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내러티브
요한복음의 내러티브
2017-04-08 16:37:13
요한복음 1장
모든 복음서의 주제는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증언이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라고 선언한다(1-2절). 그뿐 아니라 요한은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고 말한다.(3절) 요한복음의 이런 선언은 분명 공관복음서의 예수에 대한 증언과는 현격하게 다르다. 여기서는 분명하게 예수의 선재성과 신성을 주장하고 있다. 어떻게 요한복음의 기독론이 공관복음서의 기독론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복음의 독자들에게 예수에 대한 이런 신앙은 자명하였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초월적인 선언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초월적인 존재인 예수가 어떻게 이 세상과 관련되는지를 말하고 있다. 그 말씀 안에는 생명이 있었는데 이 생명이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되었다는 것이다.(4절) 문제는 빛이 비추었지만 사람들이 그것이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는 빛인줄 깨닫지 못한다는데 있다.(5절) 그래서 그 빛에 대한 증인이 필요했고 그 증인으로 보냄을 받는 사람이 바로 세례 요한이다.(6-8절)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은 각 사람을 비추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요한복음은 그 빛이 먼저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가 먼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셨음을 의미할 것이다. (9-11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를 거부하였고 이제는 (이스라엘을 넘어)누구든지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란 민족적, 혈통적 권리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믿는냐 여부로 결정된다.(12-13절) 그렇다면 태초부터 계시던 말씀은 어떻게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 되셨으며, 어떻게 세상에, 특별히 자기 땅, 자기 백성에게 오셨는가? 요한복음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장막을 쳤다는 의미) 고 말한다.(14절) 이 표현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던 성막이나 성전 이미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구약에서 성막이나 성전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상징적으로 나타났다면 이제 그 상징의 실체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어 이스라엘 가운데 오신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구약에서 성막이나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듯이 이제 육신이 되신 말씀에도 영광이 나타났는데 그 영광은 이전에 나타난 영광과 비교할 수 없이 충만한 영광이리고 말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그 영광을 아버지의 독생자(유일하신 아들, 곧 독자라는 의미) 곧 예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의미할 것이다.(14절) 그리고 그 영광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출애굽기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영광을 보여주시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시는 장면이 나타나는데(출34장 6절) 거기에 인자와 진실(은혜와 진리)이 많은 하나님이란 말이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라는 언약적 신실함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말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율법으로 나타났다면 이제 구약 율법에 나타났던 은혜와 진리, 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다는 것이다.(17절) 여기서 "우리가"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하는데(14절, 16절) 이들은 예수 안에 나타난 영광을 본 자들이고(14절) 그 영광안에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본 자들이다.(16절) 그러므로 그들은 그 영광과 그 은혜와 진리를 증언할 책임을 가진 자들이 되었다.(15절) 누구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는데 이제 그들은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이다. (18절). 당시 유대 세계는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나 그리스도에 앞서 올 것이라 믿었던 엘리야나 그 선지자에 대한 기대가 팽배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요한은 사람들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며(20절) 엘리야나 그 선지자도 아니라고 말한다.(21절) 그렇다면 왜 요한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이것이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의 질문이었다.(25절) 요한은 자기가 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를 나타내려함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요한의 세례는 이사야의 말대로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예수가 오시는 길을 준비하는 세례인 것이다.(23절) 예수에 대한 요한의 최초의 증언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었다. 요한이 왜 예수에 대해 이런 톡특하고 암호와 같은 표현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말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라는 의미였다. (34절) 이는 요한이 당대의 메시아관과 매우 다른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세례 요한이 예수를 보고 자기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을 때 그들이 그 말을 듣고 예수를 따랐으며(36-37절) 나중에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한 것으로 보면(41절) 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어린 양'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호칭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은 안드레에서 시작하여-베드로-빌립- 나타나엘로 확대되었고 그들은 모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곧 메시아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들의 메시아관은 당시 유대인들이 공유하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메시아관였지 요한복음 1장에 선포된 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으로서의 메시아관을 가진 것은 아직 아니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2장
예수의 등장은 가나의 혼례 잔치와 더불어 시작된다. 거기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표적이 나타나고 이 표적을 통해 예수의 영광이 나타났다고 말한다.(11절) 요한복음에는 표적이 많이 나타나는데 요한은 특별히 이 표적을 첫 표적이라고 칭하며 이 표적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요한은 왜 이 표적을 처음에 배치하고 특별히 이 표적을 강조한 것인가? 그리고 이 표적을 통하여 어떻게 예수의 영광이 나타났으며 또 나타난 그 영광은 무엇인가? 포도주 사건에 이어 바로 등장하는 사건이 성전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에서는 예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있었던 사건으로 묘사된다. 아마도 성전 사건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요한이 의도적으로 성전 사건을 여기에 배치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포도주 사건에 이어 바로 성전 사건을 배치한데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혼례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큰 낭패가 아닐 수 없으며 이것은 잔치를 망쳐버릴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질좋은 새 포도주가 공급된다는 것은 잔치에 벌어진 심각한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포도주 사건을 하나의 은유로 해석해 본다면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는 아마도 절망적인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의 상황을 의미할 수 있고 질 좋은 새 포도주가 공급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가 이스라엘의 문제를 일거에 그리고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분이심을 암시한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성전 사건도 포도주 사건과 유사한 은유라고 볼 수 있다. 성전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상징적인 행동은 성전으로 상징되는 타락한 유대교에 대한 심판을 의미할 것이다. 특히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는 말로 보아 예수님의 상징적 행위는 성전이 심판을 받고 무너질 것에 대한 예고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전을 무너뜨린 후에 다시 세우실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전사건은 메시아로 오신 예수가 타락한 유대교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우실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포도주 사건이나 성전 사건은 모두 메시아로 오신 예수가 절박한 상황에 빠진 이스라엘 혹은 타락한 유대교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메시아이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두 사건을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왜 포도주 사건이 예수의 영광을 나타낸 사건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요한복은 1장14절에는 영광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면서 그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라고 그 은혜와 진리는 이미 모세의 율법에 나타났던 것인데 이제 그 실체가 예수로 말미암아 충만하게 나타났다고 말한다.(1장 17절) 그렇다면 포도주 사건을 통해 나타난 예수의 영광이란 바로 충만한 은혜와 진리, 곧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절망적 상황에 빠진 이스라엘, 타락하여 심판을 받아야 할 유대교를 하나님은 그대로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보내어 고치시고 새롭게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나 혼인 잔치의 포도주 사건은 은혜와 진리, 곧 예수의 영광이 나타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 나타났을 뿐이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4절) 그 때가 이르면(요한복음에서는 예수가 들릴 때, 곧 예수의 죽음의 때) 예수의 영광, 곧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찬란하게 나타날 것이다.
요한복음 3장
니고데모는 왜 예수를 찾아온걸까?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생각했고(2절) 그래서 아마도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니고데모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매우 뜻밖이다. 예수는 니고데모가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나라를 볼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 지적에는 예수가 보여준 표적이 바로 예수를 통해 도래한 하나님나라의 표적이라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다. 예수는 표적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보여줬지만 니고데모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표적에서 하나님나라를 보았다면 그는 예수를 그저 하나님께로 부터 오신 선생으로 알 것이 아니라 그가 바로 그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알아보아야 했다. 이어지는 예수의 지적(11절)은 니고데모의 문제가 단지 영적 무지가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증언을 거부하는 완악함이었다. 예수는 표적을 통하여 그 나라를 증언했지만 니고데모는 그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11절)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백성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수의 증언을 거부한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이면서 동시에 하늘에 올라간 자라고 말하면서 하늘에 올라간다는 말을 다시 부연하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한다고 말한다. 요한 복음에는 "들린다"는 표현이 여러군데 나타나는데(8:28 ; 12:32) 그것은 예수의 죽음을 가리킨다. 요한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예수가 높이 들리는 것, 하늘에 올라가는 것, 영광스럽게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죽음에서 독생자의 영광이 절정에 이른다고 본 것이고 이것은 결국 1장 14절에서 말한 독생자의 영광속에 있는 은혜와 진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충만하게 나타남을 의미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장대에 달아 높이 든 것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살게하려는 것이듯이 십자가를 통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높이 들리운 예수를 보고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게되는 것이다.(14-15절) 하나님은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독생자를 주심으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하려 하셨다. 여기서 영생을 얻는다(15, 16절), 구원을 받는다(17절)는말은 앞에서 언급된 하나님나라를 본다(3절) 혹은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5절)는 말과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를 믿는다(15, 16절), 그로 말미암아(17절),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는다(18절)는 구절에서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 모든 내용을 연결해 볼 때 그것은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하나님나라의 왕이심을 믿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말하면 그의 왕적 다스림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영생을 얻는다든지 구원을 받는다든지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가 그 나라의 왕이심을 믿고 순종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문제는 예수가 그 나라의 왕이심을 믿지 않을 때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다.(17-18절) 왜냐하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기 때문이다.(1장 3절)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므로 그는 세상의 왕이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그 악행이 드러날까 두려워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다.(19-20절) 그러나 진리를 따르는 자들은 빛으로 나아온다.(21절) 예수는 메시아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이 기쁜 소식이다. 그것은 메시아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나라가 도래한다는 소식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을 떠났던 이제 왕이 자기 백성에게 돌아오신 것이다. 그러니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 복음은 구원이 되지만 복음을 거절하는 자에게 그 복음을 심판이 될 수 밖에 없다. 결국 니고데모와 예수의 대화에서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지만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표적을 보지 못하고 거부한 자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를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 만물 위에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31절) 그는 친히 보고 들은 것(하나님나라)을 증언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32절) 세례요한은 (하나님나라에 대한)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신 줄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고 말한다.(33절) 아들을 믿는 자(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는 자) 에게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고) 순종하지 않는 자(예수가 왕되심을 거부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게 된다.(심판을 면하지 못한다) 요한복음은 분명히 예수가 메시아( 하나님 나라의 왕)이심을 믿음으로써 그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구원을 받는다,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4장
예수가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한 것은 단지 지리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2-3절) 더구나 유대인 남자인 예수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넨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7-9절)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면서 만일 그 여인이 예수가 누군지 말았다면 거꾸로 예수에게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라는 수수께기 같은 말을 던진다. (10절) 여자는 예수의 이 말에 대단히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이는데(11-12절) 그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가 주는 물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은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말하자 여자는 호기심을 보인다. 이 대목에서 니고데모의 대화와는 다른 모습이 나타난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가진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예수의 말을 믿지 못하고 의혹했지만 여인은 예수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며 그런 물이 있다면 달라고 대답한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는 니고데모와 달리 고정관념이나 편견이 없었고 그래서 예수의 말에 제대로 반응을 한 것 같다. 그런데 예수가 갑자기 남편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아마도 반응을 보인 여자로 하여금 예수에 대한 관심를 끌어올리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그래서 여자는 예수를 (신기한 능력을 가진) 선지자라고 말하며(19절) 유대인들과 사미리아인들간의 논쟁거리인 예배하는 장소에 대한 논쟁을 꺼내는데 이는 아마도 선지자라고 생각한 예수에게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간의 종교적 정통성 논란을 제기한 듯하다.(20절) 예수는 예배의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배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24절) 결국 대화는 메시아애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고 예수는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메시아라고 명시적으로 알려준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는 암호와 같은 말로 자신이 메시아임을 말했다면 이 여인에게는 매우 직설적으로 말한 것이다. 결국 여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게 되었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알리게 된다.(28-29절) 그리고 여자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그 동네 중의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39절) 특이한 것은 그들이 예수를 세상의 구주라고 부른 것인데 (42절) 이는 메시아가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온 세상의 메시아라는 놀라운 고백으로 보인다. 니고데모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는 앞뒤로 배치되어 날카로운 대조를 보인다. 유대인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예수가 누구신줄 알지 못했지만 정작 유대인이 이방인같이 멸시하고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그 가운데서도 무시받는 여자는 예수가 메시아이신줄 알았다. 빛이 어둠에 비추었을 때, 니고데모는 그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나아오지 않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빛을 깨닫고 빛으로 나왔을 뿐 아니라 빛을 증언하는 자가 된 것이다. 예수는 사마리아를 떠나 다시 갈릴리 가나로 오셨고 거기서 왕의 신하의 거의 죽게 된 아들을 고치신다. 요한은 이 일을 포도주 사건에 이어 두 번째 표적이라고 언급하는데(54절) 그것은 이 사건이 포도주 사건과 동일하게 하나님나라의 표적이란 사실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첫번째 표적인 포도주 사건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를 보여준다면 두번째 표적인 거의 죽게된 아들을 살린 사건 역시 거의 죽게된 상태에 빠진 이스라엘을 살려주는 메시아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2장에서 4장은 한 단락을 이루며 하나의 수미상관 구조를 가진 두 표적을 통해 예수의 표적이 하나님나라 표적이며 그것은 곧 메시아 표적임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수미상관 구조의 가운데에 서로 대조를 이루는 니고데모 이야기와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가 놓여져 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는 표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지 못하는 반면에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 여인은 표적을 보지 않고도 예수가 메시아이심을 믿었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요한복음 5장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었다고 하니(1절) 이는 아마도 2장13절 유월절에 이어진 초막절일 가능성이 높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교의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으로 묘사된다. 베데스다 못에 들어가 보려고 기다리는 그러나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는 38년 된 병자를 예수가 고쳐주는 사건이 등장한다. 이 사건 역사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표적일 것이고 그렇다면 38년된 이 병자 역시 스스로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적인 이스라엘을 암시할 것이다. 누가 자기를 베데스다 못에 넣어주길 바라는 병자에게(7절) 예수는 그의 기대를 뛰어넘는 놀라운 말을 하신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놀라운 명령이다.(8절) 그리고 그 사람은 즉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이런 것임을 이 치유사건은 보여준다.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는 어찌해볼 길이 없는 절망적인 처지에 빠진 이스라엘을 즉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그분이 바로 메시아 예수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신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메시아가 오시지 않고는 하나님나라는 도래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도래가 곧 하나님나라 도래다. 문제는 병자를 고친 날이 인식일이라는 점이었다. (9절)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이나 병자에게 안식일에 짐을 지고 걸어가라고 한 것은 유대인들이 보기에 명백히 안식일 계명을 범한 것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박해하기 시작했다(16절) 그런데 예수는 자신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이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하신 일이라고 주장했다.(17절) 예수의 이런 주장은 안식일을 범한 죄에 더하여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은 죄를 더한 것으로 간주되어 유대인들은 이제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18절) 이 때를 기점으로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되었고 예수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 그 갈등을 의도적으로 일으키셨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의 주장은 곧 안식일에 병을 고친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유대인들에게 대단히 신성모독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예수는 안식일 계명을 범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 계명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안식일 계명은 시내산 언약에서 주어진 십계명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 계명에 여호와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고 제7일에 쉬셨기 때문이라는 조건절이 이어진다.(출20장 11절)그러니까 여호와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제7일에 안식하셨으므로 이스라엘도 안식하라고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이 단순히 일을 마치고 휴식을 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구약학자들 중 다수는 여기서 하나님의 안식은 신들이 성전이 지어진 후에 그 성전의 주인으로서 좌정하는 고대근동의 신화를 반영한다고 본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은 이제 창조가 끝난 후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보여주는 표적으로서 병자를 고친 사건이 안식일에 일어난 것은 당연하고도 의미심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택하여 병자를 고치심으로 자신을 통해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사건으로 인해 예수를 박해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했다. 38년된 병자처럼 절망적인 처지에 빠진 이스라엘에게 이 표적은 진정한 복음이요 빛이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빛으로 나아오지 않고 오히려 빛을 미워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긴 설교(19-47절)는 빛이 비치되 빛을 깨닫지 못하는 어둠(요한 1장 5절)을 향해 빛의 증언하는 절절한 목소리였다. 이 설교의 결론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모세를 믿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떠받들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모세를 믿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이 이 설교를 통해 드러났다.
요한복음 6장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 유월절이 가까운 때에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났다. 큰 무리들이 예수를 따랐는데 이는 그들이 예수가 병자들에게 행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오병이어 기적 역시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는 표적이었다. 큰 무리들에게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이스라엘의 무기력한 처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병자를 고친 이적과 마찬가지로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오병이어 이적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일어나는 자유와 해방을 보여준 표적이다. 오병이어 표적을 본 무리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여기거나 혹은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14-15절) 그러나 무리들의 그런 반응은 표적에 대한 오해였고 예수는 단호하게 그들을 떠나셨다. 무리들은 배를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예수를 만났는데 그들이 예수를 부르는 호칭이 랍비였던 것으로 보아 그들은 예수가 보여준 표적이 하나님나라 표적임을 깨닫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예수는 그들이 예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셨다.(26절) 그들은 표적을 보았지만 표적이 의미하는 바를 깨닫지 못했다. 오병이어 이적을 통해 예수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보여주었건만 무리들은 오직 썩을 양식만을 보았던 것이다.(27절) 오병이어 표적은 분명히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표적이었고 동시에 그 하나님나라를 도래케하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임을 보여준 표적이었다. 그러나 무리들은 여전히 예수를 믿도록 행하는 표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30절) 그러면서 무리들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표적을 거론한다. 그러자 예수는 자신이 주는 떡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은 떡과 달리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떡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생명을 주는 떡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말한다.(35절)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다시는 주리지 않으며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는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 생명의 떡인 예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이 장면은 "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고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요한복음 서문의 한 구절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는 무리들에게 이스라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생할 것이라고 말한다.(49-51절) 이어서 예수는 그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하는데, 이 말로 인해 유대인들 가운데 소동이 일어난다. 그러자 예수는 한술 더 떠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함으로써 유대인들 가운데 오해를 증폭시킨다. 표적을 보았지만 깨닫지 못하는 그들에겐 예수의 말은 점점 의혹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되었다.(60-61절)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께서 제자중에 믿지 않는 자가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신다는 해설을 붙여 놓았다. 결국 "누구든지 내 아버지께서 오게하여 주지 않으며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예수의 선언으로 제자들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와 함께 다니지 않게 되었다.(66절) 예수를 떠나고 예수를 배반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이신자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든 복음서의 주제는 바로 예수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며 증거이다. 그러나 예수 당시에 표적을 본 무리들이 그랬듯이 오늘날도 복음서의 대답을 듣고 증거를 보지만 정작 예수가 누구이신지 알지 못할 자가 많을 것이다. 오직 예수가 택한 제자들은 예수는 영생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심을 믿고 알았듯이(68-69절) 오늘날도 그러할 것이다.
요한복음 7장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예수가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셨다. 5장에서 예수는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그곳에서 38년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는 표적을 보이셨는데,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5장 16절) 이 사건이후로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했고 그래서 예수는 유대로 다니려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초막절에 예수는 은밀하게 유대로 올라가셨고 명절의 중간에 성전에 올라가 가르치셨다는 말로 보아 예수가 자신을 감추신 것은 아니었다.(14절) 예수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이 율법에 반한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안식일 계명을 가장 올바르게 지킨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것은 율법을 지킨 자, 죄가 없는 자를 죽이려는 것이니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긴 셈이 된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일을 공의롭게 판단하지 않고 외모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반복하여 자신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8절)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은 그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명절 끝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는 모습에는 깨닫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그리하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유대인들이 목마르지 않다는데 있다. 그렇기에 유대인들은 예수가 누구이신지에 대한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요한복음 8장
음행중에 잡힌 여자 이야기(1-11절) 이후에 등장하는 예수와 유대인들 간의 논쟁(12-59절)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예수와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핵심은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간음한 여자 이야기도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간음한 여자 에피소드를 통해 예수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계시가 주어진 것이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그 여자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는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다. 율법은 여자를 정죄하지만 예수는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모세의 윱법을 능가하는 분이심을 암시한다. 예수가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을 쓴 것은 예수가 율법을 능가하는 자이며 나아가 율법을 제정하신 분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의 이런 행동은 돌판에 손가락으로 율법을 써주신 하나님의 행동을 반영함으로써(출31장 18절) 예수가 율법의 제정자임을 암시한다. 간음한 여자 에피소드를 이렇게 보면 이어지는 유대인과 예수의 논쟁이 자연스럽게 연결이 된다.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던 여자를 예수는 살려주었으니 그 여자에게 예수는 생명의 빛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며 그러므로 자신을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12절) 예수는 자신에 대한 이런 증언이 참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이 예수를 위하여 증언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를 통해 나타난 표적들은 모두 예수가 누구이신가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알았더라면 예수도 알았을 것이다.(19절)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믿지 않는다면 유대인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 들은 그것을 말하며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말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예수와 항상 함께 하시며 예수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예수를 반대한다. 예수는 이런 유대인들이 죄에 사로잡힌 종이며(34절) 그들의 아비는 마귀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며 하나님이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정말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예수를 사랑해야 마땅하다.(42절) 그러나 예수는 그들의 아비는 마귀라고 규정한다. 유대인들은 그 아비 마귀의 욕심대로 행하기 때문에 진리를 믿지 못한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을 말씀을 듣는다. 유대인들이 듣지 않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서 속했기 때문이다. (47절) 그래서 아무리 논쟁을 해도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다만 귀신들린 자요(52절) 돌로 쳐서 죽일 자였다.(59절)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1장 5절)
요한복음 9장
이번에는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는 표적이 등장하는데 이 표적 역시 38년된 병자를 고친 표적과 마찬가지로 안식일에 일어났다. 이 표적과 관련해 예수는 이것이 자신을 보내신 이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표적은 앞의 음행한 여자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세상의 빛이심을 드러내는 표적이었다. 날 때부터 빛을 전혀 볼 수 없는 맹인의 눈을 뜨게한 것은 예수가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심을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적인 표적이 아닐 수 없다. 이 표적이 안식일에 일어난 것은 역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때 그 나라의 백성들에게 자유와 해방, 곧 진정한 쉼이 이루어짐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표적은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를 통해 임재함을 그리고 예수는 그 나라의 도래를 임하게 하는 메시아이심을 드러낸 표적이라 볼 수 있다. 동시에 이 표적은 앞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표적과 마찬가지로 앞을 못보는 맹인과 같이 어둠 가운데,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이스라엘을 회복시키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보여준다. 그런데 맹인을 고치는 표적은 이전의 다른 치유 표적과 달리 진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구체적인 치유 행위가 나타나는 점이 특이하다. 예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는 자도 있었고 다른 자들은 죄인이라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할 수 있겠는냐 하여 서로 분쟁이 되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분명히 보고도 그 표적이 보여주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이런 모습은 이미 언급된 바,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요한복음의 서문을 생각나게 한다. 이어지는 눈을 뜬 맹인과 바리새인들과의 언쟁은 누가 정말 맹인인가에 대한 역설을 보여준다. 맹인이었던 자는 이제 표적에 나타난 하나님나라를 보는 반면에 스스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은 표적을 깨닫지 못함으로 스스로 맹인임을 드러낸 것이다. 여기서 예수는 눈뜬 맹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는 예수를 믿게 되는데 이 장면은 앞서 4장에서 예수가 사미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밝힌 장면을 연상케 한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 날때 부터 맹인된 자와 바리새인들 전자는 스스로 본다고 자처하는 자들이라면 후자는 보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본다고 하는 자들은 정작 예수가 누구신지를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함이라" 고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이 차라리 맹인이었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다. 맹인이 표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본다고 하면서 표적을 부인하는 바리새인들은 정죄를 받게 된다.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선포는 세상이 그 빛을 보고 빛으로 나아와야 함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 빛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그 빛은 오히려 구원이 아니라 심판이 된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는 빛으로 나아오는 결단을 촉구한다. 그 빛으로 나아오는 자는 곧 예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고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요한복음 10장
우리가 맹인인가? 라고 반문하는 바리새인에게 예수는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고 이르셨다.(9장 40-41절) 이제 10장에서는 스스로 본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예수는 지적하신다. 그들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도둑이고 강도들이다.(1절) 도둑이 오는 것이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키는려는 것뿐이듯이(10절)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양들인 이스라엘을 망치고 해치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양을 돌보는 목자가 아니라 삯꾼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는 무책임한 자들이다.(12-13절) 그러나 예수는 자신을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하며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9절) 또한 예수는 자신을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한다.(14-15절) 이 대목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암시하신다. 스스로 백성들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과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예수가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다. 전자가 하나님나라를 망치는 자들이라면 후자는 하나님나라를 회복하시는 메시아이신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이런 비유를 알이듣지 못했고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고도 그 표적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메시아로 오신 분이심을 믿지 못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 것이다. 수전절이 이른 때에 예수께소 예루살렘에 머무신 것으로 보아(22-23절) 7장에서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후 계속 머무신 것으로 보이며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다시 갈릴리도 돌아간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도 유대인들과의 갈등 장면이 등장하는데 유대인들은 예수에게 메시아라면 밝히 말하라고 다그친다.(24절) 예수는 이미 내가 너희에게 말했고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여준 표적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인데 너희가 믿지 않았다고 대답하신다(25절).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고 길게 가르쳤음에도 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유대인들이 가진 메시아관으로는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비록 놀라운 표적을 행하는 비범한 존재였지만 안식일을 범하고 신성모독을 행하는 참람한 자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종교기득권자들을 인정하지 않고 비판하는 자였다. 그러나 모두가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아니였다. 예수의 표적을 본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요한의 증거가 참이라 인정하고 예수를 믿었다. (41-42절)
요한복음 11장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6번째 표적이면서 마지막 표적이다. 그동안의 표적들이 모두 메시아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 곧 이스라엘의 회복을 상징하였듯이 나사로를 살린 표적도 마찬가지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계속적인 이방의 압제 아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은 죽은 나사로와 마찬가지로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 그러므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분명히 전격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는 표적이었고 이것은 메시아 예수로 말미암아 도래하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가지 않고 그가 죽기까지 기다리신 것이다.(6절) 그렇기에 예수는 나사로의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신다.(4절)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을 때(23절)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주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보아(24절) 당시 1세기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을 믿었던 것 같다. 비록 마르다는 예수가 메시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지만(27절) 그가 기대한 메시아는 죽은 자들 살릴 수 있는 그런 메시아는 아니었다, 그래서 마르다는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의 말에 죽은지가 이미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썩어서 냄새가 난다고 말한 것이다.(38-39절) 그러나 예수는 네가 믿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가시적으로 찬란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죽은 자를 살리는 신적인 기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메사아 예수를 통해 찬란하게 드러나는 표적이었다. 바로 이 사실이 이미 요한복음의 서론에서 이렇게 진술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장14절) 나사로를 살린 이 표적을 보고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지만 아직 그들은 예수가 누구신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의 표적은 주어지지 않는다. 이 마지막 표적을 보고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내린 결론은 예수를 죽이자는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험에 빠뜨리는 자이므로 그를 죽여야만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50절) 요한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 말을 중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가 민족을 위하고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해 죽으실 것을 가야바가 부지불식간에 말한 것이라고 중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51-52절) 마지막 표적을 보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수를 죽여야 겠다는 결의였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3장 18-19절) 이것이 바로 이들을 가리켜한 말이었다.
요한복음 12장
때는 유월절 엿새 전이고 장소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이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7장에서 예수는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셨고 그 다음해 유월절이 임박한 때까지 계속 예루살렘과 부근에서 머물러 계신 것으로 보인다. 베다니에서 예수를 위한 잔치가 벌어졌고 마리아는 예수에게 비신 향유를 부었다. 예수는 마리아의 그런 행위가 자신의 장례할 날을 위한 준비로 해석했다. 이제 12장 부터는 예수의 임박한 죽음에 대한 암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12절 이하에는 예수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공관복음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모습은 예수의 예루살렘 성 입성이 이전의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모습과는 다르다. 그것은 분명히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왕이 거처하는 곳이고 예수가 입성하는 모습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예수를 환영하는 사람들도 그 의미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13절) 흥미로운 것은 유월절에 예배하려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를 뵙기를 청했다는 점이다. 이미 그들에게도 예수의 명성은 잘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수는 그 소식을 듣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말한다. 여기서 영광을 얻는다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죽음을 암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는 헬라인들이 예수를 뵙자고 청하는 소식을 듣고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이어지는 말씀들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헬라인들을 포괄하는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질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죽임을 당하는 메시아는 유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들의 메시아관에 의하면 메시아는 영원히 계셔야만 했다. 자신들의 메시아관과 맞지 않는 그러나 자신을 메시아로 주장하는 예수, 이 사이에서 유대인들은 의혹을 거듭하고 있다(34절)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어둠을 비추는 빛이라고 주장하며 빛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어둠에 사로잡힌 자들임을 지적하고 있다.(35-36절) 아무리 많은 표적을 행해도 유대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는 이것이 바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응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어진 예수의 설교(44-50절)은 유대인들을 향한 마지막 설교였다.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겐 어떤 표적도 메시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믿는 것은 자신을 메시이로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자신을 보는 자는 자신을 보낸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외쳐 이르셨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유대인은 곧 그들이 하나님이라 떠받드는 분을 믿지 않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며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
이제 장면은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시기 하루 전날 곧 유월절 이틀 전날이다. 이 장면에서는 오직 예수와 그의 제자들만이 등장하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하는 말과 기도가 17장까지 5장에 걸쳐 길게 이어진다. 이제 더 이상 대중을 위한 표적도 유대인들을 향한 메시지도 등장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의 기자가 이 대목을 아주 자세하고 길게 묘사한 것은 그만큼 이 장면이 중요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은 요한복음 전체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그것은 앞에서 표적과 가르침을 통해 보여준 하나님나라, 그리고 임박한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나라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보인다. 가롯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는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한다.(13장 31절) 가롯 유다는 이제 제자 공동체를 떠났고 그의 배신으로 이제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자가 영광을 받았다는 말은 예수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의 죽음이 예수에게 영광을 받는 일이 되는 것인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은 치욕이 될지언정 영광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예수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은 1장 서문이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그의 영광을 보았는데 그 영광은 독생자의 영광이고 그 영광 안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말했다.(1장 14절) 이 말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독생자를 통해 나타났다는 것이고 나타난 그 영광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적 속성인 은혜와 진리가 독생자를 통해 보일 수 있게 나타났다는 의미다. 이렇게 영광에 대해 말하는 요한복음의 맥락에 의하면 우리는 왜 예수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영광을 받았으며 하나님도 영광을 받는다고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독생자에게서 나타난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동일한 은혜와 진리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찬란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의 성육신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 역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에 그 두 가지 사건에는 하나님의 (언약적)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나타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인자와 아버지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영광을 받는다고 말한 의미일 것이다. 가롯 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는 자신이 장차 제자들을 떠나갈 것을 말씀하시고(13장 33절)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셨다. 그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며 이렇게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는 교훈이었다. (13장 34-35절) 예수님의 마지막 교훈의 주제는 바로 새 계명이었다. 그런데 왜 이 교훈을 굳이 새 계명이라고 칭한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구약의 모든 계명을 대치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구약의 모든 계명을 집약하고 완성한다는 의미로서의 새 계명일 것이다. 이것은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구약의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한 것과 동일한 맥락일 것이다. 예수는 구약의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다. 그래서 요한 복음도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여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고 말했을 것이다.(1장 17절)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일도 바로 이 새 계명에 대해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가 말하는 사랑은 추상적 개념이나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긴 것은 비록 예수는 선생이고 주였지만 선생과 주 노릇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을 주인으로 섬기는 종노릇을 한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의 새 계명은 서로 종노릇하라는 요구를 의미한다. 자신이 높아지고 대접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구체적이고 공동체적인 행동, 이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는 사랑이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자신을 높이려고 하고 남을 낮추려고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낮추려 하고 남을 높이려고 할 것이다. 예수의 새 계명이 실천되는 나라가 바로 예수가 왕이 되어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가 아니겠는가? 예수는 그 하나님나라에 대해 제자들에게 길고 자세히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바로 그 나라를 구성할 최초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없이는 하나님나라는 역사 가운데 실현될 수 없다. 하나님의 통치는 그 백성들을 통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나라는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로 환원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구체적으로 그 통치를 받는 백성들의 순종을 통해 실현되는 나라이다. 예수가 보여준 표적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앞에서 예수가 행하신 표적들 그리고 가르침들이 있었기에 이제 제자들만 모인 자리에서 주어진 예수의 길고 자세한 가르침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가장 먼저 보여준 퍼포먼스가 제자들의 발을 닦아준 일이란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단지 겸손하고 서로를 섬기라는 윤리적 교훈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세우실 하나님나라의 근본 원리를 보여준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다고 말한다(15절) 그러면서 새 계명을 준다고 하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그리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한다.(34-35절) 결국 이 두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가 세우실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준다. 그 나라는 서로 높아지려고 하고 상대를 낮추려고 하는 나라가 아니라 서로 낮아지려고 하는 나라, 나보다 남을 더 높여주려고 하는 나라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그 백성들의 발을 씻기신 분이고 하나님나라의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되 자기 목숨을 내어주어 사랑하였다. 그 나라의 왕이 그리했듯이 그 나라의 백성도 그렇게 하는 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예수는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왕은 압제하고 군림하지만 그 나라의 왕은 자기 목숨을 내어준다. 세상 나라의 백성들은 자신을 높이고 남을 낮추려 하지만 그 나라의 백성들은 그 반대다. 예수가 보여준 하나님나라는 이 세상 나라가 상상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나라였다. 이 세상의 어떤 정책이나 프로그램이나 사상으로도 이룰 수 없는 그 나라가 이제 예수의 임박한 죽음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복음 14장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는 시몬 베드로의 질문은 그가 예수의 새 계명에 대한 교훈에 주목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들을 떠난다는 말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가 떠난다고 하는데 어디로 떠나는지 알지 못하므로 근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근심하지 말라고 제자들을 위로하신다. 예수는 자신이 떠나가지만그것이 제자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제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는 것이며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하여 같이 있게 하리라 말씀하신다.(2-3절) 결국 예수는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데 그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가 아버지께 감으로 말미암아 이제 제자들도 아버지에게 갈 수 있는 길이 마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그 길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도마는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그 길을 어찌 알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예수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단언하신다.(4-6절) 이제 예수가 아버지께로 감으로 말미암아 그는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 되시며 아버지의 진리를 드러내고 아버지로 부터 오는 생명을 주는 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안다면 아버지를 아는 것이고 예수를 보았다면 아버지를 본 것이 된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유일한 독생자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10절) 예수는 철저하게 자신이 아버지에게서 온 자요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자며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말과 일은 모두 아버지가 자신 안에서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제 예수는 아버지에게 간다 그리고 그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12절)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하면 들으실 것이다. 이렇게 어디로 가시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을 하신 후에 예수는 다시 당초 말씀하시려던 새 계명으로 다시 돌아간다.(15절)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는 말씀은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란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의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시며 이 두 사랑이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 일을 기억하게 된다. 이어서 예수는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데(16-17절) 이는 제자들에게 명한 새 계명을 지키는 일과 관련된다고 보인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본성을 거스려 새 계명을 지키는 일을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를 보내어 도우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는 아버지에게 구해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고 그는 영원토록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온다는 의미일 것이다. 예수는 이제 아버지에게로 떠나시지만 보혜사를 보내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실 것이다. 세상은 진리의 영을 알지도 보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를 알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며 또 그들 속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을 통해 제자들은 살아계신 예수를 볼 것이며 예수가 아버지 안에 제자들이 예수 안에, 예수가 제자들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17-20절) 다시 예수는 본론으로 돌아와 새 계명을 지키는 일이 바로 예수를 사랑하는 일이고 그럴 때 예수도 그들을 사랑할 것임을 강조하신다.(21-23절)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가 하시는 이 모든 말씀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이제 예수가 떠나가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가서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고 보혜사를 통해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장
예수가 제자들을 떠나기 전에 유언처럼 남긴 메시지의 핵심은 새 계명이었다. 이어지는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도 역시 새 계명과 관련된 것이다. 예수는 참 포도나무요 아버지는 농부로 그리고 제자들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로 비유되는 이야기에서 강조점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농부가 기대하는 것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듯이 하나님이 제자들에게 기대하는 것 역시 동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가지가 포도나무에 잘 붙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예수가 제자들 안에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을(5-7절), 또한 제자들이 예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9절) 그 구체적 의미는10절에서 밝혀지는데 그것은 곧 예수의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게 될 때,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거하며 또 그의 사랑안에 거하게 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여 세운 목적이 바로 그들로 열매를 풍성히 맺게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새 계명을 지킬 때 세상은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나라 도리여 세상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세상이 예수를 박해한 것과 같이 그들도 박해할 것이다.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라는 말은 제자들을 박해하는 세상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유대인들임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곧 예수를 보내신 분이심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21절) 예수를 미워하는 것은 곧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임을 표적들을 통해서 충분히 증거하였다. 유대인들이 그 표적을 보고도 예수를 미워한 것은 그들이 아버지를 보고도 미워한 것과 같으니 그 죄를 핑게할 수가 없다. 한마디로 그들은 아무 이유없이 예수를 미워한 것이다. 지금까지 예수는 표적을 행함으로 자신을 증거했지만 이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예수를 증거할 것이며 제자들도 또한 진리의 영과 더불어 예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요한복음 16장
사람들은 제자들을 출교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죽일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아버지와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세상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제자들을 이렇게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인가? 예수는 그 이유는 제자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세상에서 택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제자들이 세상의 질서에 반하는 자들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세상의 질서에 반하는 자들이 되는가? 그것은 그들이 예수가 명한 새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새 계명은 단순히 서로 사랑하라는 윤리적 감성적 명령이 아니라 높은 자가 낮은 자가 되고 낮은 자가 높은 자가 되라는 대단히 급진적인 명령이다. 이것은 높은 자가 군림하고 낮은 자는 지배당하는 세상 질서에 반하는 반사회적 명령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새로운 질서를 따라 산다면 세상의 질서와 지배 체제는 전복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새 계명을 지키는 예수의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단히 급진적인 새 계명을 명하면서 예수는 제자들을 떠나려 하니 제자들의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예수가 떠나가는 것은 제자들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가 떠나가야만 보혜사가 제자들에게 오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혜사가 오시면 세상을 책망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말은 15장 26절에 보혜사가 오시면 그가 예수를 증언하실 것이란 말과 연관된다고 보인다. 보혜사가 오면 그가 예수에 대해 증언하심으로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그는 세상이 예수를 믿지 않은 것이 죄임을 증언하실 것이며, 예수가 떠나가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을 증언할 것이며, 그리고 예수가 온 세상의 임금이 되심으로 세상 임금이 심판받았음을 증언할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무엇보다도 제자들을 진리 가운데고 인도하실 것이다. 그는 예수가 그러하셨듯이 보냄을 받은 자로서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며 자신의 영광이 아닌 예수의 영광을 나타내며 예수의 것을 가지고 제자들에게 알리실 것이다. 예수가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는 근심이 되겠으나 세상은(유대인들)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은 도리어 기쁨으로 변할 것이요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다. 예수가 떠나가심으로 이제 제자들은 무엇이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할 수 있으며 구한 것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요한복음 17장
이제 예수는 모든 가르치기를 마치신 후에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기도의 첫 머리는 아들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광으로 시작된다. 이제 아들이 영화롭게 되며 아들로 말미암아 아버지도 영화롭게 될 때가 이르렀다. 그 때는 곧 예수가 떠나 아버지께로 가는 그 때, 곧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이다. 여기서 영화롭게 된다는 것은 영광이 나타난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아들의 영광과 아버지의 영광이 찬란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곧 십자가 죽음을 통해 나타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언약적 속성인 은혜와 진리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 여기서 영생은 공관복음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와 동일한 의미이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나라의 왕이 세워져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왕이 없이는 하나님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가 왕이 되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위한 나라이다. 그렇기에 그 나라의 왕은 그 나라의 백성을 창조한다.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는 그 나라의 백성들을 부르시고 그 나라에 들어오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말하는 영생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가 메시아 곧 그 나라의 왕이심을 아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예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이고 예수는 이 일을 이루려고 세상에 오셨고 죽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가 기도하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에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다. 그들은 예수의 영광을 드러낼 자들이다. 그들의 증언을 통해 예수의 왕되심이 그리고 예수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드러날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위해 구하는 일은 그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전하여 그들이 우리와 같이 하나가 되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들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듯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킬 때 그들도 하나가 될 것이다. 제자들이 새 계명을 지킬 때 세상은 그들을 미워할 것이니 이는 예수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가 구하는 것은 제자들을 세상에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는 것이다. 예수는 세상을 떠나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가 보낼 보혜사 성령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예수를 증언하야 할 자들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에 보낸 것 같이 아들은 그들을 세상에 보낸다. 그러므로 이들의 증언으로 인해 예수를 믿을 자들이 있을 것이고 예수는 그들을 위해서도 기도한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아버지와 아들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세상은 아버지가 아들을 보내신 것을 믿게 될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가 주신 새 계명을 지킬 때 그들은 하나가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맺기를 원하는 열매일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영광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된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함이다.
요한복음 18장
드디어 예수가 잡히는 장면이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요한복음 저자는 이 장면에서 예수가 잡히신 것이 지극히 자발적인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는 힘이 없어서 부득이 하게 잡히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기 위해 스스로 잡히신 것이다. 예수는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려가서 심문을 받는데 그 자리에서 이뤄진 짧은 대화는 그 심문이 얼마나 불법적인지 잘 보여준다. 사람을 잡아왔으면 당연히 자신들이 파악한 죄를 적시하며 심문해야 하는데 대제사장은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이미 드러내 놓고 말한 것이므로 들은 자들이 다 알고 있는데 왜 나에게 묻느냐고 정당하게 대답하였다. 예수의 이 말을 듣고 대제사장의 아랫사람 하나가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무례하게 대답하느냐고 하며 예수를 때리는 장면이 나온다. 대제사장이 권위를 가지고 있다면 그 권위는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여기서 대제사장은 자신의 권세를 불법하게 사용하면서도 그 권세를 주장하고 남용하고 있다. 하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세우신 메시아가 불법한 대제사장으로부터 심문을 받는 장면은 참으로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메시아는 자신이 권세가 없거나 힘이 없어서 이런 치욕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왕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백성을 지배하고 군림하지만 하나님나라의 왕은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백성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그런 왕이시다. 대제사장이 예수를 심문하는 이 장면은 불법한 세상 권력과 하나님나라의 참된 권세가 얼마나 다른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갔을 때 빌라도는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는지 물었고 그들의 대답은 이 사람이 행악자라고 고발했다. 빌라도가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한 것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에게 로마법으로 처벌한 죄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강압으로 말미암아 빌라도는 예수를 심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처음 한 말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는 질문이었다. 이로보아 아마도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한 죄목은 예수가 스스로를 유대인의 왕으로 주장했다는 것으로 보인다. 빌라도의 이 질문에 대해 예수는 그 질문이 빌라도 스스로 하는 말인지 유대인들에게 들은 말인지를 반문한다. 예수가 이런 반문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빌라도의 심문 역시 불법적인 것임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판단하지 않았으며 그렇다면 예수는 로마를 대적하는 정치적으로 위험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고 처벌하는 것은 불법한 일이 되는 것이다. 빌라도는 이 말이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고발한 죄목임을 밝히고 유대인의 왕이라면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는다. 빌라도의 이런 질문 역시 앞서 대제사장의 심문과 마찬가지로 불법한 일임을 보여준다. 사람을 심문하려면 먼저 그의 죄를 적시하고 그 죄에 대하여 물어야 하는데 죄가 뭔지도 모르고 무엇을 하였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이런 질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내 나라가 이 세상이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하나님나라가 내세에 속한 나라이거나 영적인 나라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질서와 전혀 다른 나라임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 나라의 종들은 자기 왕이 유대인들에게 넘겨지는 일을 막기 위해 싸우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의 이 말을 듣고 빌라도는 그 말이 예수가 자신이 왕임을 시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왕임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불법한 세상 권력 앞에서 예수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예수는 자신이 진리를 위해 태어났고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으며,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를 증언하는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진리가 무엇인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요한복음의 문맥에 의하면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나라를 지칭하는 의미로 보인다. 표적의 책인 요한복음은 예수가 다양한 표적들을 통해서 도래하는 하나님나라를 증언하였고 자신이 바로 그 나라의 메시아이심을 증언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증언한 그 나라는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 이 세상의 질서와 전혀 다른 질서를 가진 나라다. 세상 나라는 권력자들이 지배하고 압제하지만 그 나라에서는 왕이 자기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다. 그러므로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며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이 세상에 속한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나라이며, 그들은 알 수 없는 나라다. 오직 위에서부터 남으로(거듭남으로) 그 나라에 들어온 자들만이 볼 수 있는 나라다. 그래서 예수는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9장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한 자임을 알았기에 그를 놓아주려고 했다.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 한 것은 유대인들을 적당히 만족시켜 예수를 놓아주기 위함이었다. 대제사장의 무리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빌라도는 예수에게 죄를 찾지 못했음을 강변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예수가 유대 법에 의하면 당연히 죽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표현은 단순히 메시아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는 신성모독의 죄를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했고 예수에게 다시금 어디에서 온 자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았다. 빌라도는 예수의 이런 침묵에 의아해 하며 자신이 예수를 놓은 권세도 있고 죽일 권세도 있음을 강조하지만 빌라도의 그런 주장은 공허한 것이었다. 예수는 다시금 위에서 주지 않았다면 빌라도든 유대인이든 자신을 해할 권한이 없음을 확언한다. 예수의 죽음은 자신의 백성을 위한 자발적인 죽음이지 힘이 없이 부득이하게 당하는 그런 죽음이 아닌 것이다. 예수를 놓으려는 빌라도의 노력은 헛되게 끝나고 만다. 예수를 놓으면 로마황제의 충신이 아니라는 유대인들의 함성에 빌라도는 무너지고 만다. 유대인들은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로마황제를 반역하는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이런 주장은 자신들의 왕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가 아니라 로마황제임을 스스로 시인한 말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신들의 왕을 버리고 로마황제를 왕으로 삼기로 작정함으로써 자신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자인한 셈이다.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는 히브리어와 로마와 헬라 말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된 죄패가 붙었다. 이것은 물론 거짓된 죄목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죄패는 예수의 죽음이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나라 왕으로서의 죽음임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의 마지막 순간은 이렇게 간단히 묘사된다. 예수는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고 자기 백성을 위해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 이루셨다. 예수는 왕이기 때문에 죽으셨고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죽었고 그 날 무덤에 묻혔다.
요한복음 20장
예수는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고 당일에 무덤에 묻혔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토요일)이었다.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 새벽 아직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묻힌 무덤을 찾아왔다. 이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때에도 그 곁에 있던 여인이었다. 막달라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굴려진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알렸다. 제자들은 그 말을 듣고 무덤으로 달려가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확인하게 된다. 막달라 마리아나 제자들의 이런 행동을 보면 그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기대를 전혀 하지 않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도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요한복음의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여인의 증언은 효력을 갖지 못하는 유대 사회에서 부활이란 이 중차대한 사건을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였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에가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신 말은 막달라 마리아가 붙들면 예수가 아버지에게 올라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마리아가 예수를 눈으로 보고 지내는 그런 때는 지나가고 새로운 때가 도래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처음으로 제자들을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며 예수의 아버지, 예수의 하나님이 곧 제자들의 아버지이고 제자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제자들은 예수의 형제가 되고 예수의 아버지가 곧 제자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놀라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예수를 보내 하나님나라를 세우신 것같이 이제 예수는 제자들을 보내 자신이 세운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그 나라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 오직 그 나라에 속한 자들만이 그 나라를 볼 수 있고 알 수 있기에 그 나라를 증언할 사람들은 오직 제자들뿐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예수는 제자들을 선택했고 그들에게 표적과 증거로 가르치신 것이다. 바로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성령이 필요하기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이 실제로 성령을 받는 사건은 예수가 승천한 이후인 오순절 성령 사건 때에 일어난다. 성령이 오시기 위해서는 예수가 아버지에게 올라가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승천한 예수가 아버지에게 구하여 보내셔야 하기 때문이다. 아버지께 예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오시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가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성령을 받으라 하신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을 하신다. 이 말을 제자들이 성령을 받음으로 그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주어진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이런 해석은 문맥에 어울리지 않으며 실제로 신약성경은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말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기 전에 앞서 말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제 제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수가 세우신 하나님나라를 세상에 증언하는 일이다. 제자들이 그 나라를 증언할 때 그 말을 듣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나라에 들어올 것이요 그 말을 듣지만 거부하는 자들은 그들의 죄가 그대로 있을 것이다. 결국 이 말은 제자들의 복음 증거에 따라 사람들의 죄가 사해지기도 하고 그대로 있기도 할 것임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가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만 이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어지는 도마 이야기는 제자들이 대체로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음을 암시한다.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도마에게 하신 예수의 말씀은 모든 제자들에게 해당될 것이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는 예수의 말은 이제 예수를 보지 못했지만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복을 가리킬 것이다. 그런데 도마가 부활한 예수를 향하여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한 부분은 매우 특이하다. 왜냐하면 도마는 부활한 예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고백했기 때문이다. 유일신 사상에 충실한 유대인인 도마가 어떻게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무엇이 도마로 하여금 이런 고백을 하게 만든 것일까? 이 대목에서 도마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면 모르겠지만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매우 의아하다. 물론 요한복음은 예수의 신성을 증거하고 있지만 도마가 갑자기 이 대목에서 예수를 하나님이라 부르며 그의 신성을 고백하는 장면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의 기자는 자신이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면서 예수가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함이요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많은 표적들의 목적이 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 표적들이 하나님나라 표적인 것은 그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예수가 그 나라의 왕이심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예수가 그 나라의 왕이심을 믿는 것이 바로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임을 의미한다. 예수가 그 나라의 왕이심을 믿게 될 때 그 믿는 자는 자신이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동시에 왕이신 그 분의 통치에 순종해야 하는 자임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표적이란 말이 다시 등장하는 것인가? 이미 표적은 나사로를 살린 마지막 표적으로 다 끝나고 12장 이후에는 표적이 등장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요한복음의 기자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마지막 표적, 혹은 최고의 표적으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요한복음 21장
대부분의 학자들은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나고 21장은 나중에 편집과정에서 덧붙어진 부록이라고 본다. 이런 주장의 이유는 요한복음 20장의 마지막 구절이 요한복음을 마무리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20장의 마지막 구절을 반드시 요한복음 전체의 마무리 구절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구절은 20장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부활하신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났고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내는 표적중의 표적인데 도마로 대표되는 제자들은 그 표적을 오히려 믿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요한은 자신이 이 책에 기록한 표적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표적들임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요한복음의 기자가 21장으로 요한복음을 마무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1장이 중요한 이유는 20장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와 관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1장은 20장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제자들의 사명에 관해 보다 선명한 그림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본업인 물고기를 잡으러 가겠다고 한 일은 부활하신 예수가 나타나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사명에 대해 제자들이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 보여준다. 이제 제자들은 물고기 잡는 일로 살아갈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증인으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직업이 어부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밤이 새도록 애썼지만 그 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난 부활한 예수는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시고 그들에게 아침까지 준비하여 먹으라고 하셨다. 이 장면은 하나님나라를 증언할 제자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만일 제자들이 사명을 저버리고 먹고사는 문제에 골몰하다면 아무리 애써도 그들이 먹고살지 못할 것임을 보여준다. 조반을 먹을 후에 이어지는 대화는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타난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다. 그것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예수의 명령이다. 제자들의 사명은 예수의 양으로 비유된 하나님나라 백성들을 돌보고 섬기는 일이다. 예수가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주었듯이 이제 제자들은 예수의 양, 곧 예수를 왕으로 섬기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을 돌보고 섬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제자들을 택하고 가르치신 목적이요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다시 살아난 목적이다. 이것을 떠나서 제자들의 존재 이유는 없다. 예수는 내 양을 치라고 명하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묻는다. 제자들이 예수의 양을 치는 일은 곧 예수를 사랑하는 일이다. 예수 사랑은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가 세우신 하나님나라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그 나라의 백성들을 돌보는 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나라 왕으로서 그 나라를 다스리심을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왕이신 예수의 통치는 세상나라와 달리 강압적으로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 백성들이 그 나라 왕을 사랑하여 자발적으로 순종함으로 이뤄진다. 그리고 그 순종과 사랑은 죽음으로도 막지 못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으로 나타날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