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서신의 내러티브
요한서신의 내러티브
2017-08-18 19:03:06
요한1서 1장
요한복음과 마찬가지로 이 편지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그 생명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자세히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강조하고 있는데(1절) 이것은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자신의 증언이 그저 자신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하고 맛본 확실하고 믿을만 한 증언임을 말하려는 것이다.(2절) 저자는 자신이 보고 들은 바를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전하려고 하는데 그 목적은 그들과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라고 말한다. (3절) 그리고 이어서 그 사귐은 그저 인간적인 친밀함의 교제가 아니라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신적인 사귐임을 강조한다.(4절) 이 말은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이 신적인 사귐에 들어오게 됨을 의미한다. 그렇게 그들이 증거를 받고 사귐 가운데 들어오게 될 때 저자는 자신의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고 말한다.(5절) 그렇다면 저자가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듣고 전하는 소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은 빛이시므로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사실이다.(6절) 그러므로 만일 누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를 거스리는 자라고 말한다.(6절)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사귐을 누릴 수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7절) 만일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범죄하고서도 죄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스스로 속이는 자이고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이다.(8절) 그러나 자기 죄를 인정하고 자백한다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시므로 그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9절) 만일 누가 죄를 짓고도 범죄하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있지 않은 자이다.(10절) 그러니까 이 문맥에서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자기 죄를 감추지 말고 인정하고 자백하는 일을 가리킨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라면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자백하고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렇게 죄를 자백할 때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요한1서 2장
이 편지의 저자는 자신이 이런 편지를 쓰는 목적은 죄를 범하지 않게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1절) 여기서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예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죄를 범할 때 그 죄를 자백하고 죄에서 즉시 돌이키게 하려함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며(1절) 우리 죄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다고 말한다. (2절) 이 말은 죄를 자백할 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죄가 사함을 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고 죄를 자백하라는 권면의 의미일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안다고 말하며(3절) 만일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자요 진리가 없는 자라고 강조한다.(4절) 저자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킬 때,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하게 되며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줄 우리가 알게 된다고 말한다.(5절) 그래서 저자는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산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대로 그도 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6절) 저자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는 일을 언급하는 이유는 1장에서 말하는 죄가 보라 계명을 지키지 않는 일임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저자는 자신이 지금 말하는 계명이 새로운 계명이 아니라 이미 편지의 청중들이 듣고 알고 있는 계명이라고 말하면서도(7절) 이제 새 계명을 쓴다고 말한다. 여기서 새 계명이라고 말함은 청중들이 듣지 못하던 새로운 계명이란 의미가 아니라 이 계명이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비추는 새 시대에 주어진 참된 계명이란 의미일 것이다. (8절) 드디어 저자는 그 계명이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이다. 그래서 저자는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9절)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라고 말한다.(10절) 다시금 저자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어둠에 행하는 자이며 어둠에 눈이 멀어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자라고 단언한다.(11절) 저자는 이 편지의 청중들을 향하여 자녀들, 아비들, 아이들, 청년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된 초기 기독교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들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들이 모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죄 사람을 경험한 자들이요(12절)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 자들이며 악한 자를 이긴 자들이다.(13절) 또한 그들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며 흉악한 자를 이긴 자들이다.(14절) 그래서 편지의 저자는 이들에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권면하면서 만일 누가 이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15절) 그러면서 저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데 이런 것들은 다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한다.(16절) 그런데 왜 저자는 갑자기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하고 한 것인가? 그것은 세상의 질서를 따른다면 형제 사랑이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의 질서를 따르는 자는 형제 사랑이라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 세상이니 세상의 정옥을 따르는 자들은 멸망하지만 형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말한다. (17절) 이어서 저자는 지금이 마지막 때이고 적 그리스도가 많이 일어났다고 경고한다. (18절) 그런데 적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온 자들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에 속했던 자인데 그곳을 떠난 나간 자들이라고 말한다.(19절) 그렇다면 적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들은 예수께서 그리스도 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22절)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또한 아버지를 부인하는 자들이다.(23절) 그러니까 적 그리스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며 기독교 공동체를 미혹하는 자들이다.(26절) 저자는 이 편지의 수신자들이 거룩하신 자(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고 이 모든 것을 분별하는 자라고 말하며(20절)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의 인도를 받으며 담대하게 그 안에 거하라고 말한다.(27절)
요한1서 3장
저자는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 특별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그 사랑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1절) 여기서 다시금 저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귐을 누리지 못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나 세상이나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장래에 에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는 그와 같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2절) 그래서 저자는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말한다.(3절) 저자는 다시금 죄가 불법 곧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임을 말하고(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은 죄를 없애려고 하심을 강조한다.(5절)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범죄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자라고 단언한다. 여기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이 신자가 전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미 1장에서 저자는 죄를 지은 상태를 전제하고 죄의 자백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범죄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죄를 자백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지금 저자는 죄의 심각성 그리고 죄를 자백하는 문제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게 여기는 자들의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고 말한다.(7절)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한다는 경고도 죄를 짓는 자는 모두 그렇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죄를 짓되 자백하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라고 보아야 한다.(8절) 이어지는 하나님게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하기 때문이란 말도(9절)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면 죄를 자백하지 않고 어두움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강조하는 말로 보아야지 아예 죄를 짓지도 않는다는 의미로 보면 문맥에 모순된다. 결국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는 형제 사람이라는 계명을 지키는 여부로 드러난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10절) 이것이 저자의 단호한 결론이다. 이렇게 형제 사랑이라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자들을 세상이 미워하는 것을 이상스런 일이 아니다.(13절) 왜냐하면 형제사랑이란 하나님의 질서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의 질서에 반하게 때문이다. 형제 사랑은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증거다. 그러므로 누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사망에 머물러 있는 자다.(14절) 누가 형제를 미워한다면 그는 살인하는 자이고 그에세는 당연히 영생이 없다.(15절) 형제 사랑이란 계명은 단순히 윤리적인 교훈이나 덕목이 아니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여 목숨을 버리셨듯이 우리도 이 사랑을 따라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16절) 그러니까 저자가 말하는 형제 사랑이란 단순히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형제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구체적인 행동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육신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르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 사랑이란 계명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어서 저자는 형제 사랑의 구체적인 사례로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17절) 형제 사랑이란 말과 혀에서 나오는 위선적 사랑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에서 나오는 구체적 사랑이다. (18절)이렇게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속한 줄 알고 우리 마음을 주 앞에 굳게세 할 수 있다.(19절) 혹시 우리 마음에 책망할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이다.(20절) 그리고 만일 우리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가지고(21절) 무엇이든지 그에게 구하는 것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기 때문이다.(22절) 이 말을 한 후에 저자는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의 계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그것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23절)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면 그의 계명을 지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과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여기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과 동일한 의미로 보아야 한다.(2장 22절)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심을 믿는다면 그 메시아가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일 것이다.(16절) 그래서 저자는 형제 사랑의 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알게 된다고 말한다.(24절) 이것은 서두에서 말한 바대로 형제 사랑이라는 이 계명을 지키는 자만이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 가운데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1장 3절)
요한1서 4장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아닌지 분별해야 한다.(1절) 그 분별 기준은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 여부이다. 만일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다.(2절) 아마도 저자는 적그리스도가 올 것을 이전에 경고한 바 있는 것 같은데 이제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가 바로 적그리스도라고 말한다. (3절)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를 이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적그리스도보다 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4절)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은 세상에 속한 자들이고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말(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말)을 하므로 세상도 그들의 말을 듣는다.(5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예수가 육체로 임하셨다는) 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다. 우리의 말을 듣는 자는 진리의 영이고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미혹의 영이다.(6절) 이렇게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을 경계한 후에 저자는 다시 형제 사랑이란 주제로 돌아간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7-8절) 저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한다.(8절)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란 의미라기 보다는 이어지는 말로 보아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하나님이 보여주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우리를 살리시려고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일을 통해 하나님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셨다.(9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그 아들을 속죄제로 보내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을 강조한다.(10절)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11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도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다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12절) 저자는 이렇게 형제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하게 이루어질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은 최고의 언약적 합일을 이룬다고 말한다.(13절) 저자는 앞에서 적그리스도를 경계하다가 이어서 형제 사랑의 주제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만일 누가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한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부인된다면 형제 사랑의 근거가 상실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 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저자는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보았고 그 본 것을 지금 증거하고 있다.(14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는 것은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시인하는 것이다.(15절)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으며 저자는 바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고 믿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즉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신다.(16절)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면 우리는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17절)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이다.(18절)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함이 마땅하다(19절) 그런데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20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 저자는 이것이 주님께 직접 받은 중요한 계명임을 강조한다.(21절)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저자가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친밀함이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추구해야 하는 대단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의 사랑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세상이 흉내낼 수 없으며 세상 질서에 반하는 하나님나라의 질서이다.
요한1서 5장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요 이런 자가 바로 하나님께로 난 자다. 그리고 내신 이(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에게서 난 자(형제)를 사랑한다.(1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형제)를 사랑한다면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줄 알게 된다.(2절) 다시금 저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형제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임을 강조한다.(3절) 그런데 이어서 저자는 형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왜 그런지를 설명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자라면 형제 사랑이란 계명이 무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곧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고 그 사랑을 안다면 형제 사랑이란 계명이 무거운 일이 아니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저자는 하나님께로 난 자,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말한다.(4-5절)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저자가 형제 사랑이란 계명을 지키는 일이 세상을 이기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 형제 사랑이 세상을 이기는 일인가? 그것은 형제 사랑이라는 계명이 세상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나라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형제사랑이란 세상의 질서를 거스리는 새로운 질서, 세상이 미워하는 질서다. 이 세상은 서로 높이지려고 하고 남보다 더 가지려는 욕망으로 유지되는 질서다. 그러나 형제 사랑이란 서로 낮아지려고 하고 남보다 덜 가지려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다. 이 세상에서는 부익부 빈익빈이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부자는 가난해지고 가난한 자는 부해지며 높은 자가 낮아지고 낮은 자가 높아진다. 이것이 바로 형제 사랑이란 계명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래서 형제 사랑이란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세상의 질서를 이기는 것이된다. 이어서 예수가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라는 표현은(6절) 앞에서 예수가 육체로 임하신 분이라는 말과(4장2절) 동일한 의미로 보인다. 저자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예수가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심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7절) 물과 피와 성령, 이 셋이 일치하여 예수가 육체로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한다.(8절) 저자가 이렇게 예수가 육체로 임하신 분이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다면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는 사람의 증거보다 크다. (9절) 그러므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를 부인하는 자이므로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다.(10절) 저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믿는 자들에게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11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12절) 저자는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1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 즉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영생 혹은 생명이란 문자적 의미의 영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를 가리키는 의미로 보인다. 그리고 이 생명을 가진 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담대함을 가지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구할 때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다.(14절) 그리고 만일 하나님이 구하는 바를 들으신다면 우리는 그것을 반드시 얻을 줄을 안다.(15절) 이어서 저자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와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말하는데 문맥상 사망에 이르는 죄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죄일 것이다. 이런 자는 적그리스도에 속한 자이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이런 죄를 지은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에 대해서는 죄를 지은 자를 위해 구하라고 권한다.(16절) 왜나하면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그 죄가 모두 사망에 이르는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17절)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스스로를 지킴으로 악한 자가 그를 손대지 못하기 때문이다.(18절) 온 세상은 악한 자에 속했지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다.(19절) 저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참된 자, 곧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며 또한 우리가 그 참된 자 안에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게하셨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 참된 자, 그 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며 영생이시라고 말한다.(20절) 여기서 하나님을 영생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로 믿는 자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란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을 알게하셨다. 그렇다면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자는 너희 자신을 지켜 참 하나님이 아닌 것, 곧 우상을 멀리하라는 권면의 말로 편지를 마치고 있다.(21절)
요한2서 1장
택하심을 받는 부녀와 그의 자녀라는 표현은 특정한 여인을 지칭한다기 보다는 편지를 수신하는 지역교회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는 마지막 구절에서 택하심을 받은 너의 자매의 자녀들이 문안한다는 표현으로 보아도 그러하다. 인삿말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단어는 "진리"이다. 진리를 아는 자(1절) 진리로 말미암는다(2절) 진리와 사랑 가운데(3절).. 이렇게 편지의 저자는 인삿말에서 진리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런데 지금 저자가 말하는 진리는 무엇을 뜻하는가? 4절에 보면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한다고 하고 5절에서는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쓰는 것이 아니라 6절에서 사랑은 곧 우리가 그 계명을 따라 행하는 것이요.. 이로 보아서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진리란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따라 행하는 일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진리를 거스리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지적하여 미혹하는 자들이라고 말한다.(7절) 그런데 미혹하는 자들은 누구인가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이들은 미혹하는 자들이요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적그리스도다.(7절) 결국 저자의 논지는 예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 바로 진리를 거스리는 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가? 그거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예수가 육체로 오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육체로 오셨으며 죽임을 당하신 일은 바로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음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래서 요한일서에서는 "그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요한1서 3장16절) 저자는 스스로 삼가서 이런 미혹에 빠지지 말고 사도들이 일한 것을 잃지 말라고 권면한다. 이런 교훈을 져버리고 서로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교훈에 거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9절) 오직 교훈 안에 거하는 자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자이다. 그래서 저자는 만일 누가 진리를 행하라는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오거든 상종하지 말라고 명하면 만일 상종한다면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라고 경고한다.(11절)
요한3서 1장
편지의 수신자는 가이오인데 저자는 이 가이오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한다. 그가 가이오를 사랑하는 이유는 형제들이 와서 그가 참으로 진리안에서 행한다고 증언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자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함을 듣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한 신실한 일이다.(5절) 그들이 교회 앞에서 가이오의 사랑을 증언하였다. 결국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 일은 형제 사랑이었다. 저자는 나그네된 형제들을 영접하는 것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8절) 그러나 교회 안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디오드레베였다. 가이오가 진리안에서 행한 자라면 디오드레베는 진리를 거스린 자였다. 그는 편지의 저자를 맞아들이지 않고 악한 말로 비방했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 않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쫒았다.(10절) 그런데 이런 악행을 하는 디오드레베를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으뜸되려하는 것이 바로 형제 사랑이라는 진리를 거스리는 것임을 보여준다. 형제 사랑이란 자기를 남보다 낮추고 스스로 종이되어 섬기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사랑의 방식이었다.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이나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바로 자신을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절대적으로 순종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저자는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에게 속하고 진리를 거스려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다고 말한다.(11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