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우종학
2018-06-29 17:26:35
우주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이 담긴 예술작품이었다. 내가 천문학자가 된 것은 우주 공간에 펼쳐진 하나님의 역사가 궁금해서였다. 우리의 삶이 과학으로 증명되지 않는 수많은 믿음을 기초로 세워져 있듯이 신앙은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 신앙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지 지적인 이해나 동의를 넘어선다. 믿음은 구원의 약속을 주신 분에게 대한 신뢰이다.
신앙의 언어는 과학의 언어와는 다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신앙과 과학을 함께 묶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과학은 창조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풍성한 도구이다. 곧 신을 증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신을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창조 신앙을 풍성히 해주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 과학이 신앙의 적이라는 오해를 풀어야 한다. 과학을 무신론의 도구가 아닌 창조 과학에 신앙의 도구로 적합하게 사용하려면 신앙과 과학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 안에 만연해 있는 대한 불필요한 오해와 반지성적인 경향을 넘어서야 한다. 신앙의 언어 안에 과학을 품어낼 수 있는 지식과 실력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비록 과학의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필요는 없지만 두 언어를 구별할 줄은 알아야 한다.
서론
과학은 자연 세계를 초월하는 존재인 신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확실한 답을 해줄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는 아니다” 증거가 없다는 사실이 반드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이 기독교에 던지는 도전에는 다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과학 그 자체다.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역사는 그동안 우리가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창조하셨다고 믿고 생각해왔던 그림과는 너무나 다르다. 문제는 자연을 읽어내는 방식인 과학과 성경을 읽어내는 신학에 해석의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과학과 신앙이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둘째, 과학을 무기 삼아서 기독교들 공격하는 과학주의 무신론의 도전이다.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음을, 우리의 신앙의 지성적 토대가 얼마나 취약한지, 과연 무신론자들의 주장의 내용은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 기독교 신앙에 도전이 되는가? 셋째, 기독교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근본주의/문자주의의 오류를 교회가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것인가가 과학과 관련된 마지막 도전이다.
1부 과학, 자연을 읽어내는 도구
1장 자연,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의 책
성경과 자연은 하나님을 알려주는 두 가지 책이다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가지 책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첫 번째 책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려주고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특별계시라 불리는 성경이고, 두 번째 책은 자연이라는 책이다. 자연은 성경처럼 문자로 기록된 책이 아니라, 우리 앞에 펼쳐져 있는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물의 세계를 포함하는 창조세계 전체를 지칭하며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시고 우주의 역사를 어떻게 섭리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책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임을 배웠다면, 자연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지 그 창조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성경과 자연, 이 두 책의 저자는 한 분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두 책은 모순될 수 없다. 그럼에도 흔히 과학과 기독교가 서로 모순되듯이 보이는 다양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성경과 자연, 그 자체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경과 자연 이 두 책을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가지려면 성경과 자연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충분히 공부해야 한다.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법, 과학
자연이라는 책은 말 그대로 창조세계 전체를 담은 방대한 책이다. 문자로 기록되지 않은 창조세계 전체를 담고 있는 자연이라는 책은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할까?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연을 읽는 방법은 다양했다. 그러나, 근대 과학의 태동 이후 자연을 읽어내는 가장 유용한 방법으로 과학이 자리 잡게 되었다. 과학은 자연현상의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설명체계로 자연적 원인과 그 결과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자연을 읽어낸 결과를 과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지만,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가는 과정, 혹은 자연현상을 이해하는 과정을 과학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현대 과학은 우주와 지구 그리고 생물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자연현상의 원인을 자연계 내에서 찾아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다. 현대 과학의 특징은 첫째, 자연현상을 관찰하거나 혹은 특별한 조건을 만들어 실험하는 과정을 통해 얻은 경험적 증거를 꼽을 수 있다. 둘째, 그 경험적 증거들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즉 논리적이고 정량적이며 수학적인 기술이다. 셋째, 이론 체계를 바탕으로 어떤 현상이 일어날지를 예측하고 검증하는 예측과 검증 가능성이다. 오늘날, 현대 과학이 성공적으로 발전한 이유는, 경험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세운 과학 이론이 자연현상의 인과관계를 잘 설명했기 때문만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론을 바탕으로 다른 인과관계를 예측하고, 그 예측이 과연 맞았는지를 새로운 경험적 증거를 찾아서 검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측과 검증 가능성(*칼 포퍼, 『추측과 반박』)은 서로 경쟁하는 과학 이론들 사이에서 과학자들의 합의를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있게 해준다. 그래서 가설에 불과했던 한 이론을 정설로 합의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과학사를 꽃피운 예측과 검증 가능성의 예는 다양하다. 태양계의 8번째 행성으로 발견된 해왕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17세기까지 태양계엔 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6개의 행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러나, 7번째 행성인 천왕성이 18세기에 발견되자 사람들은 태양계에 더 많은 행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천왕성의 공전운동이 불규칙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이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미지의 행성의 존재를 예측했고, 이 행성이 존재할 위치를 예측하여 결국 그 위치에서 새로운 행성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바로 태양계의 8번째 행성인 해왕성이었다. 해왕성의 발견은 천왕성의 운동을 바탕으로 예측된 결과가 정확히 검증된 결과였다. 현대과학은 경험적 증거와 이론이 종합된 체계적인 설명 체계이며, 이 설명 체계는 다양한 예측을 만들어 내고, 그 예측은 다시 경험적 증거로 검증되는 특징을 갖는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예측이 맞지 않는 이론은 폐기되거나 수정되면서 과학은 발전해 왔다. 그러나,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연의 참모습을 온전하게 다 밝히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과학은 자연에 대한 영원한 근사(approximation)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과학은 자연에 대한 영원한 근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의 역사에 대해 놀라운 비밀들을 우리에게 드러내 주는 유용한 도구이며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밝혀내는 일반은총의 축복을 입은 학문임에는 틀림이 없다. 자연이라는 책은 엄청나게 두꺼운 책이다. 비록 책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눈앞에 펼쳐진 다채로운 현상을 담고 있는 자연이라는 책에는 방대한 양의 내용이 담겨 있음이 틀림없다. 생명과 지구와 우주를 포괄한 자연은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와 지식을 비밀스럽게 담고 있다. 그 내용은 우주의 기원과 역사, 지구의 형성, 그리고 생물의 세계를 포함한다.
2장 창조세계, 우주는 얼마나 클까?
맨눈으로 밤하늘을 관측하여 지구 대기권 밖 우주를 탐구하던 과거와는 달리 우리는 현대 과학의 첨단장비들을 통해 다채로운 우주의 모습을 발견하는데 과연 이 우주는 얼마나 드넓은 공간일까? 별이 핵융합 반응을 멈추고 내부로부터 폭발하면, 별을 구성하고 있던 대기가 우주공간으로 퍼져나간다. 이렇게 별이 죽어가는 것이다. 태양도 앞으로 약 50억 년의 시간이 지나면 내부의 핵융합 연료를 다 소진해서 결국 이와 비슷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별들의 세계
밤하늘을 보면 별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별의 크기에 비하면 별과 별 사이의 거리는 매우 멀다. 인터스텔라(interstellar)라고 불리는 별과 별 사이의 공간은 실로 엄청난 크기의 빈 공간이다. 인간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저 밤하늘의 별들까지 여행하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우주에서 가장 빠른 것은 빛의 속도다. 빛의 속도를 내는 우주선으로 날아간다면 지구에서 달까지는 1초, 태양까진 10분이 채 안 걸린다. 태양계를 벗어나고 싶다면 반나절이면 가능하다. 그러나, 광속 우주선을 타고 간다고 해도 별까지의 여행은 쉽지 않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별이라 해도 4년 이상이 걸린다. 다른 별까지 가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하다. 밤하늘에 보이는 수천 개의 별들은 대략 광속으로 수백 년에서 수천 년 걸리는 먼 거리에 존재한다. 광속으로 달린다고 해도 평생 동안 가볼 수 있는 별이 몇 개 되지 않는 셈이다. 오늘밤 어두운 곳에 나가서 별들을 한번 쳐다보자. 저 별들이 담겨 있는 거대한 공간의 크기를 한번 느껴보자. 창조주 하나님은 지구나 태양계만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다.
우리 은하의 별들
수천억 개의 별들이 중력에 의해 서로 묶여서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형성하고 있는 이 작은 우주를 우리는 은하라고 부른다. 우리 선조들이 은하수라고 불렀던 우리 은하에는 태양처럼 빛나는 별이 수천 개가 아니라 약 2천억 개가량 존재한다고 알려졌다. 은하는 수많은 별들뿐만 아니라, 별들이 거느린 행성들, 그리고 엄청난 양의 가스와 블랙홀 등이 중력에 의해 묶여 하나의 “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은하를 작은 우주라고 부를 수 있다. 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로 꼽히는 것이 바로 은하다. 그럼, 우리 은하 내에서 태양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에서 빛의 속도로 약 25,000년 정도 가야 하는 변두리에 위치한다. 인간의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별들은 대부분 태양 근처 변두리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 은하 너머에 또 다른 은하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는 우리 은하 내부에 있기 때문에 우리 은하의 모습은 잘 관찰할 수 없지만, 우리 은하 바깥에 있는 가까운 다른 은하들의 모습은 비교적 자세히 연구할 수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안드로메다 은하다. 안드로메다 은하는 에드윈 허블이라는 천문학자가 안드로메다 성운까지의 거리 측정에 성공하면서 밝혀졌다. 에드윈 허블은 안드로메다 성운이 밤하늘을 빛내는 별들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먼 거리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은하임을 밝혔다. 현재 측정된 값에 따르면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은하로부터 약 260만 광년 거리에 떨어져 있다. 우리 은하의 크기가 수십만 광년 정도니까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 은하의 경계 밖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은하로 우리 은하보다 두 배 정도 더 크고 약 4천억 개의 별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1920년대에는 안드로메다를 비롯한 외부 은하들까지의 거리 측정이 가능해지면서, 우리 은하의 경계 너머 외부에도 은하들이 존재하며 우리 은하는 수많은 은하 중에 하나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관측 가능한 우주의 크기가 점점 확장된 셈이다. 이렇게 확장된 우주 속에서는 지구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엮이는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진다. 우주에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이 서로 묶여 시공간이 된다. 가령 지금 안드로메다 은하의 사진을 찍는다면 우리가 찍은 사진에는 약 260만 년 전의 안드로메다 은하 모습이 담긴다. 왜냐하면 안드로메다 은하를 떠난 빛이 지구까지 도달하는데 약 260만 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의 모습은 260만 년 전의 모습이 된다.
우주 끝에서 발견되는 막 태어난 은하들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노랗거나 붉게 보이는 반면, 먼 거리의 작은 은하들은 희거나 푸르스름하게 보인다. 멀리 있는 은하들의 경우, 빛이 오는 데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과거의 모습을 담고 있는 반면, 가까이 있는 은하들은 빛이 오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으므로 최근의 모습을 보여준다. 즉 멀리 있는 은하는 파란 빛을 내는 젊은 별들이 많아서 파랗게 보이고, 가까이 있는 은하는 나이 많은 별들이 주로 내는 노란색과 붉은색으로 보인다.
우주의 거시구조
우주 초기에는 약간의 비등방성을 제외하고는 밀도가 거의 균일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중력이 은하와 은하를 서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우주의 밀도 차이가 점점 커지면서 우주의 거시구조가 만들어진다. 우주에는 우리 은하와 같은 은하가 몇 개쯤 있을까? 천문학자들은 대략 은하의 숫자를 천억 개로 추정한다. 우리 은하 내에만 태양처럼 빛을 내는 별이 2천억 개 정도가 존재하고 우주에는 우리 은하와 같은 은하들이 약 천억 개가량 존재한다. 그렇다면, 천억 개의 은하가 차지하는 우주 공간은 과연 얼마나 큰 공간일까? 그 크기는 100억 광년이 넘는다.
거대한 시공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간과 공간이 하나로 연결되는 시공간 개념을 따르면 광대한 우주의 크기는 장구한 우주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한다. 100억 광년 넘는 거리에서 오는 100억 년 전에 출발한 빛을 관측하는 천문학은 우주의 나이 또한 그만큼 오래되었음을 알려준다. 우주의 거대한 시공간은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거대한 세계를 담고 있음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창조의 기록이 담긴 자연이라는 책은 우주의 창조가 지구를 중심으로 한 제한된 창조가 아니라 천억 개의 은하를 포함한 광활한 공간을 대상으로 하는 장구한 역사의 과정임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창조는 지구나 태양계 정도에 멈춘 것이 아니라 성경의 저자들조차 상상도 할 수 없었던 100억 광년이 넘는 거대한 공간에 가득 차 있다. 아는 만큼 그리고 우리의 지성 안에 품는 만큼 내가 살아가는 우주는 넓어진다. 별과 은하의 세계를 직접 탐험하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주를 품고 살 수 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거대한 우주를 우리의 지성 안에 품고,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오래 참으심 그리고 보이지 않는 창조의 섭리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나”라는 협소한 우주를 넘어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를 나의 우주로 삼고 사는 셈이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창조 작품인 우주를 배우고 품는 일은 우리의 시선을 넓게 열어준다. 오늘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다툼과 욕망의 열매들을 우주라는 시공간의 거대한 흐름에 비추어보면 그 허망함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창조세계의 광대함은 우리의 죄 된 본성이 집착하는 보잘것없는 욕망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찬양하면서 나의 인격이 변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눈을 열어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볼 때 우리는 자연스레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
3장 우주의 역사는 얼마나 오래되었나?
우주의 팽창
지난 20세기 100년의 시간 동안 과학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발견은 우주 팽창의 발견이다. 우주가 정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팽창한다는 발견은 동적인 우주라는 새로운 개념을 낳으며 우주에 대한 인류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꾸었다. 이 발견으로 “빅뱅 우주론”(Big-Bang cosmology)이라는 우주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탄생하였다. 이 이론의 시작은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Hubble)로 부터이며, 최근에는 벨기에 신부이자 과학자인 르메트르 연구까지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허블이 발견한 것은 놀라운 사실이었다. 은하들의 거리와 속도를 측정함으로써 발견한 사실은 은하들이 우리를 중심으로 점점 멀어질 뿐만 아니라 가까운 은하에 비해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은하가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는 것이었다. 거리에 비례하여 은하의 후퇴 속도(멀어지는 속도)가 크다는 이 발견을 “허블의 법칙”이라고 불린다. 이 법칙은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이 시간에 따라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즉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주 공간이 일률적으로 팽창한다면 가까이 있는 은하보다 멀리 있는 은하가 더 빠르게 멀어지는 허블의 법칙이 드러난다. 이 법칙은 우주의 기원을 연구하는 현대 우주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우주의 시작
우주가 팽창한다는 말은 시간이 흐르면서 우주의 크기가 커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면 우주의 크기가 과거에는 작았다는 말이 된다. 과연 어느 시점까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릴 수 있을까? 시간을 무한히 되돌릴 수는 없다. 우주의 크기가 점점 작아져서 0보다 작아질 수는 없다. 우주 팽창 과정을 과거로 되돌려보면 우주가 매우 작았던 출발점, 즉 시작점이 있었다는 결론을 낳게 된다. 이 시점을 흔히 빅뱅이라고 부른다. 곧 우주가 시간적으로 무한히 오래된 것이 아니라 어떤 출발점이 있었다는 뜻이다. 우주의 팽창을 기초로 해서 정밀한 관측과 이론들을 통해 천문학자들이 측정한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 년이다. 과거의 한 점에서 우주가 팽창하여 현재의 우주가 되었다는 과학 이론을 표준 우주론(빅뱅 우주론)이라고 한다. 물론 우주의 초기에 빅뱅이 과연 어떻게 일어났는지, 우주 팽창이 과연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에 관해서는 아직 다양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빅뱅 우주론은 1965년에 우주배경복사가 발견되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의 예측과 맞아떨어짐으로써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게 되었고 우주배경복사를 발견한 과학자들(펜지어스와 윌슨)은 1978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균일하게 날아오는 우주배경복사를 관측하여 그것의 등방성을 확인하면서 빅뱅 우주론은 정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천문학이 알려주는 우주의 역사를 하나의 도표로 그려본다면, 138억 년 전에 우주가 시작되었고 매우 작았던 우주는 점점 팽창하기 시작한다. 우주의 나이가 38만 년 정도 되었을 때 태초의 빛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배경복사가 우주 공간에 처음으로 퍼진다. 그 전까지는 우주에 전자들이 너무 많아서 빛이 전자들에 부딪혀 우주 공간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38만 년 정도가 지나면 전자와 양성자가 합쳐져 수소가 되면서 원자의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면 빛이 드디어 퍼져나갈 수 있게 되는데, 그때 우주 공간에 퍼진 빛을 우주배경복사라고 하며 이는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균일하게 관측된다. 그 이후에는 아직 별들이 만들어지지 않은 시기를 거치는데 이 시기에는 빛을 내는 천체가 없기 때문에 암흑시대라고 불린다. 그 후 중력에 의해 별들이 만들어지고 은하들이 생성되면 드디어 은하의 시대가 시작된다. 수많은 은하들이 다채로운 모양과 색깔을 뽐내며 역동적으로 우주 공간을 메우는 은하들의 시대로 변한다. 빅뱅에서부터 은하의 시대까지의 138억 년의 장구한 흐름은 21세기 천문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우주의 역사다.
지구와 태양계의 연대
우주의 역사에서 태양과 지구는 언제쯤 생성되었을까? 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는 100억 년이 넘는 우주 역사의 후반기에 만들어졌다. 지구의 나이는 약 46억 년가량이다. 태양과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는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죽은 뒤 후대에 태어난 셈이다. 지구상의 생물의 역사는 어떨까?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생물의 화석은 대략 5억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 이전 시대는 미생물의 흔적들이 화석으로 남아 있으며 최초의 생명체는 대략 35억 년에서 41억 년 전에 발생했다. 지구의 역사가 흘러감에 따라 단순한 종들이 먼저 나오고 복잡한 종들이 나중에 출현한다는 생물 역사를 알 수 있다. 종합해보면 굉장히 오랜 시간 동안 우주와 지구와 생물의 역사가 흘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과학을 통해 밝힌 우주의 역사를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매우 긴 시간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다.(*하나님의 시간으로는 ‘순간’일 수도?)
우주가 가리키는 창조주
저자는 ‘이 광대한 우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 광대한 우주보다 더 큰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왔다. 과학을 통해 배운 내용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를 더 경이롭게 하며,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더 풍성하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창조주를 믿는 시각으로 자연세계를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 역사와 섭리를 보며 감격하게 되고 창조주를 찬양하게 된다. 이 관점이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관점이다. 보다 근원적으로 묻는다면, 도대체 과학이 밝힌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이 광대한 우주가 왜 존재하는지를 묻는다면, 우리는 결국 우주보다 더 큰 존재, 곧 우주보다 더 광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우주의 광대함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광대함을 가리킨다.
4장 과학의 한계와 중립성
앞 장에서 다룬 우주의 역사를 의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과학이 우주의 기원과 역사를 낱낱이 다 밝혀냈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과학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낭만주의적인 과학관은 이제 먼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다. 과학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현 시점에서 우주의 시작점을 경험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엄밀하게 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쉽게 말하면 빅뱅의 시점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다. 또 지구에서 어떻게 처음 생명체가 탄생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질문에도 엄밀한 과학적 설명은 부족하다. 무생물의 세계에서 생물의 세계로의 변화는 우주의 탄생인 빅뱅과도 같은 엄청난 변화를 필요로 한다. 또한 인간의 의식에 대한 기원도 여전히 안개에 가려져 있다. 과연 동물들과 다른 인간의 의식이 어떻게 출현하게 된 것인가에 대해서는 뇌과학이나 진화심리학 등의 새로운 학문이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밀한 설명이 부재한다. 좀 더 형이상학적인 차원으로 올라가 보면 자연법칙의 기원에 대해서도 동일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우주에 있는 모든 별들의 운동을 기술할 수 있는 중력 법칙이라든가 전자기학 법칙 등은 도대체 어떻게 기원한 것일까? 자연법칙이 과연 어떻게 자연현상에 부여된 것이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즉 자연법칙의 기원 자체를 이해하는 일은 요원하다.
과학의 특성
과학은 경험적 데이터와 이론적 설명의 대화를 통해 발전한다. 이 말은 새로운 데이터나 이론이 나오면 과학의 내용이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과학은 가변적이라는 말이다. 또한 시간이 흘러 그동안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이 발견된다거나 혹은 새로운 이론이 제시된다면 과학의 내용이 변할 수도 있다. 과학은 절대적 진리가 아닌 당대 최상의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과학이 상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과학이 가변적이라고 해서 과학의 내용이 마구 바뀐다는 말도 아니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실재에 조금씩 더 다가가는 하나의 근사(approximation)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해는 비판적 실재론이라고 불리는 견해로 대변될 수 있다. 이 견해는 과학의 절대성이나 상대성을 부정하면서, 과학이 자연이라는 실재를 어느 정도 잘 설명해주지만 동시에 가변적이며 자연에 대한 근사일 뿐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과학은 자연세계의 현상들을 대상으로 할 뿐, 초월적인 현상-신이 존재하는가, 천국이 있는가-을 다루지는 않는다. 과학이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또는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는 말은 과학적 주장이 아니며, 과학에 대한 하나의 해석 혹은 철학적 주장일 수밖에 없다. 과학은 유신론도 무신론도 지지하지 않는다. 과학이 밝혀낸 어떤 현상의 인과관계 뒤에 신이 존재하여 섭리를 한 것인지 혹은 신의 존재나 섭리 없이 그 현상이 일어난 것인지에 관해서 과학은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 이런 면에서 과학은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의 중립성에 주목하면 우리는 과학을 기독교 신앙의 변증 도구로 삼아 자연세계에서 신을 찾으려고 하는 19세기 영국의 자연신학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고, 반대로 과학을 기독교의 적으로 오인하여 맹공격을 가함으로써 오히려 과학이 밝혀내는 창조의 깊이와 신비에 눈을 가리는 실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보여준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이 밝혀낸 모든 내용을 창조주 하나님의 작품으로 여길 수 있다. 우주 전체의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작품이라는 시각이 가장 기본 되는 출발점이다. 21세기 천문학을 통해 자연을 읽어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관해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고대나 중세시대 사람들이 흔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무한하게 느껴질 정도의 광대한 크기를 갖는 시공간이다. 둘째, 수많은 별들과 은하들의 존재는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 사는 인간을 위해서 우주 전체가 창조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의 계획 속에 우리 인류가 포함될 뿐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우리는 성경이 분명하게 증언하는 창조주를 지구 중심적인 사고에 가두지 말고 전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찬양해야 한다. 셋째, 하나님은 긴 시간을 통해 동적인 과정을 사용하여 우주를 창조하셨다. 우주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구하다. 인류의 탄생을 길게 잡아서 100만 년 전이라고 본다고 해도,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시기까지 100억 년의 시간을 사용하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즉흥적이고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세밀한 기획과 긴 오래 참음을 통해 이루어진 놀랍고 값진 계획임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러한 창조의 역사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역사와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 하룻밤 사이에도 실현할 수 있는 약속이었지만,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모세의 출애굽을 통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신다. 거기엔 자유의지를 갖도록 허락해주신 하나님이 인간들과 함께 협동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프로그램화된 로봇처럼 다루지 않으신다. 거기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보이지 않는 섭리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기까지 수천 년을 기다리신 분이며 타락한 인간들이 돌이키기를 무수히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다. 신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고 인간의 그 자유의지를 통해 일하시는 섭리를 우리 인간이 다 이해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명백하게 목격할 뿐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통해 부여된 자연법칙을 바탕으로 질서 있게 운행되는 세계다. 하나님의 창조 과정은 카오스(혼돈)를 코스모스(질서)로 만드시는 과정이었다. 거기엔 자연법칙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드러난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하여 구원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성경에 담겨 있듯이, 자연법칙을 통하여 창조의 계획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자연이라는 책에 담겨 있다.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서 신실하게 일하시는 분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고백이다. 이 첫 번째 고백은 두 번째 고백 없이는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되고 만다. 그 예수는 단지 훌륭한 스승이거나 뛰어난 인품을 가진 우리의 이웃 혹은 도를 깊이 깨우친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천억 개가 되는 별들을 만들고 우리 은하를 창조하신 분이며 또한 천억 개나 되는 은하들을 지어 거대한 시공간의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고 다스리시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 위대한 창조주가 자기를 비워 신의 자리를 내려놓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베풀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깊어질수록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의미는 더더욱 풍요로워진다.
2부 성경과 과학
5장 성경은 과학과 모순되는가?
과학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어려움은 많은 경우 과학 그 자체보다는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성경이 어떤 종류의 책인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을 과학교과서로 읽기 쉽다. 성경에서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은 성경에서 과학지식을 찾으려는 경향을 갖기 쉽다. 과연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성경을 비롯한 모든 글은 인간의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다. 언어의 바탕이 되는 인간의 경험과 문화는 거꾸로 그 언어를 읽어내는 도구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성경과 과학이 모순되어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많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창세기 1장에 대한 이해
현대에도 자연이라는 책을 무시하고 성경에서 창조의 역사에 담긴 구체적인 과학 지식들을 읽어내는 것이 바람직할까? 창세기 1장은 창조의 역사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담고 있을까? 과학적 지식은 가령 인과관계나 순서 및 방법 등을 포함한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의 기간부터 다뤄 보면 17세기 아일랜드의 주교인 어셔는 창세기에 나오는 족보를 계산하여 아담까지 연대를 거슬러 올라갔다. 그러나 현대의 성서신학자들 대부분은 어셔의 해석을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창조의 역사를 시작하신 시점을 특정할 수는 없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 창조 기사에 대해 문자주의 견해나 인간의 한 주간 노동에 비유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는 데 걸린 시간이 문자적인 시간이건 그보다 더 긴 시간이건 간에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라는 창세기 1장의 핵심 메시지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다. 특별계시인 성경이 구체적으로 증언하지 않는 내용에 관해서 우리는 일반계시인 자연이라는 책을 참고해야 한다. 자연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기간은 문자적으로 6일이 아니라 그보다 더 오랜 기간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수천 년 전에 창세기를 기록한 저자는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창조의 기간에 관한 과학 지식을 전해주려는 의도를 가졌을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루의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까? 창세기 1ㅣ자의 6일은 분명히 문자적으로 6일이다. 그러나 6일 창조의 기록은 하나님이 실제로 6일 동안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설명이 아니다. 창조 기사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과학적 설명을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태양은 첫째 날이 아니라 넷째 날에 창조된다. 그렇다면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창세기 1장에 나오는 6일 창조의 순서는 과학적 설명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순서도 서로 다르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창조 기사의 순서를 물리적인 의미의 과학적인 서술로 볼 수 없다.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 살펴보면 고대 근동 사람들은 재료나 방법에 관심이 없고 어떤 기능이 부여되었는가에 더 관심이 있었다.
창세기 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이 어떤 재료나 방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한 기술은 별로 없고, 어떤 기능이 부여되었는가의 관점이 강하게 드러난다. 성경은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창조의 내용을 다뤄보면 공룡을 창조했다는 기록이 창세기 1장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성경에 공룡이 나와야 할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창조물이 성경에 모조리 기록되어야 할까? 성경에서 선택되어 기록된 창조물은 당시 고대 근동지역의 우상숭배와 관련 있다. 우상들이 신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고대 근동 우주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를 이해하려면 고대 근동 지역의 상식과 우주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우주는 철저히 지구에서 발을 딛고 바라본 관찰자의 입장에서 구성된다. 지구를 중심으로 한 고대의 우주관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근동지방의 상식이고 고대 히브리인이 가졌던 우주관이다. 창조 기사에는 지구가 편평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궁창이라는 하늘의 벽에는 해와 달과 별들이 붙어서 하루에 한 번씩 지구 주위를 돌고 있고, 궁창 위에는 물층이 있는 그런 고대의 우주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창세기 1장은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이 생각했던 우주의 모습 하나하나를 하나님이 창조한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실제 우주의 모습이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우주의 모습 그대로라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다. 성경의 목적은 과학 지식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이 우주를 누가 창조했는가, 창조주가 누구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쓰인 책이다. 성경의 저자가 의도하지 않는 내용까지, 가령 하늘 위의 물층의 존재나지구의 자전과 공전과 같은 과학적인 답을 성경에서 찾으려 한다면 심각한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당대의 문화와 상식을 배경으로 쓰인 본문
성경을 읽는 바람직한 방법은 성경의 저자들이 의도한 내용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데까지 말하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곳에서 멈추라는 권면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에 드러난 창조 개념
고대 근동 지역 사람들은 긴 시간적 과정을 거쳐서 무언가가 창조된다는 동적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즉각적이고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창조된다는 개념을 주로 갖고 있었다. 이런 개념을 즉각적 창조 혹은 새로움으로의 창조라고 부른다. 누가 창조주인지를 명확히 알려줄 목적으로 쓰인 창세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창조의 개념을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이러한 개념이 창세기에 나온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마술사가 무언가를 순간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처럼 이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에 관해 묻고 답하려면, 창조의 방법에는 별 관심이 없는 성경책보다는 창조의 방법이 낱낱이 기록된 자연이라는 책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성경은 창조주를, 자연은 창조세계를 보여준다
성경은 창조의 방법(how)에 관한 과학책이 아니라, 창조주가 누구인지(who)를 알려주는 특별계시의 책이다. 성경은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신학적 서술을 담고 있다. 성경 본문은 다양한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과학적 지식을 전해주는 목적을 담고 있지는 않다. 반면 자연이라는 책은 창조세계를 기술하는 책이다. 창조의 과정과 방법에 관한 인과적 서술이 담겨 있다. 그 서술은 과학적 정보를 담고 있으며 비신학적인 서술이다. 우리는 성경과 자연을 통합적으로 봐야 한다. 이 두 책은 서로 모순되거나 양자택일해야 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과 자연을 함께 또한 적합하게 읽으면서 창조주와 창조세계에 관해 배워가야 한다.
6장 성경 해석의 역사 : 일치론적 해석 vs. 비일치론적 해석
자연이라는 책이 풀어내는 창조의 역사를 새롭게 배워가면서 신학자와 과학자들은 과거와 달리 창조기사를 어떻게 새롭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에 부딪혔다.
일치론적 해석
기존의 성경해석과 과학이 그리는 두 그림을 합리적으로 조화시키려고 했던 노력을 “일치론적 해석”(조화주의)이라고 한다.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를 실제 과학적 의미의 순서로 이해하고 과학이 발견한 자연사의 순서와 조화시키려 했다. 성경의 하루 개념을 하나의 지질 시대로 본 “날-시대(Day-Age) 이론”과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긴 간격이 있었다는 “간격 이론”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일치론적 해석은 성경을 여전히 과학교과서처럼 읽는 한계를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작위적인 가정을 자꾸 만들어내게 된다. 창조과학자들도 성경 본문을 과학교과서처럼 읽고 해석하기 때문에 작위적인 가정을 덧붙인다. 결국 일치론적 관점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새로운 사실들을 제시할 때마다 성경 본문과 과학을 조화시키기 위해 작위적인 가정을 추가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닌 셈이다.
비일치론적 해석
“비일치론적 해석”은 창세기 1장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포관적인 서술로 해석하고, 창조의 순서를 과학적 의미가 아닌 신학적인 서술로 본다. 대표적인 견해는 “골격(frame) 이론”으로 7일째 오는 안식일을 중심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구조적으로 기술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창조 기사를 “비유적인 해석”으로 읽는 관점도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과정을 인간의 한 주간의 노동에 비유하여 안식을 중심으로 6일의 창조 기간을 비유적으로 표현했다는 관점이다.
통합적 이해
과학이 제시하는 창조의 역사와 성경의 기록을 어떻게 함께 읽어야 할까? 성경과 과학을 짜맞추려는 일치론적 관점은 건강하지 못하다. 우리는 성경과 자연을 함께 통합적으로 보되 각각의 목적에 맞게 읽어야 한다.
결론: 과학의 도전
“과학은 기독교에 대한 도전인가?”라고 물어본다면 그에 대한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왜냐하면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담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과정이며 자연의 주인은 창조주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과학이 기독교에 던지는 진정한 도전은 과학이 발견해내는 창조의 새로운 비밀들을 우리가 어떻게 신학적으로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다. 과학은 창조주가 없음을 밝혀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창조의 비밀들을 밝혀낼 뿐이다. 우리가 창조주를 분명히 믿고 인정할 때는 창조의 내용이 어떤 놀라움으로 드러나더라도 혹은 과학이 새롭게 밝혀낸 결과가 주는 충격이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원칙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과학의 도전에 대한 기독교의 응답이다.
3부 과학주의 무신론의 도전
21세기 한국교회가 직면한 두 번째 도전은 과학주의 무신론의 도전이다. 기존의 무신론에 비해서 과학에 의존하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과학을 모든 진리의 척도로 삼는 과학주의적 성격이 강하다. 과학주의 무신론의 내용은 과학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이 발견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한 하나의 형이상학적 혹은 철학적 해석에 불과하다. 과학이 다루는 내용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철학적 해석에 관해서는 과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의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다. 과학의 결과에 대한 철학적 해석은 과학적 엄밀성을 가질 수 없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의 결과를 무신론적으로 해석하는 하나의 시각, 혹은 하나의 철학적 견해일 뿐이다. 과학주의 무신론의 공격에 대해서는 지성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들(리처드 도킨스, 대니얼 데닛, 샘 해리스,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의 주장이 무엇이고 기독교 신앙에 관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과학시대를 사는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복음을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제7장 과학주의 무신론의 주장과 한계
과학주의 무신론의 첫 출발점은 물질이 스스로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그다음 단계로는 물질이 진화해서 생명체가 탄생했고 결국 인간까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이 신 없이, 우연히, 어떤 목적이나 계획 없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탄생한 인간은 신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다양한 현상을 신이라는 카테고리를 통해 설명했다. 그러나 인간의 지성이 점점 발전하고 드디어 과학이 탄생하면서 과학을 통해 그동안 답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고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과학의 자리를 차지하던 신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종교는 기능을 상실했으며 이제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이 과학주의 무신론의 기본적인 흐름이다.
물질은 어떻게 기원했는가?
인간과 모든 생물체의 필수 요소인 탄소는 약46억 년 전 지구에 이미 존재하였다고 과학은 증명한다. 50억 년 전 지구와 태양을 포함한 태양계가 만들어질 때 이미 탄소는 존재한다. 초기 우주에는 탄소가 없었겠지만 90억 년간 별들이 탄생하면서 탄소가 풍성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별 먼지로부터 온 셈이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탄소가 별의 화학공장에서 생성되었다면 탄소를 만드는 핵융합 반응의 재료가 되는 수소나 헬륨은 어디서 기원했을까? 수소의 기원은 초기 우주 원자 시대에 75%수소, 25% 헬륨, 그리고 헬륨보다 조금 더 무거운 리튬이 약간 생성되어 우주를 구성했다. 그 후 100억년 이상 동안 별들이 생성되고 사라지며 우주 공간에는 수소와 헬륨 이외에 탄소를 비롯한 다양한 원소들이 생겨났다.
초기 우주의 원자 시대에 수소와 헬륨이 만들어졌다면 수소나 헬륨의 재료가 된 원자보다 작은 단위의 양성자나 중성자 및 전자는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양성자나 중성자, 전자는 기본 입자인 쿼크들이 결합하여 생성되었다. 가장 작은 기본 입자인 쿼크는 어떻게 기원한 것일까? 결국 물질의 기원은 우주 나이 0에 해당하는 빅뱅이라는 시점까지 거슬러 가게 된다.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들은 결국 에너지가 변하여 만들어진다.(E=mc², 즉 에너지=질량×빛의 속도 제곱) 즉 에너지가 존재해야 그 에너지가 바뀌어 입자가 되고, 그 입자에서 원소가 만들어지고, 그 원소들이 별 내부의 핵융합 반응을 저치면서 탄소를 비롯한 다양한 원소들이 된다. 그렇다면 원소를 구성하는 기본 입자인 쿼크 등 기본 입자로 변해버린 그 에너지는 어디서 기원하는 걸까? 질량과 에너지는 없어지거나 새로 생성되지 않고 보존된다는 질량보존의 법칙을 생각한다면 우주에 새로운 질량이 그냥 만들어질 수는 없다. 다만 에너지가 질량의 형태로 바뀌거나 질량이 에너지의 형태로 바뀔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빅뱅의 순간에 그 막대한 에너지는 과연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빅뱅의 순간은 과학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특이점에 해당한다. 빅뱅우주론에는 사실 빅뱅 자체에 대한 설명이 없다. 결국 물질(혹은 에너지나 질량)이 영원 전부터 존재한 무한한 대상인가, 아니면 어느 순간 혹은 어느 시점(가령 빅뱅의 시점)부터 존재하기 시작한 유한한 대상인가를 묻게 된다. 무에서 유로의 창조는 오랫동안 철학의 주제였다. 현대물리학에서도 요즘 무에서 유의 창조를 주장한다. 단, 그 무는 아무 것도 없는 무가 아니라 진공상태 즉 공간은 존재하지만 그 공간 안에 질량이 담겨 있지 않는 빈 공간을 의미한다. 양자 역학에 따르면 진공에서도 순간적으로 에너지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과학적 실마리를 주는 셈이다. 그렇다면 진공은 어디서 기원했는가? 우주의 나이가 플랑크 시간보다 더 작았을 때, 즉 우주의 나이가 0에 가까운 시점은 현대 과학으로는 아직 다룰 수 없다. 플랑크 시간이란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정의되는 대로 측정이 불가능한 시간이다(플랑크 시간, 약1초를 10⁴³개로 나누어 그중 하나인 아주 찰나의 시간). 향후 과학의 발전으로 밝혀질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금 수준의 현대과학이 물질의 기원을 엄밀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물질은 누가 만들었는가?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라는 도킨스의 질문에 창조주는 말 그대로 누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이다. 무신론자들은 물질도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 같다. 물질이 존재해야 진화도 인간 탄생도 될 텐데 물질이 어떻게 기원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무신론의 논증을 설득력 있는 논증일 수 없다. 즉 유신론이나 무신론이나 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전제를 갖고 있다.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설명은 신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낳기 때문에 답일 수 없다는 도킨스의 논리는 그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물질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설명은 물질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낳기에 궁극적인 답일 수 없다.
증거와 경험
과학주의 무신론은 철저히 증거주의에 입각한 주장이다. 하지만 과학적 증거가 없다면 사실로 여기지 않는 증거주의적 태도는 사실 우리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의 삶은 증명되지 않으며 과학적 증거가 불충분한 수많은 믿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은 과학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다. 믿음은 과학 외적 영역에 존재하는 수많은 진리와 가치처럼 우리 삶을 추동하는 하나의 세계관이며 우리 삶의 방향이다. 과학적 증거와 이성의 논리에 충실하다면 오히려 신의 존재에 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이 더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무신론자들의 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용기 있지만 최소한 그 주장을 과학주의에 헌신한다면 오히려 불가지론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신론자들은 물질이 스스로 존재했고 이 모든 자연세계는 신 없이, 목적 없이, 스스로 진화해온 것이라고 믿기로 선택할 수 있다. 이 또한 증거와 경험의 과학적 선택이라기 보다는 또다른 그들만의 믿음인 것이다.
자연 법칙은 어떻게 기원했는가?
과학주의 무신론에 던지는 두 번째 질문은 자연법칙이 어떻게 기원했는가다. 물질의 기원을 피하더라도, 에너지와 물질을 조율하고 조직하여 형태를 바꾸면서 별과 지구와 생물들을 탄생시키려면 우주 전체를 움직이는 자연법칙이 필요하다. 온 은하계가 중력을 비롯한 다양한 물리 법칙에 따라 생성되고 진화되고 유지된다. 우주와 생명체의 역사를 이끌고 지탱해온 자연법칙은 도대체 어디서 기원한 걸까?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은 아직 자연법칙의 기원에 관해 명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우주를 이해하게 되었을까?
세 번째 질문은 인식론의 문제다. 자연현상들이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게 수학으로 기술된다는 사실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신비감을 준다. 인간은 이성을 통해서 수학을 이해하고 수학이라는 언어를 가지고 우주의 비밀들을 파악하고 기술한다. 무신론자들은 우주가 3차원의 공간으로 생성되었기에 ‘거리역제곱의 법칙’이 패턴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다양한 물리법칙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주의 속성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위에서 제시한 세 가지 문제는 과학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형이상학 및 철학의 영역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다. 기독교는 이 세 가지 질문에 어떻게 답할까? 스스로 존재하는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였고 그래서 에너지와 물질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지식의 풍요함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동일하고 오래 참고 신실하신 성품을 반영한 창조세계를 창조하셨고 창조세계를 운행하는 원리로서 자연법칙을 부여하셨다. 그래서 자연세계는 자연법칙에 의해 질서 있게 운행되고 인과관계를 따르며 예측 가능하기도 하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창조했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창조세계를 다스리고 돌볼 대리자로 세우셨다는 의미다. 자연세계를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지성적 능력을 부여하셨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하나님의 계획과 운영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나, 무신론자들의 주장 또한 과학을 넘어서 철학적 가정에 기초할 수밖에 없다는 면에서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과학만으로는 어느 쪽 손을 들어 줄 수는 없어도, 과학을 넘어서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인 주제를 포함하여 전체 우주에 관한 질문들을 던져본다면 무신론의 설명보다는 유신론의 설명이 훨씬 더 포괄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을 명확히 이해하는 일,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명확히 파악하는 일, 그리고 신앙의 지적 토대를 굳건히 다지는 일이다.
제8장 과학은 무신론의 증거가 될 수 있나?
우주의 시작에 신은 필요하지 않다?
스티브 호킹은 <위대한 설계>에서 우주가 창조되는 데 신은 필요 없다고 주장했고, <시간의 역사>에서는 우주는 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과학 법칙에 의해 저절로 시작되었음을 밝혔다고 선전한다. 우주는 마치 인간을 탄생시키기 위해 잘 준비된 것처럼 보이며, 우주에 중력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국 우주는 무에서 저절로 창조된다고 설명한다. 그는 M이론에서 유추되는 수많은 우주 중에 우리가 사는 우주가 저절로 탄생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우주의 시작이 과학 법칙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호킹의 주장은 다중우주를 설명하는 M이론으로 매력적인 과학이론이긴 하지만 과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을 만큼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신은 신의 창조행위나 자연세계와 반응하는 방식이 제우스 신이 번개를 내려 무언가 만들어내는 방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망상에 불과한가?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이란 책은 과학자들에게 오히려 과학의 권위를 손상시켰다고 비판받는다. 신학자들에게는 신학과 종교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이하라고 비판받고, 무신론자들에게 조차 열광적 과학근본주의라고 비판받는다.
신앙을 갖는다는 건 비합리적이고 유아적일까?
도킨스는 신을 믿는다는 것은 산타를 믿는 것처럼 비합리적이고 유아적이라고 비난한다. 어릴 때 믿다가 사회에 나가 성인이 되면 유아적 신앙을 버린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도킨스의 신>에서 어린 시절 신을 믿지 않다가 성인이 되어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고 반격한다. 이 사실은 신에 대한 믿음은 산타에 대한 믿음처럼 유아적이라는 도킨스의 유비가 별로 설득력이 없음을 보여준다. 도킨스와 비슷한 생물학자이며 인간 게놈 연구로 세계가 주목하는 프란시스 콜린스 박사는 무신론자였다가, 의과대학 재학 중에 신자가 되었다고 <신의 언어>에서 고백한다. 그는 철저한 진화과학자이지만 신과 진화를 동시에 믿는 양립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도킨스는 양립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만들어진 신>에서 주장하였다.
과학주의 무신론은 과학이 아닌 과학에 대한 해석이다
과학 자체는 유신론이나 무신론에 대해 중립적이다. 도킨스 같은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은 과학을 토대로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하나의 철학적 해석에 불과하다. <위대한 설계>에서 우주 창조에 신이 필요 없다는 주장도 과학이 밝힌 내용을 무신론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생물들의 진화 현상도 무신론의 증거가 아니라 과학의 결과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으로 이해해야 한다. 반대 해석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프란시스 콜린스 박사는 <신의 언어>에서 생물진화를 설명한 진화 이론이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잘 설명해준다고 해석한다. 제니퍼 와이즈맨같은 그리스도인 천문학자도 우주 팽창과 빅뱅우주론을 수용하면서 이것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주와 은하와 별들을 만드신 과정이라고 고백한다. 결국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의 주장 중에서 어디까지가 과학이고 또 어디서부터가 철ㄹ학적 해석인가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과 과학에 대한 해석을 구별하는 일은 결국 과학자의 몫이다. 우리에게는 진화생물학, 뇌과학, 우주론 등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활동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과학자가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교회는 전문성의 부재라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다. 한국의 창조과학회는 그런 면에서 전문성이 부족하다. 전공 분야도 아니면서 같은 과학자라고 맹목적인 설명으로 설득시키기엔 한계가 있다. 젊은 우주창조론이 대표적이다. 교회에서 대부분의 크리스찬 과학자들이 신앙과 과학을 이원론으로 해석하여 별로 깊이 있게 신학적 담론에 관여하지 않고 있는 것도 문제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을 통해 섭리하시고 창조하신다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과학을 신앙의 적으로 오인하고 창조과학식 주장으로 과학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은 과학을 꺼리게 된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대한 설명이며, 과학 자체가 하나님의 작품임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과학을 잘 공부하여 과학이 무신론으로 해석되는 철학적 주장이라고 분별해줄 명석한 크리스찬 과학자들이 많아 져야 한다. 과학이 드러내는 놀라운 창조의 비밀들을 소개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을 전공하고 또 훌륭한 과학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다.
9장 자연현상이 과학으로 설명되면 무신론이 될까?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자연현상은 신을 배제하는가? 이 질문은 과학적 무신론을 극복하는데 핵심적인 질문이다. 현대인의 삶에서 경험하는 모든 일은 자연법칙의 인과율에 따라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근대가 시작되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많은 자연현상들의 인과관계가 밝혀지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졌다. 그러다 보니 우주 전체는 그저 자연법칙에 따라 운행될 뿐이고 신의 흔적은 감지할 수 없는 듯하게 되었다. 자연세계의 모든 현상과 법칙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시각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이 직접적으로 검출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스레 무신론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떠한 방식으로 자연현상을 붙들고 섭리하고 계시는 분이다. 자연현상이 과학으로 잘 설명이 되지만 그 원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지금도 세상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자연법칙을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다.
자연적 방법은 신의 섭리가 아닌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방법은 기적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님은 자연법칙을 통해 창조하고 섭리하신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방법이 아니라 자연세계 안에서 자연적인 방식으로 일하시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의 창조과정에 대해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방법으로 하나님의 창조방식을 제한한다. 그러나 인과관계로 설명이 가능한 자연적 방법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편견이다. 하나님의 창조방법이나 섭리의 방법이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이어야만 한다고 우리가 하나님을 제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과관계를 밝히는 과학적 설명은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는다. 과학은 단지 인과관계를 설명할 뿐이지만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기독교의 신앙에서 보면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셈이다. 만일 “자연적”이라는 이유로 생물진화나 우주진화는 하나님의 창조 개념에 반대된다는 창조과학의 주장이 옳다면 생명의 탄생과정이나 중력법칙으로 움직이는 태양계의 운동들. 심지어 기상현상도 모두 하나님의 창조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자연적 과정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하나님을 배제한다고 주장한다면 하나님은 아직 과학이 풀지 못한 영역에만 남아있는 소위 “틈새의 신(God of the gaps)”으로 전락하고 만다. 특별 창조만을 고집하는 창조과학자들이 우주 진화나 생물 진화처럼 자연을 통한 창조는 아예 창조로 인정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적 안에 하나님을 가두다
우리는 초자연적 세계 안에서만 하나님을 보는 편견에 빠지기 쉬운데 하나님의 창조 방법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 결과 자연법칙에 따라 흘러가는 듯한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적의 세계 안에 하나님을 가둬두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무엇을 해주시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갈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심각한 이원론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지 않는 상황, 그럼에도 우리의 일상과 자연세계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신뢰해야 하다.
하나님의 질서 있는 자연법칙이야말로 기적이다
과학적으로 따져본다면 인과관계를 밝힐 수 없는 어떤 초자연적 현상을 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자연법칙의 존재 그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다. 우주 공간의 모든 구성원이 동일하게 자연법칙을 따르는 것이 신비롭지 않은가? 우리 은하 내의 1,000억 개가 넘는 별들이 모두 동일한 중력 법칙을 따른다는 것, 100억 년이 넘는 우주의 역사에서 1,000억 개가 넘는 은하들이 동일한 중력 법칙과 자연법칙을 따라 생성되고 사라지는 규칙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자연법칙에 의해 우주가 운행된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진다. 하나님은 많은 경우에 자연세계에 부여하신 자연법칙을 사용해 우주 전체를 주관하고 섭리하신다. 과학이 밝히는 자연법칙들은 창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무언가를 만드시지 않더라도 자연법칙을 사용하여 일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신뢰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무신론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훈련이다.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통해 창조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사실 과학주의 무신론의 공격은 허수아비 공격이 되고 만다. 그들은 자연현상이 신 없이 설명되므로 신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거꾸로 자연현상이 인과관계로 설명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세계에 자연법칙을 부여하시고 그것을 통해 섭리하시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
10장 창조의 특성
하나님이 일하시는 두 가지 방식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방식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적인 방식인데 이것을 즉각적 창조 혹은 특별 창조라고 부를 수 있다. 무로부터 창조라는 기독교의 창조 교리를 따라, 창조세계가 처음 생겨난 그 시점을 상상해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방식은 초자연적인 방식의 특별 창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는 두 번째 방식은 자연법칙을 통한 창조다. 이것은 창조세계 내의 원인들과 자연법칙을 토대로 자연적 메커니즘을 사용하여 창조하는 방식이므로 점진적 창조 혹은 자연적 창조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기적이라는 방식에 국한시키는 것은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이다. 자연 세계와 자연법칙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연적 창조 방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계획과 뜻을 드러내고 또 이를 실행하실 수 있는 분이다. 기적적 창조방식은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과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반면에 자연적 기작(mechanism)을 사용한 자연적 창조방식은 당연히 과학적 탐구의 대상이 된다. 과학이 자연세계의 인과관계를 밝히고 설명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런 자연적 과정을 통해 세계를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과학 지식은 자연적 창조방식을 사용한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를 밝혀내는 유용한 결과라고 여길 수 있다.
개입론과 비개입론
하나님의 섭리 방법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하나는 개입론(interventionism)이고 다른 하나는 비개입론(non-interventionism)이다. 개입론은 초자연적인 신이 기적적인 방식으로 자연세계에 개입하여 일한다는 견해이고 비개입론은 하나님은 자연세계에 개입하지 않고 자연법칙을 통해 자연적인 방식으로 섭리한다는 견해다. 하나님이 자연세계 안에서 어떻게 일하시는 가에 대한 이 두 가지 견해 중에 어느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 중에 자연법칙을 통한 창조가 분명히 들어있다는 점이다. 비개입론과 이신론은 초자연적인 간섭을 배제한다는 면에서는 비슷하지만 창조주와 창조세계의 관계에 대한 이해는 전혀 다르다. 이신론이 신이 우주에 전혀 간섭하지 않고 우주가 스스로 운행되도록 했다는 견해라면 비개입론은 하나님이 직접 자연세계로 들어와서 기적적으로 무엇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연세계를 붙들고 섭리하신다는 견해다.
무신론 vs. 이신론 vs. 기독교 유신론
자연이 신이라고 믿는 범신론이나 신은 자연세계에 관여하지 않고 자연세계는 신과 관계없이 스스로 운행된다고 보는 이신론(理神論, deism)과 달리 기독교는 하나님을 자연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분이시며 동시에 자연세계와 소통하며 섭리하시는 분으로 고백한다. 뉴턴의 기계론적 세계관이 유행하던 19세기의 이신론은 초월과 내재 사이에서 초월 쪽으로 치우친 견해다. 과학은 무신론을 지지하지도 유신론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과학은 그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에 대해서 세 가지 철학적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첫째는 무신론인데 이는 자연현상이 과학으로 잘 설명되기 때문에 신이 필요하지 않으며 그래서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고 주장한다. 둘째는 이신론의 입장인데, 이는 신이 우주를 창조했는지는 모르지만 신은 자연세계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신의 부재를 주장한다. 셋째는 기독교 유신론인데, 이는 과학이 설명하는 자연현상의 인과관계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유신론은 자연법칙을 통해 인과관계가 일어나는 과정은 무신론의 증거나 신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이 창조세계를 붙들고 섭리하는 증거라고 이해한다.
계속적 창조
비개입론과 관련해서 우리는 “계속적 창조(creatio continua)”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도 우주 공간에서는 새로운 별들이 탄생하고 지구에서는 새로운 지층과 새로운 생명들이 탄생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의 창조가 무로부터의 창조라면 그 이후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조된 세계를 보존하는 것일 뿐이라는 견해를 가진 신학자들은 계속적 창조 개념이 비성경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근대 과학 이전 시대에도 아퀴나스와 같은 중세의 신학자는 창조가 계속된다는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근대 과학의 발전 이후 계속적 창조는 피할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우주나 지구가 형성된 기간이 매우 길다는 것이 과학을 통해 알려졌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일어난 첫 창조의 시점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계속되었음을 과학이 증언하기 때문이다.
계속적 창조는 진화현상과 같이 시간에 따른 변화 및 신과 자연의 관계를 중시하는 과정신학이나 범재신론의 논의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에서도 계속적 창조는 충분히 수용될 수 있는 개념이며 또 수용해야 할 개념이다. 계속적 창조의 경우, 인과율과 같은 자연적 창조방법을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정론이나 이신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계속적 창조를 단순히 자연적 인과과정이 아니라 성령의 내재성을 보여주는 창조행위라고 보면 전통적 유신론의 관점과 부합한다. 계속적 창조는 하나님이 자연법칙과 인과율을 사용한 창조이므로 자연적 창조라고 부를 수 있고 이는 과학탐구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연세계와 어떻게 소통하시는지 그 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과학의 탐구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자연세계 내의 우발성이나 창발성 혹은 인과율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어떻게 자연적 기작들을 사용하여 섭리하는지는 과학으로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신의 창조 행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그것이 기적적 창조이든 자연적 창조이든 간에 본질적으로 신학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확연히 구별되는 이원론적인 범주로 이해하기보다는 초월성과 내재성이 동시에 그리고 상호보완적으로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4부 근본주의와 문자주의의 오류를 넘어
11장 주일학교를 떠나겠다는 선언
교회에서 지구는 약 1만 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창조과학을 배운 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걸 깨닫고 갈등하고 고민하다 언젠가 과학 혹은 신앙 중 하나를 선택하고 버리는 불운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과학주의 무신론과 맥을 같이하는 진화주의가 미친 악영향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내용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반과학적인 창조과학도 그 폐해가 만만치 않다. 학교와 교회에서 배우는 과학과 성경이 서로 모순된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이 신앙을 흔드는 단초가 될 수 있다. 그 이유 중 한 가지는 성경을 저자의 의도대로 제대로 읽지 못하고 문자적인 표현에 갇혀서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데 있다.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읽는 이런 경향은 19세기에 등장한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생성된 근본주의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다.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근본주의의 취지 자체는 좋은 것이나 성경을 오로지 문자적으로 보고 그 문자 안에 신앙을 가두어버리거나 인간의 경험과 언어로는 다 파악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문자적 표현 안에 가두어두는 근본주의적 경향은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할 잘못된 태도다. 마크 놀은 근본주의가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지 말라고 강조했으며,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을 탐구하는 지성적 작업, 곧 기독교적 사고를 억제하는 악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한다. 결국 근본주의는 심각한 반지성주의를 불러왔고, 성경읽기에 관해서도 교조적인 문자주의를 낳았다.
창조과학의 토대가 되는 20세기 근본주의는 근대 과학의 발전 이후에 지배적인 세계관으로 등장한 과학주의 혹은 증거주의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과학적 사고방식이 권위를 갖게 되면서 증거주의 혹은 과학주의가 진리에 대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 것으로 여겨지고 심지어 기독교 신앙에도 증거주의와 과학주의의 영향이 들어온다. 신에 대한 신앙을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영역으로 끌어내려 입증하려는 과학주의적 흐름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무신론이라 불리는 과학주의 무신론을 등장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으로 신을 증명하고 성경의 내용을 증명하려는 근본주의를 낳았다. 종교비평가인 카렌 암스트롱은 『신을 위한 변론』에서 근본주의와 새로운 무신론 현상을 거울처럼 대칭적으로 분석하면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미토스를 버리고 로고스에 기운, 완전히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신앙을 갈구하며 종교사에 유례없는 문자주의로 성서를 해석했다. 미국에서 프로테스탄트 근본주의자들이 이른바 “창조과학”이라는 이념을 발전시켜 성서의 신화들이 과학적으로 입증 가능하다고 여기고 진화론이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천지창조 이야기와 모순된다고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운동을 벌여왔다’고 한다. 과학 자체가 주는 도전 및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의 도전과 함께, 근본주의적 문자주의의 오류는 한국교회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12장 지구의 연대에 관한 혼란
과학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큰 오류 중 하나는 지구의 연대와 관련된다. 지질학은 지구의 역사를 46억 년 정도로 설명하며, 대기과학은 생명체가 존재하기 시작한 것은 최소한 30억 년 이전이라는 결론을 갖고 있다. 주류 과학의 결론과는 판이하게 다르게 창조과학은 지구의 나이가 1만 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구의 생성 연대를 1만 년으로 보는 젊은 지구 창조론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날(day)을 24시간으로 보고 창조의 기간을 문자적인 6일로 해석하고 족보 계산을 통하여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기간이 약 6천 년에서 1만 년 전의 시점에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과학이 제시하는 견해, 즉 지구와 우주가 약 1만 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젊은 지구론은 천문학, 지질학, 대기과학, 생물학을 포함한 현대과학이 통일되게 제시하는 지구나 우주의 역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지구의 연대 문제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독교 신앙을 지킬 것인가 혹은 버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으며, 과학을 부정하는 창조과학 때문에 많은 지성인들이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창조과학을 신봉하는 자들이 고전1:27을 인용하며 세상의 지혜로운 과학자들이 보기에는 젊은 지구론이 어리석은 것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 어리석게 보이는 젊은 지구론을 택하여 과학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 그들의 주장을 변호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지구의 연대가 길고 짧은지는 과학이 다루어야 할 내용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지구의 연대문제를 정확히 이해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첫째, 과학이 걸림돌이 되어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서다. 둘째, 비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지 않도록, 복음의 진보를 위해서 이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지구의 연대는 더 이상 과학의 이슈가 아니다
1부에서 기술했듯이 현대 과학은 지구를 포함한 우주의 연대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자세히 밝혀냈다. 지구 연대는 더 이상 과학의 이슈도, 과학의 연구 주제도 아니다. 하지만 지구 연대가 46억 년이라는 지질학의 결론이 틀렸고 그 대신 젊은 지구론이 옳다며 제시되는 창조과학의 논거들은 창조과학자들의 강의를 통해 교회를 거점으로 전파되고 인터넷에도 창조과학 강의는 넘쳐난다. 반면에 교인들이 교회에서 주류 과학자들의 과학 강의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현대 과학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지만 창조과학은 교회 앞마당에서 굴러다닌다. 이런 현상은 결국 한국 기독교 안에 굉장히 심각한 정보의 불균형이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과학자들의 설명은 제대로 들을 기회가 없는 반면, 흔히 사이비 과학으로 지칭되는 창조과학 내용만 접하다 보니 마치 지질학이나 천문학 같은 현대 과학이 창조과학과 경쟁이라도 하는 걸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창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과학자들 앞에서 발표하거나 연구논문을 써서 입증하려 않는다. 자연과학 그 어느 분야에서도 지구의 연대가 1만 년이라는 주장을 과학적 증거로 입증한 창조과학의 연구 결과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 분야의 과학자들에게는 상식이다.
창조과학은 젊은 지구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대신에 지구의 나이가 46억 년가량 오래되었다는 지질학의 정설과 모순되어 보이는 반증들을 찾아 제시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하지만 그들의 반증들은 대부분 오류이거나 왜곡되었거나 혹은 과학 연구가 필요한 내용을 침소봉대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창조과학자들이 제시하는 주장 중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내용들과 지엽적인 반증들이 과학적인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젊은 지구론을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계는 아직 설명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다양하고 놀라운 새로운 지식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줄 뿐이다. 창조과학이 교회를 중심으로 전파되면서 생긴 정보의 불균형은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창조과학과 지구의 연대가 오래되었다는 지질학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두 가지 이론인 것으로 심각한 오해를 낳았다. 그래서 교회를 통해 창조과학의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들어온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창조과학이 내세우는 젊은 지구론이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지구의 연대가 오래되었다는 지질학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는 경우가 많다. 열심 있는 일부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이 창조과학자들의 주장하는 증거들은 오랜 지구 연대에 대한 반증이 되지 못함을 하나씩 입증해왔다. 하지만 창조과학자들이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기 위해 기존의 과학을 공격해온 역사를 보면 놀랄 만한 편집과 왜곡의 역사가 존재한다.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는 이재만은 시카고대학의 고생물학자인 라우프의 방사성동위원소연대측정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라우프가 언급한 핵심 결론은 빼버리고 마치 연대측정법의 전문가가 그것의 오류를 인정했다는 식으로 인용하며 고의적인 왜곡과 편집을 하고 있다. 창조과학자 우드모랩이 채취한 암석의 연대측정에 대한 왜곡 사례들은 참고문헌을 제대로 안 읽었거나 아니면 일부러 원저자의 의견과 다르게 편집해서 인용했거나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창조과학자들이 엄밀한 과학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지구가 젊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과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하고 지질학의 결론을 흠집 내는 네거티브 공격으로 제한되며 그마저도 많은 경우 오류임이 밝혀졌다. 창조과학이 정말로 옳다면 전문가가 아닌 교인들이 모인 교회에서 오랜 지구 연대가 틀렸다는 프로파간다를 설파할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링 위에 올라와서 과학의 규칙을 따라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면 될 일이라는 과학자들의 비판에 대해서 창조과학자들은 음모론을 제기한다. 그들은 과학계가 자연주의와 진화론에 물들어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과학적 주장을 제시해도 공정하게 취급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주장은 변명에 불과하다. 창조과학이 주류 과학이 될 수 없는 이유는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지구와 태양계의 연대가 수십억 년 오래되었다는 과학계의 정설은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과 경쟁하고 있지 않다. 그런 오해는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심각한 정보의 불균형 때문에 생겨났을 뿐이다. 지구의 연대를 어떻게 보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문제는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 해석과 관련된 신학적 이슈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지구 연대 문제는 더 이상 과학의 이슈가 아니다.
창조과학 난민
지구의 나이가 1만 년임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라는 그 목사님의 흔들림 없는 오해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걸까?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하는 것이 참된 창조의 믿음일 텐데, 어쩌다가 젊은 지구론이 창조를 믿는 기준이 되어버린 걸까? 창조과학자이자 변증가인 휴 로스박사는 생물진화론은 반대하지만 오래된 지구 연대와 오래된 우주 나이를 수용하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로 불린다. 천문학이나 지질학의 결과는 수용하지만 생물진화는 부정하는 입장이다. 창조과학의 주류는 젊은 지구론자들이며 젊은 지구를 부정하는 오랜 지구 창조론자들은 그들에게 이단과 같은 존재였다. 로스 박사는 젊은 지구론자들이 오랜 지구론자들을 타협한 그리스도인으로 취급하면서 창조를 믿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일을 그만 멈추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그는 미국교회를 향해서,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나 과학자들이 젊은 지구론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신당하고 결국 교회를 떠나 헤매는 안타까운 일들이(창조과학 난민) 발생함을 지적하면서 젊은 지구론을 기준으로 창조 신앙을 판단하는 비성경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기독교 신앙은 이성과 과학을 초월한다. 따라서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내용을 꼭꼭 덮어놓고 모든 답이 과학에 있다는 식으로 과학주의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의 신비와 창조주의 전능하심을 외면하고 과학으로만 창조를 다루어야 한다며 창조 신학의 풍성함을 깎아내자는 주장도 결코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알려주는 지식을 신앙으로 이해하고 신학 안에 품자는 말이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는 더 자세히 드러나는 셈이 아닌가. 교회는 창조과학 난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창조과학 난민이 되어버린 그리스도인들을 수용해야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비난의 화살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 교회를 떠난 창조과학 난민들이 단지 답답하고 무책임한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신앙까지도 버리게 되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13장 다양한 창조론
기독교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다
창조과학이 기독교의 유일한 목소리일까? 분명한 것은 젊은 지구론을 신봉하는 창조과학이 기독교의 유일한 목소리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예수를 믿기 위해 창조과학을 꼭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을 출판하기 훨씬 오래전부터 기독교 내에는 창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존재했다. 창조를 보는 시각에 다양한 입장이 생긴 이유는, 첫째, 창조를 다루는 성경 본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가에 관해서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고, 둘째, 자연의 역사를 밝힌 과학적 결론에 대해서 얼마만큼 신뢰하고 수용할 것인가에 관해서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창조론의 다양한 입장에 관해서는 성경 해석이 올바른지 건강한 신학을 통해 점검해야 하고, 자연에 대한 해석이 올바른지 엄밀한 과학을 통해 판단해야 한다.
1) 고대와 중세의 창조론
이것은 창조세계를 철저히 지구인의 관점에서 눈에 보이는 그대로 이해한 내용이다. 근대 과학이 발전하기 이전이라 창조에 관해 성경을 통해서만 힌트를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성경은 근대 이후 생겨난 과학적 개념을 설명하거나 과학적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자연이라는 책 대신에 창세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주와 인간을 6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사물이 즉각적인 방법으로 완성된 형태로 창조되었다는 관점이다. 또한 창세기의 족보를 근거로 시간을 계산해서 하나님의 천지창조 사건이 약 6천 년 전에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이런 경향은 근대 과학이 성립되기 전 종교개혁 시대까지 계속되었다.(*발제주, 그러면 누가 문제인가. 그러면 앞으로 미래에 발전된 과학은 또 어떻게 앞 세대를 기억할 것인지...결국 당대 나름대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종교)이 아닐까. 오히려 과학을 하나님의 창조 안에 견강부회 하는 것은 아닐까)
2) 간격 이론(gap theory)
1700년대 지질학이 발전하면서 지구의 나이가 6천 년이라고 볼 수 없는 과학적 증거들이 등장했다. 문자적 창세기 해석과 지질학의 결론 사이의 모순은 두 가지 책에 대한 해석이 올바른가에 관한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특별계시인 성경을 제대로 해석한 것인가에 대한 다양한 신학적 질문과 검토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지구의 연대, 혹은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이나 기간 및 순서 등에 관한 지식을 전해주려고 쓰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간격 이론은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해석과 지질학의 오래된 지구의 연대를 조화시키려는 시도이다(조화주의 내지 일치주의).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긴 시간 간격이 있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즉 3절부터 나오는 6일의 창조 기간 이전에 긴 시간이 있었고 지구는 이미 오래전에 창조되었다고 보는 관점이다. 간격 이론은 1절의 첫 창조가 끝난 후 긴 시간(간격)이 흘렀고, 그 이후 6일 동안 재창조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다. 그래서 창세기 1:3부터 기록되는 창조 기간을 6일로 해석한 전통적 해석과도 크게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간격 이론은 지구의 오랜 연대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은 여전히 최근에 창조된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지구에 비해서 태양과 달과 별들의 연대가 젊다는 모순된 주장이 나온다.
3) 날-시대 이론
조화주의 입장에서 나온 또 하나의 창조론은 날-시대(day-age theory)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을 24시간으로 이루어진 하루로 보지 않고 매우 긴 기간으로 해석하는 관점이다. 즉 하루라는 개념이 100만 년 혹은 10억 년처럼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이론은 여전히 조화주의 입장에서 창조의 순서를 문자적으로 보고 과학 기록처럼 읽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다양한 가정을 해야 하며 그 가정들은 종종 매우 작위적이다.
4) 홍수지질학 젊은 지구론
젊은 지구론은 1920년대 조지 맥크리디 프라이스라는 안식교인이 만든 홍수지질학을 통해서 지질 현상을 이해하려는 관점이다. 홍수지질학에 따르면 지구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약 6천 년 전에 창조되었고 지표면의 화석의 기록은 단지 노아 홍수 때 죽은 동물들의 화석이라는 것이다. 홍수지질학은 지질학자들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지질 연대는 단지 화석의 순서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프라이스가 발견하고 제시하는 역단층(화석의 순서가 지질학에서 예측하는 순서와는 정반대로 복잡한 종의 화석이 밑에서 발견되고 단순한 종의 화석이 위에서 발견되는 지층)은 지층이 만들어진 뒤에 위아래가 뒤집어진 경우이다.
5) 오랜 지구 창조론: 점진적 창조론
근대 과학의 성장 과정에서 특히 지질학과 천문학이 발전하면서 새로 등장한 견해가 오랜 지구 창조론이다.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를 과학적인 진술이 아니라 신학적인 진술로 받아들인다. 가령 6일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인 의미가 아니라 창조주의 창조 역사를 인간의 한 주간의 노동에 비유한 것으로 이해한다. 간격 이론이나 날-시대 이론과 차별성을 갖는 오랜 지구론의 특징은 하나님이 긴 시간 동안 점진적으로 창조하셨다는 관점을 수용하며 창세기 1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도 과학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 경향을 갖는다. 이 이론을 두 개의 이론과 구별하여 점진적 창조론(progressive creationism)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오랜 지구론은 지질학이나 천문학과는 달리 생물학의 결과들을 여전히 수용하지 않는다. 오랜 지구론은 생물이 진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적적이고 즉각적인 방법을 통해 하나하나의 종을 따로 만드신 것으로 해석한다. 종의 생물학적 발생순서는 인정하지만 종의 분화를 통한 생물진화는 인정하지 않으며 대신 하나님께서 지구의 역사 중간 중간 자연세계에 개입하여 기적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종을 즉각적으로 창조하셨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식물과 동물을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성경의 표현에 주목한다. 크게 보면 오랜 지구론이나 젊은 지구론 둘 다 생물진화를 반대하는 반진화 운동인 창조과학의 흐름 안에 있다. 그러나 다수였던 젊은 지구론자들이 소수인 오랜 지구론자들을 비난하고 공격하자, 지구의 연대에 대한 세부적인 논의를 덮어두고 진화를 반대하는 깃발 아래 협력하자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난다. 이 운동이 바로 지적설계론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창조주를 직접 제시하지 않는 대신 신과 같은 지적인 존재에 대한 증거를 과학적으로 탐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친다. 즉 자연세계 안에는 창조주로 여길 만한 어떤 지적인 존재의 흔적이 있으며 그 흔적을 과학적으로 탐지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6) 진화적 창조론(Evolutionary Creationism or Theistic Evolutionism)
19세기 후반 이후 이어진 생물학의 발전은 자연이라는 책에 담긴 생물의 창조 과정에 대한 놀라운 비밀들을 밝혀왔다. 생물학의 발전은 생물의 종도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혹은 즉각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자연법칙과 자연적 과정을 통해 긴 세월에 걸쳐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놀라운 발견이었다. 진화적 창조론은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는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지만 생물들은 직접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했다고 보는 오랜 지구론과는 달리 생물들도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다고 보는 견해다. 다시 말해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에 나오는 식물과 동물 및 인간의 창조를 즉각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창조의 방법을 다양한 관점에서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창조론들, 즉 고대 창조론에서 진화적 창조론까지의 흐름은 결국 과학의 발전 과정과 성경 해석의 역사를 반영한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완벽하게 읽어낼 수는 없지만 그럼에 불구하고 자연이라는 실재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창조 역사에 새롭게 눈을 뜬다. 그리고 성경이라는 책도 더 정확히 읽어낼 수 있게 된다. 자연과 성경이라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는 쪽으로 발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발전에 따라 성경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4장 과학의 발전과 성경 해석의 변화
기독교의 두 가지 핵심 교리는 첫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고 둘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흔히 창조론이라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전제를 가진 창조론은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다.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진리는 성경이 명백하게 증거하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의 방법이나 순서 혹은 연대와 같은 문제에 관해서는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성경 해석(신학)과 자연 해석(과학), 이 두 가지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책을 각각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해석의 역사가 흘러왔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성경 해석은 성경과 다르다
창조론 안에 다양한 견해가 있는 이유는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낸 새로운 과학의 결과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출판된 『창조 기사 논쟁』에서는 과학의 결과를 직접 고려하지 않고 성경 본문 자체만을 가지고도 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해석에 대한 다양한 의견 차이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창조 기사에 관해 서로 다른 해석이 생기는 이유는 첫째, 우리 인간의 성경 해석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지만 우리의 해석은 같은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둘째,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가에 대해서, 즉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 성경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따라서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는 성경이 딱히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본문이 앞에서 제시한 다양한 창조론 중에서 어떤 입장을 더 지지하는가를 결론짓는 일은 근본적인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반대로 똑같은 이유에서, 즉 성경은 창조의 방법을 명확히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창조론이 각각 양립할 수도 있다.
성경 해석에 과학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지 않은가?
다양한 창조론의 견해 중 어떤 것이 더 적합한지를 판단할 때 성경 해석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한 해석인 과학을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혹자는 과학으로 성경을 판단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성경과 과학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격이 맞지 않다. 성경은 자연과 대비되고, 성경을 읽어내는 입장인 성경 해석은 자연을 해석하는 입장인 과학과 대비시켜 비교해야 격이 맞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과 우리의 성경 해석 사이에는 긴 간격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우리는 결국 우리의 성경 해석과 과학(자연에 대한 해석)을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창조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성경 해석을 성경 자체와 동일시하고 거기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성경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옳지만 자신들의 성경 해석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다. 더군다나 성서신학의 배경이 약하거나 없는 창조과학자들이 성서신학자들을 가르치려는 모습은 유감스럽다. 성경은 진리이지만 과학은 변하기 때문에 진리가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하고 묻는 사람들도 있다. 과학의 내용이 변한다는 것은 사실이고, 인간의 성경해석이 불완전하듯 자연에 대한 해석인 과학도 불완전할 수 있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실재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영원한 근사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이 변한다는 말은 과학이 보다 더 실재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과학의 가변성은 오히려 과학의 장점이다. 성경 해석 과정에도 비슷한 면이 있다. 주어진 성경(계시)은 불변하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은 계속 변해왔다. 왜냐하면 우리의 성경 읽기는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성경이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이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이 변하는 것도 성경의 권위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장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만큼 성경이 원래 의미하는 메시지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앙의 성숙을 뜻한다. 하지만 과학을 통해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많은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여전히 우려를 나타낸다.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인 자연을 보다 명확하게 읽어냄으로써 알게 된 창조세계에 관한 지혜를 통해 성경을 조명하는 일이 과연 과학을 성경위에 두는 잘못된 행동일까? 동의하기 어렵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알려진 사실들이 창조에 관한 전통적인 성경 해석에 도전할 경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 가지 입장이 두드러진다. (1) 전통적 해석을 고수하고 과학을 부정하는 견해, (2) 전통적 해석을 넘어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견해, (3) 전통적 해석을 수용하지만 창세기는 과학적 질문에 답하려는 의도가 없다고 보는 견해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살펴보자.
달은 스스로 빛을 낼까?
창조과학자들은 주로 첫 번째나 두 번째 방식을 많이 따른다. 반면 과학을 수용하는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세 번째 견해를 수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요한 점은 세 번째 해석을 따른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한 사람들은 지구가 움직일 수 없다며 지동설이 틀렸다는 첫 번째 방식을 따랐고, 하늘(천국)에 가는 방법은 성경에서 배우고 하늘이 어떻게 가는지(운동하는지)는 자연에서 배우라던 갈릴레이는 세 번째 방식을 따른 것이다. 성경을 과학 텍스트로 읽지 말자고 하면 마치 성경을 허구나 신화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의 길은 성경에서, 창조의 역사는 자연을 통해 배워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구원에 관련된 내용 및 하나님에 관한 내용은 성경이 최종적 권위를 가지며 성경을 통해 답을 얻어야 한다. 반면에 자연은 하나님에 관한 힌트를 담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성경의 원리에 맞게 살아가야 하기에 성경이 삶의 표준이 되지만, 구체적인 정보, 곧 어떻게 해야 하는 가에 관한 내용은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서 얻어야 한다. 성경은 “누가” 창조주이고 “누가” 구원자인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반면에 자연이라는 책은 창조주가 “어떻게” 우주를 창조하고 섭리하는 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고 다양한 창조론의 견해 중 실제 창조세계와 부합하는 견해를 찾으려 한다면 성경과 더불어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인 자연이라는 책을 참조해야 한다. 성경뿐만 아니라 자연도 하나님이 주신 책이다. 그리고 과학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내는 방식이며 해석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의 결과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15장 문자주의 해석의 한계를 넘어
성경과 자연을 정확하게 해석하기 위한 노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과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 매우 어려웠다. 고대나 중세와 달리 근대는 과학의 혁명적인 발전을 통해 자연세계에 관해 수많은 새로운 지식이 쏟아져 나왔다. 더불어 성경 해석의 역사도 의미 있는 변화를 기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한국교회는 여전히 고대와 중세 시대의 성경 해석에서 좀처럼 못 벗어나는 한계를 갖고 있다. 특히 지구의 연대와 관련하여 고대와 중세의 창조론인 젊은 지구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창조론의 다른 견해들은 이단시하고 있다. 이런 문자주의 해석의 한계는 21세기 한국교회가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이다.
진화와 진화주의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은 진화라는 개념에 대해 불편해한다. 그러나 진화라는 단어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진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풀려면 진화와 진화과학, 진화주의를 구별해야 한다. 다양한 과학 분야에서 사용되는 진화라는 개념은 시간에 따른 변화를 의미한다. 물론 단순한 변화보다는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뜻한다. 우주진화나 별의 진화, 생물진화처럼 시간에 따른 변화를 뜻하는 진화는 자연현상이며 다양한 데이터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관측되는 과학의 탐구대상이다. 진화과학은 진화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는 하나의 설명체계를 뜻한다. 진화의 원인이나 인과관계를 찾아 설명하는 과학 이론이라는 말이다. 진화주의라는 말은 진화에 대한 하나의 철학적 관점이다. 흔히 무신론적 진화론이라고 불리는 진화주의는 진화 현상을 무신론적인 입장에서 해석한다. 가령 진화가 진화 이론으로 잘 설명되니까 더 이상 신은 필요 없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주장이 대표적이다. 반면 진화는 하나님이 다양한 생물종을 창조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진화 이론은 그 창조의 방법을 밝힌 것이라고 보는 프랜시스 콜린스의 견해가 대표적이며 유신론적 진화라고 부른다.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우선 자연에서 관찰되는 진화라는 현상 자체를 거부하면 대화가 불가능해진다. 일반계시로 주어진 자연이라는 책을 거부한다면 창조주의 창조 역사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진화과학은 어떨까? 반진화주의자들은 흔히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 중에 진화생물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하다. 진화 이론이 과연 진화 현상을 잘 설명하는지, 과학적 증거들에 기초하는지, 얼마나 정밀한 설명체계인지를 판단하는 일은 전문 과학자의 영역이다. 진화주의에 관해서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진화주의는 진화라는 자연현상이 진화과학으로 잘 설명되기 때문에 무신론이 옳다는 주장이다. 진화론이라는 말로 종종 표현되는 진화주의는 인간이 아무 목적 없이 우연히 만들어졌으며 신에 의해서 존엄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진화주의는 수용할 수 없다. 진화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과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일 뿐이다. 진화주의는 창조주를 부정하지만, 진화는 오히려 창조의 놀라움을 알려준다. 과학을 통해 진화에 담긴 창조주의 지혜를 밝혀낸다면 그만큼 창조주의 위대함이 드러날 것이다.
자연적 창조(진화적 창조) vs. 초자연적 창조(기적적 창조)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진화는 자연법칙에 따른 인과적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다. 진화적 창조라는 말은 자연적 창조라는 말로 대치할 수도 있다. 진화적이라는 말의 반대는 초자연적 혹은 기적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진화적 창조와 대비되는 입장은 기적적 창조 혹은 특별 창조론이라고 부른다. 자연적 창조론과 특별 창조론은 첫째, 창조의 방법으로 자연적 인과관계를 사용했는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기적의 방법을 사용했는가, 둘째, 창조가 긴 시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가 아니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을 갖는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증언하는 동시에 자연법칙을 사용해서 섭리하고 창조할 능력이 있다고도 증언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지 답하려면 자연이라는 책을 읽어야 한다. 과학을 통해 과학적 증거들을 찾고 연구하여 결론을 내려보면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지 않고 다양한 자연법칙을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다. 창조의 방법에 관한 질문은 창조주의 능력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구나 우주 혹은 생물종을 창조하실 때 자연적 방법을 사용하실지 혹은 초자연적인 방법을 사용하실 지는 그분이 결정할 사항이다. 창조주가 결정한 창조의 방법은 창조의 역사 안에 담겨 있다. 과학은 그 기록을 담은 자연을 연구하여 하나님의 창조 방법을 밝힐 뿐이다.
16장 창조과학
창조과학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흔히 진화론 때문에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말한다. 이에 창조과학은 진화론의 위협에서 기독교를 지키려는 선한 의도로 진화론을 공격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현대 과학의 성과를 부정하는 창조과학은 교회를 떠나는 수많은 창조과학 난민을 양산했고, 신앙을 잃게 하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는 공격에 맞서는 바른 전략은 오히려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를 드러낸다고 반론하는 것이다. 과학에는 창조주의 증거가 없다고 무신론자들이 주장한다면,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과학이 오히려 창조주의 지혜를 드러낸다고 알려야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창조과학은 처음부터 잘못된 전략을 취했다. 그것은 과학이 틀렸음을 보임으로써 무신론을 무력화시키고 유신론이 옳음을 입증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 불운한 전략은 첫째, 창조과학으로 대변되는 근본주의 기독교와 과학계 사이의 충돌을 초래했다. 창조과학회는 무신론자들과 맞서려 했지만, 오히려 그리스도인 과학자를 포함한 과학계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둘째, 과학을 부정함으로써 무신론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겠다는 전략은 꽤나 시대착오적이었다. 창조과학의 주류 견해인 젊은 지구론은 아마추어에 불과했던 안식교도인 맥크리디 프라이스가 만든 홍수지질학을 토대로 세워졌다. 다윈의 진화론이 출판되기도 전에 이미 과학계에는 지구 연대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견해들이 자리잡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인 신학자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화론이라는 누명을 씌워서 지질학의 결론을 반기독교적인 견해로 규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셋째, 과학을 대적하는 창조과학의 전략은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안고 있으며 교회에도 악영향를 미친다. 성경을 과학교과서처럼 읽어서 재구성한 창조과학의 주장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창조세계의 특성을 왜곡한다. 하나님께서 인과관계를 가지고 세계를 창조하실 수 있음을 굳이 외면하고, 하나님을 마술사의 모습으로 제한하는 심각한 왜곡을 낳는다. 따라서 이제라도 자연주의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연에 담긴 일반계시에 대한 신학적 이해가 창조과학자들에게 절실히 요구된다.
창조과학자들은 왜 진화를 반대하는가?
도대체 창조과학자들은 왜 진화론을 반대하는 것일까? 첫째, 진화라는 개념 자체가 성경에 위배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진화이론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진화가 반성경적인 개념인지 아닌지는 결국 성경 해석과 관련되어 있다. 특히 창세기 1, 2장의 해석이 중요하다. 앞에서 다룬 것처럼 창조 기사에 대한 해석은 다양한 견해가 있고, 해석의 다양함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창조는 진리지만 창조의 그림은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 즉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인간의 언어로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근원적인 한계를 겪는다. 하나님의 계시는 무오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완벽하지 않다. 인간의 경험과 문화, 상식, 어휘 등을 토대로 한 인간의 언어가 초월적인 하나님을 다 담을 수는 없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처럼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하려다 하나님의 창조를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표현할 수 있는 창조의 개념 안에 하나님의 창조를 가두는 것은 불경이다. 창세기 1, 2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진화라는 개념이 성경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의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며, 성경에 표현된 문자에 얽매어 하나님의 전능한 창조의 능력을 오히려 제한하는 셈이 된다.
진화는 우연이고 목적일 수 없다?
진화를 하나님이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진화는 우연한 현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반영한 창조의 방법이 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점은 과학에서 설명하는 우연, 즉 우발성이라는 개념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우연이라는 개념이 다르다는 점이다. 과학에서 설명하는 우연 혹은 우발성이란 다양한 실현 가능성 중 하나가 실현되는 것이다. 과학적인 의미에서 우연이라는 말은 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의미에서의 우연을 배제하거나 전제하지 않는다. 진화가 우연히 발생하는 현상이라는 과학적 설명은 다양한 변화 가능성 중에서 어떤 한 가지 방식으로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우발적이라고 표현할 뿐이다. 그러나 과학이 우연이라고 설명한 바로 그 사건에 신의 섭리와 뜻이 들어 있을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의 범죄 사건이다. 제비뽑기 사건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우연한 사건이지만 하나님은 과학적으로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정확하게 그분의 뜻을 드러내신다. 진화는 과학적으로 우연한 현상으로 설명되지만 전능한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대로 진화를 통해 생물들을 창조하실 수 있다.
진화 이론은 과학이 아니다?
둘째로, 진화 이론이 과학이 아니라는 창조과학의 주장은 결국 진화를 다루는 생물진화 이론이 과학적으로 얼마나 엄밀한가와 관련된 문제다. 이 부분은 기본적으로 생물진화 과학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판단을 들어봐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생물학자들은 기본적으로 진화이론을 수용한다.
진화 창조론은 이신론이다?
이신론(deism)은 신이 만물을 창조한 뒤에 간섭하거나 섭리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다. 그러나 기독교 유신론은 이신론과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히브리서 1:3이 선언하듯 자신이 창조한 만물을 붙들고 계시고 지금도 자연세계를 다스리고 섭리하는 신이다. 창조과학자들의 누명과 달리 그리스도인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자연법칙의 주인이고, 과학이 인과관계를 설명하는 모든 자연현상을 하나님이 운행하고 섭리한다고 믿는다. 이신론의 입장에서는 시계공이 죽어도 시계는 작동되겠지만 기독교 유신론은 만물을 다스리고 운행하는 하나님이 없으면 자연법칙도 성립하지 않는, 그래서 우주도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창조과학자들은 이신론의 망령에 휩싸여 있다. 이들은 마치 하나님이 기적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역사이고 자연법칙을 사용하면 하나님의 역사가 아닌 것처럼 오도하는 잘못된 이원론에 입각한 창조신학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자연법칙에 따라 만들어지는 생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어떤 과학자도 자연이 스스로 했다는 식의 주장을 과학 논문에 쓰지 않는다. 과학은 그저 작동원리를 밝히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 과학자는 그 작동원리가 하나님의 주 되심과 다스리심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고백하고, 무신론 과학자는 그 작동원리가 신 없이 스스로 움직인다고 고백하며, 창조과학자는 작동원리를 설명하면 그것은 진화론이 된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겸손? 신학의 겸손?
과학이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듯, 신학도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영원한 근사에 불과하다. 그러니 과학의 겸손과 더불어 신학 역시 겸손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과학은 겸손할 수밖에 없다. 과학으로 입증되지 않는 내용에 대해 과학자가 무엇을 주장하겠는가? 하지만 과학이 겸손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미 전문분야의 과학자들이 오래전에 합의하고 결론 내린 내용까지 공격하는 것은 학문적인 태도가 아니다. 창조과학회가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지구의 오래된 연대처럼 과학계에서 이미 합의되고 결론 내린 내용까지 불확실한 것처럼 오도하기 때문이다. 과학을 향해 겸손할 것을 주장하는 창조과학회가 들어야 할 말은 비전문가의 겸손이다.
한국교회가 취할 바람직한 방향
교회가 젊은 지구론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꼽아보자. 첫째, 젊은 지구론이 무너지면 복음이 무너진다는 오해 때문이다. 젊은 지구론을 폐기한다고 해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담은 복음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둘째, 교회는 창조과학의 주장에만 일방적으로 노출되어 심각한 정보의 불균형을 겪기 때문이다. 이 불균형을 깨려면 전문 과학자의 견해를 듣고 배워야 한다. 하지만 세 번째 문제는 창조과학자들이 진화론자라고 낙인찍은 과학자들의 견해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창조과학이 아니면 진화론이라고 규정하는 근본주의적 폐쇄성은 오래전에 폐기되었어야 할 젊은 지구론이 여전히 창조과학의 주류 의견으로, 한국교회의 대다수 의견으로 남아 있게 만든 원인이다. 넷째, 그동안 창조과학을 가르쳐왔던 입장을 쉽사리 바꾸기가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늦게라도 깨달았을 때 반성하고 돌이키는 것이 최선이다. 교회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과감하게 젊은 지구론을 폐기해야 한다. 교회는 이성과 과학의 칼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과학보다 훨씬 위대하다.
창조에 관한 7가지 스펙트럼
신을 믿거나 믿지 않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차이에서부터 출발하여 성경 해석에 대한 차이, 그리고 과학의 결과를 얼마만큼 수용하는가의 차이에 따라 창조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게 나뉜다. 우주의 생성에 관해서 우선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눌 수 있다.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우주는 특별한 목적 없이 우연히 생겨났다고 보는 무신론의 입장이 한편에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신이 존재하며 신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우주가 창조되었다고 보는 유신론이 있다.
유신론의 견해는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한 창조의 방법과 그의 섭리 방식에 따라 크게 6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핵심적인 차이점은 진화의 방법을 수용하는가, 수용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다. 생물진화를 인정하는 견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 견해는 열린 진화(open evolution)의 입장이다. 이 견해는 신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여 생물을 창조했지만 어떤 구체적인 설계도나 진화의 방향을 계획하여 창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세계의 우발성에 따라 자유롭게 진화가 일어나도록 허용했다는 견해다. 두 번째 견해는 계획된 진화(planned evolution)의 입장이다. 이 견해는 창조주가 구체적이고 세밀한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계획에 따라 자연계의 인과관계를 사용하여 자연적 방법으로 생물들을 창조했다고 본다. 과학적으로 보면 진화가 일어나는 일은 우발적이지만 형이상학적으로 보면 창조주의 의도대로 진화가 발생하도록 미리 계획되어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다. 창조는 하나님께서 창조세계를 구상하신 혹은 계획하신 시점에 이미 완성된 것이다. 세 번째 견해는 하나님의 역할을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인상을 주는 인도된 진화(directed evolution)의 입장이다. 계획된 진화와 마찬가지로 인도된 진화의 입장도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인정하며 그 계획에 따라 생물들을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하셨다고 본다. 그러나 진화가 일어나는 시점에 하나님의 감독과 인도하심을 더 강조한다는 점에서 계획된 진화와는 차이점을 드러낸다.
생물진화를 인정하지 않는 유신론의 견해도 있다. 우선 지적설계는 진화가 자연적 과정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본다. 종에서 종으로의 분화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지적설계론자들이 갖는 공통점은 진화가 자연적 과정으로 일어날 수 없다고 보는 점이다. 그들은 종에서 종으로의 분화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본다. 오랜 지구론은 우주나 지구 창조의 경우는 하나님이 자연계의 다양한 물리적 과정, 즉 자연적 방법을 통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창조하셨지만 생물진화는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다. 하나님은 생물을 진화의 방법으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종을 독립적으로 기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창조하셨다고 보는 입장이다. 젊은 지구론은 창조주의 창조 방법을 주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제한한다. 생물뿐만 아니라 우주와 지구 창조도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창조했다고 본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에 관한 7가지 스펙트럼 중에서 어떤 견해를 가져야 할까? 복음주의권의 그리스도인이 취할 수 있는 스펙트럼은 계획된 진화, 인도된 진화, 지적설계, 오랜 지구론 정도가 될 것이다. 성경은 창조의 방법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가르치지 않으며 창조의 방법이 기적적이든 자연적이든 간에 창조주 하나님을 고백하고 믿는 신앙은 동일하다. 제한된 이성을 가진 우리에게 창조 자체는 진리이지만 창조의 그림은 다양하다.
5부 과학과 신학의 대화
17장 인류 원리
우주의 거대한 공간과 장구한 시간을 가지고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기독교 신앙은 틀린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100억년 이상의 우주 역사가 필요하고 1000억 개나 되는 은하가 존재해야 한다. 이는 우주는 마치 인간이 존재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처음부터 정밀하게 조절해둔 것처럼 보인다는 의미다. 어떤 면에서 우주는 미세하게 조절되어 마치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도록 미리 준비된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가리켜 “미세 조정된 우주”(fine-tuned universe) 라고 부른다. 이러한 미세 조절은 인류를 위해 준비된 것 같기 때문에 이 특징을 가리켜 인류 원리라고 부른다. 우주는 몇 가지 기본적인 상수들을 통해 그 운명이 결정된다. 가장 중요한 상수들은 전기력과 중력의 비율, 우주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결합력과 그 중력의 비율, 그리고 우주 안에 들어있는 총질량이다. 이 상수들은 아주 특정한 값을 가지고 있는데 이 상수 값이 조금만 크거나 작았더라면 우주는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우주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이 상수 값이 정확하게 특정한 값을 가짐으로써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우주가 형성된 것이다. 이는 마치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우주의 조건을 미리 조절해둔 것처럼 여겨진다. 우주가 이렇게 미세 조정된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크게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다중우주론으로서 이 현상을 우연에 돌리는 설명이다. 즉 우리가 사는 우주는 하나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다른 우주가 있을 수 있고 그중에 하나가 우연히 인류가 존재할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는 현대과학으로는 우주가 왜 그렇게 특정한 상수 값을 갖게 되었는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과학이 더 발전하다 보면 그 상수 값이 왜 특정한 값을 갖게 되었는지 과학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셋째는 초월적 존재의 섭리라는 설명이다. 초자연적인 신적 존재가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우주의 조건을 미세하게 조절하여 창조했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설명은 지적설계의 논증으로도 사용된다.(발제자 주: 그러나 미세 조정 그 자체가 신의 존재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지적 설계 논증의 맹점은 “틈새의 신”)
첫째 설명은 많은 이론물리학자들이 선호한다. 그러나 다중우주론은 아직 엄밀한 경험적 증거를 통해 입증된 정설이 아니라 가능성을 가진 하나의 가설로 보는 것이 현재 과학계의 평가다. 두 번째 설명은 첫째와 비슷하게 우주가 미세 조절된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다. 과학이 발전하여 인류원리에 대한 과학적 답변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인간 이성으로는 영원히 풀지 못할 숙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먼 훗날에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게 되더라고 이것이 창조주가 우주를 설계하고 섭리하여 인간을 창조했다는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창조주가 과학이 설명한 방식대로 우주를 창조했고 인간을 만드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신의 창조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에 국한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창조의 방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일반계시인 자연이라는 책을 봐야 한다. 그리고 자연을 읽어내는 과학을 통해 인과적 설명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그런 인과적 방법을 통해 창조하셨음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
18장 창조를 이해하는 틀
신학을 특별계시인 성경을 읽어가는 과정으로 그리고 과학은 일반계시인 자연을 읽어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이 “두 가지 책” 개념은 한국교회에 만연한 이원론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가는 과정이든 자연을 읽어가는 과정이든 모든 과정에는 해석이 개입된다. 그래서 과학이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한 영원한 근사이듯이 신학 역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영원한 근사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분 하나님이 저술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 사이에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지만 성경에 대한 해석인 신학과 자연에 대한 해석인 과학 사이에는 충돌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충돌이 발생했을 때, 그 각각의 해석이 올바른지 점검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제한된 언어로 획일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과 자연에 대한 해석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하나님과 창조세계를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며 실재에 더 가깝게 다가가는 과정에 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과학과 신앙은 결코 모순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 양립 가능하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창조세계를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나아가 창조주의 놀라운 능력과 섭리를 배우고 창조주를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과 신앙이 충돌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기에 종종 과학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에 위협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을 때, 중세 사람들은 이것은 성경에 위배되며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학은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 것이 아니라 천동설이 자연이란 실재와 맞지 않음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결국 시간이 가면서 사람들은 천동설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했던 혼합주의가 문제임을 깨닫게 되었고 천동설과 기독교 신앙을 분리하여 천동설을 폐기하게 되었다. 문제는 과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천동설을 기독교 신앙의 핵심으로 받아들였던 당시의 신학에 있었던 것이다. 천동설-지동설 논쟁 뒤에 이어진 뉴턴의 중력 이론도 비슷한 양상을 겪었다. 뉴턴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현상이나 달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현상을 중력으로 설명하자 그의 중력 이론은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하나님이 해와 달을 규칙적으로 동에서 떠서 서에서 지도록 천사들을 통해 운반한다고 이해했던 당시의 사람들에게 뉴턴의 중력 개념은 지극히 이신론적이고 무신론적인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뉴턴의 중력이론으로 자연현상이 설명된다면 하나님도 천사도 필요 없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제는 하나님이 달의 운동을 섭리하는 방법을 오직 천사를 통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 방법으로 제한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달이 지구 중력에 의해 지구를 공전함을 의심하지 않으며 이렇게 지구 중력으로 달의 운동을 주관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라고 이해한다.
지구의 나이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은 큰 충격을 겪었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창세기 족보에 의지해서 지구 연대도 6천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후 지질학이 발전하면서 지구 연대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다양한 과학적 증거들이 나왔고 19세기에 이르러는 지구 나이가 적어도 수백만 년은 더 되었다는 관점이 정설이 되었다. 지구가 오래되었다는 과학적 결론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반감을 가졌다. 오래된 지구를 제시하는 지질학은 성경에 위배되고 기독교 신앙을 위협한다고 여긴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성경은 지구 연대에 대해 정확하게 언급하지 않으며 별 관심도 없다. 문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젊은 지구라는 개념을 기독교 신앙과 결합시킨 혼합주의였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성경 해석이다. 젊은 지구라는 개념은 기독교 신앙과 관련이 없으며 근대 과학 이전 사람들이 가졌던 잘못된 상식에 불과하다. 이후 100여 년이 지나 또 한 번의 충격이 왔는데 그것은 다윈을 통해 등장한 생물진화 개념 때문이었다. 다윈 이전 사람들은 하나님이 생물의 다양한 종들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즉각적이고 완성된 형태로 창조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윈은 종과 종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공통 조상에서 분화되어 진화했음을 세밀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이후 등장한 유전학과 고생물학 그리고 지리학 및 발생학은 다양한 생물 종들이 순간적이고 기적적으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변화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거쳐 현재의 종들에 이르게 되었다는 생물진화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생물진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방법을 즉각적이고 기적적인 방법에 제한시켰다. 그들은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다고 믿었고 그래서 생물진화는 성경에 위배된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생물 종들이 독립적이고 즉각적으로 창조되었다고 믿는 관점과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독립적이고 즉각적으로 생물 종들을 창조했다는 그들의 성경 해석이 맞는 것일까? 창세기는 하나님이 생물 종들을 어떤 방식으로 창조했는지 말하지 않는다. 즉각적이고 독립적인 창조를 창조신학의 핵심에 두는 것은 이전에 천동설이나 천사가 달을 끄는 초자연적 방식을 창조신학의 핵심에 두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해석의 오류일 뿐이다.
이러한 과거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교훈은 당대의 과학을 기독교 신앙과 너무 강하게 결합하는 일이 매우 위험하다는 점이다. 과학이 주로 자연현상의 인과관계, 즉 하나님의 창조방법을 다룬다면 기독교 신앙은 특정한 창조방법을 다루지 않으며 그런 창조방법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기적적이든 자연적이든 어떤 방법으로 창조하셨든지 간에 하나님이 창조주가 되신다는 신앙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으려면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가에 대한 어느 정도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게 된다. 과학과 신앙의 긴장은 창조라는 진리가 창조의 방법이라는 그릇에 담길 수밖에 없다는 한계 때문에 생겨난다. 그 그릇은 주로 당대의 상식 혹은 주류의 견해에 의해 생성된다. 창세기가 쓰인 고대 근동 시대 사람들은 그 당대의 상식을 토대로 하나님의 창조를 이해했을 것이고 중세의 사람들 역시 그러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라는 진리는 창조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그림 안에 담길 수밖에 없고 창조의 그림은 각 시대마다 변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진리와 하나님이 어떻게 창조하셨는가라는 창조의 그림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창조라는 진리와 그 진리를 담은 하나의 그릇, 즉 한 가지 형태의 창조 그림을 너무 심각하게 결합시키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가졌던 창조의 그림이 조금씩 깨어지고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변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그 변화는 오히려 우리의 제한된 이성 안에 가두어 두었던 창조주와 그의 역사를 해방시키는 것이다. 나아가 그 변화는 제한되었던 창조의 관점을 확장시키며 창조신앙을 더욱 튼튼한 기초위에 바로 세우는 과정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원리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라고 부르는 관점이 있다. 평범성의 원리라고도 불리는 이 관점은 우주에서 지구를 보는 관점이 특별하지 않고 평범하다는 뜻이다. 지구는 물리적으로 특별하지도 않고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보것 없다. 중세 이전의 사람들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신이 특별하게 만들어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게 한 인류가 사는 지구야말로 당연히 우주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철학적 전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이후 이런 관점은 영원히 무너졌다. 코페르니쿠스의 원리는 생물학에까지 확장되었다. 생물학은 인간이 침팬지나 오랑우탄 등의 영장류와 유전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비슷하며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인류도 공통조상에서 분화되어 나왔고 긴 시간동안 진화의 방법으로 변화되어 왔다고 알려준다.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과거에 사람들은 인간이 사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거나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특별한 방법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찾았다. 그러나 평범성의 원리는 인간이 물리학적이나 생물학적으로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인간의 특별성을 찾을 수 있을까?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우리가 물리적으로 특별한 공간에 살고 있다거나 생물학적으로 특별한 방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곳에 살고 평범한 방법으로 창조된 인간이 특별한 이유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의 방법이나 과정 자체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하나님을 대리할 존귀한 존재로 삼으셨다는 점이다. 사실 창조의 방법이 특별하다고 해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며 창조의 방법이 평범하다고 해서 평범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창조의 방법이 특별하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으로 창조의 방법과 인간의 특별성을 결합시켜 생각해왔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은 생물학적 인간(호모 사피엔스)을 진화와 같은 자연적 방법으로 창조하셨을 수 있지만 그를 선택하여 인간을 진정한 의미의 인간으로 만드셨다고 말했다. 하나님이 생물학적 인간(호모 사피엔스)를 선택하여 그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심으로써 인간은 진정한 의미의 특별한 인간, 즉 신적 인간(호모 디비누스)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을 따라 지었다는 성경의 증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물론 생물학적 겉모습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창조했다는 의미다. 인간의 존엄성과 특별성은 바로 여기에 있지 물리적 생물학적 차이에 있지 않다. 우주에서 지구의 위치나 인간의 특별한 창조방법과 같은 차별성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노력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가망이 없어졌다. 이제는 과학의 증거에 기대어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신학적 증거에 기대어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야 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새로운 발견을 통해 인류에게 지대한 충격을 던져온 과학은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할까? 창조세계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 온 과학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창조세계에 대한 관점을 현저하게 바꾸어왔다. 과학은 그동안 우리가 갖고 있던 창조세계에 대한 이해, 종종 기독교 신앙과 결합되어 있던 우리의 제한된 관점에 도전해 왔다, 앞으로 과학이 기독교 신앙에 던지는 도전은 지구 연대 문제나 생물진화의 문제 정도가 아닐 것이다. 뇌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정신 현상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도 있고 의학의 발전은 인공 생명체를 만들어 낼지도 모른다. 혹은 우주 어딘가에서 외계 생명체를 발견해낼 수도 있다. 이런 과학적 발견은 기독교 신앙에 어떤 질문을 던질까? 우리가 극복해야 할 도전은 단순히 성경 해석 문제나 과학에 대한 반감이 아니라 과학이 제시하는 새로운 발견들을 어떻게 기독교 신앙 안에서 수용하고 창조신학을 새롭게 변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도전이다. (끝)
◆ 우리 한국교회에 창조과학이 강하게 존재하는 이유(토론)
1) 신학의 不在 : 기존의 우리 갖고 있는 신앙 패턴(예, 기복신앙)과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 사회의 다른 분야(예, 반이슬람, 반동성애, 반공 등)와도 무관하지 않다.
2) 무신론에 대한 대응으로써 우리에게도 과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선한 의도이다. 그것을 통한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 많은 성도들이 있다.
3) 기존의 정통 과학보다 창조과학이 쉽게 설명되어지고, 성경에 기초한다는 인상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