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슬라브 볼프의 신학
행동하는 기독교- 미로슬라브 볼프
2017-05-24 18:22:27
신념
1. 이주
저자는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환대하고 공평하게 대하시므로 우리 사회도 이주자들을 기꺼이 받아주고 그들에게 공평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예수님도 이주자였고 나그네였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폭력이나 가난으로 인해 본국에서 내몰린 이주자들을 보살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이주에 관한 기독교적 공적 참여의 틀이 되는 가치는 포용과 정의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민에는 안보와 문화적 통합성을 위해 합법적인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특히 끌어오는 이주보다는 내몰린 이주에 우선순위와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민 정책에서 난민들이 최우선 순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2. 치안
저자는 치안의 목표는 국민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모두가 번영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경찰력은 무엇보다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자들의 보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저자는 미국에서 백인보다 흑인이 경찰에 의해 죽임을 더 많이 당한 사례를 제시하며 경찰에게 허용된 강압적 권력이 엄청나게 왜곡될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3. 형벌
저자는 그리스도가 보응을 종식시켰으므로 형벌이 범죄의 보복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범죄자에 대한 처벌의 목표는 그들이 속한 지역사회와의 화해가능성을 촉진시키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범죄와 형벌에 대한 성찰의 출발점으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과 예수님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죄인으로서 범죄와 형벌을 판단한다는 것과 죄를 인식이 곧 처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저자는 좋은 사법제도는 범죄자의 과거를 처리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국가가 범죄를 규명하고 판단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범죄자를 응징하는 것은 기독교적 시각에서 옳지 않으며 범죄자를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미래를 열어주는 교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그동안 사법제도가 주로 처벌을 응징의 문제로 다룸으로서 왜곡시켜왔다고 비판하면서 이런 맥락에서 사형제도나 가석방이 없는 종신형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특히 형벌제도가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지적하면서, 이런 불공정성은 정의를 왜곡하는 것이며 나아가 범죄자나 희생자 그리고 사회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감옥은 영리에 치우치기 쉬운 사기업이 소유하거나 운영해서는 안 되며, 벌금이 지방정부의 예산으로 사용되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한다.
4. 전쟁
저자는 전쟁은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만일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 전쟁이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례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것은 불가능하다. 저자는 기독교인들은 역사 내내 자신의 신앙보다 나라를 더 중시하는 비참한 경향을 보였고, 그 결과 전쟁들에 참여하거나 지원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평화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므로 세상은 평화의 세상이어야 한다고 말하며 평화는 창조세계의 기본 사실이며 세상의 가장 심오한 실재인 동시에 만물이 갈망하는 역사의 목표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정당방위조차도 전쟁을 정당화하지 못하며, 전쟁은 평화를 목표로 하고 불의를 처리할 승산이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경우에만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현실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은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전쟁에 반대할 수밖에 없고 이런 맥락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는 정책을 옹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5. 고문
저자는 피해자와 고문자 모두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고문을 그리스도인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피조물에게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가치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는 심문에서 어느 정도의 강압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한다. 다만 그 강압이 심문받는 자들을 인간 이하로, 단순한 처리대상으로 취급하여 심각하고 반복적은 해를 가했다면 그것은 고문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테러와 싸우기 위한 고문을 찬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자는 고문을 허용하는 것은 공적 삶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신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증거에 의하면 고문은 심문에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 저자는 고문 외에 다른 수단으로 우리 사회를 상당한 피해로부터 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우리는 (고문을 허용하는) 잘못을 범하기 보다는 피해를 입어야 한다고 말한다.
6. 종교와 무종교의 자유
저자는 기독교는 박해받는 종교에서 출발했지만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면서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음을 지적한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은 신자들이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다른 종교는 물론이고 이단이나 변절자로 여겨진 이들에겐 자유를 박탈하는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였다고 말한다. 저자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버릴 자유, 개인적 공적으로 신앙에 따라 살아갈 자유를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자유를 자신들에게만 국한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런 자유를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이 비그리스도인이 되어 그렇게 살 자유를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 신앙을 육성하려고 정부의 강압적 권력에 의지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용기가 아니며 그리스도인은 종교의 자유와 동등한 존중을 구현하는 정치제도를 육성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다원적 민주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앙이나 철학에 따라 인류번영과 공공선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그 비전을 공적 삶에 내놓을 권리 그리고 다른 모든 사람과 동등하게 그렇게 할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그 비전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아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성품
1. 존중
존중이란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의 정의되는데 저자는 스티븐 다월이 제시한 대로 평가존중과 인정존중이란 두 종류의 존중을 구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평가존중이 누군가의 업적이나 덕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존중하는 것이라면 인정존중은 누군가의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여 존중하는 것이다. 저자는 평가존중에는 위험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무엇이 존중할 가치가 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결정할 때 근거로 삼는 가치관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성경에서 예수님이 과부의 작은 헌금을 더 높게 평가하신 일이나 하나님이 세상의 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여 세상의 지혜롭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는 바울의 말을 예시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의 가치관을 진정한 가치를 평가하는 척도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특별히 평가존중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중요한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인간이 가진 인간성 때문에 그들이 받아 마땅한 인정존중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평가존중보다는 인정존중이 중요한 공적 덕목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다원적 사회의 공적 삶에서 나타나는 대립성향은 종종 평가존중과 인정존중 둘 다를 방해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을 적절하게 평가존중하지 못하면 곧바로 그 사람에 대해 인정존중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다. 저자는 특히 이런 위험은 상대가 잘못을 범했을 때 극단적으로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그 사례로 범죄자를 인격으로 보지 않고 오직 응징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경우를 제시한다. 저자는 이렇게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보내심을 받은 구세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공공선을 위한 건전한 공적 참여는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 존중 (특히 인정존중)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결론짓는다.
2. 긍휼
저자는 긍휼은 분명 예수님께 중요했고, 그것은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공적 참여를 할 때도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공적 영역에서 올바르게 활동하려면 올바른 감정이 필요한데 그런 감정 중 하나가 긍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고통과 어려움이 특징인 세상에서 신앙에 충실하게 사는데 꼭 필요한 감정이 긍휼이라고 말하며, 공적 삶의 상당 부분이 고난과 박탈에 대응하는 것이므로 긍휼은 신앙에 충실한 공적 참여에 꼭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긍휼은 단지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포함하므로, 진정한 긍휼은 우리에게 가능한 모든 수단으로 그를 돕게 만든다고 말한다. 저자는 긍휼의 오작동 혹은 왜곡에 대해서도 말하며 눈앞에 보이는 이들에게만 긍휼을 적용하는 일, 다른 사람의 고통을 사소하게 보는 일, 자기 잘못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배제하는 일, 개인들만을 긍휼의 대상으로 제한하는 일 등을 예시한다. 저자는 긍휼이란 덕목은 많은 지혜를 요구하며 쉬운 답은 없다고 말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의 상황에 직면하여 성령의 인도에 의지하여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발견하고 최선을 다해 분별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맺는말
볼프는 신앙공동체(교회)는 신자들이 공통된 신앙에 함의된 내용들을 함께 심사숙고할 때 공동체로서 번영하며, 시민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성실하게 공동선을 추구하며 공적 질문들을 논의할 때 번영한다고 말한다. 그는 신앙공동체와 시민공동체가 모두 진정한 번영을 목표로 용기, 겸손, 정의, 존중, 긍휼의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장차 도래할 하나님나라와 비슷해지도록 이끌어 가시며 성령을 통해 온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볼프는 신앙공동체와 시민공동체 그리고 이 세상의 번영은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삶에 맞추어 조정하고, 세상에서의 그분의 사역에 참여하며, 이 부르심에 반응하는데 달려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해설- 김회권
김회권은 행동하는 기독교는 타계주의적 개인구원과 교회중심의 신앙 활동에 매몰된 복음주의의 시야를 넓혀주는 책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 책의 중요 논지를 기독교 신앙이 개인구원에 그치지 않고 온 세상 사람들의 삶과 역사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공적 세계관이라고 요약한다. 그래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공적 의사결정과 정책집행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에 맞게 정책을 분석하고 판단하여 의사 표시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회권은 이 세상은 하나님나라에서 이뤄질 이상적 사회를 앞당겨 실험하는 실험실이며 따라서 인간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얼룩진 세상이 하나님나라에 근접한 사회가 되도록 애쓰는 것이 선교의 궁극적 목표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 책의 으뜸가는 장점이 개인구원과 교회중심의 신앙생활에 매몰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사회라는 또 다른 사명의 장을 보여주는 점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 책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원주의적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신앙 정체성을 견지하며 공적 역에 참여할 수 있음을 잘 제시한다고 평가한다. [끝]
공적 신앙의 실천 그 토대- 미로슬라브 볼프
2017-05-25 02:32:41
기독교 신앙에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공적 영역이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개인적, 집단적 삶 뿐 아니라 공적이고 정치적인 삶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영역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가 중심과 기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예수의 삶과 말씀은 틀림없이 공적이며 심지어 정치적이다. 예수의 사역으로 그 나라가 왔으므로 예수를 얻지 않고는 그 나라를 얻을 수 없다. 또 그 나라를 얻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다. 따라서 그분의 삶 전제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인간 삶에 나타난 여러 타락들에 맞선 일련의 승리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승리였다. 승리하신 그리스도는 이제 살아계시며 성령을 통해 세상에서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은 새로운 시각으로 그분의 통치를 확인하고 확립해 주었다. 그리스도의 사명은 여전히 죄에 항거하고, 세속 권력의 타락과 가식의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그 나라를 살짝 맛보게 하시는 것도 그분의 사명이다. 예수가 가져오신 그 나라는 이 세상의 정권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 나라는 모든 역사와 모든 창조세계의 궁극적인 목표이며 만물이 이르러야 할 충만의 모습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실 형언할 수 없는 미래다. 그 나라는 최종적이고 보편적일 뿐 아니라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 나라는 우리가 보통 공적영역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함하지만 그것을 능가한다.
칼 바르트는 교회와 정치사회의 관계에 그리스도의 보편적 사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미지를 제시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두 동심원의 중심과 비슷하다. 안쪽의 작은 원은 그리스도가 중심임을 아는 기독교 공동체이고 바깥쪽 큰 원은 그리스도가 중심임을 모르는 시민공동체다. 바깥 원에서의 그리스도의 다스림은 안쪽 원에서의 그리스도의 다스림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다르다. 기독교 공동체는 공적으로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라는 테두리에서만 공적 참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시민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적 참여를 통해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공적 영역에서 나타나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바깥 원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 삶 전체에서 그분을 따르고 그분이 일하시는 곳 어디에서든 성령의 능력으로 일하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공적 참여를 하려 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인 성경으로 향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님, 오늘날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그 예수님이 우리의 공적 참여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자신의 삶과 죽음과 부활로 하나님나라를 가져오셨지만 그 나라는 역사의 끝날에야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그 나라는 지금 실재하지만 아직 오지 않았다. 그 나라가 온전히 실현되는 과정은 역사 안에서 점차 진보하는 형태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땅에서 점진적으로 확장되는 나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바라보는 우리의 기본자세는 소망이어야 한다. 곧 그리스도로 시작되어 성령을 통해 지속되고 있는 그 나라의 사역을 하나님이 완성하시리라는 열렬한 기대여야 한다. 물론 그 소망은 그저 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소망하는 그 나라의 실재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그 소망이 그들 삶의 성격과 계획을 결정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그 나라를 도래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 세상에 그 나라의 성격을 일부분드러낼 수는 있다.
기독교 신앙은 공적 신앙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공적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치적 종교라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는 오히려 그런 정치적 종교를 무너뜨리셨다. 바로 그 동일한 그리스도가 우리가 공적으로 참여하는 신앙의 시작이다. 우리는 그저 우리 밖에 계신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분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구체적으로 드러내야 한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통치가 그렇듯이 삶의 모든 부분과 영역을 포괄한다. 그리스도가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아 그 나라를 세우시는 목적은 인간과 온 창조세계의 번영이었다. 우리가 모두가 지음받은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것이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가 가져오려 하셨던 풍성한 삶의 완벽한 모습이다.
그리스도의 통치와 성령의 임재의 목적은 인간의 번영이다. 번영이란 개념의 틀이 될만한 세가지 측면을 삶을 잘 이끄는 것, 잘 풀리는 삶, 그리고 기분좋은 삶이다. 삶을 잘 이끄는 것은 당신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을 가진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잘 받아들이고 바른 태도를 갖고 제대로 판단하고 올바로 행동하는 문제다. 그리스도는 잘 이끄는 삶을 사랑이라는 주제 아래 요약하셨다. 잘 풀리는 삶이란 한 사람의 삶이 정말 좋은 상태를 의미한다. 잘 풀리는 삶은 상당부분 우리의 통제력을 넘어서는 환경에 달려있다. 잘 풀리는 삶이 의미하는 바는 히브리어 샬롬의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기분 좋은 삶이란 인간이 누리는 번영의 정서적 영역을 가리킨다.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는 세상과 하나님을 향해 정서적으로 적절하게 반응하는 것은 번영을 누리는데 필수적이다. 번영을 누리는 삶의 정서는 기쁨이다. 번영의 이 세측면은 각각 별개이긴 하지만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 각 측면은 선순환이나 악순환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그러한 순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삶을 잘 이끄는 것이다. 이는 다른 두 측면과 별개는 아니지만 그 순환에서 가장 결절적인 지점이다. 그리스도는 삶을 잘 이끄심으로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실 뿐 아니라 실제러 사람들을 그분의 풍성한 삶으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들이 번영하도록 힘을 주신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내시는 성령은 인간이 번영을 누려야 할 모든 측면에서 열매를 맺으신다. 성령의 열매 이것이 우리가 공적 삶의 모든 측면에 참여할 때 목표로 삼아야 할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공적 참여를 위한 기준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공적 영역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지 분별하는 과정을 어떤 글을 읽거나 해석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글을 잘 읽으려면 문맥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듯이 공공선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참여에 관해서는 두 가지 맥락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는 성경 안에 있는 복음서 이야기라는 맥락(정경적 맥락; 성경해석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이라는 맥락, 곧 특정한 상황이다.(현대적 맥락; 상황해석을 의미할 것이다) 정경적 맥락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언에 비추어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읽는 일과, 성경 전체에 비추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의 증언을 읽는 일 사이를 왔다 갔다한다는 의미다. 성경의 어떤 부분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언 사이에 분명하게 갈등이 생길 때는 후자가 우위에 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약성경의 증언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 두어야 한다. 이 사실을 잊으면 예수 그리스도가 공공선에 관련한 판단과 참여의 기준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오해하게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가 공적 영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분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황이 복음서가 나온 세상과 복음서가 처음 전해진 사회와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고, 그런 차이가 우리의 판단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분별해야 한다. 성경의 세상과 우리의 세상 사이를 오가는 쉽고 단순한 규약은 없다. 그것은 실제적은 지혜의 문제다. 불확실성과 위험이 가득한 일이며 성령을 깊이 신뢰하고 그분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일이 필요하다. 현대적 맥락의 세가지 특징은 민주주의적 이상의 인기, 복잡한 사회체계의 출현, 그리고 기술의 놀라운 발전이다.
이러한 정경적 맥락과 현대적 맥락을 염두에 두고 공적 참여 방법을 분별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시민 인권운동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 킹을 생각해 보자. 그의 세상에 대한 비전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는 불의한 사회상황을 변화시키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사랑이라는 기독교 교리를 불의를 맹렬히 비난한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의 맥락에서 읽어야 함을 알았다. 그것은 사랑으로 압제자를 회심시키려는 추구이기도 한 정의의 추구였다. 킹은 성경의 위대한 독자만이 아니라 20세기 중반 당시 미국 상황을 해석한 거장이기도 했다. 그는 미국이 국민주권에 열심을 내고 있었기에 어떤 그룹이든 구조적으로 배제하거나 억압을 정당화하는 일이 약해졌음을 알고 시위의 합법성을 제시했다. 또한 킹은 미국의 인종차별은 법의 문제만도 아니고 경제적 차별이나 문화적 관습 만의 문제만도 아니고 이 모든 것이 결합된 문제임을 감지했다. 그래서 시민인권 활동가들은 단지 새로운 법 제정만을 위해서 캠페인을 벌이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차별적 사업체들에 대해 불매운동을 일으켰고 흑인들에 대한 체계적 인종차별 관행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가두 시위를 했다. 또한 킹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이자 기준으로 삼는 공적 참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헌신할 뿐 아니라 어떤 성품 형성을 요구함을 알았다. 그러나 신앙에 충실한 공적 참여는 일련의 덕목, 그리스도를 닮는 성품 이상을 요구한다. 우리는 공적으로 행동할 때마다 어떤 질문, 이슈, 위기, 문화적 동향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이런 특정 이슈에 대해 그들의 믿음에 수반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야 한다. 요구되는 입장이 명확한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그 이슈들에 대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열렬하고 장기적인 논의가 보여주듯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직면하는 대부분의 이슈는 모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