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쟈크 엘룰 생애와 사상

메르시어 2023. 5. 16. 21:30

쟈크 엘룰 입문

2018-07-20 22:31:34


엘룰의 사상과 저작에 대한 개요와 분석 

A SYNOPSIS AND ANALYSIS OF THE THOUGHT AND WRITINGS OF 
JACQUES ELLUL 


내가 엘룰의 사상과 저작에 대해 소개 받았던 때는 1986년 아니면 1987년도이다. 그때 나는 신학관련 정기간행물에서 한 인용문을 발견했고 나는 그 인용문이 수록된 책을 찾아보기 위해 도서목록을 조사했다. 뒤틀려진 기독교라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구입해서 읽었는데 읽는데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나로 하여금 그가 쓴 다른 책들을 찾아 읽어보게 할 만큼 나의 관심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결국 나는 지금도 계속 영어로 번역되고 있는 총 서른 두 권의 그의 책과 7권의 그의 사상에 관해 다루고 있는 책들을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들 일차 이차 자료들의 목록은 이 글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다. 

엘룰의 생애 Biographical Sketch 

엘룰의 사상과 저술에 대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그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엘룰은 1912년 1월 6일 프랑스의 보르도에서 요셉과 마타 엘룰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죠셉은 영국시민권자로 말타에서 태어나 당시 오스트리아 영의 한 항구 도시였던 트리스트에서 성장했다. 죠셉의 아버지는 이탈리아인이었고, 어머니는 세르비아인이었다. 죠셉의 아버지는 여러 개의 커다란 화물선박을 소유한 부유한 선박 소유주였었다. 1890년대에 선박중 하나가 침몰했고, 하나는 납치되었고, 또 한 척이 바다의 해적을 만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보험을 들고 있지 않았던 때라 그는 도산을 하게 되었고, 귀족의 명예를 중히 여겼던 그는 자살을 하게 된다. 이어서 그의 아내는 사람들을 피해 집에서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상세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엘룰의 아버지가 '이것이 명예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그의 할아버지를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엘룰의 아버지 죠셉은 비엔나에서 법과 무역을 공부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보르도로 가서 포도주 상인으로의 경험을 쌓았다. 그곳에서 그는 엘룰의 어머니 마타를 만났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포르투갈인으로 포도주 사업을 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마타의 어머니는 프랑스 국적의 신교도였다. 
쟈크 엘룰은 그가 유산을 물려받고 민족주의가 깊어졌던 나라에서 근본적으로 외국인이었다. 그의 부계와 모계 가족들 모두가 매우 부유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엘룰 가족은 매우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갔다. 쟈크는 이것이 그의 생과 사상의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바로 가난에 익숙해지는 것이었다. 
그는 그의 소년 시절을 항구도시인 보르도의 선창에서 보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선장이 되는 꿈을 꾸곤 했다. 그는 그의 부모의 엄격한 감독아래 양심적인 학생이었지만 가난한 가정환경 때문에 그가 열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그 자신의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어린 시절 엘룰은 자신이 '아주 미약한 기독교에 대한 지식'만을 가지고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그리스와 세르비아 정교회와 같은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교란 신화와 상상의 이야기 이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볼테르적 회의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아내가 아들에게 종교적 영향을 행사하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성경이 그 가정에서 제한되는 서적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엘룰은 7-8세 경부터 때때로 성서를 읽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가 매일 기도를 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18살 때 엘룰이 라이치에서 중등과정을 이수한 뒤 엘룰의 아버지는 '이제는 법학을 공부할 차례다'라고 하면서 아들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엘룰은 바다에 나가고 싶어했지만 대학에서 법과 제도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의 수학을 시작하기 전인 여름에 엘룰은 자신이 회심한 경험을 가졌다는 것을 마지못해 이야기한다. 중등과정을 마치고 파우스트를 번역하는 일에 뛰어들었을 때, "갑자기 나는 너무나 놀랍고 너무나 압도적인 그 무엇의 현존 앞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그것이 내 존재의 한 중심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너는 하나님 앞에 있다' 나는 나에게 자신을 드러낸 그 절대자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셨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분이 나를 소유하도록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여러분은 엘룰이 요나서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그리고 이 선지자에 대한 책을 쓴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1년 후 19세에 엘룰은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게 된다. 이때는 엘룰이 가정의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 그렇게 똑똑한 아버지가 직업을 찾을 수 없는 불공평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던 때였다. 이것은 1929년 경제적 몰락의 직후인 1931년의 일이다. 그는 맑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정확히 인식했고, 후에 사회학적으로 교회를 연구하게 된 근거가 맑스에게 있음을 말하고 있다. 
3년 후 22살에 엘룰은 자칭 '회심의 2 단계'라 부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로마서 8장을 읽던 중에 '나는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으로 개심을 하게 되었다' '나는 역사 너머의 한 시각을 보았다'. 엘룰이 어머니에게(남편에게 약속한대로 종교적 영향을 그 아들에게 끼치지 않았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나는 회심을 했어요"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그를 쳐다보지 않고 "놀라운 일이 아니구나. 나는 네가 태어난 뒤 쉬지 않고 매일 저녁 이를 위해서 기도해왔단다"하고 말했다. 엘룰이 자신의 개인적 회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삼가기는 하지만 알려진 바로는 자신이 죽은 후에 공개되도록 하면서 이에 대한 경험을 썼다고 한다. 
엘룰은 구교와 신교의 신학서를 읽기 시작한다. 그는 스스로가 칼빈의 저작들에 잠시 마음을 사로잡혔다고 말한다. "그는 엄격함과 비타협성과 모든 성서를 사용함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것은 나의 엄격한 성격에 맞았다. 하지만 그는 너무나 지루했고, 지독하게 편협적이었으며 너무나 조직적이었다. 어떤 형태의 다양성도 칼빈의 사상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엘룰은 스위스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저작들과 만나게 되는데, 이는 프랑스 신교 신학자인 Jean Bosc와의 친교를 통해서였다.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접근을 배운 엘룰은 "칼 바르트를 읽기 시작한 뒤 칼비니스트가 되는 것을 멈추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칼빈보다는 루터나 케이르케고르, 그리고 바르트에게서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비록 자신은 프랑스 개혁교회의 활동적인 회원이었지만 말이다) 
어린 시절의 가난때문에 엘룰은 "권력"에 대해 반항적이고, 혁명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30대 중반에 스페인 내전과 인민전선(popular front)와 같은 많은 혁명운동에 관여했다. 이러한 활동들을 하던 중에 그는 1937년에 그의 아내가 되는, 당시 영국 시민권을 갖고 있던 네덜란드 여인 Yvette Lensvelt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카톨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신부들이 그녀의 기도에 관한 질문들에 대답해주지 않자 기독교에 반항적이 되었다. 그녀는 아주 철저한 반 기독교인이 되었고, 간호사 수업과 함께 엘룰을 만날 즈음 법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결혼하던 해인 1937년에 엘룰은 스트라스부르그 대학의 연구과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1940년 나찌 영향 하에 있던 비시 정부가 그를 '외국인'의 자녀로 독일의 사상에 대해 적대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해고할 때까지 그는 3년 동안 대학에 있었다. 
아버지 죠셉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엘룰은 그 뒤 독일인 간수의 선처로 교도소에서 그를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찌의 손에 1942년 죽었다. 
그의 아내 Yvette가 네덜란드 태생으로 영국 여권을 가지고 있어서 '외국인'으로 체포될 위기에 있음을 알고, 엘룰은 보르도를 떠나서 나찌 관할 지역 바로 너머의 "자유지역"의 시골로 들어갔다. 그들은 1940년부터 1944년까지 감자와 옥수수를 재배하고 양과 닭, 토끼들을 사육하면서 살았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도 관여하면서 유태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독일인으로부터 도망치도록 도왔다. 
1943년 엘룰은 로마법과 역사에 대한 박사 학위 과정을 끝냈는데, 그의 박사논문은 로마의 'mancipium', 곧 자신의 아이들을 팔 수 있는 로마인 아버지의 권리에 대해서였다. 
1944년에 국가 해방운동에 관여하면서 보르도 대학의 법학과 경제학부의 역사와 사회학과 교수가 되었다. 이 일은 더욱 확대되어 1947년에는 정치학 연구 기관을 포함하게 되었다. 
1944년부터 1946년까지 그는 보르도의 '대의사 시장'으로 일했지만 곧 정치의 무력함을 깨닫게 된다. 1946년부터 1953년까지는 프랑스 개혁교회의 국가 종교회의에 참여했고 WCC에서 활동했다. 이러한 정치적, 교회 경험들은 그로 하여금 정치와 교회의 개혁에 대한 환상들을 벗을 수 있도록 도왔다. 
엘룰의 교육에 대한 책임감과 저술에 대한 열정은 그의 생애 전반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사회 참여라는 실천과 모 교회를 목양하고 수년동안 비행청소년 사역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보르도의 선지자"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그는 1994년 5월 19일 보르도 캠퍼스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페삭에서 죽었다. 전하는 바로는 엘룰은 그의 사후 출판되기로 한 2권의 자서전을 썼다. 
엘룰의 법 공부와 신학적 관심은 1946년에 프랑스에서 출판된 그의 첫 저서 '법에 대한 신학적 기초'에 잘 보여진다. 그의 두 번째 저서 '왕국의 현존(국역 :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는 1948년 프랑스에서 출판되었는데, 1951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된 최초의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후의 그의 모든 저서들에 발전되어온 주제들을 총체적으로 도식화해놓고 있다. 엘룰은 "나의 모든 저서들의 요지는 그와 같은 의식적으로 생각된 총체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그의 모든 사상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가 영어로 맨 처음 번역된 책, '왕국의 현존'(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첫 장 첫 페이지에 명시되어 있다. 이 책의 첫 장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제목이 붙여져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으며 또한 그곳에 거하는 것이지 결코 그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서나 세상에 무관심한 채 살도록 지은바 되지 않았다고 말씀한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세상 속에 있어야 한다면 그는 세상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의 사상이나, 그의 삶, 그리고 그의 마음이 세상에 의해서 조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의지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다른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다른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그의 주인에 의해 세상으로 보내어졌으나 그의 주인과의 교제는 단절되지 않는다. 그가 살아야 하는 곳이 '세속'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세상의 물질적 권세와 직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영적 실재와 맞서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가 그리스도와 교제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는 혈과 육에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정사, 권세, 이 어둠의 세상 지배자들과 맞서 싸운다. 동시에 이러한 교제는 그에게 그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는 죽음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의 운명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사실을 확신시킨다. 그리고 은혜에 의한 이러한 자유의 결과 그는 세상의 영적인 실재와 맞서 싸울 수 있다." 
위의 말들은 엘룰이 다음 40년간 그의 여러 책들에 언급하고 있는 기본적인 주제들을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그 중요한 몇 가지 문장들을 발견한다. 
- 엘룰이 말하는 "세상"에 대한 특별한 우주론적 이해 
- 필연성, 운명, 그리고 세계 체제의 멸망 
- 세상의 물질적, 물리적 환경 배후에 존재하는 영적인 실재, 힘, 권세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유케 된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 남아 있고 살아야 함 
- 세상과의 단절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며 그 속에서 영적인 실재와 맞서 싸우는 그리스 도인의 책임 

그의 첫 번째 책에서 우리는 부가적인 주제 몇 가지를 발견하데 된다. 여기에는 현대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인간의 자유를 위협하는 최우선적 요인으로서의 "기술", 세상이 사용하는 선전, 그리고 혁명이라는 무익한 방법 등에 대한 통찰들이 포함되어 있다. 만일 엘룰 사상에 대한 간단한 입문서를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왕국의 현존(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 국역)'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의 몇 가지 사상이 그의 이후의 저술에서 약간 변화된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변증법적 방법Dialectic Method 

우리가 엘룰의 주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그의 사상의 방법론에 대해 언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변증법적 방법론이다. 그는 "나의 두 지성적 원천은 칼 맑스와 칼 바르트이기 때문에 변증법은 나에게 중요한 것이다." "내 모든 저술은 서로 대응하는 구도로 씌여있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선 변증가이다. 나는 변증법적 분석이 아니면 어떠한 것도 알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변증법'이라는 말은 대단히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말이다. 그것은 대화, 이분법, 그리고 이원론을 의미할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 그 말은 역설, 이율배반, 혹은 다른 측면, 논리적 분석이나 종합을 의미할 수도 있다. 엘룰에게 있어서 변증법은 인과율의 선적 논리로 종합되거나 화해될 수 없는 서로 모순되는 두 요소의 공존하는 현상을 조망하는 사상의 방법론을 의미한다. 변증법은 새로운 상황으로 들어가는 역사적 발전 속에 살아있는 두 모순된 요인들의 갈등으로 인한 역사의 역동성을 전제한다. 어떤 이는 이것을 실존주의의 객관적 형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엘룰이 쇠렌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뿌리내려지고 칼 바르트, 에밀 부르너, 루돌프 불트만에 의해 계승된 "변증법적 신학"의 전통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비록 그가 칼 바르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는 결코 '무조건적 바르트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바르트에 대한 비판은 그가 실재하는, 살아있는 상황을 관통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바르트 신학의 윤리학적 중요성이 충분히 그려지지 않은 것은 그가 세상과 정치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엘룰은 말한다. 엘룰은 바르트가 칼빈주의자들이 신적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인간적 요소들을 제거해 버린 이후 인간을 다시 신학적 균등의 위치로 되돌려 놓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바르트에게서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두 가지 주된 사상은 인간의 자유와 우주적 구원이다. 
엘룰은 "유대적 사고와, 그 이후 그리스도인의 사고가 변증법적이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변증법은 결코 그리스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고 믿었다. 그는 단언하기를 "성서 본문은 그것을 모순, 위기, 그리고 위기의 역사적 해결로 가득 찬 조직망 속에 끼워 넣지 않고서는 결코 이해될 수 없다."고 했다. 또 "오직 변증법적 사고만이 영적 계시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항상 종합 명제, 단일한 해답, 독특하고 이상적인 설명을 찾아 단순한 차원으로 환원시키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이것이 지성적으로 불가능하며 영적으로 오류이고 구체적으로 위험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나는 본능적으로 모든 통합에 대해 반대한다. 유대의 하나님(엘로힘)은 복수이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역시 복수적이다. 이것으로 사상의 다수성과 모순을 용납해야 한다는 것을 보증한다." 
다니엘 클렌데닌은 쓰기를 "엘룰의 변증법적 방법에 대한 그의 헌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데 결코 더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필연과 자유Necessity and Freedom 

엘룰의 사상에 가득 차 있는 모든 것을 둘러쌓는(?) 변증법은 한 마디로 필연과 자유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타락한 세속 질서와 사회는 필연의 질서이다. 필연이란 운명이나 어떤 기계적 결정론과도 다른 말이다. 엘룰에 의하면 필연이란 이 세상의 '권세'와 죄에 의해 굴복된 인간의 노예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하기 전, 창조세계는 필연성의 총체적 부재(어디에도 필연성은 찾아볼 수 없는) 상태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 세계 속으로 자유스럽게 들어오실 수 있었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자유스러운 상태였다. 필연성의 기원은 타락에 있다. 즉 인간이 그의 자유, 하나님과의 자발적인 교제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필연적으로 그리고 엄격하게 그의 죄된 상태에 의해 영적으로 결정되면서 인간은 자유의 질서로부터 필연의 질서로 추락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라는 한 가지 공통점에 의해 단단히 묶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성은 영적이고 공간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이다. 모든 인간은 죄에 의해 갇혀 있다.(갈 3:22, 롬 3:9, 11:32) 
엘룰의 우주론적 전망은 현대 사회가 "이 세상의 주관자들"(cf. Jn. 12:31; 16:11), "이 세대의 신들"(고린도후서 4:4)의 영역에 살고 있다고 단정한다. exousai, archai, kratoi, stoicheion, kuriotetes, 그리고 dunameis와 같은 악마적 권세들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인간 사회의 제도들 속에 깊숙이 침투해서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사망으로 몰아넣고 있다. 사탄은 인간을 지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자살적 '죽음의 의지'로 이끌어간다. 또 인간을 파괴자에 의한 자기 파괴로 몰아간다. 1954년 이전의 돈과 권세에 관한 엘룰의 책들과 저술에서 엘룰은 인격화된 악마의 개념을 수용해 오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면서 그는 인격적 악마를 부인하고 세상의 모든 일 속에 존재하는 추상적 권세라는 의미로서의 새로운 악마"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과거의 미신적 잔재들과 구별된 이러한 적법한 우주적 실재들로서의 "권세들, 주권자들, 그리고 힘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엘룰은 자신을 헨드릭 벌콥, 마틴 헹겔, 오스카 쿨만, 칼 바르트, 그리고 G.B. 캐어드와 같은 신학자들의 노선에 위치시킨다. 
엘룰에 의하면 자연인은 자신이 투쟁하고 있는 곳에서 영적인 실재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전 2:14). 그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의 껍데기만 볼 뿐이다. 그리고 그는 기술적 방법을 사용하며 도덕적 표준들에 맞추어 일하고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한다. 현대 사회의 세계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그 영적 상태를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전무하다. 소위 "진보"라는 것이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면 질수록 엘룰은 인간의 해결책들이 하나씩 하나씩 실패로 끝나며 더욱더 어려움만 증가시키고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 세대에 있어서의 사회적 재앙은 우연히 생겨난 것이거나 "불운"때문이 아니다. 그러한 재앙들은 우리의 타락한 세상의 핵심적 필연성이 만들어낸 피할 수 없는 생산물이며 인간이 이 세상과 대처해서 잘못 인도된 실수들이다. 세상의 상황은 절망적이다. 현재의 우리들의 문제에 대한 치료책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노력은 무익하다. 거짓 해결책을 적용하려는 인간의 계속되는 노력은 그가 자신의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붕괴될 때까지 그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이 세상의 틀 속에 변화를 주거나 적절한 비판을 위해서는 타락한 세상의 질서 밖에서 참고점을 찾을 때만 가능하다. 엘룰은 질주하는 기차의 예를 든다. 그 기차의 속도는 기차 안에서 볼 수 있는 안정되고 고정된 기차의 바깥 지점을 참고할 때에만 알 수 있다. 반면에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그의 상대성 이론을 설명할 때 사용한 것과 같은 설명이다.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에서의 상수는 빛의 속도이다. 그 빛은 물질의 내파된 기원의 단일성으로부터 한쪽 방향으로 지향성 있게 인지된 것이다.(?) 사회 과학에서의 엘룰의 상수는 하나님의 초월적 빛의 행동이다.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인 생명의 성육신적 회복의 단일성으로부터 지향적으로 인식된다.(?) 이것은 분명하게 엘룰을 어떤 "분별력있는" 집단으로 승진시킨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폐쇄된 의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자 외부로부터"의 사회적 상황의 인식 능력은 그러한 평행의 것의 장점으로 보인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사회 문제를 규정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의 마음"(고전 2:16)으로 영적인 실재를 이해하기에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상황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복음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세상에 대해 "망대의 파수꾼"과 같이 그리스도인은 "틈을 막아" 설 수 있다. 자신을 사회의 자멸적 죽음의 의지가 팽배한 그곳에 위치시킴으로써, 사망의 한 복판에는 생명의 현존을, 필연성의 틀 안에는 자유의 기쁨을 나타냄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Technique 

엘룰이 어떻게 필연성이 현대 사회를 결정하고 지배하는가를 설명하는 가장 우선적인 설명은 "기술"이라는 방법에 공을 돌려야겠다. 그는 그의 생애를 통한 친구, 버나드 카보뉴가 1935년에 사회학적 인식의 가장 중요한 현상으로서의 "기술"에 자신의 관심을 이끌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칼 맑스가 이 사회학적 요소를 이해했다면 그는 분명 그의 사회적 변증법에 물질적 불평등보다는 "기술"을 위치시켰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많은 비평가들은 엘룰의 세상의 사회병을 "기술"로 진단하는 것에 대해 오해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엘룰이 기술을 공격하고 있다고 잘못 이해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번역으로 인해 영어권 독자들과 비평가들 가운데 이러한 인식이 있는 것은 이해할만한 현상이다. 예를 들어보자면 그의 영문으로 번역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학적 서적의 제목은 "기술 사회(기술의 역사:국역)"인데 불어로는 영어나 불어 모두 "기술, 세기의 화형주"이다. Technique은 Technology과 동의어가 아니다. 
엘룰이 제기하는 문제는 기술 세계의 기계들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대신에 효율적인 방법론적 기술들(techniques)에 붙잡혀 있는 사회의 문제이다. 즉 기계 기술(Technology)이란 기술(technoque)과 절차의 자동 결정성에 대한 의존성의 한 표현에 불과하며 그 부산물이다. 여기서 절차의 자동 결정성이란 모든 것이 가장 효율적으로 기능하도록 조작되고 만들어지는 경향을 말하며 최고의 생산성을 가진 가장 손쉬운 목표 달성을 지향하는 것이다. 엘룰 그의 기술에 대한 정의는 그의 책 "기술의 역사" 서문에서 볼 수 있다. : "기술(Technique)은 인간의 모든 활동의 영역에서 합리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 효율성을 갖는 방법의 총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엘룰에 따르면 기술은 필연적으로 인간의 타락에서 죄악으로 기능하게 된다. 그러나 기술(Technique)의 위치는 18세기에 극적으로 변화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 중에서 "가장 최선의 수단"으로서의 효율적인 과정을 찾으려는 필요에 의해서였다. 19세기까지 부르즈와들은 기술이 그들의 물질적 상업적 이익에 대한 열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산업화된 기술적인 기술의 채용은 도시화되고 기술적이 된 20세기의 사회에 있어서 괴물이 되어갔다. 엘룰이 말하는 그 세기의 stake(?) 효율성이 더이상 선택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 필연적인 문제가 되어 가는 사회에서 기술은 새로운 사회 질서의 궁극적인 가치이며 규정하는(결정적인) 힘이 되어 갔다. 기술은 현대 사회에서 보편적인 전제군주가 되어 가는데 이는 모든 것을 질적으로 보다는 양적으로 계산하고 조직하는 인위적인 가치 체계를 강요하는 합리적 절차주의(?)로써의 전제군주이다. 살아있는 생물체 속에 있는 암세포와 같이 기술의 체계화는 무든 현대의 기술적, 기계적 사회의 세포 속에 퍼져간다. 
이러한 기술의 침략적 방법론의 미묘한 환상은 사람들이 기술을 인류의 해방자로 본다는 것이며 조작적 도구는 그들을 자연적 기능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엘룰은 정확하게 반대로 말한다. "기술은 인간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그러면서도 기술은 인간들에게 순진한 자유의 환상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기술은 인간들을 인위적 조작 대상들의 복잡성을 지닌 기술 사회의 요구에 강제적으로 일치시키도록 만든다. 

선전Propaganda 

기술사회의 이러한 상태를 현대인으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하고 또 그러한 상태를 필연성이 아니라 자유라고 여기게 하도록 만드는 수단으로서는 선전을 채택하는 방법이 있다. 선전은 엘룰에 의하면 세뇌 과정에서 쓰는 단순한 거짓 루머가 아니다. 대신에 그것은 고도로 계산된 사회적 상황에 대한 설명체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설명이란 인간이 잘 조율된 사회에 적응되고 일치되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한다.선전은 이데올로기 조작이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만큼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이데올로기는 집단적인 조직체 내의 개인들을 대중적으로 참여케 하는 특정 반응과 행동을 야기시키기 위해 인간의 행동을 예상할 수 있고 규정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향을 미친다. 선전은 개인들에게 기술 사회의 신화들과 전제들을 받아들이도록 은밀하게 영향을 미친다. 선전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회와 역사의 큰 흐름 안에" 있다고 확신시키며, 또 그들이 새롭고 완벽한 사회,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다며 설득시킨다. 그것은 집단적인 바램의 "실짜기"며 매우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미리 만들어지고, 단순화된 여론을 제공한다. 또 선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프로그램된 생활들이 너무 억압적이다는 생각이 들이 않도록 하기에 그래서 자신들이 "어디론가 좋은 곳으로 가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술의 선한 은총에 복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노력에 부합되는 운명이 있다.? 사회 공학자들이 미리 결정된 주도적인 여론에 적응시키위해 사실을 각색하고 변경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이 피해야 할 한 가지는 개인의 의견이 이 주된 흐름에 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개인의 자유를 변경시켜 집단적 적응을 용이하게 하는 것이다. 
대중의 묵종이라는 총체적 환경은 출판, 라디오, TV와 같은 정보 대중 매체를 통해 잘 조율된다. 또 개인의 반성과 평가를 금하는 스포츠, 오락, 그리고 연예를 통해서도 조율된다. 그리고 특별히 교육의 훈련, 직업 훈련(vocational guidance),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신성시된 삶의 후견인 역할을 하는 대중적 관계들, 그밖에 행정적,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체제들을 통해서도 조율된다. 



정치학Politics 

현대 사회에서 기술을 선전하는 주된 방법 중 하나는 사람들을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특별히 민주주의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통치"로 믿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정치학은 사회 속의 개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자유롭다는(자유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역할을 한다. 대중의 참여, 국민에 의한 대중의 지배, 그리고 사회 문제의 집단적 문제-해결 등이라는 '정치적 환상'은 의미, 중요성, 효과, 그리고 안전을 추구하는 개인들의 욕구를 거짓으로 만족시켜준다. 그것들은 그 개인들로 하여금 자신들과 그 모든 것을 정치화된 국가와 기술화된 시스템에 넘겨줌으로써 그렇게 한다. 
모든 가치들이 정치적 형태로 만들어 지고 모든 희망이 정치적 해결을 지향하게 되며 또 현실화되기 직전에 와 있다고 믿어질 때, 정치학은 "우리 시대의 초월적 종교"가 된다. 모든 사회 문제들에 대해서 '문제 해결의 신화'를 선전해 대면서 말이다. 사실 정치학은 선과 악, 개인적 성격, 혹은 삶의 질과 의미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세속사화의 성화 
Sacralization of Secular Society 

엘룰의 가장 독특한 사회학적 해석 중 하나는 "기술"이라는 영적인 요소를 가정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현상의 배후에는 영적인 '권세'가 존재하는데 그 권세는 '성스럽다'는 의미와 함께 어떤 것이나 행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개인들이 그곳에서 그들의 '신앙, 희망, 그리고 사랑'을 발견하며 그들이 두렵다고 소리지르며, 사람들의 상상력력을 키워나가며 의미, 가치, 충만 그리고 풍요등을 제공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엘룰은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에 의해 성스럽게 인식되었던 자연을 탈신성화시켰으며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교회는 신성해졌다고 말한다. 개신교 종교개혁은 성서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탈신성화시켰는데 성서는 '신성한 책'이 되어갔다. 18세기 이후, 과학적, 기술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탈신성화 운동이 진행되었는데 이것은 현대 세속 종교에서 점차 신성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과거 어떠한 문명보다도 덜 종교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성스러움은 이 세속성에 부여되고 있다. 
종교적 신화는 더이상 조상들의 전통에 의해 전수되지 않는다. 대신에 선전에 의한 신성한 신화의 거짓 진술을 대중 매체로 선전함으로써 전수된다. 정치적 지도층의 사제들은 진보, 행복, 젊음의 신장 그리고 유토피아적 꿈을 설교한다. 그들은 역사와 과학이라는 쌍둥이 진리의 기둥에 호소하면서 그러한 역할을 감당한다. 역사는 모든 현재의 행동을 위한 기초로 얘기되며 과학은 미래 세계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가능케하는 수행자로 결혼한다. 이러한 정치적 사제들은 사람들을 그들의 신성해진 세계 속에 조화시키려고 하면서 그들은 세속화된 시스템의 절대적 권력과 가치에 헌신하도록 주입시킨다. 

도덕Morality 

모든 신성한 종교와 함께 현대 사회의 그 세속적이고 기술적인 종교에 들어매는 도덕적 기대들이 존재한다. 세속적 신성성은 기술 윤리를 발전시키는데 그 윤리란 훈련, 자기 조절, 충성, 헌신, 서약, 헌남, 책임감, 참여, 희생, 그리고 여러가지 어려운 일들을 요구한다. 선과 악은 성공과 실패라는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세속적 도덕성은 효과적인 수행을 위한 조직적 기술을 수용하고 복종하도록 요구한다. 또 '정상적인' 혹은 '도덕적인' 행동들, 즉 받아들일만한 덕이나 정치적 정확성이라는 집단적인 기준으로 융화시키는 행동들에 적응하라고 요구한다. 
엘룰은 설명하기를 모든 도덕성은 자신의 기원을 타락으로 야기된 필연성 안에서 찾으려 한다고 했다 - 사회적 의무, 책임, 규율, 그리고 억압의 필연성이다. 이러한 것들은 그가 주장하는 자유의 행동들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은 비판적 반성이나 어떠한 상황에 대한 결단력있는 반응들을 요구하지 않으며 대신에 사회적 관습에 짜여진 일치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도덕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또 강박적 명령이 아니라 지시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선이라는 표준에 대한 일치된 배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은 이상적인 서술이나 미리 성형된 시스템에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살아있는 응답이다. 이것이 그 말씀을 엘룰이 항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항상 독특하고 자발적이며 항상 그리스도의 영의 새로운 표현이다. 엘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우리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가 아니라 살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모든 개개인의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은 영적인 존재가 오늘날의 세계의 갈등과 사건 사고들 가운데 어떠한 식으로 행동하고 구체화되는 지에 대해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유의 성육신적 표현이지 도덕적 일치로의 복종이 아니다. 

자유Freedom 

우리는 자유와 필연성의 변증법의 반대편 지점에 와있다. 쟈크 엘룰은 "만일 내가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한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유이다"고 말했다. 또 "무엇이든 자유의 빛 안에서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그것을 행하지도, 경험하지도 그리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엘룰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강요하는 최고의 그리고 가장 높으신 신이 아니라 성서의 하나님은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오직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곧 승리자요 노예와 필연의 권세를 이기신 분을 통해서만 일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유의 핵심이다. "자유로, 그분은 율법을 지키기를 택하셨다. 자유로, 그분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택하셨다. 자유로, 그분은 성육신을 택하셨다. 그리고 자유로, 그분은 죽기를 택하셨다." 따라서 그분은 자유의 완벽한 근원이며 패러다임이시다. 하나님의 자유를 드러내심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유는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하나님의 임재로 형성된다. 
엘룰에게 자유는 언제나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유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자유는 진실로 한 개인의 행동이며 삶의 양식이다. 집단적인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간이나 인류를 해방시키신 것이 아니다." 자유가 개인적이라 할지라도 자유는 고립되거나 사적인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는 세상으로부터 후퇴하거나 물러나는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분리할 권리가 없다." 엘룰은 말하기를 "자유는 단순히 내적이거나 순수하게 '영적'인 체험이 아니다." "자유는 팔짱을 끼고 앉아서 하나님으로 일하시라고 내맡기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그리스도인 개인의 특별한 행동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표현이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매일의 삶의 자리를 이 세상 안에서 어느 특정한 사회-정치적 실재 위에 정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엘룰에 의하면 유일한 자유인데 이는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특별한 환경이나 상황과 항상 연관된다. 자유는 요트 선수가 자신이 가려는 항로로 순항하기 위해 바람이나 조류를 이용하는 기술과 유사하다. 요트 선수가 두려워하는 한 가지는 고요함이다. 그 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엘룰의 개념은 오직 필연성과 변증법적으로 긴장관계를 이루면서만 존재한다. 자유는 사물에 주어진 질서에 반하는 혁명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으며, 일치에 대한 거부, 세계의 효율적 대상물들에 대한 반항, 기술 사회의 환상과 신화에 대한 탈신화화, 그리고 세계가 자신의 신앙, 소망, 그리고 사랑을 던지는 거짓 우상에 대한 탈신성화로 정의내릴 수 있다. 자유는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한 개인의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특정 한계선을 넘어서는 행동을 통해서 표현된다. 그리스도인은 사회를 일으켜 새 바람을 쏘이게 하는 "효소"와 같다. 그들은 세계 속에 낯선 외부적 요소를 소개하는 "소금"이다. 그들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다. 그리고 그들은 "늑대들 속의 양"과 같다. 
세계의 힘이 제거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또 새롭고 완전한 질서가 이 세상에 나타나리라는 것을 기대할 수도 없다. 모순과 긴장은 아직 그대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죽음의 통치를 귀통이에서나마 저지하며 또 죽음의 통치가 인간을 압도하며 지배하는 것을 막는 반-긴장을 소개한다. 바로 이것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라고 하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모든 국면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산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행동한다.(?)" 혹은 바울이 설명한 것같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다 쓸모있는 것이 아니고 다 편리하지 않으며 건설적이지 않다."(고전 10:23) 미리 규정된 자유의 행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덕이다! 자유는 살아있으며 제한이 없다. 한계도 없고 강제도 없으며 훈계나 의무가 없다. 이것이 도덕 폐기론처럼 들리는가? 이것은 은혜다! 이것은 영적으로는 참신한 것이지만 심리적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덮개가 없는 위험과 같은 것이며 위험스러운 그물없는 써커스 곡예와 같은 것이다. 엘룰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은 자유하다. 당신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앞의 인간으로 부름을 받았다. 이제 무엇을 할지를 당신이 결정하라. 나는 해야할 실천규범을 불러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의적이거나 무규칙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의 끝이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지만 특별한 근원이나 방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항상 이웃을 위한 사랑으로 구성되며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한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께서는 절대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자유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다' - 이것은 그분의 성품이나 그분의 피조세계에 있어서 언제나 진리이다. 그렇지만 그분의 성품은 그리스도인 안에서 매우 광범위한 의견과 행동의 폭을 용인하신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전제정을 옹호할 수 있으며 또 다른 그리스도인은 공산주의자일 수 있다. 또 한 사람은 군국주의자가 될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이에 대한 반대론자일 수도 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성서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동안 다른 사람은 성서를 비신화화할 수도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의 표현으로 자신들의 선택을 시험해 보려는 한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가하다. 
노예를 소유한 그리스도인도 있었고 또 노예제를 반대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러한 것들을 허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또한 모든 인간의 평등을 강력하게 주장함을 통해서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혁명적으로 전복하기도 한다. 이것은 자유가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한 패러다임을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노예제는 정치적 선전 기술 내지는 교회적 선포를 이용하는 제도적 재조직이나 종교 캠페인과 같은 집단적인 대중 행동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노예제는 사회 제도로서의 노예제를 없애는 방향으로 점진적으로 이끌어가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보이지 않는 결정들과 행동들의 누적을 통해서 변화되는 것이다. 
한 개인의 특별한 상황 속에서 국지적으로 행동하는 것의 누적을 통해서 그리스도인 개개인들은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래서 엘룰은 조언한다. 거대한 그림을 보면서 "세계적으로 사고하라." 그러나 "국지적으로 행동하라". 이 행동은 필연성의 종노릇하는 세계 체제를 뿌리로부터 침식하는 혁명적 행동을 이끈다. 개인적, 국지적 행동은 집단적이고전제적인 사회에 대한 유일한 반명제(안티테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들의 게임의 법칙에 놀아나고 말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Freedom in Christ 

엘룰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계 속에 침투하신 것은 필연의 세계에 대한 유일한 대항인 자유의 최상의 행동이었음을 굳게 확신한다. 선천적으로 죄에 종노릇하며, 기술에 예속시키는 모든 체제로 흡수되는 타락한 인간은 외부로부터, 즉 초월적 '전적 타자'로부터 소개를 받지 않고서는 자유를 경험할 수 없다. 인간의 자유는 태어나면서 혹은 본성적으로 타고 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연의 법칙 속에서 발견될 수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끌어져 나온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에 의해 제안된 '그 자유'이다. 이것을 엘룰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단절(타락)을 보완하기 위해 건축한 인위적 체계 위로 무자비한 광선을 발하고 있다. 성육신은 인간의 역사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했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죽음과 부활 속에서 최고점에 도달한다. 예수의 "끝맺으신 일" 속에서 예수는 세계 속에서 활동하는 '권세들'을 이기신 자신의 승리를 완성하셨다.(골 2:14) 동시에 내적으로 교만, 이기주의, 자기 중심성('육체'에 대한 성서적 개념)에 대한 노예제에 대해서도 승리하셨다. 따라서 예수는 우리를 농노릇하게 하는 객관적/외부적인 요인들과 주관적/내부적인 모든 요인들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이 말은 세계의 권세들과 '육적인 것들'이 제거되었다거나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남아있으며 자유를 연습하도록 하기 위해서 항구적 긴장의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성은 종말에야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 외부적 권세들과 내적인 경향들이 완전히 말소될 것이다. 



교회의 역할The Role of the Church 

엘룰의 교회에 대한 글들은 교회주의의 제도적 조직에는 거의 부합되지 않는다. 이 제도적 조직은 대부분의 그의 글에서 기술이라는 세상적 표현의 재현이라고 단정해 왔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 그가 "교회는 사회학적 실체 속에 성육신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책임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는 참으로 개인적 그리스도인의 복수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의 집단적 행동은 항상 그리스도인의 개인적 자유를 반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설립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고 말한다. 사실 180도 딴판이라 해야 할 것이다. 칼 바르트를 따라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모든 형태의 종교와 반대 위치에 놓는다. 종교는 타락한 세상의 필연성의 한 부분으로서 "자연적 현상"이다. 이것은 순전히 사회를 통합하고 사회에 의미와 안전을 보장하려는 사회학적, 심리학적, 자연적 기능에 봉사하는 것이다. 종교는 정적 순응주의를 요구하며 관료적 기계를 양상하면서 명백하게 사람들을 노예로 전락시킨다. 교회는 사람들을 자유케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사람들을 족쇄로 채우며 그들을 부숴뜨려왔다. 역사적으로 자유의 적으로서 그리고 필연성, 억압, 그리고 편견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신적인 '전적 타자'가 인간의 상황 속으로 역동적인 간섭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 데 이는 정확히 종교의 반대의 모습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리스도의 계시를 그리스도의 종교로 변형시켜왔다. 그리스도의 실재를 모든 종교들의 사회학적 기능들로 만들어버으면서 말이다. 엘룰에 의하면 기독교주의의 계시와 믿음의 변형, 즉 불어로 "기독교(Christianity)"라고 부르는 것은 언제나 있어왔다. 하지만 최근의 것은 이전의 어떤 것보다 더 심각한 데 이는 '기술'이라는 방법때문이다. 기술은 그리스도의 계시를 근본주의적 신앙체계로, 단순히 신비주의적인 내적 영성으로, 주관적 영혼 구원의 문제로 격감시키면서 시대에 뒤처진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것들은 계시와 반대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기독교 신앙을 공허한 실존적인 주관주의로 텅비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관주의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의 계시의 성육신적 표현과 모순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적 기독교는 현대적인 것이 되려고 애를 쓰면서 세속적 기술적 사회를 포용하려 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정치적 조직체로 적응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중적 선포를 하거나 이단적인 혹은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문제에 집단 행동으로 동참하는 것과 같은 선전 기술의 수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교회의 쇠퇴는 내게 다행으로 보인다."고 엘룰은 말한다. "이는 교회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정말로 교회에 속해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교회와 성서에 대한 언급을 하는것은 더 이상 유용하지 못하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로 위험과 불안과 모순속에 살면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전제와 모든 생명들을 위협하는 파괴적인 자유 가운데 행동하게 한다. 기독교도들은 파괴적인 우상숭배자로 신성시되는 기술주의의 우상들을 파괴하고 부수기를 시작했다. 
기독교인은 사회가 '진보, 발견, 사실, 결론, 성공, 현실, 등'으로 부르는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도록 부름받았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사회의 사회, 정치적 문제들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지만 그곳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희망에서가 아니라 단순히 견딜만한 것으로 만드려는 희망에서 해야 한다.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대립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대립을 파괴하기 위해서이다. 또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세상이라는 맥락속에 선포되어져서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게 하기 위해서이다. 기독교인들은 전체주의적 사회의 가장자리에 살면서 단순히 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체를 통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들은 세상속에 있지만 세상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시민들이며, 그 왕으로부터 생각과 판단과 감정들을 받는다. 그들은 이 땅에 그 나라를 대신하여 보내진 대사들이다. 그들은 모든 다른 현현들이 근거로 하고 있는 한 현현의 증인들이다. 이 현현은 역사적으로 일어났으며 모든 다른 현현들의 집합이며 보증이며, 절대 파기될수 없는 역사와 삶을 표현한다. 이 현현은 인간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개입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 현현은 살아있는 인간 예수로 나타나며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자신을 성육신 하신 것이다." 
성육신하신 본체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적 행동을 위한 규정된 절차(기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자원하는 삶이 있을 뿐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사는 것이지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오직 실용주의적 행동을 바랄뿐이고, 사람에 대한 바램은 없다. 우리는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의 중요성을 과장할 수 없다. 이 삶은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성령의 나타나심이고, 우리의 말과 습관과 결정들을 통해 우리의 실제 삶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행동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으로 가득할때만 효과적이다. 만일 무언가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Universalism보편구원론 

엘룰은 사회학과 신학의 상호관련 안에서 이것을 인정했는데, 그는 신학적 낙관론자인 동시에 사회학적 비관론자인것처럼 보인다. 때때로 그는 "내가 비관론자인가? 절대 아니다. 나는 인류의 역사가 얼마나 비극적이든 상관없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갈 것임을 확신한다. 나는 인류의 모든 자업들이 하나님의 일 안에 재 통합되어질 것을 또한 믿는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우리가 얼마나 죄악으로 가득한지 상관없이 궁극적으로는 구원받을 것을 믿는다." 이것으 물론 '보편적 구원' 혹은 '보편적 화해'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명확하게 진술하고 있다. 
이 교의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엘룰은 다음과 같이 썼다. "구원은 보편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것을 덮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아무것도 하나님의 사랑 밖에 있지 않다. 지옥과 같은 곳도 그래서 생각할 수 없다.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차이는 구원이아니다. 구원은 은혜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하나님에 의해 특별한 사명을 받은 사람들일 뿐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뜻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에 도전을 준다는 뜻이다."어느 곳에서나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 아들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주신 분이 몇 사람들에게 악과 저주를 맏도록 하셨다는 것은 새악ㄱ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는 오직 한가지 구원의 예정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사람들은 구원받도록 예정되었다. 우리의 자유 선택은 이 점에서 제외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최후의 결정적 결정에 관계된 것만 제외하고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신다. 우리는 저주받기로 결정하고 선택할 자유가 없다." 구원받고 안 받고는 우리 자신의 결정에 달려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고백하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은 항상 모든 사람에게 은혜로 주어진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포함되어 있다. 은혜의 신학은 보편 구원을 의미한다." 

결론Conclusion 

엘룰의 신학적 도식과 사회학적 진단에 동의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한가지 인정해야 할 것은 엘룰의 업적의 정도이다. 그는 법과 사회, 역사, 신학, 성서주해를 통합하고 있다. 그리고 인정하든 안하든 기독교인이 자신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드넓은 세상이라는 맥락에 대한 넓고도 포괄적인 분석을 하고 있는 철학도 이에 포함된다. 
내 개인 관점에서 세상 조직의 타락한 사회적 필요들에 대한 분명한 통찰을 가졌던 이가 기독교 역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독교인의 의무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상의 포괄적인 언급을 한 작가나 사상가를 생각해낼 수 없다. 
하지만 엘룰은 난해하다. 만일 누군가가 엘룰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면 그는 미끄러운 장어처럼 다른 한쪽을 붙잡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책을 저술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내가 믿기로 엘룰은 자신이 믿는 바를 정교히 써내려가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고 인정했다. 그가 믿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보다 쉬웠다. "내가 믿지 않는 것은 분명하고 정확하다. 내가 믿는 것은 복잡하고, 산만하고, 이론적이다."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엘룰 사상의 약점이 될 수 있는가? 그는 사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부정함으로써 주장하는가? 
하지만 엘룰은 난해하다. 만일 누군가가 엘룰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면 그는 미끄러운 장어처럼 다른 한쪽을 붙잡고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책을 저술하도록 요청받았을 때, 내가 믿기로 엘룰은 자신이 믿는 바를 정교히 써내려가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고 인정했다. 그가 믿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보다 쉬웠다. "내가 믿지 않는 것은 분명하고 정확하다. 내가 믿는 것은 복잡하고, 산만하고, 이론적이다."라고 그는 고백하고 있다. 이것이 엘룰 사상의 약점이 될 수 있는가? 그는 사적으로 정의를 내리고 부정함으로써 주장하는가? 


Some questions that might be posed in reference to Ellul's thought and writing: 
엘룰의 사상과 저서에 대해 제기되는 질문들 

· Does Ellul's emphasis on individual Christian action diminish the importance of the collective Body of Christ, the Church? 
개별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한 엘룰의 강조는 전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중요성을 축소시키는 것은 아닌가? 

· Does Ellul make liberation and freedom the all-encompassing criteria of the Christian life, to the neglect of other soteriological concepts? 
엘룰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반을 포괄하는 범주로 여기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다른 조직신학적 개념은 무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Do Ellul's views of freedom and universalism create a static rather than dynamic understanding of salvation? 
엘룰의 자유와 보편구원론의 관점은 구원에 관한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정적인 개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가? 

· Does Ellul's exclusive reference to the "powers" of necessity, fail to take into account the Power of God? 
엘룰이 필연의 '권세'에 대해 쓰고 있는 독단적인 여러 글들은 하나님의 권세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 If freedom is defined only in tension with necessity, does such an existential definition of freedom diminish or deny the objectivity of freedom in Christ? 
만일 자유가 오직 필연성과의 긴장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다면 그러한 자유에 대한 실존주의적 정의가 혹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의 객관성을 약화시키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닌가? 

· Does Ellul's denial of a personal devil arbitrarily disallow the contradiction or dialectic of God and Satan? 
인격적인 마귀에 대한 엘룰의 거부는 하나님과 사탄 사이의 대립 혹은 변증법을 자의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 Does Ellul's repudiation of the destiny of hell arbitrarily disallow the contradiction or dialectic of heaven and hell? 
지옥의 형벌에 대한 엘룰의 거부는 천국과 지옥의 대립 혹은 변증법을 자의적으로 없애버린 것은 아닌가? 

· Does Ellul's universalism impinge upon his dialectic of necessary collective universalism in the world vs. individual freedom in Christ? 
엘룰의 보편구원론은 그가 말하는 이 세상의 집단적 전체주의와 그리스도안의 개인적 자유 사이의 변증법과 모순되는 것은 아닌가? 

· Does a universal necessity of destiny in Christ, in contrast to a universal necessity of determinants in the world, create a dualism that in effect negates Ellul's entire method of dialectic? 
그리스도 안에서의 운명의 보편적 필요성은 세상의 결정론자들의 보편적 필요성과 반대되는데 이러한 반대는 엘룰의 총체적 방법론으로서의 변증법을 거부하는 이원론을 만드는 것 같지 않는가? 

· Does Ellul's universalism make him liable to the charge of his spiritual mentor, Kierkegaard, that of "doing away with Christianity by making all people, in the final outcome, Christian"? 
엘룰의 보편구원론은 그를 자신의 영적 스승, 키에르케골이 "모든 사람들을 결국에는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기독교를 제거한다"고 말한 것의 부담에 책임있게 하지는 않는가????...??? 


참고서적BIBLIOGRAPHY 

Primary Sources: 

Ellul, Jacques, Anarchy and Christian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91. 
, Apocalypse: The Book of Revelation. New York: Seabury Press. 1977. 
, Autopsy of Revolution. New York: Alfred A. Knopf. 1971. 
, The Betrayal of the West. New York: Seabury Press. 1978. 
, A Critique of the New Commonplaces. New York: Alfred A. Knopf. 1968 
, The Ethics of Freedom.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76. 
, False Presence of the Kingdom. New York: Seabury Press. 1972. 
, Hope in Time of Abandonment. New York: Seabury Press. 1973. 
, The Humiliation of the Word.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85. 
, In Season, Out of Season: An Introduction to the Thought of Jacques Ellul.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82. 
, Jesus and Marx: From Gospel to Ideolog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88. 
, The Judgment of Jonah.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71. 
, Living Faith: Belief and Doubt in a Perilous World. San Francisco: Harper and Row. 1983. 
, The Meaning of the C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70. 
, Money and Power.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84. 
, The New Demons. New York: Seabury Press. 1975. 
, Perspectives on Our Age: Jacques Ellul Speaks on His Life and Work. New York: Seabury 
Press. 1981. 
, The Political Illusion. New York: Random House. 1967. 
, The Politics of God and the Politics of Man.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72. 
, Prayer and Modern Man. New York: Seabury Press. 1970. 
, The Presence of the Kingdom.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 1951. 
, Propaganda: The Formation of Men's Attitudes. New York: Alfred A. Knopf. 1968. 
, Reason for Being: A Meditation on Ecclesiastes.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90. 
, Sources and Trajectories: Eight Early Articles by Jacques Ellul That Set the Stag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97. 
, The Subversion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86. 
, The Technological Bluff.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90. 
, The Technological Society. New York: Random House. 1964. 
, The Technological System. New York: Continuum Publishing. 1980. 
,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Law. New York: Seabury Press. 1969. 
, To Will and to Do: An Ethical Research for Christians. Philadelphia: Pilgrim Press. 1969. 
, Violence: Reflections from a Christian Perspective. New York: Seabury Press. 1969. 
, What I Believ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 Co. 1989. 

Secondary Sources: 

Christians, Clifford G. and Van Hook, Jay M. (editors), Jacques Ellul: Interpretive Essays.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1981. 
Clendenin, Daniel B., Theological Method in Jacques Ellul. Lanham: University Press of America. 
1987. 
Fasching, Darrell J., The Thought of Jacques Ellul: A Systematic Exposition. New York: Edwin 
Mellen Press. 1981. 
Gill, David W., The Word of God in the Ethics of Jacques Ellul. Metuchen: The American 
Theological Library Association. 1984. 
Holloway, James Y. (ed.), Introducing Jacques Ellul.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0. 
Lovekin, David, Technique, Discourse, and Consciousness: An Introduction to the Philosophy of 
Jacques Ellul. London: Associated University Presses. 1991. 
Troude-Chastenet, Patrick, Jacques Ellul on Religion, Technology, and Politics: Conversations 
with Patrick Troude-Chastenet. Atlanta: Scholars Press. 1988. 

Prev: 위의 자료를 번역한 글을 소개합니다. 
Next: Bibliography of Jacques Ellul`s Books 

쟈크 엘룰 생애와 사상

2018-07-20 22:35:39


들어가는 말 

 

 

쟈크 엘룰은 1912년 보르도 출생하였고, 1936-1939년 사이에 프랑스 정계에 투신하여 활동했다. 1940-1944년에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열렬히 가담하였으며, 1953년부터 프랑스 개혁교회 총회 임원으로 활동했다. 법학 박사인 그는 수많은 책을 저술하여 사회학자, 신학자, 철학자로서 널리 알려졌다. 그는 보르도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근무하였으며 <신앙과 삶>의 편집 주간으로 최근까지 활동하다가 은퇴하였다. 

 

1. 쟈크 엘룰의 생애 

 

1) 청년 시기의 엘룰(1912-1936) 

 

쟈크 엘룰은 1912년 1월 6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 태어났다. 어머니(Marthe Mendes)는 개신교 프랑스인이었으나 부친(Joseph Ellul)은 이탈리아계의 세르비아 귀족 출신으로 그리스 정교회 신자였다. 어린 시절의 매우 부유한 생활에 젖어 있던 부친이 프랑스에서 극도로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사실은 독자였던 어린 쟈크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보냈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행복했던 추억을 갖고 있다. 어머니는 미술 강사로서 생계를 꾸몄고 아버지는 1929년이래 실직 상태였다. 엘룰은 16세부터 어학(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프랑스어) 교습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고 때로는 가족 부양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는 1928년 보르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에는 보르도 법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법학을 한 것은 부친의 요구가 일차적이었고, 또 스스로도 법학이 직업을 얻어 줄 수 있는 학문이며 비교적 공부 기간도 짧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그에게 영향을 준 책은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성경이었다. 그는 1930년 <자본론>을 읽고 하나의 세계관에 접했다. 이것은 당시 그의 가정이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5개국어에 능통한 아버지가 실직한 채 직장을 찾아 헤매는 것이 매우 부당하게 여겨졌다. 그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자본론>을 읽었고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느꼈다. 나는 결국 왜 나의 부친이 직업을 잃었는지, 왜 우리가 헐벗었는지를 알았다고 느꼈다." 또한 마르크스는 1930년 당대에 정치적으로 일고 있는 상황(파시즘과 나치즘)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는 소위 마르크스주의자들(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했으나 이내 실망했고 마르크스와 그 추종자들 사이에 있는 괴리를 보았다. 그는 공산당과 결별하고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특히 삶과 죽음, 그리고 사랑이라는 실존적인 문제였다. 그는 성경을 통해-삶의 다른 수준에서-마르크스의 사회에 대한 설명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는 1932년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했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회심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두 가지 것만을 말한다. 하나는 '돌발적인 회심'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회심'이 아니라는 것이다(이 말은 자신에게 찾아온 계시에서 도피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그가 회심을 말하는 대목에서 파스칼을 언급하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이때부터 그는 성경과 자본론 사이에서, 예수와 마르크스 사이에서 갈등과 대립을 느껴야 했다. 그는 자신이 마르크스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마르크스가 사회에 대해 말하고 경제와 세상의 불의에 대해 설명한 것들을 왜 포기해야만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이제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것들을 거부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종합이 불가능하다고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세상에 대한 설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마르크스의 사상을 매우 진지하게 취하는 한, 마르크스가 하나님에 대한 문제 제기를 무용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한, 그리고 경제적 정치적 영역 외에 다른 모든 영역을 거부하는 한, 나는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게다가 나는 경제적 정치적 영역에서 기독교의 체계화가 결코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 엘룰은 프랑스 개혁 교회에 몸을 담고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었다. 얼마 동안 그는 칼빈의 사상에 몰두했으나 점차 키에르케고르와 칼 바르트에게로 넘어갔다. 비록 그가 칼빈과 같은 회심의 급진주의를 공유했지만 점차 칼빈 신학에게서 폐쇄성과 배타성을 느끼게 되었고, 칼빈과 같은 분석적 사상에 공감하면서도 해석의 다양성을 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칼빈에게서 떼어놓게 된 것은 아마도 칼빈의 세계관이 마르크스의 세계관과 충돌하기 때문이었다. "가장 불편했던 것은 서로 똑같이 배타적이고 전체적인 두 사상가 앞에 직면해야 했던 사실이다. 그런데 나는 둘 중 누구도 놓아 버릴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내 사상의 발전은 변증법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르트는 엘룰의 지적 삶에 있어 마르크스 이후, 칼빈을 밀어내면서 두 번째로 큰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듯이 바르티안도 아니다. 이러는 사이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비극의 시대가 도래하면서(1934.2.6.) 엘룰은 정치에 입문하였다. 

엘룰과 그의 일생의 친구인 Bernard Charbonneau는 1930년대에 인격주의 운동에 매료되었다. 둘 다 Esprit지(誌)를 창간하면서 주창자였던 무니에(Emmanuel Mounier)와 함께 일했다. 정치적으로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고 정치적 모순을 극복하려 한 이 운동은 19세기 부르주아지에 깊이 얽매인 개인주의를 거부하고, 또한 집단주의도 거부했다. 인간을 경제적 존재일 뿐만 아니라 영적 존재를 의미하는 인격으로 보고, 사회는 마땅히 이런 개성을 발전시키고 소외를 막는 쪽으로 짜여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사람은 공동체에 속할 때에만 인격이 될 수 있다. 엘룰은 이 운동의 공동체와 집단체의 대립, 가까운 관계 그룹과 먼 관계 그룹 사이의 대립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사회 변화를 이룩함에 있어 신학과 전략의 차이는 엘룰로 하여금 1937년 이 운동과 결별하게 했다. 혁명적 영향을 갖는 운동을 형성할 것인가 아니면 지식인들 사이에 배포되는 기관지만을 가질 것인가의 딜레마에서 엘룰의 행동적 성향은 무니에의 반발을 샀다. 

 

2) 전쟁의 시기(1937-1947) 

1937년 스페인 내란에 참여한 뒤, 엘룰은 영국 국적의 화란 태생인 Yvette Zensvelt와 결혼한다. 엘룰은 Montpellier에서 1년간 법학을 강의한 뒤 1938년 Strasbourg로 이적한다. 전쟁으로 인해 1939년 교수들과 학생들이 Clermont-Ferrand으로 자리를 옮겼고, 엘룰은 페텡(Marshal Petain)에게 공개적인 반대를 함으로써 1940년 Vichy 정부에 의해 해고당했다. 그것은 패전 중에 알자스 학생들 편에 서서 페텡의 말을 믿지 말고 알자스로 돌아가지 말라고 말한 데서 비롯되었다. 만일 돌아가면 독일 군대에게 차출될 것이라고 5-60명의 학생들 앞에서 말했고 누군가가 그것을 경찰에게 보고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의 부친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이었다. 그 결과로 그는 보르도 근처의 Martres에 살던 가족에게로 돌아와 농부로 살면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이 운동에 가담한 이유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설명한다. 자신은 해고당하고, 부친은 체포되었으며, 부인 역시 체포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엘룰은 maquis(레지스탕스의 한 운동)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지도자 없이 버려진 개신교 교회를 발견하고 이 개신교 농부들을 목양했으며 1943년엔 정규 예배를 이끌게 되었다. 그는 전쟁 기간 동안 신학을 공부했는데, 1943년 그가 법학 교수 자격증 획득을 위해 제출한 논문 제목이 신학과 맞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부터 엘룰은 보르도 법대에서 비공식적으로 다시 강의를 했다. 

해방 후 그는 보르도 시의회에 임명되었고 부시장으로 특히 무역과 공공 사역에서 활동했다. 그의 관심은 새로운 사회 경제적 조직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현실은 그의 확신을 흐리게 했다. 그는 1947년 이 직분의 환멸을 느끼고 정치를 떠났다. 

 

3) 강단의 시기(1947-1980) 

엘룰은 본격적으로 대학교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강의했던 보르도 대학(1943-1980)과 보르도 정치학 연구소(1947-1980) 시절, 엘룰은 그의 전공과목들인 로마법, 제도의 역사와 사회학,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선전, 기술 사회 등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논문을 지도했고 적극적으로 학생들과 연루되었는데, 특히 1968년 학생 소요때 그는 중재자로 개입했다. 

엘룰은 1945년에서 1955년까지 보르도에서 영화 클럽을 지도하면서 선정된 영화의 주제에 대해 토론을 이끌어 갔다. 1968년 이후 그는 환경 운동에 개입해 왔고, 특히 <아키텐 해안 보호 위원회> 회장으로 있는 기간동안 그는 정부의 개발 계획으로부터 보르도 근처 해안 지역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들에 적극 참여했다. 

 

4) 은퇴 후(1980- ) 

1980년 은퇴한 후, 엘룰은 글쓰기와 논문 지도(명예교수로서)에 전력했다. 그는 계속 교수 강연회에 참석하고, 특히 보르도 지역에서 자주 공개강좌를 연다. 그는 정기적인 성경 그룹을 인도하며 한 달에 한두번 설교한다. 

 

2. 엘룰의 사상 

엘룰의 책들은 사회학적이고 신학적인 두 범주로 나뉘도록 의도되었다. 마르크스 입장에 영향을 받은 사회학적 작품들은 현대사회의 삶의 형태를 지배하는 원리들을 관통한다. 먼저 칼빈에게서 이어서 칼 바르트와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나타내는 신학 작품들은 현대 세계에 대한 성경 계시의 도전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엘룰은 조직신학자는 아니다. 그는 전통적인 교리적 문제들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앙의 윤리적 중요성에 그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1) 성경 계시의 중심 축- 예수 그리스도 

엘룰은 조직신학자가 아니다. 그는 결코 철학적으로 논증된 신앙 내용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복잡한 신학 방법을 전개시키지 않는다. 

엘룰의 신학적 탐구는 -그 자신의 확언에 의하면- 성경 계시에 근거하고 있다. 그의 대부분의 신학적 연구들은 성경 본문들에 대한 직접적인 주해이다. 본문을 둘러싸고 구성되며 또 본문들을 유기적인 전체성(an organic totality)으로 함께 끌어당기는 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이다. 또한 엘룰이 신구약 성경을 철저한 기독교문서로서 그리고 신앙의 이해를 가능케 하는 유일한 자료로서 사용하는 것은 고전적인 개신교 원리인 '오직 성경'의 표이다. 이처럼 그의 신학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동시에 성경적이다. 

이런 시작에서 출발하여 그의 신학은 개혁파 기독교의 전통적인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곧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역사 속의 죄의 힘과 견고함, 그리고 역사를 넘어서나 역사를 포함하는 새 창조(새 예루살렘)에 대한 소망의 존재이다. 그런데 각각의 경우 주제가 의도되어 있고 그 주제는 현대 세계에 대한 심판이다. 

 

2) 도시의 의미 

엘룰은 그의 저서 <도시의 의미>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연구하는 가운데, 새 예루살렘이 도래할 때까지 도시(현대 세계에서는 '기술'과 동의어임)는 하나님에 대한 인류의 반역의 상징이요 실재라고 주장한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 최초의 도시를 세웠다. 그에게 있어서 도시는 대응 창조(countercreation)로서,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안전 장소를 찾으려는 노력이다. 

도시의 참된 특징은 성경을 통한 바벨론(이해와 교제의 장소가 부족한 곳)이란 이름으로 예표된다. 그렇지만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그 거주민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 내적 정신인 도시 전체에 대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를 통해서 모든 도시들의 정신은 그 자체의 자율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도시는 그 자체를 다른 도시들과 분리시킨다. 도시들은, 민족들과 문명국들처럼, 그 자신의 삶을 경영한다. 한 도시는 하나의 폐쇄된 세계이다. 더욱이 상업과 강압으로 다뤄질 경우, 도시는 인간관계들을 파괴한다. 

그렇다고 도시가 전적으로 소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비록 소돔은 파괴되지만, 니느웨는 회개하여 구원받는다. 그러나 그 구원은 도시를 손안에 사로잡고 있는 영적 권세를 넘어뜨리는데 달려 있다. 한편 예루살렘은 특별한 경우이다. 다른 도시들처럼 이것도 대응 창조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 거하시기로 결정하셨다. 하나님은 - 비록 그가 도시를 저주하셨지만 - 저주의 고통을 인정하며 그 도시가 소망 없이 있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도시에 대한 성경적 평가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영은 도시의 영적 권세들을 정복하고, 궁극의 도시인 새 예루살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그때까지 도시는 소외의 장소이다. 전체로서 도시는 도시에 의존하며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노예로 삼는다. 도시는 도시의 일원들로 하여금 도시의 이익에 봉사하게 하는 필연의 질서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도시는 인간의 존재가 완전히 계속되기 위해서 보존의 질서에 속한다. 도시 없이 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도시는 변증법적 성격을 갖는다. 도시는 파괴하나 또한 유지한다. 

 

3) 소망 

엘룰에 따르면, 도시가 기술 문명인 현대 세계는 인간 생활의 발전에 있어서 독특한 시기이다. 이것은 포기의 시대다.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우리는 밤의 적막 속에 살고 있다. 우리 시대의 위기는 소망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는 그 기원과 목적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기술 세계에서 살아야만 하는데, 교회는 무익한 장소이다. 주권적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소망은 특별한 의미를 담당한다. 소망은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도전이며, 불가능한 것에 대한 열정이다. 소망은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반박 청구이며, 언약 신학의 표현이다. 소망은 실제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간섭하도록 자극하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소망이 없는 시대 속에서 소망을 갖는 그 자체는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응 실재이기 때문이다. 

엘룰의 해석에 의하면, 이 세상의 질서 안에 있는 대응 실재로서의 기독교 소망은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이다. 계시록의 첫 부분에서, 교회는 단순히 사회적인 현상이 아니라 역사를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중재로 묘사된다.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서, 새 창조는 원창조에서 급진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된다. 원 창조는 동산이었지만, 가인은 그것과 매우 다른 '도시'를 건설하였다. 비록 하나님은 자율적인 힘으로서의 도시를 저주했지만, 그는 역사를 모두 폐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가 침묵하실 때에도, 역사 투쟁의 현장에 있었다. 새 창조에서 하나님은 도시를 보존하되, 그 성격과 방향을 바꿀 것이다. 반역의 작품이었던 것이 화해의 작품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파괴적인 동시에 재건적이다. 하지만 새 도시에서는 교회도 정치적 권위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고 끊임없이 실현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자유 : 기독교적 삶의 형태 

이 세상과 새 예루살렘의 중간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의 태도를 창조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태도는 지상의 도시에 거는 기대에 불화하는 태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구현해야 한다. 

 

기독교 윤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격 묘사이다. 그 출발점은 개인이지 사회 구조가 아니다. 창조적인 갱신의 가능성은 단지 개인에 머문다. 이 세상의 권력들과 새 창조의 가능성 사이의 투쟁점에 위치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태도는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것은 현 질서의 필연성에 대한 책임감을 내포하는 것이지만 한편 하나님나라의 반대 질서를 나타내려는 의도이다.(->그리스도인은 필연성이 지배하는 현질서를 보존해야 하는 책임과 동시에 현질서가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질서임을 드러내야 하는 책임을 이중적으로 짊어지고 있다. : Caleb 주)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이원론적이자 동시에 혁명적이다. 비록 그들이 두 도시(세상의 도시와 하나님 나라 : Caleb 주)에 속하지만, 그들의 궁극적인 신실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것이다. 

엘룰에 따르면, 기독교적 삶의 형태의 근본적인 특색으로서의 자유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자의로 명백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에게만 열려 있는 그 자유는 양면성을 지닌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유는 필요(‘necessity’는 엘룰이 이 세상 질서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자유’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필연’ 혹은 ‘종속’이라는 의미로 번역됨이 타당하다 : Caleb 주)의 질서로부터와 이 세상 권력들의 노예상태로부터의 해방이다. 엘룰은 일상 생활의 환경을 구성하는 제도적인 구조들(정치적 경제적 기술적 구조들)과 체계적인 전체성으로의 구조에 노예화된 사람들을 붙들어 매는 힘과를 구분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통해서, 이러한 힘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제도들 속에서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제도들은 더이상 우리 삶의 성격을 결정하거나 혹은 우리 행동의 필요성을 명령하지 못한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유는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 사랑의 모든 생각에 종속된다. 나와 너 사이의 잃어버린 교제의 회복으로서의 사랑은 특별한 사람들의 특이성에게 제기된다. 그 방향이 이웃의 필요에로 향한다는 점에서, 사랑은 개인주의적이고 특수주의적이다. 

 

5) 기도 

엘룰의 저서 <기도와 현대인>은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장에서 엘룰은 기도해야 하는 유일한 이유를 다루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의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는 바로 인간 최대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5장은 기도가 전투임을 말한다. 기도는 자신의 본성과 싸우는 전투이다. 기도는 소망의 행위이며 종말론적 행위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또한 사회참여 행위이며 역사를 만들어 가는 행위이다. 

기도는 기도하기 싫어하는 본능과의 싸움이다. 기도는 소비사회의 인생관과 가치관과의 싸움이다. 기도는 종교적인 것들과의 싸움이다. 기도는 비종교적인 기독교를 세우는 행위이다. 이단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시지 못하게 만드는 요구이다. 기도를(->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싸움이라고 할 수 없다. 모든 기도는 다 반드시 종말론적이다. 기도는 우리를 이 시대의 끝에다 심어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임하게 만드는 행위이기도 하다. 기도에는 행동이 뒤따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것은 기도이다. 행동이 기도의 시금석이 아니라 기도가 행동의 시금석이다. 

엘룰은 기도가 본능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기도가 본능과 거스려 싸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기도가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필연적으로 자신의 본성과 세상과 악과 싸우는 전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다. "기도는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하여 기도가 불가능한 자신과 싸우는 싸움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6) 그리스도인과 돈 

엘룰에 의하면, "일상생활에서는 돈이라는 용어가(->는) 경제학적인 용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돈을 소유한다'는 말은 "지출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이 더 강하다. "돈을 벌고 쓰는 일은 개인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경제작용이라고 하는 복잡한 구조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하나님이냐 돈이냐, 15쪽). 

엘룰은 돈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무엇보다도 돈의 유혹을 물리치는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쟈크 엘룰에 의하면, 아동교육에 있어서 돈 문제는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에 대한 교육은 매우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 어린아이가 학교에 갈 무렵이면 벌써 돈 문제에 부딪친다. 그는 아직 돈의 의미는 모르지만 그 유용성과 위력은 빨리 감지한다. 그는 아직 돈을 소유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지만 그 사용법에 대해서는 이미 감을 잡는다. 그리고 부모들의 태도로부터 돈의 중요성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단계적으로 돈의 필요성과 거기에 수반되는 악을 동시에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돈의 필요성과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해야 하며, 돈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 등을 쉽게 이해할 것이며 빨리 거기에 익숙해질 것이다. 반면에, 돈에 대한 교육을 단계적으로 받은 아이는 돈이 수반하는 악을 많이 줄일 수 있다."(같은 책, 154쪽) 

엘룰에 의하면,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을 보고 배우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도 아이들에게 교육의 자료로서 가르쳐야 한다. 서로 많이 소유하려는 경쟁심, 사회적 불평등, 도둑질과 파업 등 사회 전반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잘 설명해 주면 아이들은 돈의 현실과 동시에 돈의 위험도 알게 된다. 사람들이 돈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까지 희생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되, 돈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돈을 신뢰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엘룰에 의하면, "돈을 사용하는 어린아이는 그 돈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그것이 위험이다. 아이는 많은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알고, 자기 가족이 부유하면 그렇지 못한 친구들을 놀리는 일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그때 가난한 집 아이들은 야욕과 원한을 품게 된다. 비싼 차를 더 좋아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것을 갖지 못한 아이들은 자기 부모를 경멸하게 된다." (같은 책,158쪽) 

돈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가르치는 교육이 제구실을 하려면 아이를 위한 부모의 기도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참으로 삶의 인도자이며, 하나님만이 돈을 지배할 능력과 아이를 사로잡힘에서 해방시킬 능력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기도라야 한다. 인간을 사로잡힘에서 해방시키는 모든 행위에 우선되는 것이 바로 이 기도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은 부모가 자녀에게 모범이 되는 것이다. 부모가 돈 문제에서 해방되었다면 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돈을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부모의 중심적 관심사가 언제나 돈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돈 문제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사실이다. 

 

쟈크 엘룰은 다음과 같이 발하고 있다: 

"부모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돈 문제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얻으면 아이도 거기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성경적으로 보아 아이는 부모의 삶을 따라간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 이 사실은 열 두 살 정도까지의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이때까지의 아이들은 예외 없이 부모의 태도에 물질적으로 의존할 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심리적인 영역에도 영향을 받고 그대로 행동한다. 따라서 내적이든 외적이든 돈에 대한 부모의 태도는 곧 아이의 태도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아무리 아이들 앞에서 돈 이야기를 하지 않고 겉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내적으로 돈에 사로잡혀 있으면 아이들도 돈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먼저 부모의 구원을 입증하는 내적 행위가 중요하다."(같은 책,160쪽) 

 

엘룰에 의하면, 우리가 돈에 중요성과 관심을 부여하지 않게 되면 돈도 중요성을 잃는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다른 것에 중요성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초연은 두려움과 고행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추천할 만한 것이 못된다. 아이에게 돈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그에게서 돈을 빼앗거나 돈 없이 지내도록 강요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다른 가치 체계가 그를 사로잡아 점차적으로 돈에서 멀어지도록 아이를 유도해야 한다.(같은 책, 163, 164쪽). 

이웃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주는 것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줄 물건과 대상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가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잡아끌거나 주도하는 증여는 피해야 한다. 아이 스스로 점차 증여의 필요성을 현실화하도록 하고, 그 구체적인 모양은 그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기도록 해야 한다. 한편, 이 증여는 아이의 진정한 희생을 표시하는 것이어야 한다. 특히 잃은 것을 보상받으려는 의도적인 행위를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증여가 어려운 행위임을 알게 될 때 아이는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처럼 어렵고 중요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같은 책,165,166쪽) 

엘룰에 의하면, 돈은 인간관계의 장애물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유로운 정신 속에서 자란 아이, 사람이 돈에 따라 판단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자신과는 다른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쉽게 사귈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영적으로 돈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그 권세를 꺾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 돈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독교적인 유일한 태도는 '자기가 처한 상황에 만족하는' 것이다. 올바르지 않게 돈을 쓰는 것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돈을 모으는 것도 모두 헛되다. 이런 자세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이 취할 자세다."(같은 책, 172쪽) 

그리고 "돈을 극복한다는 것은 돈을 가질 때나 가지지 않을 때나 삶의 자세가 변치 않으며 늘 하나님께 같은 헌신을 하는 것을 말한다. 부유한 가운데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재물에서 완전히 초연해져야 하니 말이다. 많은 부자들이 자기는 돈에서 초연하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자들은 바울처럼 돈에 초연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만 인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실상 돈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들이다."(같은 책, 173쪽) 

 

(->위의 송광택의 ‘하나님이냐 돈이냐’에 대한 요약과 정리는 유용하면서도 돈의 교육적 측면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단점이 있다. 여기에 몇가지만 부가한다. 엘룰에게 있어서 돈은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상징이다. 중요한 것은 화폐에 부여된 의미이며 권세이다. 돈의 실재는 물리적 상징 즉 지폐, 주화, 수표 등이 아니라 돈에 부여된 의미와 권세이다. 엘룰에게 있어서 이 돈의 권세는 마귀의 권세이다. 바로 여기에 엘룰의 사상의 급진성이 존재한다. 돈은 이 세상의 질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엘룰에게 있어서 돈, 기술, 국가는 현대 사회의 마귀의 삼위일체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해서는 안되는 것이 엘룰이 돈, 기술, 국가가 갖는 외적 형식 자체를 마귀로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엘룰을 영지주의자로 규정하는 몇몇 학자들은 엘룰이 현대 문명의 외적 형식을 그 자체로 악이라고 규정한다고 오해하고 있다. 엘룰은 언제나 배후의 세력에 주목한다. 즉 엘룰은 돈의 배후에 존재하는 세력이 마귀라고 보고 있는 것이지 영지주의자들이 정신은 선하되 육체나 물질은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주화나 지폐를 그 자체로 악하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엘룰은 돈이 얼마든지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돈을 가치 중립적으로 보는 몇몇 순진한 학자들처럼 많이 벌어 좋은 데 쓰라고 가르치고 있지도 않다. 

돈은 이미 이 세상의 구조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이 세상의 구조를 형성하는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여기서의 세상이란 하나님 나라와 적대관계에 있는 세상, 곧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다스리는 세계로서의 세상이다. 돈이 이 세상의 질서의 한 부분이 되어 버린 것은 돈의 정신이 오염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의 돈의 정신은 매매의 정신, 교환의 정신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정신은 은총의 정신, 거저줌의 정신이다. 매매란 주어진 가격대로 주고 받는 것을 말한다. 거저줌이란 매매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거저줌은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은 채 거저주는 행위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바 되었다. 거저줌, 곧 은총이란 복음의 핵심적 특징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정신이요 법칙이다. 돈의 웅장한 권세, 거대한 힘은 거저줌이라는 증여 행위를 통해 산산히 부서진다. 매매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증여란 항상 의심스러운 행위이다. 매매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증여란 불가능한 행위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은총의 행위를 이 세계 속에서 실현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의 경제 활동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가르쳐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엘룰의 모든 책이 그렇지만 말이다. 여기서 그의 사상의 종합으로 위의 질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엘룰은 그리스도인이 증여만 하고서는 이 세상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상 이 세상의 경제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이 세상의 질서가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이 세계의 매매의 법칙과 교환의 법칙에 속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이 세상에 대한 보존의 책임이다. 이 세상은 보존되어야 한다. 비록 그 구조와 정신이 악할 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세상이 보존되기를 원하신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서(? - 엘룰은 보편구원론자인고로 이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말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자유케하는 복음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 이 세상이 파괴되지 않으며 보존되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존의 은총이다. 보존의 은총으로 이 세상은 유지되며 유지되는 세상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경제 활동이 할 수 있는 한 공정하게 운영되도록 여러가지 시민운동이나 경제 정의 실천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는 어디까지나 이 세상의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것이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 경제 활동은 증여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순된 두 가지 경제 활동을 수행해야 한다. 한 가지는 이 세상의 시민으로서 이 세상의 경제 활동이 매매의 규칙에 따라 공정하게 운영되도록 감시하는 활동이며 다른 한 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거저줌, 곧 증여의 활동을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또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상 Caleb 주) 

 

나가는 말 

엘룰에게 있어서 신학의 중심 주제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투쟁이다. 세상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된다. 세상은 소외 상태에 있으나 궁극적으로 포기되지는 않는다. 때때로 불가능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투쟁의 목표는 바르게 세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더글라스 스텀(Douglas Sturm)에 의하면, 엘룰은 기독교 현실주의와 기독교 혁명이라는 양면적인 대의명분에 그의 생애와 사상을 한 마음으로 헌신했다는 점에서 존경받아 마땅하다. 엘룰은 조직신학자는 아니지만, 현대의 예언자이다. 

 

이 소고에서 엘룰의 사상은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다양한 주제에 천착(穿鑿)하는 그의 사상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연구가 요청되고 있다. 비록 쉽지 않은 사상가이지만, 현대 기독교를 향한 그의 메시지를 체계적으로 추적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참고문헌 

 

(번역 출간된 쟈크 엘룰의 저서들) 

 

기도와 현대인(두레시대,1993) 

도시의 의미(한국로고스연구원,1992) 

뒤틀려진 기독교(대장간,1990) 

법의 신학적 기초(대한기독교서회)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대장간,1992) 

인간 예수(엠마오) 

쟈크 엘룰 사상입문(솔로몬,1994) 

폭력(현대사상사,1974) 

하나님의 정치 사람의 정치(두란노,1987) 

하나님이냐 돈이냐(대장간) 

 

 

 

 

시대를 볼 수 있는 눈을 얻고픈 마음으로

「우리시대의 모습」을 읽고

 

지은이 : 쟈크엘룰

옮긴이 : 김재현

펴낸곳 : 대장간

펴낸날 : 1995.3.15

읽은날 : 2001. 8. 11 ∼ 8. 22

 

쟈크엘룰은 몇번 책을 통해서 만난 적이 있다. 그의 글을 대하면서 나는 삶과 믿음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을 대하는 듯하기도 하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그리고 잘 못되었던 것들에 대해 알아가기도 해서 그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 이 책을 대하면서 참 오랜만에 그의 글을 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도움을 받고있는 그의 책을 소홀히 대했다는 데 대해서 나 스스로가 어디에 정신을 쏟고 다녔다 싶을 정도로 미안한 마음마저 들면서 이 책에 손을 댔다. 이번 글들에서는 뭔가 알 듯 모를 듯한 내용이 있어 읽는데 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역시 그는 이 글에서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는 이 책에서 크게 네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와 기독교 계시 또는 신앙의 입장에서 기술에 대한 접근방법을 논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삶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중요한 두 인물을 제시한다. 바로 칼 마르크스와 칼 바르트이다. 그가 17, 18세 되던 해인 1930년, 그러니까 대공황이 일어난 다음 해에「자본론」을 접하면서 마르크스 사상에 푹 심취되었고, 그로부터 변증법과 역사적 상황에 따른 변화와 현실의 중요성, 소외된 자들 편에 서야 한다는 것 등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통용되었고 헤겔에 와서 완성되고 마르크스에 의해 역사 해석에 적용되었던 변증법을 통해서 쟈크 엘룰은 역사와 기독교 계시를 보고자 했다. 수많은 모순된 역사들이 전개되고 진행되어 왔다. 논리적으로는 흰색은 검은색의 반대이고 어떤 것도 흰색이며 동시에 검은색은 없다. 변증법적으로는 논리적으로 상호배척되는 상황이 단순한 혼동, 즉 흰색과 검은색이 합하여 되는 회색같은 경우나 단순히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합이 아니라 두 요소가 서로서로 통합시켜 더 이상 모순되지 않는 새로운 역사적인 상황이 출현된다고 하였다.

기독교 계시의 경우에서 특히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과 구원을 위한 행위와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즉 의미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수고스럽게 일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구원을 위해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은 사람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했고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함으로 이 둘은 서로 배타적이다. 하지만, 쟈크엘룰은 자신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구원을 위해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저주를 받았다면 자신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행동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앞에서처럼 생각이나 의미나 계획이나 지적인 상황에서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이 둘은 완전히 해결된다는 것이다.

또 쟈크엘룰은 애굽에서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통제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을 변증법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한 자유와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경영하심을 수용하는 것 또한 의미상으로는 배타적이나 삶, 즉 구체적인 현실에서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신앙에 변증법을 적용하는 것을 칼 바르트로부터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칼 바르트는 한편에는 하나님의 자유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자유가 있다고 말하였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는 마르크스에게서 얻은 첫 번째 것으로 각각의 역사적 시기에 자신들을 발견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혁명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각각의 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우리는 변해야 한다고 하였다. 

두 번째로 마르크스에게서 얻은 것은 바로 현실의 중요성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것이 결코 유물론을 말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지적이거나 영적인 지성인들은 현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러한 성향이 결코 현실을 숨길 수는 없으나 그렇게 현실을 무시하는 것처럼 위장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이 어떤 경제적 측면에서 말하고 있는지, 자신의 이해관계는 무엇인지를 곧바로 묻곤 한다고 하였다.

쟈크엘룰은 자신이 가난한 자들 편에 서야겠다는 결심이 마르크스로부터 받은 세 번째

영향이라 하였다. 마르크스도 그랬지만, 쟈크엘룰도 역시 가난한 자들을 돈과 관련시켜서만 이해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프롤레타리아는 인간의 조건에서 소외된 자들이며 기계의 명령과 도시에서 삶에 종속되어 뿌리가 뽑혀진 삶을 살아가는 자들로서 나이든 자들이라든가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 부적격자들, 주변에만 머물 수밖에 없는 자들을 일컫는다.

쟈크엘룰은 마르크스가 자신의 삶과 사상체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지만 종교적인 영역에서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당시에는 기독교나 교회에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혀 관련조차 시키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그가 20여세가 될 즈음해서 제기되었던 삶과 죽음과 같은 실존적인 문제, 사랑 등 삶에 관해 마르크스의 설명과는 다르게 성경이 건설적인 설명을 제공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라고 하고 있다. 그 회심을 가리켜 자의도 타의도 아닌 전적으로 순진하고 급작스런 것이었다고 하였다. 

이런 회심의 상황에서 그에게 영향을 미쳤던 마르크스와 성경 사이에서 그는 아주 혼란스러웠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 결코 둘로 나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마

르크스가 그에게 이 점에서 영향을 준 것은 성경을 특정한 경제적 상황에서 읽을 것과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성경을 구체적인 삶과 관련하여 읽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회를 사회학적으로 연구 및 비판하다보니 종교와 성경에 대해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취해 기적을 믿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에 속했다고 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는 칼 바르트의 변증법적 작품들을 만나면서 예정, 원죄, 보편구원의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하는 칼빈주의를 버리고 그런 해답보다는 이해의 방법들을 제공하면서 하나의 모험을 감행하도록 한 칼 바르트를 따른다.

그는 세계 2차 대전 중에 잠시 교수자격을 얻어 학생을 가르치기도 했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기도 했으며 개혁교회 최고 직위에서 활동도 했고 1950년대 말부터는 청소년 범죄

예방에 약 20여년 활동을 했고 그 이후에는 환경보호운동에 마지막을 보냈다. 그는 이런 일련의 활동 속에서 단순히 전통적인 방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소그룹과 생각하고 활동하기를 원했으며,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이렇게 삶을 회고하면서 던진 실천적 말에 많은 공감을 느낀다.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라(Think globally, Act locally)"

즉 결코 세계적인 행동은 없으며 실제적인 행동들은 모두 소규모라는 것이다.

 

그의 삶과 생각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접고, 다음은 그가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는 기본적으로 기술에 대해 비판적 수용적인 견해를 견지한다. 그는 기술이 모든 활동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핵심적인 현상이라고 하였다. 또한 기술은 특정한 사회구조를 요구하며 특히 인간의 가치는 기술의 발전과 관련이 있으며 사회발전은 철저하게 기술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특히 그가 기술이 주체의 억압과 의미의 억압을 초래했다는 것에 상당히 흥미를 가지고 주의를 기울여 읽었다. 즉 기술로 인해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인격적으로나 인간적으로는 존재의미를 갖지 못하고 단지 어떤 특정한 또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대단한 기술을 소유한 사람으로 평가됨과 동시에 실제 노동 상황에서 그는 중요하지 않고 그 기술만이 중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술이 그 기술의 주체를 억압하는 상황이다. 

두 번째는 의미의 억압으로 이 사회에서 기술 자체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중요했던 정치나 예술, 심지어는 종교의 의미까지도 그 의미를 잃었다고 하였다. 정치를 예로 들면 정치가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정치인들은 기술관료들이 제공해준 자료와 정보를 가지고 결정만 내리고 실제 집행 또한 기술 전문가들이 실행하게 되는 것이 정치를 의미하게 되면서 그 본래적인 '정치'로서 의미를 잃은 것이다. 법률 또한 경영과 조직을 위한 기술적 고안물이 되어감으로써 더 이상 정의실행에 그 목표를 두고 있지 않다. 예술가들 또한 이제는 기술에서 배우며 실행에 옮기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기술사회에 대해 결코 냉소적으로 대하거나 피해가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기술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는 시점에서 진정한 희망을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기술에 의해 완전히 지배당하고 있는 사회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텔레비젼에 대해 스스로 자유롭다고 해서 텔레비젼과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인들과 살아가는 이상 텔레비젼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말한다.

쟈크엘룰은 역사적으로 환경이 자연적 환경에서 사회적 환경으로 그리고 이제는 기술적 환경으로 변화해 왔다고 한다. 기술적 환경은 하나의 체계로서 스스로 자기증대 또는 자기발전이 가능하나 자기규제는 불가능하다. 즉 의도가 핵발전소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모두가 핵폭탄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기술이 산업을 발전시키고 삶을 좀더 윤택하게 하는 것도 사실이나 이로 인해 제 3세계 사람들은 삶의 뿌리가 뽑히면서 기술적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주변부를 떠돌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쟈크엘룰은 앞에서 말한대로 현재의 역사적 상황을 잘 파악할 줄 알아야 혁명적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자가 된다고 하였듯이, 현재의 기술사회, 기술체계를 바로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이를 위해 기술사회로부터 떨어진 어떤 시점을 찾는 것이고 또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거기에 속해있는, 결코 기술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이 아닌 초월적 존재로부터 오는 자유를 얻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기술사회로부터 초월한 지점이나 존재는 바로 성경적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종교와 기독교, 그리고 기독교 계시를 구별하고 있다. 종교는 인간이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속성, 즉 걱정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 도움이 될 만한 도구로서 신을 만들어내고 상향적 속성을 띠는 것이라 하였으며 기독교(Christiainity)는 그러한 사회학적 사고체계 또는 종교적 속성을 띠고 있는 기독교라고 하면서 그는 '기독교'라는 용어보다는 기독교 계시, 성경계시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의미는 결코 인간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방향이 결정되며 인간 내부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결코 알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로서 알려준 것에 한하여 알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오늘날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심한 좌절감이 있는 현대사회에서 기독교는 단지 좌절감을 탈출하기 위한 종교적 수단에 불과하다고 그는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바로 마르크스가 말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현대사회에서 결코 기술을 거부해서는 안되며 고통과 신경과민에 빠져버린 자들에 대한 희망으로 남아야 하고 기술이 결정적인 삶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반드시 자유의 담지자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쟈크엘룰은 다음과 말하고 있다. 

"아무리 광기어린 역사가 우리 앞에 펼쳐진다 하여도 계시에 의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한 희망이 있다."

 

뒤틀려진 기독교- 쟈크 엘룰

2018-09-09 23:48:52


9장 권세와 지배

 

1. 영적 권세

  계시된 X 에 대한 왜곡은 인간의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 행동 때문일 뿐 아니라 영적 권세들의 활동 때문이다. 영적 권세는 인격적 존재가 아니므로 스스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권세들은 인간과의 관계 속에사만 또 인간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존재한다. 영적 권세는 절대 권력으로서 국가 권력에 깃들어 있으며 마찬가지로 돈에도 예수가 맘몬이라 부르는 절대권력이 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분이 싸워야 하는 것은 살과 피를가진 인간이 아니라 하늘에 자리잡은 악한 영이라고 말한 것이다. 성서는 맘몬, 이 세상 군주, 거짓의 영, 사탄 마귀 죽음과 같은 악한 권세들을 제시하는데 이 권세들은 모두 돈, 권력, 거짓, 고소, 분열, 파괴 같은 기능으로 특징지어진다. 이 권세들은 천상적 권세이며 어떠한 실재도 스스로 갖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들은  인간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존재하며 활동한다. 이 권세들은 혼돈을 일으키며 늘 창조를 위협한다. 무엇보다 이 권세들은 성도들을 공격하며 예수와 관련하여 모든 악의 권세들은 절정에 달했다. 악한 권세들의 본질적인 역할은 모든 인간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일이 아니다. 악한 권세들은 이미 패배했다. 그러나 이 권세들은 여전히 지상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신앙을 파괴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받게 한다.

 

2. 맘몬

  돈은 완전히 모든 면에서 은총에 반대된다. 돈을 통해 교회에 유입된 것은 관계법칙으로서 교환과 판매의 정신이다. 교회에서 은총이 돈으로 거래되고 교회는 노략질과 치부의 중심이 됨으로 사실상 돈을 통해 수많은 방식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하지만 이것은 돈 자체의 결과도 아니도 돈에 대한 인간의 주관적 취향의 결과도 아니다. 돈에다 힘을 부여한 것은 진정 이 악마적인 권세였다. 맘몬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상실했을 때 자신의 법칙을 세우고 강압적이 된다. 맘몬은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욕구 충족과 더불어 인간 주변에 은총이 뚫고 들어갈 수 없게 차단막을 세운다.

 

3. 이 세상 군주

  세상은 이 세상 군주에 속해 있다.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그것은 인간이며 지상의 모든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이 세상 군주다. 권세의 영은 이 세상 군주의 영이며 지상에서와 우리 역사의 흐름에서 권세를 나타내는 모든 것은(사회 계급제도, 법, 국가의 권위, 주인의 권위) 세상 군주의 관할에 있다. 기독교의 뒤집힘은 이 세상 군주가 교회에 침입하고 유혹하고 이끄는 대로 내버려둔데 있다. 비록 세상에 속해 있지 않아도 교회는 세상 군주의 권세가 가장 강하게 미치는 곳이며 일시적이지만 놀라운 승리를 반드시 거두는 곳이다. 세상 군주는 패배했지만 여전히 세상 속의 모든 것에 대한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에 전적으로 귀속되기 일보 직전까지 늘 끌려들어갈 것이지만 결코 세상으로 완전히 굴러 떨어지지는 않는다. 

 

4. 거짓

  거짓의 영은 진리를 사물과 이념과 견해와 교조와 철학과 과학과 경험과 실재로 변화시키고 실재를 허울뿐인 진리로 변화시킨다. 거짓의 문제는 예수의 인격 자체와 관련된다. 신약성서에서 거짓은 유일한 진리이신 예수의 정체성을 거짓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은 세 가지 형태를 취한다. 우선 거짓은 예수를 이념으로 변화시킨다. 형이상학적 체계 속에서 예수의 인격을 더 교묘하게 만들거나 이용하는 영적 인식을 추구할 때 혹은 예수를 닫힌 교의나 혹은  철학의 한 부분으로 삼을 때 거짓이 존재한다. 두번째는 예수를 우상으로 변형시키는 것인데, 예수를 마법적으로 숭배하든지, 예수로부터 지상의 이익과 일상의 작은 기적을 얻으려 하든지 혹은 인간의 도식 안에서 예수를 이용할 때 거짓이 존재한다. 세번째 거짓은 예수를 교회로 귀착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존재는 진리이지만 교회 자체를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려는 유혹 및 교회가 완전한 진리를 보유하고 설파한다고 주장할 때 거짓은 존재한다. 인간의 모든 거짓, 곧 지적이고 심리학적이고 도덕적인 거짓 모두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이 세가지 거짓에서 비롯된다. 이렇게 거짓의 영에 의해 고취된 모든 거짓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계시와 무관한 진리를 추구하려고  애쓰는 일은 거짓에 속하지 않는다. 불교를 탐구하거나 과학이나 정신분석 분야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일들은 오류에 속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거기에 예수를 끌어들이지 않는한 거짓은 아니다.

 

5. 고소

   사탄은 고소하는 자이며 정확히 말해 고소 자체다. 따라서 우리는 형태와 동기가 어떠하더라도 고소가 이루어질 때마다 사탄이 있다고 해야 한다. 고소를 통해 사탄은 활동적이고 현존하는 인격이 된다. 사탄은 더는 천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은 사탄의 고소를 듣지 않으신다. 그러나  천상에서 내몰린 이 고소는 지상에서 성행하고 펼쳐진다. 여기서 비극은 고소하는 자가 우선적으로 교회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교회는 모든 고소와 심문 제도 전체의 시초와 완성과 모델이 되었다. 교회는 고소 메커니즘을 사적이고 개인적은 영역으로부터 집단적이고 제도화된 영역으로 옮겨가게 했다. 종교재판 사건에는 계시의 엄청난 타락 있었고  죄에 대한 개인적인 고해성사의 실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계시에 대한 왜곡은시작되었다. 사탄이 교회 한 가운데 머무르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 자체는 고소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고소의 해결책도 끝도 없이 인간을 짓누르며 번져가는 암적 존재가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기독교 세계를 특징짓고 기독교를 졸교와 무관한 운동에 전달한 것이 바로 고소의 이러한 확대이다. 현 세상이 지칠줄 모르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소고의 세상이라면 이것은 사탄의 영향아래 교회가 저지른 방향설정의 잘못 때문이다.

 

6. 분열

  악마, 곧 디아볼로스는 분열시키는 자이다. 악마는 사탄과 마찬가지로 인격이나 개별화된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 곧 분열의 실재이다. 분열과 갈등과 싸움이 있는 곳이 어디든 악마가 있다. 기독교 이전에도 전쟁과 갈등과 반목이 존재했지만 교회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전에는 단지 심리학적이고나 정치학적이거나 혹은 사회적 차원의 것처럼 보이던 것이 교회에 의해 영적 차원의 것이 되었다. 단절에 영적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단절은 더 심해졌다. 종교전쟁과 십자군, 이단과 마법 등이 그것이다. 종교전쟁은 전형적으로 악마와 교회가 서로 마주친 결과이며 교회로부터  온 세상으로 전염이 되었다. 세상의 전쟁과 정치적 갈등이 이처럼 끔직한 것은 그것이 종교 전쟁 및 영적투쟁과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분쟁들을 종교적으로 만들었고 적대자들을 이단과 절대 악의 화신으로 단정했다. 이런 판단은 우리가 속한 세상에 그대로 남아서 모든 적은 인간이 아니라 일종의 악마적 존재가 되고 절대적으로 없애야 할 존재가 되었다.

 

7. 파괴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말세에 대한 예수의 예언에는 "너희가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것이 거룩한 곳에 놓인 것을 볼 때..."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로마의 예루살렘 점령이라는 역사적 사건 및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는 독수리로 의미를 국한시키지만 나는 이 본문을 역사적이고 지역적인 영역으로 귀착시키는 것은 본문을 마음대로 제한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나는 이 본문이 교회 역사 전체에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이 황폐하게 하는 가증스러운 것에는 두가지 가능한 의미가 있는 듯이 보인다. 하나는 황폐를 유발하고 철저히 파괴하며 헐벗은 땅으로 만드는 끔직한 영적 현상이다. 기독교는 예전의 신앙과 종교와 가치와 문화를 파괴했고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진리로 대체했다. 하지만 이 진리가 무너지고 파괴되어 예수가 더는 구속자도 구원주도 아닐 때 진정 이것은 황폐이고 황무지다. 또 하나는 인간을 전적인 고독의 가증스러운 상황으로 빠뜨리는 완전한 절망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권세들이 주도하는 악마적이고 끔직한 최후의 활동이다.

 

8. 영적 권세들의 결집과 승리

  권세들은 영적이다. 이 끔직한 사건에서 일어났던 일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 현상, 사회학적 현상, 사물과 제도의 영향력과 관계된 것이었으며 마르크스 사회주의에 일어났던 것이나 루소의 민주주의적 몽상의 때에 일어났던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기독교의 뒤집힘에는 어떠한 숙명도 필연성도 없다. 사람들이 계시로부터 더는 나아가지 않고 머무는 한 상황이 달라졌을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다. 인간이 이 진리를 따를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독교의 뒤집힘이 없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뒤집힘이 초래된 것은 불행한 우연들의 결집, 곧 서로 연결된 영적 권세들의 결집을 통해서이다. 역사적으로 인간적으로 상황이 이처럼 되었던 것은 영적인 권세들이 결집했기 때문이다. 이 권세들은 십자가를 둘러싸고 바로 그런 덕목과 진리와 의를 이용했다. 다른 모든 교리와 사상과 덕목과 철학은 인간 안에서나 사회 안에서 결정적인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멀쩡한 채로 남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그리스도의 부활과 새로운 몸은 그렇지 않았다. 바울은 이 권세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했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했기에 우리는 늘 이 힘들의 먹잇감이 되었다. 이 힘들은 인간의 눈에는 예수에게 늘 결부되는 듯이 보이는 것을 이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힘들은 어느 때보다 훨씬 악하다. 이것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다. 황폐케하는 가증한 것은 주후70년 예루살렘 파괴로 국한되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미혹이 있고 인간은 일어나는 모든 것에 미혹되고 거짓 약속, 거짓 그리스도, 거짓 정의와 거짓 자유에 미혹된다. 하지만 권세들의 극단적인 힘은 기독교의 뒤집힘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상황이 이처럼 된 것은 역사적 우연이 아니다. 구체화된 권세들은 진리가 세상을 비추는 것과 사물들이 제 위치에 있는 것과 미혹이 가면을 벗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빛이 세상에 왔고 어둠은 빛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빛이 있었기 때문에 어둠은 더 어두워졌다.

   그러면 이것은 성령의 패배인가? 세상에서 성공으로서 또 힘의 과시로서는 성령의 패배가 맞다. 왜 사람들은 성령이 다른 식이기를 바라는 걸까? 성령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하나님과 다른 것일까? 하나님은 인간을 제약하거나 기계로 만들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는 것을 끊임없이 목격한다. 매번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제시하고 새로운 가르침을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것은 자발적인 비무력의 실패이다. 성령도 다르지 않다. 빛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복종하게 만드는 역사적인 힘도 아니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역적적이 힘도 아니다. 성령은 모든 것이 절망적인 곳에서 소망을 주는 동시에 이 재난의 한 가운데서 지탱하는 힘과 이 미혹에 빠지지 않기 위한 명철함과 관여된 권세들을 와해시킬수 있는 능력을 준다. 그러므로 신자는 미혹의 힘을 자체의 법칙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하며, 우리의 물질적인 실재에서 미혹의 힘을 박탈하고 드러내며 미혹의 힘을 하나님을 섬기는데 관여하게 하는 예지와 능력을 지닐 수도 있는 자이다. 그러나 위풍당당한 승리는 없다. 성령으로 영감받은 국가수반이나 자본주의나 과학이나 기술도 없다. 그러나 권세들은 이와 반대로 이 모든 것들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진리 자체를 자신들의 위대함에 예속시키는 폭발적인(위풍당당한) 승리를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