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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내러티브

메르시어 2023. 5. 14. 18:19

요한계시록의 내러티브

2017-10-13 19:10:55


요한계시록 1장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선언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계시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계시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계시를 받아 요한에게 전달하신 것이다. (1절) 그렇다면 그 계시는 무엇인가? 그것은 반드시 곧 일어날 일에 대한 계시다. 이 계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계시로서 이제 요한에게 알려진 것이다.(2절) 요한은 이 계시, 곧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계시는 듣는 자로 하여금 그 계시에 나타난 교훈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3절) 이제 요한은 자신이 받은 계시를 편지의 형식으로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고 있다. 그 편지의 인삿말에서 요한은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은혜와 평강의 복을 구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로, 그리고 성령은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으로 표현되고 있다.(4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표현은 가장 길고 풍성하다. 그는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서 먼저 살아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시다. (5절) 그러니까 앞부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임금들이 머리가 되신 분이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시다. 앞부분과 뒷부분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땅의 임금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나라로 삼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의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의미일 것이고 제사장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들의 역할이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과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 나라와 제사장은 같은 의미를 조금 다르게 평행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6절) 이어서 요한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초림은 초라하고 은밀하게 이루졌지만 그의 재림은 영광스럽게 그리고 천하만민이 다 알 수 있게 전지구적으로 임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때 땅의 모든 족속은 애곡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7절) 그리고 인삿말의 마지막은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선언으로 끝난다. 그것은 앞에 4절에서 이미 나타난 표현을 반복하고 강화한 것이다. 알파(처음)과 오메가(마지막),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 그리고 전능한 자이다. 앞의 두가지 표현은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존재론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관계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도, 전에도, 장차에도, 그리고 처음에도 마지막에도 자기 백성들에게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의미다. 그리고 이렇게 신실하신 하나님이 또한 전능하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신실하며 전능하신 분, 그러기에 자신이 하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며 또한 넉넉히 지키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신 분이라면 그 하나님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우리가 의지할만한 분도 아닐 것이다. 또한 그가 전능하지 않으신 분이라면 그의 신실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신실하시면서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우리가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이다.(8절) 이어서 요한은 자신을 너희 형제로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한다.(9절) 이런 표현은 예수가 다스리는 그 나라에 동참하려면 예수로 말미암는 환란과 인내에도 동참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암시하고 있다. 이어서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었는데 (10절) 그 음성은 요한에게 네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일곱교회에 보내라고 명령한다. (11절) 여기서 요한이 보는 것은 첫머리에서 언급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요한은 자기에게 명령한 자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것은 왕이나 제사장의 모습이다. 그는 일곱 별(일곱 교회의 사자)을 붙잡고 일곱 촛대(일곱 교회) 사이를 거니시는 분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그가 교회의 주인으로서 교회를 다스리는 분이심을 의미할 것이다. 이 분이 누구신가는 이 인물이 스스로 자신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 이전에 죽었다고 살아나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8절)

 

요한계시록 2장-3장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은 칭친하는 내용보다는 책망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이 주조를 이룬다. 그리고 각각의 편지들은 모두 승리를 위한 분투를 요구하는 말로 끝맺는다. 그러니까 지금 요한의 편지를 받는 일곱 교회의 상태는 모두 승리를 위한 분투가 요구되는 상황이라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바로 이런 상황에 처한 교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려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미 승리하시고 살아나셨지만 그리스도의 승리가 자동적으로 성도들의 승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려면 다시 말해 그의 나라에 동참하려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환란과 참음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환란과 참음 그리고 그의 나라에 동참할 것인가? 그리하여 이기는 자가 될 것인가?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 그래서 각 편지의 말미에는 모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는 권면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그것은 각 교회에 쓴 편지의 내용은 아니다 왜냐하며 편지의 내용은 성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4장부터 환상으로 주어지는 계시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4장 이후에 등장하는 환상들은 바로 각 교회들이 이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며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한 묵시적 내러티브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받아서 교회에 전달한 계시인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교회들에게 하시는 성령의 말씀은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4장

편지가 끝난 후에 본격적인 묵시적 내러티브가 전개되는데 그것은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해 요한이 하늘에 올라가는 일로 시작된다. 그리고 요한은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의 환상을 보게 된다. 하늘의 환상을 보여준 분이 성령이라는 언급은 앞에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4장 이후에 전개되는 묵시 내터티브임을 암시한다. 요한에게 처음으로 보여진 이 환상은 아마도 이 묵시 내러티브에서 가장 중요한 환상이기에 맨 먼저 주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보좌 앞에 일곱 영 그리고 보좌에 둘러 이십사 장로들도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실현된 하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환상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통치는 하나님만의 통치가 아니라 이십사 장로들도 그 통치에 참여하는 그런 모습의 통치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환상은 하나님나라가 하늘에서 온전히 구현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계시이다. 요한의 편지를 받은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거하는 땅에서는 하나님나라가 아직 완전히 임하지 못했지만 하늘에서는 이미 하나님나라가 완전하게 이뤄진 것이다. 땅에 거하며 아직 완전하게 임한 하나님나라를 보지 못하고 기다리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승리하기 위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늘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졌다면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다. 그러니 요한에게 맨 처음에 주어진 이 하늘 환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그리고 지체하지 않고 지상에서도 임할 것임을 보여주는 계시인 것이다. 이 환상에서 등장하는 네 생물들은 에스겔서의 인유인데 그렇다면 이 네 생물들은 직접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네 생물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노래하며 경배하는데 이 노래 역시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를 신실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땅에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8절) 이십사 장로들도 하나님께 경배하는데 이때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계신 분으로 묘사된다. 이런 표현 역시 존재론적 표현이 아니라 언약에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관계론적 표현이다. 그런데 이십사 장로들이 하나님에게 경배하면서 자기의 머리에 쓴 금관을 보좌 앞에 드리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는 매우 주목할만 한 장면이다. 이것은 이십사 장로들의 다스림이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통해 이루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창세기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다스리에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악과 금령은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다스림의 권세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가운데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러니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는 장면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하늘에서 온전히 이루어졌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은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주의 뜻대로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는 이십사 장로들이 드리는 찬양은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계시록 5장

그렇다면 하늘에서 이렇게 온전하게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게 땅에 임할 것인가? 주기도문의 간구대로 어떻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인가? 바로 이것이 일곱 인으로 봉인된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이다. 두루마리가 인봉되었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 비밀은 계시되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요한은 하늘 위에나 땅 아래에 능히 그 두루마리를 펴거나 볼 자가 없음으로 크게 울었다. 그런데 장로 중의 하나가 말하길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두루마리와 인을 떼시리라고 말하다. 그렇다면 장로가 말한 이 인물은 누구인가?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 인물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으로 묘사되는데 그렇다면 그 인물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킬 것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두루마리의 인을 떼고 펼져보일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비밀을 계시할 자가 왜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인가? 그것은 하늘에서 이미 이룬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하는 일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 그가 승리하셨다. 그런데 그는 일찍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룬 승리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이룬 이상한 승리다. 이 세상 원리로는 누가 죽임을 당했다면 그는 당연히 패배한 자이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원리는 죽임을 당한 자가 승리하며 죽음을 통해 승리가 이뤄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방식이며 그렇다면 그가 다스시는 하나님나라는 이런 방식으로 그 승리를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말한 바 예수의 환란과 참음에 동참함을 의미할 것이다. 이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일곱 영이 함께 계시는데 이 일곱 영은 앞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계시던 성령과 동일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함꼐 계시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와도 함께 계시다면 하나님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는 늘 함께 계시는 분이심을 의미할 것이다. 어린 양이 하나님의 오른 손에서 두루마리를 취했을 때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께 드렸던 동일한 경배를 어린양에게 드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일한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그들이 어린 양에서 경배를 드릴 때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는데 이 향이 성도의 기도들이라함은 어린 양이 바로 땅에 거하는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심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양과 함계 계신 성령이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는 표현도 땅에 거하는 성도들의 사정을 살피시고 돌보시는 분이 바로 어린 양이심을 암시한다. 네 생물과 장로들이 어린 양에서 드리는 찬양은 새 노래로 표현되는데 이는 이 노래가 지금까지 사람들이 알지 못했고 부르지 않았던 새로운 노래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린 양이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세상 모든 나라들 가운데 사람들을 자기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신 분이시라고 노래한다. 어린 양이 하신 바로 이 일을 통해서 하늘에서 이뤄진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다. 그렇기에 오직 어린 양만이 그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것이다. 이 대목에서 그들을 나라와 제사장을 삼는다는 것이 곧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한다는 의미임이 밝혀진다. 이어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서 경배가 드려지고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동일하게 경배와 찬송이 돌려지는데, 이것은 어린 양이 하나님과 동일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6장

드디어 어린 양이 일곱인을 떼는 환상이 등장한다. 첫째 인부터 넷째 인까지 떼어지면서 보여지는 환상은 이 땅에서 권세를 가진 자들(8장에서 땅의  짐승들로 표현된다)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과 기근 그리고 그로 인한 사망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말탄 자들은 땅의 짐승들로 상징된 세상의 권세자들일 것이고 그들이 말을 타고 나가도록 허락되었다는 것은 이 땅의 권세잡은 자들의 권세가 하나님이 잠시 허락하신 권세임을 보여준다. 문제는 그들이 그 권세를 악용하고 남용함으로써 이 세상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환상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전의 이 세상의 비참한 현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다섯 째 인의 환상에서 등장하는 죽임을 당한 자들의 신원 요청은 단순히 원수를 갚아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비참한 세상의 현실을 끝내고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조속히 임하길 바라는 간구라고 보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자들이다. 이 세상의 권세자들은 그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죽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불의한 세상 권력을 거부하고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죽임을 당한 그들은 언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인지 언제 하나님이 불의한 권세를 심판하실 것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간구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에게 각각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잠시동안 쉬며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흰 두루마리를 준 것은 그들이 승리한 자들임을 인정하는 상징이다. 그들은 이 땅에서 죽임을 당했지만 패배한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긴 자들이다.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의 고난이나 핍박이 그치고 쉼이 주어진다. 그러나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 때가 이르기까지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야 한다. 여기서 죽은 자의 수가 찬다는 것은 하나님이 죽을 자의 수를 정해놓고 그 수가 찰 때까지 기다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기 전에 많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인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전에 성도의 고난이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이 이 땅에 임하기 전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증거해야 하며 그 증거로 인한 고난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여섯째 인에서 나타나는 우주적인 파멸의 환상은 바로 하나님의 최후심판의 모습을 묘사한다. 이 환상은 앞에서 언제 하나님나라가 임하여 이 땅의 심판하실 것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다. 지금은 아직 때가 이르 지 않았지만 그 심판은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이 환상은 보여준다. 그 날은 진노의 큰 날이므로 누구도 그 진노를 견딜 자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진노의 큰 날이 우주적 파멸로 묘사된 것은 물론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는 감추어져 있지만 그 날에 이 세상에 전무후무하고 경천동지할 큰 일이 벌어질 것은 분명하다. 

 

요한계시록 7장

이어진 환상은 여섯째 인과 일곱 째 인 사이에 삽입된 환상인데 이 환상이 삽입된 이유는 진노의 큰 날이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종들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들의 승리는 보장된다는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이 세상에서 그들이 환난을 당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은 일종의 영적 전쟁인 셈이다. 인쳐진 자의 숫자가 십사만사천이라는 것은 그들이 바로 이런 영적 전쟁을 위해 계수된 군사들임을 보여준다. 이들은 이 전쟁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에게 인을 치셨다는 것은 그들의 승리는 보장되었음을 의미한다. 열둘을 두번 곱하고 거기에 천이 곱해진 십사만사천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충만한 수를 의미하지 문자적인 유대인의 숫자를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이 환상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은 비록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지만 그들의 승리는 반드시 보장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네 천사가 땅의 바람을 잡아 불지 못하게 한 것은 이들이 모든 싸움을 끝내고 승리하기 까지 최후의 심판은 지연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환상에서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등장하는데 이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이 이긴 자들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앞에서 등장한 십사만 사천이 영적싸움을 끝내고 최후의 승리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앞의 십사만 사천과 다른 무리가 아니라 동일한 무리를 다른 관점에서 묘사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앞에서 십사만사천이 고난과 죽임을 당하며 영적 전투를 하는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면 여기서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영적 전투를 마치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 교회의 모습을 묘사할 것이다. 이것은 이십사 장로 중 하나가 그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한 자들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들은 영적전투를 하느라 큰 환난과 죽임을 당했지만 결국은 승리한 자들이다. 어린 양의 피에 옷을 씻어 희게하였다는 말은 그들이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자들이며 그리하여 어린 양의 승리에도 동참한 자들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등장하는 때는 언제인가? 그 때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바로 그 때일 것이다. 이 큰 무리가 세 가지 찬송을 외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했을 때 당연히 외쳐야 할 그런 찬송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성전에서 항상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제 그 나라에서 그들은 다시는 주리거나 목마르거나 악한 기운에 상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어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8-9장

드디어 어린 양이 일곱째 인을 떼실 때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했다. 일곱째 인이 떼어졌다면 두루마리를 인봉한 모든 인이 떼어졌으므로 이제 누구나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기록된 내용의 공개를 기대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했다는 것은 두루마리가 이제 펼쳐졌고 그 내용을 듣기 위하여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이십사 장로들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환상은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일곱천사가 일곱 나팔을 받는 환상이다. 그러니까 일곱나팔 환상은 일곱번 째 인을 뗌으로서 나타난 환상이 아니라 별다른 환상인 것이다. 일곱째 인을 떼었을 때 나타난 결과는 여기서는 단지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했다는 말로 끝난다. 아마도 요한은 독자들이 궁금증을 고조시키기 위한 문학적 구조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펼쳐진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한 환상이 등장하지 않고 일곱 나팔 환상이 등장하는 것인가? 일곱 나팔을 불기 전에 묘사된 장면(8장 3-5절)은 일곱나팔  환상이 등장한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 장면은 천사의 손에 들린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자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제단의 불을 담아 땅에 쏟는데 그 결과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우레와 음성과 번개와 지진은 하나님이 이 땅에 임재하시는 신현 현상을 상징한다. 이것은 앞에 6장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자들이 하나님께 언제 자신들의 피를 갚아주실 것인지 물었을 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최후심판의 환상이 주어진 것과 유사하다.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라갔을 때 이 땅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졌다는 것은 고난과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의 신원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이 이 땅에 임재하시어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일곱 나팔 환상에서 등장하는 재앙들은 앞에 6장에서 보여진 최후심판이 반드시 이 땅에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나팔과 같은 재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6장에서 우주적 대격변으로 묘사된 최후심판이 여기서는 일곱 나팔의 재앙으로 다시 자세히 묘사된 것이다. 다만 앞의 최후심판이 단 번에 일어난 것처럼 묘사된 것과 달리 여기서는 나팔을 불면서 순차적으로 재앙이 나타남으로써 하나님의 최후심판 전에 이 땅에 충분한 경고가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 네 개의 나팔 재앙이 땅과 바다와 강들 그리고 해, 이렇게 자연에 주어지는데 비해 다섯째, 여섯째 나팔 재앙은 직접적으로 사람들에게 쏟아지는데 이는 점점 더 심해지는 재앙을 통해 더 강력한 경고가 주어짐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날아가는 독수리를 통해 땅에 사는 자들에게 세 가지 화가 더 남아있다는 경고가 주어진다. 여섯째 재앙까지도 죽지 않고 남은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귀신과 우상에서 절한다. 문제는 재앙을 통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땅에 거하는 자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는데 있다. 

 

요한계시록 10장

앞에서 여섯번째 나팔 재앙이 등장했으므로 이제 일곱번째 나팔재앙이 등장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일곱번째 나팔을 부는 장면은 11장 15절에 등장하고 여기서는 또 다른 환상이 삽입되고 있다. 이것은 앞에서 여섯째 인과 일곱 째 인 환상 사이에 7장의 다른 환상이 삽입된 것과 동일한 문학적 구조다. 이런 문학적 구조를 취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앞에서 7장에 삽입된 환상이 최후심판이 임하기 전에 성도들의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영적전쟁이 있을 것이며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보장된다. 그리고 승리한 그들이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참여한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한 것처럼 여기서의 삽입도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앞에서 잠시 멈추었던 이야기, 즉 일곱번 째 인을 뗀 이후에 연결되어야 할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앞에서 일곱 째 인을 떼었을 때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한 후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지금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봉이 다 떼어지고 펼쳐지 두루마라에 대한 이야기다. 여기서 힘 센 천사가 다시 등장하는데 그는 앞에 4장에서 처음 등장하여 누가 그 두루마리를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냐고 큰 소리로 외치던 천사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천사가 그 손에 펴 놓은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나타난다. 여기서 힘센 천사의 손에 들린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가 바로 8장에서 일곱째 인이 떼어진 후 펼쳐진 두루마리일 것이다. 혹자는 여기서 "작은"이란 수식어 때문에 이 두루마리를 다른 두루마리라고 주장하지만 여기서 펴놓은 두루마리를 언급할 때 "작은"이란 수식어가 붙은 경우도 있고 붙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아 "작은"이란 수식어가 다른 두루마리임을 지칭하기 위한 의도라고 보기 어렵다. 또 앞에서 두루마리와 직접 관련된 힘센 천사가 펴 놓인 두루마리를 들고 다시 등장한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러한 것은 만일 여기 작은 두루마리가 앞에서 인봉되었던 두루마리가 펼쳐진 것이 아니라 다른 두루마리라면 그것은 전개되는 환상들 간에 맥락이 통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서 "작은"이란 수식어가 등장한 것은 그 두루마리가 요한이 받아 먹을 수 있는 크기임을 나타내려는 의도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힘센 천사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서 무엇인가를 말했고 요한이 그 말을 기록하려고 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은 무엇이고 그 말한 것을 기록하지 말고 인봉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아마도 여기서 일곱 우레는 앞에서 일곱 나팔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된다고 보인다. 그리고 일곱 우레가 기록되지 않고 봉인된 것은 앞에서 일곱 나팔의 결과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일곱 우레가 인봉된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회개를 기다리며 이 땅을 심판하는 일을 연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힘 센 천사의 말처럼 때가 되면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힘 센 천사는 일곱 째 천사가 나팔을 불 때가 바로 그 때라고 말한다. 이미 여섯 번의 경고 나팔을 불었고 일곱째 나팔을 불 때는 경고했던 바로 그 최후심판이 이 땅에 지체하지 않고 임한다는 것이다. 힘 센 천사는 이 때에 하나님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 곧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시행되는 바로 그 때에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인봉되었던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 내용은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어떻게 이 땅에 임할 것인가를 기록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이미 전하신 복음이다. 문제는 그 복음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고 이것이 바로 봉인된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런데 힘 센 천사는 일곱째 나팔을 불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고 했으니 이는 이 때에 비로서 펼쳐진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이 공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도 두루마리의 내용에 대한 공개는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여 뒤로 미뤄지고 있다. 이어서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요한에게 힘 센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고 명한다. 그러자 힘 센 천사는 요한에게 그 두루마리를 주며 갖다 먹어버리라고 말한다.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것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내용을 예언하라는 명령을 의미한다.(참고 에스겔3장 1-4절) 이는 힘 센 천사가 요한에게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해야 하리라는 말을 한 것을 보아도 그렇다. 아마도 요한은 이미 예언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임하기 전에 요한은 다시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며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이다. 그 두루마리가 입에서는 꿀 같이 달았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는 것은 그 예언의 말씀은 복음이므로 당연히 달고 기쁜 소식이지만 요한이 그 복음을 전할 때 이 땅은 반대할 것이고 그로 인해 요한은 쓰디쓴 고난을 당할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11장

앞에서 힘 센 천사는 요한에게 예언하라고 명했는데 여기서 정작 예언하는 사람은 요한이 아니라 두 증인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두 증인은 이 땅에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라고 설명된다. 두 감람나무 이야기는 스가랴 4장에 나오는데 거기서 두 감람나무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상징한다. 그러니까 두 감람나무로 상징된 두 증인은 이들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즉 예언하는 권세를 받은 자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두 증인은 두 촛대로도 상징되는데 요한계시록에서 촛대는 이미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또한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과 성전 마당이 짓밟히는 기간이 동일하다는 것은 두 증인으로 상징되는 것과 성전으로 상징되는 것이 동일함을 암시한다. 이로 보아 여기서 두 증인은 예언하는 권세를 받은 교회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1장에서 교회는 일곱 촛대로 묘사된 반면에 여기서는 두 촛대로 묘사되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구약에서 증언이 유효하려면 반드시 증인 두명이 필요하듯이 이들에게 주어진 일이 증언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예언 사명이 앞 장에서는 요한에게 주어졌는데 정작 예언하는 사람은 두 증인으로 표현된 이유를 납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두 증인은 이 땅에서 예언하는 교회를 상징한다.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예언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임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임박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면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듯이 그들도 동일한 일을 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이 땅에 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다. 두 증인의 예언은 바로 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일이다. 그런데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은 천이백육십일로 제한된다. 그 기간은 이방인들이 성전 바깥 마당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는 기간과 동일한 기간이다. 이는 교회가 예언을 하는 기간은 동시에 교회가 고난을 받는 기간임을 의미한다. 교회가 고난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때문이다. 이 기간동안에 성전 마당은 짓밟히지만 성전과 제단은 보호된다는 것은 교회가 고난을 받지만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교회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고난 가운데 잠시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경륜임을 의미한다. 두 증인의 예언은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것 같이 강력하게 회개를 촉구하며 또 그들의 예언은 하늘이 닫히고 재앙이 땅을 치는 것과 같이 두렵기도 할 것이다. 천이백육십일이 지나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벌여 그들을 이기고 죽일 것이다. 무저갱에서 짐승이 올라온다는 것은 두 증인이 예언하는 동안은 그 짐승이 무저갱에 갇혔다가 예언을 마칠 때 무저갱에서 잠시 풀려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 이 땅의 교회가 엄청난 타격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완전히 소멸됨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교회는 죽은 자와 같이 되버릴 것이다. 그리고 땅에 사는 자들은 교회가 죽은 자와 같이 된 것을 기뻐한다. 왜냐하면  두 증인은 그들을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두 증인의 예언은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참으로 괴로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교회가 죽은 자와 같이 되고 멸시를 당하는 기간은 사흘 반으로 표현된다. 교회가 권세를 가지고 예언하는 기간에 비해 그 기간은 매우 짧다. 그리고 사흘 반 후에 하나님은 교회를 다시 회복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시며 이 땅에 큰 진노를 쏟으실 것이다. 그 남은 자들이 이 모든 현상들을 보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게 된다. 아마도 이것은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대규모 회개를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팔 재앙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던 사람들이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인해 회개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언사역을 감당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사람들의 회개를 기다린다. 교회가 세상이 복음을 전파하여 고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그 때가 무르익기 위해서 교회는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결국 이 환상이 말하려는 것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교회가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예언하며 고난을 받는 그 기간은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양육받고 준비되는 시간이다. 이런 시간이 없이는 하나님나라는 이 땅에 임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백성들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성도들이 승리하기까지 연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 사이에 삽입된 환상이 끝나고 드디어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서 큰 음성이 들린다. 하늘의 큰 음성은 아마도 이십사장로들과 천사들의 음성일 것인데 이들의 큰 음성은 바로 일곱째 나팔을 분 결과가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하신다는 선포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다는 선언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앞에서 힘센 천사가 말한 바대로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때  이십사 장로가 엎드려 얼굴울 땅에 대고 하나님에게 경배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4장에서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엎드려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린 바로 그 장면과 동일하다. 이것은 4장에서 요한이 보았던 그 환상, 즉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가 이제 땅에서도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주기도문의 내용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십사 장로들은 하나님이 친히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신다고 노래한다. 그런에 여기서 하나님의 호칭이 조금 변한 것을 발견한다. 1장에서 하나님의 호칭은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하신 자였는데 여기서는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라고 바뀌었다. 장차 올 자라는 호칭이 빠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땅에 임재하시여 왕노릇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장차 오실 분이 아니라 지금 계시며 왕노릇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왕노릇을 거부하는 이방들은 분노하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내려 그들을 심판하신다. 6장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이 임한 것이다. 이제 하나님은 땅을 멸망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8장에 독수리가 경고한 세가지 화중에서 마지막 화가 그들에게 임한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보다 더 큰 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은 누구라도 능히 견딜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날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복된 날이요 기쁜 날이다. 그 날에 하나님은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드디어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의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인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놓인 지성소와 성소 사이에는 장막이 가려져 엄격하게 구별되었다. 장막이 있는 동안에는 누구든지 함부로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오직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스스로 속죄한 후에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언약궤가 보인다는 것은 지성소의 장막이 걷힘으로 지성소 안의 언약궤가 보이고 누구든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7장에서 이미 언급된 바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이 그들위에 장막을 치고 늘 함계 계심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구약의 오래된 약속이 드디어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이 때 나타난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 아니라 엄위로우신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신현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요한계시록 12장

여기서는 앞에서 연속하여 등장한 일곱 인과 일곱 나팔과는 다른 환상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환상은 앞에서 이미 등장한 환상들과 어떤 관계를 갖는 것인가?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다양한 환상들은 모두 서로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가지고 통일된 메시지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땅에 거하는 교회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할 것인가에 대해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12장에서 등장하는 여자는 해를 옷입고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썻다고 묘사되고 있는데 이런 묘사는 여자가 매우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존재이며 특히 열두 별의 관을 썻다는 묘사는 여자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임을 암시한다. 이 여자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를 낳았다고도 하는데 여자가 낳은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렇다면 여자는 메시아 공동체를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기서 등장하는 여자는 11장에서 성전이나 두 증인으로 묘사된 교회에 대한또 다른 상징일 것이다. 붉은 용도 등장하는데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며 그 일곱 머리에 일곱 왕관을 썻다고 묘사되는데 이는 붉은 용이 큰 권세를 가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흉내내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용이 여자가 낳은 아이를 삼키려 했으나 아이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올려갔다는 것은 메시아가 사탄의 공격을 이기고 승천한 사실을, 그리고 하늘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큰 용이 하늘에서 내어쫒긴 것은 메시아의 승리로 말미암은 사탄의 결정적인 패배를 회고하는 묘사일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남으로 말이암아 용이 하늘에서 내어 쫒겼다. 그리스도가 승리하셨고 용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도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씀으로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했다. 그렇다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어린 양에서 충성하고 용에게 굴복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를 증언하심으로 고난을 받고 죽으셨듯이 성도들도 동일하게 하나님나라를 증거함으로 어린 양의 고난과 죽음에 동참함으로 어린 양의 승리에도 동참한다는 것이다. 이제 용은 땅으로 내어쫒긴 후에 여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자는 광야로 도망하여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양육을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에 거한다. 동일한 의미로 여자는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서 거기서 뱀의 낮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받는다. 여기서 여자가 양육받는 기간은 앞에서 성전 마당이 이방인에게 짓밟히는 마흔 두달과 동일하고 두 증인이 예언하는 천이백육십일과 동일하다. 이로 보아서도 여자, 성전, 두 증인이 상징하는 실체는 동일하고 그것은 교회로 보아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교회가 고난을 받는 기간과 교회가 예언하는 기간과 교회가 양육을 받는 기간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지만 그 고난은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지 않으시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교회를 양육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고 고난을 받는 가운데 알곡으로 성장한다는 귀중한 진리를 발견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12장에 새롭게 등장하는 환상이 앞의 일련의 환상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발견한다. 그러니까 12장에 등장하는 환상은 11장에서 교회가 고난을 받고 예언을 하는 일의 중요성과 그 의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11장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이전에 교회가 고난을 받으며 예언을 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보여주었다. 바로 그 교훈을 12장에서 이어지는 환상들은 다시금 자세히 설명하고 강조하고 있다. 이제 용은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위에 서 있다. 여기서 여자의 남은 자손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표현되는데 이들은 아직 죽음을 통해 어린 양의 승리에 동참하지 않고 이 땅에 거하는 성도들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 곧 어린 양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이 어린 양의 증거를 가졌다는 것은 그들이 어린 양이 증거했던 바로 그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자들이란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바로 어린 양의 증거를 가지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3장

이제 용은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인다.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용과 비슷하게 뿔이 열이고 머리가 일곱으로 묘사되고 있다. 뿔이 열이란 말은 이 짐승이 세상의 큰 권세를 가진 존재임을 그리고 그 머리들에 신성모독 하는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이 짐승이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하는 자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은 짐승의 모습을 다니엘이 묘사한 짐승과 유사하게 묘사함으로써 이 짐승이 하나님나라를 대적하는 세상의 권세자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짐승이 가진 권세는 용이 준 것이었다. 용은 바다에서 나온 이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다. 그러니까 용이 교회를 공격하는 방식은 바로 세상의 권세자들을 자기 하수인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사람들이 용과 짐승에게 경배하며 짐승도 과장되고 신성모독하는 입을 받고 마흔 두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게 된다. 여기서 짐승이 교회를 공격하는 기간은 앞에서 교회가 고난을 받고 예언을 하며 양육을 받는 기간과 동일하다. 그러니까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지만 그 권세는 영원하지 못하고 다만 교회가 증언하는 기간에 국한될 뿐이고 이 기간에 교회는 짐승에게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교회를 양육하시는 것이다. 이 기간동안 짐승은 입을 벌려 하나님과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고 성도들과 싸워 이기며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는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누구든지 예외 없이 이 짐승에게 굴복하게 된다. 그만큼 짐승이 가진 권세는 대단하고 강력해서 누구도 이길 수 없을 정도이다.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이 짐승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인가? 누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인가?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하는 말씀을 가진 자들이다. 그래서 요한은 사로잡히고 칼에 죽는 일이 있겠지만 성도들은 인내와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 다음에 등장하는 짐승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인데 어린 양처럼 두 뿔을 가졌지만 용처럼 말하는 짐승이다. 어린 양처럼 두 뿔을 가졌지만 용처럼 말한다는 것은 이 짐승이 죽임당한 어린 양의 흉내를 내지만 사실은 용의 하수인인 거짓된 종교 권력자를 의미할 것이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 세상의 권력자라면 땅에서 나온 이 짐승은 종교 권력자인 셈이다. 이 짐승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경배하고 그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그 우상에서 절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다 죽이게 한다. 그는 모든 자들에게 짐승의 표를 받게하고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하지 못하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것이니 짐승의 이런 가혹한 압박을 견딜 자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4장

용에서 권세를 받은 두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는 도무지 살 수 없는 그런 암흑같은 세상에서 요한은 뜻밖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어린 양과 함께 십사만사천이 시온 산에 서있는 환상이었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었다. 이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표와 이름 대신에 어린 양과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있는 것이다. 이들은 짐승과 싸움에서 이긴 자들이다. 이들의 숫자가 십사만 사천으로 상징된 것은 이들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충만한 수이면서도 동시에 짐승과의 싸움을 위해 계수된 하나님의 군대임을 의미한다. 이들이 어린 양과 함께 서있는 것은 그들이 어린 양의 승리에 동참한 자들임을 그리고 그들이 선 곳이 시온 산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그들과 함께 거하심을 의미한다. 하늘에서 나는 물소리 같고 우렛소리와도 같고 거문고 타는 것 같은 소리는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고 기뻐하는 하늘의 천사들의 합창일 것이다. 그들도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는데 이 새 노래는 오직 이들만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다. 그들이 부르는 새 노래는 5장에서 이미 하늘에서 네 생물과 장로들이 불렀던 노래였다. 그 노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였음을 선포하는 노래였다. 이 사람들이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고 순결한 자라는 것은 이들이 자기들의 신랑인 어린 양만 따르고 음녀와 같은 짐승을 따르지 않은 자들임을 의미한다. 이들은 사람 가운데 어린 양의 피로 산 자들이며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다. 이어서 요한은 공중에 날아가는 천사를 보는데 그는 온 땅의 백성들에게 전할 영원한복음을 가진 천사였다. 영원한 복음을 가진 그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을 선포한다. 이제 성도들은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섰으므로 이제 이 땅에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이 이른 것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하나님나라의 백성들이 준비되었으므로 이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소식은 곧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영원하 이루어진다는 소식이니 영원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 땅의 모든 악이 제거되며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가 임할 것이다. 그래서 둘째 천사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선포한다. 이 큰 성 바벨론은 모든 나라에게 그 음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든 장본인이다. 큰 성 바벨론은 예루살렘 성으로 상징되는 하나님나라에 대응하는 이 세상나라 , 곧 용에게 권세를 받은 두 짐승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에게 경배하게 만들었던 세상을 의미한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가 짐승에게 경배하고 이마에 표를 받은 자들에게 내리게 될 것이며 그들은 밤낮 쉼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성도들은 인내로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이란 예수가 승리하신 어린 양이심을 믿고 그 승리에 동참하기 위헤 인내하는 믿음일 것이다. 이들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며 그들은 모든 수고를 그치고 쉼을 누리는 복된 자들이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은 두 가지 추수하는 환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익은 곡식을 거두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익은 포도송이를 거두어 포도주 틀에 넣는 장면이다. 전자의 장면이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후자의 장면은 짐승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비없는 진노가 임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곡식이든 포도송이든 익어야 추수할 수 있듯이 여기서 곡식이 익었고 포도송이가 익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무르익었음을 의미한다. 교회는 고난받는 기간 동안 하나님의 양육을 받아 곡식으로 익었고 동일한 기간에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포도송이로 익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때가 무르익은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기 이 땅에 임하게 될 때 성도들은 그 나라를 상속하게 될 것이고 짐승에게 경배하던 바벨론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15장 

요한은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았는데 그것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재앙이었다. 이 재앙을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날 것이다. 앞에서 재앙은 일곱 인 재앙을 시작으로 일곱 나팔 재앙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곱 대접 재앙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인, 나팔 대접으로 상징된 재앙들은 서로 다른 재앙들이 시간 순서를 두고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동일한 하나님의 심판을 반복하되, 다르게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하나님의 통치가 세상을 심판하는 재앙으로 나타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재앙들이 세 번 나타난 것은 세 가지 재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재앙을 다르게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할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재앙들이 인. 나팔, 대접으로 다르게 상징되었는데, 인 재앙이 하나님나라가 점진적으로 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나팔 재앙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모습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접 재앙은 하나님의 진노가 남김없이 쏟아 부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대접 재앙을 마지막 재앙이라 표현한 것은 재앙의 시간적 순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재앙의 최종적 모습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재앙이 쏟아지기 전에 요한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은 앞서 14장에서 어린 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 십사만사천과 동일한 무리일 것이다. 마지막 재앙이 쏟아지기 전에 승리한 성도들의 모습이 다시 등장한 것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성도들의 승리의 때까지 유예되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요한계시록에서 십사만사천으로 상징된 수, 곧, 하나님이 정하신 언약백성들의 충만한 수가 차기 까지 최후의 심판을 연기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시행되기 전, 인류 역사의 의미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준비되고 양육되는 시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완전히 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그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준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승리는 하나님나라의 완전한 도래를 위해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백성이 준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최후심판은 성도들이 승리하여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준비되어야만 비로서 시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승리한 무리들은 하나님을 만국의 왕으로 찬양하며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므로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라고 노래하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곧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최후심판이 더 이상 연기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드디어 하늘의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오는데 네 생물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준다. 여기서 언급된 성전은 지성소를 가리킬 것인데, 일곱 천사가 지성소로부터 나왔다는 것은 일곱 천사를 통해 쏟아질 재앙이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최종적인 심판임을 의미한다.

 

요한계시록 16장

드디어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이 땅에 쏟아진다. 하나님의 재앙은 먼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에게 쏟아진다. 그리고 이어서 바다와 강과 물 근원에 재앙이 쏟아진다. 이렇게 이 땅에 임하는 재앙은 세상의 핍박으로 죽임을 당한 성도들과 선지자들을 신원하는 재앙이다. 그래서 제단 아래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롭다고 화답한다. 이들은 앞에 6장에서 신원의 때가 언제인가라고 묻던, 죽임을 당한 영혼들일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성도들의 충만한 수가 승리함으로써 드디어 그들이 고대한 신원의 때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진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으며 오히려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한다. 앞에 나팔 재앙에서도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지만 두 증인의 예언 사역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했다. 하지만 이제 대접 재앙에서는 더 이상 회개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여섯째 천사가 그 대접을 쏟았을 때는 개구리 같은 더러운 세 영이 등장하는데 이것들은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온다. 이들은 귀신의 영인데 이들은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있는 전쟁을 위하여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왕들을 아마겟돈이라하는 곳으로 모은다. 이것은 악의 삼위일체인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합력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은 이제 아무 의미가 없다. 일곱째 천사가 대접을 공중에 쏟았을 때 "되었다"는 큰 음성이 성전에 있는 보좌로부터 났다. 이제 이 마지막 재앙으로 큰  성 바벨론이 진노의 맹렬한 포두주 잔을 받고 멸망한 것이다. 14장에서 공중을 날아가는 두번째 천사가 예고한대로 큰 성 바벨론이 드디어 무너진 것이다. 14장에서 큰 성 바벨론은 모든 나라에게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 묘사되는데, 그것은 곧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를 따르던 이 세상을 가리킬 것이다.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것은 바벨론의 주인 노릇을 하던 용과 짐승과 거짓 선자자가 심판을 받았음을 전제한다. 왜냐하면 그 악의 삼위일체가 제거되지 않고는 바벨론이 멸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17-18장

이어지는 환상은 이미 선포된 바벨론의 패망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일곱 천사 중 하나는 요한에게 많은 물 위에 앉은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준다. 여기서 음녀가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며 음녀는 바벨론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바벨론은 온 백성과 열국과 방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 음행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바벨론은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로도 묘사되는데 이것은 바벨론이 짐승의 권세 아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앞에 13장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가리킬 것인데 그 짐승의 몸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이 가득했다. 또 이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 자로 묘사되는데, 이는 바벨론이 바로 짐승의 사주를 받아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인 장본인임을 가리킨다. 음녀 바벨론이 탄 짐승의 일곱 머리는 일곱 왕으로 그리고 열 뿔도 열 왕으로 설명되는데 이들이 자기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었다. 이들은 합세하여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는데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것이며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도 이길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내려오면서 힘찬 음성으로 바벨론이 무너졌다고 외친다. 크고 견고한  성 바벨론에 드디어 심판이 이르렀고 하나님은 하늘의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위하여 바벨론에게 심판을 행하셨다.

 

요한계시록 19장

이제 바벨론은 멸망했고 하늘에 허다한 무리가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심판이 참되고 의로우심을 노래한다.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도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한다. 이제 어린 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으므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 여기서 어린 양의 아내가 자신을 준비했다는 것은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준비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어린 양의 아내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었다는 것은 그들이 승리한 자들임을 의미한다. 세마포 옷이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설명되고 있는데 여기서 옳은 행실이란 15장에서 언급된 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남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어린 양의 신부가 준비되었고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른 것이다. 어린 양의 아내는 또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로도 묘사된다. 혼인이란 이미지는 대단히 언약적인 표상이 아닐 수 없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한 성도와  하나님과의 언약적 회복과 동거를 의미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하늘에서 백마를 탄 자가 내려오는 것을 본다.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며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머리에 관을 쓰고 피 뿌린 옷을 입었으며 그 옷과 다리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는 이름을 썻다는 묘사는 백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자가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암시한다. 4장에서 하늘에 열리고 요한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여기서는 하늘이 열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땅으로 내려오시는 것이다. 하늘에 있는 군대들도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는데 이들은 이미 승리하여 하늘에 거하던 성도들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가 승리한 하늘의 성도들을 데리고 오는 이유는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들의 군대와 전쟁을 벌리기 위해서이다. 전쟁의 결과 짐승이 잡히고 거짓 선지자도 함께 잡혀 유황 불붙는 못에 던져진다. 18장에서 큰 성 바벨론이 무너졌다면 19장에서는 바벨론이 타고 있던 두 짐승이 멸망을 당한 것이다. 어린 양과 어린 양의 아내가 혼인 잔치를 벌리는 그 날이 바로 짐승이 멸망하는 날이기도 하다.

 

요한계시록 20장

여기서 오랫동안 교회사에서 천년왕국 논쟁으로 얼룩졌던 본문이 등장한다. 그것은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용을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고 무저갱에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함으로써 천년 동안은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했는데 천년이 지나면 반드시 잠깐 놓인다. 그리고 용이 결박되어 무저갱에 있는 기간인 천년 동안 승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한다는 이야기다. 이 본문을 19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 한 후에 일어날 미래의 일로 해석하여 등장한 이론이 전천년설이다. 전천년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지상에 천년동안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통치하는 천년 왕국이 도래한다는 것이고 천년이 지난 후 용이 무저갱에서 나와 16장에서 언급된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킨 후에 최종적으로 멸망하고 그 후에 다시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이 본문을 전부 미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 일어날 일로 본 결과이다. 그러나 무천년설은 이 본문을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로 말미암아 용이 하늘에서 쫒겨난 12장의 이야기와 동일하게 과거로 보고 또한 천년동안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왕노릇하는 것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도래한 하나님나라에서 성도들이 영적인 의미에서 왕노릇한 과거로 본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년 동안 왕노릇 하는 자들은 순교한 영혼들과 짐승과 우상에서 굴복하지 않은 자들인데 이들은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로도 묘사되는데 여기서 첫째 부활도 영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후천년설은 무천년설과 동일하게 용이 무저갱에 갇힌 사건은 과거로 보지만 천년왕국은 미래의 사건으로 보아서 지상에 천년왕국이 실현된 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본문을 앞의 환상들과 관련된 문맥에서 보면 19장에서 짐승이 멸망한 후에 이제 20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용이 멸망하고 최후의 심판이 이루어짐으로 모든 악이 제거되었음을 말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용이 무저갱에 갇혔다든지 그 기간에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왕노릇한다는 것은 용의 멸망을 말하기 위해 용과 관련된 과거의 일들을 회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언급된 천 년도 문자적 천년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왕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충분한 기간을 의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어서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서 싸움을 붙이는데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마귀도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있는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 이 장면은 이미 16장에서 아마겟돈 전쟁으로 묘사된 그 일과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장에서 말하려는 것은 19장에서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멸망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용이 멸망한 후에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행된다는 이야기다. 이 심판은 이미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인데 그들은 모두 부활하여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심판을 받고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던져진 불못에 던져진다. 이들은 결국 짐승과 그 우상에서 경배한 자들을 가리킬 것이다. 결국 20장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함으로써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인 악의 삼위일체가 멸망하고 그들을 따랐던 자들도 멸망함으로써 이 땅의 모든 악이 제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1장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없어지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았다. 바다가 다시 있지 않았다는 것은 모든 악이 이 땅에서 제거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모든 악이 제거된 세상, 그것이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져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져 버렸다는 말이 아니라 악이 제거된 후에 처음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새로 생긴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세상이 새로워졌음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임함으로 모든 악이 제거되었고 그 결과 온 세상이 새롭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위한 것이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이 땅에 임할 만한 세상을 만드시기 위해서 세상을 새롭게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게 하려하심과 같다.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는 바로 그 일이다. 드디어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 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4장에서 요한이 처음 보았던 환상, 곧 하늘에서 이미 완전히 성취되었던 하나님나라가 이제 이 땅에 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이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장막은 그동안 휘장으로 가려져 들어갈 수 없었던 지성소를 의미할 것인데 이제는 하나님의 지성소가 열리고 하나님이 성도들과 함께 계시게 된 것이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심으로 우리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한 말을 기억나게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이 이미 그 백성들과 동거를 시작하셨는데 그 충만한 모습이 이제 이 땅에 가시적으로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이긴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구약의 오래된 약속이 드디어 성취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놀라운 일은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만 상속으로 주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이기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짐승과 그 우상과 그 이름에 경배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바로 둘째 사망이다. 일곱 천사 중 하나는 요한에게 어린 양의 아내를 보여주겠다고 말하는데 그가 보여준 것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니까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바로 어린 양의 아내였던 것이다. 19장에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다고 말하면서 승리한 성도들을 어린 양의 아내로 비유했는데 어린 양의 아내가 곧 새 예루살렘 성이라면 승리한 성도들이 곧 하나님나라인 셈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데 성도들의 승리가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가를 잘 보여준다.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빛난다. 그 성에 열두 문이 있고 그 문들 위에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써 있으며, 성의 열두 기초석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써 있다는 것은 곧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충만한 수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성은 지성소와 마찬가지로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같은 정육면체로 되어있는데 이는 그 성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임을 암시한다. 성곽은 벽옥이고 그 성은 맑은 유리같은 정금이고 성곽의 기초석도 각색 보석으로 꾸몄다는 것은 승리한 성도들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들임을 의미할 것이다. 주목할 점은 성안에 성전이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성소와 이스라엘 백성이 거하는 성소가 분리되어 존재하는 성전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으로 해나 달의 비침이 필요없다. 이제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고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만국이나 땅의 왕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승리한 성도 외에 다른 사람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그 성에 들어갈 수 있으며, 오직 이긴 자들만이 하나님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만국은 이긴 자들로 가득할 것이며 그들은 땅에서 왕노릇할 것이다.

 

요한계시록 22장

요한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는 것을 본다. 그리고 강 주위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가 달마다 맺히며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한다. 이 장면은 첫 사람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쫒겨났던 그 에덴 동산의 모습을 연상케한다.  이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으로 하늘과 땅이 새로워졌듯이 세상은 첫 사람 아담이 거했던 에덴동산과 같이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종들 가운데 있어 그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을 비치심으로 그들이 세세토록 땅에서 왕노릇할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첫 사람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기대하셨던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천사는 환상을 통해 주어진 이 말이 신실하고 참되며, 이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들과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이 두루마리의 예언이란 1장에서 언급된 바, 요한이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한 두루마리일 것이다. 환상을 통해서 요한에게 주어진 이 예언이 바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교회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지켜야만 어린 양의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에 자기 두루마리를 빨아 희게 하는 자들이고 이들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권세를 받는 자들이다. 여기서 자기 두루마리를 빨아 희게 한다는 것은 7장에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하였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린 양의 고난에 참여하여 승리한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음행하는 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다시 말하면 짐승에게 굴복한 자들은 다 성 밖에 있을 것이다. 성 밖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심판을 받아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에게 주어진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들을 위하여 천사를 보내어 증언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 가감하는 일이 엄격히 금지된다. 반드시 속히 오실 주 예수를 기다리며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