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
해방신학
2017-04-06 21:07:51
1. 정치신학과 함께 1970년대 부터 특수한 상황적 문제들을 다루는 다양한 형태의 상황신학들이 등장한다,. 이 신학들은 해방신학과 같이 특정 지역의 문제를 다루는 형태를 갖기도 하고 여성신학과 같이 인류와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주제를 다루는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해방 신학의 역사적 뿌리는 수백년에 걸친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과 억압의 상황에 있다. 역사적 배경 외에 해방신학의 등장에 직접적 촉매가 된 것은 제2차 바타칸 공의회이며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 쿠터와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운동, 리처드 쇼올의 혁명의 신학, 골비처의 WCC 등이 신학적 배경을 이루고 있다.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속에서 망각되어버린 사람들, 비인간이 된 사람들의 비참한 상황 속에서 이들을 정치적, 경제적으로 해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따라서 해방신학은 해방에 관한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해방의 실천이다.
2. 해방신학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비참한 현실에서 출발한다. 해방신학은 민중들의 특수한 삶의 현장에 뿌리를 두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향한 해방과 변혁을 추구한다. 해방신학의 중요한 과제는 세계의 해석이 아니라 세계의 변혁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편적으로 해석하는 전통신학과 달리 해방신학은 편파적으로 이해한다.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사랑의 편파성을 가난한 자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란 명제로 나타내는데, 이 명제는 신학의 모든 명제들에 대한 해석학적 원리가 된다.해방신학에서 하나님은 해방자 하나님이며 예수 역시 해방자로 이해되고 성령도 본질적으로 해방자로 이해된다. 이렇게 해방신학은 하나님을 해방자이신 삼위일체로 이해한다. 해방신학은 죄의 개인적 내면적인 측면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죄의 개인성보다 구조성을 더 강조한다. 따라서 구원을 사회의 구조악으로부터의 해방과 구조악으로 말미암아 훼손된 생명의 치유로 이해한다. 해방신학은 해방과 치유로서의 구원에 대한 대표적 근거를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에서 발견한다.
3.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들이 단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구원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가난한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교회를 인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 구원의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의 잠재력에 대한 해방신학의 통찰은 가난한 자들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데 까지 확대된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종말이 서구신학에서 말하듯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단지 미래로부터 현재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투쟁을 통한 해방의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물론 해방신학은 하나님나라의 성장과 완성이 인간의 노력과 투쟁을 이뤄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임을 인정하지만 이 선물은 해방의 역사적 실천 속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된다고 말한다.
4. 라칭거는 해방신학이 가난한 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간주하고 하나님나라를 계급투쟁을 통한 해방운동과 동일시하며 신앙을 역사에 대한 신실함으로 대체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인간의 해방 자체를 하나님의 구원이나 하나님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다. 해방신학도 인간의 해방은 언제나 부분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가난의 원인이 부분적으로 가난한 자들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문제로 보인다. 혁명과 해방만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간주하는 것도 해방신학이 갖는 한계이다. 그리고 해방신학이 사회적 구조악의 해방을 강조하면서 가난한 자들 안에도 숨어있는 인간의 죄된 본성을 충분히 고려하기 않는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해방신학의 방법론
2017-04-12 19:31:37
1.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의 경험으로 성경을 읽고 가난한 자들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준거점으로 삼는다. 해방신학은 위로부터의 신학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이 겪는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의 신학적 자리는 가난한 자들이 처한 사회적-경제적 상황이다. 해방신학은 텍스트로부터 출발한다기 보다 컨텍스트로부터 출발하는 신학이다. 구티에레즈는 해방신학은 해방과 해방의 실천에 관한 신학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역사적 해방 실천과 그 경험으로부터 신앙을 이해하고 해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세계를 성찰하고 해석한다고 말한다.구티에레즈는 억압된 자, 빈곤한 자만이 세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며 억눌린 자의 인식론적 특권을 주장한다. 해방신학의 키워드는 해방인데, 여기서 해방이란 영적, 개인적, 실존적 해방이 아닌 사회적, 역사적,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며, 이 역사상의 해방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결부짓는다.
2. 해방신학의 출발점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해방신학의 과제는 신학에 대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라 불의한 사회를 정의의 사회로 변혁시키는 것이다. 해방신학에서 신학의 목표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해방신학은 신학의 탈이데올로기를 위해 불트만식의 비신화화처럼 성경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을 시도한다. 불트만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존재에 대한 실존주의적 분석을 사용했다면 해방신학은 사회구조를 압제로 보는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을 사용한다. 해방신학은 일차적으로 신학의 해방을 주장하며 모든 지배적 신학, 보편신학에 대한 의심의 해석학을 시도한다. 순수한 신학이나 중립적인 신학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신학은 사회적 자리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신학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으므로 기득권의 편을 들거나 아니면 가난한 자의 편을 들게 된다는 것이다.
3. 어쩌면 역사상의 모든 신학은 앵글로 색슨, 백인 남성, 부르조아를 위한 신학일 수 있다. 서구의 지배적 신학은 대체로 평민들을 위한 신학, 노예나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신학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궁중신학, 국가신학이었다. 그것은 흑인이 아닌 백인을 위한 신학, 가난한 자가 아닌 가진 자를 위한 신학, 여성이 아닌 남성중심적 신학,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위한 신학이 아닌 인간중심, 자연지배의 신학이었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비주체자들의 신학이며, 역사의 승리자와 정복자들에 대한 희생자들과 패배자들을 위한 신학이다. 그러므로 해방신학은 신학적 방법론에 있어서 보편신학, 표준신학이라는 이름을 내걸었던 모든 신학들이 사실상 특정 계급들의 이익을 위해 신학적인 봉사를 했다는 점을 직시하면서 신학의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을 선결과제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해방신학을 주변부의 신학 혹은 역사의 이면에서 출발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신학의 주요쟁점
2017-04-12 19:45:14
1. 가난한 자를 위한 하나님의 우선적 선택
하나님은 구원사를 전개할 때, 누구보다 가난한 자들, 사회적 약자들을 먼저 선택하신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과 계시의 특별한 도구로 사용되며 하나님은 역사의 밑바닥으로 먼저 내려오신다고 말한다. 복음주의 신학자 로날드 사이더도 성경역사에서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에 있다고 말한다. 해방신학자들은 역사상 기독교는 항상 하나님에 대해 보편주의 사고를 대입했고 당파적 하나님을 혐오했는데, 그 이유는 교회가 콘스탄티누스적 국가교회로 탈바꿈하면서 체제 안정적이면서 번영신학을 요구하는 지배계층의 종교성을 떠받들어 주는 신학을 제공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보편주의 기독교는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유럽, 백인, 남성, 국가, 부르조아의 정치적 이념적, 계급적 표준치 아래서만 형성되어왔다.이런 기독교는 밑바닥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해방적 면모, 구원과 하나님나라에 대한 세계변혁적 착상, 교회에 대한 대인적 사고들이 도출될 수 없었다. 해방신학은 하나님의 선택에는 신주권적 동인과 함께 사회적 동인이 포함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이지만 유별나게 가난한 자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난한 자들 먼저 사랑하는 당파적 사랑이다. 구약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애굽제국의 압제아래 희생당한 노예집단을 선택하여 약자들을 위한 정의로운 대안사회를 구축하신다는 것이다.
2. 죄는 역사 안에서 발견되는 구조악이다.
해방신학은 죄는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고 언제나 역사적 실재로 출현하는데 그것은 사회의 시스템안에 내재화된 악으로서 구조악이라고 말한다. 구조악은 사회질서와 문화현상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힘의 실체로서 실존하는 악이다. 따라서 죄로부터의 돌이킴, 즉 회개는 단지 인격 배면의 사건으로서의 회심이 아니라 타인과의 나눔과 친교를 독점하고 차난하는 행위로부터 돌아서는 사회적, 경제적 전향이다. 궁극적으로 회개는 개인적 회개만이 아니라 사회, 경제적 회개이며 이웃관계의 파괴된 죄에 대한 회개다. 또한 구원은 하나님의 용서나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다.
3. 역사적 차원에서 구원의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해방신학은 선교의 무대를 교회에서 세상으로 옮겨간다. 왜냐하면 교회밖의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활동이 진행되고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역사를 초월하여 일어나거나 역사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내적 과정에서 일어난다. 그러므로 구원사는 역사안에서의 구원이며 구원은 역사내적 실재(intrahistorical reality) 복음주의 선교관의 최대 약점은 하나님의 구원활동을 그리스도에 대한 인격적 믿음으로 고백하는 개인적 차원으로 제한함으로써 구원의 역사지평을 배제한다는데 있다. 결국 복음주의 구원관은 어쩔 수 없이 개인구원과 인격구원의 차원에 머물면서 사회구원을 포괄할수 없게 된다. 현대신학자들은 구원을 개인이나 교회의 차원을 넘어서 역사의 차원에서 해석하려고 했다. 해방신학은 전통신학이 구원을 내면화 사사화시킨 것을 비판하면서 구원의 사회적 역사적 지평을 강조한다. 특별히 해방신학에서 역사상의 해방은 하나님의 구원과 별개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방신학이 역사상의 해방을 죄로부터의 해방 그 자체로 보지는 않는다. 다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모든 차원의 죄로부터 총체적 해방을 가져오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불의로부터 해방 역시 그리스도가 가져오는 부분적 해방으로 본다.
4. 하나님나라와 인간 사회의 진보
해방신학은 구원을 역사내적 사건으로 강조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현세화, 물질화하여 구원을 역사안의 해방과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진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 구티에레즈는 정의의 사회를 건설하는 일은 하나님나라 건설로 환원될 수 있으며 해방활동에 참여하는 일 그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구원사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구테에레즈가 헨세적 진보를 하나님나라의 성장과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실재는 현세적 진보와 관련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이다. 양자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는 않는다. 구티에레즈는 구원과 해방의 관계를 구별하고 있긴 하지만 두 관계의 연속성에 비중을 둔다. 그에 의하면 해방은 구원의 한 차원이며 둘은 구별 가운데 연속성을 갖는다고 말한다. 개인주의적 복음주의 모델에 서있는 존 스토트는 구원 물질적이나 정치적 해방이 아니라 도덕적이며 죄로부터의 구조라고 말한다. 스토트를 비롯한 복음주의 전반의 이런 구원 이해는 근본적으로 구원을 인격구원의 차원으로 규정하면서 구원을 사회- 구조보다는 개인-인간과 더 관련을 시킨다. 존 스토트의 신학에서 창조의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 우주적 하나님과 언약의 하나님, 세계와 교회, 일반은총과 구원은총, 칭의와 사회정의, 사회개혁과 인간의 중생은 명백하게 분리된다. 그러나 스토트의 이런 개인주의적 구원관은 개혁주의 신학의 총체적, 우주적 구원관과 명백히 차이가 있다. 이와 달리 신킬빈주의 구원관을 표방하는 리처드 마우는 구원은 인격적 믿음을 통한 개인적 칭의와 회개이면서 동시에 죄의 왜곡된 권세로부터 전 창조질서의 구원이라고 말한다.
5. 해방신학의 기독론
예수의 죽음은 신학적 관점에서는 구원약속에 대한 성취의 죽음이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자발적인 자기 희생의 죽음이지만 현실 역사의 관점에서는 억울한 희생물의 죽임이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들을 세계의 악으로부터 패생된 희생물로 본다. 그래서 가난한 자들의 불행을 이 세계의 악을 대신 짊어지는 대리적 고난, 대리적 죽음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점에서 가난한 자들은 예수 고난과 죽음의 집단인격이자 대리인격으로서 대속적 역할을 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가난한 자들은 역사의 해방의 주체이므로 그들의 고난은 이 세상의 희생물들을 위한 대리적 고난이요 죽음이며, 그들은 예수 고난과 죽음을 통해 가져오는 대리 속죄적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난한 자들을 너무 미화하며 나아가 가난한 자들의 죄악을 간과한다는 비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