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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왕의 복음-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메르시어 2023. 5. 14. 16:50

예수 왕의 복음-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2017-03-30 12:07:28


1. 마태복음이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로 소개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아브라함의 정체성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천하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려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아브라함 이야기가 등장하기 전에 주어진 창세기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이스라엘 민족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와 관련된 것임을 암시한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온 인류를 대표하여 그리고 온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경륜의 도구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이 예수를 아브라함의 아들로 소개한 것은 예수가 온 인류와 관계된 분이심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 마태복음은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소개하는데 이것은 예수가 다윗의 뒤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의미한다. 바벨론 포로이후 왕없이 살아 온 이스라엘은 다윗의 뒤를 잇는 왕을 기다려 왔는데 이것이 바로 메시아 사상이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바로 이스라엘이 오래 기다려온 바로 그 왕이심을 알하고 있다. 동방박사 이야기도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다시금 확인해 주는데, 그 확인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소개와 마찬가지로 예수가 이스라엘 민족만의 왕이 아님을 암시해준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도 한 자손을 약속하며 그로 인해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고 하셨고 다윗에게도 영원히 왕권을 이어갈 한 후손을 약속했다. 그렇다면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란 말은 바로 예수가 바로 약속의 자손임을 의미할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손으로 이삭이 태어났듯이 이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자손으로 예수가 오신 것이다.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세례요한의 선포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왕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왕의 임박한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회개가 요청된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왕이 오신다는 소식은 이스라엘의 회개를 요청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불순종했던 이스라엘에게 순종이 요구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이후 왕이 없었던 것은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제 왕이 오신다는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시므로 이제 이스라엘도 하나님께 돌아가서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회개가 의미하는 내용이었다. 세례 요한이 왕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 이런 선포를 했다면 예수는 왕으로서 동일한 선포를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화개하라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예수의 선포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오셨다는 선포였으며 왕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순종을 명령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갈릴리의 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당연히 그는 예루살렘의 왕궁에 거해야 하지만 지금 예루살렘의 왕궁에는 자칭 왕이라는 헤롯이 버티고 있고 정작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갈릴리의 변두리에서 자신의 왕적 사역을 시작했다. 왕으로서 그의 첫 사역을 제자들을 불러 세우는 일이었는데 이것은 단지 랍비로서 제자들을 모은 일이 아니라 왕으로서 자기 백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제자를 세우는 일은 이후 제자들을 통해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며 그리하여 예수가 왕으로 다스리는 나라, 곧 하나님나라 백성을 만드시는 준비였다. 

 

3. 예수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여러 이적과 치유사역들 그리고 다양한 비유들을 통하여 자신을 통하여 도래하는 하나님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그리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제자들의 정체성과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특히 산상수훈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가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나라의 질서며 통치 원리라고 볼 수 있다. 가이사라 빌립보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 하느냐고 묻는다. 제자들의 대답을 보면 당시에 대부분 유대인들은 예수를 선지자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를 메시아, 곧 하나님이 보내신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한다. 제자들의 이런 고백은 예수가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비록 암시적이지만 분명히 드러내었음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들의 메시아관은 대단히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난다는 이야기에 두려워하거나 심지어 두려워한다. 제자들의 메시아관은 당대의 유대인들의 메시아관과 동일했을 것이며, 그들의 메시아관으로는 예수의 이런 말은 도무지 납득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예수는 고난을 당하고 죽는 메시아요, 다시 살아나는 메시아였으니 이런 메시아를  제자들은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나라의 왕이 이렇게 이해 불가한 왕이니 그 나라도 이해 불가한 나라였다. 제자들의 관심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는 것이었지만 예수는 천국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말한다. 그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가 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세상 나라의 왕들은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지만  하나님나라 왕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자기 백성을 위해 내어주려고 오셨다. 

 

4. 예수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나귀를 탄 것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들어감을 보여주는 상징 행위였다. 그러나 예수는 백마가 아니라 초라한 나귀를 탄 겸손한 왕이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성전에서 하신 일이나 종교지도자들을 책망하신 일들은 모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신 왕적 사역이었으니 그것은 한마디로 위선과 불순종에 대한 심판이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예수가 하신 행동과 말들은 모두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드러내고 왕으로서 하신 일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는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주장을 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며 또한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스스로 죽으신 것이다. 죽음을 앞둔 유월절 식사에서 예수가 자신의 죽음이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피라고 말한 것은 예수의 죽음이 자기 백성의 죄를 인하여 죽는 왕적 사역임을 암시한다. 특히 그  죽음을 "언약의 피"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죽음이 언약적 죽음인 것을 의미한다. "언약의 피"란출애굽기에 처음 등장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후 언약체결 의식으로 화목제물의 피를 제단과 이스라엘에 뿌린 피를 지칭한다. 이 언약의 피는 언약을 맺은 양 당사자들이 모두 언약에 생명을 걸고 참여함을 상징한다. 이는 만일 어느 일방이 언약을 배반한다면 그는 반드시 죽음으로 그 댓가를 치뤄야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언약의 피라고 지칭한 것은 그의 죽음이 언약을 배반한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죽는 언약적 죽음인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을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의 죽음으로 간주되는 법적 효력을 갖게된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발적으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라면, 그의 죽음은 자기 백성을 위한 왕적 사역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자기 백성을 위해 죽는 왕, 이것이 세상은 결코 상상할 수도, 흉내낼 수도 없는 하나님나라의 왕적 통치방식이었다. 

 

5. 대제사장의 심문이나 빌라도의 심문이나 주된 이슈는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이었다. 예수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임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심문에서 그것이 주된 이슈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로 행동으로 주장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예수는 왕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권력자들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동시에 왕이었기 때문에 자기 백성을 위해 스스로 죽으신 것이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는 로마군인의 조롱,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 왕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무리들의 비웃음은 예수의 죽음이 직접적으로 그의 왕권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죽음이 자기 백성의 죄사함을 위한 죽임이었듯이 그의 부활은 자기 백성을 위한 부활이었다. 이스라엘 왕, 예수의 죽음이 이스라엘의 죽음이었듯이, 이스라엘 왕이신 예수의 부활은 곧 이스라엘의 부활이었다. 당시에 부활은 이스라엘의 회복이었으며 이스라엘의 해방을 의미하는 종말론적 사건이었다. 종말에 일어날 일들이 지금 예수 안에서 일어난 것이 예수의 부활이다. 이제 부활한 예수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주어진 것은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으로 등극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 이것은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나라의 백성은 그 나라의 왕의 명령에 순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온 세상의 왕이신 예수는 다시는 자기 백성을 떠나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