝트였다. 평화와 정의 프로젝트는 폭력범죄의 희생자들의 사례를 살피고 그들에게 법률적, 심리적 도움을 제공하며 정부 관리들이 이런 희생자들에게 그들의 책임을 수행하도록 돕는다. 노동권 프로젝트는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교육하고 노동관련 소송에서 승리하도록 돕는다. ASJ는 정의로운 법 체제를 확립하고 그런 법을 집행하며, 그 법을 위반한 자들을 처벌하는 일은 일차적으로 정부의 몫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ASJ는 희생자들 편에 서서 그들을 변호하고 도움을 주는 일에 만족하지 않고 공무원들이 법을 집행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하는 일을 책임 있게 수행하도록 돕는다. 나는 온두라스에서 학대받은 연약한 사람들의 얼굴을 직접 보았으며 목소리를 들었다. 나는 그들과 정서적으로 일치감을 느끼게 되었다.
26장 보복적 처벌에 대한 바울의 거절
ASJ는 구제나 개발조직이 아니라 사회정의 조직이다. 이 단체는 사회정의를 확립하는 일차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 단체는 희생자들을 보호하는데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지 않고 정부가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사회정의를 유지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정부를 자극하고 돕는다. 이런 식으로 ASJ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국가업무에 대한 바울의 이해를 심각하게 반영하고 있다. 국가에 대해 기술된 로마서 구절(로마서12-13장)로 인해 지난 수백 년 동안 기독교인들의 정치적 소극성이 정당화되어 왔으며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그런 관행이 바울의 말을 오해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적 처벌을 내리는 것이 하나님이 국가에 부여한 과업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나는 여기서 보복과 처벌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처벌은 누가 한 짓을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희망과 예상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떤 사람이 자기가 한 짓을 반복하지 못하도록 그를 변화시킬 희망과 기대 속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보복은 빚을 되갚아주는 것, 그 악행이 초래한 선과 악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성경의 교훈은 보복을 반대하는 것이지 처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보복적 처벌과 구분되는 책망적 처벌이란 표현을 쓰고자 한다. 나는 로마서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모든 것이 책망적 처벌론에 부합하다고 생각한다. 국가는 보복적 처벌을 수행하도록 권위를 위임받은 것이 아니라 책망적 처벌을 수행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은 것이다.바울의 생각은 일단 악행이 발생하면 하나님은 그것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발생을 저지하고 그것의 발생으로부터 대중을 보호하는 임무를 정부에 맡기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정부의 임무는 불의를 제어하고 정의를 북돋우기 위해 대중을 통치하는 것이다. 정부는 사회 권력의 사다리에서 밑바닥에 위치한 사람들의 불의한 상황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정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임무다.(*시장은 강자의 논리, 정치는 약자의 눈물을 닦아줘야)
27장 국가의 임무와 권위에 대한 바울의 생각
로마서 13장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국가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국가는 국민들에 대해 권위를 가지며 국민들은 권위자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으로 인해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불의에 직면해서 지난 수백 년 동안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아파르트헤이트를 옹호했던 아프리카너들의 공통된 주장은 저항자들이 국가에 복종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종했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해석하기 위한 주된 논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나는 권위의 두 개념을 구분하고자 한다. 하나는 무언가를 행하는 도덕적 권위를 의미하는 “수행 권위”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의 자리에 있음을 의미하는 “지위적(제도적) 권위”다. 로마서 13장 첫 두절에 대한 전통적 해석은 제도적 권위에 근거하여 국가 자체가 권위의 자리에 있으므로 백성들은 그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국가에 권위를 부여하신 목적이 불의를 제어하고 정의를 북돋기 위함이며 그러므로 백성들은 국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국가가 권위의 지위에 있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국가가 악을 행하는 자들을 처벌할 권위를 준다고 해서 국가가 악을 행하는 권위를 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는 국가 자체가 악을 행하는 자가 되거나, 국가가 악한 의도로 강제력을 사용하거나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나는 바울이 하나님이 국가에 주신 권위를 제도적 권위가 아니라 수행 권위의 개념으로 사용한다고 본다.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셨다는 의미는 권세가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임명된 일을 할 때 우리는 저항하지 말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국민에게 특정한 명령을 내리는 것이 도덕적으로 국가에 허용되지 않는다면 국민은 국가에 복종할 의무를 갖지 않는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국가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을 때 국가에 저항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저항하는 것이란 뜻이다. 사회의 불의를 제어하고 정의를 확보하는 일은 하나님이 정부에게 부여하신 임무다. 지배자의 핵심과제는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다. 정부는 정당한 법과 사법제도를 확립하여 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래서 온두라스의 ASJ는 불의의 희생자들을 돕는 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국가에 행하도록 권위를 부여하신 임무, 즉 정의를 확보하고 불의를 제어하는 일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돕고 지원한다. 이 정부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행하도록 맡기신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제대로 그 권세를 사용하기를 기도하지만, 정부가 단호히 거절할 경우, 정부의 전복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28장 정의, 용서, 그리고 처벌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이웃 사랑과 정의의 관계를 논하지 않은 채, 기본적 정의에 대해 논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용서가 반응적 정의 및 처벌과 관계가 있는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반응적 정의 일반, 특히 처벌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용서는, 누군가가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범했다, 어떤 사람에게 권리가 있는 어떤 것을 그에게서 빼앗았다, 그래서 불의가 발생했다는 것을 전제한다. 설명을 돕기 위해 후버트라는 가상의 인물을 설정하겠다. 용서가 발생하기 위해 필요한 상황은 다섯 가지 핵심 요소들로 구성된다. (1)후버트가 내게 잘못을 저질렀다. (2)나는 그가 그렇게 한 것에 대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믿는다. (3)나는 그런 행동이 행해진 것에 대해 분노나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4)나는 그런 짓을 한 것 때문에 후버트에게 분노나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 (5)나는 그런 행동과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를 계속 기억하고 비난한다. 이런 조건들이 충족될 때, 후버트가 내게 행한 잘못에 대해 내가 그를 용서하는 것이 가능하다.
만약 그가 협박, 무지, 연약한 의지 등의 이유로 행동하여 그에게 과실이 없다고 내가 믿는다면, 나는 그를 비난도 용서도 하지 않는다. 그저 봐줄 뿐이다. 봐주는 것은 용서와 비슷하지만 분명히 구별된다. 그리고 행동 또는 행위자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무감각한 무시이지 용서가 아니다. 용서는 오직 행위와 행위자가 도덕적으로 진지하게 취급될 때만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후버트가 내게 저지른 일을 계속 기억하며 비난해야 한다. 의도적이든 자연스럽게든 후버트의 행위를 잊는 것은 용서와 비슷하지만 용서는 아니다.
그렇다면 용서는 무엇인가? 용서는 “과거를 묻지 마세요”가 아니다. 나는 그가 한 짓을 기억하고 비난하지만, 그가 내게 한 짓에 대해 후버트를 더 이상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를 용서하는 것은 그 행위가 그의 도덕적 역사의 일부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 역사의 일부다. 왜 그가 저지른 짓이 내가 그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영원히 결정짓도록 결심하지 못하는가? 후버트가 회개한다고 가정하면, 이제 그는 자신이 내게 저지른 일을 나와 함께 비난한다. 후버트의 회개는 내가 그를 용서하라는 초청이다. 회개에 대한 반응으로써 용서가 가져올 것이라고 우리가 기대하거나 소망하는 선은 바로 화해다. 철학자 장 햄프턴, “용서는 갱신된 관계로부터 도래하는 유익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그것은 비도덕적 행동 자체의 영향에서 희생자와 악행자를 해방한다. 용서하는 자는 더 이상 자신을 방어해야 하는 자리에 갇혀 있지 않고, 악을 행한 자도 더 이상 죄인의 자리에 있지 않다” 용서는 악을 행한 자와의 관계다. 용서와 회개는 쌍방관계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제기하는 문제는 심지어 회개하지 않을 때에도 자신들이 용서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예수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에 대해 스스로가 하는 짓을 모른다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그가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참아주는 것, 그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신약성경 어디에도, 예수께서 청중에게 회개하지 않는 악행자들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우리는 우리에게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도 포함해서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원수들을 용서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신다고(의롭게 여기신다고) 말하는 본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더 심각한 질문은 악을 행하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를 용서하는 것이 심지어 가능한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이 도덕적으로 허용할 만한가 하는 것이다. 만약 후버트가 회개하지 않는 경우,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그의 악행, 나 자신의 가치, 혹은 도덕적 행위자로서 후버트의 가치를 도덕적으로 진지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하찮은 것으로 만든다.
용서와 처벌에 관하여, 후버트가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믿지만, 나는 그를 변화시키기 위해 그를 심하게 대우하는 것에 대해 지지할 수 있다. 이것이 그의 성품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또는 변화가 나타날 때까지 대중이 그에게서 보호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어떤 체제를 작동한다면, 그것은 무차별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참회하여 우리를 감동시켰다고 해서 그에게 제재를 가하지 않는다면, 그 체제는 효과적으로 공정하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즉, 변화, 보호, 제재를 위해 적절한 종류의 심한 대우가 후버트에게 주어져야 한다. 이는 장래에 성취될 어떤 선을 위하여 후버트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내가 그를 용서한다고 하여 그의 처벌을 반대해야 하는가? 용서를 통해 더 이상 그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지만, 행해진 일에 대한 엄중한 비난으로써 심한 대우는 중요하다. 이는 그가 한 짓에 대해 비난하는 것이다. 여러 방식으로, 우리는 그를 용서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처벌을 포기하거나 그가 처벌받는 것을 지지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우, 우리의 용서는 불완전한 것으로 남고, 남을 수밖에 없다.
6부 아름다움, 희망, 그리고 정의
29장 정의와 아름다움
추함은 불의와 얼마나 관계가 있을까? 미학적 선함은 정의와 얼마나 관계가 있을까? 우리가 동료 인간들에게 미학적으로 추한 환경에서 살도록 강요할 때, 혹은 그들이 그런 환경에서 살도록 방치하는 것에 우리가 만족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가? 봉사기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단지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집에 거주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편견의 덫에 걸리기 쉽다. 실제로 음식, 옷, 집 문제가 절박하다. 정의는 그런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을 훨씬 넘어선다. 인간에게 교육이 박탈되면, 스스로 자기 삶의 진로를 결정할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면, 그는 무례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인간이 미학적 불결함 속에 살도록 강요된다면, 그는 무례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빈곤뿐만 아니라, 미학적 불결함 속에 살도록 강요한다면, 그들은 학대받고 부당하게 취급받는 것이다. 미학적 품위의 환경에서 살 기회는 선택적 사치가 아니다. 정의가 그것을 요구한다.
30장 희망
세상의 불의에 압도되는 감정을 갖기 쉽다. 당신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의를 후원하라. 나는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라는 대의, 팔레스타인들의 지속적인 대의, 그리고 온두라스의 정의라는 ASJ의 대의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불의를 바로잡으려는 대의 속에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만성적인 위협은 탈진이다. 인간의 모든 자발적 노력은 최소한 자신의 목표가 성취될 것이라는 희망이 필요하다. 낙관주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희망이 있는 한, 그는 계속 시도한다. 희망을 포기한 순간, 그는 더 이상 시도하지 않는다. 불의를 바로잡기 위해 수고할 때 필요한 것은 바로 희망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희망에 대한 대단히 명쾌한 분석을 제공한다. 근본적으로 희망은 특별한 형태의 욕망이라고 아퀴나스는 말한다. 그 목적이 현재의 선이라기보다 미래의 선이란 점에서 그것은 기쁨과도 다르다. 아퀴나스는 믿음, 희망, 사랑이 신학적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아퀴나스는 기독교적 희망이란 완성에 대한 희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완성’이란 하나님과의 초자연적 형태의 합일이다. 이는 역사에서 발생하는 것에 대한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불의의 교정을 위한 투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기독교적 희망은 역사를 초월하는 행복한 상태에 대한 희망이다. 나는 기독교적 희망을 완성에 대한 희망으로 한정하는 것이 신학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적 희망은 두 가지, 구속에 대한 희망과 완성에 대한 희망이라고 본다. 기독교인은 이 창조된 질서 안에서 구원을, 특히 불의로부터 구원을 희망하고, 창조주요 유지자로서 하나님의 사역을 넘어서는 변형된 존재 방식, 즉 창조사역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닌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대를 희망한다. 즉, 현재의 창조세계 내에서 하나님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희망과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을 모두 갖고 있다.
우리가 낙관주의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낙관주의가 정의와 복지를 위한 잠재력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특별한 거대담론은 결코 죽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전보다 번성하고 있다. 근대세계에서 기독교 저자들과 평신도들이 근대성의 이런저런 낙관적 거대담론들에 영합하라는 유혹에 주기적으로 굴복해왔다. 마르크스주의, 나치주의, 민족주의, 정치적 민주주의와 결합된 시장자본주의 등이 그것이다. 기독교적 희망과 세속적 낙관주의의 결합은 전적으로 이단적이다. 이는 구속이 악행으로 손상된 창조를 위한 하나님의 뜻밖의 복음으로 간주되기보다, 창조의 잠재력의 작동으로 이해된다. 앨런 부삭, “우리 기도는 때때로 정치적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종속되지 않는 삶의 영역은 단 한 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와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복음의 요구와 기도의 범주 밖에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불의의 교정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이 무엇보다 기도(기도와 노래)의 형태를 취하길 바란다.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항상 기독교 교회의 구호였다. 어떤 일을 위해서는 기도하고 다른 일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는 일하는 것 말이다. 자크 엘륄, “결국 그 목표는 필연적으로 성취되고, 언제든지 궁극적으로 성취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것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취되고 획득된다면, 이 모든 소란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교회의 사소한 일상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자신이 행한 일의 무익함을 수용할 수도 없고, 자기 운명의 지배에 순응할 수도 없는 근대인의 고통스러운 거절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소용없다는 판단이 행동하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불의의 교정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나라에 정의의 통치가 도래하도록 다른 사람들이 행한 것과 우리가 행한 것을 사용하신다고 확신하며 불의의 교정을 위해 일하는 형태를 취한다. 기독교적 희망의 경우, 그 희망의 토대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통치가 실현되도록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31장 재정리
반응적 정의가 부재한 상황에서는 기본적 정의도 불가능하다. 서양에서 정의에 대한 담론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과 울피아누스적 사고방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의는 이익과 부담의 분배, 그리고 상호간 교환에서 공평이나 평등으로 구성된다. 정의는 대우의 평등이다. 롤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전통에 확고히 서있다. 그래서 롤스에게 정의는 분배의 공평성이다. 울피아누스에 따르면,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은 각 사람의 권리와 몫을 각자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각자가 가진 권리를, 각 사람에게 각자의 몫을 제공하는 것이다. 나의 기본적 정의에 대한 설명은 울피아누스 전통에 확고히 서있다. 흑인과 유색인을 강제로 이주시켰듯이, 아프리카너들과 백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고 가정해보자. 이런 대우의 평등은 모든 사람이 정당하게 대우받고 있었다는 뜻일까? 아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당하게 대우받고 있었다는 뜻일 것이다. 학대받은 사람들이 단지 불공평의 희생자들이었다면, 나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방식에 끌렸을 것이다. 권리는 자율서의 보호자다. 남아공에서 유색인들의 자율성은, 물론 아파르트헤이트 법에 의해 심각하게 제약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게는 그것이 잘못된 것의 뿌리로 보이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그들의 존엄성이 침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존엄성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으로 대우받고 있었다. 많은 경우, 정의가 요구하는 대로 어떤 사람을 대우하는 것은 마음이나 행동 속에 어떤 분명한 징표가 없다. 반면, 악을 행하는 상대방은 명백한 징표가 있다. 그래서 해를 입은 사람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정의를 분명하게 해준다. 정의의 붕괴는 붕괴된 것에 대해 우리가 고민하도록 자극한다. 그래서 정의의 특이성은, 정의의 붕괴가 흔히 정의를 명백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한 종류의 무활동이 해를 끼치는 다른 경우들도 많다. 만약 불량배들이 당신을 괴롭히는 동안, 내가 옆에서 빈둥거리며 당신을 돕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에게 잘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는 내가 그들을 막도록 노력하라고 요구한다. 그런 경우, 정의가 눈에 보임에도 어떤 명백한 징표를 남기지 않는 것은 불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