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기독교 신앙
과학과 기독교 신앙
2018-09-10 22:12:48
과학의 새로운 발견은 기독교의 서사에 하나의 도전으로 다가올 수 있다. 과거의 지동설, 천동설 논쟁은 좋은 역사적 사례이고 오늘날도 주장되는 젊은 지구론도 한 예이다. 과거의 지동설 논쟁이 보여주듯이 문제의 핵심은 과학의 도전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문제였고 오늘도 논란이 불식되지 않은 젊은 지구론도 마찬가지다. 잘못된 성경해석을 가지고 과학적 사실이 성경의 진리에 위배된다고 배척해온 역사를 기독교는 가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기독교 신앙은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게토화된 집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문제는 잘못된 성경 해석을 절대시하고 성경의 무오성을 성경해석의 무오성과 혼동한데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성경의 무오성 교리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는 종종 성경의 무오성 교리를 내세워 자신들의 성경 해석의 절대성을 주장해왔고 이것을 가지고 다른 해석전통을 배척하고 혐오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은 지동설 천동설 논쟁은 불식되었고 젊은 지구론 논쟁도 실제적으로는 종식되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 누구도 지동설이나 오랜 지구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적 혼란을 겪지는 않는다. 그러나 과거의 이런 역사적 사건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훈을 받지 못하고 아직도 과거의 혼란과 오류를 반복하는 듯이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진화론 논쟁이다. 진화론을 가지고 무신론의 근거로 주장하는 과학주의 무신론도 성행하는가 하면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무신론자라는 근본주의 기독교도 여전하다. 앞으로 어느정도 세월이 흐른다면 아마도 진화론 논쟁도 과거의 지동설 논쟁과 마찬가지고 불식되고 그리스도인 누구도 진화론을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면서도 신앙적 갈등을 겪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기독교 특히 한국 기독교는 진화론 논쟁의 한 가운데서 혼란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다.
성경이나 과학이나 모두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불가피하다. 문제는 어떤 해석이 바람직한 해석이냐는 것이다. 성경의 해석이 과학적 사실이나 이론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그 성경 해석의 절대성을 주장하며 과학을 배척할 것이 아니라 성경 해석의 타당성과 적실성을 다시 검토하고 반성해야 한다. 반대로 과학적 무신론자들은 과학적 사실을 해석하여 거기에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무신론의 증거로 내세우고 성경을 배척한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의 과학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통해 주어진 일반 계시와 자연을 통해 주어지는 일반계시가 서로 모순되거나 충돌할 수 없음을 기본 공리로 받아들이고 이 작업을 해야한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문자주의는 배척되어야 한다. 문자주의느 성경의 역사성을 무시하는 역설이며 허상이다. 우리는 역서적 문법적 성경 해석을 통해 성경 저자가 의도한 원래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의 원청자들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지환경 및 장르, 수사법, 역사적 특수성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칫 현대적 관점을 고대 문서인 성경에 투사하기 쉽다. 자연이란 책을 무시하는 성경 해석에 대한 독선적 태도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런 두려움은 다양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거부에 기인한다고 본다. 문자주의는 성경 해석에 대한 반지성적이고 독선적 태도이다. 그렇다고 성경 해석을 타협하자는 것이 아니라 독선의 해석학을 버리고 겸손의 해석학을 취하자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적 특성성에 기반한 성경 해석을 통하여 보편적 타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성경 해석에 대한 지성적이고 겸손한 해석의 태도이다.
성경 해석을 절대시 해서 과학적 사실을 배척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학적 사실에 대한 해석을 가지고 무신론을 주장하는 것도 문제다.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은 과학이론과 그 인론을 근거로한 행이상학적 해석을 결합하여 무신론적 주장을 제기하는데 이런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과학 이론 자체와 과학이론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구별하여 분리시키는 일이 필요하다. 자연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된다고 해서 그것이 무신론의 증거가 될 수 없듯이 반대로 자연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유신론의 증거도 되지 않는다, 이 두가지 경우 모두의 배경에는 과학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 자연현상의 작동원리에 대한 과학적 설명과 그 설명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석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의 영역과 형이상학의 영역은 별개의 영역이므로 구별되어야 한다. 얘를 들면 진화는 시간에 따른 변화를 가리키는 하나의 자연현상이고 진화론은 진화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론이다. 이와 달리 진화주의는 진화론을 무신론적 세게관으로 해석한 과학주의 무신론이다. 창조과학은 성경을 경직되게 해석한 문자주의적 성격과 과학에(주류과학을 배척하고 유사과학에) 기대어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과학주의적 성경을 모두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창조과학은 성경을 과학(유사과학)에 맞추려는 과학주의와 과학을 성경(성경해석)에 맞추려는 문자주의 두 가지 오류에 빠져있다.
과학적 사실이나 과학이론은 기독교 신앙아 가진 서사에 도전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런 도전에 기독교가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바른 대응은 기독교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 수 있지만 잘못된 대응은 오히려 기독교를 위축시키거나 오도할 염려가 있다. 과학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답에서 첫째로 검토되어야 하는 것은 과학의 도전에 대한 합리적인 평가다. 이 평가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도전으로 여겨지는 것에 과학주의적 입장이 있는지를 살펴보고 비판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그런 과학의 도전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서사 안으로 포용할 수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포용과정에서 우리는 겸손의 해석학을 통하여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대한 반성과 숙고가 필요하다.
과학에 대한 이해
2017-04-01 18:10:54
1. 양립 가능 vs 양립 불가능
A is compatible with B ; A와 B는 서로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모두가 참이다.
A is incompatible with B; A와 B는 서로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A와 B중 어느 하나만 참이다.
2. 과학주의(scientism)
전문 철학자들이 사용하지 않는 용어다. 전문 찰학자들은 주로 환원주의, 물리주의 혹은 자연주의라는 용어를 쓴다. 현대 심리철학에서는 주로 물리주의와 자연주의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과학주의는 계몽주의 이래 과학만이 실재에 대한 진리를 알려준다는 세계관이다. 과학주의는 그 특성상 종교비실재론이므로 유신론과 양랍할 수 없다. 물리주읜 자연주의가 환원주의와 결합된 것이 과학주의라고 볼 수 있다.
3 세계관(Weltanschauung ; worldview)
독일의 칸트, 슐라이어머허, 딜타이, 야스퍼스 등과 같은 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고 사용된 개념으로서 세계의 의미와 세계를 이해하는 근본방식에 대한 개인적 신념을 가리킨다. 독일헌법 4조1항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 그리고 종교적, 세계관적 신념의 자유는 불가침하다고 규정한다. 형이상학적 신념 및 가치관이 개입되기 때문에 세계관은 과학적 탐구의 영역이 아니다. 무신론이나 유신론도 일종의 세계관이다. 신이란 대상 자체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삶의 목적 같은 문제들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은 그 자체로는 무신론이나 유신론과 무관하다. 신앙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무신론적 세계관인 과학주의가 신앙과 충돌을 일으킨다. 앨빈 플란팅거는 대립하고 있는 것은 종교과 과학이 아니라 자연주의와 유신론이라고 말한다.
4. 경신의 원리(Principle of credulity)
신증명은 리처드 도킨스 등이 주도하는 신무신론자들( new atheists)의 공통된 태도다. 이런 태도에 대응하기 위해 라처드 스윈번은 "경신의 원리"를 제안했다. 경신의 원리란신의 존재는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의심할 이유가 없는 한 일단 믿어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신 존재의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그 믿음을 부정하는 쪽이어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신의 원리는 종교적 경험에 대한 정당한 도움을 제공한다.
5. 진화, 진화이론, 진화주의 vs 창조, 창조론, 창조과학
진화란 생물진화든 우주진화든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자연현상 자체로서 일종의 과학적인 경험데이터를 의미한다. 진화이론은 진화현상에 대한 인과율에 근거한 설명체계이다. 이와 달리 진화주의란 진화나 진화이론을 무신론적 세계관으로 해석한 것이다.
창조라는 말은 유신론적 세계관을 전제하고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의미하는 범주다. 칭조론은 창조라는 현상이나 사건을 설명하는 이론인데 진화를 수용하는 창조론과 진화를 배제하는 창조론이 있다. 창조과학은 다양한 창조론들 중의 하나로서 진화를 배제하고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반과학적 창조론이다. 진화를 배제하는 창조론들은 진화와 진화주의를 구별하지 않거나 진화론이 성경의 창조론과 대립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성경도 과학도 모르기 때문이다.
6. 진화이론과 기독교 신앙
주류과학에서 검증을 거치고 전반적인 지지를 받는 진화이론을 배제한다면 기독교 신앙은 과학과 소통할 수 없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고립시키거나 약화시키게 된다. 맥그래스, 폴킹혼과 같은 학자들은 진화이론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신앙을 너무 학문적으로 접근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이 세상과 소통하기 위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 신앙의 내용 자체가 세상과의 소통을 필요로 한다. 진화이론을 받아들일 때 부딛히는 두가지 문제는 신론과 인간론이다. 첫째는 신론에서 발생하는 문제인데, 우주와 생물의 존재를 자연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가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창조나 섭리는 기적적인 방법에 제한하려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는 기적적인 방법과 자연적인 방법 모두를 사용하여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둘째는 인간론의 문제인데,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달리 특별한 방법으로 지어졌다고 이해했고 이것이 인간이 특별한 존재인 이유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를바 없는 자연적인 방법으로 지어졌다면 인간의 독특성이 사라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특별함은 창조의 방법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특별해서이고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바로 이런 특별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결국 진화와 창조는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양립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