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

메르시어 2023. 5. 14. 18:18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

2017-09-25 18:42:29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을 얻게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잘 아는 유명한 구절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신다고 수없이 말한다. 세상을 사랑하다는 것은 특별히 인간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사랑이란 말은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사랑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인격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피조물 중에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밎고 있는 존재는 오직 사람뿐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다는 말은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이시고 사람은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대해 성경은 존재론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관계론적으로 대답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진다. 성경은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이시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 말은 하나님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진 분이신지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창조주라면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누구시냐에따라 세상이 무엇인지도 규정된다.  반대로 세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하나님이 누구시냐도 규정된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관계론적 대답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와 달리 더 독특하다. 하나님과 세상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관계이지만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단순히 피조물의 관계를 넘어선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한 바 하나님은 자기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사람을 지었다고 말한 대목이다. 사람은 이 세상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어진 특별한 피조물인 것이다. 그런데 이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었다는 말이 단순히 닮은 꼴로 지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생래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 관계는 인격적 관계라고도 혹은 언약적 관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단순히 수동적이고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단히 능동적이고 쌍방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사실 인격적 관계 자체가 능동적이고 쌍방적인 관계를 전제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인격적 관계일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인격적 하나님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는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관계가 인격적 관계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적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하나님이 맺으시길 원하시는 인격적 관계의 상대방이라는 고귀하고도 유일한 존재인 셈이다.  

 

  이렇게 성경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과 그 존재의미를 바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떠나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지식도 하나님과 사람과의 인격적 관계를 떠나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은 단지 존재론적으로 설명되는 분이 아니라 사람과 맺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만 체험되고 이해될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인격적인 분이시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상대가 필요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외에 다른 비인격적 존재들을 창조하신 것은 바로 인격적 존재인 사람을 위해 하신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이 독특하고 유일한 관계는 생래적이고 운명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관계이고 사람이 존재하면서부터 주어진 관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인하든 인정하든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주어졌고 존재한다. 이것은 결코 사람이 선택할 문제가 아니고 단지 주어진 관계이고 이 관계를 떠나서 인간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은 단지 이 관계 속에세 존재하며 이 관계를 인정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이 관계를 거부하며 살 것인가의 문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나님이 사랑을 사랑하시든지 혹은 사람을 미워하시든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행동은 모두 이 생래적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지 않은 다른 피조물을 사랑하시거나 미워하시지 않고 오직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 사람을 향해서만 그리하실 뿐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이 인격적인 관계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하였다고 했는데 그 목적은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하나님 대신 다스리는 놀라운 권세를 주신 것이다.  인정을 하든 안하든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생래적으로 이런 권세를 가진 놀라운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과 사람의 인격적인 관계란 단순히 사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단히 공적인 관계인 셈이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위임하셨고 사람은 그런 권세를 위임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로 출발한 것이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선악과 이야기는 바로 사람이 이런 놀라운 권세를 위임받은 존재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한기지 금령을 주시는데 그것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단지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주어진 권세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쳐주려는 금령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를 반드시 그 권세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가르쳐준다.

 

  문제는 사람이 이 선악과 금령을 어겼다는데 있다. 사람의 모든 문제와 세상의 모든 고통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사람에게 주어진 놀라운 권세의 남용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다스려야 할  존재로 창조된 사람의 존재 이유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노아의 홍수 사건은 바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비참한 결말이 무엇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선약과 금령을 어긴 시간을 죄의 기원으로 이해한다. 죄란 단순히 금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인격적 관계에 대한 훼손을 의미한다. 죄라는 개념이 오직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처럼 죄는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놀라운 권세를 전제한다. 선악과 금령을 어긴 일은 바로 이런 관계를 훼손한 것이고 이런 권세를 남용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의 근본적 성격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죄에 대해 분노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죄인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분노도 하나님의 사랑도 모두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인격적인 관계 때문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사람 외에 대한 피조물에 대해 분노하시거나 사랑하지 않으신다. 미움이나 사랑은 모두 인격적인 관계를 전제한다. 하나님의 심판이란 바로 돌이키지 않는 죄인에 대한 언약적 분노의 결과이고 구원이란 바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창조목적, 곧 사람의 존재목적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열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구원이나 하나님의 심판이나 모두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인격적 관계를 전제하며 그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이고 사적인 사랑이 아니라 대단히 목적을 가진 공적인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언약적 관계 자체가 대단히 공적이고 목적적이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잇닿아 있고 사람의 존재 이유와 직결되어 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하려 하심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곧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인격적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 일을 독생자를 보내심으로 이루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독생자를 보내시어 이 일을 이루시는 것인가? 독생자 곧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셨다. 예수의 성육신, 그리고 십자가 죽음은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독생자가 한 일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었고 이것은 첫 사람 아담이 보여준 불순종과 잘 대조된다. 첫사람 아담이 불순종했다면 예수는 두번째 아담으로서 순종을 한 것이다. 예수의 이 순종,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룬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왜 예수의 순종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는 것인가?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가 범죄한 인류를 대표하는 두번째 아담이요, 온 인류의 왕이심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는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가 우리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세워진 왕이시기에 그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으로 간주되고 우리의 불순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복음이라고 이해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 죽음은 그리스도로서의 죽음이기에 의미가 있게 된다. 이렇게 하나님은 독생자를 보내어 그리스도로서의 죽음을 죽게하심으로 자기 사랑을 사람에게 드러내셨다. 복음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말뿐아 아니라 자기 아들을 보내어 죽게하시는 방식으로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사람은 사랑은 어찌 된 것인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셨다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에 있는 사람은 마땅은 그 사랑에 반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욕이며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람의 반응이로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을 믿는 일이다. 복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요 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독생자를 믿는 일이요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일이요 그의 죽음이 그리스도로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죽음임을 믿는 일이다.이것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첫 단추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드리고 반응하는 일이다.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 곧 예수가 우리의 왕이심을 믿는 것이다.

 

  복음은 예수가 왕이심을 믿는 것이고 그가 왕아로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를 위해 죽으심을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왕이신 예수에게 충성하는 것이요 그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예수가 왕이라고 믿으면서 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거짓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예수에게 충성하고 순종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충성한 그 모범을 따르는 일이다. 그것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순종,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순종,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은 세상이 알 수도 없고 흉내낼 수도 없는 기이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자신을 티끌처럼 낮춘 사랑이다. 이 세상은 자기를 높이고 내세우기에 급급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는 자신을 낮추고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었다. 그래서 예수는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그렇기에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에서는 높은 자가 낮은 자가 되고 힘세 자가 약해지며 어린아이가 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말째가 되어아 하고 강한 자가 되려면 오히려 약한 자가 되어야 하는 나라가 하나님나라다. 이렇게 하나님나라의 질서는 세상나라의 질서와 반대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라 사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은 이 세상 나라에서 미움을 받는다.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으라고 하셨다. 이것은 제자들이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새 계명이라고 하신다. 새 계명은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가 세우신 하나님나라의 질서다.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그 사랑의 방식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질서이고 이 하나님나라 질서를 따라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보여준신 사랑에 반응하는 것이며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예수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을 믿는다면 예수가 하나님나라 왕이시고 우리는 그 나라의 백성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왕에게 순종하야 하고 왕이 세우신 하나님나라 질서를 따라 살아아 한다 이것이 사람의 사랑이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거짓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 공적인 사랑이듯이 사람의 사랑도 인격적 관계에 기초한 공적인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사적이거나 감정적 차원의 사랑이 아니라 공적인 사랑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나라 질서를 따라 자신을 남보다 낮추고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기는 그런 사랑이다. 그 사랑은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그런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