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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 그리스도

메르시어 2023. 5. 14. 17:04

주 예수 그리스도

2017-04-19 19:31:36


  나사렛의 한 유대인 청년 예수에게 붙은 호칭은 그의 고유명사가 되어 오늘날 우리는 그 분을 " 주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한다. 이 호칭은 예수는 주님(kyrios; 퀴리오스)이시며 예수는 그리스도(Christos; 메시아)라는 의미다. 당시 로마시대에 퀴리오스는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메시아는 유대교가 대망하던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왕이었다. 그러니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예수는 황제요, 왕이라는 고백이었다. 다시 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황제를 숭배하던 로마시대에 로마의 황제가 왕이 아니라 예수가 왕이라는 고백이며 동시에 예수는 유대인들이 대망하던 바로 그 종말론적 왕이라는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고백은 단순한 종교적인 고백이 아니라 대단히 정치적인 고백이었던 셈이며 황제를 숭배하던 로마시대에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곧 정치적인 반란을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왕이라고 고백하였을까?  예수 당시 1세기 유대교에는 메시아 운동이 활발했고 자칭 타칭의 메시아들이 많이 등장해서 로마에 대한 정치적 반란을 도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마도 예수도 이런 메시아들 중의 하나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 다니며 여러 이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았지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순간까지도 예수를 당시 1세기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로 믿었던 것 같다. 예수가 3번에 걸쳐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과 다시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은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거나 다시 살아나는 메시아는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건져내고 이스라엘을 열방에 뛰어난 나라로 만들 정치적, 군사적인 왕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제자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고 제자들은 예수를 떠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기대하지도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정작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었고 제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예수 부활에 대한 최초의 증언자가 되었음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제자들은 여인들의 부활 증언을 물론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부활한 예수를 보고도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예수가 이전에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은 후 다시 살아날 것이란 말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그들이 이전에 가졌던 메시아관은 다시금 수정될 수 밖에 없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부활을 믿게 되었다고 해도 부활 그 자체가 그들에게 새로운 메시아관을 심어준 것은 아닐 것이다. 만일 3년의 기간동안 예수가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고 보여준 말과 행동이 없었다면 그들은 부활이 지향하는 새로운 메시아관이 무엇인지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되면서 이전에 예수에게 보고 배웠던 이야기들을 다시 회상하게 되었을 것이고 예수가 누구이신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례 요한을 이어 예수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고 그 두 사람이 선포한 화두는 하나님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이 그 임박한 나라를 준비하는 자로서 그런 선포를 했다면 예수는 그 나라의 왕으로서 그런 선포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나라가 임박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자신이 그 나라의 왕으로 왔다는 선포를 의미한다.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모두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왕이 오시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그 선포에 대한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었다. 당시에 그 말을 듣는 자들은 모두 그렇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를 그 나라의 왕, 곧 메시아로 믿었고 그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할, 다윗과 같이 위대한 정치적, 군사적 왕이었고 예수를 좇던 제자들도 이런 메시아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신 분이시며 여러 가르침과 이적을 통해서 자신이 바로 그 왕임을 암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드러내셨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나귀를 탄 모습이나 성전을 심판하는 행동은 모두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을 드러내는 명시적 행동이었다. 결국 예수가 죽임을 당하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고 십자가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써붙인 것은 그의 죽음이 대단히 정치적인 죽음이었음을 보여준다. 

 

   나사렛의 한 유대인 청년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선포했고  주장했으며 그로인해 자신에게 죽음이 불가피하게 닥칠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1세기 유대 사회에서 이런 메시아들이 많이 등장했고 그들은 모두 로마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예수는 비록 다른 메시아들과 달리 폭력에 호소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주장은 이미 충분히 정치적인 주장이었고 로마법에 의해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다. 예수와 다른 메시아들의 차이점은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활에 있다. 다른 메시아들은 살아나지 못했지만 예수는 살아난 것이다. 만일 예수가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도 당시의 다른 메시아들처럼 기억에서 사라지고 역사에 묻혀버렸을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그가 진짜 메시아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였던 것이다. 부활을 통해 예수는 진짜 메시아로 선포된 것이다. 이렇게 부활이 예수가 왕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라면 부활은 곧 그 왕이 다스시는 나라가 도래했음을 의미할 것이다. 왕이 없는 나라가 없듯이 나라가 없는 왕도 없다. 예수가 왕이시라는 선포인 부활은 예수가 왕으로서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드디어 도래했음을 의미한다. 왕이 귀환하신 것이다. 왕의 귀환은 곧 그  나라의 도래를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이후 이스라엘을 오래 떠났던 왕이 이제 돌아오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떠나셨고 그들을 이방의 압제에 붙이셨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자신들을 떠나신 왕이 다시 돌아오실 것을 기대했고 그것이 바로 메시아 대망이었던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는 철저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였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서 드러난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다. 그런 메시아를 뛰어넘는, 그들이 한번도 상상한 적이 없던 놀라운 메시아였다. 그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왕이었다. 그렇다고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포되신 분이다. 그렇기에 그는 온 세상의 왕이신 것이다. 원래 이스라엘은 온 세상을 대표해서 하나님 앞에 세워진 백성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하려함이란 말씀에서 잘 나타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천하만민에서 복을 주려하심이었다. 그래서 애초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일개 부족신이 이니었고 천지를 지으신 분이시요 천하만민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신 분으로 선포된 것이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온 세상이고 온 피조세계이지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았다. 다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이 지으신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경륜을 시작하시고 펼쳐오신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셨고, 이것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떠나셨다가 이제 다시 돌아오신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왕이셨으며 그러므로 처음부터 온  세상의 왕이셨던 하나님이 이제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역사 가운데 다시 돌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예수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하나님의 말씀이며 동시에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예수의 신성과 선재성에 대한 이런 고백은 단순히 그가 신적인 존재라는 고백 이전에 그가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왕이요, 온 세상의 왕이심에 대한 고백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가 이런 분이신 줄 알지 못한다. 빛이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왕이심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필요한 것이고 이런 목적으로 세워진 사람들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이 다스릴 백성으로 새롭게 세우신 그 나라의 백성을 대표하는 최초의 씨앗들인 셈이다.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을 믿은 자들이 예수가 세운  새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민족적 경계를 넘어선 천하만민으로 구성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탄생했고 지금도 탄생하고 있으며 예수는 그 나라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신 것이다. 그러니 복음이란 예수가 왕이시란 소식, 이스라엘을 떠나셨던 그 왕이 예수 안에서 다시 돌아오셨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부활은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는 신적인 증명이 된 것이다. 부활이 그가 왕이심을 증명하는 선포라면 그의 죽음 역시 예수가 왕이심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자기 백성을 위해 피를 흘린 것이고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왕이기 때문에 죽었고 왕으로서 죽었다. 그의 죽음으로 그는 자기의 새로운 백성을 창조했다.  그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났던 천하만민을 위한 왕의 죽음이었으며 자기 백성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었다. 바울이 말한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는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이제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것이다. 예수는 죽고 부활함으로 왕이 되신 것이 아니라 처움부터 왕이셨던 분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 왕으로서 오셨고 왕으로서 가르치셨고 왕으로서 죽으셨고 왕으로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왕으로서 지금 다스리고 계신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셨다. 그러므로 예수는 우리 왕이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왕에 대한 고백은 당연히 백성으로서의 순종을 포함한다. 하나님나라는 왕이신 예수의 통치가 그 백성들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실현되는 나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