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누구인가? - 키이스 워드
2018-07-31 20:21:22
1. 신은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그림 2 점(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 윌리엄 블레이크의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의 공통점 : 하늘에 살거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나이든 남성’과 같은 신. 현대인은 좀더 정교하게 ‘몸을 지니지 않은, 전적으로 영적인 존재’로서의 신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신을 ‘특정 존재’로 생각하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즉,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생각하고 변덕스럽기도 하며 슬픔과 행복을 느끼는 감정을 동반한 인격적인 신 즉, 인간의 특징을 공유하지만 영원히 사는 존재로서 우리보다 나은 존재로서의 신. ==> 이와 같은 잘못된 그림들을 먼저 지우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 왜 신은 무한해야만 하는가? ]
그리스도교 전통 교리는 신이 지혜롭고 힘이 세며 우주 저 너머 혹은 우주 안 어딘가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유한한 정신은 아니 라고 주장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이 ‘무한’하다고 말했습니다. 신은 여러 사물 중 하나 즉 여러 존재 중 하나가 아닙 니다. 심지어 신을 우주보다 더 큰 존재로 여긴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안) 신을 보이지 않는 정신이나 인격체로 보는 대신 우리와 우주 전체를 포함하며 한계가 없는 하나의 실재라고 생각해 봅시 다. ‘유한’하고 ‘한계’를 지닌 존재인 우리는 모두 ‘제한이 없고’, ‘무한’한 실재의 일부입니다. 이 실재가 바로 신입니다. 이는 우주가 곧 신이라고, 신이 우주 전체를 뜻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는 신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8) /
모든 것이 신 안에 있고 신의 ‘일부’라면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는 것인가? 책임을 질 필요가 있는가? 악행조차도 신을 드러내는 것인 아닌가?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우주의 모든 요소는 신과 분리될 수 없기에 모든 것은 ‘그 안에’ 있습니다. 동시에 유한한 모든 것은 신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존재를 지니고 있습니다.
신은 우주와도 다르고, 우주에 있는 모든 유한한 것들과도 다르므로 유한한 우리는 신을 적절하게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언어는 특정 대상이 지닌 한계를 표현함으로써 유한한 실재의 한 측면을 집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말은 신을 표현하는 데 올바르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신을 바르게 드러낼 그림 또한 그리지 못합니다. 신은 우주의 유한한 존재들을 통해 (부족하나마) 표현되는 무한한 존재입니다. / “시간이란 ‘영원’이 움직이는 형상이다”(플라톤, ‘티마이오스’) / 시간과 공간 전체는 무한한 신의 유한한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주 전체는 유한한 방식으로, 묘사할 수 없는 존재를 표현합니다.
[ 우리는 어떻게 신에 관해 말할 수 있을까? ]
종교 언어 즉 신에 관한 언어(메마른 학문 언어가 아니라 예배와 기도에서 사용되는 살아있는 언어를 가리킵니다(p.18);ex) 성공회 기도서)를 읽는 일은 세계에 다가가는 특별한 방식입니다. 섬세하게 이 언어에 다가서고 이 언어를 a. 읽어내기 위해 꾸준히 b. 수행할 때 우리는 신에 관한 언어가 전하는 세계를 c.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교 언어는 이 세계가 단순히 세계 그 자체로 머무르지 않으며 이를 넘어서는 어떤 실재를 표현하고 있음을 전달합니다. /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니케아 신경 중), “하늘과 땅(천지)을 만드신 하느님”(사도신경)(p. 48) / 세계를 이루는 다양한 부분들(과학, 예술, 도덕, 종교)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무한을 표현합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대상을 분석하는 과학, 사물 자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예술, 필요와 도움을 바라보는 윤리/도덕은 각각의 방식으로 세계의 근본 방식을 더 잘 표현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계시에 더 잘 반응합니다. 종교란 영감을 받은 특정 개인이 지녔던 계시 체험에 기반을 둔축적된 전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은 유한한 세계의 특수한 일부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이를 체험한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시나 상징으로 표현했고, 자신이 속한 문화와 사회에서 쓰는 개념을 사용해 자신이 이해한 바를 다른 사람들도 이해할수 있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공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애썼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위대한 종교들은 이러한 방식을 간직 하고 있습니다. 신은 인간의 모든 개념을 넘어서기 때문에 신에 관한 정확하고 틀림 없으며 최종적인 묘사는 어디에도 없습니 다. 다만 인간은 부정확하더라도 개념을 활용하여 신을 향해 초점을 맞춰갈 뿐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의 요약) 신은 무한한 실재입니다. 무한한 실재는 인간 언어로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지만, 유한한 사물, 사건을 통해 표현되며 모든 유한한 사물 너머에, 그리고 그 안에 존재합니다.
Q. 2011년 교수님께서는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에 ‘종교는 과학이 간과했던 실제적 질문들에 답할 수 있다”Religion can answer factual answers science neglects는 제목의 논란이되었던 글을 기고하셨습니다.
A. 그 글이 논란을 일으켰나요? 전모르고있었는데요.(웃음)
Q. 저는 그 글 밑에 달린 수 많은 덧글을 보았습니다. (웃음) 거기서 교수님이 언급하신 ‘사실적 질문’factual questions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A. 사실적 질문 중 가장 분명한 것은 ‘신이 존재하는가?’입니다.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 거기에 대한 반론도 많습 니다. 신은 물리적 실재가 아니므로, 저는 과학이 이에 대해 직접 답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신’이라는 것은 실험할 수도, 계량화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자유의지에 관한 질문도 사실적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과학이 답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죽음 이후에도 삶을 가지느냐는 질문에도 과학이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과학은 실험하거나 측정할 수 없으면 답을 할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아주 많이 있습니다. 철학과 종교는 이러한 질문을 매우 많이 던지고 답하고 있습니다. 과학이 이러한 질문에 답을 못한다고 하여, 이 질문들을 구석에 처박아둘 수는 없습니다.
Q. 교수님은 종교는 이러한 ‘사실적 질문’에 관한 것이라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교수님은 종교는 ‘사실fact’보다는 ‘가치value’ 나 ‘의미meaning’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는 것입니까?
A. 예, 저는 그러한 입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종교가 가치와 의미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종교는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신의 실재’, ‘죽음 이후의 삶’과 같은 사실의 범주에 있는 문제를 다룹니다.
Q. 그렇다면 사실, 가치, 의미는 어떻게 상호작용을 합니까? 예를들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있다면 어떤 가치와 의미가 이 사실에 결부됩니까?
A. 일단 이 문제는 신에 대한 정의에 달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일반적인 그리스도교인처럼 신을 사랑의 존재로 여기고 창조적 힘, 동정심과 이해심과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봅시다. 신의 창조에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은 사랑과 지혜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여기에는 도덕적 가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의 존재는 가치가 배제된 사실이 아니라, 최고의사랑과 힘을 가진 존재라는 가치를 포함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실과 가치, 의미가무관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 다.
2.우주는 어떻게 신을 가리키는가?
신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으나 이 세상과 관련지어 신에 관한 무언가를 말할 수는 있습니다.
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탐구하는 확실한 방법은 유한한 이 세계의 특성을 보고 거기에서 가장 일반적인 성질을 드러내 이 세상이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 세계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합리적 질서와 법칙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자연과학의 등장과 발전, 성과는 신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좋은 논거가 될 수 있습니다. 과학이 종교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이들이 있지만 본래 종교와 과학은 다툴 필요가 없습 니다. 보통 이런 논쟁에서는 모두 과학자들이 승리했습니다.
[ 과학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현대 과학은 유신론 세계, 특히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탄생해 성장했습니다. a. 많은 신이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욕망과 바람을 가지고 세계에 관여한다고 믿는다면 b. 과학은 가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계의 모든 요소가 a. 운명이나 순전한 우연들, 영이나 신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발생하고 움직인다고 믿는 믿음에서는 b. 과학이 시작될 수 없습니다. a. 세상을 창조한 합리적인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이성적인 신이 우리에게 우주에 대한 진리를 c.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해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b. 과학은 시작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이성을 외면하지 않으며 과학을 반대하지도 않습니다. 어떠한 측면 에서는 종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이성적인 활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과학이 제공하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이 성적 설명의 토대’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시작’ - 어떤 이들은 16, 17세기에 유럽에서 세상과 사물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과학이 시작됐다고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세상을 주의 깊게 관찰해왔습니다. 과학은 관찰로부터가 아니라 온 세상을 합리적으로 설명 하기 위해 노력했을 때, 세상을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기를 멈추고 완벽하고 합리적으로 짜인 세상에 대해 궁리했을 때 시작되었 습니다. 과학의 시작은 관찰이 아닙니다. 과학은 먼저 합리적인 가설을 제시하고 가설을 증명할 실험을 구성한 뒤, 자연을 관찰하지 않고 (가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 뉴턴의 ‘관성의 법칙(제 1 운동법칙)’, 빅뱅, 전자와 쿼크, 중성자
모든 존재는 반드시 이유를 지녀야 하고, 발생한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증명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일에 이유가 있다고 가정하지 않으면 과학은 성립하지 못합니다. 과학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 또한 불가능합니다. - 바닥은 갑자기 사라지지 않으며, 오른쪽 다리가 갑자기 화분으로 변하거나 낙타가 갑자기 거실에 나타날 일은 없습니다. - 어떤 일을 초래한 이유가 있고, 이를 적절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일상생활과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 믿음이자 공리입니다.
[ 신 - 궁극의 설명 ]
반드시 무언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
이러한 방식은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설명에서 비롯합니다. 세상에 발생한 어떤 일은 일정한 법칙을 따릅니다. 법칙은 매우 이성적입니다. 물리적인 물체가 언제 어디서나 따르는 듯 보이는 일종의 규칙입니다. - 전자가 갑자기 전하량을 바꾸거나, 순간적 으로 유령처럼 사라진다면 입자 물리학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일반 법칙에 따라 일어나야 합니다. / 자연은 가능한 한 가장 단순한 법칙을 따라 구성되었으면서도 가장 풍성하고 복잡한 효과를 내도록 고안되었다.(철학자 라이프니츠) / 이렇게 구성된 우주는 완벽하게 이성적입니다. 현대 과학은 구성된 우주 자체가 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 적으로 작동한다고 가정합니다. 우주가 작동하는 방식은 우주를 이성적이라고 말하는 가장 좋은 논거입니다. 우주는 우리가 기대하는 일반적이고 우아한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기에 설명 가능합니다.
==> 이러한 설명이 가리키는 바는 우주의 기원이자 토대인 신 역시 이성적이라는 사실입니다.
a. ‘신을 믿는 일’은 우주를 존재하게 하는 합리적인 원인이 있음을 믿는 일입니다. 이 믿음은 보편적이고 이성적인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b. ‘과학’ 역시 공유하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이러한 믿음을 ‘신 존재 증명’에서 논의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신 존재 증명을 알고 있는 매우 지적인 사람도 여전히 신을 믿지 않는데 어떻게 신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신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신 존재 증명은 확실한 증명도 어떠한 의미도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과학과 일반 상식이 가정하듯이 이성적 법칙에 기반을 둔) 이 세상을 완벽하게 설명할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그런데 세상이 완벽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 역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현대 과학의 견해, 순전히 과학의 놀라운 성과에 의해 정당화된 듯 보이는 이 생각도 사실은 일종의 신앙입니다. 만일 우리가 접하는 이 세상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면, 가장 유명한 증명인 인과론에 기대어 ‘다른 존재를 존재하도록 하는 근원적인 존재’가 있음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 근원적인 존재가 바로 ‘신’입니다.
신에 관한 논증은 a. 우리에게 어떤 방향, 더 큰 이해로 나아가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b. 우리 정신을 우리 이해 ‘너머’에 있는 실재를 향하게 함으로써 더 큰 이해가 가능하도록 돕는 훈련입니다. c. 순간적이며 변화하고 늘 죽어가는 파편들의 집합체인 세계가 매 순간 어떤 존재에 의존하고 있으며, 변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완전하고 충분히 이성적인 존재 질서를 표현한다는 관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d. 수학 증명과 다른 이유는 최종적으로 무한한 존재에 대한 비전을 보여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점입니다.
[ 신 - 궁극적 원인 ]
신이 온 우주의 기원이라면 그는 공간뿐 아니라 시간에 대한 원인이기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신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무언 가입니다. 신은 그저 시간 안에서 맨 처음 등장한 사물이 아닙니다. 신은 시간의 창조자이며, 시간 자체에 대한 설명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신은 영원해야 합니다.
신을 우주의 원인이라고 말할 때, 이는 신이 시간의 처음인 태초에 모든 과정이 진행되도록 시동을 걸었다고 말하는게 아닙니 다. 신은 시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그 안에 있는 만물은 모두 신에게 의존합니다. 신이 없다면 만물은 존재할 수없습니다. 신은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자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신은 존재할 수 있으며, 존재하기 위해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신이 시간을 초월해 있다면, 신은 변화 또한 넘어서야 합니다. 모든 변화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은 변하지 않고, 바뀔 수도 없습니다. 우주의 합리성을 이해하려는 과학자들의 신념이 궁극적으로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신 존재가 필요합니다. 즉, 만물의 자존하는 원천이자 영원하고 변함없는 존재 개념을 통해 과학과 종교가 어떤 지점에서 만나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난처한 문제) ==> 설명 불가능한 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a. 실제 신과 b. 우리가 신에 관해 이해하는 바를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 지성은 제한적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 그러나 신의 본성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완전한 설명이 존재하고, 우주가 전적으로 이성적이라고 해도 우리는 이를 알거나 믿을 수는 있어도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설명은 도달하지 못한 목표이며 인간의 정신은 전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종교 언어로 말하자면) 신의 실재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실재가 자아내는 강렬한 빛 때문에 우리가 그 실재를 볼 수 없는 것입니 다. 신에 대한 모든 묘사는 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a. 신은 시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b. 신은 다른 존재에 의해 창조되지 ‘않았고’, c. 어떤 사물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d. 신은 변하지 ‘않는다’와 같이 말이지요.
우리가 신을 ‘이성적인 정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것이 적절하다기보다는 우주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기초로 우리가 제시할수 있는 가장 좋은 명칭이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은 신을 비이성적이고 임의적인 무의식적 힘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오해의 소지가 적습니다.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하며 수학적인 우아함을 갖춘 세상을 바라본다면, 스스로 존재하는 이성적 의식이 세상의 기초를 놓았다는 생각은 합당해 보입니다.
그리스도교인이 신을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니케아 신경, p.48. 각주)라고 부를 때, 이는 신이 과학이 탐구하는 일반적이고 이해 가능한 법칙을 지닌 우주에서 자신을 생성하고 표현하는 영원한 의식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신이 만든 사물들을 통해 드러나는 신의 지혜는 숨이 멎을 만큼 경이롭습니다. 영원한 신의 무한한 힘과 지혜를 깨닫을 때 예배는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a. 과학이 우리가 사는 우주의 아름다움과 광대함, 우주의 이성적인 구조를 점점 더 발견해낼수록 신에 대한 깨달음도 더 깊어지고 b. 예배 또한 더 진중해질 수 있습니다.
3. 신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 고백에는 신이 무한하고 한계가 없는 실재이며, 유한한 우주를 통해 표현되는 영원하며 자존하는 존재로 만물의 원천이자 무한한 힘과 지혜를 지녔다는 훨씬 더 미묘하고 심오한 뜻도 담겨 있습니다. 신은 유한한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이성적이고 질서정연한 법칙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자연의 기원이자 기초를 이루는 ‘이성적 의식’으로 생각하는건 옳습니다. 이러한 신을 향해 존경과 경외를 담아 힘과 지혜가 무한한 존재로 경배하는 일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물론 성서는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신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성서 저자들 또한 신의 힘과 지혜가 자연 세계를 통해 드러난다고 생각했습니다. 성서 저자들은 근대 과학 세계관을 알지 못했고 이성적 의식이 창조한 자연 세계를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위대한 힘과 지혜를 지닌 신이 자연에 현존하며 자신의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시 19:1) /
여기에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 이 세계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 세계는 특정한 모습을 갖추고 있고 질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기원은 무한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가 질서를 갖춘 세계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이때 어떤 목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 니다.
[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가? ]
우주에서 아주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인류. 인간 정신은 매우 제한적이기에 우주 전체가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만일 뿐 아니라 별다른 성과도 없지 않겠는가?
과학은 사물이 왜 존재하는지 항상 그 이유를 묻는 방식인데 우주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창조된 것처럼 보이느냐는 질문은 과학 적인 사고의 틀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적절한 질문입니다.
우주가 목적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인 생각일까요?
(성서 작성 시기) 상당히 작은 우주, 우주의 중심인 지구, 평평한 접시 같은 지구, 반구형 지붕처럼으로 지구를 덮고 있는 하늘, 인류의 역사는 2,000년 정도, 신이 가장 관심을 기울이는 피조물은 인간, 하늘과 땅 사이에 천사, 대천사 같은 ‘천상의 존재들’ 을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이 신의 목적을 묻는다면 그 질문은 이 지구라는 행성 위에 사는 삶의 목적에 관해 묻는 것.
(오늘날) 인간은 우주의 주변부에 있으며 전체 창조에 비추어 봤을 때 인간 존재가 신의 핵심 목적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이 지만 / 지구는 우주의 중심은 커녕 태양계에서도 중심이 아님을, 이 방대하고 아름다우며 경외심을 일으키는 우주가 대부분 빈공간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생명없는 바위와 이글거리는 태양들과 가스 구름으로 채워져 있음을 / 기억하더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수백만 광년의 빈 공간 전부보다 극히 미미하고 하찮아 보일지라도 의식 있는 존재가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사물은 오직 그것을 알아주는 누군가에 의해서만 가치를 갖습니다. 어떠한 사물이 가치 있다는 말은 그 사물을 선택할 이유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물은 사물이 지닌 영향력을 따져보는 어떤 의식에 의해 선택됩니다. 의식되지 않는 우주는 별다른 가치를 갖고 있지 못합니다.
[ 보편적인 가치들 ] ‘우주에 목적이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변화하는 이 우주가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가치) < ‘행복’, ‘지식’, ‘창조성’, ‘사랑’ >, ‘본질적 가치’ 4가지는 그 자체로 이성적 존재가 선택할 만한 가치들입니다. 예를 들어 ‘행복’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입니다. 즉 그 자체로 선한 것이며 그것 자체를 위해 선택하는 무엇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주 그 어디에도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작은 행성에 살고 있는 하찮은 한 생물의 행복이 우주 나머지 전체보다 더 가치있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자신을 위해 가치를 선택하는 어떤 의식적인 존재가 없다면 그 어떤 것도 가치를 지닐 수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외계 생명체, 자연을 초월한 존재라도 이 가치들은 선택할 만합니다. 특별히 인간에게는 이 가치를 자유롭게 선택할 도덕적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원한다면 불행, 무지, 게으름, 이기심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실제로 어느 정도 그렇게 합니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교인들은 이 세상이 ‘죄 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실제로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는데 실패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소중한 가치를 더 배우기보다는 성가신 상황을 마주하지 않고 싶어 합니다. 창조 활동을 하거나 다른 이를 돕기보다는 그저 대접받으며 삶을 수동적으로 즐기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행복, 지식, 창조성, 사랑이 가치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가치 ?> 가치있는 상태) 이러한 가치는 ‘가치있는 상태’로 라는 것이 정말로 있는지, 만약 있다면 ‘가치 있는 상태’가 무엇인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결정했다면 그 상태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지, 명확하고 분명하게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인지를 또물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고 ‘행복’, 지식’, ‘창조적 자유’와 ‘사랑’을 깨달은 존재 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가 이런 상태를 실현하리라고 우리는 희망할 수 있습니다. 이때 ‘존재들’은 꼭 인간이 아닐 수도 있고 다양한 형태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공동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 삶의 형태가 가치 있음을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그들을 존경하고, 우리 삶 역시 그들의 삶처럼 되기를 바랄 것입니다.
(인간 삶은 가치 있는가?) 신인동형론적 편견이 아니라 ‘인간 삶이 근본적으로 가치 있다는 것’은 어리석고 교만한 생각이 아닙 니다. 이성적 존재가 행복과 지식, 창조와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발전하는 일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일입니다. 이 가치를 추구하는 a. 존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모인 b. 사회가 어떠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도 그리 중요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낯선 존재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본질적 가치’를 목표로 삼을 수 있다면, 그들은 인간 삶과 매우 중요한 요소를 공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는 이 가치를 향하고 있을까요? 아닐까요?
(우주는 가치를 향하고 있는가?) 우주가 전개되고 있는 과정이 가치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우주는 합목적적(가치있는 목표를 향한 조화로운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주를 이루는 법칙이 본질적 가치들을 선택할 수 있고 실현할 수있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존재를 통해 관철되어야 함을 뜻합니다.
a. 가치가 과정의 끝자락에만 위치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b. 가치는 정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c.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 자체가 가치일 수 있습니다. ex) 등산 : 산 정상에 오름이 가치라면 헬리콥터를 타고 오르면 그만이지만 그것은 등산이라고, 등산에 걸맞은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때 가치있는 건 산을 걸어서 올라가는 행위 그 자체입니다. 이 단순한 예를 통해 어떤 과정이나 행위도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티끌 같은 인간) 우주를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 존재가 우주가 지향하는 목적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습니다. 이 맥락에서 인간이 전체 우주와 견주어 봤을 때 그 크기가 지극히 작다는 점은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주가 목적을 지니고 있다면 이 우주는 자신의 활동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이성적 존재에 기대어 있습니다. 이는 우주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비슷해 보입니다. 우주가 진화하는 전 과정은 지식, 창조성, 우정의 발전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인간 사회를 빚어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주가 자신의 목적을 표현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충분한 타당성이 있습니다.
[진화의 목표] 현대 과학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는 진화론은 우주가 목적에 들어맞게 움직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깊고 명확한 통찰을 전합니다. 무기질에서 유기 생명체가 나타나고, 이 생명체는 스스로를 유지하는 자기 보존적 삶을 살며 궁극 적으로는 인간에게서 발견되는 자기 주도적, 의식적 생명이 됩니다. 이렇듯 진화는 이전에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질적 특성들의 발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 진화는 우주가 목적에 들어맞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목적을 전제하지 않으면 자연 과정에서 의식적인 생명이 출현한 일을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주는 그 자체 구조 안에 합목적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주는 의식과 가치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목적은 진화 자체의 내적 방향과도 일치합니다. 우주가 존재했던 첫 순간부터 목적은 있었고 시간이 흐르며 점차 펼쳐져 더 복잡 하고 가치 있는 새로운 특성들을 만들어냅니다.
성서를 쓴 이들은 진화론이 전한 관점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 시대에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세상이 끝날 거라 기대했고, 자연 질서를 초월한 신의 개입으로 신의 목적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과학 이전에 그려진 인류의 그림이 더는 적절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에덴동산). 그 대신에 우리는 자연 과정을 통해 무기물로부터 이성적 의식을 지닌 생명체로 느리게 발전한 과학의 그림을 채택해야 합니다. 인류가 사랑과 우정뿐만 아니라 욕망과 공격성에 의해 살아남고 진화했다는 그림, 더 나아가 신이 정해 놓은 목표를 향해 인류가 나아가는 그림, 즉 신이 창조한 인류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선이 실현되는 새로운 그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화론이 전한 관점으로 그린 그림을 채택하는 일은 신의 목적에 대한 생각에 새로운 생명과 감각을 부여합니다. 신의 목적은 세계가 움직이는 과정 자체에 내재된 방향이며, 우리에게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며 진화하는 과정이자, 그 과정이 가리키는 종착 지입니다. 신의 목적은 외부 존재에 의해 임의로 이 세계에 부과된 계획이 아니라 세계 자체의 내적 방향이며 목표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유한한 사물과 사건을 통해 무한하고 영원한 실재가 드러남을 이미 경험했고, 지금 경험하고 앞으로 경험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한 알의 모래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하늘을 보네.
너의 손바닥으로 무한을 쥐고, 찰나의 순간에 영원을 담는다.
/ 윌리엄 블레이크 / 순수의 전조 Auguries of Innocence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