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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정치학- 존 하워드 요더

메르시어 2023. 5. 16. 21:17

예수의 정치학- 존 하워드 요더

2018-01-22 15:43:22


 
해설(신원하)
 

  1. 요더는 콘스탄타누스 대제 이후 로마 카톨릭은 물론, 개신교회의 진보신학이든 보수신학이든 동일하게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오늘날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의 유효한 모델이나 규범이 됨을 인정하지 않고 세상의 삶의 방식과 비전에 타협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는 교회는 신약성경에 나타난 바, 세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존재 공동체로서의 비전과 윤리를 잃어버리고 이른바 "교회 유형(church-type)"으로 동화되어 가면서 교회다운 독특성과 차별성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요더에 의하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따라서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신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오늘도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모델이요, 지켜야 할 규범이라는 것이다.

 

2. 요더는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나라 백성의 삶의 방식은 이 세상과 집권자들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예수는 결코 이 세상의 집권자들 처럼 폭력적 방법으로 역사의 방향과 흐름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 하지 않았다. 예수는 강제력과 무력대신 사랑과 평화의 방식으로 하나님나라를 세워갔다. 그는 힘과 무력으로 판세를 엎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길을 걸었다. 그럼에도 예수의 삶은 사회적 정지적으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요더는 그리스도인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결코 성공, 승리, 효율성, 힘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것들은 이미 어란 양의 승리를 통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의 승리에 동참하면 되는 것이고, 그 길은 예수의 방식을 신실하게 따르고 닮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종국적인 하나님의 승리를 이 땅에 끌어들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삶은 평화주의로 표현될 수 있지만 그것은 일반 평화주의와는 그 동기와 철학적 근거가 판이하게 다르다. 그것은 인류애나 탁월한 효과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가 그 길을 걸어가셨기 때문이고 그 길이 예수를 통해 성취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요더가 말하는 평화주의는 철저히 기독론에 근거한 기독교 평화주의요 메시아적 평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3. 요더는 예수의 사역과 삶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고 당시의 집권자들에게 큰 정치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고 말한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예수는 당시 집권자들에게 결코 미움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십자가형이라는 정치적 형벌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요더는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사회 윤리적인 성격이 없는 오직 개인 윤리와 영적인 삶을 위해 의미있는 것으로 해석해온 19-20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큰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요더는 예수의 삶의 방식을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십자가는 실패의 상징인 것 같으나, 실제로 부활사건을 통해 예수의 방식이 옳았음이 입증되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가 임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삶이 당시 사회에 큰 정치적 영향력을 미쳤듯이 오늘날도 여전히 정치적인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고 요더는 강조한다.

 

4. 요더는 하나님나라는 예수가 걸으셨고 가르치신 그 삶의 방식과 그 비전을 따라 살아가는 제자들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확장되어 간다고 설명한다. 이 공동체는 새로운 삶의 질서와 윤리를 가지고 존재하는 공동체, 즉 기존 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삶의 질서를 가지고 있는 대안사회이고 이를 통해 세상에 사회, 정치적 영향력이 행사된다는 것이다. 요더는 기존 사회의 질서와 정치와 그 산물에 대해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의 이런 신학적 입장 때문에 요더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회에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또 어느정도로 이 사회와 책임있는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요더는 타락한 창조세계와 그 안의 구조와 기능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이해하는 신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존 사회를 변혁해 나가는 것에 대한 열정과 관심보다는 교회와 같은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를 만들어 대안 사회로 제시함으로써 기존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을 더 강조한다. 요더의 이런 입장은 분파적 신학으로의 회귀라 비판받기도 하지만 요더는 자신의 윤리학과 메노나이트의 비전이 현실도피적이거나 사회에 대해 무책임한 것이 아니고 단지 이 사회와 세상에 대해 정의와 평화를 조성해 나가는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라고 변호한다.

 

초판(1972년)  서문

 

  이 책은 한마디로 주류 기독교 신학이 신약의 메시지에 담긴 평화주의적 함의들을 도외시해 온 현실에 대한 '기독교 평화주의자'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책은 예정에 "성경적 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주창되었던 독특한 성경적 세계관에 관한 통찰들을 기독교 공동체의 삶의 영역에 적용해 보려는 시도다. 한 세대 전 성경적 현질주의 운동의 주된 논지는 형이상학 및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것이었다. 그 운동으로 인해 교회론 및 종말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고조되었는데 그 이후 전개된 에큐메니컬운동이나 희망에 관한 기독교적 사고의 대두는 이러한 신학적 상황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적 현실주의 운동에서 교회론과 종말론이 윤리적 내용의 측면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는데 본서는 그러한 움직임을 윤리적 영역에 적용해 보려는 뒤늦은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예수의 비전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적용되는 많은 구체적인 윤리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2판 서문 (1992년)

 

   사실 이 책의 의도는 신약학계에서 진행되어 온 그간의 학문적 작업을 집대성하여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책의 논지에 맞는 표본적 연구들 몇가지를 골라 소개하는 것이었다.  그 전체적 논지는 주석의 영역이 아니라 윤리학 방법론에 속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신약성서 본문들이 제사하는 도덕적 증언의 내용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증언이 갖는 정치적 성격에 관한 것이다초판 서문에서 나의 성경읽기를 규정하기 위해 "성경적 현실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성경적 현실주의는 전통적인 현학적 성향에 빠지지 않은 채, 문학 비평과 역사 비평의 모든 도구를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성경을 교회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으려는 그런 접근법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 책을 두고 성경을 교회 혹은 윤리와 직접 연관시키는 독창적 방법을 제시한 연구라고 간주하기도 했고, 다른 이들은 이 책을 근본주의적이라고 여겼다. 물론 이들의 평가는 이 책을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방법론에 대한 추상적인 논의에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정작 교회 정체성의 중추가 되는 성경 본문이 제 목소리를 내지못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1장 메시아적 윤리의 가능성

 

1. 나는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예수가 급진적인 정치적 행동의 한 대표적 모델이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예수의 정치적 성격이라는 이 주제가 현재 신약학계 일반에서 괄목할만 하게 논의되고 있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비록 성경학자들이 표현하는 방식이 윤리학자들이 관찰하는 것과는 어느정도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이런 관점을 "담론화""하려고 한다. 나는 사회윤리에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예수가 당대의 사회문제와 아예 관계가 없거나 적어도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전제를 가진 이들에게 예수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려고 한다. 이를 위해 나는 신약연구와 현대의 사회윤리학을 연결해줄 법한 접점을 찾아 기술하려고 한다. 특히 현대 윤리학이 권력이나 혁명 등의 문제에 물두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오랫동안 신학자들은 예루살렘이 아테네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물었다. 나의 주장은 베들레헴이 로마 혹은 맛사다에 대해 할 말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감히 신약주석과 현대 사회윤리학 사이의 깊은 틈 사이로 밧줄을 드리우려 한다. 내가 감히 이런 작업을 시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최근 "성경적 현실주의" 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급진적 개신교 원리를 생각할 수 있다. 이 원리의 기본 개념은 이렇다,. 곧 교회의 생명력이 진정 중요한 것이라면 학자들의 이런저런 해석학적 여과과정들에 의지하는 것보다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경 전체를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이 책에서 두 학문(신약성서 주석학과 현대 사회윤리학)의 종합이라는 위험한 방식을 통해 정경 복음서들의 예수를 현재와 나란히 놓아보자고 제안하는 것은 결코 무지나 무책임의 소지가 아니다.

 

2. "예수는 규범(norm)이 아니다" 라는 주류의 고전적 윤리학의 입장를 뒷받침하는 일차적이며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사회윤리학의 문제들에 관한 한 예수는 그 어떤 직접적 적실성도 갖지 않는다는 진술이다. 이들은 예수의 윤리는 임박한 종말을 전제로 한 소위 중간기(interim)의 윤리였으며 또한 예수의 메시지는 본질적으로 역사와 무관한 영적이고 구체적이고 실존적인 문제였다는 복음서 이해를 근거로 예수는 윤리를 위한 어떤 상세한 지침도 제공할 의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만일 이결론대로 예수의 윤리가 궁극적 규범이 아니라면 윤리에 관한 성찰을 위해서는 다른 영역 혹은 통로가 필요해진다. 이것은 단순히 신약성서 시대와 현재를 연결하는 다리가 아니라, 신학에서 윤리학으로 혹은 실존적인 것에서 제도적인 것으로 이어지는 다리다. 윤리학의 구조는 다리 이편에서 새로이 구성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다리 이편에서 이루어져야 할 사회윤리학적 재구성 작업은 상식과 사물의 본성에 의해 인도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전통적으로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이라 불리는 하나의 인식론으로 수렴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은 주어진 그대로의 모습에서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고, 옳음이란 그 사물의 본질을 존중하고 그 본질의 실현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 자연법(natural law) 윤리의 기본구조는 옳음을 분별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선포를 들어서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실재와 현실을 탐구함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이다.

 

3. 이렇게 주류 윤리학의 주장대로 예수가 현실과 관련된 사회윤리를 가르칠 수 없었다면  도대체 계시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과연 기독교 윤리는 존재하는가? 만일 독특한 기독교 윤리란 없으며 자연적 인간 윤리만이 존재한다면 이런 본질적 포기는 단지 윤리적 진리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의 인간적 삶이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의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만일 그가 인간이지만 규범적이지 않다면 이는 바로 옛날 에비온파 식의 이단이 아닌가? 만일 그가 모종의 권위를 가진 분이지만 그의 권위가 인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하나의 새로운 영지주의가 아닌가?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과 동일한 기준을 따르는 것이라면, 권력 구조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될 이유가 있는가? 나는 널리 퍼진 전제들을 뒤집는 새로운 가설을 시험해 볼 것이다. 즉 본문에 사회윤리가 있는가? 라는 질문을 염두에두고 복음서를 읽는다면, 예수의 사역과 주장은 그 청중들에게 정치적 선택을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특정한 사회적-정치적-윤리적 선택을 제시하는 것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후기]

1. "예수의 정치학" 초판이 불러일으킨 반응을 검토하는 첫 걸음은 당연히 예수가 과연 정치적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신약학계의 최근 논의를 다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 소소한 문제들에는 여전히 이견이 있지만 예수가 비정치적이었다는 주장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잦아들었다고 할 수 있다. 예수 사역의 정치적 차원에 대한 인식은 끊임없이 재점화되곤 했는데, 그 중에 일단은 해방신학이라는 폭넓은 흐름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두번째 걸음은 예수가 직접적인 윤리적 모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들에 대한 검토가 될 것이다. 과연 성경 본문으로부터 우리의 윤리적 삶을 인도할 만큼 명확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역사비평적 회의주의가 있지만 학문적 작업을 통해 비정치적 예수를 발견해 낸 경우는 없었다. 다른 형태의 역사비평적 논쟁도 계속되고 있는데, 곧 고대 본문속에 담긴 내용이 내적 일관성을 갖느냐에 관한 논쟁이다. 그러나 다양성에 대한 이런 인식은 결코 내러티브적 이해를 손상시키지 않는다. 내러티브적 이해에 따르면 한 본문이 증거하는 내용의 핵심은 그 본문이 이전 전승에서 현재의 도전에 이르는 궤적을 따라 해당 공동체의 살제 삶 속에서 가리키는 방향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다양성 안의 일치성이 단순한 확일성보다 오히려 신뢰할만하고 더 유용하다.

 

2. 만약 우리의 관심이 사회 윤리의 핵심을 장조하는 것이라면 "다른 어떤 규범이 존재하는가?"라는 논지를 더 확대해야만 할 것이다. 이런 신학적 취지를 가진 신학적 논증들은 고전적으로 "자연", "이성", 실재"에 호소한다. 이 규범들은 도덕적 이상을 세우는데 특정한 유대적 혹은 기독교적 근거들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 때 기독교적 근거가 성경 전체든 혹은 더 구체적으로 예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여러 논증들은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모두 예수의 권위를 배제하는 효과를 갖는다.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거나 예수의 이야기에서 전혀 다른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요구들을 이런저런 방식으로 애초부터 조직적으로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이루어지는 연구의 목적은 이처럼 예수의 권위를 배제하는 태도가 과연 신약본문들의 의도와 내용을 정당하게 파악한 것인지를 시험하는 것이다. 

 

 

2장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1. 마리아의 찬가(눅1:15)은 지금 고지되는 탄생의 주인공이 매우 근본적인 사회변혁의 주체가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그의 임무는 사람들이 고대하던 "이스라엘의 위로"였는데 이 열망은 제의적인 것도 교리적인 것도 아니고 바로 자기 백성의 억압을 풀어주는 해방이었다.  그동안 모든 것을 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전제를 핑게 삼아 요한의 출생이 갖는 의미를 선포한 사가랴의 말(눅1:68)이나 세례요한이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때" 사용했던 표현들(눅3:9, 17)의 의미심장한 언어를 깊이 생각지 못한채 지나쳐 버렸다. 세례 요한이 사회정치적 변화를 기대했는데 이에 반해 예수가 실제로 성취한 것은 영적인 변화였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없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복음의 이야기를 전하려는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폭도라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는 변증적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당시에 예수를 기다리는 경건한 소망들이란 이스라엘이 그 사회정치적 현실 속에서 겪는 고통과 관련된 그런 소망들이었으며, 따라서 오실 자의 사역 또한 그와 동일한 성격이 될 것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보도해지 않을 수 없었다.  세례요한의 사역은 노골적인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예수 역시 어느정도 요한의 행보를 이어갔다. 예수와 세례 요한의 관계는 분명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요한의 투옥은 그가 정치적 봉기를 조장할지도 모른다는 헤롯 안티바스의 두려움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2.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선언은 왕의 즉위(시편2편)와 고난받는 종(사42장)이라는 두 주제를 명시적으로 결합한 것이다. 이 선언은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아들의 신분을 규정한 사건이 아니라 사명을 위한 부르심에 해당한다. 예수는 실제 역사 속에서 그리고 팔레스틴이란 구체적 지역에서 메시아적 아들과 종, 곧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약속의 담지자가 되도록 사명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이 사명의 의미는 곧이어 예수가 받게될 광야 시험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시험하는 자가 말하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란 가정적 논리는 형이상학적 아들 개념이 아니라 왕권 개념에 근거하여 도출된 것이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내놓은 선택 조항들은 어떤 왕이 될 것인가와 관계된 물음이다. 그동안 우리는 광야 시험 본문을 읽을 때 흔히 쓰는 영적 안경 때문에, 이 시험의 유혹은 순전히 개인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만 취급해 왔다. 그러나 굶주림 가운데 던져진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시험의 본질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풍성한 식탁을 베푸는 방식으로 메시아됨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무리들을 배불리 먹이라 그러면 네가 왕이 될 것이다. 두번째 시험 역시 그 사회정치적 성격이 가장 널리 인정되었다. 여기서 시험하는 자가 약속하는 천하만국의 권세와 영광은 그 정치적 성격을 부인하기 어렵다. 오히려 문제는 "내게 절하면"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다. 그것은 모종의 사탄숭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권력을 향한 욕망 혹은 민족주의적 우상숭배를 의미할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도 본질적으로 예수가 신적 왕권을 내세움으로 신성모독에 가까운 주장을 편 사실과 관계된 것이다. 예수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린다면 그것은 그를 최후의 승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종교적, 정치적 투쟁의 신호탄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에 자주 언급되었던 소위 유사 메시아들이 추구했던 그런 방식으로 말이다.

 

3. 마태와 마가복음은 모두 예수가 외친 최초의 메시지가 세례요한의 선포에서 이미 등장한 그리고 후에 예수의 제자들이 선포한 메시지와 같은 내용을 가진 것으로 기록한다. 즉 "하나님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라"나 "복음" 등의 용어는 모두 정치 영역에서 차용된 것들이다. "나라"라는 용어가 정치색을 띤 용어라는 사실은 거의 논증할 필요가 없다. "복음" 역시 그저 문자적으로 반가운 소식이 아니라 왕이 전령을 보내 미리 알리고 그 소식이 당도하면 잔치를 벌일 정도로 중요한 공적 선포를 가리키는 말이다. 만일 요한이 기대한 것과 달리 예수가 정치적 영역에 아무 관심이 없었다면 그가 이처럼 정치적 용어를 골랐다는 사실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누가는 예수의 사역초기에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에 대해 말하지 않지만, 그 대신 나사렛 회당 이야기(눅4:14이하)를 통해 같은 내용을 전달한다. 예수가 이사야61장에서 가져와 자신에게 적용한 구절들은 그저 메시아에 관한 구절이 아니라 메시아 대망을 가장 뚜렷한 사회적 용어로 진술하는 구절이다. 이사야 61장의 문맥에서 "주의 은혜의 해"는 당시 청중들에게 희년, 곧 오랜 세월 누적된 부정들을 말끔히 씻어내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이 동일한 지점에서 새로 시작하게 될 "희년의 때"로 이해되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예수가 팔레스틴을 역사적 인과의 흐름과 상관없는 곳으로 만들 것이란 기대가 아니라 예수가 희년이 가져오는 공평함의 물결을 팔레스틴으로 흐르게 할 것에 대한 기대였다. 안드레 트로크메는 예수가 말한 바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개념이 상당 부분 구약 선지자들의 희년 사상에 빚지고 있다는 증거들을 제시하였다. 이 가설은 지금까지 의미가 분명치 않던 여러 암시와 몇몇 난해한 비유의 해석에 빛을 비추어 주었다.

 

4. 레위기 25장의 희년 규정들이 과연 문자적으로 준수되었는지, 만일 그랬다면 어느정도로 철저히 지켜졌는지에 대한 논의는 불필요하다. 우리의 관심은 구약의 예언자들이 희년의 이상을 활용한 방식에 있다. 레위기 25장의 존재로 인해, 경제생활을 원점에서 새롭게 시작할 한 시대에 대한 기대는 하나의 살아있는 희망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사야61장의 증거는 장래의 회복을 향한 비전으로서 희년 사상이 얼마나 생산적인 비전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과거 역사에서 종종 실현된 바 있는 실제적 회복이든, 혹은 세상의 마지막에 이루어질 궁극적 회복이든, 하나님 백성의 회복은 희년의 형태를 취할 것이라는 확신은 구약 선지자적 이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의 이사야서 인용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수의 말씀을 통상적인 의미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마리아나 요한의 경우처럼 예수의 선언 역시 새로운 통치의 즉각적인 적용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이 새로운 통치의 표지는 부자가 가난한 자들과 소유를 나누고, 갇힌 자가 자유를 얻으며 이소식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새로운 회개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5. 누가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 옮기신 후(눅4:31) 무리와 병자, 세리들 사이에서 그 사역이 더 큰 효과를 거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한다. 종교기득권자들은 예수가 죄 용서의 권한을 사용하고(5:21),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자들과 어울리는데(5:31) 반발했고, 이 반발은 단시간 내에 예수에 대한 살해음모로 발전한다(6:11) 예수가 열두 제자들을 택한 것이 이 무렵이다. 예수는 자신을 향한 조직적 반대에 대해 제자 공동체로 이루어진 새로운 사회적 실체를 공식적으로 출범시키는 것으로 대응한다. 열둘이라는 상징적 숫자, 하룻밤의 기도, 그리고 엄중히 선포된 저주와 축복은 모두 예수의 사역이 새로운 공적 단계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리는 극적 표현들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선포한 축복과 저주의 내용(6:20 이하)은 나사렛 회당에서의 선언을 반복하여 이를 더욱 상세히 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역하는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본받아야 한다는 원리(6:35-36) 그리고 사람들이 통상 보여주는 자연법적 행동과는 전혀 달라야 한다는 원리가 제시되었다. 이 두 핵심 원리에 바탕을 둔 이런 식의 윤리는 새 시대가 시작되었고 따라서 이 세대의 새로움이 경제적 현실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만 비로서 이해될 수 있다.

 

6. 마귀가 예견한대로 예수가 떡을 나누어주자(9:1-22) 무리들은 마음이 동하여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다. 예수가 이런 무리의 환호로부터 거리를 두는 상황은 자신의 사역은 고난의 사역이며 제자들 역시 그와 함께 고난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베드로가 고난받는 메시아를 거부한 일이나 많은 자들이 예수의 말씀이 어렵다며 떠난 것도 이 무렵이다. 한편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한 것도 이 때다.  이후로 예수는 서서히 유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무리에게조차 소외되어 간다. 그가 제시하는 메시아 사역이 그들의 구미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길은 은둔이나 신비주의로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메시아적 사명을 새로이 확인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어렴풋이 나타난 십자가의 모습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 제의적으로 처방된 방편이 아니라 폭동과 정적주의 양자에 대한 하나의 정치적 대안으로서 십자가였다. 

 

7. 십자가의 전망은 더 이상 예수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무리가 함께 한 바로 그 때, 예수는 처음으로 엄중한 공개적인 경고를 던진다.(14:25 이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 구절의 핵심은 종교적 토대위에 세워진 견고한 가족적 유대를 특징으로 하는 사회 한가운데서 지금 자발적 헌신을 특징으로 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공동체는 그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기존 사회의 미움까지도 감내할 준비기 되어 있는 그런 공동체다. 오늘날의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인이 되는 일이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려는데 반해 예수는 오히려 무리로 부터 멀어지고 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그 절정으로 하는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도래할 하나님나라에서 누리게 될 특권에만 마음이 팔려있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의 꾸짖음에서도 동일한 경고가 좀 더 뚜렷한 어조로 나타난다.(22:25 이하) 복음서들 어디에도 예수가 새로운 사회 체제 설립에 대한 제자들의 기대를 꾸짖은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예수가 제자들을 꾸짖은 것은 그들이 예수가 세우려고 의도했던 새로운 사회 질서의 성격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사회의 독특함은 그것이 사회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가시적이지 않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사회 질서와는 다른 질서를 그 특징으로 한다는데 있다. 세상 왕들의 통치방식을 벗어나는 이 대안은 영성이 아니라 종노릇이다. 이런 이유로 제자 공동체에서는 사회변혁을 도모하는 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사회학적 특징들이 발견된다. 즉 여기서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에 뒤따르는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진지한 결단, 그리고 다른 무리와 구별되는 분명하게 정의된 삶의 방식 등이 보인다. 이런 차별성은 제의적 혹은 의식적 분리가 아니라 세상의 삶에 참여하면서도 거기에 동화되지 않는 삶의 질의 차이다. 이런 사실로 인해 이 공동체는 존재하는 모든 권력에 대한 불가피한 도전이요, 새로운 사회적 대인의 출발점이 된다.

 

8.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9:51) 로 시작되는 누가복음의 중심부는, 우리가 종려 주일로 기념하는 예루살렘 입성 사건에서 그 첫 정점에 이른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이는 누가의 기록에서 처음으로 메시아적 언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한 경우다. 마태복음에서 이 이야기는 바로 성전 청결 사건으로 이어진다. 성전 사건을 단지 성전과 관련된 사람들이 자행하는 경제적 착취에 대한 선지자적 분노의 표출로 보는 것은 충분치 않다. 이것은 예수가 성전 관할권을 주장하는 자로서 성전을 상징적으로 접수한 사건으로서 그의 메시아적 주장과 관계되어 있다. 승리의 입성과 성전청결 사건 사이에 누가는 복음서 중 유일하게 매우 의미심장한 한 대목을 삽입시켜놓았는데, 여기서 예수는 마치 선지자의 통곡과 같이 성문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예루살렘이 열렬하게 메시아를 환영하는 그 대목에서 누가는 예수가 그의 무리들에게 버림당하는 일이 이미 피할 수 없는 일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단락에는 어떤 식으로든 두 사회 체제의 충돌, 그리고 현 체제에 대한 예수의 거부가 반영되어 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도전, 포도원 농부 이야기,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서기관들, 부유한 서기관들과 가난한 과부들, 시련과 승리, 이 모든 이야기 위에는 임박한 두 통치의 충돌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데나리온 질문은 예수가 로마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당연시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이에 대답한 구절의 내용과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것"이 "영적인 것들"을 의미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린다는 것은 서로 중첩되거나 경쟁하는, 그래서 해결되어야만 하는 요구나 권한을 가르친다.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은 서로 충돌할 일이 없는 것들이 아니라 이 둘은 한 격투장에 서 있다.

 

9. 겟세마네 이야기에 대한 교회의 해석을 채색하고 있는 경외심으로 인해 일반 독자는 물론 전문 주석가들조차도 좀처럼 "이 잔을 옮기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을가를 물어볼 만큼의 역사적 호기심도 품지 못했다. 성전에서 용인할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야기된 상황에서 그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궁극적인 충돌과 파멸을 피해갈 수 있다는 말일까? 역사적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할 때 우리가 상상해볼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예수가 다시 한 번 이 최후의 유혹의 순간에 처음부터 그를 유혹해 온 메시아적 폭력의 길을 고려해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가 다른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를 길게 열거함으로 칼에 관한 이야기를 해석한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마태의 기록은 그 의미가 분명하다. 그는 유대인, 그리고 로마와의 이 최후의 충돌이 하나님이 종말론적 성전을 시작한 그 순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마태의 기록이 종말론적 전투의 이상을 투사한다면 누가의 이야기는 무기의 존재와 베드로의 방어행위에 의해 무장 봉기라는 정황 속에 놓인 예수의 혐의를 묘사한다. 이제 마지막 기회가 왔다. 사탄이 광야에서 세 번 예수에게 다가왔듯이 열심당의 방식으로 왕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가 공적 사역에서 그에게 세번째 주어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으로 무력의 선택이 예수를 유혹한다. 다시 한 번 예수는 이 선택을 하나의 생생한 유혹으로 직면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그는 이 길을 거부한다.

 

10. 예수의 처형 이야기는 십자가에 붙은 명패에 관한 언급 및 왕이라 자칭하면서도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군인들의 조롱에 관한 이야기로 끝난다. 이렇게 예수는 열심당 지도자인 바라바와 맞교환되어 "유대인의 왕"으로 처형당했다. 이 이야기는 영적-변증적 주창자들이 강조하는, 유대인, 로마인, 열심당 성향의 제자들 모두가 예수를 오해했다고 해석하는 본문에 속한다.  예수는 결코 기존 질서를 뒤흔들 의도가 없었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재판과정의 불법성 혹은 고소의 불합리함이 이야기 속에 드러나야 한다. 더구나 성전 사건이나 예수가 사용한 언어들은 폭동의 인상을 피하기 위해 계산된 산물이 아니다. 유대와 로마의 권력자들은 실제적인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이 위협이 무장 폭동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정상적인 재판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제거하야 할 정도로 이 위험이 그들을 괴롭혔다는 사실은 빌라도나 가야바가 바보거나 비겁한 자들라는 증거가 아니라 비폭력이 내포한 고도의 정치적 의미를 보여주는 증거다. 사태를 가설적으로 재구성해보려는 모든 진지한 시도는 예수가 로마인들에 가했던 정치적 경제적 위협을 교회의 해석 전통이 인정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중요한 것은 법적 절차가 적합했는지 혹은 유대 당국자들이 부분적 책임이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로마의 입장에서 예수의 공적 행보의 성격은 그의 처형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고 얼마든지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4:21)는 말은 제자들이 예수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진술은 예수가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이해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목격자의 보고다. 예수가 엠마오 도상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두 제자를 책망한 이유는 그들이 왕국을 바랐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의 고난이 왕국의 출범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 있다. 여기 십자가 위에 원수를  사랑하는 자가 달려있다. 그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으며, 부요한 자로서 가난하게 되었고, 겉 옷을 달라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며, 자신을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  십자가는 그 나라를 향한 우회로도 아니요 장애물도 아니다. 십자가는 도래한 왕국 자체인 것이다. 예수는 그저 약간의 정치적 암시가 포함된 가르침을 베푸는 도덕주의자가 아니었다. 자신은 영적 삶을 가르쳤지만 불행히도 그의 공적 사역이 정치적으로 오해된 그런 사람도 아니다. 그는 단지 희생 제사로 준비된 어린 양도 아니었으며, 신이자 인간으로서 그의 신성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인성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그런 존재도 아니었다. 실제로 예수는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한 메시아였으며, 인간적, 사회적, 정치적 관계의 새로운 가능성을 몸에 지닌 분이었다. 세례는 이 새로운 통치의 시작이었고 십자가는 그 통치의 절정이었으며, 제자들은 이런 통치를 함께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었다. 이제 더 이상 조직신학의 이름으로나 해석학의 이름으로 이 왕국이 실제적이지도, 적실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이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역사의 예수와 구속사의 그리스도 혹은 신이신 그리스도와 사람 예수 혹은 정경의 예수와 역사의 예수 사이에 아무 차이도 없다. 그 어떤 구분을 갖다 대더라도 예수가 십자가로 상징되는 새로운 윤리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 즉 그는 근본부터가 철저히 다른 새로운 삶의 질서를 지닌, 새 공동체를 창조함으로써 기존 사회를 위협한 사람이었고 그가 진 십자가로 대변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윤리로 우리를 초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후기]

 

1.  누가복음의 편집의도를 읽어내는 방식은 두 가지다. 주석가들 가운데 지배적이었던 견해는 누가의 일차적인 편집 의도가 "변증적"이라는 것이었다. 누가의 목표는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가진 독자 '데오빌로'에게 기독교운동이 로마제국의 평화와 질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누가의 편집 자료들 속에 여전히 예수를 혁명가와 같은 인물로 묘사하는 내용들이 계속 등장한다는 사실은 이런 보고들의 역사적 사실성을 드러내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가의 편집 의도를 가늠하는 또 다른 빙식은 그가 선택하고 강조하는 자료들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이 방식을 따라가면 누가는 여자, 세리, 군병, 가난한 자, 나환자 등 천대받는 이들에게 특별한 괸심을 기울인다고 보인다. 그러니까 누가는 소외된 자들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이런 생각은 누가의 평지 설교를 마태의 산상수훈과 비교해 보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또한 다른 복음서들에는 나오지 않는 나사렛 회당의 설교에 누가가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는 사실과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렇게 보면 누가는 사회복음의 주창자였다. 그렇다면 혹자는 내가 애초에 누가의 이야기를 따라갔기 때문에 수훨하게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해석이 누가의 관점에만 한정된 것이며 모든 복음서의 공통된 관점을 일관성있게 드러내지는 못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모든 복음서가 나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동일한 내용을 충분히 담고 있으므로 내가 어느 특정 복음서 비평 학파를 선호한다고 비판할 이유는 없다.

 

2. 나는 이 연구를 통해 역사적 예수 논쟁에 독창적인 기여를 하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그래서 이 연구에 역사적 예수 연구 논쟁의 영향이 그리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역사적 예수 논쟁에서 복음서 기록들 자체 혹은 학자들에 의해 비평적으로 재구성돤 묘사들을 통틀어 의심의 여지가 가장 적은 부분이 바로 예수 사역의 정치적 차원이라는 점이다. 복음서 본문이 역사적 갈등 문제들에 가장 근접하는 경우는 열심당적 행동방식, 즉 반로마적 폭력의 가능성에 대한 대목이다. 지난 사반세기에 걸쳐 이전까지 좀 추상적으로 이루어지던 조직신학에 좀더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접근해 보려는 노력, 다시 말해 "성육신", 혹은 "삼위일체"와 같은 전통적인 주제를 좀더 새롭게 다루어 보려는 노력이 이루어져 왔는데 이러한 방식의 하나로서 복음서의 예수가 더 새롭게 많은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런 연구들 중 많은 저술이 주장하는 것은 신약의 내러티브적 예수 읽기가, 단지 사회 정의에 대한 신자 공동체의 관심을 다루는 방법 이상이라는 것이다.

 

3. 예수의 사역을 설명하며 내가 사용했던 "열심당적 선택"이라는 용어가 시대착오적이므,로 사용하지 말아아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예수는 물론 주후 66년 이래 므나헴 봉기 이전에는 그 누구도 이 말을 사용한 적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주장은 맞는 말이지만 실제로는 별 의미가 없다. 한 세대 후  혹은 두 세대 후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어느 시대가 되었든, 이 말이 독자들에게 체제 전복적 폭력이라는 일반적인 현상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한 "열심당적 선택"이란 용어는 어떤 열심당원들, 혹은 어느 열심당적 사회개혁의 세부 사항들이 아니라 좀더 단순히 폭력적 체제 전복의 원리 자체, 곧 좌익과 우익 할 것 없이 소위 열심당이라면 누구나 신적 명령의 토대 위에서 천사들의 힘을 빌려 정당화했을 그런 원리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예수가 직면한 도전은 과거 회귀적인 해방과 미래 지향적인 해방 사이의 선택도 아니었고 사회주의적 개념의 해방과 부르주아적 해방 사이의 선택도 아니었다. 문제는 합당한 정치적 명분을 위한 것이라면 폭력이 원칙적으로 정당하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

 

 

3장. 희년의 의미

 

 

1. 희년 혹은 안식년은 네 가지 요구를 포함하고 있었다. 1)땅의 휴경, 2)빚 탕감, 3)노예 해방, 4)가족 재산의 환원.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가 선포한 희년을 살펴볼 수 있다.

 

a)휴경년

 땅을 갈지 않고 묵혀 두는 것에 관해 예수가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안식년에 관한 모든 규정 중 가장 잘 지켜졌던 규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자기들의 필요를 채우시리라는 것을 신뢰하면서 7년마다 밭을 묵히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였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 대망이라는 틀 속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6일 동안(혹은 6년 동안) 부지런히 일한다면, 하나님이 너와 너의 가족들을 돌보시리라고 믿어도 좋다. 그러므로 걱정하지 말고 땅을 묵혀 두어라. 하나님은 너희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다. 안식일(년)을 지키지 않는 이방인들이라고 해서 결코 너희보다 부유하지 않다.”

 

b)빚 탕감과 노예 해방

빚 탕감과 노예 해방은 예수의 가르침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소서”라는 번역은 오류를 범한 것이다. 헬라어 명사 ‘오페일리마’(opheilema)는 글자 그대로 금전적 채무를 가리킨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해 준 것처럼 우리의 빚을 사해 주옵소서”라는 번역이 더욱 적합하다. 이는 예수가 우리에게 돈을 빚진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라고, 희년을 실천에 옮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마태복음 기자는 (혹은 예수는) 주기도문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 6:14-15)는 첨언을 더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희년의 실천과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엄밀한 등식 관계를 설정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오직 은혜를 실천하는 자만이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너희가 서로 용서를 실천하지 않으면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 또한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생각은 복음서의 여러 비유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①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

‘용서하지 않는 종의 비유’는 은혜롭지 못한 이는 은혜를 누리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신명기에 나오는 것처럼, 잦은 빚 탕감은 심각한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는데, 한 예로 아예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다. 안식년이 가까워질수록 부자들은 혹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까 염려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돈 꾸어 주기를 꺼렸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힐렐은 ‘프로스불’을 제시한다. 채권자가 안식년으로 인해 없어질 수 있는 빚을 되받을 수 있게, 그 권리를 법정에 위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제도이다. 이는 모세 율법에서 금지되었던 이자 대출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런 ‘프로스불’은 율법 본연의 혁명적이며 해방적인 성격을 희석시키는데 사용되었으므로 예수의 격렬한 분노를 야기했다. 이에 예수는 빌려주기를 거부하는 상황에 대해 부자들은 돌려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접고 너그러운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답변을 제시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는 의무 이행에 성실하지 못한 채무자에게 정직하게 빚을 변제하도록 하였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프로스불을 이용하여)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②정직하지 못한 청지기의 비유

청지기가 소작인들을 착취하고 주인의 재산을 횡령하다 주인에게 발각되었다. 청지기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거짓으로 부풀린 부분을 원래대로 회복시킨다는 이야기이다. 청지기의 이런 결정은 주인에게 횡령한 재산을 변제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청지기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켜 가난으로 내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행동을 통해 그는 진정한 부를 획득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그에게 당했던 이들의 감사와 우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 중 한 가난한 자,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어 이제 그는 형제로서 영접받고 환대가 이어질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라 부른 것이었다. 예수는 이 이야기의 결론으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외친다. “내가 선포하는 희년을 실천하라. 너희에게 빚진 자들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되지 못하게 너희를 속박하는 굴레에서 자유롭게 되라.” 용서하지 못하는 종의 비유에서는 하나님이 먼저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고서 그 사람이 같은 모습을 보이리라 기대하셨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에서는 청지기가 먼저 행동을 취한다. 그가 먼저 메시아의 부름에 순종하여 하나님과 자기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사해 줌으로써 희년을 실천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은혜의 손길을 받기도 전 먼저 부의 재분배를 실천하는 이 지혜로운 사람을 칭찬한다. 따라서 이 두 비유는 나사렛 설교, 주기도문, 산상수훈에서 이미 선포되었던 주제를 다시금 확인해 준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모세의 안식일 규정을 따른 희년이었다. 빚을 탕감하고, 빚을 갚지 못해 종으로 전락한 빚진 자들을 해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희년인 것이다. 이러한 희년의 실천은 취사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을 위한 선결 과정에 속한 것이었다. 이 길에 들어서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었다.

 

c)재산의 재분배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자발적 가난을 받아들였고, 희년의 한 부분인 재산의 재분배를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예수의 이런 말씀을 교회는 전통적으로 수도사나 수녀 등 매우 특별한 소명의 대상자만이 모든 재산을 포기하도록 요구되었다고 해석했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구제’ 곧 수입의 일부를 자선에 내어주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자선 베푸는 일을 합당한 것으로 간주했다면, 바리새인들을 그토록 신랄하게 비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예수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이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고 그들을 비난했다. 이를 통해 본 바, 예수는 십일조만 내면 이룰 수 있었던 편리한 율법 완수와 손쉬운 도덕적 자기 만족의 수준을 넘어서고, 사람들을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단계로 부르려고 하였다. 과부의 두 렙돈을 통하여 볼 때, 예수는 바치는 돈의 액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주는가가 중요하였다. 

 

후기

예수가 히브리 전통에서 가져와 선포한 희년의 메시지는 매 7년 혹은 매 49년 주기로 실천되던 관습으로서의 수준을 초월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희년의 메시지는 새로운 질서를 나타내는 항구적 특징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예수가 보인 다른 유대 전통에 대한 태도와 상응하는 것이며, 그가 실제로 창출한 공동체 내에서 실천되었던 바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블로서에 따르면, 땅의 재분배를 포함한 희년의 제 규정들은 한 번도 제대로 실천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의 생각과 문화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순종해야 할 명령으로 인식되던 것이 점차 새 세대에 하나님이 행하실 일에 대한 약속의 차원으로 바뀌어 갔다. 블로서는 (하늘의 보화, 부유한 관원, 삭개오 등) 예수의 다른 가르침에 대한 배경으로서 이 희년 개념이 갖는 윤리적 의미를 매우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으며, 이를 지나치게 ‘종말론적’ 혹은 상징적 관점에서 영적인 해석을 제시하는 것에 반대한다. “희년은 그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통찰을 제공하는 신학적 개념에 머물지 않는다. 희년은 신자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준수되어야 할 삶의 지침이다. 이러한 희년적 행위들은 단지 미래적 기대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할 것들이다. 우리는 이미 신자의 삶에서 희년적 활동을 그 특징으로 하는 새 세대를 살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미래에 기대하는 것들은 지금 현재에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4장.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시리라

 

1.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전쟁이라는 주제를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읽을 때, 해석의 태도는 율법적인 것으로 경직화되고, 그 질문 또한 일반적인 수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모든 전쟁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이 과연 그의 입장을 구약 이야기들과 조화시킬 수 있을까? “모든 전쟁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는 일반론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록된 구약의 전쟁들과 나란히 놓으면, 그 일반론은 무너진다. 이스라엘은 성경이 도덕적 일반론을 정당화 해주는가와 같이 현대적 물음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 곧 자기들이 누구였는가 하는 물음을 가지고 성경을 읽었다. 이야기 속에 도덕적 의미가 담기거나 도덕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도덕적 주체가 이야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은 아니다. 구약은 야웨 하나님을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런 행동을 취할 필요도 없게 그의 백성을 친히 구원하는 분으로 그리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나라로 태동하던 독특한 문화적 맥락에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민족으로 생존하는 일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했다.

 

2. 출애굽 기사의 각 부분들은, 비록 해석하기 어려운 대목들이 종종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 사람들을 격파하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분명히 말해 준다. 그들이 받은 요구란 믿고 순종하는 것뿐이었다. 이스라엘이 매우 가공할 만한 파괴력으로 칼을 휘두를 때조차도, 승리의 영광은 병사들의 능력이나 지휘관의 책략이 아니라 야웨의 도우심에 돌려졌다. 이런 관점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 전체를 흐르는 핵심 사상으로 남아있다. 올바른 본문 해석의 일반적인 원칙 중 하나는 어떤 본문이든 저자가 의도한 의미, 그리고 원래의 독자 혹은 청중이 생각했을 법한 의미에 준하여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목숨을 취함이 모든 상황 속에서 도덕적으로 허용되는가 아니면 금지되는가 하는 것은, 아브라함 시대 혹은 여호수아 시대의 문화 속에서 생겨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삭을 제물로 한 계획적인 희생 제사 혹은 여호수아의 전쟁 기사를 살인의 도덕성 여부를 해결하는 자료로 읽는 것은 불합리하다. 가나안 정복 이야기는 피 흘리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경건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이스라엘이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자”, “위엄”, “왕벌”이 그 땅의 거민들을 조금씩 쫓아내리라는, 일반적인 약속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의 나라로 태동하던 독특한 문화적 맥락에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민족으로 생존하는 일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했다. 역대하 16장은 유다 왕 아사와 다메섹의 벤하닷이 북쪽 이스라엘 왕국에 대항하여 동맹을 체결하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선지자 하나니는 이에 저주의 말을 던진다. 선지자의 선포에서 구체적으로 정죄당하는 것은 정치-군사적 힘에 의존하려는 태도였다. 역대하 20장, 32장에는 극적으로 살아남게 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런 이야기들에는 사건의 기적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3.  자신의 역사를 하나의 기적적 보존의 역사로 이해하는 관점은 이스라엘의 표준적 예배 의식의 일부를 이룬다. 이런 보존의 과정에는 때로 이스라엘의 군사적 행동이 동반되기도 했고, 동원되지 않기도 했지만 두 경우 모두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했다. 곧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스스로를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야웨를 신뢰하는 것이 결연히 이스라엘 자신의 군사력을 사용하는 것보다 더 나은 대안이라는 것이다. 예수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성경 속에 등장하는 이러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과연 어떤 의미를 읽어냈을까?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기적적 이야기로부터 경건한 그들의 신앙을 끌어낼 힘을 공급받았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리라”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자신의 생존과 번영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힘이 아닌)자신의 힘에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방향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4. 구약 이야기 배후에 놓인 ‘실제 역사’가 어떤 모양이든, 묵시적 기대에 한껏 민감해져 있던 예수 시대의 분위기에서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들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현재적 방식의 패러다임을 구약에 등장하는 기적적 구원 이야기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통상적이진 못하더라도,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비록 예수가 ‘왕국’ 공동체의 회복과 새로운 삶을 선포하면서 폭력적 방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구약의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기만한다면 자신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신앙을 오늘의 삶에 되살려 내는 자로 이해될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예수가 자신의 말이 액면 그대로 이해되도록 의도하셨을 리가 거의 없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쉽게 역설적, 혹은 상징적 재해석으로 빠진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예수 당시의 신실한 유대인 청중에게는 실현 가능성 여부로 인해 그 약속의 수용이 방해받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묵시적’ 약속들이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다는 이유로, 이 약속들이 시간의 틀을 벗어난 영역을 가리킨다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과거의 구원 사건들은 분명 자기들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팔레스타인 땅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예수의 왕국 선포를 대부분의 청중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것은 그들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향한 심판이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자연 현상이란 획일적이며 예외적 현상은 불가능하다고 믿는, 우리의 현대적 인식으로 예수의 메시지를 걸러 내려고 덤비지 말아야 한다. ‘기적은 없다’는 생각은 우리가 결코 예수와 그의 청중에게 억지로 덮어씌워서는 안 될 현대적 전제인 것이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한 행위들은 결코 역사의 종말도 아니요, 인간의 역사적 사건의 틀을 벗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예수의 청중은 희년의 도래를 출애굽 이야기 혹은 여호사밧의 구원 이야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는 구체적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했다고 생각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5장 비폭력적 저항의 가능성
 
1. 복음서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이 예수의 공생에 사역이 사회 변혁을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한다는 인상을 받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의해 온 요인들(1장 p.26이하, 복음의 본질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는 열심당이 주창한 방식 외에 로마에 저항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가정 때문에 더 심화된다. 이러한 사실과 동떨어진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해, 우리는 효과적인 비폭력 저항이 유대인의 경험에서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일화1) 유대 총독 빌라도가 군기 위에 그려져 있던 가이사의 상을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엄청난 무리들이 몰려와 빌라도에게 이 형상들을 치워 줄 것을 여러 날 동안 강청했다. 그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려 목을 내밀며 그들의 율법의 가르침을 범하느니 차라리 기꺼이 죽음을 택하겠노라고 말했다. - 이 사건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대중의 공통된 반응이었고, 빌라도에게도 이러한 반응이 전혀 예측 불허의 일이었다.
일화2) 두 번째 저항은 수로 공사(식수난 해결을 위한)를 위해 빌라도가 성전 금고를 유용한 것에서 촉발되었는데, 그 사건은 결국 유혈 진압으로 마무리되었다. - 이것 역시 유대인들이 비무장으로 저항하기 위해 몰려나온 점에서 첫 번째와 별로 다를 바 없었다.
일화3) 공식적인 황제 숭배(자신을 신이라 선언)를 명한 첫 번째 로마 왕이었던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자신의 형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도록 했다. 이번에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은 일종의 전면적인 파업이었다. 파종할 시기였지만 밭을 갈지 않은 채로 내버려두었고(흉작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역시 의식적인 위협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특사 페트로니우스에게 한 달 이상 강청을 계속했다. - 유대인들은 가이사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의사가 전혀 없음을 맹세하면서, 한결같이 이 위험천만만 신성모독을 허용하느니 차라리 자신들의 목숨과 아내와 아이들의 목숨까지 내어놓겠다는 다짐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려 하지 않았다. 결국 특사 페트로니우스는 칼리굴라 앞에서 스스로의 입지가 흔들릴 위험을 무릅쓰고 유대인들의 양심의 판단을 옹호하게 되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집단적인 비폭력 저항은 로마 군대를 상대로 10년 사이 두 번이나 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예들은 열심당 식의 방식을 거부한 뒤 예수가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대안은 세상의 종말이나 광야로의 도피였으리라는 가정, 즉 칼을 쥐어야 할 때 칼을 거부하는 것은 곧 역사로부터의 도피를 의미한다는 식의 섣부른 가정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다.
 
 
6장 시산표(試算表)
 
1. 복음서 내용과 문맥을 들여다보면 예수의 사역이 분명 윤리적, 사회적 성격을 띤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예수의 말씀과 사역, 그의 삶과 죽음은 이 세상에서 선택이 가능한 독특한 삶의 유형을 일관되게 형상화하면서 이를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까지도 공히 의미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오늘날은 고사하고, 예수의 그런 입장이 신약의 다른 부분에서라도 적용되기는 한 것일까? 이어질 장들에 담긴 단편적인 논의들은, 예수의 방식을 따른 삶(Jesus kind of life)이 이식된 것으로 보이는 예들 중에서 의미론적, 문화적 양상의 다양성을 고려해 선택한 것들이다. 독창적인 해석은 아니고 단지 학계의 흐름을 요약하여 제시하는 것이다. ‘예수의 방식을 따른 삶’이 어떻게 신약의 다른 부분들에 이식되고 있는지 점검해보자.
 
2. 누가에서 바울까지
 제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라는 주제는 누가복음 14장에서 곧바로 서신서로 나아간다. 바울은 자기 사역을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었다(고후 4:10-11, 골 1:24). 혹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일반 신자의 고통과 연결될 수도 있었다(빌 1:29). 자신을 내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부부사랑(엡 5:25) 혹은 교회연합(빌 2:1-5)을 위한 패러다임으로 제시된다. 서신서들에는 ‘보편적인 목회적, 도덕적 지침으로서의 본받음(imitation)’개념이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장 일관되게 그리고 가장 보편적으로 예수가 우리의 모범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부분이자 주제는 바로 그의 십자가다. 신자의 십자가는 그들이 견뎌내도록 요구받는 모든 종류의 고통, 질병 혹은 갈등과는 다르다. 예수의 십자가처럼, 신자들의 십자가 역시 사회적 영합의 거부(social nonconformity)에 대한 대가다. 그것은 병이나 재난처럼, 설명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그 대가를 미리 계산한 뒤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의 종착지다. 십자가는 루터의 ‘내면적 영적 갈등과 고통’처럼, 민감한 영혼이 자아 및 죄와 싸우는 그런 내적 투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사회적 현실로서, 원치 않는 세상 속에 도래할 새 질서를 드러내는 것이다.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요 15:20)
 
이 말씀은 모호한 삶의 상황을 돕기 위한 목회적 조언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의 메시아됨과 우리의 사회적 순종의 관계를 말해 주는 규범적 진술이다. 예수의 사람들은 예수가 하신 것처럼, 임박하여 우리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새 질서를 나타내고, 또 정당한 폭력의 사용이나 기존 권력들에 대한 인정을 거부하고, 동시에 비개입(non involvement)이라는 제의적 순결 또한 포기함으로서 예수의 행보와 유사한 모습으로 옛 질서의 적대감과 마주 설 것이다. 예수의 공적 사역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로서 인간 예수가 거듭하여 직면했던 유일한 유혹은, 사용할 수 있는 폭력적 방법들을 활용하여 정당한 혁명을 도모하고 이로써 본연의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라는 도전이었다. 그에게 시험거리는 사회적 도피의 유혹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때로 선택하는) 이 대안은 처음부터 이미 배제된 것이었다. 사두개파식의 기득권 체제에 동조하면서 보수적으로 사회 책임을 행사하는 것(대다수 그리스도인이 선택하는 또 하나의 대안이다) 역시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가 보여 준 삼중적 거부에 공감하게 될 때다. ⓵정적주의(quietism) ⓶기득권 유지의 책임 ⓷십자군 방식, 이 세 가지를 명백하게, 근본적으로 그리고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다. 복음서의 기록들은 예수가 말한 거의 모든 것이 사회 윤리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사회 윤리에서는 예수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준다.
 
3. 다시 현재로
 일반적인 경향은, 예수의 의도가 사회적 차원과 다른 어떤 차원에 있다는 것이라거나, 그가 직면한 이슈들 자체가 우리의 문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식의 이유로 그의 윤리가 갖는 사회적 적실성을 폄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인상은 이러한 경향을 설 자리가 없도록 만든다. 예수가 선포하신 것은 세상 가운데 살면서 그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취해야 할 새로운 삶의 태도였다. 곧 이 땅에서 성취되어야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의 어휘나 심상은 성격상 ‘실존적’이거나 제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이었다. 예수의 수난이 불가피했던 것은 정당한 자기 방어책을 포기하는 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종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험이 말하는 바는, 이 세상에서 분명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수단들을 동원하여 사회적 책임을 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 된 도덕적 의무라는 주장에 직면했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이를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급진적 랍비로서 예수는 에비온파적 입장이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초기의 사도적 교회는 바로 그 예수의 정치적 인간성을 교회의 삶에서 규범으로 만들었다. 기독교 교리의 발전 과정을 추적(하나님의 아들, 말씀의 선재, 그의 우주적 탁월성, 삼위일체, 성육신)해 보면, 이런 생각을 더욱 분명히 뒷받침할 수 있다.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성의 모든 차원을 다 취하시고 이를 긍정하심으로써 자연을 하나의 계시로 승인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성육신의 의미는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우리의 통상적 관념의 경계를 허물고, 예수를 통해 인간성에 대한 새롭고 창조적인 정의를 부여하셨다는 의미다.
 
가현설적 입장은 예수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기는 하지만, 이를 위해 예수를 우리의 인간성과 분리해 버리는 우를 범한다. ⓵예수는 인간들의 죄로 인해 죽어야만 했다. 이는 구약 예언서들에 이미 예언된 것이며, 그의 사회적 인간성과는 무관하다. 따라서 이런 필연적 죽음이 어떤 실제적 과정을 거쳐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 곧 사회적 인간성과 관련된 물음은 의미가 없다. 그가 왕이 되거나 자신을 방어하기를 거부한 것은 왕권이나 자기 방어 자체가 잘못이어서가 아니라 그런 식으로는 십자가라는 정해진 운명에 이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⓶우주 전체가 인간의 영역을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복음서 이야기에 나오는 예수는 유대주의의 문화적 고립에서 벗어나 제2 바울서신이 선포하는 관점, 곧 하나님이 주신 역사와 인류에 대한 전우주적 긍정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라는 것이다. ⓷한편으로는 창조 질서의 보편성과 타당성, 다른 한편으로는 축적된 기독교 전통의 역사적 연속성과 적실성 사이에 끼어, 예수의 윤리는 그 속에 어떤 실질적 독창성이 있든 간에, 이젠 더 이상 아무런 결정적 중요성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⓸사실로서의 역사(Historie)와 의미로서의 역사(Geschichte)를 분명히 구별한다. 역사상의(historic) 예수와 역사적(historical) 예수는 서로 다르지 않은가? 복음서의 자료들은 중립적 기록물이 아니라 특정 저자들의 신앙적 증거라는 것이 인식되기 시작했기에, 다른 분야의 동료들이 해 왔던 문학적 혹은 철학적 질문들을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
 
여기서 나는 전대미문의 어떤 현대적 예수를 주창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요청하는 것은 예수가 성부의 말씀이며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라는 고백, 곧 교회가 항상 말해왔던 그 고백의 의미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이 예수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갖는 적실성을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메시아요 주님이 바로 예수시라는 고백에 의해 새롭게 조명되고 새로이 형성되는 사회적 책임은 과연 어떤 모양이 될 것인가? 우리가 윤리적 회개로 부름받은 곳은 과연 어디인가? 다시 말해, 우리의 도덕적 선택을 뒷받침해 줄 사고의 유형을 어떻게 새로 짜맞출 수 있는가? 나는 이런 사고 유형의 재편 작업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사항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⓵지금까지의 신학적 전통은 우리가 반드시 역사의 예수와 교리의 예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만일 예수가 성육신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우리는 예수의 형이상학적 계약(transactions), 곧 그것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게 된 그 계약에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러고는 예수의 탄생에서 바로 십자가로 비약한다. 그 사이에 등장하는 그의 가르침 및 그의 사회적 정치적 개입은 관심의 대상도 아닐뿐더러 규범적이지도 않다. - 만일 우리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한다면 이런 식의 양자택일은 거부해야 한다.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는 동일하다. 교회가 요구하는 실존적 자유를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이 혁명적 랍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야웨의 주권이 인간의 역사가 된 것이다.
⓶기존의 신학적 전통은 우리에게 선지자적 입장과 체제 긍정적 입장 중 하나를 선택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는 선지자들이 옳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꾸려 가야 할 제도에 관한 한 선지자들의 요구는 아무런 직접적 관련이 없다. 자기희생 및 비폭력과 같은 선지자적 이상은 이 세상에서의 책임 수행을 위한 기초는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에만 의존하며 역사를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제도의 유지와 집행을 맡도록 요구받은 이들은 폭력, 불평등, 착취 같은 것을 경감시키거나 없애기 위해 그것들을 수용하고 용납할 것이다. 더 심각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책임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 선지자를 존경하면서도, 실제로는 제도를 택할 것이다. - 메시아로서 예수가 건설한 새로운 통치 형태는 이런 식의 양자택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수가 선포한 희년은 바로 역사 속에서 시행되면서 그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하며, 제한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제도이며, 새로운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주기적인 개혁과 같은 것이다.
⓷신학적 전통은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통치를 외적인 대변혁 아니면 주관적이고 내면적인 것 둘 중 하나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말한 역사의 종말을 사도들은 몇 십 년 동안 강한 기대를 간직했지만, 결국에는 날짜 계산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엉뚱한 무언가를 잘못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만 했다. 이와 반대되는 입장은 예수가 실수했을 리 없다는 가정과 함께, 예수가 하나님 나라와 그 도래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은 단지 당시 통용되던 신비적 언어를 활용하여, 하나의 내적, 영적, 실존적 나라에 관해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믿지 않는 자의 눈, 그리고 역사가의 눈에 그 나라의 실재는 당연히 언제나 숨겨진 채로 남아 있을 것이다. - 만일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우리는 이런 식의 선택 역시 거부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의 사회적 질서지, 숨겨진 어떤 실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우주적 대변혁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 사면과 회개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희년적 순종이며, 그 가능성은 지금 당장 시작될 수 있는 것으로 선포된다. 이는 은총과 정의가 하나가 되고, 새로운 질서로 가는 실제적인 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길을 여는 것이다. 이 새 질서는 내일 시간이 끝 날 것이라 전제하지 않는다. 이는 시간의 지속이 왜 의미 있는지를 드러낸다.
⓸신학적 전통은 우리가 반드시 정치와 분파주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적 책임 곧 무슨 수단을 동원하든 다스리고 통치하는 책임을 받아들이든가, 그게 아니면 ‘비정치적인 길’, 즉 개인적이고 수도사적인 소명 아니면 분파주의적 도피의 길을 택할 수 있을 뿐이다. - 만일 예수가 메시아로 고백된다면, 이러한 이분법은 합당치 않다. 스스로 무력 사용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무력을 사용하는 자들을 정죄한 예수의 독특한 선택은 그 자체로 정치적 적실성을 가진 하나의 행동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산헤드린과 로마 총독 둘 다 정치적 책임이라는 각자 나름의 명분 아래 예수의 생존권을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물음을 생각해 본다면, 예수가 택한 방식은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투쟁보다 오히려 더 적실한 방법이었다. 빌라도(로마 총독)와 가야바(산헤드린 유대교 대제사장)를 모두 예수를 심판함으로써 이에 대한 분명한 증언을 해주고 있는 셈이다. “역사 속에서 야웨의 주도권은 그 공동체의 외적 내적 관계를 모두 아우르는 정치 질서와 관련된 것이다.”(밀라드 린드)
⓹기존의 신학적 전통은 우리에게 반드시 개인과 사회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산상수훈의 윤리’는 친밀한 대인적 만남을 위한 것이며, 사회 구조와 관련해서는 ‘세속적 소명’의 윤리가 필요하다. 회복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들은 예수의 철저한 대인적 접근(radical personal ism)과는 전혀 다른 근거 위에서 결정될 사안이라는 것이다. - 그러나 정작 예수는 철저한 대인적 접근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그가 선포하는 인간성은 모든 이를 향해 던져진 치유와 용서의 부름으로서, 치유 공동체라는 사회적 새로움 속으로 통합된다. 예수가 처한 유대적 정황을 더 깊이 인식하고 그 속에서 아모스적 울림을 생각하며 예수의 이야기를 읽는다면, 이 점은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전통은 우리에게 개인으로서의 인간을 존중하는 것과 역사의 운동 속에 참여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런 양자택일을 거부한다. 역사의 운동이란 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절대적 ‘아가페’와 (통상 폭력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현실적인 효력 사이에서, 부활은 그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부활의 빛 안에서 십자가에 달린 아가페는 (헬라주의자들이 생각하듯) 미련한 것이나 (유대주의자들이 믿듯)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고전 1:22-25).
 
 

7장 그리스도의 제자와 예수의 길

 

논의를 시작하면서 우리가 던졌던 질문은 과연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이 사회 윤리를 위한 실질적 지침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에 일치하도록 예수의 행동이 일관되고 의식적인 사회 정치적 성격과 방향을 보여 주고 있으며 그의 가르침 역시 이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정작 초대교회는 예수가 선포한 왕국과는 천양지차인 것으로 드러났다. 인간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선포했던 왕국 개념으로부터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이방 교회들이 예배한 천상의 그리스도에 이르는 과정 어딘가에서 균열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의 두 번째 국면은 실제 사도 시대의 윤리적 전통의 몇몇 흐름(, 예수의 길과 초대교회의 길은 같은 것이고 초대교회는 변질된 것이 아니다)을 살펴보는 것이고, 이는 본문을 귀납적으로 살피는 방식이 될 것이다.

 

가장 두드러지게 그리고 가장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한 가지 주제는 우리가 참여 혹은 상응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신자들의 행동이나 태도는 주님의 행동이나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성품 혹은 본질과 상응하거나, 이를 반영하거나 이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어떤 고정된 전문적인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서 상응/참여의 사상을 담아내는 수많은 표현 외에, 이 전통 가운데서 서로 구분되는 두 가지 심상 혹은 언어적 전통들의 묶음을 식별할 수 있다. 하나는 제자도(discipleship)라 부를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제자라는 명사, ‘따르다 혹은 배우다라는 동사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이 이미지는 공간적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구름 기둥을 뒤따르고 팔레스틴 여기저기서 선지자나 랍비나 예수를 그의 제자들이 뒤따른다..

 

또 하나의 전통은 본받음’(imitation)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이미지는 좀더 구조적이거나 신비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는 유사한 행동 이면에 깔린 성품과 의도 차원에서 드러나는 내적이며 형식적인 병행 관계를 표현한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진술을 어떻게 이해하건, 그 것이 다음의 사실을 말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곧 그들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에서 혹은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에서, 인간 존재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의 존재 자체와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이러한 지위는 의문시되지 않는다. 구약은 이를 설교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으며, 그저 도처에서 당연한 것으로 전제할 뿐이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보편적으로 전제된 근본 개념의 하나였던 것이 신약에 와서는 성령의 역사와 더불어 하나의 새로운 현실이 된다. ‘제자도 본받음의 두 이미지는 그 내용면에서 많은 부분 중첩된다. (결국 제자도 본받음이란 키워드로 성경본문을 추려내되 복음서에서는 예수의 목소리를, 서신서에서는 제자들의 목소리를 담아내 둘 사이에 간극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제자도 본받음이란 키워드로 비폭력 무저항의 정치적 성격을 드러내 보여준다.)

 

제자/참여자와 하나님의 사랑

 

a) 하나님의 본성을 공유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표지다. [요일 1:5-7]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요일 3:1-3] [벧전 1:15-16, 레19:2 인용] [요일 4:17] [ 3:9-10; 참고 엡4:24

b)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기. [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같이 하라[ 3:13]  [ 6:12; 참고 눅 11:4] [ 6:14-15] [ 18:32-33]

c) 하나님처럼 차별없이 사랑하. [ 6:32-36]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마 

5:44-48]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마태복음 5:45과 누가복음의 병행 구절을 비교해보면, 여기서 말하는 온전함이란 다름 아닌 차별하지 않음  조건 없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지 않듯 그의 제자들 역시 사랑할 대상을 선택할 때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요일 4:7-12, 저자 강조]

 

제자/참여자와 그리스도의 삶

 

a)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표지다[요일 2:5-6]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b)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의 부활 생명에 동참함. [6:6-11]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8:11] [ 2:20; 참고 5:24] [ 4:20-24] [ 2:12-3:1]

c) 자신을 내어 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처럼 사랑하기.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15:12] [요일 3:11-16; 참고. 앞에 언급된 4:7-10] 예수 윤리의 핵심 개념이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황금률이라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예수가 이 계명을 언급한 것은 자신의 가르침을 요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지적하기 위해서였다. 이 계명의 요지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대로 너희도 행하라 혹은 아버지가 그의 아들을 보내실 때 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d) 예수의 섬김처럼 다른 사람 섬기기. [5:25-28]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 13:1-17] [ 15:1-7] [고후 5:14 이하] [고후 8:7-9]

e) 복종

 

제자/참여자와 그리스도의 죽음

 

a)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것이 사도적 존재의 표지다[ 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3:10-11] [고후 4:10-11] [고후 1:5] [고전 10:33] [살전 1:6]

b) 그리스도의 신적 낮아지심에 동참함. [2:3-1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c) 그리스도처럼 너의 목숨을 내어 주라. [5:1-2; 참고 요일 3:16]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 군림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는 종의 모습 [ 10:42-45;  20:25-28]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d) 예수처럼 무고한 고난을 불평 없이 받아들이라. [벧전 2:20-21]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3:14-18] [벧전 4:12-16] 천국의 대의명분을 지닌 자로서, 그리스도 처럼 혹은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의 적대감을 감당하라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 14:27-33] [ 15:20-21] [1:29] [벧전 4:13]

d) 죽음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이다. [벧전 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는 죄를 그쳤음이니 [ 5:24]

e) 죽음은 선지자들의 운명이었고, 우리가 따르는 예수는 이미 선지자들의 그 길을 따르고  있었다. [ 24:19-20; 참고 막 12:5-8]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 2:26; 참고 행 4:10, 7:52] [살전 2:15]

f) 죽음은 승리다. [ 12:10-11]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2:15] [ 1:22-24] [ 17:14]

 

요약

 

목회적 돌봄에 등장하는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설명할 수 없는 우연의 사건이 아니다. 질병이나 사고처럼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그런 사건이 아닌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행동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십자가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 십자가를 향해 다가가고 심지어 십자가를 자초하기까지 한 것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 예수의 자발적인 선택이었다. 예수는 그 대가를 생각하지 못한 채 같은 길을 가겠다고 나서는 일이 없도록 제자들에게 경고한다( 14:25-33). 갈보리의 십자가는 가정 내의 어려움도 아니며, 성취하고 싶었던 개인적 꿈의 좌절도 아니다. 엄청난 빚도, 시댁의 간섭도 아니다. 십자가는 정치적인 것이며, 이 사회를 다스리는 권력과의 충돌에서 생겨난, 법적으로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를 가리킨다. 오래전 초대교회의 신자들 또한 모든 종류의 고통을 칭찬받을 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이 부당한 것일 경우에만, 그 고통은 하나님 앞에서 의미있는 것이 될 수 있었다(벧전 2:18-21; 3:14-18; 4:1, 13-16; 5:9;  4:10) 십자가 개념으로 변형시키는 또 하나의 방식은 이를 자아의 내적 체험으로 만드는 것이다. 십자가의 언어는 또한 내적 참담함, 교만과 자기 의지의 포기라는 방향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본받음과 포기

 

예수의 생활방식을 형식적으로 모방함으로써 그를 따르려는 사람들이나, 이러한 왜곡을 근거 삼아 예수를 따르는 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모두, 우리가 읽어 온 신약 성경과의 놀라운 간격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이다. 앞서 간단히 지적했듯이 신약 성경에는 예수처럼 사는 삶에 관한 일반적인 개념은 나타나지 않는다. 본받음 개념이 여전히 유효한 영역의 하나일 뿐이다. 이는 신약 내의 모든 전승에 공히 해당되는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는 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은 이를 더욱 놀라운 것으로 만든다. 바로 적대감과 권력과 관련하여 십자가가 드러내는 구체적인 사회적 의미의 영역이다. 종된 섬김이 주인 행세하는 삶을 대신하고, 용서가 적대감을 흡수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우리는 예수와 같이 되라는 신약의 가르침에 묶이게 되는 것이다.

 

 

8장 그리스도와 권세

 

예수의 가르침이 규범적 의미를 갖는다는 예수 자신의 혹은 다른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 늘 등장하는 논증의 하나는, 그의 가르침이 철저히 개인 지향적(radical personal ism)이기 때문에 권세나 사회 구조 등의 분야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는 역사가 머지않아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윤리가 실효성이 없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예수의 가르침이 애초부터 책망하기위한 것이라는 식의 주장으로 그의 윤리를 무시하기도 했다. 예수가 요구한 고결한 윤리는 실제 순종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죄를 슬퍼하도록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이 개인 지향적이라는 근거로 그의 가르침을 전면 거부하려는 논증도 끈질기게 제기되어 왔다. 루터와 경건주의 이후, 특별히 개신교 실존주의가 현대의 세속적인 개인주의(personal ism)와 결합한 이후, 아니 더 나아가 프로이트와 융이 자기중심적 대응 유기체라는 인간관을 현대인 모두의 마음에 심어준 이후부터, 개인에 대한 호소가 개신교 진영의 핵심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에 발맞추어 예수의 주된 가르침도 한 개인의 입장에서 가장 철저히 인식할 수 있는 부름, 곧 독립된 개인일 때 가장 진솔하게 실행할 수 있는 태도를 요구하는 부름으로 이해되어 왔다. ‘독립된 개인으로서 실행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흔치않은 영웅적 도덕 행위건 자신의 죄에 대한 슬픔과 같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해당되는 반응이건 상관없이, 이는 모두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해야 할 일에 속한다. 그러니까 사회 구조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다 4세기 무렵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에 대한 책임을 감당해야 할 위치에 처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예수 아닌 다른 근거들에서 필요한 사회 윤리적 통찰을 얻어야만 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교회가 기독교 내의 사회 윤리 체계를 세우기 위해 다른 모델들에 의존해야만 했다는 사실에 우리가 놀라지 말아야 할 진짜 이유는, 사실 뻔하고 매우 논리적인 결론이지만, 예수가 사회 윤리에 대해 별로 하실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장의 임무는 바울 서신에 나타난 권세 개념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리가 현대 관점들 및 질문들과 어우러질 수 있는 방식을 조명해 보는 것이다.

 

권세(power) 개념의 명확성과 모호성

권세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의 변화 가운데에서도 일을 일어나게 만들 수 있는 모종의 능력을 의미하고 구조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 속에서 드러나는 정형화된 면모들을 의미한다. ‘구조라는 용어는, 직접 인식할 수 있는 현상을 초월하고 또 이에 선행하는, 그리고 이를 규정짓는 패턴 혹은 규칙성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현대 신학에서의 예수와 권세

1930년에서 1950년 사이 유럽을 뒤흔들었던 사건들에 몰려 새로운 물음 및 성경 본문에 그러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게 해주는 새로운 기술이 한데 어울려졌고 바울의 답변은 윤리적 퍼즐에 맞는 조각이 된다. 복음이 드러내는 세계상 중 여태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그 부분이 사실은 복음이 건드리지 않는다고 여겨 왔던 바로 그 물음들에 대한 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권세의 기원

[ 1: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7절에 함께 섰다”(subsist)고 번역된 단어는 영어의 시스템과 어원이 같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창조에서 그리스도가 맡은 몫이라고 말한다.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체계화된다. 다시 말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함께 선다. 그리스도가 연합된 상태로 유지하는 이 모든 것은 세상 권세들을 가리킨다. 이는 피조계의 질서, 그러니까 본래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하나의 신적 선물로 주어진 그 질서를 통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타락한 권세들

피조물과 세상은 타락하였고, 이 점에서 권세들 역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다. 그들의 활동은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목적을 중재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종이 되어야 할 구조들이 우리의 주인이자 보호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타락하고 반항적인 상태에서도 권세들의 작용이 한없이 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권세들은 질서 유지 기능을 계속 수행한다. 전제적 통치조차도 혼란보다는 나으며, 따라서 우리는 거기에 복종해야만 한다. 율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며 우리는 이에 순종해야 한다. 비록 본받을 가치가 없지만, 이교적이고 원시적인 형태의 사회 종교적 표현들에도 아직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의 역사를 듣지 못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보존적 인내가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사역의 결과를 선포하기에 앞서 당시의 언어로 피조계의 존재 구조에 관해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을 선언한다.

 

  이 모든 구조는 하나님이 지으셨다. 인간 존재에 관한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의 삶이 닿 영역이면 어디에나 조직화된 규범과 규칙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권세들은 반역했고 타락했다. 그들은 겸손함으로 창조의 의도와 일치하는 상태에 머물기를 거절하였, 오히려 스스로 절대적 가치가 되겠다고 나섰다. 우리는 무엇에 복종하는가? 우리의 삶과 사회에 필요하긴 하지만 스스로를 위해 우상적 지위를 요구하고 마치 자기가 절대적 가치인 양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 바로 그 가치들과 구조들에 복종하는 것이다타락했지만 권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섭리적 주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은 이들을 선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벌코프가 권세들과 구조적으로 유사한 것으로 예를 드는 현대의 몇몇 구체적인 현상인간의 전통, 천상의 실체에 의해 좌우되는 지상적 삶의 과정, 도덕, 고착된 종교적 윤리적 규칙들, 정의와 국가 질서의 집행.” “원시 부족들에게서 보이는 집안이나 종족의 위치, 중국인의 삶에 나타나는 조상과 가족에 대한 예절,  힌두교의 사회 계급,  고대 바빌론의 점성학적 통일성,  다양한 도덕적 전통과 규율로 가득 찬 도덕 생활,  종족의 권세들, 계급, 국가 그리고 민족” 

 

요더의 분류

종교적인 구조들(특히 안정된 고대 원시 사회의 종교적인 토대들), 지적인 구조들(무슨 무슨  내지는 무슨 무슨 주의’), 도덕적 구조들(법규와 관습), 정치적 구조들(전제 군주, 시장, 학교, 법정, 민족, 나라)

 

사도 바울이 권세들에 관해 말하는 바를 이 구조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우리는 구조들 없이 살아갈 수 없다그러나 이 구조들은 원래 작정된 것과는 달리 우리를 섬기는 일에 실패했다. 이 구조들은 인간을 해치며 예속시키므로 우리는 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실과 생존은 분리될 수 없으며, 이 둘은 모두 권세에 의존되어 있다.

 

예수의 사역과 권세들

다른 모든 사람처럼 예수 역시 이 권세들에 복종하였다. 그러나 도덕적으로는 자기 영광에 도취된 이들에게 동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깨뜨리셨으며,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예수를 죽였다.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큰 의, 그리고 로마의 평화보다 더 보편적인 사회적 인간관계 질서의 이상을 설파하고 구현하면서, 예수는 유대인에게 거룩한 날을 속되게 하도록 허용하였고, 로마인에게는 불법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다루도록 허용함으로써 법률에 대한 그들의 자랑스러운 관심을 부정하도록 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죽음이 권세들에게 끼친 결과를 묘사하는데 세 개의 동사를 사용한다.[ 2:13-15; 벌코프의 책 인용] 그는 그들을 공공연한 본보기로 삼았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 땅에 참 하나님이 나타나자, 권세들이 하나님께 적의를 품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구가 아니라 그의 적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그들을 이기고 승리하였다.’ 부활은 십자가에서 이미 성취하신 것을 명백히 드러내준다. 이 승리의 구체적인 증거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가 세상 권세를 무장 해제시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던 망상의 힘이라는 무기가 그들 손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교회의 사역과 권세들

(벌코프 인용)

바울의 진술은 그리스도가 임한 후부터 새로운 힘이 구원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는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곧 교회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교회는 이스라엘과는 사뭇 성격이 다르다. 교회는 세상을 채우고 있는 두 종류의 사람 곧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 둘을 한 몸 안으로 함께 이끌었다는 것은 하나의 비밀로서, 오랜 세대 동안 감추어져 있다가 이제 바울의 사역을 통해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역을 통해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 하나님의 각종 지혜가 분명히 드러났다. 이제 이런 교회의 존재 자체가 난공불락이던 세상 권력들의 지배가 종말을 고했음을 그들에게 공포하는 표시다. 권세가 지배하던 세상에 교회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권세에 대한 가장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대안이 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타자성’(otherness of the church)은 연약함이 아니라 강함에 기반을 둔다.

(벌코프 인용이는 신실한 자들과 권세들 간의 직접적인 충돌에 대해 바울이 무지하다는 말이 아니다.  6:10-18은 실상 그 반대임을 보여 준다. 궁극적으로 신실한 자들의 투쟁 대상은 손에 잡히는 사람이나 사물이 아니라 이들이 순복하고 있는 권세들이다. 우리의 의무는 권세들을 무릎 꿇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이루시는 과업이다. 그는 지금까지 이 일을 책임져 오셨고 앞으로도 계속 그리하실 것이다. 권세에 대한 공격이 예수의 과업이기 때문에 방어는 우리 몫이 된다. 우리의 임무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권세들과 권세들의 유혹과 속박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무기에 대한 비유적 언급들은 우리의 역할이 방어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우리의 무기는 그리스도와 가까이 지내는 것이며 이로써 권세들의 끄는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 머무는 것이다.

 

기독교적 사회 전략에서 교회의 우선성

벌코프의 해석에 따르면, 바울이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임무는 교회의 존재 자체다. 교회는 권세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이는 이미 예수가 하신 일이다. 교회는 존재 자체로 권세들의 반역이 진압되었음을 드러낸다. “책임 있는 사회라는 문구는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의 암스테르담 총회를 위한 준비 문서에 처음 등장한 이래 아주 흔한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이 문서는 만약 교회가 전체 사회를 위해 어떤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면 이를 이행하는 첫걸음은 바로 교회 자체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교회로 교회 되게 하라는 것이 그 슬로건이었다. 이는 교회로 회복된 사회가 되게 하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는 경제적 차별과 인종 차별의 극복이 실현되는 새로운 인간성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야 주변의 사회를 향해 이러한 차별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진정한 사회 생황을 재창조하는 일차적 과업에 관심을 기울인다. 첫째로 사회의 갱신을 위해 교회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바로 말씀 선포라는 일차적인 사역의 기능과 예배공동체로서의 삶을 성취하는 것이다. 또한 소그룹 사람들이 함께하며 갱신의 체험 속으로 들어가고 세속 영역 가운데서 기독교적 삶과 행동을 통해 서로서로를 뒷받침하는 그런 삶이 중심이 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경건파의 오해

바울이 말한 것은 일부 보수 종교집단들이 말하는 것처럼 복음이 개인적인 윤리만 다룰 뿐 사회 구조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는 특히 권력을 가진 개인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그들이 겸손하게 또는 분별 있게 또는 더 나은 기준에 따라 사회를 다스리게끔 하는 것이 사회 구조를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복음이 다른 구조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필요로 하는 우선적인 사회 구조는 기독교 공동체라는 구조라는 사실이다. 이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은 겸허해지며 그들의 행동방식이 변화된다. 권세들 자체 혹은 힘 그 자체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다. 제자들이 어떤 종류의 힘을 행사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권세의 구조적 반역이 너무나 고질적이어서 그 상황에서 책임 있게 행동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권세와 공모하거나, 그에 결탁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러한 거부를 통해 그 권세가 압제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편을 들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부가 결코 사회로부터 물러서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오히려 소극적 방식으로 사회 변화 과정 안으로 개입하는 한 방식으로서, 설사 가치 있어 보이는 목적을 위해서라도 무가치한 수단을 활용하지는 않겠다는 거부를 의미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권세들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분별할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경험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역사의 표면을 보고 그것을 쉽게 하나님의 뜻의 선언으로 읽어 내려는 사두개적 혹은 독일 기독교적 유혹에 희생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일하신다. 교회의 사명은 그 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아는 것이다.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의 현대적 적실성

인간을 타락했지만 또한 구원받을 수 있는 자로 보는 기독교의 인간관은, 인간을 자신의 구원을 이룰 준비를 거의 갖춘 존재로 보는 유토피아적 사상이나 인간을 환경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는 기계론적 사상의 인간 이해보다도 훨씬 더 적절한, 다시 말해, 훨씬 더 정확하고 실제적인 출발점을 제공한다.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것은 개별적으로만 응답할 수 있는 선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포는 권세들에 대한 도전으로 작용하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적인 현실이다. 따라서 이 선포에 담긴 주장들은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그 속에 담긴 심판의 의미 또한 이를 들으려고 결심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는 1세기 건에 이렇게 외쳤다. “예수의 정복자 되심은 영원히 확립된 사실이다. 온 세계가 그의 것이다.”

 

 

9장 혁명적 복종
 
1. 나는 예수의 사회 윤리적 적실성에 대한 학계의 일치된 견해, 곧 예수는 현 사회가 오래 유지될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적절한 사회윤리를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고 보는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물론 이런 전통적 견해는 그 나름의 복음서 해석을 전제하고 있기에, 나는 이런 복음서 해석과 다른 나름의 대안적 해석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복음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만으로 나의 논증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사회 윤리적 적실성을 과소평가하는 견해는 복음서뿐만 아니라 실제 초대교회에서 제시되었던 윤리적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견해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수가 사회윤리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다른 곳으로부터 사회윤리를 빌려오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의 핵심적인 면모는 학자들이“가정규례”라고 부르는 특정 형태의 윤리적 가르침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골3:18-4:1)  양식비평의 선구자 마르틴 디벨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초대 교회는 일상적 윤리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적어도 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관점에서 이런 필요에 적절히 대처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초대 교회는 불가피하게 헬레니즘과 유대교의 변증 전통에서 발전된 도덕적 교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가정규례는 이런 과정을 잘 보여주는 표본이다.”이런 진술에는 우리는 다시금 예수의 의도를 근거로 한 윤리란 교회가 이 사회에서 직면하는 실제적 문제를 해결해주는데 적합하지도 않고 별 의미도 없다는 주장의 한 전형을 만난다. 예수의 윤리가 적실성이 없었기에 도덕적 판단과 분별을 위한 근거들을 유대사상이나 헬라사상으로부터 차용할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2.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러한 주장은 세 가지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첫째 만약 초대교회가 비성경적 출처로부터 도덕적 통찰을 빌릴 수 있다면 이런 차용이 타당하고 이런 차용에 의지하지 않으면 초대교회가 가진 윤리적 근거가 적합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이런 견해는 교회가 비성경적, 비기독교적인 출처로부터 윤리적인 지침을 차용해 오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하며 또 합당함을 말해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거기서 어떤 통찰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셋째는 급진적인 예수의 윤리로부터 당시 기존 사회 속에 자리를 잡은 초대교회의 가르침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는 본질적으로 보수적인 자세를 취했음을 의미한다. 즉 초대교회는 여성의 종속성이나 노예 제도에 도전하지 않았고 이로써 초대교회는 서서히 기득권 계급의 종교, 즉 3세기 후 콘스탄티누스 시대에 절정이 달했던 발전과정을 준비해 나갔다는 것이다. 마르틴 디벨리우스는 초대교회가 시공을 초월하는 예수의 급진성으로부터 벗어나 세상(마르틴 루터가 창조질서라고 불렀던 것을 의미)과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을 진보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이리하여 종교개혁기 이후, 바울이 스토아학파로부터 사회윤리 사상을 차용했다는 사실이 일종의 선례 혹은 당위로 간주되었다. 즉 바울이 기독교 윤리를 정립하는데 필요한 통찰을“사물의 본성”으로부터 가져오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선례와 당위가 된 것이다. 그래서 진보적인 개신교 진영에서는 바울이 여성에 대해 불공평한 시각을 가지거나 노예제도를 인정했다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또한 급진적인 개신교 진영에서는 바울식의 스토아 사상의 차용은 기독교 윤리가“자연신학”으로 퇴보한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의 주장들의 공통점은 모두 정경 안에 있는 예수의 윤리와 사도적 교회의 윤리 사이에 갈라진 틈이 있으며, 교회가 이 간격을 뛰어넘으려 한 것은 예수에게서 어떤 적절한 도덕적 장치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일치된 입장을 가지고 있다.
 
3. 가정규례가 스토아 철학에 기원을 둔 것이라는 가정은 오랫동안 학자들 사이에 깊고 넓게 퍼져있었기에, 최근에 이르러 이에 대한 본격적인 의구심이 등장했다. 학자들은 좀 더 신중하게 성경을 해석하면서 예수와 바울을 양극단으로 나누어 놓은 식의 해석이 본문에서 자연스레 도출된 것이 아니라 “바우어”의 헤겔 철학적 전제들이 신약에 덧씌워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학자들은 가정규례들이 도래해야 할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요구된 대체적 가르침이라는 전통적인 주장에 대한 문헌사의 근거를 찾을 수 없었다. 가정규례가 넓은 의미에서 스토아 철학과 비슷해 보인다 하더라도 스토아 철학과는 다음과 같이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1) 스토아 사상에 의하면 내가 나의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는 삶에서 이루어지는 진정성의 성취는 나 자신을 중심으로 한다. 반면에 가정규례에서는 관계 자체가 우리가 맞추어 살아가야 할 기준이다. (2) 스토아적 사고는 명령의 대상이 되는 모든 명사를 단수로 사용하고 한 사람에게서 가능한 많은 역할을 분별해 낸다. 그리고 당면한 결단의 상황에서 자가에게 어떤 역할을 적용할 것인가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결단에 달린 문제다. 반면에 가정규례는 복수 형태로 주어지며 훈계들은 교회 안의 모든 아내들, 종들, 부모들에게 주어진다. 따라서 가정규례의 윤리적 권고에서는 공동체의 권징과 훈련이 가능하고 공동체 전체가 함께 도덕적 참여를 제고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3) 스토아적 논리의 패턴은 단순히 사물의 본질을 풀어내거나 이를 볼 수 있는 통찰력을 확보하는 것이며, 이 통찰의 도구는 이성이며 도덕적 의무의 기초는 사물의 본질이다. 만약 사람이 사물의 본질을 안다면 당연히 그는 그 본성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스토아 철학의 형태는 명령법이 아니다. 반면에 가정규례의 문법적 형식은 언제나 명령으로서 구약의 소위 “정언법” 형태와 유사하다. (4) 스토아 철학은 품위 있는 남자를 염두에 두고 그에게 최고의 자아상을 따라 살아가라고 요구한다. 이런 요구의 대상은 사회의 지배층, 그리고 시간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반면에 가정규례의 훈계는 먼저 아랫사람들에게 향한다. 상전에 앞서 종에게, 부모에 앞서 자식에게, 남편에서 앞서 아내에게 권고가 주어진다. 바로 여기에 초기 기독교의 윤리적 사고의 혁명적 새로움이 드러난다. 이는 기독교 윤리가 타문화의 윤리적 자료로부터 차용된 것이라고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사회질서에서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도덕 행위의 주체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당시의 문화에서는 어떠한 법적, 도덕적 지위도 없던 자들에게 인격적, 도덕적 책임감을 부여하고 그들을 도덕적 결단의 주체로 간주하는 신앙을 발견한다. 
 
4. (5)스토아 철학은 사회 속의 지배자나 귀족들, 그리고 그들 속의 높고 고귀한 요소에 호소한다. 진정한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스토아적 이상은 바로 그의 존엄성과 초연함 그리고 속박에서 벗어난 자유에 집중된다. 반면에 가정규례에서 명령의 핵심은 상대방에 대한 자발적인 복종이다. 복종은 기존의 질서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에 대하여 자발적이며 의미 있는 동기를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왜 이런 가르침이 필요했을까? 당시에 아이들과 여성들과 종들을 향해 복종하는 명령을 내려야 할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인가? 당시 사회에서 이들에게 복종은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들에게 복종 아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 흐르는 두 번째 혁신적 원리를 발견한다. 사도들이 노예들과 여성들에게 복종하라고 권면한 것은 그들이 그 권면과는 다르게 행동하도록 유혹하는 어떤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것이 무엇이었겠는가? 이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 체험 가운데 혹은 기독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가운데, 이 비천한 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존엄성과 책임감에 대한 비전 혹은 열망을 갖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삶이든지 설교든지 무언가가 그들에게 그들의 종속적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거나 이미 변화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을 때라야, 가정규례들이 말하는 그런 종류의 오만함에 빠질 유혹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복종에 대한 요구는 불복종에 대한 유혹을 전제하지 않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나아가 불복종의 유혹은 종속적 신분을 가진 자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미 그들의 존엄성을 긍정해주는 메시지를 듣고 난 상황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의 메시지를 사회적 문맥에 맞게 합리적으로 재구성해보면 복종에 대한 요구는 모든 종류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긍정에서 생겨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은 이미 존경받을 만한 남자를 향해 자기 역할에 부여받은 존엄성에 맞게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반면에 가정규례는 먼저 사회 위계 구조에서 최하위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을 향한다. 여기에는 이미 그들이 지금까지 도전할 수 없었던 복종의 관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만드는 메시지를 듣고 있었다는 상황이 전제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의 부활로, 그리고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을 통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그들이 이런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겠는가? 
 
5. (6) 스토아 윤리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동기는 사물들의 존재 방식과 자신의 위치에 맞추는 삶의 자명한 타당성이다. 여기에는 보상의 약속이나 마음의 감동도 탄원도 없다. 윤리적 반성은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알게 된 후, 이를 실행하는 자발성에 달려 있을 뿐이다. 반면에 가정규례는 규례를 해석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격려하는 여러 이유가 제시된다. 다시 말하면 명령이 옳은 것일 뿐 아니라 왜 옳은지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설명들은 모두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복종하라는 일반적인 명령과 좀 더 구체적인 명령들이 성도들이 공유하는 예수의 모범이나 성품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 명령들이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공동생활 속에서 사도들의 원초적인 가르침을 통해 생겨났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설명도 불가능하게 만든다. 다시 한 번 이런 면에서 사도들의 윤리를 유대나 헬라적 출처에서 온 것으로 간주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7) 가정규례는 먼저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한 후에 그 다음으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도 일종의 복종을 보여주도록 요구한다. 부모는 자식을 거스르지 말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요구를 한다. 빌레몬은 오네시모를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말고 사랑받는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권유를 받는다. 이렇게 복종에 대한 요구가 상호적이라는 사실은 혁명적 성격을 갖는다. 현재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과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명령의 전부라면, 루터 전통이 이 본문들을 창조 질서를 재확인하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이 사회를 그렇게 만드셨기에 이 창조질서에 계시적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주장이 옳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 질서를 신적 명령에서 나온 것으로 보는 루터 전통이 옳다면, 기독교 사회 윤리는 항상 근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정규례가 아랫사람에게 복종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하는 것은 결코 기존 질서를 신성시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가정규례는 즉각적으로 그 가르침을 반전하여 이 질서를 상대화하고 약화시켰다. 그 시대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일이나 아버지가 자식을 화나게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상전이 종을 다룰 때 그들 모두가 더 높은 상전의 종임을 인식하는 것은 아랫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변화를 윗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했던 그 고백의 의미 및 이런 선포가 이들 들었던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으로부터 직접 생겨난 것임에 틀림없다. 이런 가르침의 기원에 대해 우리가 논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결국 이 전통이 예수로부터 유래한다는 것이다.  
 
6.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에도 가정규례에 표현되어 있는 윤리 사상의 중심구조와 유사한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고린도의 여성 신자들이 예수 안에서 누리게 된 새로운 가치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던 방식 중 하나는 대중 앞에 나올 때 마땅히 갖추어야 할 표준적인 차림이었던 베일이나 머리 수건을 예배드리는 중에 벗어버리는 것이었다. 당시에 여성이 밖에 나갈 때 쓰는 베일은 그녀가 아버지나 남편의 보호와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일종의 보호 표식의 기능을 했으며 또한 누군가에 종속된다는 상징이었다. 가정 규례와 마찬가지로 어떤 해석자들은 이 단락을 읽으면서 바울이 아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비전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 단락의 핵심 논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먼저 고린도의 여인들이 이미 평등에 관한 복음 메시지를 들었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이 수건을 벗어던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특히 예배 중에는 더욱 그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정규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다시 한 번 복종과 지배의 관계는 가치의 차이가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대목이 있다.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고전11:11-12)  지금 존재하는 현실에서 복종을 수용한다고 해서 그것이 복종하는 사람이 열등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종속적 입장에 있는 이들에게 복종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라고 요청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이 다른 사회에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7. 고린도전서 7장에서 바울은 종속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곧 여성과 노예들이 직면하는 구체적인 결정들에 대해 이야기 한다. 이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복음이 구체적인 윤리적 경우들을 만날 때 나타나는 자유 및 이러한 자유로운 적용 가운데 나타나는 일관성을 잘 드러내준다. 바울의 권면의 첫 번째 요소는 원래의 사회적 신분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이런 훈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현재의 사회적 상황을 바꾸는 것이 죄악된 것이나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가 아니다. 다만 세상의 구조가 영원하지도 않고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만큼 중요하지도 않다는 근거에서, 사도의 일차적 관심은 이런 세상의 구조 속에서 모든 사람이 염려 없이 지내도록 도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신분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서 자유를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과 함께 얼핏 그 정반대로 보이는 두 번째 교훈의 흐름이 나타난다. 만약 종이 자유롭게 될 수 있다면 그는 이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인은 그 남편이 사망할 경우 재혼할 자유가 있다. 만약 누군가가 꼭 결혼하고 싶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자유인이 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의 극대화라는 관점에서 사회적 신분을 바라보라는 요구를 받는다. 더 많은 자유를 행사할 기회를 얻은 사람은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서도 이 자유는 현재 신분 안에서도 이미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곧 성취될 하나님나라의 견지에서 보면 그러한 사회적 차이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이다.
 
8. 국가와 관련된 신약의 가르침에도 동일한 태도가 나타난다. 여기서 정부는 가정 질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살면서 갖는 인간 관계내의 구조들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정부에 복종하는 동기와 의무는 그리스도의 사역과의 관련 속에서 이야기 된다. 그러나 가정규례와 다른 놀라운 차이가 있다. 가정규례에서는 아랫사람을 향한 권면에 이어 역으로 윗사람들에 대한 권면도 주어진다. 그러나 복종에 대한 명령이 정치적으로 종속된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졌을 때는 이 권고가 역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즉 왕이 자신을 백성을 섬기는 종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식의 권고는 없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윤리적 교훈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그 교훈에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역사의 멍에를 자원하여 지셨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현재 상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지극히 철저하고 혁신적이어서 신자들을 예속하고 소외시키는 이 세상 권세에 대한 굴종 상태가 끝났음을 인식하게 한다. 모든 종류의 속박에서 자유를 느낀 그리스도인들이 이 같은 근본적인 변화에 어울리게 행동하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그러나 다름 아닌 그리스도 때문에 초대 교회는 이 변화를 교회의 영역을 넘어 일반 사회의 질서에 강압적으로 요구할 수 없었다. 복종의 자태를 취하신 예수의 본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로서는 결코 이를 일반 사회에 강요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새 세계 혹은 새 체제는 단순히 현재 경험하는 세상의 대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재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기초한 자발적 복종이란 삶의 패턴은 복종에 대한 창조적 변혁의 한 형태라고 말할 수 있다. 군림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섬김의 태도를 취하는 “혁명적 복종”이라 부를 있는 이 복종은 사회의 종속적 위치에 있는 자로 하여금 원한을 품지 않고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하며, 동시에 지배적 위치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군림하려는 습관을 버리고 끊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종속된 자는 숙명이나 분노에 찬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복종을 통해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하나의 윤리 주체가 된다. 이것은 옛 질서와 새 질서가 서로 다른 차원에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믿는 아내는 믿지 않는 남편에서 자유롭게 복종하는 것을 자신의 현재 몫으로 수용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우리 모두를 자유롭게 하시고 자유인이나 종이나 모두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게 하셨기에 지나가 버리고 말 현재의 구조 안에서 자발적 복종이 가능하게 되었다.
 
9. 트뢸취와 그의 제자들은 옳았다. 그들의 말대로 초대교회는 사회 체제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가야 했고 따라서 임박한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대로 가득하게 했던 예수의 가르침에  등장하지 않는 윤리를 개발해야 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발전시킨 윤리가 예수의 윤리와 상반된다거나 혹은 아무 관련이 없다는 그들의 전제는 틀렸다. 가정규례에 명시된 바와 같이 예수의 윤리가 전해졌고 이것이 변화하여 사회 내에서의 섬김이라는 교회의 태도로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하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 복종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지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의 역할 내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스토아 철학의 전통적 관점을 변혁하였다. “주 안에서 합당하다”는 것을 알고서 복종을 받아들이는 아내나 자녀나 종은 예수의 부르심이 갖는 급진성을 져버린 것이 아니다. 예수가 처음부터 가르쳤고 자신의 고난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낸 태도란 바로 현재의 세상 구조에 대한 이런 태도이며, 어차피 무너질 현재의 세상 구조들을 무너뜨려야 할 필요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태도다. 나는 신약성경의 한 부분을 골라내어 그것이 사회 질서 문제에 적실성을 가질 뿐 아니라 예수의 윤리와도 일관성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이를 통해 사도들의 윤리가 예수의 윤리와 상충된다는 널리 퍼진 견해를 비판했다. 그러나 이것이 사회 윤리의 어떤 문제에 관해서도 신약성경의 결의론적 가르침을 통해 직접적인 답을 찾을 수 있다거나 좀 더 넓은 일반화의 과정이나 지속적인 해석학적 노력 및 다른 자료들로부터의 통찰 없이도 다른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현대의 문제들에 대해 성경적 윤리의 내용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약성경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제공했던 구체적인 지침들이 모두 예수의 메시아적 윤리를 재확인하고 적용한 것들이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10장 로마서 13장과 국가의 권위
 
1. 나치의 위기가 개신교 신학계의 중심부를 강타하기까지는 국가에 대한 기독교 교리의 기초로서 로마서13장의 핵심적 중요성과 적실성에 대해 거의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이후 오랜 세월동안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신학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해 왔던 신학적 흐름 속에서 이 본문은 기독교 정치인과 그리스도인 시민들을 안내하는 일종의 요약판 헌법처럼 간주되었다. 신약성서학이 이미 오래 전에 국가가 창조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이라는 식의 단순한 개념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은 개신교의 조직신학과 윤리 사상 특히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개신교 사상에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반대하고자 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통적인 주장이다. 그것은 국가는 칼을 휘둘러야 할 사명을 받았고 또 신자들은 국가에 순종해야 할 의무를 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의 이런 사명과 신자의 의무가 결합되어 그리스도인들이 국가가 수행하는 모든 합법적 살인 행위를 지지하고 이에 참여하도록 하는 도덕적 의무를 부과한다. 비록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및 모범에 근거한 다른 의무들과 상반된다 하더라도 이 의무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간주된다.
 
2. 복음서에는 세속 정부를 사탄의 주권이 지배하는 영역으로 보는 강한 흐름이 존재한다. 이런 시각을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예수의 광야 시험 기사일 것이다. 누구도 이것이 성경 내용의 한 부분이며, 사도시대 이후 초기 교회가 견지해 온 중요한 흐름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로마서13장은 단지 정부의 지배를 묵인하는 것일 뿐 현존하는 정부를 하나님이 인정했다거나 신적인 개입으로 어떤 나름의 주권이 확립되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헨드리쿠스 벌코프와 케어드는 사도들의 사상 중에는 권세와 통치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라는 틀 속에서 국가를 이해하려는 강력한 흐름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로마서13장을 창조 질서로서의 국가 제도라는 입장 대신에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교회라는 영역을 넘어 확장되면서 이 구속사역을 반영해주는 역동적인 과정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런 시각이 중요한 것은 바로 로마서 본문 내에 존재하는 “권세”라는 개념 때문이다. 요한계시록13장에서 묘사되는 정부의 이미지는 참된 신자들을 핍박하는 권세로 나타난다. 지금까지 개신교 정치 윤리 사상이 로마서13장 한 본문에 의해 지배되고 마치 이 본문이 정치사상 영역의 헌장이나 헌법인 것처럼 간주되어 온 상황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한다.
 
3. 로마서 전체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것과 고통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것을, 그리고 승리에 찬 미래로 나아가는 하나님의 움직임에 의해 이끌리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현재의 사회 제도에 근거를 제공해 주는 정치적이고 보수적인 표현으로 로마서13장을 파악하는 일체의 해석은 본문의 전체 맥락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거부한 것일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는 동일한 문맥에서 원수 갚음과 진노의 개념을 둘러싸고 매우 구체적이며 변증법적인 교차 현상이 나타나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직접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되며 이를 하나님과 그의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롬12:19) 다음으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그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으로서 권세들이 승인된다(13:4). 이것은 정부가 수행하는 기능이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해야 할 기능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하나님이 이용하시는 권세들의 파괴적 행위가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런 행위에 참여하는 일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의무라는 생각을 천명하지 않는다. 이렇게 단일한 구절을 이루는 일관된 논증 속에서 동일한 단어들이 한 문맥 속에서 사용되고 있다면, 이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하나님의 섭리적 통제 아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원수 갚음이나 진노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실행하지 말도록 명령받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4. 로마서13장은 전통적인 견해가 주장하듯이, 어떤 특정한 정부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거나 인정된 것이라고 선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정부를 제정하셨다는 말은 현존하는 어떤 정부가 존재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섭리 행위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실증주의적인 입장에 의하면 어떤 특정한 정부가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그 정부의 합법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런 입장은 과거 루터파 일각에서 주장한 것이다. 이런 입장이 히틀러 정권을 공인하는 지점까지 나갈 필요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학적 입장은 그런 상황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를 막을 만한 어떤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히틀러 치하에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 입장을 얼마든지 극단적으로 몰고 갈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그 결과 이 입장의 타당성은 분명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입장은 여전히 대중적 신앙과 애국주의 속에 남아있다. 이런 실증주의적 시각의 약점은 로마서 본문이 어떤 특정한 정부의 존재에 대해 도덕적으로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으며 또한 정부의 통치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구체적인 언급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에 대한 다른 입장은 규범적 관점이라 부를 수 있는 칼빈주의적 전통의 견해다. 이런 입장은 쯔빙글리에서 출발하여 존 낙스와 크롬웰을 거처 칼 바르트와 에밀 부르너에 이른다. 이 입장은 하나님이 공인하신 것은 어떤 특정한 정부가 아니라 “합당한 정부”라는 개념이다. 즉 어떤 정부가 최소한의 요구 조건들을 만족시키면서 존재하는 한, 이 정부는 하나님이 설립한 기관으로 재가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정부가 하나님이 부여하신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그 정부는 권위를 상실한다. 그렇게 될 경우 불의한 정부에 저항하여 궐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시민의 의무가 된다. 이는 정부라는 제도 자체를 부인하기 때문이 아니라 합당한 정부를 옹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상의 약점은 부분적으로 이 사상 자체에서 연유한다. 어떤 정부가 합당한 정부인지를 누가 판단할 것인가? 그러나 이 관점이 가진 최대의 약점은 로마서13장 본문 안에 그 어느 것도 정당한 반역 이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실제 존재하는 국가를 거부하고 이를 전복시키려는 시도의 근거가 되는 합당한 의미에서의 국가 개념은 이 본문에서 보이지 않는다. 본문 어디에도 전복되어야 할 실제 국가와 대조되는 합당한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정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5. 만약 실증주의적 혹은 규범적 해석 모두가 본문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이라면 이 본문이 정말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 제시된 바울의 논증은 도덕적 진술이지 형이상학적 진술이 아니다. 그는 다만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현재의 상황에 대해 말할 뿐 모든 정체적 실재의 본질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상적 사회질서를 위한 처방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현존하는 권세들을 제정하거나 인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권세에게 명령하고 질서를 부여하며 그들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주권적으로 말씀하는 분으로 그려진다. 인간 사회가 존재한 이래 위계질서와 권위와 권세는 항상 존재했다. 하나님이 정치 영역에 질서를 부여하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부가 하는 구체적인 행위 하나하나를 도덕적으로 승인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반역적인 권세의 존재에 대해, 혹은 그들의 정체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명하시고 섭리와 허용의 방식으로 신적 목적에 맞게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권세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이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 자체가 정부가 어떤 모습을 갖추어야 하는지 혹은 우리가 정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관해 아무 새로운 사실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존재하는 정부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도,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통로가 된 것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우주를 질서 있게 다스리시는 가운데 그에 의해 자리를 잡고 사용되는 것뿐이다. 이는 사람이 정부에 가담하여 하는 일이 인간의 선한 행위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본문이 가진 일차적인 의도는 로마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혁명이나 불복종에 대한 어떤 생각도 품지 말고 무저항적 자세를 견지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을 가져다가 다른 사람을 살해할 의무를 뒷받침하는 증거 구절로 만드는 것이 얼마나 이상한가? 
 
6. 로마 제국이 피지배 백성들에게 요구했던 역할에는 군대나 경찰 업무 등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런 기능들은 세습되는 것이거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의 특권으로 간주되었다. 당시에는 모든 사람에게 공히 부과되는 병역 의무 같은 것이 없었고 더욱이 노예와 유대인이 대부분인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의무를 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관찰은 본문의 내용뿐 아니라 당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본문의 의미를 확장하여 마치 다른 시대 다른 유형의 정부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의무들에도 이런 입장이 당연히 적용되는 것처럼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특히 본문의“복종하라”는 어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현대 징병제도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종하도록 요구받은 역할들 중 칼을 들어야 하는 기능은 사법적이며 치안 기능을 가리키는 것이지 사형집행이나 전쟁은 이에 해당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치안과 전쟁을 구분하는데, 이 둘 사이에는 힘에 대한 호소가 함축하는 사회학적인 의미 면에서 구조적이며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정당한 전쟁”과 같은 이론에 약간의 논리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성은 거의 없다. 실제적이든 가상적이든 어떤 정부의 이름으로 수행되는 어떤 전쟁이든 이 기능을 로마서13장이 정부에 부여해주는 권위 안에 포함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7. 로마서13장의 전체 의미를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마치 어떤 정부가 합법성의 기준을 채우지 못하여 반란을 일으킬 필요가 있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이 척도를 가지고 어떤 정부가 하나님으로부터 승인을 받았는지 여부를 판단할 수 없다. 존재하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규제에 복종되며, 그리스도인들은 이 권세들에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에 대한 복종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도덕적 독립성과 판단력을 여전히 유지한다. 따라서 정부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중요한 기준들이 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정부의 지위란 그 정부가  무엇을 요구하든 우리가 거기에 단순히 순종할 의무를 지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복종이다. 복종은 순종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거절하면서도 그 정부의 주권 아래 머물러 그것이 부과하는 처벌을 수용하는 양심적 거부자나 혹은 가이사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하지만 그가 자신을 죽이게 허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종은 하지만 순종을 하지 않는 자들이다. 이런 복종을 명령하고 또 가능하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나 생존을 위한 계산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복종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하나님의 승리를 드러내고 성취하셨듯이, 그리스도인의 복종은 피조계의 반역하는 권세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승리에 동참하는 길이다.
 
8. 콘스탄티누스 이후 교회를 지배해 온 주도적 전통에서 로마서13장과 마태복음5장은 긴장 관계에 있다. 개신교나 로마가톨릭, 보수 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 모두 이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로마서13장은 사회적 영역에서 그리고 마태복음5장은 개인적 영역에서 우선권을 갖는다는 설명으로 이 두 종류의 진술의 긴장 관계를 해소하려 했다. 어떤 평화주의자들은 이런 분석을 수용하고 여기서 더 나아가 개인의 신실함이 사회적 책임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일 이 둘이 서로 모순된다면 바울보다 예수의 입장을 따르고 책임론보다 종말론을 따르는 것이 더 타당한 선택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제시한 설명을 통해 이런 가정 자체가 성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신약성경이 한편으로는 정부에 순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을 사랑하라는 두 가지 명령을 내리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 둘이 모순될 때 우리는 그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 이 두 본문은 모순이나 긴장관계에 있는 구절이 아니다. 이 두 본문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적 관계를 포함한 모든 관계에서 “비저항적”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둘은 모두 예수의 제자들에게 이 세상이 “복수” 혹은 “정의”라고 부르며 전개하는 이기주의 놀음을 거부하라고 촉구한다. 이 두 구절 모두 칼이 사용되고 그로 인해 사회질서가 유지되는 역사적 과정을 존중하고 따라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그 칼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맡은 화해의 사역을 감당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11장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의 칭의

 

정의가 오직 믿음으로만 그리고 은혜를 통해서만, 그 어떤 공로와의 상관관계도 없이 이루어진다는 바울의 주장은 모든 급진적인 윤리적 혹은 사회적 관심을 근본에서부터 잘라 버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바울과 현대 독자의 질문

 

바울의 칭의 개념은 수세기 동안 개신교 사상에서 너무나도 자명한 기정 사실로 인정되어 왔다. 이는 또한 가톨릭적 영성으로 치부되던 어떤 경향들에 대한 교정책으로 절실하게 필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적 전통과 아주 잘 조화되었다. 그러나 논의를 위해,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가장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 있는 것이라는 가정은 검증해야 할 하나의 가설이라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바울에게 의란, 하나님 안의 의든 인간의 의로움을 말하든, 우주적 혹은 사회적 차원을 갖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다는 대안적 가설을 적어도 한 번은 고려해 볼 만한 가설로 상정해 보자. 물론 이처럼 의를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본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이 믿는 자들에게 부여하시는 의의 개인적 차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필자가 반대하고자 하는 것은 이 전통적 교리를 논쟁의 상황에 적용하는 특정한 방식, 곧 윤리적 사회적 차원들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이 칭의 개념을 활용하려는 입장이다. 필자는 칭의의 개인적 차원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개인의 구원을 좀더 큰 실재 속에서 바라본다면, 이는 우리가 그러한 화해를 이해하는 통상적 바탕이 되는 개인주의를 거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크리스터 스텐달(Krister Stendahl)은 이 개인주의적 공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고전적인 루터식 체험의 모든 주요 요소가 사도의 체험이나 사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 나간다. 첫째, 바울은 스스로 죄책감에 사로잡히지도 않았으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추구하지도 않았다. 둘째, 바울이 이해하는 히브리 율법의 의도에 따르면, 율법의 기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책을 알게 한다거나, 듣는 이들로 하여금 죄에 대한 자각을 더 깊게 하도록 함으로써 용서의 메시지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도록 만든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율법은 그의 백성들이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동안 그 삶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조치였다. 셋째, 바울에게 믿음이란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다른 유대인들과 갈라놓았던 그 확언, 곧 나사렛 예수를 통해 메시아가 도래했다는 사실에 대한 확언이었다.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장이요 자비롭고 용서하시는 보호자로 본다고 해서, 이것으로 유대인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믿음의 주관적, 지성적 의미는 이 메시아적 확언에 앞설 수도, 그것을 대체할 수도 없다.

 

바울이 맞서 투쟁하던 이단적 사상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하여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이 폭로하는 근본적인 이단 사상은, 메시아가 도래하셨고 따라서 이방인들도 포함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언약이 개방되었다는 사실을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교회의 사회적 구성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바울은 과연 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가? 바울은 스스로 심각한 죄인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공의 아래 서 있는 자신의 실존적 고뇌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메시아가 도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교회를 핍박하고 하나님의 언약이 이방인들에게로 개방되는 것을 방해했다는 매우 구체적인 이유 때문이다. 지금 그의 삶이 바르게 세워졌다는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불가해한 간섭을 통하여, 그가 올바른 대의를 위한 하나님의 행동의 대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하나님의 의를 선포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 양자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양자 모두, 어떤 이(루터)는 율법이라는 과정을 거쳐 그리고 어떤 이(바울)는 율법과 상관없이,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새 사람

 

바울이 에베소서를 통해, 교회를 위한 청지기가 되라는, 오직 그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은혜( 3:2)이며, 그에게 알려진 하나의비밀’(mystery)이 있는데, 일정 시간 감추어졌다가 바울에게 주어진 계시를 통해 알려진 이 신적 목적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화해하여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2:11-16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을 고한 것으로 묘사되는 적대감은 유대인과 헬라인들 사이의 적대감이다. 이 적대감을 극복하는 일, 다시 말해 그들을 나누었던 담, 곧 유대인들은 신봉하고 이방인들은 무시했던 유대 율법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화평을 이루는 일은 그 자체로 한 새로운 인류를 창조하는 일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3:1) 바울의 독특한 사역은 하나님의 목적의 비밀을 통찰할 수 있도록 그에게 허락된 독특한 계시와 분리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저 개인들의 영혼을 구원함으로써 이제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도록 하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화평을 이루고 벽을 허무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자체로, 하나는 율법 아래 살았고 하나는 그렇지 않았던, 두 부류의 사람으로 구성된 한 새로운 공동체를 설립하는 일이다. 바울은 이 사건들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 속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사도적 사역이 차지하는 자리에 대한 바울 자신의 이해는 이방 세계의 복음화와 그리스도의 재림이 서로 시간적이며 인과적인 관계가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나님 앞에서 유효한 새로운 의

 

마르쿠스 바르트(Markus Barth)는 갈라디아서 2:14이하,“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는다”(justified)는 것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며 하나의 교제권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으로, 바로 이 관계 안에서 그리고 이 관계를 위하여 사태를 바로 잡는 것을 의미한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칭의란 바로 에베소서에서 말하는 화평을 이루는 것 혹은 막힌 담을 허는 것이라는 말과 동일하다. 바르트는 그리스도 안의 칭의는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에게 일어나는, 그래서 개인이 혼자 추구하고 소유하는 개인적인 기적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칭의는 이 사람과 저 사람을,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칭의는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바르트는 우리가 이미 스텐달을 통해 그리고 에베소서에 확인한 바를 확실하게 해준다. 곧 하나님의 칭의와 개인들 및 그룹 상호간의 화해는 순차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관계가 아니다. 바르트는 바울에게는 전조와 결과 간의 관계가 결코 구별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피조물

 

경건주의 전통의 개인주의에 초점을 맞춘 성경 본문, 고후 5:17(“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을 보자. 개인들을 향한 복음 설교가 사회 변혁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 되는 것은 변화된 개인은 분명 다르게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질문은 단지 그것이 과연 이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인가 아닌가 하는 것뿐이다. 본문 자체를 좀더 신중하게 들여다보면 개인주의적 해석은 지극히 의심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이라는 표현은 원문에는 없다. “피조물”(creature) 혹은 창조”(creation)로 번역된 단어, ‘크티시스’(ktisis)가 신약 다른 곳에서는 개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단어는 창조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창조의 행위를 가리킨다. 이 단어는 우주 전체를 의미할 수 있다. ‘인간 창조물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사회 제도들을 지칭한다(벧전 2:13).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하는 다른 한 군데에서는, 에베소서 2:15 새 사람과 완전한 병행을 이루어, 새롭게 된 개인이 아니라 유대인/헬라인 단절의 극복으로 상징되는 하나의 새로운 사회적 실재를 가리킨다. 좀더 최근 번역자들이 선택한 번역을 선호해야 할 개연성이 훨씬 커진다. “누구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창조계가 새로워진다”(if anyone is in Christ, new is creation). 혹은 좀더 부드럽게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된다”(there is a whole new world, NEB). 이렇게 되면 본문의 강조점은 사람의 존재론적 변혁에 있지 않고(사람의 심리학적 혹은 신경 계통의 변혁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그리스도를 삶의 에 받아들인 사람의 관점의 변화에 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하는 말은 하나의 사회적 혹은 역사적 진술이지, 내향적 혹은 감정적 진술이 아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

 

한스 베르너 바르취(Hans Werner Bartsch)는 바울이 로마 공동체 전체를 한 번도 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율법의 자리에 관한 물음의 당면한 의미는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께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조직신학적 사색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구체적인 로마의 상황, 곧 유대인과 헬라인, 율법적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서로를 용납해야만 했던 그런 상황이었다. ‘율법이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영혼 구원의 방편으로나 그 장애물로서가 아니라, 역사적 구체성 속에서 유대인들을 구별해주는 정체성의 표지로서였다. 그리고 칭의론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것이다. ‘칭의라는 단어는, (앞에서 논의한 창조와 같이) 심판자의 판결의 결과로 주어지는 한 사람의 준사법적 상태를 지칭하는 추상명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어근의 의미를 좇아 하나의 동사적 명사,  사태를 바로 잡는’(setting things right) 하나의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이 교회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을 생각해보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하나의 교회로 지칭하지 않는 것은 그 그룹의 불충분한 연합이 그들에게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 문제가 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보인다. 바르취는 이 편지의 모든 전환점에서 유대인과 헬라인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바울의 칭의 개념을 다른 부류의 사람들 간의 화해에 초점을 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우리가 초두에 제기했던 문제, 즉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제안하는 혁명적 비폭력의 윤리와는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마도 분명한 것은 이런 사회적 칭의 개념이 현재의 신학적 윤리학 논쟁에 미치는 일종의 이중 부정의 효과일 것이다. 전통적 논의에 의하면, 바울은 예수와 다르기 때문에 혹은 칭의는 사회 윤리와 다르기 때문에 예수의 길은 더 이상 우리 시대를 위한 규범이 아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을 더 열린 태도로 읽어 보면 바로 이런 부정적 명제가 오히려 부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적 기독교가 그 진화의 막바지에 가까워진 어느 지점에서 바울은 예수가 그 과정의 시작 지점 어딘가에서 말했던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곧 창조를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안에 있는 자나 밖에 있는 자나, 친구나 적 모두가 동등한 축복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이로써 우리 또한 그 사랑을 적과 이방인과 죄인에게 베풂으로써 우리가 가진 사랑의 진정성(예수가 말한 완전”;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청중에게 요청한 완전은 아무런 잘못이나 흠도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친구와 적, 내부인과 외부인, 선인과 악인 사이를 가르는 차별에 대한 거부다. 이는 선인과 악인을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무차별적인 사랑에서 그 면모를 드러낸다.)이 구체적인 현실이 된다는 데 있다. 가장 복음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되는 때는, 사람들 간의 적개심이 해소되고 이웃 사랑이 원수에게까지 확장되며, 가장 의로운 명분을 위해서라도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다. 우리 자신의 공로나 업적과는 무관하게 나의 적과 내가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내 손으로 상대의 목숨을 취할 수 없는 하나의 새 인류 안에 있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예수는 희생 제물일 뿐 아니라, 선생이요 모범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창조 질서를 보증하시는 분일 뿐 아니라 창조계의 기초를 흔들기도 하는 분이시다. 믿음은 주관성일 뿐 아니라 제자도이기도 하다. 그간의 우리의 논의에서 전통적 요소가-희생 제물로서의 예수,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주관성으로서의 믿음-거부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필자의 의도가 아니다. 필자는 오히려 메시아적 요소를 배제하려는 경향에 대항하여 신약을 방어하고 있다. 이전 세대에 북유럽 학계에 팽배했던 반로마적, 반유대적 편견들로 인해 바울 본연의 메시지가 개인주의적, 신플라톤주의적 구원 개념에 가려져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12장 어린 양의 전쟁

 

지금까지 우리 논증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예수와 바울이었다. 하지만 신약 내에서는 다른 인물, 다른 사상 또한 나름의 목소리를 발하고 있다. 우리의 논증이 철저한 것이 되려면 이미 제시한 해석이 다른 전승들을 통해서도 검증되어야 한다. 나는 곧바로 전체적인 요약으로 건너뛰는 데, 요한계시록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다.

 

우리는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 주장하지만, 역사가 그런 식으로 움직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아직 증명되지 못한 사안에 속한다. 역사의 의미와 역사의 과정, 특별히 역사 속에서 신뢰와 강제성의 상호 작용에 관한 사도적 인식에 대해 알고 싶다면, 신약의 이곳저곳에도 산발적으로 나타나지만 특별히 요한계시록에서 주된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예전적(liturgical) 본문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의 환상을 통해 요한에게 주어진 질문은 다름 아닌 역사의 의미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역사가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과거 역사 속에서 일해 오셨고 계속해서 우리 가운데서 활동하겠다고 약속하셨다는 확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관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신비적, 실존적 혹은 영적 이유에서라도 인간사의 전개에 관한 관심을 폄하할 수 없다. 일련의 환상 및 찬송들을 통해 주어진 답변은 죽임당한 어린 양이 권세를 받기에 합당하시다!”이다. 사실상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역사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칼이 아니라 십자가이며,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드러내는 순종의 열쇠는 효율성이 아니라 인내다(13:10). 의로운 자의 승리는 의로운 자들을 도우려는 무력에 있지 않다. 의로운 자들의 승리는 부활의 능력 때문이지,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계산 때문도 아니며 선한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더 큰 힘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순종과 하나님의 목적의 승리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관계다. 교회의 연약함(요한은 유배중, 바울은 감옥에)과 현 세대의 악한 통치자들 간의 필사적인 충돌에서 교회가 취한 이런 연약함이라는 입장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수행하신 사역의 의미를 논리적으로 풀어 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는 하나님의 원수 사랑에 너무나도 신실하신 나머지 그가 택할 수도 있었던 모든 효율성을 포기하셨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 어린 양이 그를 경배하는 백성이 계속하여 살아가는 인간적 역사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가 하는 물음이다. 우리는 예수를 단지 경건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랍비들의 계보 중에서 가장 위대한 최종 주자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를 역사를 움직이는 자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역사의 움직임을 바라보아야 할지 가르쳐 주는 기준으로 생각해야 한다.

 

어린 양의 전쟁

 

효율성이냐 순종이냐 하는 어려운 선택에서 가장 합당한 실례는 예수 자신이다. 그가 정치적 효율성을 보장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및 열심당 세력이나 당시 팔레스틴 사회의 다른 권력들과 정치적인 제휴를 꾀함으로써 적실성 있는 대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실제 매우 현실적인 가능성에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왕관을 거부하고 십자가를 받아들임으로써 그가 내린 결정은, 기꺼이 효율성을 포기하게 만들 정도의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신적 사랑에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었다.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구할 것이다.”이런 역설적인 가능성이 애초부터 분명한 사실 자체를 바꾸지는 못한다. 곧 예수는 사태의 결과를 올바르게 만들 수 있는 일체의 능력에 대한 규범적 관심을 완전히 배제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기는 초대교회의 찬송시에 가장 심오한 형태로 표현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 2:6). 성경의 보편적 증거에 의하면 그리스도인들이란 바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요한계시록의 환상들은 어린 양이 경배를 받는 천상의 보좌가 있는 방에서 시작하여, 수많은 우리 형제들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린 양의 피와 그들의 증거의 말씀으로용을 물리친 승리의 환상으로 이어진다(12).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자기 뒤를 따르는 자만을 제자로 인정하셨을 때 마음에 두고 계신 의미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 찬송시의 본래 의미는, 하나님과 동등함을 버리신 것(6)은 이후 기독교 교리의 발전 과정에서 형이상학적 신성과 성육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예수가 포기하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형이상학적 지위뿐 아니라 오히려 그가 오셔서 거하게 된 인간 사회의 일들에 대해 아무런 제약 없이 행사할 수 있는 주권적 권력이었다. 그가 자신을 비우신 것, 죽기까지 종과 순종의 형체를 취하신 것은 다름 아닌 주권의 포기요, 분명 역사를 올바른 길로 가게 만들기 위해 효율적으로 행동해야 할 의무를 포기하신 것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포기와 패배의 수용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은 이것이 바로 승리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고백 속에서라는 말은 신자들의 겸손함이나 애정이나 헌신을 표현하는 칭호가 아니었다. 이는 그가 우주의 권세들과의 관계에서 승리자 되신다는 사실을 확언하는 것이었다. 이 찬송시가 확언하는 바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예수가 보여 준 명백한 역사적 실패를 인간 역사의 한 動因으로 이용하셨다는 것이다. 이 찬송시는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저 하늘에서 왔다가 다시 그리로 돌아가는 신비적 인물로서의 그리스도에 관한 헬라의 신비 종교적 문서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는 동시에 십자가라는 매우 정치적인 죽음을 당했던 인간 예수에 관한 설명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의 십자가라는 복음서의 이런 개념은, 고통이 그 속에 구속적 효력을 담고 있다거나 순교가 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가치 있는 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비기독교적 국가를 표방하는 정부에 의해 종교적인 이유로 핍박받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예수의 이런 부름이 가리키는 바는, 바로 전략이라 할 수도 없는 이 순종이라는 전략의 외관상 패배이며, 또한 오로지 자신을 이웃의 자비로운 처사에 맡기는 사랑, 곧 대적과 소외된 자들과의 화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자신과 가족들을 위한 정의를 포기하는 그런 사랑에 충실하고자 하는 이들이 겪어야 할 불가피한 고통이다. 예수가 진정으로 포기하신 것은 폭력이라기보다는 강한 자들로 하여금 약한 자들의 존엄함을 무시하도록 만드는 태도, 곧 목적을 이루겠다는 강박증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모든 합법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의 핵심은, 정당한 방법을 통한 목적 달성이 불가능할 때 우리의 정당한 목적을 기꺼이 포기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어린 양의 승리에 찬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반역하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투쟁, 초기 퀘이커 교도들이 어린 양의 전쟁이라 불렀던 그 투쟁의 본질에 참여한다는 개념이다.

 

힘없음을 받아들임

 

십자가를 자신의 의도를 성취하기 위한 매우 특이하지만 효과적인 기교로 간주한다면, 이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역을 두고 칭송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바울이 제시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소치다. 궁극적인 적실성이 확보되고 선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열쇠는 단순한 순종이며, 이는 역설적이건 아니건 어떤 형태의 계산과도 무관하다. 십자가는 부활이라는 요리를 만들기 위한 조리법이 아니다. 고통은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는 수단도 아니며 그 자체로 선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악에 연루되기보다는 기꺼이 눈에 보이는 패배를 받아들이려는 그런 종류의 신실함은,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일하실 때 일어나는 일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어린 양의 궁극적인 승리와 발을 맞추는 것이다. (*‘십자가-부활이라는 결과론으로 보지 말라. 십자가는 철저한 순종이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철저하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발제주) 궁극적 선이란 결과가 아니라 신실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이런 시각이 바로 현대인들이 흥미를 상실하는 대목이다. 부활과 어린 양의 영원한 영광에 대한 약속이 유일한 보증이 되는선의 승리, 사회 전체를 위에서부터 통제하는 방식으로 조작할 수 있는, 즉각적으로 누릴 수 있는 승리와 혼동하면 안 된다. 중세 시대 로마 기독교와 이슬람이 시도했던 바는 지금 마르크스주의와 민주적 민족주의가 시도하고 있다. 선한 명분을 위해 악을 행할 수도 있다는 그 나름의 적실성을 만들어 낸다.

 

역사를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는 (*잘못된-발제주) 신념이 전제되고 나서야, 악에 대한 그런 식의 편의주의적’(opportunistic) 정당화가 따라온다. 전쟁이 약속하는 바를 자기도 똑같이 성취할 수 있으며, 어쩌면 폭력을 사용하지 않고서 더 나은 방식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평화주의자가 기독교 평화주의’(Christian pacifism)를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성품과 그리스도의 사역에 기초한 기독교적 평화주의는, 우리의 순종과 궁극적 효율성 사이의 계산적 관계가 끊어진 그런 종류의 평화주의다. 하나님의 승리란 부활을 통해 오는 것이지 효율적인 다스림이나 생존의 보장을 통해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증거의 타당성과 가능성에 대한 전망이 비관적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다시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교회의 너무 많은 부분을 지배해 왔던 그 자기 중심적 태도와 사회적 무관심으로 돌아서야 할 것인가?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바는 이것이다. 곧 이러한 비관적 전망에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논쟁해야 할 주제는 인간의 본성과 역사의 방향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구상에서 그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들이 비기독교적인 혹은 탈기독교적 신념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아마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직시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 이후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배해 온 생각, 곧 사회를 향한 교회의 근본적인 책임과 그 사회를 관리하는 것(*, 순종으로 나아가야-발제주)이라는 식의 생각이 얼마나 타당성 없고 터무니없는 것인지 깨달을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요약 및 후기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지금 우리가 사는 곳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종류의 세상이라는 식의 생각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으로 더 가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는 지금 우리의 책임 아래 있는 예측 가능한 미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비평가들은 저 너머의 세상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은 현세와 내세를 분리하려는 영적 의도를 품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종교란 이 세상과 무관하다는 주장뿐인 것이다. 밧모섬의 선견자가 미리 보았던 미래는 하나님도 움직이고 우리도 움직이며 우리의 개별적 행동이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우주, 곧 한 단일한 체제였다.

 

성경적 묵시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다. 곧 황제들과 군대와 시장으로 대표되는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바를 이해하는 더 나은 열쇠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이지 결코 군사적, 물질적, 종교적 힘으로 무장한 로마의 통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예수를 따르는 것은 효율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후에 천국에서 만족을 맛보고자 현재의 사회 과정 속에서 해방을 위한 관심을 포기한다거나, 순수함을 위해 효율성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예수 안에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인과 관계가, 어떤 종류의 공동체 건설이, 어떤 종류의 갈등 관리 방식이 우주의 본질과 어울리는가에 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온 세계가 그 손 안에 있다는 것이 승천 이후 교회의 고백이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정치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그저 시적인 수준 혹은 용기를 북돋우는 정도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