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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의 핵심 개념 -송제근

메르시어 2023. 5. 16. 21:15

구약성경의 핵심 개념 -송제근

2018-01-21 19:25:50


경륜

  

1. 경륜은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역사 속에서 진행시키려는 계획이다. 하나님은 태초에 만물을 창조하신 후 역사적 상황에 맞게 새로운 작전을 펼치시며 우주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역사를 창조해 가신다. 이것이 바로 경륜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역사 진행에서 작전을 변경하시거나 새롭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만드신 우주를 인간들이 통치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주신 "권리와 자유"때문이다. 주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을 알려주시는 행동이 바로 계시다. 하나님의 계시는 펼쳐지고 발전된다. 하나님의 계시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하는 관계를 이루기위해 하나님 편에서 먼저 말하고 행하시는 행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는 반드시 인간 편에서의 반응을 기대하고 요구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에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발전되기도 하고 퇴보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우주와 역사 속에서 계시를 늘 새롭게 주시는 것을 "계시의 펼쳐짐,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당신의 경륜이 진행되고 발전될수록 완전하게 펼쳐져서 구약 성경보다는 신약성경에서 더욱 완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인간 저자들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가운데 당신의 계시를 기록하도록 하셨다. 그런데 각 성경 저자들은 단지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역사적 존재일 뿐이므로 이들은 자기들이 살아가는 시대적 상황속에서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다는 한계를 가진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경륜에 맞추어 발전되어 간다고 말할 수 있다.

 

2. 경륜은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 속에서 이루려는 거대한 계획, 일종의 마스터플랜인데, 이 계획으로 이루려는 궁극적 목적은 바로 우주와 역사 속에 임하는 하나님나라다.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계획인 경륜은 성경에 크게 네가지 단계로 나타난다. 

a.  제1경륜은 창조에서 아브라함까지인데 이 기간 동안에 하나님나라는 소극적이고 수동적으로 진행된다. 이 기간에 하나님은 악이 우주에 편만하게 되어 하나님나라를 붕괴하기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해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나라를 소극적 부정적으로 진행하신 이유는 인간에게 주신 놀랍고 엄청난 자유를 존중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1경륜 아래 진행된 하나님나라는 악순환을 거듭하여 그야말로 총체적으로 붕괴할 상황에 이루고 말았다.

b. 제2경륜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의 초림까지의 기간이다.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전격적으로 불러내어 제2경륜의 시대를 여셨는데, 이 시대에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으로 진행해 나가신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당신 나라를 만들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으며 인간에게 능동적으로 자신의 뜻을 드러내셨다.  제1경륜 말기의 절망적 상황 속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심으로 하나님나라는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씨)에게 가나안(땅)을 약속하시고 율법(뜻)을 주심으로 하나님나라가 역사 속에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세 요소를 갖추게 하셨다. 실제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씨, 땅, 뜻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은 매우 험난했으며 수많은 외적, 내적 전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다.

c. 하나님나라가 근본적으로 한계를 보인 제2경륜의 마지막 "때가 차매(갈4:4)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를 여셨다. 제2경륜에서 예고된 다윗의 한 후손이라는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제3경륜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나라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혁명적, 폭발적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제3경륜에서는 하나님나라 구성요소인 씨.땅.뜻이 혁명적이고 폭발적으로 초월되었다. 이제 제3경륜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믿는 자는 하나님나라 씨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또한 하나님나라의 땅도 가나안이라는 지리적 영토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세상 모든 곳,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되었다. 하나님나라의 뜻도 제2경륜에서는 소극적, 부정적 형태가 대부분이었지만 제3경륜에서는 대단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의 언약전쟁의 성격이 혁명적으로 전환되었다. 제2경륜에서는 영적 차원과 함께 물리적 차원의 전투가 중요했지만 제3경륜에서는 모든 전투가 영적 차원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이후 역사가 흘러갈수록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는 수많은 패배를 기록했다., 특히 중세의 십자군과 근현대사의 제국주의를 주도했던 서구교회들이 그러했다.그 이유는 첫째는 혁명적으로 높아진 하나님나라 씨의 기준이 오하려 아주 낮아지거나 모호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교화했을 때부터 일어난 현상이다. 둘째는 제3경륜에서 혁명적으로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땅이 지리적 관점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지리적 땅이 아니라 인간이 모여 사는 모든 삶의 영역을 하나님의 언약법이 시행되는 하나님나라의 땅으로 창조해내는 원리, 실제에 대해 교회가 너무 무능하고 무지했다. 셋째 하나님나라의 뜻이 저차원적으로 이해되어 정신적, 영적 에너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d. 인자가 다시 올 때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18:8)는 말씀에 따르면 제3경륜의 마지막은 불신, 배교, 타락이 지배하는 시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럴 때 예수계서 재림하시고 새로운 경륜인 제4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시작될 것이다. 이 놀라운 4경륜 시대에도 하나님나라는 여전히 씨, 땅, 뜻의 세 요소가 갖추어짐으로 완성될 것은 분명하다.

 

 

언약

 

1. 하나님이 당신의 경륜을 따라 궁극적 목적인 하나님나라를 세우시는데 사용하시는 역사적, 합법적 수단이 바로 언약이다. 이 역사적, 합법적 수단이 없이는 그 궁극적 목적은 성취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과 언약을 아주 구체적인 장소와 역사적 시간 속에서 공적으로 체결하심으로 당신 나라를 이루신다.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로서 언약(berith)이란 인격당사자간에 공적 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공식은 언약의 이런 의미를 아주 명백하게 보여준다. 이런 의미는 고대 근동의 공적, 합법적 관계를 맺는 제도인, 조약, 입양, 결혼에서 그 유비를 찾을 수 있다. 이 유비들은 인격당사자 간에 공적 관계를 합법적으로 이룬다는 점에서 구약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의미와 동일하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나타나는데 하나님은 이런 고대 근동의 유비들을 사용하여 쉽게 이해하도록 하셨다.

 

2. 그런데 언약개념은 제1경륜에서는 사용되지 않았고 오직 제2경륜에서부터 사용되었다. 그러나 제1경륜에서 이런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 진실된 하나님나라의 씨 사이에 이런 관계는 드러나게 표현되지 않았을 뿐 근본적으로 내재되어 있었다. 인간이 원래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을 다스릴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하나님과 가졌던 관계를 제2경륜에서 회복하려고 하셨다. 그래서 제2경륜에서 인격당사자 간에 공적관계를 합법적으로 맺는 것이란 의미로 언약이란 개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언약관계는 원리적으로 하나님과 한 개인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심위일체 하나님 공동체와 인간 공동체 사이에 관계다. 개인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공동체 하나님과 인간 공동체가 맺은 언약관계에 포함되는 것에 불과하다.

 

3. 구약성경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언약은 족장언약, 시내산 언약, 모압(세겜)언약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 언약들이 모두 오경 속에 나타난다. 오경 이후에 표현된 언약들은 모두 이 근본 언약들을 적용한 것에 불과하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족장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되는 것을 보여준다. 출애굽기에서 민수기에 걸쳐 등장하는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나라 씨의 완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신명기에 등장하는 모압(세겜)언약은 하나님나라 땅의 완성을 보여준다. 

 

4. 족장 언약은 하나님나라가 역사 속에 성취되는 일에 있어서 예비적 성격을 띤다. 족장 언약에서는 하나님나라 씨의 숫자가 충만하게 형성되지 않았으며 또 하나님나라 땅도 약속으로만 주어졌으며 하나님나라의 뜻인 언약법도 시내산 언약에서 같이 구체적이고 본격적으로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족장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을 준비하는 예비적 언약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을 맺음으로 자동적으로 하나닌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 완료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 완료되는 것은 모두 아브라함을 비롯란 족장들이 그 당시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이루어졌다. 이점은 이후에 이루어진 시내산 언약이나 모압언약에서도 동일한 진리다. 언약을 체결헸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언약 당사자인 그 씨가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하다.

 

5.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최초의 본격적 언약이 바로 시내산언약이다. 시내산언약으로 하나님나라가 다 완성된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나라가 역사 가운데 드러나기 위한 씨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을 맺음으로 즉각적으로 씨가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이 지향하는 씨의 완성을 위해 언약 상대방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뜻인 언약법을 제시하셨다. 이스라엘이 이 언약법에 순종함으로써이스라엘은 비로서 하나님나라의 씨로서 완성된다. 만일 이스라엘이 언약법에 불순종한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는 깨어지고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의 씨로서 완성되지 못하게 된다. 출애굽후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황금송아지 사건이나 정탐꾼 사건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고 그 결과 출애굽1세대는 언약적 저주를 받아 광야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적 자비를 베푸시어 출애굽2세대를 준비하셨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셨다. 그러므로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나라 씨를 완성하려는 목적은 언약에 불순종했던 출애굽1세대가 아닌 출애굽2세대를 통해 성취된 것이다. 시내산언약이라는 수단을 통해 씨가 완성되는 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현재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이다. 바로 이 점은 족장 언약의 목적이 성취되는 모습과 동일하며 또 앞으로 체결할 모압언약의 목적이 성취되는 모습과도 동일하다.

 

6. 신명기에 등장하는 모압언약의 목적은 하나님나라 땅의 완성이다. 모압언약을 통해 완성되는 하나님나라 땅은 오직 그 씨가 하나님의 뜻에 현재적으로 순종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신명기에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한 전략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시내산 언약법보다 훨씬 더 많고 세부적인 모압 언약법을 제시한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이 약속대로 반드시 주어질 것이라는 전제하에, 어떻게 완성된 씨인 출애굽2세대가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인가를 아주 섬세하게 가르친다. 그리고 만약 이스라엘이 그 뜻을 따라 살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땅에서 쫒겨날 것이란 경고가 주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가나안 땅은 영구히 이스라엘의 소유권이 보장되는 정태적인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현재적을 순종하는 조건하에서 주어지는 역동적 약속이다. 그 땅은 소유의 대상도 아니고 단순히 존재하는 공간도 아닌, 그 뜻을 따라 현재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공간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모압언약을 통하여 그 땅이 완성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시내산 언약을 갱신하는 모압언약은 두 장소(모압, 세겜)에서 두 시간대(현재, 미래)에 걸쳐 그리고 두 지도자(모세, 여호수아)에 의해 체결된다는 매우 독특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7. 시간이 흐르면서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를 혁명적이고 폭발적으로 진행시키기로 작정하셨고 전격적으로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제2경륜에서 예언되었던 새언약(렘31:31-34), 평화의 언약(겔36장)이다. 그런데 이 둘은 별도의 언약들이 아니라 두 예언자에 의해 예언된 하나의 실체로서의 언약이다. 이 새언약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역사속에 내려오신 성령의 사역 그리고 언약백성 자신이 새언약의 작은 중재자가 되는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완성하는 목적을 이루어 간다. 

a. 언약의 주체되시는 성부 하나님과 새언약 백성 사이를 완전히 중재하려면 그 중재자는 하나님인 동시에 사람이어야 한다. 제2경륜에서 언약의 중재자들(제사장, 왕, 예언자)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가 아닌 잠정적인 중재자들이었다. 이제 더 완전한 하나님나라가 역사 속에 임하는 제3경륜에서는 언약의 완전한 중재자가 나타나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야 할 역사적 조건이 되었다. 새 언약의 완전한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는 새언약 백성들을 죄의 노예에서 해방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유월절 어린양으로 대신 희생당하고 죽으셨다. 또한 이 새 언약의 완전한 중재자는 하나님과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양 당사자들 사이에 새 언약을 보증하기 위한 희생제물로 드려지심으로 언약의 양 당사자를 향하여 생명으로 보증하여 언약의 양 당사자들이 진실과 사랑으로 완전한 언약을 체결하도록 하신다. 나아가 이 새언약의 완전한 중재자는 영적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용서하기 위한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b.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직후 성부 하나님이 다른 보혜사로 파송하신 성령 하나님은 새언약을 완전하게 역사가 끝날 때까지 적용하신다. 이 다른 임마누엘, 다른 보혜사인 성령하나님은 새로운 씨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뜻을 행하도록 도우신다. 그리고 하나님나나를 위하여 은사를 부어주셔서 세상을 이기도록 하신다.

c. 제3경륜에서는 새언약의 씨들이 새언약의 중재자로 기름부음을 받아 작은 메시아들이 되어 역사의 현장 속으로 파송된다. 각자가 처한 역사와 영역에서 새 언약법을 이루어 하나님나라를 이루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제2경륜 시대에는 일부 사람들만이(왕, 제사장, 예언자) 언약의 중재자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놀랍게도 제3경륜에서는 새언약의 모든 씨들이 새언약의 작은 중재자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신적 권위, 권능, 권세를 부여받은 것이다.

 

 

언약법

 

1. 언약이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합법적, 역사적 수단이라면 언약법은 이 언약의 목적인 하나님나라를 성취하는 구체적인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언약법은 하나님나라의 구성 요소 가운데 "뜻"에 해당한다. 하나님나라를 역사적, 현재적으로 이루려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야 하는데, 이 뜻을 객관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명백하고 구체적으로 선언된 것이 바로 언약법이다. 그러므로 언약을 완성하는데, 즉 언약의 목적인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중요한 것은 바로 언약법을 마음으로 깊이사랑하며 연구, 준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는 것이다.(스7:10) 언약법이 본격적으로 주어진 것은 제2경륜 시대이다. 물론 제1경륜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인간 속에 본성적으로 주어지기도 했고 역사적 상황속에서 부분적으로 주어지기도 했지만 객관적, 보편적 체계로서 언약법이 주어진 것은 제2경륜부터다.

 

2. 하나님나라의 원리적 법으로 주어진 것이 십계명이라면 구체적인 법으로서 시내산 언약의 세부법(출21-23장)이 주어졌다. 십계명은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지켜야 할 종교적 근본법(1-4계명)과 인간과 공동체를 향하여 지켜야 할 시민법(5-10계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런데 종교적 근본법과 시민법 외에 하나님나라에 꼭 필요한 다른 법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레위기에 등장하는 제사법이다. 하나님나라 씨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렸을 때 언약을 회복시키는 길이 열려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법이다. 이렇게 제사법은 인간의 연약함 때문에 깨어지기 쉬운 언약관계를 언약백성이 자발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마련된 법이다. 그런데 제사법은 깨어진 언약관계를 회복시키는데 필요할 뿐 아니라 언약을 건강하게 유지하거나 언약을 발전시키는데도 필요하다.

 

3. 현대법 체계에서 가장 중요한 법정신은 공의 혹은 정의일 것이다. 그런데 언약법에서는 공의뿐 아니라 자비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공의와 자비가 아니라 반드시 언약적 자비와 공의가 되어야 한다. 공의를 시행하고 자비를 베풀어도 그 공의와 자비가 반드시 언약을 기반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즉 언약의 당사자들은 서로를 향해 공의롭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자비롭게 행동해야 한다. 언약적 공의와 더불어 언약적 자비를 동시에 추구하는 하나님나라의 이런 법정신은 언약관계가 부재한 채 공의만을 추구하는 냉혹한 현대법 정신과 명확히 구분된다. 성경의 언약법에는 언제든지 공의와 함께 자비가 동행하며 언약법의 정신에는 언제든지 자비가 공의보다 먼저 나타난다. 버로 언약법의 이런 정신을 표현하는 전문용어가 언약적 자비와 공의(헤세드 베-에메트; chesed we-emet)다. 그런데 언약적 자비(헤세드)와 언약적 공의(에메트)는 하나님을 향해서만 아니라 동료인 언약백성을 향해서도 사용되어야 할 행동원리다. 이렇게 헤세드와 에메트는 십계명 중에서 하나님을 향한 계명(1-4계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백성 상호간을 향한 계명(5-10계명)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4. "헤세드 베-에메트"가 역사 속에서 가장 공개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법정이다.(시50편) 예언서들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공적으로 언약법정에 가상적으로 호출한다. 이 법정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언약법을 어긴 것을 따지고 죄로 정하시는 것은 "언약적 정죄"라고 하고 그 죄에 따라 언약적 심판을 선고하는 것을 언약적 저주라고 한다. 고대인들에게 성문은 그 자체가 법정이었고 이런 법적 개념들은 거의 일상화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이런 인지환경을 이용하시어 예언자들을 통해 가상적 언약법정을 여시고 이들을 호출하여 언약적 심판을 하신다. 언약적 저주로 주로 주어지는 내용은 질병, 흉년, 전쟁패배, 포로로 잡혀감인데, 이런 언약적 저주로 언약관계의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반드시 돌이키는 길을 열어주시거나 일방적으로 자비로운 조치를 보여주신다. 언약적 저주조차도 사실은 이스라엘을 돌이키시려는 훈육의 수단이었다. 세상법정에서 흔히 보는 일법백계나 보복 개념은 하나님나라 언약법에는 자리할 곳이 전혀 없다. 언약적 저주도 이스라엘이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회복하고 발전하는 수단이므로 사실상 단지 저주라기 보다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자비인 셈이다.

 

5.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적극적, 긍정적이었듯이 언약법도 그러했다면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가의 언약법은 혁명적이고 폭발적이다.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에서 "죄"는 제2경륜의 그것과 차원이 완전히 다르다. 제3경륜에서는 "선한 것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된다.(약4:17) 제2경륜에서는 하지 않아야 할 행동을 규정한 반면, 제3경륜에서는 "해야할 적극적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을 죄로 규정한다. 제3경륜에서 최고의 언약법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이다. 예수님은 유언적 설교에서 새언약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듯이 서로 신적인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새언약의 언약법은 혁명적, 폭발적이다. 하나님은 새언약의 백성들이 매우 섬세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총체적 삶을 스스로 규율해 나가길 원하신다.

 

 

제 1경륜의 하나님나라

2018-01-28 22:08:19


1. 하나님의 창조의 꽃은 사람 창조다 왜냐하면 다른 것들은 모두 각기 종류대로 창조된데 반해, 사람만믘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람 창조 구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은 "남자와 여자"라는 구절에 정확히 대응된다. 그리고 둘째 구문에서 사람을 3인칭 단수로 표현되었으나 셋째 구문에서는 3인칭 복수로 변했다. 이는 인간이란 개채적 존재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로 존재하는 복수적 실체라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은 인간이 더불어 사는 존재, 공동체적 존재라는 선언이며 그 대표적 형태가 바로 남자와 여자가 서로 더불오 사는 형태임을 의미한다. 아담이 그의 아내를 처음 보았을 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로다"라고 한 말은 인간이 자신이 이런 공동체적 존재임을 얼마나 기뻐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라는 1인칭 복수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하나님도 인간과 마찬가지고 다불어 존재하시는 분, 즉 공동체적 존재임을 암시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인간을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당신 자신도 공동체적 존재이시며 하나님을 닮아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된 인간의 대표적인 존재 형태가 바로 남자와 여자가 하나를 이루며 더불어 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을 인간이 통치하며 다스리는 것이며 또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권위, 권세를 주신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주를 다스리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간이 잘 수행하는지 알기 위하여 인간에게 단 하가지의 당신의 뜻을 전달하셨는데 그것이 선악과 금령이다. 선아과 금령은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뜻을 거부하여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거부할 수도 있는 엄청난 자유를 가진 존재임을 알려준다. 동시에 선악과는 인간이 그렇게 놀라운 존재이지만 인간은 스스로 법을 만드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 에 순종하여야 하는 자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신적 자유, 권리를 가진 놀라운 존재인 동시에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는 존재임을 선악과 금령은 보여준다. 선악과 금령은 인간이 창조시 부터 자유와 더불어 욕망을 가진 존재임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욕망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욕망은 인간이 물질적 존재록서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렇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며 대신에 자신의 뜻을 추구할 때 인간은 반드시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게 됨을 성경은 가르친다. 욕망은 악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제어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할 때 그 욕망은 악한 것이 됨을 선악과 이야기는 잘 보여준다.

3. 그런데 인간이 타락한 것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와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아담도 함께 타락하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타락을 즉각 심판하시고 처분하시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찾아오셔서 대화하시고 그 심판을 미루신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셨고 가인에게는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의 이런 질문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를 촉구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드러나 아담도  가인도 하나님의 이런 질문을 회피하고 핑게대며 엉뚱한 반응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심판의 와중에서도 자비를 베푸셨다. 아담과 하와에게 노동의 고통과 출산의 고통을 주셨지만 그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셨으며 가인에게도 비록 떵에서 쫒겨 나지만 만나는 자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셨다.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의 동편 놋 땅에 거한 가인은 그 마음에서 하나님을 없애버린 세상 사람들의 시조가 되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없애 버린 결과 생긴 원초적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방어벽으로 둘러싼 세상의 성,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들의 후손을 통해 영원성을 이어가려고 했다. 물론 그들이 생존의 방식과 삶의 기능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인간이 요구들을 충족하면서 인간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러나 창세기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목적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만 남았음을 보여준다.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할 욕망이 이제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인간 세상은 욕망들이 충돌하고 증오와 살인이 난무하게 되었다. "온 땅이 하나님 앞에 타라과고 부패하여 폭력이 땅에 충만하였다"(창6:11-12) 하나님은 이런 세상 가운데 새로운 씨를 준비하시는데 그것은 아담에게 죽은 아벨 대신에 셋을 낳게 하신 일이다. 가인의 후손과 셋의 후손은 정반대의 지향점을 가진 두 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가인의 후손은 이 세상에서 영원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다면 셋의 후손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을 사는 삶을 추구했다. 가인의 후손들이 살았던 연도는 하나도 기록되지 않은 반면에 셋의 후손들이 살았던 연도는 한 사람당 정확히 세번씩 언급되는데, 이는 가인의 후손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도 없음을 암시한다. 

 

4. 인간의 죄악은 점차 세상에 가득하여 정의가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 대신에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은 육체의 껍질만 존재하게 되었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은 육체가 된 인간관 함께 더 이상 계실 수가 없었다. 고대의 네피림으로 불린 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여 욕망만 채우는 육체에 불과한 존재들이었다. 이렇게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이 사람을 창조하신 일을 한탄하고 근심할 정도로 타락해 버렸고 마침내 하나님은 이들을 홍수로 한꺼번에 쓸어버리기로 작정하신다. 그런데 이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또 다시 자비를 베푸시어 셋의 후손 중에 노아 가족만은 보존하기로 작장하신다. 노아는 셋의 후손 답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룩한 가계의 전통을 지켜나간 당대의 의인이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씨를 이어가시려고 하시려고 방주를 짓게하시고 심판을 면하게 하셨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진정한 씨를 위한 구원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역사적 진리다.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이 제1경륜 시대에 하나님나라를 진행시키시는 소극적, 부정적 방식을 나타내는 아주 탁월한 상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세상이 들어와서 악이 넘쳐나게 되면 깨끗하게 청소하는 동시에 당신의 진정한 백성은 보존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홍수 후에도 인간들은 여전히 불순종하였으며 높은 대와 탑을 쌓고 자신들의 이름을 오랫동안 남기기로 도모한다.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는 방식으로 이들이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든 조직과 체계를 만들지 못하게 하셨다. 언어는 인간이 공동체적 존재가 되는데 필수적인 요소지만 이것을 인간이 악한 목적을 위해 썻기 대문에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케 하는 방식으로 악의 확산을 막으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제1경륜 시대에 하나님나라를 진행하시는 방식은 부정적, 소극적, 수동적이다. 하나님의 이런 조처는 하나님의 무능과 무책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가진 자유를 책임있게 쓰고 새로운 삶을 살기를 인내하며 기다리심을 의미한다.

 

 

족장 언약

2018-01-28 23:17:50


 1. 족장언약이 예비적 언약인 이유는 아직 공동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언약의 파트너로서 민족과 나라를 이룰 단계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씨의 준비가 아직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땅으로 약속된 가나안에는 이미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죄악이 아직 땅에서 내어 쫒길 정도로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족장 시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나라의 뜻인 언약법이 공적으로 주어질 상황도 아니었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삼대 구성 요소인 씨, 땅, 뜻이 모두 족장시대에는 본격적으로 구비되지 않았기 때문에 족장 언약은 예비적 성격을 가진 언약이라고 볼 수 있다.

 족장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제 하나님은 점차로 타락이 심화되는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심으로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를 적극적, 능동적, 긍정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하신다. 그 시작은 족장들과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합법적 방식은 족장언약을 세우시는 것이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 세워진 것이지만 그 효력은 개인적 한계를 넘어 이삭과 야곱에게 적용된다. 족장언약이 가지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바로 언약의 양 당사자가 했던 서약행위에 있다.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서약이 창세기 15장이라면 아브라함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행한 서약운 창세기 17장에 나타난다. 이 둘은 비록 시간적으로 약14년의 차이가 나지만 언약이 역사적 실체가 되는데 필수적인 언약 양 당사자의 참여를 보여준다.

 

2. 롯을 구하기 위한 전투 이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다"고 말씀하시며 아브라함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신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도대체 어디있느냐고 묻는다. 아브라함의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은 장차 씨와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보증하기 위해 "하나님 편에서 아브라함을 향한 피의 서약"을 행해 주신다. 고대 근동에는 희생 짐승을 반으로 가르고 그 피가 흥건한 사이를 걸어감으로써 언약 당사자가 생명을 건 서약 예식을 행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바로 이런 고대 근동의 언약예식을 사용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은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을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서약하신 셈이다. 이 때가 아브라함이 85세였는데 이후 아브라함이 99세가 되었을 때, 아브라함은 "할례"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향한 피의 서약을 햄함으로서 언약 쌍방이 완전히 참여하는 형태의 족장언약이 완성된다. 이리하여 아브라함 이후 모든 후손들이 행하는 할례는 하나님과의 언약에 목숨을 걸고 참여한다는 서약을 의미하게 되었다. 

 

3. 이후에 진행되는 아브라함 이야기는 하나님나라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 지극히 위대하지만 또한 얼마나 힘든가를 잘 보여준다. 사실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에서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데라였다. 그런데 데라는 하란까지 여행한 후 그만 그곳에 주저앉고 말았고 그 아들 아브라함이 이어받아서 부름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렇게 세상을 탈출하는 일은 한 세대 이상 걸리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세상과의 단절은 지리적으로 몸을 옮겼다고 완전히 이루어지는 않는다. 비록 아브라함은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났지만 그의 마음에서 메소포타미아에 넘쳤던 세상적 요소가 사라지고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진정한 씨가 되는데는 아브라함에게 일생이 걸렸다. 아브라함이 75세에 갈대아 우르를 떠나 99세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 씨를 주지 않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이 사용하는 씨를 얻는 방식들이 하나님나라에서 절대 통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입양이나(15장) 씨받이 여인(16장) 같은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나라의 씨가 준비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나라를 이어갈 다음 세대의 씨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으로만(그리고 그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만) 준비됨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적 수단들과 가능성들이 완전히 끝난 후, 전능하신 하나님이 작정하신  시간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하나님나라 씨인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신다. 이미 아브라함은 생애를 관통하면서 하나님나라의 씨는 인간적 계획으로 생산되지 않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준비됨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명령에 아무 토도 달지 않고 순종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죽은 씨라고 언제든지 다시 살리셔서 당신의 나라를 창조해가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생애 마지막까지도 하나님나라 땅에 대한 어떤 물리적 증거도 주지 않았다. 씨는 하나로도 주어졌지만 땅은 한 뼘도 주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사라를 매장한 땅을 돈을 주고 헷족속에게 사야만 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돈을 주고 그 땅을 사는 역설을 행하면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했다. 그는 하나님나라의 씨와 마찬가지로 땅도 세상의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방법과 때에 주어짐을 알고 복종해야 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이 차고 넘칠 그 때까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려야 했다. 아브라함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구체적인 뜻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여서 겉으로는 아무 결실이 없는 것 같은 생애를 오롯이 살아가야 함을 배우게 되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약속으로 받은 유일한 씨인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뜻에 이전의 실패와는 달리 과감하게 순종하여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놀라운 약속을 받았다.

 

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상과 근본적으로 결별하는 떠남과 버림"을 선명하게 요구하심으로 아브라함을 통핸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 역사를 여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믿고 순종함으로 시작했지만 곧 하나님의 시험을 경험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재물에 대한 첫 시련을 주셨을 때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다. 기근으로 인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죽임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게 되는 일을 당했다.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아브라함은 위기를 모면했지만 애굽와 바로에게 책망을 받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이런 실패를 통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에 더욱 예민하게 행동할 것을 가르치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재물로 인한 둘째 위기에서는(재물의 문제로 롯과 갈라서는 일) 재산상의 이익을 깨끗이 포기함으로써 승리를 얻는다. 아브라함은 롯을 구하는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재물에 대해서도 깨끗한 태도를 보인다. 아렇게 아브라함은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서 재물에 대한 어떤 시험이 와도 견뎌내는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5.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약속하신 씨에 대해 물었을 때, 하나님은 씨가 준비되는 방식에 대한 뜻을 분명하게 나타나신다. 그것은 입양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몸을 통해서 나오는 방식이었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믿었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의"로 간주하셨다. 여기서 "의로 여긴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백성임을 공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사람이 예수를 믿을 때 얻는 의를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을 예로 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할 때, 하나님이 그를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씨로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입양 외에 세상에서 씨를 얻는 또 다른 방식인 씨받이 여인"을 통하는 것이 시험대에 올랐다. 사라는 이 방식을 쓰기로 결정하고 하나님에게 한마디도 묻지 않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신학적 정당화를 해버렸다. 결국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과 사라는 모두 고통을 받게 되었고 스스로 수습하지 못하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시간이 더 훌러 아브라함이나 사라나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이 늙어버린 때에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에게 씨를 약속하시지만 아브라함이나 사라는 모두 이 약속을 비웃음으로 태어날 아이는 이삭이라는 괴상한 이름을 얻게된다. 이런 모습은 인간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약속을 이루시며 하나님나라를 진행시키시는 분이심을 분명히 보여준다.

 

6. 아브라함은 모든 역경을 관통하면서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역동적으로 알린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 조상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삭의 생애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수동성으로 진행된 하나님나라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쌍둥이 아들을 주시면서 장남보다 차남이 강할 것이며 장차 장남이 차남을 섬길 것이라는 이상하고 특별한 계시를 주신다. 이 계시는 공개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뜻이므로 만일 이 계시를 거부한다면 하나님나라는 이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나 이삭의 가족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각자의 생각을 따라 행동했고 그 결과 그 가정에 큰 증오와 불화에 닥치게 된다. 먼저 이 특이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기선을 인간적 속임수로 장자권을 차지하겠다고 야심을 품었던 차남이 잡게 된다. 반면 장남은 장자권에 대해 무심했다. 문제는 수동적이고 계시에 무관심햇던 이삭이 하나님의 심원한 계시의 의미를 숙고하지 못한데 있다. 이것이 바로 수동적으로 진행된 이삭 시절의 하나님나라의 실상이었다. 이삭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나님이 새롭게 시작하신 하나님나라에 대한 역사적 자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경륜을 진행하기 위해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야곱의 생애는 그의 아버지 이삭과는 정반대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은 능동성으로 진행된 하나님나라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한 사람이다. 야곱이 생애 말년에 바로 앞에서 "내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한 말은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속임수를 써서라도 얻으려고 날뛰던 사람을 하나님이 얼마나 매섭게 연단하셨는지를 보여준다. 야곱이 아무리 능동적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것은 전부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인간적인 능동성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씨들이폭발적으로 성장할 기반을 마련하셨다. 하나님은 인생의 쓰라린 시련을 통해 야곱을 연단하셨고 야곱은 드디어 모든 삶의 기준이 되었던 것을 조금씩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절대적으로 순종하게 된다. 야곱은 하나님 앞에 모든 경홈과 시건과 관계들을 승화시키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모되어 갔고 임종하면서 내린 유언에서 앞으로 펼쳐진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를 내다보는 가운데 열두 아들들에게 족장으로서의 축복을 한다.

 

7. 요셉을 통하여서는 그가 겪은 완전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준비 완료된 모습을 보여준다.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아브라함을 통해 매우 힘들게 시작되었다면 이삭을 통해 그 나라는 인간적 수동성 가운데 진행되었으며 야곱을 통해서는 인간적 능동성으로 진행되었다. 이제 요셉의 경우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하나님나라가 준비완료 되기 위해 얼마나 철저하고 완전한 고난을 통과하여야 하는지 보여준다. 요셉의 완전한 고난을 통하여 준비완료되는 하나님나라는 두 개씩 쌍으로 된 총 6개의 꿈에 나타난 계시로 이루어진다. 그것은 요셉 자신이 꾼 두개의 꿈(37ㅣ5,9)에서 시작하여, 두 관원장이 각각 꾼 꿈들(40:5) 그리고 바로가 꾼 두 개의 꿈(41:1,5)이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6개의 굼들을 통하여 선명하게 나타났다. 꿈을 꾼 사람들은 각각 달랐지만 이 모든 꿈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 꿈들을 소중히 여길 사람도, 해석할 사람도 오직 요셉뿐이었다. 결국 이 모든 꿈을 통해 하나의 목표점인 하나님나라가 준비 완료되는 일에 사용되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요셉은 고난들을 관통하면서 결국에는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이런 근본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극단적인 삼중 고난 ,즉 완전한 고난을 통과해야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동체 내부가 주는 고난, 공동체 외부가 주는 고난 그리고 요셉이 자신의 "작은 의"를 포기하기 위해 받아야 할 고난이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하면서 요셉은 인간들이 조작한 온갖 오해를 뒤집어썻으며 설득과 설명이라고는 전혀 불가능하고 어떤 위로도 받지 못한채 철저히 외로운 가운데 지내야 했다. 그렇지만 요셉이 짊어진 고난들은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준비완료라는 도구가 되었다. 그가 진정으로 자기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더면 그런 고난의 경험들 자체가 절대적 가치를 가졌을 것이고 결국 가기가 하나님나라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요셉 이야기에 등장하는 6개의 꿈들의 성취는 요셉이 총리대신으로 출세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완료되는 수단이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그가 애굽의 최고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이 준비되는 일이다. 먼저 씨가 준비완료되는 것은 무엇인가? 가나안에는 흉년이 들었고 애굽에는 풍년이 들었으며, 요셉이 애굽의 총리였기 때문에 하나님나라의 씨들 70명이 애굽에 내려갈 수 있었다. 거기서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나라의 씨들은 충만한 숫자로 성장하게 된다. 요셉은 단지 이 일을 준비하고 인내하는 사람에 불과했으며 요셉 자신도 자신이 그런 일을 위해 예비된 자임을 명확하게 자각하게 된다. 또 땅이 준비완료되는 것은 두 족장의 죽음을 위한 특별한 장례식으로 이루어진다. 야곱이 죽었을 때, 그의 시신은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매장된다. 이는 애굽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나그네로 있을 곳이지 영구히 터를 잡을 곳이 아님을 보여준다. 요셉은 자기가 죽은 후 자기 해골을 장차 이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갈 때 메고 나가라고 유언한다. 이것 역시 하나님나라 씨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애굽 땅에서 나가야함을 지시하는 실물 교훈이 되었다. 이 두가지 장례식은 하나님나라의 씨들이 미래에 처해야 할 위치를 정확히 지시한다. 즉 제대로 된 하나님나라 씨라면 현재의 애굽을 떠나 장차 가나안 땅으로 가야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8. 요셉은 자신에게 부여된 하나님나라를 준비완료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세 가지 고난을 통과해야 했다. 그는 이모든 고난을 통과하면서 자신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을 한 개인 차원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라는 거시적이고 광대한 관점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먼저 요셉은 공동체 내부로 부터 오는 고난을 관통해야 했다. 그는 자신이 꾼 꿈때문에 공동체 내부의 시기와 미움을 받고 죽음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진 꿈에 대한 공동체 내부의 무관심과 부정적 태도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인간적 반응과 계산 모두는 요셉을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려는 섭리의 일부가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꿈을 통해 명백하게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욕망을 하나님의 뜻보다 우선시 했고 요셉은 공동체 내부로 부터 오는 핍바과 고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서 요셉은 공동체 내부로부터 오는 고난을 온 몸으로 감수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진실을 증언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가운데 침묵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또한 요셉은 공동체 외부로 부터 오는 유혹과 핍박을 인내해야 했다. 이 경우도 공동체 내부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철저히 요셉의 입을 봉하시고 침묵하게 하셨다. 권력을 잡은 세상이 마음대로 욕망을 부리며 거짓을 조작하여 하나님나라 씨를 그 희생물로 만드는 일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가 여기에 있다. 이런 고난들 외에도 요셉은 자신이 설정한 한계 혹은 자기 의라는 한계를 넘는데 필요한 고난의 세월도 보내야 했다. 사실 요셉의 진짜 대적은 공동체 내부나 공동체 외부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요셉이 잊힌채 감옥에서 지낸 만2년의 세월동안 그는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꿈을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것인가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하나님은 자기 의 혹은 자기 자아라는 인간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을 내려놓아 상대화시키고 대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루시려는 뜻에 순종하는 일을 요셉에게 가르치시려고 요셉을 2년동안 감옥에서 썩게 하신 것이다. 그 고통스럽고 억울한 경험은 그가 하나님나라에 귀하게 쓰임받는 존재로 태어나는데 꼭 필요한 것이었다. 공동체 내부나 외부에소 오는 고난이나 핍박을 이겨내는 일은 요셉을 탁월한 지도자가 되게 하는데 꼭 필요한 단련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고난 즉 자기 자신의 의를 포기하는데 필요한 고난은 그를 하나님나라의 진정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요셉은 하나님나라의 높고도 광대한 역사를 조망하고 해석하며 행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요셉은 마지막 셋째 고난까지 인내하고 극복한 후에애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를 준비완료하는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 지평위에 올라서자 요셉에게는 전혀 다른 시각이 열렸으며 모든 사건과 경험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받아들일 있게 되었다. 요셉은 이제 개인이 아닌 하나님나라 지도자로서 자신의 시대에 하나님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하나님나라의 씨와 땅을 준비완료시키셨다.

 

시내산 언약

2018-02-02 21:44:28


하나님나라 씨의 충만과 출애굽

 

1.  이집트에서 하나님나라 씨가 받은 고통은 이들로 하여금 이집트가 머물로 살 곳이 아니라 떠나야 하는 곳이며, 이제 전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문화, 문명을 만들기 위해 족장들에게 약속된 그 땅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외적 동기가 되었다. 출애굽의 부정적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애굽에게 사망의 심판이 되지만, 하나님나라의 씨에게는 적극적, 긍정적인 생명의 길이 되어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새롭게 출발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출애굽 사건은 세상 나라의 심판(죽음)과 하나님나라의 구원(생명)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보여주는 전형이다. 하나님은 이 출애굽 사건을 통해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출발함을 기념하는 축제로 유월절을 제정하신다. 이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얻은 구원, 해방, 자유를 축하하는 일을 넘어 이미 충만하게 된 씨가 제2경륜이 하나님나라를 본격적으로 구현하는 씨가 됨을 기념하는 의미다.

 

2. 하나님나라의 씨가 애굽에서 해방, 자유를 얻는 것으로 역사가 마무리 되지 않는다. 그 씨가 해방, 자유를 얻은 후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관계를 맺고 그 언약을 발전시키는 삶을 살ㅇ아야 비로소 하나님나라 역사는 완성된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언약체결"이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 혹은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의 두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시내산 언약기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홍해에서 시내산까지의 여정은 애굽에서 해방된 시가 광야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눈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세상 나라와 확실히 구별되는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 씨에게 이런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그 뜻에 대한 절대적 순종이다. 애굽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앞으로 자신 마음대로 행동해도 됨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행동을 해야 한다. 관건은 어디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어디를 향한 자유인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된 생명만이 삶아남는 광야의 아주 척박한 생존 조건들을 하나님나라 씨를 시험하고 연단하는 도구로 삼으셨다.

 

3. 하나님은 시내산에 도달한 그 씨들에게 정식으로 언약체결로 초대하신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공적 언약관계에 들어가자는 초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유일한) 보배백성이다" 여기서 보배백성(segullah)라는 말은 고대 근동에서 조약을 맺을 때,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칭하는 전문용어다. 하나님이 제안하신 언약관계에는 하나님나라의 씨가 하나님을 향해 선포해야 할 언약관계의 선언인 "여호와는 우리에게 유일한 하나님이시다"라는 말도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조약에서 약소국이 강대국을 향하여 "당신은 나의 주이십니다"라는 선언이 내포된 것과 같다. 이렇게 언약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 대한 쌍방선언이 존재한다. 그런데 조약 전문용어인 "보배백성"의 의미를 선명하기 위해 "제사장 나라" "최고 백성(goi quadosh)라는 표현이 추가되었다. 제사장 나라라는 말은 이스라엘에게 제사장 역활을 맡긴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제사장과 같이 최고의 지위를 준다는 의미고 "최고백성"이란 말은 흔히 거룩한 백성이란 말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 말 역시 앞에서 언급한 제사장 나라와 동일한 의미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최고로 대접받는 위치에 있음을 가리킨다.

 

4. 언약체결을 위해서는 언약의 양 당사자가 집적 대면하는 일이 필요하고  출애굽기에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면하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약한 당사자인 하나님나라 씨가 준비를 마치고 공적으로 자기가 설 자리에 도열하자 드디어 강한 당사자이신 하나님이 시내산이 진동하는 가운데 장엄하게 강림하신다. 하나님의 이런 장엄하고 두려운 신현은 하나님나라 씨가 언약을 맺는 당사자인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이스라엘에게 경험하게 한다. 이렇게 이스라엘과 대면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직접 십계명을 주시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계시된 법이다. 다시 말하면 십계명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전제로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법, 다시 말하면 언약법인 셈이다. 언약관계 원리법인 십계명이 하나님을 통해 직접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면 언야관계 세부법은 모세를 통해 간접적으로 주어진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주신 언약관계 세부법을 낭독해서 백성들에게 들려주었고 백성들은 그대로 순종할 것을 입으로 약속한다.  그리고 모세는 ㅎ십계명과 언약세부법을 공적 문서인 언약의 책에 기록하는데 이 문서는 일종의 언약관계를 증명하는 중명서인 셈이다.

 

5. 이렇게 언약이 체결된 후에 모세는 두 가지 종류의 돌로 만든 구조물을 세운다. 첫째는 제단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의 당사자임을 기념하는 실체가 된다. 그리고 열두개의 돌로 만든 기념물을 세우는데 이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 이 언약에 참여했음을 기념하는 상징이다. 이렇게 두 기념물이 고대의 거석문화체럼 그곳에 남아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증언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그 다움에 이스라엘은 언약을 공적으로 체결하는 제사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린다. 이 제사는 죄와 관계된 제사가 아니라 언약 당사자가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함을 상징한다. 번제가 생명을 건 절대 순종을 상징한다면 화목제는 두 당사자 간의 샬롬과 헌신을 의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피를 뿌리는 서약식이 진행된다. 이 피의 서약을 위해 번제와 화목제에서 나온 피를 둘로 나누었고 그것을 언약의 각 당사자에게 뿌렸다. 피의 반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에 뿌려졌는데 이는 하나님 편에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을 걸고 이 언약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나머지 피의 반은 백성들에게 직접 부려졌는데, 이것도 이스라엘이 생명을 걸고 언약에 참여함을 나타낸다.  이런 피의 서약식은 고대 근동에서 공적인 관계를 맺을 때 행하는 일종의 "자기 저주" 예식이다. 만약 언약의 한 당사자가 언약을 배반한다면 다른 당사자가 자기를 죽여도 좋다는 저주를 미리 선언하는 셈이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제단에도 피가 뿌려짐은 그만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려 인간처럼 낮아지시서 가까이 내려오셨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 피는 언약관계를 체결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공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그 공식 명칭은 언약의 피라고 표현되었다.

 

6.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씨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체제, 구조가 견고하게 형성되는 것을 출애굽기 후반(25-40장)과 레위기 전반(1-7장)이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나라 씨의 숫자를 계수할 때가 되었는데, 그것을 구약성경의 넷째 책인 민수가 전반부(1-10장)가 보여준다. 이 언약백성의 씨의 숫자를 계수하는 것을 인구조사로 보면 성경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이렇게 조사하는 씨의 기준을 명확하게 두가지로 규정한다. "싸움에 나갈만한 20세 이상의 남자를 그 군대대로"  그렇다면 이는 인구조사가 아니라 전투병력을 조사한 것이다. 이들이 벌여야 할 전투는 가나안 족들을 심판하고 내쫒는 사명때문에 생긴 일이다. 그리고 이 조사는 개인별로가 아니라 그 군대대로 이루어졌다. 중요한 것은 각 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각 지파 공동체였다. 민수기 1-4장은 특이하게도 전투병력 조사를 중복적으로 소개하는데 이는 어떤 일이 중요할 때 그것을 반복하는 구약성경의 전형적 표현 방식이다. 그런데 일반 지파와 레위지파의 계산이 다른 점을 볼 수 있다. 일반 지파는 20세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남자이지만 레위지파의 경우는 1개월이상된 남자였다. 이렇게 조사 기준이 다른 것은 전투를 할 때 레위지파가 맡은 역할이 일반 지파와 다르기 때문이다. 레위지파의 역할은 이스라엘이 증거막에 함부로 접근하거나 잘못 제사를 드림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도록 막는 일이다. 이렇게 레위지파의 전투는 내적이고 영적이므로, 레위지파의 경우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전투병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1개월 이상의 남자를 계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레위 지파가 한 일은 증거막의 보호가 아니라 증거막을 둘러산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7. 하나님나라 씨가 이렇게 점검된 것은 이제 그들이 그 땅으로 행진할 준비를 다 마쳤음을 의미한다. 씨가 충만한 숫자가 되어 출애굽함으로 해방과 자유를 얻었으며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을 만들고 제사 제도를 완비하고 언약법을 받음으로써 하나님나라를 이룩한 준비가 끝났다. 그러나 아직 제2 경륜의 하나님나라의 씨가 완성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씨가 준비되었으니 이제 그 씨가 그 땅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일에서 큰 문제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그 땅으로 들어가는 일이 무려 40년이나 지연되었다. 하나님나라의 씨는 준비되었고, 그 씨는 하나님의 뜻에따라 그 땅에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이 씨가 그 땅에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까지 했으며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의 중재자들을 죽이려는 반역까지 시도했다. 이렇게 되면 이 씨는 그 땅을 가지지 못한 미완성의 씨가 되고, 이런 씨는 하나님나라 씨로소 존재할 가치를 상실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언약배반을 한 이스라엘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전멸하는 치명적인 언약적 심판을 내리신다. 그동안 광야 여정에서 일어난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구체적 언약법을 어긴 것이라면, 이번 사건은 언약의 근본 목적인 하나님나라 자체를 거부한 심각한 행위였다. 결국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광야에서 죽는 언약적 심판이 선고된다. 그러나 출애굽 1세대가 진멸되는 40년의 잔인한 기간은 출애굽 2세대가 성장하기를 기다리는 언약적 자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시내산 언약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씨는 정작 출애굽1세대가 아니라 이들의 후손인 출애굽2세대를 통해 완성된다. 이들 세로운 씨들은 40년 후에 광야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둔 모압 땅에 도달한다. 이들 출애굽 2세대야말로 시내산 언약의 궁극 목적인 하나님나라 씨의 완성이다. 이렇게 시내산 언약을 통해 하나님나라의 씨가 완성되는 것은 준비된 씨가 그 땅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순종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언약의 증거막

2018-02-07 22:23:54


1. 시내산 언약 체결 이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약의 증거막을 건조하는 일을 자세하게 명하시며 그 안에서 이루어질 제사제도를 규정하신다. 언약의 증거막을 건조하는 일은 지루할 정도로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데 이는 언약의 증거막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한 구조물임을 의미한다. 만약 이런 구조물이 없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단지 법을 수여하는 자와 법을 수납하는 자라는 관계밖에 없게 된다. 마치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태양신인 샤마쉬가 함무라비 왕에게 법제정권을 주었고 왕은 그것을 따라 법을 제정하니 백성들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함무라비 법전과 같이 말이다. 이제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역사 속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마당에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의 증거막이라는 구조물에서 서로 만나 언약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킬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의 증거막이 없다면 깨어진 언약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이미 있던 언약관계를 유지하거나 발전시키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2. 이스라엘에게 있던 매우 독특한 이름인 "언약의 증거막"은 흔히 일반 종교의 성전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종교의 독특성을 왜곡시키며 이스라엘 종교를 당시 고대근동의 종교들과 동일하게 만드는 피상적 이해다.  이 장막에 대한 정확한 용어는 증거의 장막이다. 여기에 증거라는 특이한 단어가 쓰인 이유는 이 구조물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증거하는 실체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남녀의 신혼방과 같이 증거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알리는 구조인 셈이다. 고대 근동의 조약에서 증거(에이두트: eidut)란 용어는 조약(언약) 혹은 그 조약에서 제정된 법규(언약법)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장막 자체만 증거막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물품인 궤도 증거궤, 그 안에 들어있는 돌판도 증거판이라고 불린다. 이는 돌판이니 궤 그리고 장막, 이 모두가 언약을 전제로 하여 그 언약을 증거하는 실체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증거막은 종종 회막(만남의 장막)이란 용어로 지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이 장막이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공적으로 만나는 장소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회막이란 이름이 사용된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언약을 맺은 후 증거막이 아직 건조되기 전의 일시적 기간동안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임시적 장소로 장막이 마련되었고 이것이 회막이란 용어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에 증거막이 건조된 후에도 증거막과 회막이란 용어가 번갈아 사용되었다.

 

3. 증거막은 정사각형의 공간(50규빗x 50규빗) 두개를 길게 이은 직사각형의 공간에 막이 둘러쳐진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째 정사각형 공간의 정가운데는 번제단이 놓이고 둘째 정사각형 공간의 정가운데에는 증거궤가 놓인다. 번제단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출발점이라면 증거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나아가는 지점인 셈이다. 이렇게 증거막은 근본적으로 언약의 양당사자가 서로롤 향해 나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다. 둘째 정사각형의 공간안에는 두개의 방이 배치되는데 이 방들은 큰 방인 성소와 작은 방인 지성소로 구별된다.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두꺼운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증거궤는 바로 지성소 안에 놓여 있다. 성소에서 번제단을 향하는 정동향의 문은 평소에 열려있어서 낮에는 동쪽의 햇빛이 성소를 비추게 되며 해가 진 후에는 금등대가 성소를 비추게 된다. 이렇게 증거막의 중심에 좌정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이스라엘이 나아가려면 총 세 단계를 거쳐야 한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자신의 좌악과 오염을 정화시키는 제사를 드리는 단계로서 모든 제사는 번제단 위에서 드려진다. 이렇게 부정한 것들을 제거한 후에 제사장들이 언약공동체를 대표하여 들어가는 공간이 성소다. 이곳은 제사를 드리는 곳이 아니라 진설병을 올려드리고 금등대의 불을 밝히며 향단에서 향을 피우는 공간이다. 이 성소에는 일반 백성들은 들어갈 수 없고 오직 레위인 제사장들만이 공동체 전체를 대신하여 들어갈 수 있다. 셋째 단계는 하나님을 알현하기 위해 지성소로 나아가는 단계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큰 커튼이 항상 가리워 있는데 이 막을 들추고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레위인 제사장 중에서 오직 대제사장뿐이다. 그것도 일년에 한번만 가능하고 대제사장이라 할지라도 번제단에서 자신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성소에서 향을 피운 후에만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증거막 전체는 이스라엘이 차례로 성결-헌신-완전함으로 세 단계로 높여가는 구조를 보여준다. 즉 번제단에서 시작하여 성소를 통과하여 지성소 안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왜 성소와 지성소는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을까?  증거막 제도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임을 생각하면 그 이유는 쉽게 이해된다. 

 

4. 첫번째 정사각형 공간(번제단 뜰)에 놓은 두가지 물건은 번제단과 물두멍이다. 번제단은 번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제사가 여기서 드려진다. 번제단에서 드려지는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러 온 일반백성(제사인)이다. 그는 제사를 드릴 동물을 도살하고 피를 받고 껍질을 벗기고 각을 뜨고 내장을 물에 씻는 등, 제사물 준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제사장은 다만 제사인이 준비한 제사물을 번제단에 올려놓고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런데 제사장이 주도적으로 일하는 공간은 증거막 뜰이 아니라 성소다. 제사장은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번제단과 성소 사에에 놓은 물두명에서 자신을 씻어 정결하게 준비하여야 한다. 성소 안에 놓은 물건은 우편에 진설병(상), 좌편에 금등대, 그리고 지성소 앞 가운데 향단이다. 진설병은 직역하면 얼굴(레험 파님; lechem panim)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열심히 노동하여 추수한 곡식으로 만든 빵이다. 언약백성의 삶에서 얻은 결실을 음식으로 만든 것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얼굴의 떡인 셈이다. 이 떡은 6개씩 두줄로 놓아 열두개를 진설하는데 이는 당연히 이스라엘 열두 지파 언약공동체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얼굴의 떡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가 노력해서 얻은 결과를 하나님께 감사로 올려드림을 의미한다. 일곱개의 가지가 난 금등대는 성소를 비추며 특히 맞은 편에 놓은 진설병을 환하게 비춘다. 성소에 놓인 이 금등대로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취하는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진설병이 유형의 헌물이라면 금등대는 무형의 헌물이라고 할 수 있다. 지성소 앞 가운데 놓은 향단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을 가리워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5.빛도 없고 소리도 없는 지성소에 놓은 단 하나의 물품은 금으로 장식된 증거궤다. 증거궤 안에는 증거판이 들어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언약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신 십계명이 기록된 증거의 두 돌판이다. 고대 근동에서 조약을 맺을 때 반드시 두개의 원본을 만들어 각 나라의 신전에 보관하는 관습이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도 이와 같이 동일한 내용이 적힌 언약을 증거하는 돌판 두 개를 만들었고 이것을 모두 지성소 안의 언약궤에 보관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이 두개의 돌판은 두 당사자가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공적 문서이기 때문에 증거판이 되며 그래서 이 판이 담긴궤를 증거궤라고 불렀다. 증거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도 들어있는데, 이는 모두 출애굽, 시내산 언약체결, 가나안을 향한 행진중에 생긴 역사적 물품이다. 이것들은 하나님나라가 역사 속에서 현실적으로 진행할 때 꼭 필요한 물질과 권위가 모두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증거궤의 덮개(카포레트; kapporet)가 매우 특별한 기능을 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카파르(kappar; 덮다)에서 유래한 명사이며, 여기서 대속죄일(욤 키푸르; yom kippur)란 말도 나왔다.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번제단에서 드린 제물의 피를 이 덮개에 뿌림으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단번에 사람을 받는 예식을 대속죄일에 행한다. 이런 예식은 고대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행사이기에 이 덮개를 속죄소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또 속죄를 이루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했으므로 자비소 혹은 시온소라고 의역하기도 한다. 이 덮개는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불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이 덮개가 하나님이 발을 얹고 좌정하시고 말씀하시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제사 제도

2018-02-08 00:21:10


1. 제사 제도는 언약 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키는 행동을 지휘할 제사장을 임직하는 일과 어떻게 제사를 드릴 것인가에 대한 규례로 구성된다. 제사장은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지도자"가 아니다. 히나님나라에서 지도자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언약의 중개자만 있을 뿐이다. 언약의 중재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선 자로서 하나님나라를 역사 속에서 인도하는 자이며 그에게 맡겨진 역할은 언약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하게 하는 일이다. 왕과 예언자 역시 언약의 중재자일 뿐이며 이들도 하나님나라에서 동일하게 언약의 회복, 유지, 발전의 역할을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제사장이 자신을 얼굴을 하나님을 향할 때는 언약백성을 대신하여 그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도록 간구한다. 반대로 제사장이 얼굴을 언약백성에게 향할 때는 하나님의 대변자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최초의 언약 중재자로 모세를 세우셨다. 그는 앞으로 있을 모든 언약의 중재자(제사장, 왕, 예언자)가 총합된 형태의 언약의 중재자였다. 모세는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일회적으로 언약의 총괄적 중재가 역할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역활들은 서서히 분화되었다.

2. 황금송아지 사건을 주도한 무리들을 처단하는 일에 레위지파가 앞장을 섰는데, 이일로 인해 레위지파가 이스라엘을 위한 제사장 직무를 감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레위지파를 통솔한 책임을 가진 대제사장으로 아론이 선택되었다. 아론을 이은 최초의 대제사장은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였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잘못된 불을 드려 하나님의 진노로 죽임을 당했고 남은 아들이 엘르아살과 이다말인데, 그중 엘르아살의 아들이 비느하스였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여인들과 음행하는 일로 인해 전염병이 도는 징벌을 받았는데 비느하스가 이 일에 관여한 시므온 지파의 한 족장을 앞장서 처단하자 놀랍게도 즉각 전염병이 그쳤다. 이 일 후에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언약적 열심을 칭찬하셨고 그에게 평화의 선물(berith shalom)을 하사하시는데 이는 비느하스의 가계가 여원히 대제사장의 직분을 행하게 된 것이란 일종의 임명장이었다. 이후로 대제사장은 유일하게 비느하시의 가계에서만 나오게 된다. 이렇게 제2경륜의 하나님나라에서는 언약적 열심으로 능동적 자발적으로 앞장서는 자들이 언약의 중재자로 선정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제사장적 역할이 아론에게 넘어간 후에 남은 역할은 하나님나라를 실질적으로 인도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가나안 정착후에 비세습적인 사사(쇼퍼팀; shopetim)로 나타났고, 이; 사사제도는 제사장제도와 함께 사사시대 4백년 동안의 하나님나라를 인도한다. 이어진 왕정시대 4백년 동안 사사제도는 다시 세습적인 왕제도와 비세습적인 예언자제도로 분화된다. 비느하스가 평화의 선물을 받아 그의 가계에서 대제사장 직분이 이어졌듯이 다윗선물을 통해서는 다윗 가계에서 왕권이 이어지게 되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이렇게 삼중으로 분할된 언약의 중재자들이 하나님의 뜻인 언약법을 중심으로 제사장은 가르치고 왕을 시행하고 예언자는 경고하는 역할을 하였다.

 

3. 제사 제도를 다룰 때 가장 주의할 일은 이스라엘 종교에서 제사란 무엇인가하는 점이다. 구약성경의 제사 제도를 고대 근동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진노하는 신을 달래는 것을 이해하면 안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나라에서 제사는 언약관계를 회복, 유지, 발전시키는 방편이다. 첫째로 제사는 이스라엘이 언약법을 어김으로 언약관계를 깨트렸을 경우, 이 관계를 회복하는 방편이다. 즉 언약관계에서 부정적인 것을 없애는 수단이 제사다. 언약을 깨트릴 경우 원리대로 말하면 언약체결할 때 피로 서약한대로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명으로 갚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비를 베푸는 길을 마련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 제도다. 즉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겼을 때 그것을 이스라엘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여신 은혜의 방편이 바로 제사 제도인 셈이다. 그런데 제사제도에서 더 중요한 기능은 부정적인 것을 없애는 기능보다 언약을 유지, 발전시키는 적극적 기능이다.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이 언약관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할 수 밖에 없다. 과거에 맺어진 관계도 중요하지만 현재와 미래에 그것을 어떻게 유지 발전시키느냐 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과거의 잘못을 처리하는 일이 제사의 부정적, 소극적 기능이라면 언약관계의 현재 미래의 발전을 위한 일이 바로 제사의 긍정적, 적극적 기능이다. 과거의 잘못을 처리하여 관계를 회복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현재와 미래의 언약관계를 더 발전시키는 차원의 제사가 더 중요하다. 레의지파(출32:25-29)이나 비느하스(민25:10-13)의 경우는 언약적 열심을 통하여 언약관계가 발전된 사례를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나서서 이런 적극적 차원으 제사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물을 주시는 것을 보면, 이런 적극적 차원의 제사 역시 또 다른 차원의 은혜의 방편이라 할 수 있다.

 

4. 구약 제사의 구체적 형태는 다섯 가지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두가지 큰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은 상황에 따라 제사들을 여러가지로 조합하여 드릴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하나의 제사는 하나의 의미만 아니라 다양한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번제(올라; ollah)라는 명사는 알라(allah; 올라가다)라는 동사에서 나왔다. 번제에서 이 동사의 의미가 살아있는데, 이는 완전히 태워서 재와 연기를 하나님에게 올려보낸다는 것을 뜻한다. 번제는 부정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이 불로 완전히 태우듯이 죄와 죄인에 대해 진노하심을 나타낸다. 번제는 언약백성 대신에 그 제물이 하나님의 온전한 진노를 받는 셈이다. 이 경우 대개 관계를 회복하는 화목제와 드려지는 경우가 많고,  혹은 속죄제 혹은 속건제와 함께 드려지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번제가 긍정적 차원에서 드려질 경우, 즉 죄와 관계없는 경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햐 완전히 태우듯이 자신을 헌신함을 의미한다. 이때 함께 드려지는 화목제도 긍정적인 의미를 지님은 당연하다. 화목제(셔라밈; shelamim)이란 명사는 화평, 평화를 의미하는 샬롬(shslom)의 복수형이다. 샬롬은 단순한 평화가 평안이 아니라 언약관계의 화목과 평안을 의미한다. 다섯 제사들 가운데 이 제사만 유일하게 복수형으로 쓰였는데, 그 이유는 관계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쪽이 평화의 악수를 내밀어도 상대가 응하지 않으면 쌍방관계의 화목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런 화목제는 번제처럼 이중적 기능이 있다. 즉 화목제는 부정적 차원과 긍정적 차원을 가직소 있다. 부정적 차원의 화목제는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 드리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는 손을 내밈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것을 극복하는 화목제는 언약관계를 이전처럼 회복하기를 바라고 드리는 제사다. 반면에 적극적인 것을 성취하는 화목제도 있다. 이것은 언약관계가 잘 유지되는 가운데 이스라엘 편에서 이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드리는 경우다. 이런 화목제에는 하나님께 감사로 드리는 감사제로서의 화목제, 하나님에게 작정하는 자원제로서의 화목제, 하나님에게 무엇을 요구하면서 드리는 서원제로서의 화목제가 있다.

 

5. 속죄제(하타트; chattat)는 고대 셈족어의 과녁을 벗어나다, 조공을 바치지 못하다란 동사에서 유래된 명사다. 이 단어 자체에는 제사 의미가 없기 때문에 대체로 그 기능을 고려하여 속죄제 혹은 정결제로 변역하고 있다. 속죄제는 죄 자체를 처리하는 제사이므로 부정적인 차원만 있지, 번제나 화목제처럼 적극적인 것을 성취하는 의미는 없다. 속죄제는 이스라엘이 언약관계를 깨트렸을 때 드려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제사다. 그렇기 때문에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속하는 제사의 핵심은 속죄제다. 속건제(아샴: asham)는 범죄의 결과 생긴 손해를 보상하는 제사로 배상제 혹은 보상제로 번역되기도 한다. 속죄제가 죄 자체를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는 제사라면 속건제는 죄의 값읋 치루고 자유, 해방을 얻는 제사를 의미한다. 마지막 제사인 소제는 동물의 생명이 희생되지 않는 유일한 제사다. 소제(민하; mincha)는 조공, 선물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소제는 혼자 드려지는 경우는 없고 언제든지 다른 제사와 곁들여서 드려진다. 소제로 드리는 한줌 가루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렇게 소제를 통홰 이스라엘이 작은 정성이라도 표현할 길을 열어놓으셨다. 먼저 부정적인 것을 극복하는 제사에 첨가하여 드리는 소제는 자신이 지은 범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전달하는 의미를 갖는다. 반대로 긍정적인 것을 표현하는 제사에 덧붙여 드리는 소제는 정성을 다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마음을 전달하는 의미를 갖는다.

 

 

모압(세겜) 언약

2018-02-08 15:07:05


1.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를 받아 출애굽1세대가 광야에서 허망하게 소멸되는 40년의 시간 은 출애굽2세대에게는 언약적 자비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기간이었다.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드디어 현실 역사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본격적인 씨가 되었다.이들은 그토록 대망했던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을 목전에 둔 요단 동편의 모압 고원지역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가나안을 향해 군사적으로 진군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아주 중요한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중요한 일이란 바로 모압(세겜)언약을 체결하는 일이다. 이 언약을 체결해야 하는 이유는 새로운 씨가 일어났으며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요소에서 변화가 일어났을 때 해야할 일은 바로 언약 갱신이다. 고대의 조약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나라에서 씨나 땅이나 뜻이 변화되면 언약을 갱신해야 한다. 이 경우는 황금송아지 사건처럼 언약이 파괴되고 다시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는 이 언약 갱신을 모압에서 처리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압에서 죽었다. 바로 이런 상황이 언약 갱신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언약 갱신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뜻인 언약법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인데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사람이 모세외에는 없었다. 하나님은 이런 어려움을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해결하셨는데 그것은 언약갱신을 둘로 나누는 방식이었다. 즉 모세가 현재 모압땅에서 할 수 있는 일과 여호수아가 마래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할 일로 나눈 것이다. 모세가 현재 모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보다도 언약체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언약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언약법을 새롭게 형성된 출애굽2세대에 맞게 소개하는 일, 즉 언약체결에서 법적 요소를 처리하는 일이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미래에 세겜에서 언약체결에 필요한 제의적 요소를 마무리짓는 일이다. 이렇게 하다보니 이번 언약 갱신은 두 언약의 중재자(머세, 여호수아)에 의해, 두 장소(모압, 세겜)에서 두 시간대(현재, 미래)에 이원적으로 행해지는 매우 이례적인 언약체결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 모압과 미래 세겜에서 체결되는 이 언약을 모압(세겜)언약이라 부를 수 있다.

2. 모세가 시작하고 여호수아가 완성한 이 특이한 언약에 대한 역사적 보고는 여호수아에도 나타난다.(수8:30-35) 여호수아는 가나안에서 벌린 두 번의 전투 직후에 이스라엘을 데리고 세겜으로 올라간다. 그 이유는 모세가 명한대로 모압(세겜)언약을 마무리 하기 위해 남은 제의적 요소를 행하기 위함이었다. 세겜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마고 처음으로 계시를 주신 곳인데, 여호수아는 바로 이곳에서 모세가 명령한대로 모압(세겜)언약의 제의적 요소를 행함으로 언약갱신을 완료했다. 모세가 모압땅에서 언약갱신의 법적 요소를 완료한 내용이 신명기에 나타난다. 현재의 신명기는 외곽구조(신1:1-4:43; 29:2-34:12)와 내부구조(4:44-29:1) 로 나누어지는데, 모압(세겜)언약에 대한 보고는 바로 이 내부구조 안에 포함된다. 먼저 신명기는 모압(세겜)언약이라는 하나의 공적 문서를 시작하는 표제 혹은 제목으로 한 단어를 택하는데 그것이 바로 토라(torah)다. 내부구조를 시작하는 표제는 4장 44절인데(이것이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선포한 토라니라), 이어진 4장 45절에서(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나온후 모세가 증거와 규례와 법도를 선포하니라) 모압(세겜)언약이란 공적 문서를 표현하는 일종의 표제 제목인 4장 44절에 나오는 토라는 법규를 의미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신명기 내부구조에 등장하는 모압(세겜)언약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한 일종의 고유명사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의 공식 문서라는 의미로 "언약의 책"(출24:7)이라는 용어가 쓰인 것과 동일한 역할을 한다. 이렇게 시작된 모압(세겜)언약은 신명기 29장1절에서 마무리된다. "이것이 호렙에서 이스라엘 자손과 세우신 언약 외에 여호와게서 모세에게 명하사 모압 땅에서 그들과 세우신 언약이니라" 여기서 이것이라는 지시대명사의 구체적 내용은 신명기 29장 이후에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앞에서 자세하게 제시된 내용인 신명기4:45-28:68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모압(세겜)언약이 등장하는 신명기의 내부구조에서는 법적 요소와 제의적 요소가 선명하게 구분되면서도 이 두 가지가 나란히 반복해서 언급된다. 첫 번째 법적요소(4:44-11:25)와 첫 번째 제의적 요소(11:26-32)는 모두 내용이 단순하고 원리적인데 반해, 두 번째 법적 요소(12:1-26:15)와 두 번째 제의적 요소(26:16-29:1)는 모두 복잡하고 세부적이다,. 이렇게 "단순 원리적-단순 원리적- 복잡 세부적- 복잡 세부적"이란 반복 구조를 갖는 것은 히브리 문학의 전형적 표현법인 평행법을 확대한 것이다. 신명기 저자는 이런 특이한 구조를 통해 모압(세겜)언약이 시간(현재, 미래)와 공간들(모압,세겜)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압에서 시작되고 세겜에서 완성되는 하나의 언약임을 나타내고 있다. 신명기의 외부구조 역시 내부구조 못지 않게 매우 특이하게 구성되어 있다. 외부구조의 앞부분(1:1-4:43)에서 주로 하나님나라의 과거 역사를 다룬다면 뒷부분(29:2-34:12)은 하나님나라 미래 역사를 소개한다. 이것은 히브리 산문의 평행법의 일종으로서 내부구조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 구조를 보여준다.

 

3. 신명기의 내부구조에서 가장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복잡한 제의적 요소를 다루는 부분(26:16-29:1)이다. 이 부분은 전체가 모압(세겜)언약이 이루어지는 제의적 절차는 현재 모압과 미래 세겜을 오가면서 설명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모세가 현재에 주는 권면 그리고 여호수아가 미래에 수행해야 할 제의적 요소가 아주 체계적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섞여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 정의가 구조적으로 이 부분 전체를 시멘트와 같이 견고하게 하나로 결합하는 역할을 한다. 언약관계 정의는 시내산 언약에서 이미 세 가지 선언으로 표현되었는데(출19:5-6),  여기 신명기에서는 더 명확하게 표현되고 있다.(신26:18-19) 시내산 언약에서 언약체결 예식은 매우 표준적으로 잘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모압(세겜)언약에서는 특정한 내용이 더 강조되는데 그것은 언약법에 대한 기록이다. 이렇게 언약법을 강조하는 것은 모압(세겜)언약 전체가 언약법을 철저하게 강조하는 경향과 일치한다. 이런 경향은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언약체결 예식을 행할 때도 나타난다. 시내산 언약이 한번 깨어진 후에 다시 회복되면서 하나님은 언약적 축복과 언약적 저주를 선명하게 표현하셨다. 한번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트린 후에는 언약적 축복과 언약적 저주가 강조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압(세겜)언약을 묘사하는 신명기 27장에는 그리심산  앞에 선 여섯 지파가 언약적 축복을 선언하고 에발산 앞에 선 여섯 지파는 언역적 저주를 선포하는 내용인 나타난다. 그들이 세겜에서 선포한 언약적 축복과 언약적 저주의 내용은 신명기 28:3-6(축복) 그리고 신명기 28:16-19)에 표현되어 있다. 모세의 교훈이란 형태로 주어진 언약적 축복과 언약적 저주는 시내산 언약의 경우보다 더 길어졌다., 그리고 축복,저주의 비율도 시내산 언약보다 저주의 비율이 매우 높아졌는데 이것은 언약의 역사가 진행될수록 미래는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두워진다는 것을 나타낸다. 시내산 언약에서는 단순히 "피의 서약식"(출25:6-8)을 하고 마무리했는데, 모압(세겜)언약에서는 "자기 저주 형태의 서약식"(신27:15-26)이라는 매우 부정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이것은 신명기 전체가 이스라엘이 종교적 위선에 빠질 위험을 강력히 경고하는 맥락과 일치한다. 신명기기 이렇게 암울한 전망을 가진 이유는 언약적 불충성에 빠진 이스라엘의 처참한 미래 모습을 이스라엘이 직면하고 경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역사가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 봉착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의 언약적 자비로 언제든지 회복될 수 있다는 소망은 명백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이 소망은 신명기의 외부구조에 비밀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4. 신명기의 역사철학이 선명하게 나타난 곳이 외부구조인데 그중에서도 신명기 30:1-10에 가장 잘 나타난다. 먼저 하나님나라의 먼 미래에 언약적 축복과 저주가 반복하여 나타나다가 결국 언약적 저주가 누적되어 하나님나라가 역사 속에서 철저히 멸망당하고 그 씨가 포로로 끌려갈 것이 예고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에서라도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이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이 외부구조의 전반부(30:1-5)와 후반부(30:8-10)에서 반복하여 선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하나님나라의 회복은 조건적으로, 즉 반드시 회개해야만 주어진다. 그런데 그 중심에는(30:6-7) 그 회복이 특이하게도 조건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한다. 오경 속에서 이렇게까지 선명하게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이스라엘의 마음속에 할례를 주겠다고 표현한 적이 없다. 조건적 회복과 무조건적 회복, 이렇게 서로 충돌되는 것 같은 두 진술이 하나의 단위 본문속에 공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책임이라는 조건성을 늘 강조하셨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이 허물어지고 스스로 돌이킬 기회조차 사라지는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관게없이 무조건적으로 개입하시어 하나님나라 역사를 전격적으로 새롭게 하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회복된 후에는 여전히 하나님은 조건성, 즉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신다.

 

5.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씨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이루는 도구였다. 그러나 출애굽1세대는 실패하여 광여에서 진멸되었다. 그 이유는 그 씨가 그 땅으로 들어가야하는 하나님의 현재적 뜻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씨의 완성은 그들의 후손이 출애굽2세대를 통해 이루어지게 된다. 이들은 하나님의 현재적 뜻에 순종하여 여호수아의 인도하에 가나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시내산 언약의 목적이 하나님나라 씨의 완성이라면 모압(세겜)언약의 목적은 하나님나라 땅의 완성이다. 시내산 언약과 마찬가지로 이 모압(세겜)언약 역시 그 씨가 그 땅에서 그 뜻인 모압(세겜)언약법을 현재적으로 순종할 때 그 땅이 완성된다. 이런 원리를 잘 서술하려는 것이 신명기의 목적이다.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어떻게 잘 정복할 것인가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라 오히려 그 땅이 이미 정복되었다는 전제 하에 그 땅에서 어떻게 그 뜻(언약법)에 순종하여 그 땅에서의 삶을 완성할 것인가를 다루는 책이다. 다시 말하면 신명기가 말하는 것은 그 땅을 정복하는 방법이 아니라 주어질 그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것인가이다.  하나님의 언약관계는 늘 현재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의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현재적으로 순종해야 할 책임이 가장 막중한 것이다. 지금, 여기 눈 앞에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행하는냐에 따라 그 땅의 완성, 즉 그 땅의 영속적 소유가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 모압(세겜) 언약의 내용이다. 이것을 위해서 시내산 언약에서 받았던 십계명과 세부법에 비해 모압(세겜)언약에서는 훨씬 더 다양하고 자세한 세부법이 전해졌다.

 

6.  모압(세겜)언약의 세부법의 구조도 시내산 언약의 구조와 마찬가지로 십계명의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다. 즉 두 언약 모두 십계명은 원리법으로 하고 이 원리법의 순서대로 세부법이 주어졌다. 다만 모압(세겜)언약의 특징은 원리법인 십계명(5장)과 세부법(12-26장) 사이에 모세의 교훈(6-11장)이 매우 길게 삽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모세의 교훈의 가장 첫머리에 유대인의 교육헌장으로 알려진 "셔마(shema)"가 등장한다. 모세의 교훈은 모세가 40년의 광야 생활에서 얻은 역사적 교훈을 출애굽2세대에서 전달함으로써 그들이 모압(세겜)언약의 세부법을 잘 지키게 하기 위하여 삽입된 것이다. 이 모세의 교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언약백성들의 의(체다카; tsedaqah)라는 개념이다. "우리가 그 명하신대로 이 모든 명령을 여호와 우리 하나님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신6:25) 여기서 "의"라는 개념은 로마서에 천명되고 종교개혁에서 발견된 "이신칭의"의 진리에 나타난 바, 사람이 예수를 믿음으로 받는 "수동적 의"가 아니다. 제2경륜의 관점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보배백성으로 인정되는 자체가 바로 이신칭의의 수동적 의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신명기6장에 등장하는 "의"(체다카)는 언약법을 잘 지킴으로 하나님에게 인정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언약적 축복이 주어질 것임을 확증하는 의미로서의 "능동적 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명기 9장에서는 다른 차원의 "의"를 말한다. "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 때문도 아니요 네 마음이 정직함 때문도 아니요(신9:5)" 이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나라의 씨가 되어 그 땅을 얻으며 그 뜻을 행할 수 있게 된 사실 자체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로운 선택에 의한 것임을 의미한다. 신약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수동적 의"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두 본문은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수동적 의를 받은 사람이라면 사실상 능동적 의를 행할 수 있고 행해야 함을 이 두 본문은 말하는 셈이다.

 

7. 모세는 언약의 근본원리인 "셔마"를 자신의 가르침의 출발로 삼았다. 셔마의 첫 절(6장4절)은 총 6개의 히브리 단어, 세 콜론으로 구성된다.  첫째 콜론(셔마 이스라엘; 들으라 이스라엘아), 둘째 콜론(야훼 엘로헤이누; 야훼는 우리 하나님이시니라), 셋째 콜론( 야훼 에하드; 야훼는 유일하시니라) 첫째 콜론의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곧 순종하라는 명령문이다. 둘째 콜론은 첫째 콜론의 명령의 이유를 설명해주는데 그것은 야훼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야훼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셋쩨 콜론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야훼가 누구이신가를 설명하는 문장인데 그 의미는 야훼만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슨 유일한 분이란 것이다. 여기서 "유일하다"는 단어를 문자적으로 숫자적 "하나"를 의미하지 않는다. "에하드(echad)의 실제적 의미는 "하나이다"가 아니라 "유일하다"이다. 즉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는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적 유일성이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유일한 분은 여호와이시라는 뜻이다. 유대교느 이슬람교는 바로 이 구절을 근거로 단일신론(monothesism)을 주장하지만 사실 그 근거는 매우 취약하다. 이런 해석을 더 선명하게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다음에 나오는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이 사랑하라는 말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의 유일성을 전제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모든 명령의 근거는 바로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셔마를 단지 유대교의 교육헌장 정도로 보는 것은 매우 좁은 해석이다. 셔마는 그런 것을 훨씬 뛰어넘어 제2경륜의 언약백성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할 근본적인 태도를 선포한 것이다. 모세는 바로 여기에 근거해서 어어진 교훈들과 세부법을 가르친다.

 

새 언약과 평화의 언약

2018-02-11 23:00:50


 새 언약과 평화의 언약이 주어진 역사적 상황

 

1. 제2경륜의 제2시대인 사사시대 말기에 하나님나라는 비침한 지경에 빠졌다. 베냐민 지파의 악행으로 12지파 언약공동체 안에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왕이 없어서" 생긴 혼란을 끝내기 위해 오래전에 준비하신 다윗의 가계를 세우시어 당신 나라를 전격적으로 새롭게 할 전기를 마련하셨다. 물론 이스라엘이 먼저 세상의 왕 제도를 달라고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일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요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면서 첫번째 왕으로 가장 심각한 언약적 저주를 받았던 불쌍한 베냐민 지파에서 선택하심으로 놀라운 자비를 보이시며 왕정시대를 여셨다. 그렇지만 사울은 왕으로서 실패함으로써 하나님나라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 가계를 일으키사 다윗과 솔로몬의 화려한 역사가 시작된다. 왕과 모든 백성이 언약법에 충실했으므로 하나님나라 자체가 놀라운 통일을 이루었고 하나님나라가 단기간에 당시의 온 세상을 통치하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즉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약속하신 모든 땅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전무후무한 역사를 이룩했다. 하지만 이후의 왕정시대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는 마치 사사시대가 여호수아와 갈렙을 통해 성공적으로 시작되는 것 같았지만 곧 내리막길을 걸어간 것과 유사하다. 다윗선물(삼하7장)을 통해 영광스러운 하나님나라가 이어질 것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다윗을 이은 솔로몬 시대 후반기부터 바로 타락이 일어났다. 언약적 축복의 결과로 주신 풍요가 오히려 올무가 되어 물질에 대한 관심은 증가한 반면 언약법을 마음에서 멀리하며 지키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 시대가 끝나자 언약적 저주로 당신의 나라를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유다 둘로 나누셨다. 사실 이 일은 하나님이 이런 조처를 통해 두 나라가 언약법을 지키는 일에 선의의 경쟁을 할 기회를 주신 것이었다. 그러나 남북조의 역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왕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놀라운 기회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단지 자신들의 정치적 지배력을 확대시키는 일에만 몰두했다. 결국 북조 이스라엘은 잦은 왕조의 교체를 거치다가 180여년 뒤 자전 722년에 앗수리에 멸망당한다. 남조도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점령당하고 포로로 사로잡혀간다. 이렇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법을 지키지 않을 때, 여호와의 언약전쟁의 원리를 따라 이방을 일으키시어 하나님나라를 치는 언약적 저주를 시행하신 것이다. 

 

2. 이런 혼란스러운 가운데 하나님은 세습적 왕 제도와 나란히 비세습적이며 오직 신적 카리스마에 의해 활동하는 "예언자 제도"를 세우신다. 하나님나라 역사를 인도하던 비세습적 "사사제도"가 세습적 왕제도로 넘어가는 가운데 분화되어 새롭게 발생한 제도가 예언자 제도인 셈이다. 이들 예언자들은 왕과 제사장과 백성들이 언약법을 지키는지 여부를 점검하는 일이 주된 일이었다. 제사장도 왕도 언약의 중재자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제2경륜의 후반부에 하나님은  언약의 새로운 중재자인 예언자를 세우시어 하나님나라의 파국을 막으려 하신다. 북조의 마지막 시간에 활동했던 제1세대 예언자인 비기록예언자들(엘리야 엘리사)에 이어 이들의 후예인 제2세대 기록 예언자들(아모스, 호세아)로 발전되었다. 그렇지만 결국 북조는 멸망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최대의 언약적 저주를 받고 말았다. 이제 남조만 남은 가운데 무낫세 왕 이후의 남조는 북조를 능가할 정도로 타락했다. 이때에도 하나님은 끝까지 언약의 마지막 중재자인 제3세대 예언자들(예레미야 에스겔)을 파송하여 현재적인 타락을 막으려 하셨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단순히 현재의 하나님나라에 대한 언약적 심판뿐 아니라 먼 미래에 나타날 무조건적인 언약적 자비도 선포했는데 후자의 경우는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를 예비하는 놀라운 예언이었다. 이 신비한 무조건적인 언약적 자비에 대한 예언은 북조의 예언자들을 통해서도 나타났고 남조의 예언자인 예레메야와 에스겔을 통해서는 더 깊고 신비로운 무조건적인 언약적 자비의 메시지가 선포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언약을 이스라엘과 맺으실 것에 대한 예언이었다. 유대의 파멸의 시간을 피와 눈물로 증언한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새언약(렘31:31-34)과 아미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에스겔을 통해 주신 "평화의 언약"이 그것이다. 예레미야는 앞으로 언약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상황에서 에스겔은 이미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이 놀라운 예언들을 선포하였다. 이 예언들은 각각의 상황에 처한 언약백성들을 향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를 기대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새언약( 렘 31:31-34)

 

1. 남조 유다를 향한 마지막 예언자인 예레미야의 선포에는 언약적 저주가 가득했고 그 심판은 모든 계층 영역을 망라하는 총체적인 저주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심각한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통해 이스라엘이 앞으로 당할 고통을 미리 체험케 하면서 예언을 선포하는 극단적 방법을 택하셨다. 그 결과 예언자 중에서 하나님나라 때문에 받는 고통이 넘치는 자신의 삶을 기록한 사람은 예레미야가 유일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예레미야가 심판을 전달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제2경륜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먼 미래의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를 투사하는 메시지를 주셨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어진 새언약은 당시 제2경륜에 속한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혁명적이고 폭발적이었다. "새언약을 세우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에서 인도해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렘31:31-32) 여기서 하나님은 제2경륜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이나 모압(세겜)언약과 명백히 구별되는 새 언약을 제시하신다. 마치 제2경륜이 시작하던 때에 하나님이 전격적으로 아브라함을 부르시던 것처럼 하나님은 제2경륜의 언약의 한계를 지적하시며 제3경륜의 새언약의 시대를 여신다고 선언하셨다. 하나님은 언약을 배반란 이스라엘을 파멸시키고 모든 것을 끝장내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차원의 언약, 즉 새언약을 전격적으로 예고하신다. 예레미야의 선포에 의하면 이제 작은 자나 큰 자나 언약법을 배우고 아는데 구별이 없게 될 것이며 언약법이 마음에 들어가서 언약적 삶을 진정으로 살아내는 시대가 열린다. 언약을 배반하여 저주를 받음으로 모든 소망이 끊어져 버린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된다"(렘31:33)는 소위 언약관계에 대한 쌍방 선언은 경륜과 상관없이 모든 언약백성의 마음에서 결코 사라져서는 안될 확신이다. 그래서 새언약의 백성에서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악을 기억하지 않는다"(렘31:34)는 언약적 자비가 선포되었다.  새언약의 핵심은 바로 언약법이었고 더 구체적으로는 언약법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문제가 되는 것은 언약법 자체가 아니라 그법이 존재하는 위치였다. 옛언약에서 십계명은 돌판에 그리고 세부법은 다른 형태(앙피지나 파피루스)에 기록되었다면 새언약에서 언약법은 언약백성 각 사람의 마음속에 기록될 것이다. 새언약에서는 언약관계도 언약법도 유지될 것이지만 오직 법이 존재하는 공간이 새롭게 사람의 마음으로 변하게 된다. 이것은 정말 제3경륜에서나 일어날 가장 놀랄만한 사건이다. 

 

2. 그러면 언약법이 마음에 기록된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나? 그것은 각 언약백성의 마음에 모든 언약법의 제정자이시고 보혜사되신 은혜와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죄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고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16:7,13) 이렇게 법이 존재하는 곳이 마음이 되다보니 옛언약에 비교해서 가장 중요한 차이는 이제는 누구도 이 새언약의 법을 가르칠 필요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말하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가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 왜냐하면 제3경륜에서 언약의 유일한 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에게 언약법이 그 마음에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주깨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시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이는 개인이 독립적으로 해석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새언약의 역사적 공동체의 진실된 성원들 속에 보혜사 성령이 내주하시어 강력한 진리의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새언약에서 언약법 자체를 폐기한 것처럼 율법무용론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제3경륜에서는 제2경륜의 언약법인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눅 10:27)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차원이 높아진 제3경륜의 언약법(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5:12)이 주어진다. 제2경륜에서 언약법이 인간으로서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것이라면 제3경륜에서 언약법은 사람이 마치 하나님처럼 동료 백성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경륜의 언약법은 제2경륜의 언약법보다 훨씬 더 어렵다. 그렇기에 이 어려움을 돕기 위해 보혜사 성령이 개인과 공동체의 마음에 계셔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진리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새언약의 언약법은 옛언약의 언약법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차원의 언약법이다. 

 

평화의 언약(겔36-37장)

 

1. 예레미야의 새 언약에서 약간 불투명했던 내용이 에스겔의 평화의 언약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선포되었다. 에스겔의 메시지는 바벨론에 이미 포로로 끌려가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주어졌다. 그들은 비참한 삶을 살았지만 포로 귀환 후에는 하나님나라를 재건하는 일에 앞장 설 "극회 좋은 무화과 나무"(렘24:2,5)로 규정되었다. 이에 반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도 왕조를 망하게 만들었고 예레미야를 강제로 애굽으로 끌고 내려갔던 무리들은 "극히 나쁜 무화과 나무로 규정된다. 새언약보다 평화의 언약이 더 선명한 이유는 평화의 언약이 단순히 마음에 언약법을 기록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옛마음 자체를 수술해서 쓰레기통에 던지고 대신 새마음을 넣어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철저하게 타락했으며 선에 대해 완전히 무능한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아예 마음 이식 수술이라는 근본적이고 완전한 대첵을 평화의 언약에서 선포하신 것이다. 이뿐 아니라 평화의 언약에서는 마음의 수술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 차제를 인간에게 주시겠다는 가히 혁명적인 약속이 포함된다. 이 약속은 드디어 제3경륜에서 성령 하나님이 새언약의 백성에게 오심으로 성취된다. 제3경륜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이런 무조건적 자비가 부어져 내릴 것이다. 평화의 언약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비록 바벨론의 포로생활 중에라도 이 놀라운 소망을 붙들고 인내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런 혁명적 성격의 평화의 언약을 당시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메시지다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남조 유대를 회복하실 때, 에브라임으로 대표되는 북조 이스라엘도 회복하시어 둘이 원래처럼 하나가 되게 하실 것이란 약속이었다.

 

2. "새 영을 주고 내 영을 보내준다"는 이 원리적 선언의 실제적 내용은 무엇일까? 관건은 은 결국 언약법을 어떻게 행할 것인가이다.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겔36:27) 이것은 행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행하게 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하지만 이것을 일종의 "자동주의"로 이해할 일이 아니다. 창조된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였다.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역사가 경륜을 따라 전개될수록 이 자유의 의미는 더욱 커져갈 것이며 그만큼 권리와 책임도 커져갈 것이다. 그러므로 에스겔의 놀라운 메시지는 궁극적으로 언약법을 기쁨 가운데 자발적으로 행하는 언약백성들이 나타나는 낙관적 미래를 말한다. 에스겔이 선포한 이 언약에 붙여진 타이틀은 아주 특이하다. "내가 그들과 평화의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이 되게 하고"(겔37:26) 그런데 평화의 언약이란 이름은 이미 한번 등장한 적이 있다. 그것은 비느하스가 언약적 열심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악을 제거했을 때, 하나님이 비느하스의 가계가 대제사장직을 이어갈 것이라는 선물로서의 언약을 주실 때 사용되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사용한 평화의 언약은 단순한 선물로서의 약속이 아니라 공적관계를 법적으로 맺는 언약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어진 구절에서 언약관계의 쌍방선언이 등장함을 보아도 분명하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겔37:27) 에스겔의 평화의 언약은 이후에 등장하는 후반부 메시지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며, 한 임금 다윗 아래서 큰 군대가 되어 열국이 이들이 여호와의 언약백성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장차 온 세상이 연합하여 세상의 중앙에 거하는 백성을 치는 곡의 전쟁을 벌이겠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는 승리하며 성전이 재건되어 하나님나라는 완전히 회복된다. 바벨론에 포로로 살고 있는 당시 백성들중 누가 이런 환상적인 예언을 믿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들 가운데 진실된 언약백성들이라면 이 예언을 믿고 소망하며 비참한 현실을 견뎠을 것이다.

 

 

제3경륜 시대에 성취된 새 언약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제3경륜의 시대가 전격적으로 열려질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사53:1) 새로운 경륜이 시작되는 제2경륜의 마지막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문화적으로는 세속적인 헬레니즘이 번성했으며 내적으로는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이 활개치던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 그러나 옛언약에서 가장 어두운 이 시갠이 바로 새언약의 강력한 빛이 비칠 시간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새언약을 체결하시고 제3경륜의 하나님나라를 연 진정으로 영원한 중재자 사역이었다. 사실 구약의 모든 제사들과 제도들은 예수님의 중재사역에 근거하여 효과를 누리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제2경륜 시대에 순종하는 백성들에게 미치는 효력은 제3경륜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실체적 사역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적용된다. 구약의 유월절에 희생된 언린양이란 그림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희생으로 제사를 드리는 그 때에 실체가 완성되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영적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을 보증하는 희생제물이 되시어 언약의 양 당사자 모두를 완벽하게 보증하신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읗 향하여 영적 이스라엘을 보증하시고 영적 이스라엘을 향하여는 하나님을 보증하는 분이 되셨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는 구약의 속죄 제사들의 실체요 본질이다. 제2경륜 시대에  죄와 관계된 모든 제사들은 미래에 드려질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제사라는 실체로부터 효력을 얻는 그림자에 불과하다.  역사를 초월하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단번에 시공을 초월하는 영원한 제사를 완성하셨다. 하지만 제3경륜의 언약백성들은 시공을 어느정도는 초월하지만 완전히는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때마다 제2경륜의 언약백성처럼 개인적으로 혹은 공동체적으로 죄를 고백해야 사함을 받을 수 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제2경륜 시대의 삼중의 언약의 중재자 직분을 모두 가지셨고 그것을 수행하셨다. 첫째는 제사장적 언약의 중재자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새언약의 영원하고 유일한 중재자이심을 선포한다.(히9:15)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서 대제사장의 사역을 완수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 하늘 보좌 우편에서 지속적으로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며(히8:1) 새언약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에게 간구하신다.(롬8:34)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나심으로 다윗 선물(삼상7장)에서 약속된 영원한 왕권을 이루실 단 한분의 왕적 중재가가 되셨다. 그러므로 이제 새언약의 백성들에게는 예언약의 백성들과 달리 부패한 인간 왕이 필요없고 오직 영원하고 유일한 예수 왕만 따르면 된다. 이것이 바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주(퀴리오스; kurios)는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라는 믿음으로 순교한 이유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역사를 긍극적으로 심판하실 예언을 주시는 유일한 예언자적 언약의 중재자다. 그는 미래 역사책의 인봉을 떼어서 하나님나라를 대비하게 하실 유일한 자격을 가지신 분이다. 이렇게 제2경륜에서 그림자같았던 언약의 삼중 중재가 직무의 실체를 모두 완성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성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중재자 직무를 실천 ,적용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그렇기에 히브리서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었다고 말한다.(히8:10-13) 이리하여 새언약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씨가 혈통을 넘어서며 하나님나라의 땅도 지역을 넘어선다. 이제 3경륜의 하나님나라에서는 혈통과 관계없이 누구든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될 기회가 주어지며, 가나안 땅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뜻으로 다스려지는 하나님나라의 땅이 될 수 있게 되었다.(마28:18-20, 행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