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하나님의 나라와 순종

메르시어 2023. 5. 14. 18:02

하나님의 나라와 순종

2017-08-11 17:50:58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다. 이건 분명하다. 문제는 하나님이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하는 점이다. 창세기 1장에서 보듯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를 다스리게 하려 하심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다스리는 방식이 직접 통치가 아니라 간접통치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직접 다스리시기 보다는 사람을 만들어 대신 다스리게 하셨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림의 권세가 주어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선악과 이야기도 의미를 갖는다. 선악과 이야기는 단순히 원죄 교리를 증거하는 본문이 아니다. 그 이야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그 통치를 위임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통치의 권세를 주셨지만 그 권세는 위임된 권세이기 때문에 반드시 위임하신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되어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권력의 남용이고 배임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대신 다스림'을 목적으로 지어진 사람은 그 존재목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선악과 이야기에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경우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경고가 주어진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는 바로 존재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의 비참한 결말을 보여준다. 이렇게 창조 이야기는 창조시부터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다. 

 

  창조 이야기에 이어지는 아브라함 이야기 그리고 이스라엘 이야기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방대한 구약을 차지하고 있는 이스라엘 이야기는 이스라엘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 목적을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시려는 이야기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게 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다. 그래서 장구한 이스라엘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교훈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그 결과 나라가 분열되고 급기야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에도 이스라엘은 이방의 지배 아래 고통스런 세월을 견뎌야만 했다. 아무 희망도 보이지 않는 암울한 시간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한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나사렛 예수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누구인지를 오직 복음서의 증거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복음서들은 일치하여 나사렛 예수가 바로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메시아라고 증거한다. 요한복음의 기자는 자신이 기록한 목적이 바로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게하려 함이라고 말한다. 메시아라는 호칭은 오직 이스라엘의 역사적 맥락안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메시아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의 왕이란 의미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란 말은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이란 의미다. 복음서는 바로 예수가 메시아 곧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믿게 하려고 쓰여졌다. 예수가 죽임을 당한 공적 죄목이, 비록 그것이 거짓이었지만, 유대인의 왕이었다는 복음서의 증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죽었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이 유대인을 대표한 죽음이었음을 의미한다. 복음서는 그 죽음이 예수가 힘이없어 불가피하게 당한 죽음이 아님을 말한다. 오히려 복음서는 그 죽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예수의 자발적인 순종의 결과였음을 강조한다.

 

  예수의 죽음이 유대인의 왕으로서의 죽음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이 불가피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자발적 순종이었다는 복음서의 증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의 오랜 불순종의 문제가 예수를 통해 한 번에 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죽었고 그 죽음은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순종의 표현이었다. 그렇다면 예수의 죽음은 이제 이스라엘이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게 최고의 순종을 드렸음을 의미한다. 예수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의 오랜 불순종의 문제가 일거에 해결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의 부활은 예수를 통해 드려진 이스라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이스라엘을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불순종하던 이스라엘은 예수와 함께 죽었고 순종하는 이스라엘이 예수와 함께 부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이다. 처음부터 복음이 이방에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이제 예수 안에서 탄생한 새 이스라엘은 더이상 민족적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복음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소식이고, 새 이스라엘은 이 복음을 믿는 모든 이방을 포함하게 되었다.

 

  이렇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옛 이스라엘의 죽음과 새 이스라엘의 탄생을 의미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이스라엘 이야기는 창조 이야기의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단지 선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통해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야기다. 바로 그 이스라엘 이야기가 예수를 통해 절정에 이르렀고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옛 이스라엘이 죽고 예수의 부활을 통해 새 이스라엘이 탄생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성취되는 결정적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새 이스라엘의 탄생이 창조목적의 완성 그 자체는 아니다.  이제 새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해 창조목적이 역사 가운데 이루어져 가야 한다. 그러므로 새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도 언제나 순종이다. 새 이스라엘은 당초 하나님이 창조시에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이 세상을 다스려나가야 한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순종했듯이 새 이스라엘도 이 세상의 왕으로서 순종해야 한다. 새 이스라엘을 통해서 실현되는 하나님의 통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의 실현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통해 이 땅에 임한다. 이것은 창조시부터 변하지 않는 만고불변의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