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관점들
구약과 신약의 관계
2018-02-10 00:19:16
구약과 신약의 관계- 김근주
1. 바울의 편지들과 복음서가 아직 성경으로서의 권위가 널리 인정되지 못하던 주후1세기 교회는 오직 구약 성경을 지닌 채 찬란하고도 눈부신 초기 교회를 이루고 지켜나갔다. 이를 생각하면 구약은 결코 지금은 그 효력이 다한 옛 언약일 수 없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설명할 때 흔히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구약을 대표하는 두 인물인 아브라함과 다윗이 모두 믿음으로 밀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바울이 그토록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을 보면(로마서 4장) 구약을 율법으로 요약하는 것은 전혀 적절치 않다. 아울러 신약에도 그리스도의 제자된 이들에게 요구되는 규례들이 있다는 점에서 신약을 그저 복음이라고만 요약하기도 어렵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고 구약이든 신약이든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된(의롭다함을 받은)이들이 따라 가야할 규례가 있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행하여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하나님이 먼저 베푸신 은혜가 있음으로 은혜 받은 백성들이 하나님이 부르시는 길로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니 구약을 율법으로 요약하여 율법을 지나간 시절의 법, 우리의 죄를 보여주는 법으로만 여긴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구약 말씀을 격하시키고 오늘날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게 된다. 신약의 산상수훈을 우리가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도무지 지킬 수 없는 우리 상태를 깨닫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게 만드는 말씀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 값싼 은혜와 연관된 이런 이해는 지난 2천년 교회 역사를 더럽혀 왔고 지금도 교회를 타락시키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율법을 따르는 복된 길을 위선 가득한 흙탕길로 만들었다.
2. 어쩌면 오늘 우리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구약에 대한 오해와 그로 인한 구약 경시일지 모른다. 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하게 권위 있는 문헌이 구약성경이었음을 기억하는 것은 신약문서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신약문서들은 구약성경을 기본으로 하여 1세기 교회의 상황과 문제를 다룬 실질적인 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신약문서들은 구약성경에 이미 있는 모든 문제를 다루기보다는 당시의 상황과 관련된 문제를 주로 다루었다고 보아야 한다. 구약에는 있지만 신약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많은 부분 여기에 기인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국가에 대한 이해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국가의 기능에 있어서 식민지 상황이 아니라 자기들의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과 다른 상황 가운데 있다. 그로 인해 구약성경은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훨씬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구약의 수많은 본문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경우 그들을 향해 심판을 선포하는 예언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국가적 차원을 다루는 신약성경은 이방인과 나라없이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국가를 이루고 있는 오늘 우리 현실과 좀 더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 책은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생각하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속에서 살아가는 한국교회는 신약 시대보다는 오히려 구약 시대와 좀 더 겹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신약의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질적으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되, 하나님이 세우신 권세들이 저지르는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 무죄한 피를 흘리는 행위에 대해 예언자의 마음으로 항의하고 거부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구약은 명백하고도 분명하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3. 구약은 이스라엘이라는 특정한 민족, 특정한 나라를 통해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이 땅을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의 존재를 보여주는 현실이다. 구약이 경시된 폐해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나라와 민족, 공동체로 존재하는 하나님 백성의 차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나라가 사라지니 남는 것은 오직 개인이다. 그 결과 나 한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신앙의 내용이 되고 나 한사람이 착하게 살고 전도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보니 신약본문은 물론이고 구약 본문까지도 온통 개인을 향한 말씀으로만 읽게 된다. 구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신약을 구약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한다는 실천적인 함의를 지닌다. 구약을 신중하게 고려할 때, 구약은 우리로 하여금 공동체적 차원을 항상 명심하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새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지극히 사사롭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축소되고 만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드러내고 있는 문제의 본질 가운데 있다. 우리의 교회가 사적인 이익과 만족을 구하는 종교집단으로 전락하게 된 현실의 근본에는 구약에 대한 경시가 놓여 있다. 구약에 대한 경시는 신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할 수밖에 없다.
4. 구약이 지닌 국가적, 민족적 차원을 고려하지 않을 때, 신앙의 개인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구약에 있는 국가적 차원은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읽든지 아니면 잘읽지 않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구약읽기 경향의 단적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읽기는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온통 개인 실존의 차원으로 국한시켜 버린 편협한 읽기일 뿐이며, 이런 읽기에서는 개인이 별수없이 순응하고 따라가게 되어 있는 악한 사회구조와 틀에 대한 인식을 절대 발전시킬 수 없게 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비롯하여 웨스트민스터 고백서 같은 글들은 구약율법을 제의법, 시민법, 도덕법으로 구분한다. 이에 의하면 제의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었고, 시민법은 이스라엘이란 국가가 사라지면서 더 이상 효력이 없어졌으며, 오직 도덕법만이 오늘날도 여전히 보편타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 율법을 제의법과 시민법, 도덕법으로 나는 것 자체가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제사법을 제의법이라 분류하여 신약 시대에 폐지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십일조 같은 제도는 제의법일 수도 있고 시민법일 수도 있다. 안식일법은 제의법인지 시민법인지 아니면 도덕법인지 쉽게 판정할 수 없다. 오늘날 칼빈을 따르며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교회들이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구약에 근거하여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안식일법과 십일조 법을 도덕법으로 여기지 않는 한 그런 식의 적용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주일성수와 십일조를 강조하는 교회는 칼빈의 가르침과 모순된다. 또한 구약의 안식일법을 근거로 주일성수는 강조하면서 안식일법이 확대 적용된 구약의 안식년이나 희년 규례를 강조하는 교회들은 없는 것 같다.
5. 구약율법을 이렇게 셋으로 구분하는 것은 매우 주관적이며 전혀 명료하지 않다. 구약성경 어디에도 율법을 그런 식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약성경 역시 그 어디에서도 구약의 율법을 그런 식으로 구분하지도 않는다. 이런 식의 자의적 구분은 타당하지도 않거니와 그 폐해가 매우 크다. 이런 폐해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시민법과 연관된 이해다. 시민법은 국가인 이스라엘과 연관된 법이라 여겨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사라지면서 더 이상 효력이 없는 법이라 여겨진다. 그로 인해 면제년과 희년을 비롯하여 구약의 재판제도나 왕정에 대한 말씀들이 전부 본질적인 의미를 잃게 되었다. 올바른 사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와 왕권, 재판에 관련된 말씀들의 사회적, 구조적 측면이 모두 사라져 버리니 남는 것은 이 말씀들을 사사롭고 개인적인 측면에 적용하는 것뿐이다.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니 나라니 하는 차원을 고려하지 않은 채, 구약과 신약의 모든 말씀을 개인적인 차원으로 풀이해 버린다. 제도와 구조에 대한 고려가 사라지니 남는 것은 오로지 영적인 의미다. 악한 제도와 구조로 사람이 죽어가고 억압받는데도 영혼의 자유만을 말하게 된다. 불의한 세상을 향한 예언자의 비판은 사라지고 언제나 자신의 마음속만 들여다보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독재 권력과 부패한 권력에게 최상의 종교일 수밖에 없다. 이런 개인주의적 교회가 늘어갈수록, 이들에 의해 사사로운 복음이 전파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불의한 사회 구조보다는 내면의 변화, 내 안의 죄 문제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믿은 이들은 더 이상 불의나 사회적 참상에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영혼의 구원에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개인주의적이고 사적인 성경해석은 어느 시대든 절대 권력이나 부패한 권력의 환영을 받고 후원을 받기 마련이다.
6. 율법에 대한 우리 이해를 바로잡을 출발점은 당연히 주의 말씀이다. 구약 율법에 대한 주님의 입장은 지극히 단호하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함이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5:17-18) 유감스럽게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위에 인용한 구절을 예수께서 도덕법의 효력이 신약 시대에도 지속된다는 점을 확인하신 것이라고 풀이한다. 그런 주장은 이미 율법의 한 범주인 도덕법만이 보편타당하다고 전제하고 마태복음 본문을 읽은 이해일 따름이다. 이 구절이 선언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수는 결코 구약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았다. 예수는 구약을 성취하러 오셨다. 예수는 구약이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요 실제임을 드러내시고 증거하신다. 이를 보건데 구약이 없어지는 것이 신약시대가 아니라 구약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참으로 현실이며 실제임을 드러내는 것이 신약시대다. 물론 신약 곳곳에서는 율법의 폐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신약 구절이 말하는 율법의 폐지가 제의법이나 시민법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다. 이를 정당하게 고려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구약 율법 전체가 폐지되었으며 그 전체가 성취되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구약이든 신약이든 우리를 의롭게 하는 율법은 완전히 폐지되었다. 동시에 구약이든 신약이든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이들에게 예수께서 성취하신 율법은 완전히 살아나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마태복음 5:21-48에서 구약율법을 재해석하시되 구약율법이 명령하는 그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신다. 그 점에서 주님이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율법이 참으로 요구하고 의도하는 의미를 온전히 행하셨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시민법이든 제의법이든 도덕법이든 구약의 모든 율법은 에수 안에서 폐지되었고 예수 안에서 다 성취되었다. 이것은 구약의 모든 율법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사랑의 빛으로 해석되고 풀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랑의 빛으로 구약의 제사제도를 읽고, 구약의 나라와 구조, 제도에 관한 법을 읽을 때, 구약은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오늘에도 여전히 해당되는 규례와 법도다.
7. 신약 기자들이 구약을 사용할 때 거의 공식처럼 사용하는 전형적인 어투가 "기록되었으되", "기록된 바", 이루려 하심이라"이다. 이런 어투들은 신약 기자들이 자신들이 경험한 예수 사건을 구약이 전하고 선포하는 내용의 성취로 여겼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신약기자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유일한 성경이 구약성경뿐이었다는 점에서 신약 기자들이 경험하고 깨달은 예수 사건이 구약의 성취임을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구약의 빈번한 인용과 언급들은 신약 기자들에게 구약과 예수사건이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할 만큼 서로 연관된 것으로 여기고 고백되었음을 보여준다.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요17:5)라는 주님의 말씀은 창세 전부터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께서 함께 계셨음을 증거하며, 아버지의 말씀으로 대표되는 구약과 아들이신 에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사역을 전하는 신약이 결코 불연속적일 수 없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사고가 신약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 같은 인상이 우리들 교회 안에 편만하지만 성경은 곳곳에서 그 부당함을 증언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바울의 선언(롬3:21-22)은 구약이 이야기하는 의에 대한 개념과 정확히 일치한다. 여기서 "의"로 번역한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구약에서 쓰인 히브리어 "쩨다카" 혹은 "쩨데크"와 정확히 상응한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든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구약의 대표적인 두 인물을 통해 입증하는데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것이 결코 신약 시대의 산물이 아님을 확실해 보여준다. 우리의 사고방식 안에 구약은 불완전하고 신약은 예수로 말미암아 완전하게 되었다는 생각이 있는데 이는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예수는 불완전한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성취하려고 오신 것이다.
8. 그렇다면 예수께서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는 공생에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구절을 찾아 읽으셨다.(눅4:18-19) 이 구절을 읽으신 후에 주님은 그 자리에 참여한 회중들에게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다. 여기서 "응하다"로 변역된 헬라어 동사는 앞에서 언급한 "성취하다"로 번여해야 마땅한 동사다.. 즉 예수는 이사야서 말씀이 오늘 주님의 때에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은 무엇을 성취하신 것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이 선포되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의미다. 이사야 61장에서 "포로된 자에게 지유를"이란 구절에 사용한 히브리어가 희년의 자유선포를 가리키는 단어라는 점, 그리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 역시 희년 선포와 밀접하게 결부된다는 점에서 예수께서 이 말씀이 오늘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신데는 희년에 대한 고려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50년 마다 이루어지는 희년을 예수께서 오늘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신 것은 예수께서는 희년을 시간에 매어 놓은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일로 끌어내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희년을 오늘 성취된 현실로 예수께서 선포하심을 볼 때, 우리의 구약 이해는 지극히 협소하고 편협하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구약율법이 선언하고 보여주는 세상과 예언자들이 다시 보여주는 다가올 영광의 날들을 오늘 우리를 향한 것으로 붙잡아내지 못하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성취"는 사실상 아무런 내용도 없게 된다. 예수가 구약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구약이 증거하고 선포하는 새로운 날들을, 변화된 세상 전체를 현실과 일상으로 만드셨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이 예고하고 증거한 영광의 미래가 어떠한지 온 힘을 다해 살피고 묵상하고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은 현실이 되고 일상이 될 수 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질 놀랍고도 새로운 날들을 선포한다. 그날이 되면 칼이 보습으로 창이 낫으로 바뀔 것이며(사2:2-4),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놀 것이다.(사11:6-9)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말씀은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누가 이런 비현실적인 말씀을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구약의 에언들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반드시 성취될 합당한 사실임을 보이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과 불연속적인 어떤 것, 근본적으로 바뀐 어떤 것을 가져오신 분이 아니라 구약이 줄기차게 증거하고 선포하던 것이 공상이나 허황된 약속이 아니라 현실이요 실제임을 그 말씀의 성취를 통해 분명히 증거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이 폐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약은 일상이 되고 현실이 된다. 이 땅에 오신 예수는 구약을 온전히 살아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구약의 약속의 성취를 소망하고 꿈꾸게 만드신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에 관해 잘 정돈된 신앙고백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게 됨을 의미한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구약이 약속하고 선포한 말씀을 현실로 살아가게 하신다. 구약의 예언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믿는 자들은 구약이 선포한 약속을 오늘의 끔직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굳게 붙잡고 소망하고 꿈꾸며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 류호영
많은 사람들은 구약이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었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에 대한 성취의 기록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미 성취된 예언인 구약은 더 이상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이러한 구약 이해는 구속과 복음을 집중적으로 말하고 있는 신약에 대해 열등한 자리매김을 할 수 밖에 없다. 먼저 약속과 성취라는 신학적 패러다임은 구약과 신약을 하나의 단일한 언약으로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매우 성경적인 구조라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패러다임에서 성취된 약속은 그 가치에서 성취 그 자체보다 덜 중요하다거나 혹은 그 효력이 이제 정지된 것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런 관점에서 구약은 상대적으로 신약에 비추어 열등하게 여기는 현상이 생기게 된다. 이런 현상을 염두에 두면서 구약의 약속과 신약의 성취라는 두 요소를 보다 긴밀한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려는 새로운 노력을 하려고 한다. 이런 노력을 새롭다고 하는 이유는 어떤 신학적 주제의 저변에 흐르고 있는 중심 사상 혹은 원리는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변치 않고 동일하게 머물러 있다는 관점에서 약속과 성취라는 두 요소를 새롭게 조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의 약속의 형태나 신약의 성취의 형태로 주어진 신학적 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근본 원리와 기저 사상이 언제나 동일하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단일성, 즉 하나의 언약이라는 대명제 하에서 약속과 성취라는 주제를 이스라엘이라는 정체성의 문제, 땅이라는 시간과 장소의 문제를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스라엘의 정체성 문제 :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축복을 약속한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종족상의 문제인가? (유대인) 종교상의 문제인가?(유대교)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기다려 온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고정되고 정적인 대상 즉 혈연과 지연의 개념으로 생각할 때마다 이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발하곤 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언약의 축복들은 믿음과 순종에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얻게 되는 보장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보면서 구약의 선지자들은 마지막 날에 구원을 받을 자들은 남은 자들이라고 선언한다. 아브라함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언약의 축복을 받을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며(럼9:6)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마3:9) 결국 구약과 신약은 모두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이스라엘을 정의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성경은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이 구약의 신앙 열조들의 계보로 시작한다는 것은 신약의 이야기, 곧 예수의 출생, 사역, 고난, 죽음 부활, 승천의 사건들이 구약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사건은 하나님이 구약의 신앙 열조들에게 주셨던 약속들을 이제 신실하게 이행하시는 일임을 암시한다는 뜻이다. 마태의 족보는 예수가 아브라함 언약과 다윗언약의 성취임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이전의 일의 반복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일이다. 구약의 이야기가 이제 예수를 통해 최종적으로 천명되고 구현되었기에 예수 사건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일이다. 마태의 예수 계보의 촛점은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축복들이 오직 예수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예수는 참된 이스라엘의 대표적 구현이요 그가 참된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예수의 계보에 이방 여인들이 열거된 것은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이 혈통의 순수성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또한 예수가 처녀인 마리아를 통해서 출생했다는 사실은 역시, 참 이스라엘이 구약의 이스라엘의 혈통을 따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로 대표되는 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제한되지 않는 보편적인 백성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누가 참 이스라엘인가는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이런 점에서 구약과 신약의 단절성을 보게 된다.
마태는 두 번에 걸쳐 하늘의 음성을 기록하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라] 구약의 메시지를 반향하는 이런 음성은 예수에게 어떤 정체성을 부여하는가? 하늘의 음성은 예수의 세례에 대한 하나의 반응으로 나타난 것인데 그것은 예수의 메시아 사역을 인준하는 것이다. 하늘의 음성은 이사야 42장 1절은 연상케 하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종의 메시아 사역은 인정하고자 그의 영을 이 종에게 두실 것을 약속하며 이 종이 택한 자로서 의와 구원을 열방에 가져올 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세례 장면은 예수가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임을 나타내도록 의도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받으신 광야 시험 역시 참 이스라엘이 누구인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았듯이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파트너요 참 이스라엘 되신 예수도 동일한 시험을 광야에서 받으셔야 한다. 광야 시험은 하나의 동일한 근본적인 질문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참 이스라엘로서 예수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상징하듯이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며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40년의 시험을 거쳤듯이, 예수님도 하나님나라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시험을 거치신다. 결론적으로 광야의 시험을 통해 예수는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시험을 겪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을 예수님은 성공하심으로 자신이 참 이스라엘임을 증명하셨다. 이로써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약속이 예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스스로 참 이스라엘이요 참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분이시기에 하나님은 예수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임재와 뜻에 믿음과 순종으로 반응하는 자들을 모두 참 이스라엘로 인정하신다.
땅: 시간과 장소의 문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의 구현
땅은 매우 성경적인 주제중 하나이다. 땅은 물질적이므로 영적인 진리를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과 반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의 핵심 진리중 하나는 육체의 부활이다. 영혼이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의 합일체인 전인격적 존재로 영원히 살 것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육체의 부활과 이에 대한 믿음은 이미 그 안에 땅이라는 구체적인 실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땅은 새로워진 몸이 살아갈 장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다스리심이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장소를 암시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들이 실질적으로 경험하게 될 실체이다. 이런 점에서 땅이란 주제는 성경의 일관된 주제라 할 수 있다. 구약 약속의 핵심적 요소 중 하나가 땅에 관한 약속이다. 신약은 구약 약속의 성취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는 신약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 라는 중요한 질문이 대두된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또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가나안 땅을 주마 약속하시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관된 성경적 관심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중심으로 땅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고, 취소되며 또 회복되는지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로 보건데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근본적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의 근본적 요소인 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점은 가나안 땅이 제비뽑기로 배분된 것, 땅의 첫 소산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 그리고 희년 제도를 통하여 강력하게 암시되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은 땅은 오직 믿음과 소망을 통해서만 붙잡을 수 있도록 의도되었다. 가나안 정탐꾼 사건은 이 약속의 땅이 오직 믿음과 소망으로만 현재적 실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한 가나안 입성 후의 기록을 보면 땅은 단순히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라 축복, 평화, 안정, 안식이라는 중요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땅을 소유한다는 것은 땅이 내포하는 이 모든 축복들을 함께 향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땅을 지속적으로 소유하고 그 내포된 축복들을 지속적으로 누리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그 땅에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드러나지 않는 땅은 필연적으로 박탈될 것이라고 성경은 반복하여 강조한다. 후선지서는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가 없음으로 인해 빼앗긴 땅, 곧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의 거룩하지 못함과 불의로 인해 땅의 약속이 잠정적으로 취소되었지만 땅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잃어버린 땅에 대한 회복과 갱신을 기대할 수 있었다. 특별히 땅의 회복은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들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땅의 소유에 필요조건인 거룩함과 공의의 문제를 어떻게 충족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땅을 소유하는데 선결 조건인 의의 문제를 친히 해결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점이 포로 후기 선지자들이 선포한 일관된 메시지였다.
그렇다면 신약은 땅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가? 신약의 중심 메시지의 하나는 온 피조세계가 예수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다는 점이다. 예수의 구속 사역을 통해 인류가 새롭게 될 뿐 아니라 만물이 새롭게 회복되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의 사역이 땅을 영적인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의미가 아니라 온 땅이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성전이 아니라 온 예루살렘이 여호와께 성결이라" (슥 14ㅣ20)는 예언이 근본적으로 구현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지성소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온 만물 가운데 충만하게 임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구현될 장소로서 땅의 참된 의미가 예수 사건을 통하여 온전히 실현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신약이 말하는 땅에 대한 메시지는 땅의 영적화 혹은 땅의 비영토화, 혹은 땅의 인격화가 아니라 땅의 보편화라고 할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하여 온 보편세계가 하나님의 의로운 다스림의 영역이 되었다는 것이 신약이 말하는 땅에 대한 메시지의 핵심이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땅에 대한 약속의 성취는 여전히 최후의 완성 때까지 이 땅에서 유보되고 있다. 땅의 약속에 대한 이러한 종말론적인 유보는 육체의 부활을 상정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는 육의 부활 이후에 온전히 경험되어질 것이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 김성진
1.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이해는 창1장1절에서 시작해야한다. 창세기 1장 1절은 창조자와 주권자가 한 하나님이심을 계시한다. 그러므로 조직신학에서 말하듯이 창조질서 계시에 일반계시와 특별계시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는데 형상이란 우상 곧 “쩔렘”을 가리킨다. 우상이란 곧 신의 형상으로서 신을 대표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자란 의미이다. 하나님을 사람이 하나님을 대리하는 자로서 지으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조 질서이다. 이 창조 질서를 만드신 창조주가 곧 구속주이다 . 하나님은 항상 한 하나님이시니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 주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시다.
2. 성경의 70%가 구약이다. 사람들은 신약을 구약보다 우선하지만 구약 없이 신약은 없다 구약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스도는 구약을 성취하신 분이시므로 그리스도의 구원을 구약의 맥락에서 이해해야한다. 고대 문서인 구약의 글쓰기방식은 현대의 우리와 다름을 인식해야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인데 하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로 택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이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중심으로 성경을 읽으면 안 된다. 인물 중심이 아니라 그 인물을 통해 계시되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사를 이루는 일, 이것이 역사의 의미이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선언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은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신 것이고 사람이 하나님의 “쩔렘”, 곧 형상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사람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지어진 것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대리인인 사람을 통해서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3. 역사에 대한 성경관점이 무엇인가? 성경기록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 기록이 아니고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성경을 여러 가지 서론 다른 전승의 편집이라 속단하는 것은 금물이다.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가 아니라 주제에 맞추어 사건을 선택적으로 기록한다. 이것이 성경의 역사 기록 방식이다. 일반 역사처럼 사건을 육하원칙으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주제를 중심으로 사건을 선별적으로 기록한다. 그러므로 성경의 기록은 왜 라는 질문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성경의 사건은 주제와 관련성이 중요하다. 성경을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 성경에서 사건을 기록한 의미는 주제 관련성에서 찾아야 한다. 큰 그림 하에서 개별 사건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4. 창11장까지는 하나님이 창조주와 심판 주라는 객관적 하나님의 모습으로 기록하였는데 12장부터 표현이 부드러워지면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먼저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에게 먼저 세 가지 약속을 하시고 언약을 맺으시는데 그 세 가지 약속이란 자손, 땅, 복의 세 가지이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하나님 관심사가 드러나 있다. 하나님은 이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언제나 신실하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모든 역사는 바로 이 약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지만 언약의 파트너인 사람은 언약에 신실하지 못하다. 하나님은 씨, 땅, 복 이 세 가지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집중하신다.
5. 창세기의 후반부는 요셉이란 인물의 기록이 주를 이루지만 요셉의 기능은 씨의 약속을 이루는 것이고 정작 씨의 주인공은 장자가 아닌 유다였다. 유다의 형인 르우벤과 시므온은 장자권을 상실했고 유대가 실질적인 장자권을 갖게 된다. 요셉 이야기의 중간에 유다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유대 이야기에는 수혼 제도가 나타나는데 이것은 땅 무르기와 함께 나타난 구약의 고엘 시스템 즉 기업 무르기 제도이다. 고엘, 곧 기업 무르는 자가 갖는 의무는 토지뿐 아니라 멸문될 그 가문의 복원까지 책임을 떠맡는다. 결국 고엘 시스템은 곧 수혼 제도를 통한 씨의 회복과 토지 무르기를 통한 땅의 회복으로 멸문될 가문을 복원시키는 제도이다. 결국 베레스와 오벳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고엘 시스템의 산물이다. 하나님은 고엘 시스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
6. 이스라엘은 애굽 생활을 통해 씨가 번성하고 출애굽하게 된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나라로 삼겠다고 하시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모든 민족들에게 하나님을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하시겠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율법과 성막제도를 주시는데 성막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만나는 장소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장소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이방과 구별하는 민족정체성을 부여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 씨의 약속이 성취된다. 이제는 땅의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데 여호수아부터 땅의 약속이 성취되기 시작한다. 가나안 정복에서 유독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두 전투만 기록한 것은 땅의 약속은 오직 순종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나안 정복 당시 여호수아의 실수는 가나안 족속을 철저히 진멸한 것이 아니라 성 중심으로 점령한 것이고 또 자기를 이어갈 이스라엘 지도자를 세우는데 실패한 것이다.
7. 다윗이 등장하면서 사울과 다윗이 비교되는데 사울의 실수는 멋대로 제사를 드린 것과 아말렉 전쟁이다. 사실 사울에게 이것이 큰 흠은 아닌듯하나 결국 불순종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다윗은 미미한 처지에서 출발했지만 승승장구하게 되는데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지만 사울은 혼합주의자였다. 다윗 시대에 하나님이 주신 땅의 약속이 완벽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복의 약속이 다윗이 통치하는 나라의 복으로 이뤄진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와 땅과 복의 약속이 다윗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에 다윗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솔로몬은 제국을 꿈꾸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그는 이방나라와 혼인 외교를 통해 제국을 꿈꾸었지만 오히려 나라는 분열되고 언약이 파괴되기 시작한다. 이후 북조, 남조는 잇달아 멸망하였고 이후 땅의 언약이 성취된 나라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하나님의 언약을 실패한 것인가?
8.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이루신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언약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소개한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진정으로 성취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확장되었다. 당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원래 의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스께서 성취하신 이것이 바로 천국이다. 하나님나라가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구약 언약이 하나님나라로 성취되었으니 구약의 복은 천국의 복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으로 언약이 완성된 것이니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언약이 성취된 것이다. 계시록은 하나님나라가 완성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 말하는 복음이다. 고로 구약의 맥락을 모르고 신약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 송제근
1.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여기는 것은 기독교만이 아니다. 유대교는 전적으로 구약성경만을 그리고 이슬람교는 부분적으로 구약성경을 경전으로 가진다. 단일신론을 가진 제한된 이들 종교들 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삶과 문화와 역사에서 더 탁월하고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본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들은 기독교에 대해 실망하고 오해하였을 뿐 아니라 미워하고 투쟁을 계속했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구약성경을 새롭게 연구하고 실천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런 새로운 연구, 실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독교가 구약 연구를 통해 단순히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적 공의와 언약적 사랑의 하나님(에메트와 헤세드의 하나님), 그리고 영적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시는 하나님으로 깨닫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것은 나의 필요를 위해 찾았던 하나님과의 피상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생명과 죽음을 주고받는 진정한 언약관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구원하시는 하나님 정도가 아니라 구원이란 수단을 통해 영원한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수동적 의를 덧입게 되지만, 진정으로 언약을 맺은 자라면 거기에 만족하여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그리스도인의 능동적 의를 발휘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열정적으로 반응하여 사는 삶, 언약백성으로서 능동적, 적극적으로 공의와 사랑을 발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아가 기독교인들에게는 유대교나 이슬람이 갖지 않은 또 하나의 경전인 신약성경이 있다. 우리는 39권의 구약성경과 27권의 신약성경이 하나의 정경이라는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며 삶의 실제에서 종교적 위선을 극복하고 원리와 실제가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구약성경이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계시라면 신약성경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계시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은 지나간 경륜에 대한 계시이므로 지금은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초대교회의 “말시온”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2천년동안 구약을 무시하고 왜곡하는 해석이 이어졌고, 그 결과 교회는 부패하고 왜곡되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비록 차원은 낮지만 오랜 기간에 걸쳐 기록된 역사적 풍성함이라는 장점이 있다. 비록 제2경륜의 계시지만, 구약에는 인간의 모든 삶과 문화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총체적 삶과 역사가 담겨있다. 이에 반해 신약성경은 비록 높은 차원의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의 계시를 담고 있지만, 기록된 기간이 극히 짧고 기록한 사람들도 제한적이기에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의 삶과 역사를 단편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과 로마의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기록된 신약성경은, 정반대로 로마의 황제들이 기독교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그들이 다윗과 솔로몬같이 다스릴 것인가? 또 기독교가 온 세상에 편만하게 되었을 때, 기독교는 이 세상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이런 것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서구교회들은 지난 2천년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지도 못한 채 사양길에 들어섰으며 다른 지역의 교회들도 대부분 기독교의 이런 역사성을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현상적이고 외적인 발전만을 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3. 이런 가운데 기독교가 윤리와 행위를 고치는 것보다 더 우선적인 것은 윤리와 행위의 기초가 되는 근본원리를 다시 돌아보고 새로운 기초를 세우는 일이다. 그것은 구약성경의 장점과 한계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장점과 한계를 파악하며, “두 성경, 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개념을 어떻게 통일성 있게 구현할 것인가의 문제다. 삶과 역사는 풍성한 반면에 차원은 낮은 구약성경과 차원은 높지만 역사가 매우 짧고 범위가 좁으며 다양하지 못한 신약성경을 하나의 경전, 하나의 통일된 기초로 만드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다양하고 풍성하지만 차원이 낮은 제2경륜의 계시인 구약성경과 차원이 높으나 다양하거나 풍성하지 못한 제3경륜의 계시 모두를 활용하여 높은 차원이면서도 풍성한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추출해내는 작업이다. 이것이 바로 “두 성경, 한 하나님의 말씀”이란 도전 앞에 선 새 언약의 백성이 해야 할 과제이다.
4. 그런데 이런 작업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의 제2경륜의 언약법들을 보면, 이 법들도 시간에 따라서 변용되고 새롭게 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언약법일수록 시간에 제한될 수밖에 없고,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새롭게 바뀌어져야 한다. 영원한 것은 언약법의 구체적 항목들이 아니라 언약법의 정신과 원리다. 그러므로 그 원리와 정신에 견고하게 선 가운데 역사의 현재적 상황 속에서 조심스럽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시 시대에 맞는 언약법을 섬세하게 발견하고 풍성하게 만들어 나가여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제3경륜의 높은 차원에서 다양하고 풍성한 하나님나라의 행동 원리들을 발견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새 언약의 백성들이 거쳐야 할 이런 시행착오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아주 놀라운 조처를 취해주셨다. 그것은 이전의 모든 계시의 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이 시간 장소를 뛰어넘어 언약백성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신다는 약속이다. 또한 성자 예수님도 진실한 새 언약의 백성들을 위해 친구 간구하시며 도우신다.
5. 일반적으로 “두 성경, 한 하나님 말씀”이라는 주제를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라는 문제로 축소시켜 막연하게 다루는 경향이 있다. 연속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하나님이 주신 계시이므로 변하거나 불연속이 생길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이시지만 하나님이 인간에게 경험되고 역사에 나타나시는 순간,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가 완전히 계시될 수는 없고 단지 인간과 세계가 수납할 만큼만 계시될 뿐이다. 절대하신 하나님 자신은 영원하고 전능하시고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이시지만 역사 속에서 경험되는 하나님이나 계시의 내용은 역사적 상황에 제한될 수밖에 없다. 이런 점이 바로 하나님나라 역사가 연속적이지만 불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이유다. 그런데 이런 점은 우주와 역사의 진행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 언약의 백성들이 언제나 동일하시며 늘 새로우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계시를 날마다 새롭게 받는 자유를 누리게 한다. 그러므로 낮은 차원이지만 다양하고 풍성하고 총체적 삶과 역사가 담긴 구약성경과 차원이 높지만 제한되고 단편적인 삶과 매우 짧은 역사가 담긴 신약성경을, “두 성경, 한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 아래 우리 시대에 맞는 계시를 찾아나가는 노력은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늘 창조적으로 운용하고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6. 구약에서 “유일하신 하나님”(신6:4)은 유대교에서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단수성, 즉 한 분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과만 언약을 맺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나타낼 뿐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복수성”의 하나님(창1:26-27)으로 계시되었다. 제3경륜의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선명하게 계시되었다. 제1경륜의 하나님나라는 매우 소극적, 부정적, 수동적으로 진행되어서 하나님나라의 세 요소(씨, 땅, 뜻)도 그렇게 유지되었다. 모든 땅에서 모든 씨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총체적 반역이 일어나서 인간의 욕망으로 세상이 통치되었으므로 하나님이 당신의 뜻으로 통치할 수 있는 땅이 전무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는 매우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으로 진행되었다. 즉 하나님나라의 씨는 매우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누구나 될 수 있는 경륜이 열린 것이다. 또 지구상에서 전무하건 하나님나라 땅은 유일하게 가나안으로 확정되었으며 그리고 뜻은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세부법들로 명확하게 주어졌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나라는 세 구성요소로 명확하게 누구나 언제든지 알 수 있도록 역사에 우뚝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작된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나라 씨가 파멸지경에 이르렀고 그 땅은 이방이 차지하였으며 그 뜻도 더 이상 지켜지지 않게 되었다. 이런 절망적 상황 속에서 급한 바람같이 혁명적이고 폭발적으로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다.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처절하게 무너지고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새롭게 시작할 정도로 불연속적이었다. 비록 경륜적으로는 불연속적이지만 하나님나라는 결코 망하지 않는 불사조처럼 연속적이었다. 제3경륜에서 하나님나라 씨는 더 이상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 아니라 누구나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나님나라 땅도 더 이상 가나안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확장되었다. 하나님의 뜻도 부정적인 관점에서 주어진 십계명과 세부법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포괄적인 법들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이 마치 하나님처럼 높아진 차원에서 행동할 수 있는 뜻이 계시된 것이다.
7.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닮은 꼴, 즉 자녀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제1경륜의 하나님나라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언약이 별도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가고 세상이 타락하면서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에서 소멸되는 듯이 보였다. 이런 절망적 상황에서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신 일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족장언약이란 예비적 언약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 완료되게 하셨다. 그 후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씨가, 모압(세겜)언약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땅이 완성되도록 하셨다. 씨와 땅이 완성되어 하나님나라를 현재적으로 유지하는 길은 뜻(언약법)을 현재적으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2경륜에서 언약도 궁극적으로 붕괴되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그 씨 그 땅에서 그 뜻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제2경륜의 언약을 “옛언약”으로 지나가게 하시고 제3경륜의 새로운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새언약”을 새로운 씨와 맺으시고 새로운 땅을 열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뜻을 행하도록 하셨다. 옛언약에서는 언약의 중재자들이 모두 연약한 인간들이었기에 아무래도 불완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새언약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분이 사람이 되어 오셔서 영원한 언약의 중재자(메시아)가 되셨다. 즉 메시아 예수는 언약적 은혜(헤세드)와 언약적 공의(에메트)가 충만하게 구현된 새언약의 진정한 중재자가 되셨다. 이제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언약의 역사는 사실상 제3경륜의 언약의 역사에 비하면 그림자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주목할 일은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에서는 새언약의 진실된 씨들이 모두 작은 메시아들, 작은 언약의 중재자들도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제2경륜에서는 특정한 사람들이 언약의 중재자(메시아)로 세워졌지만 제3경륜에서는 언약의 유일한 중재자이신 예수가 가진 권위, 권세, 권능이 모든 언약백성들에게 부어져 모든 언약백성들을 작은 메시아로 세우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