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구원이란 무엇인가? - 설교

메르시어 2023. 5. 14. 17:55

구원이란 무엇인가?

2017-08-01 16:10:30


 본문: 출애굽기 15장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에 성공한 후에 그 기쁨을 노래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찬송하는 장면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정말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대단히 드라마틱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 모세를 부르시는 장면부터 모세가 열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는 광경,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뒤쫒는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장면까지 모든 이야기들이 대단히 역동적으로 진행되어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렇게 극적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홍해가에서 모여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라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출애굽 이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러한 구원의 찬송 직후에 등장하는 일이 광야에서 물 부족으로 인해 모세에게 원망한 일입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광야의 쓰라린 생활입니다. 마실 것과 먹을 것이 전혀 없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 외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만 그들은 부단히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낫겠다는 말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구원이라고 말하면 분명 그것은 구원이 맞지만 구원의 결과가 황량한 광야 생활이라면 무슨 구원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정말 애굽의 압제 못지 않은 고생스럽고 암울한 삶이 기다릴 뿐이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내신 목적이 광야 생활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고생하라고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 분명히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에 이스라엘이 정착해서 복된 삶을 살게 하시려고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나온 것이나 광야 생활은 모두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 위한 수단이요 과정일 뿐입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을 누리지 못하다면 애굽에서의 구원이나 광야에서의 고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두가지 차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부정적 의미 혹은 수단적 의미의 구원이고 다른 하나는 긍정적 의미 혹은 궁극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에서 벗어난 일이나 광야에서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심으로 생존한 일 등은 모두 부정적 의미의 구원입니다. 즉 애굽에서의 압제라는 상황 혹은 광야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는 상황, 즉 부정적인 상황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물론 이것은 분명히 구원이 맞지만 이것이 궁극적인 의미의 구원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런 구원은 수단적 의미의 구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이나 광야에서의 생존은 결국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구원이란 말이지요. 그렇다면 긍정적 의미의 구원 혹은 긍극적 의미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요?  그것은 당연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은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믿음과 분투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더라도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믿고 분투하지 않으면 그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셨고  그 땅에서 복을 준비하셨지만 이스라엘이 그 땅에 들어가 그 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차지하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을 누리는 이것이 바로 궁극적 구원이요 긍정적 의미의 구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세 오경은 구원의 두가지 차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애굽이 없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지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출애굽은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이렇게 이 두가지 차원의 구원은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약이 보여주는 구원의 이 두가지 차원을 신약적으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신약에서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 아닙니까? 모든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래서 그 죄의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죄 사람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구약의 모세 오경의 구원 이야기에 비추어 보면 죄의 용서 혹은 죄의 권세로 부터의 해방은 출애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애굽의 압제에서 모세를 보내어 구출하셨듯이 하나님은 죄에 사로잡혀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을 자기 아들을 보내시어 죄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의 용서 혹은 죄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은 부정적 의미 혹은 수단적 의미의 구원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긍정적 의미 혹은 궁극적 의미의 구원은 신약에서 무엇인가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무엇을 위하여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신 것인가요?  신약에서 약속의 땅은 어디에 있나요? 우리는 흔히 이것을 내세의 삶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내세에서의 복된 삶, 물론 이것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목적을 단순히 내세에서의 삶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성경의 강조점은 이 세상에서의 구체적인삶에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압축하여 말하고 있지요. " 너희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분별하여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궁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적 구원이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한 죄의 용서는 궁극적 구원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한 수단적 구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애굽의 압제 아래 있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듯이 우리가 죄의 권세 아래 있디면 하나님의 백성 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그 반대로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만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광야에서 소멸된 출애굽1세대 처럼) 애굽에서의 구원이 아무런 의미가 없듯이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다웁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에  순종하여 살지 못하다면 우리가 이미 받았다는 죄의 용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구약이 보여준 이 구원의 두가지 차원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출애굽의 구원을 받았지만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소멸된 출애굽 1세대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결코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출애굽-광야- 약속의 땅으로 이어지는 성경의 구원 이야기는 구원이 과거의 한시적 사건이 아니라 과거-현재- 미래를 아우르는 통시적인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과거에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사랑 가운데 그 구원을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며 또한 그 구원이 미래적으로 완성될 것을 소망하는 가운데 기다려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광야에서 순종하는 삶을 훈련해야 했고 믿음으로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야 했듯이 예수의 은혜로 죄에서 해방된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기 위한 믿음의 분투가 반드시 요구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값없이 주어지지만 동시에 그 약속은 반드시 우리의 믿음과 분투를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