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밖의 정의(Outlaw Justice by Ted Jennings)- 한수현
법 밖의 정의(Outlaw Justice by Ted Jennings)- 한수현
2017-03-03 08:41:08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론에 대한 짧은 소개글
1. 철학과 종교 그리고 정치 담론들이 분리되기 이전, 로마 시대에 유대교의 한 지식인이 로마제국의 정의에 대항하여 새로운 정의를 외치며 일어났다. 그가 쓴 서신이 오늘날 아직도 신약성서 안에 바울서신으로 남아있다. 테오드르 제닝스 교수는 바울의 로마서가 바로 진정한 정의에 대해 말하는 책이라고 말한다. 제닝스는 자신의 책 Outlaw Justice에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정의란 무엇이며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제닝스 교수는 바울 텍스트의 다양한 해석의 층위를 인정하면서도 정의론적 관점에서 읽는 것이 로마서에 바르게 접근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이신칭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라고 일컬어지는 교리적 근거로 사용되던 로마서가 제닝스 교수의 손에서 메시아에 대한 층성으로 구현되는 정의로 탈바꿈되고 있다. 바울서신을 정치적 관점에서 읽는 것은 오늘날 철학과 성서신학 내에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 지젝, 바디우, 아감벤 등의 철학자들이 바울 서신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있고, 탈식민주의나 맑스주의 성서신학자들도 바울을 새롭게 읽는데 그 핵심에는 모두 메시아 정치학에 대한 담론이 있다. 이렇게 바울을 새롭게 읽는 두 가지 흐름에는 기독교 신학 외적인 흐름과 신학 내적인 흐름이 있는데, 제닝스 교수는 정확히 이 두 흐름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책을 쓰고 있다.
2. 기독교 내에서 오랜 세월동안 루터와 킬빈식의 바울 읽기는 개신교 신학의 토대로서 받아들여져 왔고, 이후 바울 신학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인에서 의인으로 칭함을 받는 문제에 대한 연구와 논쟁으로 점철되어 왔다. 이러한 바울읽기는 반유대주의, 반율법주의, 그리고 기독교가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기독교 우월론을 생산하는데 중요한 해석의 근거가 되어왔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해석들을 극복하는 흐름들이 성서학계에서 일어났다. 서구 사회는 2차 대전의 유대인 대학살로 인해 정신을 차리게 된 이후에야 반유대주의적이고 종교우월적 해석에서 벗어나 바울을 다시 읽기 시작했고 그 결과 바울은 유대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따라서 반유대적인 가치로 기독교를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그렇다면 바울이 그토록 혹독하게 비판한 율법적 신앙 혹은 율법적 (정)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최근에 이르러서야 바울이 비판한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 로마제국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비판한 율법이 모세의 율법만이 아니라 로마의 법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바울의 율법 비판은 그가 예수의 부활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의 관점에서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3. 신학 외적인 흐름에서 바울 서신이 중요해진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자본주의의 끝도 없는 질주를 민주정치 체제가 막아낼 수 없을 것이란 의심이 확산되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레닌주의에 대한 재조명이 민주정치 체제에 대한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다. 자본주의 안에 살면서 자본의 힘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비전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이 어려운 질문에 레닌은 형식(form)이 내용(content)에 선행한다는, 당이 당의 정신과 목표보다 먼저라는, 다른 의미로 말하면 새로운 비전이 먼저가 아니라 희망을 생산할 수 있는 형식(form), 집단, 또는 공동체의 창설이 먼저라는 해답을 내놓았다. 이에 착안해 루카치와 지젝은 바울이 예수의 가르침을 하나의 당의 형태로 만드는 것에 집중했다고 보았다. 즉 바울은 제국에 대한 대안적 정치학으로 새 정치를 생산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데 필생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것이 바로 에클레시아, 현재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집단이었다.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만이 제국의 정치를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비전, 정의에 대한 인식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엥겔스와 맑스가 바울서신을 읽으면서 초기 공산당 조직에 대한 영감을 얻었고, 바디우와 아감벤이 국민의 삶 자체를 통제하는 국가 형태의 유일한 탈출구를 바울에게서 찾은 것은 공감할만하다.
4. 이런 두 가지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제닝스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어거스틴으로부터 근대의 칼 바르트, 현대의 지젝과 같은 철학자들과 브리짓드 칼과 같은 성서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소개하면서 로마서를 바울의 정의론으로 새롭게 읽을 것을 제안한다. 아마 독자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예수를 여호수아로, 의(righteousness)를 정의(justice)로 그리고 믿음(faith)를 충성(loyalty)으로 읽는 제닝스 교수의 독해에 놀랄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희랍어 번역이고, 예수는 히브리식 이름인 여호수아의 아람어 표현이며, 또한 의라는 표현은 영어식 번역의 오류로서 이보다는 정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희랍어 피스티스는 믿음보다는 충성이 더욱 적절한 번역이다.(피스티스를 신실함이라고 생각하면 충성이 가진 의미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제닝스는 Outlaw Justice에서 바울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바울 해석의 역사와 정치론적 해석의 역사를 쉽고도 깊게 서술하면서 로마서 전체에 걸쳐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정의와 그 정의에 기반을 둔 공동체가 어떤 것인가를 바울의 생생한 증언으로 들려준다. 제닝스의 설명과 함께 새로운 정의의 공동체에 대한 바울의 신념을 듣다보면 로마서가 현대의 새 정치를 갈구하는 독자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외침임을 알게 될 것이다.
5. 토탈리티(Totality ; 전체성, 총체성)
오랫동안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인간 개인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고 생각해왔다. 제닝스는 이에 반하여 바울은 사회적 콘텍스트로부터 분리된 개인의 죄의 총합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공동체들의 죄를 비판했다고 말한다. 바울이 말한 보편적인 죄는 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공동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적인 죄는 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불의에 기반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일견 루이 알튀세르의 총체성 개념과 라인홀드 니버의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떠올리게 한다. 즉 불의의 원인을 추구하다보면 한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불의를 생산하는 구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데리다가 "법의 힘"(Force of Law)에서 법이 정의의 생산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과 같이 제닝스는 바울이야 말로 유대와 로마의 법이 인간 사회를 불의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알아차린 인물이라고 본다. 헬레니즘 시대로 부터 플라톤이나 슬론과 같은 천재들은 법이야 말로 인간 사회에서 정의를 생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더욱 나은 법체계를 만드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닝스는 바울은 "정의와 법 사이에는 회복할 수 없는 갈등이 존재하며, 정의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법 밖에서 도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제닝스는 이신칭의는 바울에게 정의를 실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으며, 충성심(피스티스)를 통하여 구체화된 하나님의 정의가 바로 복음이며, 바울이 대명제였다고 본다. 제닝스는 데리다의 정의에 대한 이해가 바울서신, 특히 로마서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시한다고 보면서, 데리다가 정의는 정의 밖에서 그리고 정의를 넘어서 나타나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정의가 법을 행함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주장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법 밖의 정의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인가?
6. "환대로서의 정의"(Justice as hospitality)
이 개념은 제닝스가 데리다를 전유하여 바울의 중요 주제로 제시한 것이다. 제닝스는 데리다의 저서인 " 법의 힘"에서 해체와 정의를 하나로 묶어 사용하는 해체의 실천적인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즉 데리다의 해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법-정의-환대라는 연결고리가 나타났으며 이런 징후를 바울서신에서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가 불가능한 가능성이었던 것처럼 바울에게 충성(믿음, 신실함)은 불가능을 믿는 행위였다. 바울은 믿음을 설명하면서 아브라함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고 말하는데, 이를 데리다식으로 말하면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야말로 해체적 정의와 가까운 불가능성 위에서의 신실함이었다. 그래서 바울에게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은 불가능함 속에 가능성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선물이었고 이는 완전히 인간이 만든 체계 밖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메시아가 유대인들에게 거절당하고 로마에 의해 죽임당했다가 부활했다는 것은 바로 유대의 법치 사회와 로마의 문명화된 법의 해체를 의미했다. 그래서 메시아를 하나님의 정의로 선포하는 것은 법 밖의 정의이며, 메시아에 대한 믿음(충성)이야말로 정의의 길을 걸어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메시아에 대한 충성이 하나님의 정의를 간직하는 것이라면, 그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 공동체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것인가?
7. 바울은 일단 사회적 불의의 총체적 현실을 인정한다. 비록 하나님의 정의가 선물로 주어졌다고 하더라도 불의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 사회는 여전히 죄의 현실 아래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법의 역활이 구체화되는데, 법은 인간이 죄의 현실에 처하여 있으며, 하나님의 정의가 법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게한다. 바로 이 순간이 법이 활동정지(inoperative)하는 순간이며, 이것이 바울이 말한 바,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법을 완성시키는(fulfilled) 순간이다. 그리고 남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 밖에는 없다.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이 이방인의 지혜로도 유대인의 종교로도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정의는 실로 예측할 수 없다. 여기서 제닝스가 생각하는 로마서의 정의의 두번째 요소인 정의의 즉흥성(Improvisation)이 등장한다. 정의는 계산되거나 예측되는 것이 아니다. 정의의 개념을 인간의 어떤 지식 체계에 가두려는 시도는 결국 인간 사회의 불의를 더욱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의 정의의 즉흥성에 대한 무조건적 믿음이 바로 정의의 시작이다. 그런데 인간의 지혜로서도 종교 전통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면 바울은 어떻게 그 정의를 담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제닝스는 그 해답을 로마서 12장부터 시작되는 바울의 권면에서 찾는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어찌보면 뜬금없어 보이는 바울의 권면이 바로 정의를 구현하는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다. 바울은 정의를 실현하는 도구로 철학이나 종교적 제의나 세상의 어떤 학문이니 기관이 아닌 바로 인간 몸을 생각했다. 그 몸은 개인의 몸이 아니라 다중이 모여 하나를 이룬 몸이다. 이것을 이해하는데 장 뤽 낭시의 Singular Plural의 개념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각자의 특이성 혹은 유일성(Singularity)들이 전체로서의 다양(Plurality)성과 연결되어 하나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메시아적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 메시아적 공동체의 삶은 즉흥적(Improvisational)이면서 환대(Hospitality)의 정신으로 외부로 열려진 공동체임을 설명하고 있다.
8. 그렇다면 이 메시아적 공동체는 어떻게 메시아적 정치론을 만들어 내는가? 이 책의 제목이 법 밖의 정의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우리의 관심은 도대체 어떠한 형태의 구체적인 정치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였다. 물론 정치라는 것이 하나의 공동체가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본다면 메시아적 공동체는 메시아에 대한 충성을 통해 환대의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해간다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제닝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바울이 주는 실질적인 정치학의 가능성을 데리다의 "도래할 민주주의(Democracy to come)"의 개념을 통해 제시한다. 이미 바울 시대 이전에 플라톤이 민주주의를 개념화했는데, 바울이 시도하는 환대의 공동체는 바로 현실의 모든 형태의 민주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더욱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그리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모든 이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바울이 말하는 타자에 대한 환영과 강자와 약자가 서로를 존중하는 정치학은 어찌보면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오랜 인간의 역사에서 주변인으로서 억압받았던 민중들은 한번도 역사의 주인공이 되어 본적이 없었다. 그들이 들고 일어설 때마다 힘있는 자들은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그렇다면 너무나 분명한 힘의 차이 앞에서 때로는 논리의 모순 앞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몸부림은 언제나 아무 희망없이 사라지게 되는 것일까? 그보단 우선, 왜 우리는 아직도 그런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가? 무엇이 우리 안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욕망의 잠을 깨우고 있는가? 제국을 뒤집어 보려는 운동도 아니고, 자신의 논리에 반대하는 진영을 시원하게 논파하는 이론서도 아닌 바울서신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우리의 욕망을 깨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바울이 제시했던 급진적 평등과 환대의 공동체에 대한 비전때문이 아닐까?
9. 제닝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메시아적 프로젝트를 보호하려는 모든 시도들은 결국에는 현실과 타협한다. 그러나 비록 타협하더라도, 또는 다른 메시지로 변질되더라도 바울의 메시아적 정치학은 여기저기에서 새롭게 희망으로 태어나 모든 형태의 지배와 분열의 형태에 저항한다. 바울의 텍스트는 언제나 기존 사회 질서에 어떤 형식으로든 저항해왔다. 이것이 가진 폭발적인 잠재력은 여전히 우리가 메시아적 정의의 부름과 선포를 듣고 일어나 충성을 서약하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의 목소리는 계속 남아 우리 안에 새로운 저항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데리다가 말한 것처럼 그 어떤 형태의 민주정치보다 사회민주주의 또는 대중민주주의보다 기독교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적들을 환영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민주주의는 자신의 뺨을 그 적들에게 돌려대고 환대를 제공하고 표현의 자유를 부여하고 반민주주의에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떠한 민주정치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 기독교 민주주의야 말로 민주정치라는 이름을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의 메시아적 프로젝트는 민주주의 그 자체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물론 이 민주정치는 절대로 현존하지 않고 도래할 것으로 언제나 남아있을 것이며, 이 도래할 민주주의를 바울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정의(Divine Justice)라 불러도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