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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

메르시어 2023. 5. 14. 17:54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

2017-08-01 00:30:31


   마빈 해리스의 서적을 보면서 어느 한 문화인류학자의 생각의 깊이를 보면서 세상에는 이런 일이 있고,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의미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내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공간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렇게나 자세히 또는 필요 이상으로 설명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읽은 도서는 마빈 해리스가 전문적인 학자에서 학술적 영역에 가깝기 보다는 일반교양서적 중에서 다소 난이도가 높지만 그래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도서들을 읽었다. 

 

지금도 서평을 적고 있는 컴퓨터 책상 옆에 놓인 작은 서재에 <아무것도 되는게 없어>,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끼>,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작은인간> 이렇게 5권의 서적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마빈 해리스가 학자로서 제대로 고찰하거나 반박하거나 토론한 도서를 읽어본 적은 없었다. 분명 위의 5권의 도서도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인 내용으로 봐서는 충분한 가치가 있고, 현재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 대한 깊은 사고와 통찰을 요구하게 되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다고 하여 문화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진가를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정작 그의 학문적 깊은 영역에 다가가지 못함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게 된 도서가 문화유물론이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나는 그가 문화유물론적인 가치관으로 통해 인류학을 연구하므로 다소 마르크스주의적인 요소를 지닌 학자로 알았다. 분명히 관념론이나 합리주의 내지 계몽주의로 무장한 서구사회의 사고에서 마르크스의 등장은 엄청난 변화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관념으로 통해 물질을 만들어내는 플라톤의 철학에서, 물질이 인간의 사회를 변화한다는 유물론적인 가치관을 인류학에 반영했기 때문이다. 

 

솔직한 내 의견으로 전한다면 인류학의 주요 연구대상은 현대인보다는 차라리 원시민족 내지 문화의 발원지 및 소멸지에 대한 진상규명을 추구한다.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라는 현대사회의 인간보단 네안데르탈인부터 시작하여 원시인들의 문화에 더 가까운 연구를 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학적이고, 그 과학에서 생물학과 진화학적인 관점을 보자면 문화인류학에서 유물론적인 가치관은 필수불가결한 영역일 것이다. 과거 원시인들이 고대그리스 철학자마냥 현학적인 말로 철학을 논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성보다는 오히려 감성과 무의식적인 본능에 가깝게 움직였을 것이다. 생존이란 조건 속에서 가혹한 자연환경과 주변 맹수 및 위협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을 내던졌을 것이다. 지금의 인간에게 불의 발견이란 위대한 문화적 도구로 인해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 호우와 폭우를 피하고, 사자와 호랑이로부터 목숨을 지킬 수 있다. 문명을 가진 인간에게 자연이란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보다는 자신이 스스로 착취해야할 대상으로 변모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그런 착취의 최종 목적지는 결국 인간이 되어 버린 것이 슬픈 비극이다. 

 

왜냐고 물어보면 하루 몇 시간 노동으로 통해 며칠을 빈둥빈둥 거리며 즐길 수 있는 원시부족에 비해 우리가 과연 행복한 존재라고 되물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각종 미디어나 매체로 통해 자신의 시간을 즐기고 있으나, 오히려 그것에 의지하고 집착할수록 자신의 존재적인 확실성은 아주 조금씩 무뎌져 간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나, 인간은 결국 자신의 속한 어느 특정 사회나 영역에 맞출 수밖에 없는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라고 했으나, 적어도 정치학적, 사회학적 동물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것에 대한 철학적 사고는 대다수 사람에게 지겨운 시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이런 인간이 살아가는 역사란 공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학에서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을 모두 소유한 시간적, 공간적 영역일지라도 그것은 개인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이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한 없이 생명이 짧고(어떻게 보면 매우 길수도), 약한 생명체다. 우리에겐 산 위의 거대한 소나무처럼 몇 백 년을 살 능력도 없고, 늙으면 병약해서 빨리 죽게 되고, 도구도 없으면 맹수나 자연재해(호우, 지진, 태풍 등)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인류라고 생각해보자. 인류는 문화를 어디서부터 정하면 좋을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몇 천 년, 몇 만 년, 혹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살던 몇 백만 년 전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살아가던 시기는 짧아도 인류는 영원할 것이다. 인류학을 연구한다는 점은 먼 과거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앞으로 열릴 미래까지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과연 그런 모습인지 문화유물론을 보면서 생각나는 점은 인류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인간들의 가진 여러 가지 모습들을 연구하고 검토하고 비판하여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 가는 점이다. 마빈 해리스의 <문화유물론>을 읽다보니, 이 책이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이란 새로운 대안을 논하는 도서이기도 하나, 그 이전에 이 도서는 마치 사상에 대한 논쟁과 가까웠다. 

 

2부의 다른 연구전략들을 살펴보자. 마빈 해리스는 분명 활발히 학술활동을 할 시기에 많은 도전과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문화유물론을 추구하는 이유는 문화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보려는 문화과학(文化科學)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추구하는 목표에서는 결코 일방적이고, 비과학적인 사고는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비판하는 다른 연구전략은 그런 점들을 명확히 밝혀두고 있었다. 5장부터 11장까지 각 해당되던 사상적인 분류체계를 보면 사회생물학과 생물학적 환원론, 변증법적 유물론, 구조주의, 구조론적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적 관념론과 인지적 관념론, 절충주의, 반계몽주의이다. 

 

여기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역시 구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이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넘어오면서 마르크스의 학문, 정치, 사상은 모든 영역에 깊숙하게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석하자면 인류학에서 위대한 공로가 있는 사람 중에서 분명히 마르크스를 뽑아도 무방할 정도다. 왜냐하면 위에도 언급했지만, 기본적으로 서구사회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에 의해 완벽하고 합리주의적인 이성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구사회의 가려진 뒷모습에서 이성과 합리란 없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사고에 항상 그런 관념으로 무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메리카 대륙에 출발한 영국인들이 그렇게 인디언을 학살할 이유도 없고, 에스파냐와 같은 무적함대국가들이 중앙 내지 남아메리카 주민들을 무참하게 살해할 이유도 없다. 

 

모두 눈에는 비서구화된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대륙의 존재들은 미개하고 개선할 수 없는 존재이고, 때에 따라서는 노예로 부리고, 때에 따라서는 학살의 즐거움이 되는 도구로 되었다. 인간의 이성이란 그런 것인가? 어차피 이성은 감정 중의 하나라는 말이 있듯이 극단적 배타적인 사고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보여준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간악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왜곡시키며, 그런다고 너무 깊이 들어가서 그것에 대해 객관적, 과학적 사고를 유지하지 못하면 학문적 가치가 없다. 과학적인 사고로 통한 이성이 납득되지 않으면 누구에게 그런 사고의 결과물을 전달할 수 있냐는 말이다. 

 

물론 다양한 구조와 전략과 대안에서 여러 가지 이론과 해결책들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다. 물론 이 책에서 마빈 해리스는 그런 부분들을 열렬히 비판하고 여기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예전에 나는 이런 책을 본 기억이 있었다. 에드먼드 리치(미국 사회인류학자)의 <레비 스트로스>라는 것을 도서를 말이다. 이 책에서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라는 프랑스 구조주의-인류학을 창시한 학자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었다. 분명 <문화유물론>과 <레비 스트로스>에서 위대하고 천재적인 학자의 능력과 업적은 인정했으나, 한편으로 매우 거센 비판도 있었다. 

 

그의 논리적인 서적이라고 하는 인류학도서에는 치명적 실수가 있으니, 그것은 너무 구조주의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나에게 던졌다. 즉, 실증적인 부분이 너무나도 취약했다. 어떤 부족들에 특성들을 각각 모아 하나로 정리했는데, 사실 현지조사 결과 너무 다른 결과를 보인 것이다. 현지조사는 고증해야하고 과학적이고 구체적으로 밝힐 인류학에서 매우 치명적인 답을 내리기 때문이다. 진실을 그대로 밝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특정 시점에서 편의를 위해 그렇게 속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여 이 책은 문화인류학에서 문화유물론에 대한 도서이지만, 보는 내내 사상과 철학에 대한 토론에 가까웠다. 따라서 전반적인 부분으로 이해가능해도 세세한 부분까지 이해하기란 무리였다. 모든 인류학적인 검토시점을 철학과 사상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비판 검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구조주의 인류학 비판은 단순히 레비 스트로스에 적용될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상 영역까지 이어진 것이라 점이다. 게다가 구조주의에서 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페르디난 드 소쉬르의 언어학과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다.

  

마르크스의 영역이 얼마나 위대한지, 구조주의 자체도 마르크스의 뿌리가 있고, 이 책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마르크스의 연구 분야, 구조론적 마르크스주의까지도 포함한다. 구조론적 마르크스주의는 어떻게 보면 문화유물론과 비슷하고 어떻게 보면 구조주의와 비슷하다. 둘 다 프랑스가 주된 사상적 학문이란 점에서 보면 당연하다. 그렇지만, 왜 그런지 몰라도 모두 문화유물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양이다. 마빈 해리스는 문화유물론에서 마르크스의 업적을 인정한다. 모든 사물을 관념보단 물질이라고 하던 유물론적인 영역이 있었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검토시점을 주었다. 

 

특히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많이 준 인물로는 아리스토텔레스, 아담 스미스, 리카도, 존 스튜어트 밀, 칸트, 스피노자와 같은 인물들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뽑자면 헤겔이 있을 것이다. 변증법적 논리로 통해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만들었고, 그의 젊은 시절에 청년 헤겔파였다. 그렇지만, 마빈 해리스는 이렇게 정리했다. “헤겔은 마르크스 등 뒤에 탄 원숭이다”라고 말이다. 헤겔이 분명 변증법적 논리로 통해 당시 독일의 쇼펜하우어와 더불어 유명한 철학자고, 당대 쇼펜하우어보다 더 많은 문하생들이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빈 해리스는 헤겔의 영향은 그저 부수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르크스의 모든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비판도 하였다. 마빈 해리스는 마르크스와 더불어 인구론을 만든 맬서스의 학문도 받아들였다. 

 

마르크스는 맬서스의 학문을 경시했지만, 마빈 해리스는 두 가지를 받아드린 것이다. 모든 것은 유물론을 받아들이되, 모든 유물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점이다. 마빈 해리스는 문화인류학자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문화상대주의를 경계했다. 문화상대주의를 모두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에틱(etic)과 에믹(emic)이란 용어로 통해 정확하게 보자는 것이다. 모든 것은 에틱으로 시작하여 에믹으로 판단하려는 그의 강력한 제안 속에 문화인류학에 대한 과학적 사고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쿠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을 예를 들어보듯이 어느 살인사건에 4인의 시각에 통해 모든 것이 정답이다 혹은 어느 한 가지만 정답이라고 하는 에틱적 사고 즉, 그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것보다는 각 입장을 통해 보고 객관적인 상황으로 판단하고자 하는 에믹적 사고를 추구한다. 결국 모두 정답이거나 어느 것만 정답이라고 하는 것은 정답이라도 정답이 아니다. 그렇지만 에믹이라고 좋은 것만은 아닌 것이 모두 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답은 무엇이고 어떻게 보자는 것일까? 적어도 그런 일방적인 주장에 빠져 논리를 잃지 말자는 부분에서 상당히 공감이 간다. 

 

문화유물론에서 마빈 해리스가 추구하는 점은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에게 마르크스의 존재는 소중해도 마르크스주의자와는 다른 부분이다. 아니 마르크스가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그것은 아니라고 부정하듯이 그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라는 철학자는 <철학에 관하여>란 도서에 이렇게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정의하려고 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으로서 존재하여도 철학으로 생산한 적은 없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관념론과 유물론이란 두 가지의 영역을 끊임없이 대립해야 한다고 했다. 

 

오히려 마빈 해리스의 입장에서 루이 알튀세르의 입장이 나에게 강한 느낌이 온다. 과연 그렇구나 하는 느낌은 마빈 해리스는 단지 왜 그렇게 하였을까 라고 하는 과거형이 아니라 왜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에 대한 현재형에 치중하고 있다. 그는 원시민족이 소유한 문화의 파괴와 지구환경 파괴를 매우 염려하며, 비판하였다. <문화유물론>에 등장한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까지는 아니어도(이 책에선 그의 업적은 언어학적 영역이다), 내가 처음 접한 다른 도서를 봐도 그가 제시한 문화의 모순과 판독에서 분명히 소비와 착취로 일삼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단순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증거와 자료로서 보자는 것이다. 마빈 해리스의 서적에서 인도의 암소숭배는 매우 자주 나오는 내용이다. 암소숭배는 내가 살아가는 21세기에도 존재한다. 그가 서거했던 2001년 이전인 20세기에 나온 이론인데도 유효하다. 단지 힌두교라기보다는 소가 없으면 농민들이 농업으로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고, 소가 없으면 우유와 버터 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트랙터가 도입될 경우 대자본을 지닌 자에게 모든 농민들은 토지를 잃고, 도시로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의 현재를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보면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노동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살던 자보단 자신과 그들의 부모들이 시골에서 이주해온 사람이란 점이다. 가혹한 노동과 열악한 주거환경, 카스트제도라는 신분제의 영구화에서 착취라는 것들을 의심과 비판의 대상보단 오히려 경배해야할 관념으로 변했다. 이 책의 6장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이런 문구가 인상 깊다. 

 

“문화유물론자들은 자본주의와 국가사회주의가 어떻게, 또 무엇으로 변화할 것인지에 관한 정치적 방침을 공유하고 있지 않지만, 문화유물론은 전략을 추구함으로써 불가피하게 현상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기여한다. 역사시대, 선사시대를 통하여 지배계급은 항상 사회생활을 신비화시킴으로써 실제의 혹은 잠재적 적들에 대한 첫 번째의 방어선으로 삼았다. 현대의 정치적 맥락에서는 관념론과 절충주의가 지배계급의 존재자체를 호도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빈곤, 착취, 환경악화의 책임을 착취자로부터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돌린다. 문화유물론은 문화관념론과 절충주의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이 전략들은 왜곡된 비효율적인 분석을 통하여 전쟁, 빈곤, 착취의 원인을 이해할 수 없도록 하기 때문이다. 문화유물론은 이와 똑같은 정치적, 과학적 이유 때문에 변증법적 유물론에 반대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미래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는 확신을 조장함으로써 착취에 대항하는 투쟁을 촉진시키려 한다. 그렇지만 같은 의미에서의 확신이 새로운 지배계급의 착취를 영속화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즉 새로운 지배계급이 국가체계의 착취적 측면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끔 호도하는 것을 정당화해 주는 정교한 이데올로기를 제공해준다. 실증주의 인식론을 멸시한다면 변증법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은, 최고로 오도된 분석이다. 문화유물론은 정치적 편의 때문에 사회과학의 경험론적, 조작주의적 성실성을 억압하는 사회에서는 결코 착취를 없앨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경험론적, 조작주의적 비판이 유지되지 않고는 이른바 민주주의라는 것이 새로운 형태의 자유인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노예제인가를 우리는 결코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 문장은 마치 자크 랑시에르, 슬라보예 지젝, 알랭 바디우와 같은 석학들이 저술한 <민주주의는 죽었는가>에서 문제제기한 부분을 이미 제기한 느낌이었다. 문화인류학이란 분야가 결국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과학적 검토까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민주주의라는 영역에서 자유인가? 노예인가? 라는 담론은 지금 우리 한국이나 또는 세계 어디에 가도 마찬가지의 고민거리다. 문화인류학에서 그 중에서 문화유물론은 단순히 인류를 연구하는 것에 끝을 맺지 않는다. 마빈 해리스가 제기한 인간이 인류이고, 인류가 인간이란 점에서 과거의 모습과 현재에 이어지는 그 과정을 담론하여 우리가 어떤 삶을 찾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추구하는 문화인류학자이다. 본래 그도 끌로드 레비 스트로스처럼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관념으로 갇히기보단 차라리 그 관념을 벗어나 현실적인 문제를 보고 의문을 제기하여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철학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