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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필찬

메르시어 2023. 5. 13. 11:58

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이필찬

2017-02-22 20:44:07


요한계시록의 서론(1:1-8)

 

1.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아포칼립시스)" 라는 말로 시작함으로써(11), 이 책이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를 기록한 문서임을 밝히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묵시문학의 특징은 서사적 골격을 가진 초월성에 있다. 묵시문학은 일정한 이야기 형태를 가지고 그 안에 시간적 혹은 공간적 초월성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이 땅과 동시에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를 말하면서 공간적 초월성을 강조하고, 또한 교회의 종말론적 구원을 조망하면서 시간적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공간적 초월인 하늘에서 시간적 초월인 종말적 구원의 복을 현재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에게 이런 묘사는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대단히 영적이며 실천적이다. 요한은 이러한 공간적, 시간적 초월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상징적 요소 혹은 상징적 환상을 사용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사용한 이러한 묵시적 환상은 그 당시 교회가 처해있던 열악한 상황을 극복하기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묵시적 환상을 가진 초월적 세계는 여러 가지 내적, 외적 도전에 직면해 있는 교회에게 강력한 인내력을 부여하였다. 왜냐하면 묵시적 환상을 통해 보인 천상적 세계는 외부적으로 보이는 로마의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허구적 실체를 직시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인내하며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지시해주었기 때문이다. 현실에 대한 천상적 관점에서의 조망은 매일 매일 다가오는 도전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2. 또한 요한계시록은 자신을 "예언의 말씀"이라고 소개한다.(13) 구약 전통에서 예언이란 단순히 앞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셨던 일을 해석하여 그것이 어떻게 현재의 삶에 의미를 갖는지를 발견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각성시키려던 구약 선지자들의 주된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이 예언 선포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출애굽 사건을 근거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예견했던 것처럼 요한 계시록은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을 근거로 현재에 경험되고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구속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십자가에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모습과 부활하고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구약 선지자들과 연속성상에 서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정점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의 메시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기대해 왔던 것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3. 요한계시록의 세 번째 문학적 특징은 편지라는 점이다. 요한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다.(14-5) 그런데 편지의 인사말에 삼위 하나님의 특징들이 표현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이런 언급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내용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는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이 영원히 살아계시는 삼위 하나님이 현재에도 역동적으로 임하시는 모습을 묘사할 것임을 예상하게 한다. 또한 성령이 일곱 영으로 상징된 것은 어린 양의 승리가 교회(두 증인)를 통해 우주적으로 선포될 것을 예고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충성된 증인이며 땅의 왕들의 머리라는 표현은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충성된 증인노릇을 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왕들로 세워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가 돌려보도록 의도한 회람용 서신이다. 서신이 무시간적인 상황에서 기록되지 않으며 보통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일차적 독자의 상황을 고려하여 기록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곱 교회 모두가 문제가 있으며 그 문제의 핵심은 그들이 영적 전투에서 패할 수 있는 가능성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일곱 메시지마다 마지막에는 후렴구처럼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반복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영적 전투는 표면적으로는 로마의 제국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초래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단이 로마를 악한 세력의 총체로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영적 전투는 한편으로는 목숨을 위협하는 두려움으로 다기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자신을 방임하므로 영적 생명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요한계시록은 이런 상황에 처한 1세기 독자들에게 죽기까지 순종하라고 도전한다.

 

 

그리스도의 명령(1:9-20)

 

1. 요한은 요한계시록이 일곱 교회에 보내기 위하여 쓴 것임을 밝히면서, 이 일이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11) 이어서 요한은 12-20절에서 구약의 말씀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13절의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7 13절의 인자 같은 이를 반영하고 발에 끌리는 옷과 가슴에 금띠는 출애굽기 28 4절의 대제사장의 옷을 연상케 한다. 양털 같은 머리털, 불꽃같은 눈, 단련한 빛난 주석 같은 발, 많은 물소리 같은 음성(14-15)은 다니엘79절의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반영한다. 요한은 다니엘7 9-14에 나타난 메시아적 인물에 대한 묘사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 구약에서 메시아적 인물은 하나님 자신과 구별되어 나타났는데, 특별히 메시아적 인물의 대표적 원형은 다윗이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다윗처럼 위대한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건져줄 메시아의 출현을 기대해 왔다. 다니엘서는 이와 같은 메시아적 인물을 '인자 같은 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요한은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로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메시아가 되셔서 가장 완벽한 회복을 성취했다고 보는 것이다.

 

2.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구약의 기대는 신약에서 교회를 통하여 그 성취를 발견한다. 그러나 메시아로서 그리스도의 사역 대상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 분은 열두 지파 대신 열두 사도를 부르심으로 새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고 진정한 하나님나라를 수립하신다. 하나님나라를 구성하는 하나님 백성의 대표로서 열두 지파 대신 열두 사도가 세워졌으며 예수님은 하나님나라 임재의 증거로서 성령을 통해 귀신을 쫒아 내셨으며 그 나라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로 구성되며 그들은 서로에게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열두 사도들을 바로 교회의 기초라고 말하는데(2:20-22), 이는 신약의 이스라엘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는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구약 기대의 성취로서 만국으로부터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을 불러 모아 새 이스라엘인 신약 교회를 이루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오른손에 일곱별을 가지고 계시며(1:16) 요한이 1:12에서 보았던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신다.. 일곱별은 일곱 교회에 보내진 사자이며, 일곱 금 촛대는 일곱 교회를 가리키는데 여기서 메시아로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세우신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2:1-3:22)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단순히 윤리적 교훈을 제시하거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지금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전통을 이어받아 신약의 선지자로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교회에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 메세지는 여러 면에서 구약 선지자들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요한의 메시지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포했던 메시지의 정점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요한은 어떤 점에서 구약 선지자들의 유형을 따르고 있는가? 첫째로 메시지 서두에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이라는 표현은 구약 선지자들이 선호하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라는 예언의 서두를 연상케 한다. 둘째로 구약의 선지자들의 메시지들의 주된 목적은 정죄와 심판의 선포를 통한 회개의 촉구인데, 요한의 일곱 메시지도 대부분 심판의 선포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점은 요한의 편지에는 책망과 아울러 구약의 선지자 메시지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칭찬의 요소가 가미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상황을 종말론적으로 바라보았는데, 마찬가지로 요한도 종말의 정점을 종말론적 약속에 근거해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사실들은 일곱 메시지들이 구약 선지자들과의 연속선상에서 주어진 예언자적 메시지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성상의 특징이 있다. 첫째 서신의 일반적 특징인 서두와 결론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는 이 편지들이 요한계시록 전체와 구별된 독립적인 서신들이 아니라 이 편지 이후에 계속되는 이야기에 대한 배경으로서 주어진 예언자적 메시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로 각 메시지들은 모두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으로 끝맺고 있는데 이는 이 메시지들이 21-22장의 종말론적 극치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2-3장의 내용이 약속이라면 21-22장의 내용은 약속에 대한 성취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2-3장에서는 회개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21-22장에서는 그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 서두와 말미에 있는 이런 통일성은 요한계시록 전체의 통일성 있는 전개를 예시해 주고 있다. 셋째로 요한은 추상적인 교회에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교회에게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요한계시록 메시지 전체를 구체화하고 있다. 요한의 메시지를 받는 교회들은 하늘에서 안전하게 쉬고 있는 교회가 아니라 특정한 어려움과 유혹 가운데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심각한 위기를 맞은 채 살아가는 교회들이다. 만일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메시지들이 없었다면 요한계시록의 환상적 요소들은 인간의 경험세계와의 값진 접촉점을 상실하였을 것이다. 넷째로 일곱 메시지는 요한계시록이 일곱 교회뿐 아니라 소아시아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와 앞으로 존재할 모든 교회에게 전하는 것임을 보여줌으로써 요한계시록의 메시지 전체를 보편화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단지 일곱 교회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교회들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곱 교회에 전해진 메시지는 모든 시대 교회들의 특징적인 면들을 제시해준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성령이 교회들에게 말하는 것을 살피도록 요구하고 있다. 다섯째로 일곱 메시지들은 요한계시록 저자의 주된 관심이 교회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요한은 모든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에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을 통해서 교회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우주적 영적 전쟁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고 있다. 이 우주적 전쟁의 승패는 이미 십자가에서 결판이 났지만 그 전쟁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승리의 극치를 이룰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이 영적 전쟁에 참여하도록 요구받는다.

 

 

하늘의 성전 환상(4:1-5:14)

 

하늘의 성전 환상은 2-3장의 일곱 메시지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일곱 메시지가 교회의 지상적 존재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면 성전 환상은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의 의도는 지상의 존재에 상응하는 천상적 교회의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그 어떤 영적 전투 가운데서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교회의 안전성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21:2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교회가 하늘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신학적 진리를 내포하는데 그것은 이미 하늘에서 교회의 미래의 종말적 모습이 구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적 종말의 천상적 실재는 새 예루살렘 모티브를 통해서뿐만 아니라 새 창조와 종말론적 심판 현상의 묘사를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다.

 

4-5장은 모두 동일하게 하늘에 대한 환상이지만 그 강조점은 다소 다르다. 4장이 창조주 하나님을 강조한다면 5장은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4장에서 네 생물은 창조주 하나님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24장로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는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5장에서는 보좌에 앉으신 이기 오른손에 일곱 개의 인으로 인봉된 책을 하나 들고 계시다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힘 있는 천사가 누가 그 책을 펴며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 라는 문제를 제시한다. 결국 이 책을 펴고 인을 떼어내실 분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심을 보여줌으로써 그리스도의 승리를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4장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올렸던 24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싼 무수한 천사들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을 찬양하고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분의 구속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양이 차별 없이 천사들과 24장로들에 의해 울려 퍼지는 이유이다. 또한 4장에서 일곱 영은 하나님과 관련되었는데 5장에서는 그리스도와 관련되고 있다. 이러한 변환은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이시라는 요한계시록의 기독론적 입장을 반영한다. 창조의 목적은 구속을 통해 완성된다. 그러므로 4장은 5장에 대한 배경적 역할을 한다.

 

그런데 4-5장에서 하늘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에 세가지 중요한 요소가 발견된다. 교회, 새 창조, 종말적 현상이 그것이다. 먼저 교회는 24장로를 통해 상징되고 있다. 그들은 각각 보좌에 앉아서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동안 이들이 어떤 존재들인지 논란이 되어 왔다. 구약에서 천사들이 보좌에 앉아 면류관을 쓰고 있다는 증거가 없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다. 또한 24장로들은 역대상24:1-19에서 24계층으로 구성된 제사장을 그 배경으로 한다. 이런 점에서 24장로들은 제사장들의 왕적 가계를 이어받는 하나님의 백성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지상 교회에 대한 천상적 대응 관계를 가진 천상적 교회이다. 그러므로 24장로들의 찬양은 땅에 존재하는 지상교회를 대신해서 천상 교회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며 땅에서 예배하는 교회를 대신하여 하늘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하늘의 송영인 것이다. 또한 24라는 숫자는 12이라는 숫자를 두 개 합쳐서 만든 숫자인데 이는 구약과 신약의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하늘 성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존재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에베소서는 이미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혔다고 말한다.(2:5-6) 그리스도와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늘에 앉힌바 된 것 또한 사실인 것이다. 골로새서 또한 이러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3:1-4)

 

하늘의 성전에서 번개, 음성, 뇌성이 일어나는 장면은 소위 종말적 신현을 수반하는 현상에 대한 묵시적 묘사이다. 이것은 하늘의 성전에서 이미 종말론적 심판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하늘의 성전은 6-16장에서 전개될 종말론적 심판 시간의 진원지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4-5장은 6-16장에서 일어나게 될 종말론적 심판을 예감하게 한다.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는데(4:6) 152절에는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바다에 서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른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후 홍해에 수몰되는 애굽 병사들을 보며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승리자였던 것처럼 짐승과 그의 형상을 이기고 벗어난 자들도 역시 승리자인 것이다. 24장로들과 네 생물이 부르는 새 노래(5:9) 역시 15 3-4절에서 정복자들이 모세의 노래 곧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것과 병행을 이룬다. 이 두 노래의 관심사는 모두 왕권(kingship)에 있는데, 전자(5:9)가 그리스도인들의 왕권이라면(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후자(15:3-4)는 하나님의 왕권이다.(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성도들의 왕권은 하나님의 왕권에 근거한다. 곧 하나님의 왕권은 성도들의 승리로 확증된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이 등장한다. 이 네 생물들은 에스겔1:10의 네 생물을 연상하게 하는데. 이것은 에스겔10:8 19-22의 그룹 천사들과 동일한 것이다. 에스겔 1장과 10장에서 보는 것처럼 네 생물은 피조물을 대표하는 존재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새롭게 된 모든 피조물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한다. 이는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게 될 새 창조를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 새 창조가 아미 하늘에서 실제로 발생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는 두루마리가 있는데 일곱인으로 봉해져 있다. 그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뗄 수 있는 유일한 자는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로 묘사된 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일찍이 죽음을 당한 어린 양이다. 유대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는 다윗의 위를 이은 왕, 곧 메시아를 뜻하는데, 바로 이 메시아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다. 그러니까 메시아의 왕권 곧 그리스도의 승리는 그의 죽음을 통해 주어진 것이다.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라는 유대의 종말론적 메시아 기대가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에서 응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메시아 기대에 대한 기독교적 재해석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은 하나님의 메시아이다. 이것이 바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가 두루마리의 인을 떼고 열 수 있는 이유이다. 두루마리를 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만이 두루마리를 펼 수 있다. 그렇다며 그 두루마리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이다. 다시 말하면 그 두루마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 땅에 도래할 것인지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종말적 도래가 하늘의 성전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는 6장 이후에 나타나는 심판의 시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사단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나라가 도래하기 위해서는 심판을 통해 모든 악이 제거되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5 9-14에는 3가지 송영이 등장하는데 이 송영은 어린 양과 그의 희생적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송영은 바로 이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하여 종말적 구속과 새 창조가 하늘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4-5장에 나타난 하늘의 성전은 미래적 종말의 완성된 형태가 존재하는 곳임을 보여준다. 그 하늘은 공간적 초월의 상태로서 시간적 초월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시공을 초월하여 하늘에 존재함으로써 미래적 종말의 축복을 누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하늘 성전의 환상은 하늘에 하나님의 백성 전체로서의 교회가 존재하며 종말적 심판의 근원과 새 창조의 실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모두 미래의 종말에 이루어질 일들이지만 이미 그 완성품이 하늘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바로 이 일을 이루신 분이다. 그러므로 두루마리의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은 바로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 예수시다. 4-5장에서 나타난 예배는 21-22장의 새 예루살렘에서 경험하게 될 예배를 미리 맛보는 역할을 한다. 요한은 하늘의 성전 환상을 통해서 종말적 새 예루살렘의 도래를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일곱 인 심판과 삽입(6:1-8:5)

 

일곱 인 심판에서 첫 네 개는 5 8절에 등장했던 네 생물에 의해 도입되고 있다. 네 생물은 피조물 전체를 대표하는데, 첫 네 심판에서 네 생물의 등장은 하나님의 심판이 피조세계와 관련하여 주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인 심판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쟁과 기근을 통한 피조세계의 파괴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 네 심판에 등장하는 네 마리의 말들은 스가랴 18-11의 네 명의 말탄 자들과 스가랴6:18의 네 병거에 대한 기록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스가랴서에서 말 탄 자들은 세상을 살피도록 두루 다니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고 네 병거들은 하늘의 성전에서 나와 땅을 살피기 위해 두루 다니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들이다. 이들의 파송은 곧 열방들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고 있고 바벨론의 멸망을 예감하게 한다.

 

 

다섯 번째 인을 뗄 때는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를 인하여 죽임을 당한 성도들의 신원을 위한 탄식이 언급된다.(6:10) 이들의 탄식에 대해 하나님은 흰 두루마리를 주시며 일정한 숫자의 순교자의 수가 차기까지 쉬고 있으라고 말씀하신다. 인 심판 시리즈에서 심판의 전개는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심판이 점점 강화된 간다는 논리적 순서를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섯째 인을 떼는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요한의 의도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이 바로 순교자들의 탄원에 대한 응답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다. 여섯 번째 인을 뗄 때 그 심판의 영역은 땅과 우주로 확대된다. 큰 지진이 나고 해와 달과 별들의 기능이 현저히 약화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심판에 대한 묵시적 묘사로서 마가복음13:24-25나 마태복음 24:29의 묵시적 심판의 표현들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이 심판이 보여주는 것은 우주적 질서의 파괴일 뿐이지 우주적 질서의 전면적 와해는 아니라는 것이다. 우주 보존의 언약인 노아언약은 그 어느 시기에나 파기되지 않는다. 그것은 종말이 오더라도 우주의 골격은 계속해서 유지되고 완전하게 됨을 의미한다. 우주적 질서가 와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주적 질서의 부분적 파괴로 인해 상태계가 훼손되고 이로 인한 치명적인 고통과 불편이 인간에게 초래될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견딜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렇다면 일련의 이런 심판 가운데 하나님의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요한에게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는 삽입 단락이 71-17절이다. 이 단락의 결론은 하나님은 그 심판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지키신다는 것이다. 전반부인 1-8절에서는 지상적 관점에서, 그리고 9-17절에서는 천상적이고 종말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서술한다. 이러한 이중적 서술은 교회가 지상과 동시에 하늘에 거하는 이중적 존재임을 암시한다. 여기서 요한은 144,000이라는 숫자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숫자를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구약의 백성(12)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12)에다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천(1000)을 곱하여 만든 숫자이다.144,000은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의 완전성과 충만성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것은 민수기의 말씀을 교회론적 관점에서 재구성한 것이다. 요한은 144,000이란 숫자를 통해 새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숫자를 의도한 것이다. 민수기에서는 르우벤 지파로부터 계수되지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유다지파로 부터 계수가 시작되는데 이것은 메시아가 유다지파로부터 나왔으므로 민수기 말씀을 기독론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144,000명은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데, 이것은 에스겔9:4-6을 배경으로 한다.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는 의미이지만, 그들도 불신자들이 겪게 될 심판에 동일하게 노출되어 괴로움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모독하지 않고 도리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방법으로 성도들이 사단을 이기며(12:11), 이러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더 이상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의 기회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이 핍박과 고난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승리하며 나가라고 권면한다. 따라서 민수기의 계수가 군대를 편성한 것이었듯이 144,000은 이 땅에서 사단에 맞서서 전투하는 교회를 가리킨다.

 

 

요한은 79-17에서는 교회를 다른 각도에서 즉 지상에 있는 전투의 교회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승리한 교회로 묘사한다. 9절에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오는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무리가 등장하는데 이 무리는 앞의 144,000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의 완전한 무리와 동일한 의미이다. 144,000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특수성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본 것이라면, 셀 수 없는 무리는 신약의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보편성의 관점에서 교회를 바라본 것이다. 이들이 입고 있는 흰 옷이나 그들이 들고 있는 종려가지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임을 의미한다. 그들은 일곱 인 심판으로 야기된 큰 환란을 이기고 나온 자들이며 하늘에서 종말적 축복을 경험하는 무리들이다. 이처럼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은 지상에서 보호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하늘에서 축복을 받을 것임을 확증하고 있다.(715-17) 요한은 교회의 이런 양면적 모습을 병치시켜 놓음으로써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며 여전히 환란을 겪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또한 하늘에 존재하여 완전한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의 독자들에게 천상적 관점에서 자신들의 현실을 봄으로써 참다운 진실에 대한 바른 통찰력과 무한한 위로를 주었을 것이다.

 

 

일곱 번째 인이 떼어지는 때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해졌다.(81) 그 이유는 83-4절에 나타나는 성도의 기도 때문이다. 성도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리도록 네 생물, 24장로들, 천사들의 찬양이 잠시 멈춘 것이다. 그리고 85절에 보면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 이것은 역사의 정점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들리도록 하늘이 침묵한 것이며, 그 기도들에 대한 응답으로 마지막 심판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로 올려졌던 향이 담긴 향로에 제단의 불을 담아 쏟았더니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과 같은 종말적 심판의 현상이 일어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은 땅에서 고난 받는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기도는 69절의 순교자들의 기도와 유사성과 연속성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의 구속역사에서 고난 받는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 가시는데 중요한 동인이 되고 있음이 틀림없다. 다섯 번째 인이 순교자들의 기도라면 일곱 번째 인은 모든 성도들의 기도이다. 모든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께 틀림없이 상달되고 있음을 요한은 매우 생동감 있게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영적 전투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자신들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던 성도들에게 커다란 위로와 감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종말적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받은 고난에 대한 신원이다. 그리고 이러한 보응은 공의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동이신 것이다.

 

 

일곱 나팔 심판과 삽입(8:6-11:19)

 

일곱 나팔 심판은 일곱 인 심판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일곱번 째 인을 떼는 과정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일곱 인 심판과 일곱 나팔 심판이 시간적 순서로 배열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심판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는다고 말하는 곳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인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는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단에게 괴롭힘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증거 문에 고난을 받는다. 즉 그들은 증거 사역을 감당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다. 일곱 나팔 심판은 일곱 인 심판보다 심판의 강도가 훨씬 더 강력하고 광범하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나팔 심판의 재앙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기는커녕 도리어 우상에게 절하고 악행을 회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920-21) 이는 사람들의 강퍅함과 아울러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여섯 번째 나팔 심판이 끝나고 일곱번 째 나팔로 이어지기 이전에 다시 한 번 삽입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작은 책과 두 증인에 관한 이야기이다.(10:1-11:13) 102절의 힘센 천사가 들고 있는 작은 두루마리는 앞서 51절의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있던 두루마리와 동일한 두루마리이다. 이것은 52절과 101절에서 모두 두루마리와 관련하여 힘센 천사가 등장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고, 또한 51절과 109-11절은 모두 동일하게 에스겔( 2:9-10; 에스겔31-3)을 그 배경으로 하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그런데 51절에서는 그 두루마리가 닫혀 있었지만 102절에서는 그 두루마리가 열린 채 천사의 손에 들려있다. 그리고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예언의 내용으로 소화하기 위해 받아먹는다. 그러니까 닫혔던 두루마리가 예수께서 하늘에서 일곱 인을 뗌으로써 열려지고 열려진 그 두루마리가 힘센 천사에 의해 하늘에서 땅으로 옮겨지고 결국 요한이 먹도록 주어진 것이다. 5장과 10장의 두루마리가 동일하다는 사실은 그 두루마리의 성격과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두루마리가 닫혀 있다가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 이전에는 감추었다가 이제는 드러났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전엔 감취었다가 이제 드러난 하나님의 경륜의 비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그러므로 보죄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 손에 가지고 있는 두루마리는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비밀스런 경륜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4장에서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당위성을 하나님의 이름을(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 통해 계시한다면 5장에서는 그 나라가 어린 양이 두루마리의 인봉한 것을 떼어 하나님의 감추었던 경륜을 드러냄으로써 이 땅에 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두루마리의 인을 하나씩 뗄 때마다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 두루마리의 내용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요한은 두루마리의 인을 점차적으로 뗌으로써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그 두루마리에 기록된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6장부터 등장하는 심판의 목적은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비교해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다니엘서에서는 예언의 말씀을 간수하고 봉함하라고 명하는데(8:26; 12:4)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고 명한다.(계시록 22:10) 이러한 차이는 전자의 경우 종말적 미래가 멀리 남아있고 후자의 경우는 그 종말적 미래가 임박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니엘서에서 한 때 두때 반때로 묘사된 종말의 때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재림으로 완성되는 종말의 때인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하나의 시점으로 본 종말의 때가 신약에서는 예수의 초림과 재림이라는 두 시점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니엘서에서는 한 때 두 때 반 때가 지나서야 종말이 오고 그때 비로소 모든 비밀이 드러날 것을 말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종말이 시작되었고 종말의 비밀이 다 알려졌다.(16:25-26 ; 1:26-27) 두 번째 종말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이미 다 알려진 비밀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뿐이다. 이것이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으로 말미암아 두루마리의 인봉이 떼어지는 것을 요한이 목도할 수 있었던 이유다.

 

 

81절에서 마지막 인이 떼어지고 10:2에서 그 두루마리가 열린 채로 힘센 천사의 손에 들려있다. 그리고 요한은 그 두루마리를 먹고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할 것을 요구받는다. 바로 이 예언을 통해 그 두루마리의 내용인 하나님나라가 사람들에게 밝히 드러나며 사람들은 그 나라의 통치에 순종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는 에스겔이 31-3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경험한 것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요한의 사역은 에스겔과 같은 예언자 사역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러한 명령은 11:1-14에서 두 증인(교회)을 통하여 실행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이 곧 교회의 사명임을 의미한다. 요한은 예언의 사역을 위탁받은 후(10:9-11) 성전을 척량하도록 명을 받고(11:1-2) 이어서 두 증인의 이야기를 하는데(11:3-13) 이 세 가지 에피소드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예언사역의 위탁과 성전 척량은 에스겔의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에스겔이 예언사역을 위탁받은 후 그의 예언적 메시지를 구현하는 상징행위를 한 것과 같이 요한도 예언 사역을 위탁받은 후에 하나의 상징적 행위로서 성전 척량을 행한 것인데 이것은 그가 감당해야 할 예언 사역을 보여준다. 성전 척량을 하지 않은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마흔 두달 동안 짓밟힐 것이다.( 11:2) 반면에 척량되는 부분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는다. 요한은 교회의 내적이며 감추어진 실체를 교회의 외적인 경험과 구별하고 있다. 교회는 핍박과 순교를 경험할 것이지만 그 숨겨진 영적 실체는 안전하게 보호될 것이다. 이것은 7장에서 교회가 이 땅에서 영적인 도전을 받지만 그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 있는 자는 하늘에 앉힌바 되어 안전하게 보호받는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이어지는 두 증인 이야기(11:3-13)는 교회가 외적으로 받는 핍박과 순교는 결국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은 교회가 해야할 예언자적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두 증인이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촛대로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입증된다. 1-2장에서 일곱 촛대가 교회를 상징하였듯이 여기서 두 촛대도 그러하다. 일곱 촛대는 전체로서의 교회를 나타낸 것이라면 두 촛대는 증인 노릇을 하는 교회의 역할을 나타낸다. 두 증인은 구약의 대표적 선지자인 모세와 엘리야를 모델로 사용하고 있지만(11:5-6) 그들 자신이 모세와 엘리야라고 말하진 않는다. 다만 두 선지자의 사역 모델이 그들이 이방 통치자 및 이방종교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점에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증거 사역과 가장 유사하기 때문에 요한은 모세와 엘리야를 사용하여 입증하는 교회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적대관계는 요한계시록 전체를 통해서 교회와 사단의 세력의 대립 관계를 잘 보여준다. 두 증인이 증거를 마칠 때라면 1260일이 다 지난 다음일 것인데 이는 곧 종말의 때가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20장에서 용이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갇혀 있다가 천년이 차서 무저갱에서 올라온 것과 동일한 때이다.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은 만국을 미혹케 하는데 만국을 미혹하기 위해서 먼저 두 증인을 죽인 것이다. 그러나 두 증인은 사흘 반 만에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된다. 삼일 반이라는 숫자는 그들이 복음을 증거한 삼년 반의 기간을 연상시킨다. 삼년 반이 두 증인이 제사장적 왕노릇을 한 기간이라면 삼일 반은 그들이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순간이다. 두 증인의 부활과 승천은 그들의 증거의 신적 권위를 확인하는 동시에 교회의 부활과 승천을 상징한다. 놀라운 것은 극심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던 자들이(920-21) 1113절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난 것인가? 이런 변화의 사이에는 요한의 예언자 사역의 부르심(10)과 두 증인의 복음 증거(11)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것은 예언자 사역 즉 복음 증거의 사역이 이런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역할에 대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것은 사람들을 회개시키는 길은 극심한 심판이 아니라 교회가 고난 가운데 복음의 증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마침내 일곱 번째 나팔을 불었을 때 "세상 나라와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라는 크고 놀라운 찬양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온다(1115). 이것은 앞서 삽입된 이야기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은 교회의 예언사역 즉 복음증거를 통하여 세상나라가 하나님과 예수의 나라가 되도록 의도하셨다. 교회의 예언 사역은 전능하신 하나님, 승리하신 어린 양의 전적인 간섭 하에 수행될 것이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 의도된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성취된다. 그러므로 이 찬양 소리는 바로 이런 목적이 성취된 상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러한 내용은 이어지는 24장로의 찬양에서도 계속 이어진다.(1117-18) 그런데 24장로의 찬양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분"으로 묘사되면서 "장차 오실 분"이라는 호칭이 생략되었다. 이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4, 1:8, 4:8에서 모두 일관성 있게 "장차 오실 이"를 하나님의 이름에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1117절에서는 "장차 오실 이"라는 구절을 생략한 것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그 구절에 생략된 하나님의 이름이 일곱 번째 나팔로 인한 최종적인 심판의 단계에 주어졌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문맥에서 현재로 오시는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미래의 하나님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 미래적 의미의 종말의 시점이 드디어 도래했기 때문이다. 요한은 이미 하나님이 오셔서 큰 권능으로 왕 노릇하고 계시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왕 노릇은 미래의 완성된 시점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그 하나님의 통치가 이제 완성된 모습으로 지금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115절에서 세상나라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었다는 선포에서 이미 암시되고 있다. 이것은 지금이 바로 이방들을 심판하고 성도들에게 상급을 수여하실 때라는 24장로들의 이어지는 찬양에서 더욱 확증된다. 왜냐하면 24장로의 그러한 고백은 2011-15절에 나타난 최후의 심판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의 전쟁(12:1-17)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는 교회다. 요한계시록은 이 우주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종말을 향해 갈 때 어떻게 존재했으며, 지금 어떻게 존재하는지 그리고 장차 어떻게 존재할 것인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단지 미래를 예언한 책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교회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또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요한계시록이 교회에 대해 그리는 두 가지 그림은 하나는 승리하는 교회요 다른 하나는 전투하는 교회다. 전투하는 교회가 현재의 모습이라면 승리하는 교회는 미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승리하는 교회의 모습이 전적으로 미래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전투하는 교회 역시 동시에 승리하는 교회로서의 본질을 가지고 있다.

 

 

요한계시록 12장은 교회의 이런 모습을 상징들을 통하여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이 묘사하고 있다. 12장에는 두 종류의 이적이 등장하는데, 이적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일어날 사건을 이해하거나 통찰하도록 도와주는 지시자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적이란 말 보다는 표적이란 말이 더 나은 번역이다. 그럼 두 종류의 표적이란 무엇인가? 하나는 여인이 아들을 낳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큰 붉은 용이 여인이 낳으려는 아들과 여인을 쫒는 장면이다. 여기서 여인은 교회를 상징한다. 이는 그 여자의 머리에 열두 사도 혹은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별의 면류관이 있는 것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이 여인이 해를 옷 같이 입고 그 발아래 달이 있다는 묘사는 교회의 영광스런 모습을 상징한다. 여인이 낳은 아들은 만국을 철장의 권세로 다스릴 자로 표현되는데, 이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할 것이다. 그리고 여인이 교회를 낳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구약의 교회인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신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용과 여자의 이야기의 사이에 7-12절에 삽입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삽입된 이야기는 단순한 삽입이 아니라 앞뒤로 전개되는 이야기의 의미를 밝혀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하늘에서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마귀와 더불어 싸워서 승리함으로 마귀가 하늘에서 땅으로 내 쫒긴다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권세로 이루어진 이 승리는 또한 성도들의 승리이다. 그런데 사단이 내어 쫒김으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지만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늘에 속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고 땅과 바다에 거하는 자들은 사단에 속한 자들을 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구분해서 일부는 하늘에 일부는 땅에 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하늘에 거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하늘에 거하는 교회는 11절에 묘사되듯이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고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긴 자들의 모임이다.

 

 

그렇다면 7-12절이 삽입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1-6절의 이야기 중에서 5-6절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하려고 한 것 같다. 7-9절은 5절의 결과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사단이 미가엘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땅으로 쫒겨난 것은 5절에서 그리스도의 탄생과 승천으로 마무리된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10-12절은 6절과 연결되어 있다. 여인이 사단을 피해 1260일 동안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을 받는 것은 10-12절의 하나님의 교회가 하늘에 속해 있다는 사실과 연관된다. 따라서 전자가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라면 후자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연합하여 하늘에 승리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교회이다. 그러므로 삽입된 7-12절은 전체적으로 5-6절을 천상적 관점에서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용과 여자의 이야기는 13절에서 이어진다. 용은 여인이 낳으려는 아들을 삼키려고 했으나 실패하자 아들을 낳은 여인을 핍박한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막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그 결과 하늘에서 쫒겨났다. 이제 사단의 공격 대상은 아들에서 여인에게로 바뀌었다.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원천 봉쇄하려던 사단의 전략은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결과로 태어난 교회에 대한 공격으로 바뀐 것이다. 비록 교회가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받지만 교회는 하늘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보호를 받을 것이다. 사단이 하늘에서 땅으로 쫒겨난 것(13) 20장에서 사단이 무저갱에 갇힌 사건과 병행관계에 있으며 또 교회가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에서 보호를 받는 기간인 1260일은 20장에서 나오는 사단이 무저갱에 갇힌 천년이란 기간과 병행관계에 있다. 또한 17절에서 사단은 이제 교회의 다른 칭호인 여인의 남은 자손과 마지막 접전을 준비하는데 이것은 207절 이후의 천년이 다 찬후에 사단이 무저갱에서 풀려날 때를 가리킨다.

 

 

12장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교회에 관한 3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준다. 첫째로 사단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치명상을 입고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권세와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 둘째로 그러나 사단이 교회에 대한 공격을 포기한 것도, 그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도 아니라는 것, 셋째로 교회는 비록 사단의 공격을 받지만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를 받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가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땅에 있으면서 동시에 하늘에 속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땅에서 공격을 받으면서 존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교회는 하늘에도 존재하므로 그 공격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로 미래에 아주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고 있다.(12:17 ; 20:7-10) 그러나 동시에 이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승리가 예고되고 있다. 그리고 사단의 최후의 패배는 곧 최후의 심판으로 이어질 것이다.

 

 

 

성도의 상급과 불신자의 심판(14:1-20)

 

앞선 11:3-13에서 교회의 역할이 신실한 증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신실하게 증거하는 것이라면 12-14장에서 교회의 역할은 악을 이기신 메시아 어린 양의 군대로서 악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다. 이 기간은 마흔 두달 동안 교회가 당하는 핍박의 기간이며(11:2), 1260일 동안 교회가 복음을 증거 하는 기간이고, 교회가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기간이며(12:6, 14) 또 짐승이 일할 권세를 받은 기간이다.(13:5). 그러므로 12-14장은 11:3-13에 나타난 악의 세력들과 증거 하는 교회 사이에 일어나는 충돌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14장의 이런 문맥에서 볼 때 14장의 전반부(14:1-5) 12장의 용과 13장의 두 짐승의 등장으로 발생한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교회가 승리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극렬한 심판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묻는 질문(6:17)에 대한 대답(7:1-17)과 동일한 패턴이다. 요한계시록의 관심은 언제나 교회의 안전성과 승리이다. 여기서 나타난 144,000에 대한 묘사는 앞선 71-17과 동일한 내용과 동일한 시점의 것이지만 71-8절과 79-17의 내용을 하나로 조화하여 발전시키고 있다. 이러한 발전이 이뤄진 이유는 무엇인가? 12장의 영적 전투와 13장의 두 짐승 이야기가 이런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14 1-5 12장과 13장의 관점을 통해 71-17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12장과 13장을 지나면서 다시 71-17로 돌아가서 13장에서 말한 짐승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1444,000의 모습을 다시 확인할 필요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이런 생각이 맞다면 요한은 7:1-8에 존재했던 144,000 13장의 짐승에 대한 승리자로서 7 9-17의 하늘에 존재하는 셀 수 없는 무리로 봄으로써 땅과 하늘의 두 관점을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14장의 후반부(14:6-20)에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과 심판하는 일이 세 천사에 의해 두 번에 걸쳐 선포된다. 첫번째 단락에서(14:6-13) 첫 째 천사는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파하며 하나님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고 권면한다. 이어서 둘째와 셋째 천사는 각각 바벨론의 멸망과 짐승과 우상에게 경배한 자들이 당할 심판을 선포한다. 두 번째 단락(14:14-20)에서도 세 천사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첫 단락에서 등장한 천사들의 재등장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14절에서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손에는 날 선 낫을 가지고 구름위에 앉은 인자 같은 이가 등장하는 점이다. 여기서 인자 같은 이는 다니엘 7:13을 배경으로 종말론적인 왕적 메시아를 나타내며 결국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여기서도 첫째 천사가 말하는 곡식의 추수는 심판이 아니라 첫 단락에서 복음을 전하는 천사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종말론적 사건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어서 둘째, 셋째 천사가 시행하는 포도 추수는 심판을 의미하고 있다. 땅에서 거둔 포도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지고 있기 때문이다. 포도 수확으로 표현된 심판의 맹렬한 모습은 이사야6:63:6과 요엘3:13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포도주 틀에서 피가 나와서 그 피가 1600 스타디온에 퍼졌다는 것은 심판의 대상이 온 세상의 왕들과 관련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포도수확으로 비유된 심판이 포도를 포도주 틀에 모으는 것과 포도주 틀에서 그 포도를 밟는 두 과정으로 시행된 것은 1612-14에서 땅의 왕들과 그의 군대를 아마겟돈으로 모으는 것과 예수의 재림으로 그들이 괴멸되는 두 과정과 병행된다.

 

 

 

일곱 대접 심판(15:1-16:21)

 

일곱 대접 심판은 마지막 재앙으로 규정된다.(151) 왜냐하면 이 재앙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끝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의 심판은 없을 것이며 만일 있다면 그것은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곱 대접 심판이 시작하기 전에 짧은 삽입이 등장한다. 먼저 요한이 본 것은 "불이 섞인 유리바다"였다. 이것은 표현은 다르지만 46절의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와 동일한 것이다. 다만 수정이 불로 바뀌어 표현된 것은 불이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46절은 순수한 하늘 성전을 묘사한 것이지만 요한이 지금 보고 있는 하늘에서는 심판이 시행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긴 자들이 유리 바닷가에서 노래하는 모습은 홍해를 건너고 난 후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를 부른 광경을 연상하게 한다. 그러므로 본문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을 홍해를 건넘으로 하나님의 구속을 경험한 이스라엘에 비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달리 영원한 승리를 누린다. 왜냐하면 그들의 승리는 바로 어린 양의 구속의 은혜로 인한 승리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일곱 대접의 재앙을 가진 천사가 하늘의 증거 장막 성전에서 나온다.(155) 그리고 일곱 대접 심판이 전개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앞의 다른 두 심판과 비교하여 몇 가지 독특한 특징들을 발견한다. 첫째는 대접 심판이 하늘 성전에서 발원하였다는 것을 좀 더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둘째,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를 하늘의 군대로서 장엄하게 묘사하고 있다. 셋째 일곱 대접은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차있었다는 점이다. 이 대접은 원래 58절에서 성도들의 기도가 담겼던 그릇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금대접이 하나님의 진노로 가득 차 있다.(157) 이것은 8 5절에서 성도들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올려졌던 향을 담은 향로에 불이 담겨져 땅에 쏟아짐으로 종말론적 심판의 현상이 일어난 것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 고난을 받는 성도들의 기도는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직결된다. 하나님은 절대로 고난받는 성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요한계시록에서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은 언제나 영적전투에 노출되어 있으며, 고난과 순교를 통해서만 참다운 승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린 양같이 죽임을 당함으로 유다 지파의 사자와 같이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길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재앙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훼방하며 저희 행위를 회개하지 않는다는 점이 반복하여 언급된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들의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재앙 가운데서도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들의 악함과 하나님의 심판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다섯 번째 대접 심판에서는 재앙이 짐승의 보좌를 향해 쏟아졌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악의 세력의 심장부를 강타하여 그 나라를 쇠약하게 만들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짐승의 보좌에 대한 심판은 더욱 종말론적 특징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심판은 주로 자연계의 영역에 국한되었으나 이제는 심판이 핵심 대상인 짐승을 향하여 시행되고 있다. 여섯 번째 대접에서는 사단에게 속한 자들이 그야말로 하나님의 군대와 최후의 일전을 위해 유브라데에 모여든다. 물론 사단이 아마겟돈에서 준비하는 전쟁은 총과 칼로 싸우는 물리적 전쟁이 아니라 대 영적 전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한은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1615)는 권면을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대접을 공중에 쏟았을 때, 성전에서 "되었다(혹은 이루었도다)" 라는 큰 음성이 났다.(1617) 여기서 "공중"이란 사단이 장악하는 영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공중을 향해 대접을 쏟았다는 것은 사단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참고 에베소서 2:2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이미 다섯 번째 대접에서 재앙이 짐승의 보좌를 향해 퍼부어졌는데 이제는 사단의 권세를 나타내는 공중에 재앙이 부어짐으로 사단의 권세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심판 시리즈가 목표하는 가장 최종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되었다"(혹은 이루었다)는 큰 음성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일곱 번째 대접의 심판이 가장 최종적인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바벨론이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한다는 말이 이어진다. 왜 바벨론이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하게 되는가? 일세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바벨론은 로마를 상징한다. 사단은 로마를 성도들을 핍박하는 수단으로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당연한 이유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기억하신바 되었다는 것은 바벨론에게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은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기억하심으로 그에 대한 응답으로 바벨론을 심판하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은 로마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성도들을 괴롭히는 세력의 궁극적 멸망을 예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결국 심판의 최종 목적은 사단을 좇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단 자체이다. 그러므로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심판에서는 자연계와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집중된 반면에 일곱 대접 심판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사단 자체에게 집중되고 있다.

 

우리는 나팔 심판과 대접 심판에 나타난 재앙의 종류들은 출애굽시 애굽에 내려졌던 열 재앙들과 유사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요한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는 사단을 애굽의 바로와 병행시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각각 일정한 패턴으로 전개되는데 처음 네 개의 재앙은 각각 통일성을 가지며 나머지 세 개는 처음 두 개와 나머지 한 개가 서로 구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 심판 시리즈에서 처음 네 심판은 네 생물, 네 마리 말들에 의해 통일성을 가지며 나팔 심판 시리즈에서는 처음 네 재앙이 각각 땅, 바다, 강 그리고 천계에 일어난다. 그리고 대접 심판 시리즈에서는 처음 네 재앙이 땅, 바다, , 하늘()에 쏟아진다. 이러한 네 개의 통일성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이라는 숫자는 요한계시록에서 자연계 전체를 포괄할 때 사용된다.(참고 4:6-8 ; 7:1 ; 9:13-14 ; 20:8)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전 우주계에 걸쳐서 완벽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심판 자체의 완전성을 함축하고 있고 "" 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는 대상의 완전성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완전하며 그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대상은 없다.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서로 시간적 순서로 배열된 것이 아니라 그것은 각각 개별적으로 종말적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그 심판의 강도가 점층적으로 심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 개의 심판 시리즈는 요한계시록의 몸통의 역할을 한다. 심판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기록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의 내러티브에서 심판의 중요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심판의 메시지는 결국 바벨론의 멸망(17:1-19:10)과 새 예루살렘의 등장(21:9-22:5)에서 그 최종적 성취를 이룬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세 개의 심판 시리즈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심판을 통해 악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 더럽혀졌던 자연계를 새롭게 하여 새 예루살렘인 교회가 그 새로워진 창조 세계의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바벨론의 멸망(17:1~19:10)

 

1. 이 본문은 바벨론에 대한 전체적인 묘사(17:1-8)와 바벨론의 멸망(18:1-19:10)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앞에 16 12-21절의 7번째 대접 심판에서 이미 선포된 바벨론의 멸망을 다시 자세히 풀어서 설명한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의 내용은 일곱 대접 심판 시리즈의 연속선상에 서 있다. 요한은 17:2에서 바벨론이 심판을 받는 이유는 음행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음행은 영적인 것으로서 하나님 외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모독한 행위를 가리킨다. 바벨론의 음행에 대한 심판은 이미 148절에서 예고되었고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선포는 16:19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이렇게 이 본문은 앞서 선포된 바벨론의 심판 선포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2. 바벨론을 상징하는 여자가 짐승을 타고 있다(173)는 것은 바벨론과 짐승의 관계가 밀접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 짐승은 13장에서 소개된 두 짐승 중 첫째 짐승이다. 음녀 바벨론과 짐승은 운명 공동체로서 바벨론이 망하면 짐승도 망하게 되어 있다. 음녀 바벨론과 짐승은 모두 로마에 대한 이미지로서 전자는 로마의 여신숭배를, 후자는 로마의 황제숭배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13장에서 짐승은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고 묘사되었는데 17장에서는 여기에 한 간단한 해석이 덧붙여진다. 일곱 머리는 일곱 왕을, 열 뿔은 열 왕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짐승이 온 땅의 왕들의 권세를 사실상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온 땅의 왕들이 짐승의 통치를 받는다면 온 땅의 백성들도 당연히 짐승의 통제 하에 있을 것이다. 18장부터는 바벨론의 멸망이 본격적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자세한 묘사의 마지막에서(1824) 선지자들과 성도들의 피가 언급된 것은 바벨론의 멸망의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성도들을 위한 신원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암시한다.

 

3. 바벨론의 멸망 후에 19장에서는 하늘에서 찬양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이 찬양의 핵심주제는 첫째로 하나님의 심판의 진실성과 정당성이다.(192) 하나님의 바벨론 심판은 69-10절에 나타난 순교자의 탄식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주제는 하나님의 통치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에 개시되었으나 아직 온전히 체험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사단의 활동을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바벨론이 멸망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가시적으로 확립되었다. 찬양의 셋째 주제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이다. 이것은 바벨론의 멸망과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밀집하게 연관됨을 보여준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서 주인공은 어린 양과 신부인데 신부는 당연히 교회일 것이다. 197절의 "아내가 예비하였으니"라는 말은 교회가 이 혼인 잔치를 위해서 자신을 단장했다는 뜻일 것이다. "단장"은 하나님의 뜻에 교회가 순종한 것을 의미할 것인데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에 요구한 대표적인 하나님의 뜻이란 짐승에게 절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언약적 신실함이다. 하나님은 이렇제 자신을 단장한 교회를 의롭다고 여기심으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신다.(198)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어린 양이 그리스도와 신부인 교회가 완전한 결합을 이루는 순간이다. 그리스도의 승천 이후 교회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연합의 시작일 뿐 아직 완성은 아니다. 연합이 완성되는 때는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다. 그래서 2122절에서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성전이 되어서 교회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한다. 어린 양의 혼인잔치는 바로 그 때가 온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 시기가 바벨론의 멸망 시점과 일치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제 바벨론이 멸망함으로써 교회가 더럽힘을 받을 위험이 모두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의 멸망, 어린 양의 혼인 잔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모두 동일한 종말의 시점이다.

 

 

최후의 심판(19:11-20:15)

 

1. 최후의 심판은 종말론적 전쟁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19:11-21) 이 전쟁을 주도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다. 여기서 묘사되는 하나님의 큰 잔치(19:17-19)는 에스겔3917-20절에 나타난 열국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배경으로 한다. 이 전쟁의 결과는 첫째 짐승과 둘째 짐승(거짓선지자)의 완전한 패배다. 그 둘이 산 채로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던져지고 나머지 왕들과 그의 군대들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죽임을 당한다. 결국 하나님의 큰 잔치는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승리하신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벌어진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큰 잔치와 19장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어린 양의 잔치가 바벨론의 멸망 직후에 벌어지듯이 하나님의 큰 잔치는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심판을 받는 종말론적 사건 직후에 일어난다는 점이다. 만일 바벨론의 멸망과 두 짐승의 심판이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라면 두 잔치는 동일한 것일 수 있다.

 

2.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대접 심판에서(16 12-21) 이미 용,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바벨론의 멸망이 언급되었는데, 이 내용이 17-20장에서 다시 자세히 설명되고 있다. 이 세 존재의 멸망은 동시에 일어나겠지만 설명의 편의상 요한은 하나씩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논증이 옳다면 197-9절의 어린 양의 혼인잔치와 하나님의 큰 잔치(1917-18, 21)는 종말론적으로 동시에 일어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요한은 동일한 잔치를 두 가지 다른 관점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잔치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완전한 결합의 관점에서 어린 양의 잔치라고 표현한 것이라면 동일한 잔치를 종말론적 전쟁의 승리와 심판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큰 잔치라고 묘사한 것이다.

 

3. 바벨론의 멸망(18), 두 짐승의 멸망(19)에 이어서 20장은 용의 멸망에 대해 이야기 한다. 용이 천년동안 결박되어 무저갱에 던져졌다는 것은 사단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해 철저하게 패배하여 무력화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단이 무저갱에 갇혀있는 기간인 천년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사이의 기간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기간에 사단은 여전히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각 족속과 백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것은 비록 사단이 결정적으로 패배했지만 그 패배가 아직 완전히 가시화된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특히 천년이 다 찼을 때, 사단은 종말론적 전쟁을 위해 잠시 놓이게 될 것이다.(19 19-20; 20:7-8)

 

4. 그런데 이 천년의 기간에 보좌에 앉아 심판하는 권세를 가진 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은 받은 자들 그리고 살아 있으나 짐승에게 절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들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 노릇을 할 것이라고 말하는데(204) 이들은 바로 교회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 동안 이들이 왕 노릇한다는 것은 단순히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적으로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며(16; 510) 이십사 장로는 면류관을 쓰고 하늘 보좌에 앉아 있으며(44) 두 증인으로 대표되는 교회는 왕적 권위로 복음을 증거한다.(113-13) 특히 59-10절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드린 때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초림에서 시작된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왕 노릇(16 ; 44 ; 510 ; 113-13)과 천년동안 왕노릇(204-6)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가 왕 노릇하는 기간은 사단이 결박당해 무저갱에 갇혀 있는 천년이란 기간과 일치한다.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 기간을 천년으로 표현한 것은 천년이란 숫자가 통치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5.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을 나타내는 숫자로 마흔 두 달, 삼년 반, 1260, 한 때 두 때 반 때가 있는데, 이 숫자는 모두 동일하게 삼년 반이라는 기간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동일한 기간을 삼년 반과 천년이라는 다른 숫자를 사용하여 표현한 것인가? 그것은 요한이 그 기간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교회의 통치개념에서는 천년이란 숫자를 사용하고, 교회가 고난당하는 관점에서는 삼년 반의 숫자를 사용한다. 즉 왕적 통치 기간을 나타낼 때는 오랜 기간의 숫자를 사용하고 고난과 핍박의 기간을 표시할 때는 짧은 기간의 숫자를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천년동안 왕 노릇하는 자들을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하면서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첫째 부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하거나, 살아 있으나 짐승에게 절하지 않고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에게는 둘째 사망 즉 최후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영원한 형벌이 조금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6. 천년이 차면 사단이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일 것이다. (207-8) 여기서 등장하는 곡과 마곡은 에스겔38-39장에 등장하는 곡과 마곡을 그 배경으로 한다. 이 곡과 마곡은 성도들의 진, 곧 사랑하시는 성을 둘러싸지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들을 태워버린다. 여기서 성도들의 진 혹은 사랑하시는 성은 물론 교회를 의미한다. 요한은 에스겔38-39장의 곡과 마곡 사건을 인용하여 예수님이 피로 사신 교회가 얼마나 견고하고 안전한 공동체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곡과 마곡과 함께 마귀(사단, )가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던져진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진다. 2010절만 보면 짐승과 거짓선지자가 먼저 던져지고 나중에 용이 그곳에 던져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 7-8절의 전쟁과 1919-21절의 전쟁이 다른 전쟁일 수 없으므로 두 짐승과 용은 모두 동일한 종말론적 전쟁에서 패배하여 불 못에 던져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7. 종말론적 전쟁이 끝난 후 드디어 최후심판의 장면이 펼쳐진다.(2011-15) 크고 흰 보좌는 하나님이 엄위롭고 거룩한 심판주이심을 의미한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첫째 부활을 경험한 자들이 아니고 짐승을 따르다가 죽은 자들이다. 이 죽은 자들을 바다, 사망, 음부가 내어주고 있는데 이 셋은 다른 장소가 아니라 죽은 자들이 대기하던 동일한 장소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보좌 앞에 다른 책들과 생명책이 펴져 있는데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들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지만 죽은 자들은 다른 책에 기록되어 있고 그들은 자기 행위를 따라 그 책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는다. 이제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운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고 불못에 던지우므로 죽은 자들을 모아놓았던 사망과 음부도 더 이상 필요없기 때문이다.

 

 

새 창조와 새 예루살렘(21:1-8)

 

이 본문에 등장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일각에서는 벧후310-13절에 근거하여 재창조(regeneration)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재창조인가 아니면 갱신(renewal)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새 창조가 재창조냐 갱신이냐에 따라서 세계관과 우주관이 판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창조와 함께 중요한 것은 새 창조세계를 소유하고 누리고 그래서 하나님의 왕권을 피조세계에 드러낼 공동체의 존재이다. 이것은 처음 창조시의 에덴 동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하나님은 에덴 동산을 능가하는 새 창조를 계획하셨고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오랫동안 구속역사를 주관해 오신 것이다.

 

171-1910절이 바벨론에 대한 묘사라면 219-225절은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이다. 그리고 이 본문은 이 두 도시에 대한 묘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서로 대조되고 병행되는 이 두 도시의 존재는 요한계시록 전체에서 이중적 결론을 형성하고 있다. 바벨론은 사단의 통치 대상이요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이다. 이 도시 중에 어느 것이 승리하는가? 그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중대한 관심사이다. 요한계시록의 이중적 결론은 바벨론은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은 승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중적 결론의 중간에 이 본문이 하나의 중간단계로서 십입되어 있다. 이 본문은 교차대구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심부는 2-3절에 언급된 새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백성된 교회에 대한 언급이다. 처음 창조에서 5일동안 인간의 거처로서의 우주를 창조하고 맨 나중에 인간을 창조한 것처럼 여기서도 우주를 먼저 새롭게 하고 마지막에 하나님의 교회가 등장하면서 첫 창조의 패턴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요한은 창세기의 내용을 상당히 의식하면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새 창조를 통해서 첫 창조에 예비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 창조는 갱신인가? 재창조인가? 이 본문의 교차대구 구조에 의하면 1절의 "새 하늘과 새 땅" 에 대한 대응구절은 "만물을 새롭게 한다" 5절이다. 5절의 의미는 분명히 만물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만물을 갱신하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니까 요한이 말한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존의 하늘과 땅이 없어지고 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하늘과 땅이 새롭게 갱신된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한 것인가? 그것은 아마도 마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세계가 완전하고 완벽함을 강조한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한 주목할 것은 1절의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순히 요한이 본 것이지만 5절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것이라는 점이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사역은 인류의 범죄로 인하여 상실당한 첫 창조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완전성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므로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반드시 완성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창조계획이 완성되는 순간이 바로 종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통해서 개시되었고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것이다.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모든 악이 제거되었으므로 더 이상 슬퍼하거나 죽거나 애통할 일이 없다. 그렇다면 이런 복을 누리게 될 주인공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 새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교회다. 우주의 갱신과정에서 교회도 갱신되는데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2-3절이다. 갱신된 교회의 모습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혹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의 모습으로 상징된다. 이제 교회는 하나님과 완전히 연합될 준비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장막이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다. 이제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는 새 예루살렘인 교회와 혼인잔치를 치르고(197-9)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과 완전한 결합을 이루신다. 21 3절은 이것은 극명하게 보여주는데 이 구절은 언약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이 구절은 언약이 최종적으로 성취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에 의해 예비된 교회와 그리스도의 완전한 결합이야 말로 언약의 최종적 성취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통해 이루시고자 했던 창조목적을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통해 이루신 것이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창조 이후 이루어 오셨던 구속역사가 그 정점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는 옛 질서로부터 새 질서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우주의 갱신이 먼저 있고 그 변화된 질서의 주인으로서 새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 어린 양의 신부인 교회가 있으며 교회가 그토록 고대했던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모습이 있다.

 

 

 

새 예루살렘(21:9-22:5)

 

이 본문은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 곧 그리스도의 신부로 묘사되고 있는 교회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하늘에 있는 천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가 종말에 누릴 축복에 대한 이야기로 보아야 한다. 새 예루살렘이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면 새 예루살렘에 관한 대부분의 묘사들도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당연하다.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로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성벽인데 성벽의 치수로 144 규빗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고 있다. 144 12x12로서 약속으로서의 구약의 교회와 성취로서의 신약의 교회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요한은 성벽의 치수를 통해 새 예루살렘이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의 온전한 백성으로 이루어진 종말론적 교회임을 의도하고 있다. 이런 의도는 12기둥에 새겨진 12사도의 이름과 열두 문에 새겨진 열두 지파의 이름을 통해 더욱 확증되고 있다. 성벽의 12기둥과 12문에 새겨진 12지파의 이름들은 에스겔 48:30-35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에스겔 본문은 12지파가 땅을 분배할 때 각 지파가 각각 할당된 정당한 몫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인데, 마찬가지로 요한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가 종말에 누릴 하나님나라의 복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항상 열려있는 12문은 종말에 교회가 하나님과의 영광스럽고 놀라운 교제로 들어갈 풍성한 기회가 열려졌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12문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12 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각각 새겨져 있는데 이는 구약 교회의 기초가 이스라엘 12지파이듯이 신약교회의 기초는 12사도임을 의미할 것이다.

 

놀라운 것은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 건물이 없다는 사실이다. 성전 건물 대신에 하나님과 그리스도 자신이 친히 성전이 되신다. 이는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상황에서 본다면 매우 충격적인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의 독자들 대부분은 성전의 멸망(주후70)을 경험하였으며 성전의 재건을 열망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물론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는 것이지 하나님이 성전이 되시므로 성전 자체는 존재한다. 다만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건물로서의 성전이 없을 뿐이다. 하나님이 친히 성전이 되신다는 메시지는 그리스도께서 공생애중에 자신이 성전임을 말씀하신 이야기를 연상시킨다.(요한복음2:19-21) 예수가 손으로 지은 성전 건물을 무너뜨리고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을 지으시겠다는 말씀이 그의 부활로 일차적으로 성취되었고 이제 새 예루살렘 성에서 종말론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새 예루살렘이 각종 다양한 보석으로 장식된 것은 어린 양 예수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이 순결함과 아름다움으로 단장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21 11절에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으며 벽옥과 같이 맑다고 하는데 이는 보석이 보좌에 계신 하나님의 신적 현현을 반영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새 예루살렘의 보석들은 성전 모티브를 포함하는 출28:17-20에 대제사장의 가슴에 다는 보석들과 그리고 에덴 모티브를 포함하는 에스겔28:13의 보석들과 거의 비슷하다. 이렇게 보석 모티브는 새 예루살렘과 성전과 에덴을 서로 밀접하게 관련시키고 있다. 이것은 구약의 에덴과 성전의 궁극적 실체가 새 창조의 새 예루살렘에서 완전히 드러날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의 에덴 동산은 구약의 성전을 통하여 그 회복이 예고되었으며 마침내 새 예루살렘을 통하여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에는 에덴적 요소와 성전적 요소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되어있다.

 

그런데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이해되서는 안된다. 이 구절은 만국이 새 예루살렘으로 순례의 길을 걸어갈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만국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이사야 2:2-4; 14:1-2; 60:1-4 ;스가랴 2:11; 14:16)은 구약에서 언급되는 종말론적 축복 중 하나이다. 구약에서 만국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 목적의 완성 그리고 예루살렘이 우주의 중심임을 의미한다. 이러한 언급은 새 예루살렘에서 구약의 종말론적 약속의 성취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종말적 교회 공동체인 새 예루살렘에서 에덴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짐으로 첫 창조의 목적이 성취된 것이다. 유대적 전통에서 새 에덴은 항상 종말론적 축복으로서 새 예루살렘과 공존한다. 왜냐하면 첫 창조의 회복이 종말론적 완성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에서는 강물이 흐르고 에스겔 47장에서는 성전에서 강물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강물이 흘러나온다. 이것은 에덴 동산과 에스겔의 성전을 통해 기대했던 바가 새 예루살렘에서 마침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에덴동산도 아니고 성전도 아닌 바로 하나님 자신이 생명수 샘물의 원천이 되신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에덴의 회복은 생명수 강 양 옆에 있는 달마다 열두 실과를 맺는 생명나무에 의해 더욱 강조된다.(22:2)

 

새 예루살렘에서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다.(22:4) 아담은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수밖에 없었고(3:9-11)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는 살아남지 못했다.(33:20,23)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 새 에덴,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다는 것은 타락에서 회복으로의 완전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교회가 세세토록 왕 노릇을 한다는 언급이다.(22:5) 이것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만물을 통치하도록 위탁받았던 궁극적 가치의 회복으로서 새 창조, 곧 새롭게 된 만물을 다스리는 교회의 통치사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22:1-5은 새 창조의 주인공인 교회가 에덴 동산에서 첫 창조의 목적에 대한 완전한 회복을 경험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교회의 이런 종말적 모습은 단순히 미래적인 것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교회는 비록 이 땅에서 고난을 받고 있지만 동시에 그 종말적 특징을 지금 하늘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핵심 메시지이다. 하늘에 속하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는 교회의 이중적 실존의 모습이 요한계시록 전체에 흐르고 있다. 계시록312절은 이 땅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이름과 하늘의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계시록112절은 척량된 성전과 제단은 보존되지만 측량되지 않은 성전 뜰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힌다. 교회는 핍박당하지만 철저히 보호받는 존재이다. 계시록209에는 성도들의 진 곧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성이 사단과 그의 군대에 의해 포위되지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대적들을 태워버린다. 이렇게 새 예루살렘인 교회는 하늘에 존재하면서 동시에 이 땅에서 사단의 공격대상이 되고 있다. 교회는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린 양의 신부로 준비되어((197 ; 202) 마침내 어린 양과 혼인 잔치를 치르고(212)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성으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213)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적 교회론

 

요한계시록의 일관된 흐름을 형성하는 주제는 교회론이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에 대한 묘사는 신약의 다른 책들과 비교해 볼 때 그 표현기법이 매우 독특하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유대 묵시문학의 전통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묵시 문학의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공간적, 시간적 초월성이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두 측면의 초월성을 근간으로 하여 교회를 설명한다. 그것은 교회가 현재 전투하는 교회로서 이 땅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승리한 교회로서 하늘에 존재하며, 그 하늘에서 교회는 종말론적 축복을 경험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2-3장에서 먼저 등장하는 일곱 교회는 당연히 땅에 존재하는 교회다. 그 일곱 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요한계시록이 이런 문제투성이 교회들로 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놀랍게도 이어지는 4-5장에서는 하늘에 앉아 있는 24장로로 묘사된다. 24장로는 구약과 신약을 망라하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2-3장에서는 땅에, 4-5장에서는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가 7장에서는 나란히 등장한다. 7장 전반부(7:1-8)에서는 144,000으로 상징되는 땅에 존재하는 교회가 등장하고 동시에 7장 후반부(7:9-17)에서는 셀 수 없는 무리로 상징되는 하늘에 존재하는 교회가 등장한다. 이 두 무리는 분명 하나의 동일한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요한은 하나의 교회를 두개의 관점, 즉 천상적 관점과 지상적 관점에서 바로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교회가 특수성과 보편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땅에 존재하는 지상의 교회는 전투하는 모습이고, 하늘에 존재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천상의 교회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다.(7:9-12) 요한계시록은 교회가 전투하는 모습과 승리하는 모습의 양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으며, 또한 하늘과 땅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교회론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11-12장에서 교회는 고난과 핍박 심지어 순교도 각오해야 하는 공동체로 묘사된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손상되지 않는다. 교회는 성전의 척량에 의해 보존되며, 두 증인의 부활로 승리가 확인된다.

 

 

교회에 대한 상징은 14장에서 다시 144,000으로 등장하는데 이 숫자는 7장의 144,000과 동일한 무리다. 그런데 71-8에서 지상에 존재하던 144,000 141-5에서는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가장 직접적인 문맥을 형성하는 12-13장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141-5에서 21-18절을 12-13장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7:1-8 144,000 13장의 두 짐승에 대한 승리자로서 7:9-127 "셀 수 없는 무리"처럼 하늘에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봄으로써 땅과 하늘의 두 관점을 하나의 관점으로 통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짐승에 대한 교회의 승리를 확증하고자 한다. 그래서 19:6-10에서 하늘에서 승리한 교회의 모습인 4-5장의 24장로와 7:9-17 "셀 수 없는 무리, 그리고 14:1-5 144,000의 연장선에서 혼인 잔치에 참여한 신부로서의 교회가 등장한다.

 

 

요한계시록은 언제나 일관되게 사람들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 땅에 거하는 자들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 그것이다. 이런 구분은 공간적 구분이 아니라 종교적 구분이다. 전자는 본질적으로 사단에게 속한 자들이고 후자는 하나님에게 속한 자들 곧 교회다. 이런 측면에서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땅에 존재하지만 땅에 속한 존재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늘에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교회는 공간적 초월인 하늘에서 시간적 초월인 종말을 경험하고 있다. 교회가 하늘에서 누리는 축복들은(7:15-17) 교회가 종말에 누리게 될 축복들이다.(21:3-4 ; 22:3-6) 이 두 축복들은 서로 병행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교회가 하늘에서 종말적 축복을 미리 경험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땅에 존재하는 교회는 하늘에서 종말에 주어질 영원한 생명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종말론적 교회관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져주는가? 첫째로 한국교회의 교회관이 좀 더 낙관적이어야 한다. 이런 낙관적 태도는 하나님의 계획이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이다. 이유야 어쨋든 한국교회가 패배의식에 빠지는 것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무시하는 인간의 불신앙적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에 무관심하자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철저하게 반성하고 치료해야 하지만 동시에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주도면밀하신 계획의 실천성을 겸허히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이런 자세는 현실적 도전에 대한 패배주의를 절대로 용인할 수 없으며 도전을 극복할 수 있는 낙관적이고 희망찬 관점을 갖도록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공동체성에 눈을 떠야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교회의 공동체성은 당연히 전제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한 번도 개인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의 관심은 개인이 아니라 교회전체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사회적 풍조인 개인주의 영향을 받아 점점 더 해체되어가는 느낌이다. 그러한 개인화 경향은 대형교회로의 평행이동에 의해서 더욱 심화되고 있다. 공동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성경적 교회관을 대형교회가 실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셋째로 우리는 교회 공동체가 누릴 수 있는 종말론적 축복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는 종말에 누릴 축복을 현재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되어 미리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러한 특권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면 교회 공동체가 엄청난 능력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이런 특권을 소홀히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이런 특권이 발휘될 수 있는 영역중의 하나가 교회 공동체의 예배다. 교회 공동체의 예배와 교제가 천상의 감동과 감격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예배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하늘의 생명력을 넘치게 누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어 천상의 축복을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이 땅에서 전투하는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의 이 양면적 특징은 요한계시록이 일관성 있게 말하는 교회관이다. 어떻게 이 양면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이미 성취되었지만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속 역사가 완료되는 날, 사단은 유황불에 던져질 것이며 교회는 더 이상 전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날에 하늘과 땅은 합치될 것이며 하늘에 존재하던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올 것이다. 그래서 천상에서 승리한 교회가 지상에서도 승리한 교회로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 날이 오기 전에 교회는 이 땅에서 전투하는 교회로서 존재한다. 믈론 전투현장에서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를 받지만 때로는 실패도 맛보고 고난도 받으며 심지어 순교도 당해야 한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