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최갑종, 『칭의란 무엇인가?』 정리 및 단상

메르시어 2023. 5. 13. 11:54

칭의란 무엇인가? -최현만

배우는 자의 기도/서재

2017-02-07 18:41:42


최갑종, 『칭의란 무엇인가?』 정리 및 단상 

20대에 최갑종 교수님이 쓰신 예수 연구, 바울 연구 관련 서적에서 큰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관련 주제의 연구 동향을 깔끔하게 잘 요약해서 소개해 주셔서, 시야를 넓히는 데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도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계속 소개해주셨구요. 최근에 칭의에 관한 책을 내셔서 반가운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새 관점 지지자의 입장에서 교수님의 주장을 정리하고, 나름대로 새 관점을 변호해 볼까 합니다.

 

[1] 서문

핵심은 하나다. 바울은 [믿음으로 얻은 최초의 칭의]와 [행위에 근거한 마지막 칭의]를 둘 다 말했다는 것이다. 억지로 조화시키지 말고,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이해해 보자. 바울은 목회자였고,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다른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할 때는 [믿음으로 얻은 최초의 칭의]를, 공동체의 거룩한 삶을 촉구해야 할 때는 [행위에 근거한 마지막 칭의]를 강조했을 것이다.

[2] 1장, 칭의에 대한 최근의 쟁점

38~41쪽에서 새 관점의 칭의 관련 가르침을 여섯 측면으로 제시하며, 이 내용 각각이 본서의 각 장(chapter)가 된다. (2)에 칭의의 근거가 추가되서 총 7장이 되고, (3)과 (4)는 본론에서는 순서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① 칭의의 기원: 다메섹 사건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 선교 상황에서 발전된 것? -> [제2장. 바울의 칭의 교훈의 기원]

② 칭의의 내용: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에 관한 것? -> [제3장. 칭의란 무엇인가? + 제4장. 칭의의 근거]

③ 칭의와 성화의 관계: 구분된 개념이라기보다는, 통합적으로 보려는 시도. -> [제6장. 칭의와 성화]

④ 칭의의 수단: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실함(믿음)? -> [제5장. 칭의의 수단인 믿음]

⑤ 전가 교리: 부정하거나 다른 개념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 -> [제7장. 칭의와 전가]

⑥ 칭의와 행위 심판의 연관성: 견인 교리를 부정하고, 탈락 가능성을 긍정한다. -> [제8장. 칭의와 최후의 행위 심판]

[3] 1장 말미의 심층연구1: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 재구성 비판

다음 네 가지 비판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① 1세기 유대교 문헌을 보면 [언약적 율법주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제2성전 유대교에는 [율법주의적 경향]도 함께 존재한다. 그렇다면 샌더스는 자료를 과장 혹은 왜곡한 것이다.

② 신약성경 자체가 1세기 유대교 안에 율법주의가 상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③ 제2성전 유대교 공동체의 실제 삶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④ 제2성전 유대교의 분위기를 결정한 것이 [종말론]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종말론]의 문맥 안에서는 율법 준수가 [신분 유지(staying in)]가 아닌 [가입(getting in)]의 의미를 갖게 된다.

[4] 단상

1) 새 관점 주장을 정리한 내용은 정리이기 때문에 깔끔하지만 미심쩍은 느낌이다. 본론의 각 파트에서 더 자세한 설명을 읽고 난 뒤 판단해야겠다.

2) 샌더스의 1세기 유대교 재구성 비판 부분

전반적으로 반(反) 새 관점 학파에서 이전에 했던 비판의 반복으로 다가왔다. 관련 논의를 처음 접한 사람에게는 좋은 요약이 될 수는 있겠지만, 비슷한 비판들에 대해 이미 새 관점 진영에서 답변을 제시한 상황에서 그 내용을 제시하지도, 재반론을 시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미흡하다고 생각되었다.

심층연구1에서 샌더스의 유대교 재구성을 비판한 내용 중 ①, ②, ③은 한꺼번에 다룰 수 있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소개하는 제임스 던의 글이 충분한 답변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글의 세 번째 단락 내용은 최갑종 교수님이 서문에서 강조한 내용과 비교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최갑종 교수님이 바울의 표면적인 비일관성을 변호하기 위한 무기인 "목회적 의도"가 던이 언약적 율법주의의 다채로움을 변호하는 무기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④의 경우는 제8장에서 다룰 내용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단 보류하는데, 이 비판에 대한 제임스 던의 반응은 『바울에 관한 새 관점』(에클레시아북스), 81~89쪽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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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던, 바울에 관한 새 관점, 78~81쪽]

샌더스가 그 내용을 최초로 진술했을 때, 그 정식의 신율주의적 측면을 덜 강조하고, 그 주제에 대해 제2성전 유대교가 만장일치를 이루고 있었음을 과도하게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샌더스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 정식을 융통성 없는 법칙으로 취급하거나, 그 정식이 기본적으로 통합된 특징을 지니고 있는지에 이의를 제기해 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대교의 구원론을 ‘언약적 신율주의’로 범주화하는 것은 여전히 전체 내용에 대한 공정한 정리로 생각된다. 구원론을 좀 더 정교하게 기술하다보면 유대교들(복수)에 대해 말할 필요성이 생긴다는 것을 인식함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여전히‘ 유대교’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가능하며 또한 그렇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미 지적했듯이 내가 제2성전 유대교와 관련하여 이 용어를 사용할 때, 나는 신명기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신학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다.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개념으로 바울의 구원론의 특징인‘ 이미/하지만 아직은 아닌’의 긴장을 들 수 있겠다. 그 긴장이 지닌 요소와 특징에 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념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에는 광범위한 의견 일치가 이루어진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제2성전 유대교의 구원론 안에 선택(언약)과 토라(신율주의) 사이에 공생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이지, 그 관계의 내용이 무엇인지 혹은 그 관계가 상이한 제2성전 유대교의 작가들과 종파들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지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선택의 주어짐"(givenness)과 "그로부터 파생된 결과인 의무", 이 둘은 제2성전 유대교의 구원론이라는 타원의 두 초점에 해당된다. 하지만 두 초점 사이의 연결이 허락하는 한에서 어떻게 타원을 그리느냐에 따라서, 그 둘레는 좀 더 팽팽할 수도 혹은 느슨할 수도 있다. 더 이상의 오해를 막아보려는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요점을 반복해보겠다. ‘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샌더스 자신의 진술을 변호하는 것은 나의 의도가 아니다(아베마리를 위시한 사람들의 비판은 정당하다). 나의 핵심 주장은 제2성전 유대교의 구원론 안에는 [주어진 선택]과 [요구된 순종] 사이의 상호관계가 존재했으며, 그 상호관계가 샌더스 이전에는 충분히 인식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문구 안에 그러한 특징이 공정하고 효과적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인 논의를 통해 다음과 같은 위험성이 부각된다. (1) 다른 시기, 다른 상황 속의 다른 작가들의 다양한 진술을 조직화하려는 위험성. 혹은 (2) 다른 문학 장르와 수사적 맥락으로부터 위태로운 병렬 진술들을 추출해내려는 위험성. (자만과 번영이 득세한) 특정 상황에서는 당연히 신적인 선택이 먼저라는 사실, 그 선택이 값없이 주어졌다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한다; 나는 이미 신명기의 서두를 예로 든 바 있다. 반대로 (불순종과 방종이 두드러지는) 특정 상황에서는 순종해야 할 필요성과 순종하지 못할 때의 위험성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서는 신명기 28장이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 이야기는 일관성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가, 아니면 상이한 상황에 적절하게 적용된 상이한 수사학에 대한 이야기에 불과한가, 아니면 같은 책에 존재하는 상이한 단락에 관한 것인가?! 나는 뒤에서 바울의 저작을 포함한, 기독교의 저작들이 지닌 이와 유사한 성질에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말하자면, [은혜에 대한 강조]와 [순종의 필요성] 사이의 관계와 관련하여 그와 유사한 다양성이 기독교 저작들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쉽게 입증될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은 유대교 본문 만큼이나 ‘일관성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두 가지 내용 모두 발화의 다양한 방식이 상이한 환경 속에서는 각각 적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줄 뿐인가?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율주의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요소 사이에는 창조적인 긴장이 존재했던 것이 분명한데, 이 내용을 아마도 왜곡했던 사람들이 제2성전 유대교와 랍비 유대교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지워진 신율주의적 의무를 강화했던 집단과 종파가 존재했으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은 반박하는 할라카에 신실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상태를‘ 의로운 것’으로 평가했고, 이러한 할라카를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들’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할라카’ 대신‘ 성서 무류설’,‘ 6일 창조’,‘ 교황의 무오성’,‘ 안식일 준수’,‘ 형벌적 대속’,‘ 성직자의 자격으로서 남성성’과 같은 말을 넣어 보라. 그러면 같은 이야기를 기독교 내부의 적지 않은 종파/집단/전통주의자들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진정으로 각각의 경우에 하나님의 은혜가 지닌 순수함이 위태롭게 될 위험성, 하나님을 위한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위한 열심 때문에 부차적인 쟁점/아디아포라가 본질적/근본적인 위치로 격상될 위험성이 존재한다. 애석하게도, 어떤 모습이든 근본주의자들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가 그러한 모든 형태의 근본주의에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지, 종파를 구별해 주는 특정 교리들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어떤 종교에 대한 근본주의자들의 표현이 반드시 그 종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언약적 신율주의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는, (내가 질문을 던졌듯이) ‘언약적 신율주의’가 제2성전 유대교 구원론에 대한 성격 묘사로서 부적절하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아니면 바울이 제2성전 유대교 안의 표현들 가운데에서 오로지 제한된 범위의 표현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표시인가? 

 

제2장 바울의 칭의 교훈의 기원

※ 내용 정리

1. ‘논쟁 교리’로서 칭의 교리를 제시하는 새 관점의 주장

전통적으로 개신교 학자들은 ‘칭의’를 바울 복음의 핵심/중심 주제로 생각했다. 그런데 ‘칭의’를 바울이 이방인 선교 현장에서 만난 유대주의자들과의 논쟁 때문에 발전시킨 논쟁 교리로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새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부적으로 (1) 바울 사상 혹은 로마서의 중심이 ‘칭의’가 아닌 ‘참여’/‘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2) ‘칭의’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와 관련된 내용이다, (3) 칭의의 기원은 다메섹 사건이 아닌 안디옥 사건이다, (4) 바울의 비판 대상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율법의 사회적 기능이었다, (5) 유대인이 율법을 고수한 이유는 ‘행위 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적 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6) 칭의는 구원론이 아닌 교회론에 관한 것이다, (7) “하나님의 의”와 “칭의” 모두를 언약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새 관점에 대한 평가: 공헌과 한계

칭의 메시지가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정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칭의에는 사회적, 교회론적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부각시킨 것은 새 관점은 공헌이다. 하지만 칭의 교리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에서 비롯된 특수한 메시지이거나 역사적 정황의 산물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3. 칭의가 복음의 핵심이었다는 증거

1) 복음과 칭의는 연결되어 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칭의를 사회적/교회론적 측면만이 아닌 구원론과 연결해서 이야기한다. 즉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해결하셨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가 제거되었다는 내용이 칭의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공동체만이 아니라 개인의 믿음을 항상 함께 언급한다.

2) 로마서 1-3장의 논증 과정이 그 증거다

바울이 복음과 의를 결코 분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로마서로 설명하자면, (1) 복음을 믿는 모든 자들(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조하고, (2) 그 이유가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3) 그 다음 1:18-3:20에서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한 죄인이라는 사실과 율법의 무력함을 제시한다. (4) 이어서 3:21-31에서 “드디어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내용과 수단, 근거, 결과를 설명한다.

4. 칭의 복음의 기원도 다메섹 사건이다. 칭의는 처음부터 바울의 복음의 핵심이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그 복음의 기원을 다메섹 도상의 계시로 돌린다. 칭의는 처음부터 그가 전파하는 복음의 중심 내용이었다. 성경 상의 여러 증거로 보건대 바울은 안디옥 사건 이전에도 칭의의 복음을 설파했던 것이 분명하다. 안디옥 사건도 바울과 베드로의 복음 해석이 달랐다기 보다는, 베드로가 유대화주의자들을 두려워해 합의를 실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 갈등 문제가 주된 이슈가 아닌 서신에도 칭의 복음이 분명히 등장한다.

※ 단상

1. 칭의 복음의 기원과 관련된 논쟁

“칭의 복음의 기원이 다메섹 사건인가, 안디옥 사건인가?”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바울이 칭의 교리를 처음부터 확립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칭의가 바울 복음의 핵심이다’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칭의 교리가 이방인 선교 문제로 개발된 교리라면 칭의가 바울 복음의 핵심일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제임스 던은 이 사안과 관련해서도 오해가 있다면서 이미 자신의 주장을 더 정리해서 제시한 상태라, 본서의 비판은 허수아비 논증으로 다가왔다. 아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최갑종 교수님이 공격한 내용을 던은 대부분 부인한다. 이 사안과 관련된 제임스 던의 입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바울에 관한 새 관점, 45~49쪽).

1) [믿음으로 얻는 칭의]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처음부터” 확고하고 분명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구원하는 의로 이해하는 바울의 사상은 로마서 1장 16~17절이 암시하듯이 그의 유대교/구약성경이 물려준 유산의 일부다.

2) 이방인의 사도로서 자각과 관련해서도 바울은 “처음부터” 이방인이 이제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임을 깨달았다. 바울은 자신의 회심을 회상할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방인도 이제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자신의 눈이 뜨인 사건이라고 말한다(갈라디아서 1장 12~16절). 바울은 기독교인으로서 복음 전파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줄곧" 하나님의 구원하는 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3) 그런데 최초의 이방인 선교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등장했다.

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교 율법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일례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나)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특히 이방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율법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가? 일례로,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아직 “유대인이 되지 않은”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식사를 같이 해도 되는가?

가)의 경우는 예루살렘 회의에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나)는 아직 충분하게 인식되지 못했거나 혹은 해결되지 않은 채 모호하게 남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는 것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더 높은 수준의) 토라 준수를 주장하고 나섰을 때, 안디옥의 그 사건이 발생했다. 안디옥 사건을 촉발한 것은 가)가 아닌 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할례 문제, 그리고 정함과 부정함에 관한 규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주체가 바울이 아닌 그의 동료 유대인 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의문이 없었기 때문에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다가, 동료 유대인 신자들이 문제를 삼자 자신의 신학적인 근거를 진술하게 된 것이다. 바울이 그만큼 큰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복음이 이방인 신자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분명한 정식화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4)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이신칭의 공식에서 핵심은 “율법의 행위들이 아닌”에 있다. 베드로는 칭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다는 생각, 그리고 유대교 신자들이 율법의 행위들을 지키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생각, 이러한 두 가지 생각 모두를 고수할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베드로는 이미 칭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한다는 신앙에 동의했지만, 안디옥에서는 (유대인) 신자들이 (핵심적이고 특정한) 율법의 행위들을 준수하는 게 여전히 필요하다고 암시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 베드로의 이런 행동을 본 바울은 이 부분에 복음의 성패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는, 갈라디아서 2:16의 내용을 그 쟁점에 맞춰, 아마도 예리한 대립적인 표현 - “믿음에 행위를 더한 것”도 아니고, “믿음과 행위 둘 모두로도”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 을 사용하여 하나의 공식화된 표현으로 선언했다.

5) 요약하면, 갈라디아서 2:16에 나타난 칭의에 대한 바울의 정식 선언은 문맥이 암시하듯이 안디옥의 위기 상황에서 나온 반응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칭의가 온다는 신앙은 "처음부터" 공통 기반이었다. 바울은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칭의에 대한 그의 가르침이 “좀 더 예리해질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강조해야 했다.

2. 복음과 칭의의 관계에 대해

“복음과 칭의의 관계”의 경우는 “복음”과 “칭의”를 각각 규정하고 나서 이야기해야 할 사안인데, 1) 아직 “칭의”의 내용을 상세하게 다루기 전이고, 2) 최갑종 교수님이 제시한 “복음” 및 “칭의”에 관한 각각의 정의도 논란거리가 많은 내용이다 보니, 두 개념을 둘러싼 논란을 정리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책의 초반에 이 두 개념의 관계를 다룬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냥 최갑종 교수님 나름의 정리된 개념을 확인한 느낌 정도였다.

최갑종 교수님은 “복음”과 “칭의”의 밀접한 관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로마서 1-3장의 논리 흐름을 들었는데, 같은 주제에 관한 톰 라이트의 견해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겠다. 톰 라이트가 구약 혹은 유대교의 신앙 체계, 특히 언약 내러티브를 배경 삼아 로마서의 흐름 및 "복음"과 "칭의"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는지에 중점을 두고 보면 좋겠다.

1) 로마서 1:3-4(“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다”라는 왕의 조서)이 복음 내용의 요약이고, 1:16-17(“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은 복음의 내용이 아닌 복음의 효과를 약술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이신칭의의 복음이 계시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처리하고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드러났다는 의미다.

2) (특히 포로기)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다는 것은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이 나타날 마지막 심판을 염두에 둔다. 그날에는 불의한 사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우상을 숭배한 자들에게 하남이 진노가 내릴 것인데, 현재 이방인의 상태는 그런 모습이다.

3) 하나님의 이 마지막 판결(최종적 칭의와 심판)은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 날에 의롭다고 인정될 사람은 율법을 신실하게 지킨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마음에 율법이 기록되어 율법을 행하는 의인이 이미 있다!)

4) 그런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할 계획을 위탁한 이스라엘의 상태는 어떤가? 맹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어야 할 유대인은 어떠한가? 율법을 자랑하는 그들도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했다. (그런데 성령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무할례자가 이미 존재한다!)

5) 하나님의 말씀을 위탁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실패했다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폐하는가? 우리의 불신실함이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가?

6) 원래 계획대로라면, 마지막 심판에서 불의한 이방인은 심판을 받고 의로운 유대인은 칭의를 받는 그림이어야 하는데, 유대인도 이방인과 함께 심판석에 앉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세상이 실패하고, 세상을 위한 구원 계획을 수행해야 했던 이스라엘도 실패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렇게 좌초하고 마는가?

7)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불신실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할 신실한 이스라엘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자기 아들 예수를 신실한 이스라엘로 보내신 것이다. 원래 계획으로는 마지막 날 인류(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일어나야 할 최종적 심판이 역사 한 가운데서 예수라는 한 분에게 미리 일어났다. 하나님이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은, 그를 옳다고 인정하신 것이다. 이제 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유대인/이방인, 할례/무할례와 무관하게 의롭게 된다.

8) 이런 설명에서 칭의는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인데, 마지막 날에 있을 이 의롭다는 선언이 역사 한가운데서 예수에게 먼저 내려졌고, 이 예수에 관한 복음을 믿는 사람도 모두 의롭다는 선언을 받는다. 복음과 칭의는 이렇게 연결된다. 복음의 내용은 이신칭의가아니라, "하나님의 통치하신다" =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고, 이는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임명하신 것" = "예수가 이 세상의 주님이시다"는 의미다.

 

제3장 칭의란 무엇인가?

본장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다.

1) 칭의의 초점은 (가) 우리의 신분에 대한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인가, 아니면 (나) 실제 삶을 바꾸는 구원 행위인가?

2) 칭의는 (가) 구원론적 주제인가, 아니면 (나) 교회론/선교론적 주제인가?

1)과 관련해서 최갑종 교수님은 "하나님의 의"란 표현의 의미로 논의를 전개한다. (가)의 사례로 크랜필드의 견해를 든다("하나님의 의"는 "신자들에게 전가된 하나님의 의"다). (나)의 사례로는 케제만("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 행위로 피조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과 라이트의 견해("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다)를 소개한다. 그후 (가)와 (나)의 약점을 비판한 후, 자신의 의견을 제시한다.

그 의견이란 "의"를 역동적인 의미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래서 크랜필드와 케제만과 라이트의 견해 모두를 그 의미에 통합시킨다. 그러면서 자신의 견해와 비슷한 입장으로 스튤마허와 김세윤의 글을 소개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점을 말하면,

"의", "하나님의 의", "신자의 의", "의롭게 하다" 개념에 대한 정밀한 정의를 생략한 채 논의를 전개한다. 이 개념들 사이의 관계를 정리하는 건 칭의 논의를 위해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나머지 개념들은 중간중간 두서없이 논의에 통합되어 버린다. 중간에는 크랜필드의 개념을 전제로 두고(혹은 옳다고 판단하고, 혹은 독자들도 그 입장에 동의할 것으로 전제하고)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 개념이 구분 없이 사용하다 보니,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다.

결론 부분에서 이런저런 개념을 통합한 자신의 주장을 '의 개념은 역동적이다', '칭의는 포괄적이다', '바울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않는 히브리적 전망에서 사고한다' 등으로 뒷받침할 때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그런 말들이야 모두 맞는 이야기지만, 사고나 논리의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었다.

최갑종 교수님은 3장을 시작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다.

"칭의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 어휘에 대한 구약과 중간기 유대 문헌 및 바울 당신의 고전 그리스어의 용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울 서신에서 의라는 어휘가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나타나고 있는 의와 관련된 바울의 용법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 말에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문맥도 중요하지만, 바울의 (특히) 유대적 배경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갑종 교수님의 논지가 혼란스러운 근본적인 요인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언급하셨던 내용들('의 개념은 역동적이다', '칭의는 포괄적이다', '바울은 주관과 객관을 구분하지 않는 히브리적 전망에서 사고한다')이 결국은 바울의 사고방식이 기본적으로 히브리/유대적 관점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바울의 사고방식과 개념을 히브리/유대적 관점에서 먼저 정리하는 게 우선이지 않을까?

그게 톰 라이트가 "칭의를 말하다"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고, 그 방식은 '바울의 유대적 배경'과 '바울 서신'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바울 서신의 의미를 선명하게 잘 드러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최갑종 교수님은 텍스트 자체를 먼저 강조하다보니, 텍스트 자체만으로는 메우기 힘든 간극을 기존의 개념으로 메워 넣고는, 나중에 바울의 유대적 배경이 지닌 특징을 맥락과 무관하게 근거로 제시한다는 느낌이다.

2)와 관련해서는, 새 관점의 입장을 과도하게 단순해했다는 사실, 비판을 위한 비판 같은 느낌, 역시 허수아비 논증 같다는 느낌이다. "새 관점은 A를 주장하고 B를 무시했다. B를 긍정하긴 해도, A를 강조한다"는 문장이 반복된다. 톰 라이트가 칭의의 교회론/선교론적 차원을 강조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창조"를 강조하려는 것인데, 자꾸 다른 부분을, 그것도 왜곡해서 부각시켜 비판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구원에는 수직적 요소와 수평적 요소가 공존한다는 최갑종 교수님의 결론에는 톰 라이트도 동의할 것이다(그리고 반복해서 그렇게 천명했다). 문제는 접근방식이다. 톰 라이트라면 이 주제에 접근할 때, 구원론과 교회론의 대립이라는 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계획이라는 틀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두 요소가 대립할 필요도 없고, 또 두 요소의 관계가 적절하게 설명되며, 나아가 바울이 칭의론을 제시해야 했던 정황과 강조점도 제대로 부각될 것이다.

주해라는 게 결국은 자료들을 가장 매끄럽게 이어주는 설명을 찾으려는 노력이고, 여기에는 '역사'와 '문학'과 '신학'이란 세 요소의 통합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세 요소 사이의 상호 작용과 비판적 대화가 지속되어야 한다. 그래도 굳이 출발점을 특정하자면 나는 '역사'를 들고 싶다. 최갑종 교수님은 문학을 기반으로 삼고, 중간의 홈을 신학으로 메꾸고, 그 설명을 뒷받침할 거리를 역사에서 찾은 느낌이다. (100% 맞지는 않아도) 잘 구축된 역사(특히 세계관)를 배경에 두면, 문학과 신학의 요소도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그것이 내가 톰 라이트에게 배운 핵심이다.

 

제4장 '칭의의 근거'
제5장 칭의의 수단인 믿음

제4장은 분량이 꽤 많다. 핵심 본문인 3:23-26, 갈라디아서 3:10-14, 고린도후서 5:18-21을 상세하게 주해하기 때문이다. 제5장은 이제는 유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의 해석에 관한 내용이다.

두 부분 모두 논란이 있는 여러 주제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길게 이어지기 때문에 정리하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그리고 정리하기가 힘들어 보인다). 이 주제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또 이전에 박영돈 교수님의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를 읽으면서, 반복되는 딴생각을 적어보겠다.

1) 최갑종 교수님의 주장에 국한된 내용이 아니라, 관련된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을 보며 토론이 아니라 자기 생각 말하기 대회 같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입장을 가진 학자들이 자기 주장을 뒷받침 하기 위한 근거를 온갖 영역에서 찾아내다(?) 보니, 양쪽 모두 다수의 증거를 소유하게 된 상황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같은 편끼리도 세부사항에서는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당신 생각은 그런가 보군요. 하지만 이런 증거도 있으니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는 말이 주로 오가는 느낌이다. 결국 판단은 독자가 알아서 현명하게 해야 되는 상황이 된 듯하다.

2) 그런데 "독자"로서 나는 무슨 기준으로 판단해야 할까? 어휘, 구절, 문장, 근접 문맥, 각 서신의 흐름, 주제, 더 넓게는 바울 신학, 구약과 신약의 관계, 역사적 배경 등 온갖 관점에서 서로 증거들을 주고 받으며 싸운다. 최선은 그 모든 관점에서 완벽한 설명이겠지만, 그런 설명이 있다면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까? 일단은 관련 논의를 직접 붙잡고 씨름하는 게 중요한 첫걸음이라 생각된다. 그래야 무엇이 더 중요한지,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개인적으로 감이 잡힐 것이라 본다.

본서의 예로 들면, 5장 말미에 <심층연구 2>가 있다. 이 부분에서 최갑종 교수는 로마서 3:21-26에서 하나님의 의에 관한 홍인규 교수의 논문을 비판한다. 4쪽 분량밖에 안 된다. 홍인규 교수는 3:21-26의 핵심을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다"로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그 의가 계시된 수단으로 보고, 그래서 주격 속격으로 해석한다. 최갑종 교수는 그에 대해 세 가지 근거로 비판하고 목적격 속격 해석을 지지한다. 직접 로마서 3:21-26을 읽고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나서, 이 부분 <심층연구 2>에 나오는 두 교수의 주장을 심사해 보면 어떨까?

그리고 5장 주제에 대해서는 목적격 속격 찬성자인 제임스 던과 주격 속격 찬성자인 리처드 헤이스가 서로 주고 받은 논문이 있다. 리처드 헤이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클레시아북스)에 부록으로 두 논문이 모두 실려 있으니, 직접 읽어보고 정리해보는 것도 좋겠다.

3) 나는 새 관점 지지자로서 선입관을 가지고 이 책을 읽고 있다. 그리고 관련된 책을 번역하다보니 관련 논의를 조금은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을 읽는 도중에 눈에 걸리는 지점이 많아서 진행이 더디다. 글이라는 게 논리가 있기 마련이데, 중간에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전제가 나오면 그 뒤로의 이야기는 의미가 없어진다. 꾸역꾸역 읽다 보면 좋은 말, 맞는 말도 많이 나오지만, 같은 말이라도 다른 맥락에서 다른 걸 강조해서 하는 이야기다 보니 감흥이 떨어진다. 이게 문제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어떤 틀을 가지고 어떤 맥락에서 하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 틀은 성경 해석에도 영향을 준다. 최갑종 교수님은 신약학자로서 바울 서신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최갑종 교수님이 이미 전제하고 있는 어떤 틀이 텍스트 이해에 영향을 미친다는 느낌이 계속 든다. 물론 내 틀도 내 텍스트 이해에 영향을 주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틀이 중요하다. 그래서 톰 라이트가 최근에 "행위 언약" 개념을 대놓고 비판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톰 라이트나 헤이스가 결국 강조하는 것은 결국 성경의 내러티브다. 깔끔한 개념 체계가 아닌 성경의 내러티브가 중심이 되는 성경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삶이 대세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성경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성경을 보면, 물론 초점과 내용은 상당히 바뀌지만 나름 굉장히 "깔끔한 개념 체계"도 드러난다는 면을 톰 라이트가 어느 정도 보여준 것 같기도 하다.

4) 최갑종 교수님과 박영돈 교수님의 책에서 반복해서 드러나는 전제는, 복음의 핵심은 개인의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한 억측이겠지만) 이 전제를 방어하는 일이 중요한 목표인 것으로도 느껴졌다. 다른 모든 주제에 영향을 미치는 이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해석에도 영향을 미친다(아니 관련되어 있다). 리처드 헤이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논란의 함의와 관련하여 한 말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복음의 핵심에 대한 믿음/전제/입장이 개인의 성경 해석 전체에 두루두루 영향을 미칠 수 있다(혹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지키려는 입장 때문에 오히려 내 입장이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입장을 내려놓고 대화하면 의외로 서로 뜻이 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는 차원에서 읽어주시면 좋겠다.

[개인의 믿음이 가진 구원 효력을 강조하는 인간중심적(“목적격 속격”) 해석에 항상 뒤따르는 위험성이 있으니, 복음을 개인의 종교적 체험에 관한 설명 정도로 전락시키거나, 믿음을 기괴한 종류의 행위(그리스도인들은 올바른 영적인 마음가짐을 함양함으로써 구원의 입구를 통과한다)로 변질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루터는 자신의 후계자들이 이러한 신학적 어리석음을 저지를 때마다 무덤 속에서 동요하며 악담을 퍼부을 게 틀림없다.) 구원을 "예수의 신실함"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얻어진 것으로 보는 내러티브적 설명은 이러한 신학적 오류를 제거하려고 시도하여, 구원이 우리 밖에서(extra nos) 오는 측면뿐만 아니라, 구원의 공적인, 집합적인 특징을 강조한다. 과거와 현재의 불트만 주의자들은 복음의 내러티브적 특징을 이처럼 강조하게 되면 말씀을 객관화하고 생명력을 떨어뜨릴 것이라고 조바심을 낼 게 틀림없다.]

 

제6장. 칭의와 성화

[내용 정리]

1)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 소개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엄격히 구분했는데, 이는 구속 사건과 하나님의 주권이 지닌 중요성을 보존하고, 공로주의나 행위 구원론이 들어올 여지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견해를 소개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 앤서니 후크마, 박영돈, 김영한을 인용한다. 이중 후크마의 정리가 가장 깔끔해보였다.

ⓐ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거하지만,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제거한다.
ⓑ 칭의는 신자 밖에서 일어나는, 신자의 신분/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지만, 성화는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신자의 성품의 변화다.
ⓒ 칭의는 유일회적 사건이지만, 성화는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최초의 칭의와 마지막 칭의의 관계에 관한 개혁주의의 관점은 다음 내용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내용은 제8장의 주제다.)

ⓐ 칭의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성화를 거져 종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서 처음 믿음과 칭의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 칭의의 판결을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판결이 마지막 심판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언되는" 것이다.

2) 김세윤의 견해 소개

김세윤는 칭의와 성화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종교개혁의 입장 때문에, 구원론이 왜곡되고 윤리가 부재한 신앙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 원인으로는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와 종말론적 유보를 간과한 점을 든다. 그러면서 바울에게 성화를 칭의의 현재 단계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둘이 구원이란 실제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그림 언어라고 이야기한다. 칭의가 구원의 실제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된 측면을 표현한다면, 성화는 오염된 상태의 해결이라는 제의적 측면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크게는 이런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최갑종의 견해

성경에서 "의", "성화", "구원" 어휘가 실제 어떻게 사용되는지 고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김세윤의 견해를 옹호하는 관점으로 보면 되겠다.

"종교개혁자 등이 칭의와 성화를 구분했다고 해서, 그리고 이 입장이 부분적으로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의 칭의와 성화를 동의어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상]

앞 장에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인상을 계속 받는다. 최갑종 교수님은 논제를 기존의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설정하고, 이전의 논의를 정리한 다음, 성경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그런데 이미 논제 설정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했기 때문에, 성경을 근거로 자기 주장을 할 때도 그 틀에 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직신학적 관점의 설정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김세윤 교수님의 주장대로, 바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사태를 조망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개인 구원을 중심으로 칭의와 성화를 설명하는 틀 자체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 종속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하면 더 매끄럽게 설명이 될 것 같고, 실제로 김세윤 교수님의 설명이 더 매끄럽게 다가온다. 최갑종 교수님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는,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반영하면서도 기존의 조직신학적 틀을 고수하다보니 이르게 된 이상한 결론으로 다가온다. 김세윤 교수님이나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더 큰 그림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면 안 될까?

사족인데,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후크마가 정리한 내용을 보면, 조직신학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깔끔한 개념 정리도 어떤 틀에서 하는지가 중요하고, 나아가 바울이 그처럼 깔끔한 개념 구분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문이 든다. 외국에서는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중심으로 하면서 기존의 유산을 적절하게 통합한 새로운 조직신학이 일어나면 좋겠다.

 

제7장 "칭의와 전가"

[정리]

전통적인 칭의 교리에서 의롭다는 선언이 가능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의가 신자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최갑종 교수님은 루터와 칼뱅의 견해,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인용해서 이 입장을 설명한다.

이어서 라이트 등 전가 교리를 비판 혹은 부정하는 견해를 소개하는데, 핵심은 전가 교리는 성경적 기반이 희박하며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도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갑종 교수님은 이어서 전통적인 전가 교리를 변호한다. 주요 논증은 흐름은 1)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 2) 하나님께는 공의(죄된 인간을 심판)와 사랑(용서와 회복)이라면 양면성이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만족시켰다로 이어진다. 이런 흐름에서 1)의 인간은 자력으로 "의"를 확보할 수 없는데, 3)을 통해 예수의 "의"가 확보되었고, 하나님은 인간이 예수를 믿을 때 예수의 "의"를 인간에게 전가하신다.

이 설명에서 최갑종 교수님은 인간이 믿을 때 예수와 "연합"하고, 그렇게 연합할 때 전가가 이루어진다고 설명함으로써, "믿음"과 "전가" 사이를 잇는 고리고 "연합"를 추가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전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함께 가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가와 함께 간다. 곧 전가가 빠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전가는 실체가 없는 추상에 빠지게 된다."

그후에 전가 교리를 이해할 때, 위의 논증에서 2)에 해당하는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 기초라는 사실을 강조한 후, 이런 설명이 결코 의의 "주입"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전가 교리가 성경으로 뒷받침된다는 증거로 롬 4:3, 고후 5:21, 고전 1:30을 든다.

[단상]

"연합" 개념으로도 충분한데, 왜 굳이 "전가" 개념이 필요한지 의문이 계속 들었다. 최갑종 교수님은 "전가가 빠진 연합은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분을 불분명하게 만든다"고 우려한다. 인간의 타락이라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의 의"가 먼저 획득되고, 그 의가 타락한 인간에게 전가되어 "우리의 의"가 된다고 설명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분이 불분명해진다는 이야기인 듯한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의미가, 우리가 먼저 의로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말이 아닐텐데, 굳이 왜 그런 우려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자신의 설명이 결코 의의 "주입"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고 반복해서 강변하지만, 나는 계속 주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최갑종 교수님은 롬 4:3에서 아브라함을 사례로 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일어나는 의의 전가와 다음과 같이 연결한다.

(1)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 
-> (아브라함이 믿은 약속에 내포되어 있는) 의를 (믿음을 수단으로) 아브라함에 전가시켰다 
-> 아브라함을 의로운 자로 선언하셨다.

(2) 그리스도인의 경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 예수의 사역을 통해 성취된 예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된다 
->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자로 선언하신다.

(1), (2)의 두 번째 항목은 겉으로는 유사점이 없다. 그래서 괄호 안에 설명이 붙는다. 최갑종 교수님도 이게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전가의 내용이 아브라함이 믿은 약속이라면, 우리의 경우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다. ...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을 우리의 것으로 돌리신다." "아브라함이 믿음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를 등치시킨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되고, "약속에 내포된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등치시킨다는 것도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리고 최갑종 교수님의 설명을 따르면, 우리가 믿는 대상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여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튼 성경 본문 자체에는 (1), (2) 모두에서 두 번째 항목이 없다. 굳이 없어도 설명이 된다. 선언한다는 말로 충분한데, 중간에 이런 항목이 끼어드니 의의 "주입"이라는 의심이 든다. 그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간주하다"의 의미를 "전가하다"로 설명하는 것도 납득이 안 된다. 애초에 전가 도식에 맞게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에게서 온 의"로 이해하는 등 "의", "칭의" 개념을 맞추다 보니, 무리한 해석이 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미 구축되어 있는 칭의 개념의 틀이 관건이다.

그냥 연합 개념을 따라 이렇게 간단하게 이해하면 안 될까?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최갑종 교수님이 전가 교리의 기초로 제시한 세 가지 내용(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속성, 그리스도의 성취)을 약화시킬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1) 예수님은 신실하게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
2) 우리는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한다.
3)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의롭다고 여기신다.

당연히 여기서 "의롭다고 여기다"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겠지만, 이 역시 칭의 개념의 틀 문제다. 이 문제는 제8장에서 다룰 수 있겠다. 8장 관련해서는 지금까지 나온 개념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겠다.

 
 
 
 
최갑종, 『칭의란 무엇인가?』 정리 및 단상 (5)

제6장. 칭의와 성화

[내용 정리]

1) 종교 개혁자들의 견해 소개

종교 개혁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엄격히 구분했는데, 이는 구속 사건과 하나님의 주권이 지닌 중요성을 보존하고, 공로주의나 행위 구원론이 들어올 여지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견해를 소개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 앤서니 후크마, 박영돈, 김영한을 인용한다. 이중 후크마의 정리가 가장 깔끔해보였다.

ⓐ 칭의는 죄의 책임을 제거하지만, 성화는 죄로 인한 오염을 제거한다.
ⓑ 칭의는 신자 밖에서 일어나는, 신자의 신분/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선언이지만, 성화는 신자 안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신자의 성품의 변화다.
ⓒ 칭의는 유일회적 사건이지만, 성화는 계속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최초의 칭의와 마지막 칭의의 관계에 관한 개혁주의의 관점은 다음 내용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내용은 제8장의 주제다.)

ⓐ 칭의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성화를 거져 종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서 처음 믿음과 칭의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 칭의의 판결을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판결이 마지막 심판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언되는" 것이다.

2) 김세윤의 견해 소개

김세윤는 칭의와 성화를 엄격하게 구분하는 종교개혁의 입장 때문에, 구원론이 왜곡되고 윤리가 부재한 신앙을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 원인으로는 칭의의 관계론적 의미와 종말론적 유보를 간과한 점을 든다. 그러면서 바울에게 성화를 칭의의 현재 단계로 설명한다. 그리고 이 둘이 구원이란 실제를 표현하는 서로 다른 그림 언어라고 이야기한다. 칭의가 구원의 실제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된 측면을 표현한다면, 성화는 오염된 상태의 해결이라는 제의적 측면을 표현하는 언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크게는 이런 개념들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최갑종의 견해

성경에서 "의", "성화", "구원" 어휘가 실제 어떻게 사용되는지 고찰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김세윤의 견해를 옹호하는 관점으로 보면 되겠다.

"종교개혁자 등이 칭의와 성화를 구분했다고 해서, 그리고 이 입장이 부분적으로 성경의 지지를 받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경의 칭의와 성화를 동의어처럼 사용하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를 동일시할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단상]

앞 장에서 받았던 것과 비슷한 인상을 계속 받는다. 최갑종 교수님은 논제를 기존의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설정하고, 이전의 논의를 정리한 다음, 성경을 근거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한다. 그런데 이미 논제 설정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했기 때문에, 성경을 근거로 자기 주장을 할 때도 그 틀에 매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조직신학적 관점의 설정 자체가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를테면, 김세윤 교수님의 주장대로, 바울은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서 사태를 조망한 것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개인 구원을 중심으로 칭의와 성화를 설명하는 틀 자체도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에 종속되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하면 더 매끄럽게 설명이 될 것 같고, 실제로 김세윤 교수님의 설명이 더 매끄럽게 다가온다. 최갑종 교수님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는, 성경 말씀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반영하면서도 기존의 조직신학적 틀을 고수하다보니 이르게 된 이상한 결론으로 다가온다. 김세윤 교수님이나 톰 라이트가 제시하는 더 큰 그림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면 안 될까?

사족인데,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후크마가 정리한 내용을 보면, 조직신학이 참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깔끔한 개념 정리도 어떤 틀에서 하는지가 중요하고, 나아가 바울이 그처럼 깔끔한 개념 구분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문이 든다. 외국에서는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의 메타내러티브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중심으로 하면서 기존의 유산을 적절하게 통합한 새로운 조직신학이 일어나면 좋겠다

 

제8장 칭의와 최후의 행위 심판

[정리]

전통적인 입장은 최초의 칭의와 마지막 칭의를 하나의 칭의로 생각하는데, 6장에 있는 다음 표현에 잘 요약되어 있다.

ⓐ 칭의는 믿음에서 시작해서 성화를 거져 종말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가서 처음 믿음과 칭의를 "재확인"하는 것이다.

ⓑ 칭의의 판결을 행위에 따른 최후 심판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판결이 마지막 심판을 통해 "공개적으로 선언되는" 것이다.

그에 반해 최초의 칭의와 마지막 칭의를 구분하고, 마지막 칭의에서는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있다. 라이트는 "현재적 칭의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사역에 근거해서 믿음으로 앞당겨 주어지지만, 미래에 주어질 최종적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신 성령의 사역, 곧 우리의 삶 전체를 근거로 주어진다"고 주장한다. 김세윤은 "칭의의 현재 단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성령의 도움으로 순종하려는 기본 자세를 가지고 살지 않는 사람은 설사 그가 예전에 믿음으로 예수를 고백해 칭의/구원을 받았다 한들, 종말의 칭의/구원의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탈락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라고 말한다.

최갑종은 마지막 심판을 언급하는 롬 2:6-11을 풀어서 설명한 후, 라이트나 김세윤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억지로 조화시킨 것이라 비판한다. 그러면서 성경 저자의 강조점에 맞추어, 문맥에 따라 받아들이자고 제안한다. 구원을 강조하는 직설법과 신자의 삶을 강조하는 명령법 문맥에 따라, 그리고 공동체의 정황에 따라 이해하자는 것이다. 결국 바울이 편지를 썼던 "목회적" 상황에 따라 각 본문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적용하자는 것이다.

[단상]

간단히 제 입장을 정리하면, (1) 라이트나 김세윤의 주장이 절충이나 껴맞추기가 아닌 제대로 된 틀이며, (2) 그런 틀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최초의 칭의/마지막 칭의, 믿음/행위에 관해 겉으로는 모순 같아 보이는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상황에 맞추어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목회적" 상황만을 강조하면 결국 바울은 일관된 사상이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다. 바울의 가지고 있던 큰 생각틀을 제대로 설명하면 될 일이다. 나에게는 라이트나 김세윤의 설명이 "절충"이나 "조화"가 아닌 제대로 된 틀로 보인다.

[첨언]

칭의 관련 내용을 "대충" 정리해보겠다. 주로 던과 라이트를 읽은 내용을 기억에 의존해 중요한 틀이라 생각되는 내용만 정리한 것이라, 오류나 허점이 많을테니 참고만 하시면 좋겠다.

0) "의"는 기본적으로 언약/관계적 개념이다. 언약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그리고 나아가 피조 세계) 사이의 계약으로, 여기서 "의"는 언약에 신실함이다. "의"는 신실한 태도나 신실한 행동 모두를 포괄한다. 꼭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언약"의 목적이다. 하나님 입장에서 단순히 너희를 내 백성 만든다는 수준이 아니라, 너희를 통해 세상을 위한 나의 계획을 펼치겠다는 의미다. "칭의"는 하나님 입장에서 자기 백성이 언약에 신실하게 살았다, 너희가 나의 참 백성이라는 것은 인정/선언하시는 것이다. 최초의 칭의의 경우에는, 언약과 언약의 상대를 신뢰함으로 그 언약에 참여한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1) 유대교에도 "최초의 칭의"와 "마지막 칭의" 개념이 있었다. 그들은 혈통을 따라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각 개인에게 "최초의 칭의"란 의미가 없었다.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나, 출애굽/시내산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1세기 유대인에게는 "마지막 칭의"가 중요했다. 그것은 어떻게 죽어서 천국 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 받는 문제,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는 문제였다. 하나님은 구약의 약속을 따라 메시아를 보내셔서 이방 민족을 타도하고 이스라엘 왕국을 회복하실 것이며, 신실한 남은 자를 의롭다고 하실 것이다. 그것이 "마지막 칭의"다.

3) 여기서 "율법의 행위"가 도입된다. 그들이 "신실한 남은 자"가 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다. 최갑종 교수님의 지적대로, 종말론적 맴맥락에서 "율법"은 더 이상 "staying in"의 수단이 아닌 "getting in"의 수단이 된다. 이 점은 라이트도, 던도 인식하고 있는 내용이다. 유대인들은 마지막 날에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게 될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방식인 율법을, 그분의 구원을 기다리면서 신실하게 지키는 게 소위 '율법주의' 일까? 물론 율법주의의 여지는 있었겠지만, 그렇게 매도할 수 있을까?)

4) 다소의 사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사도 바울은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1) 마지막 날에 일어나야 할 칭의가 한 사람 예수 안에서 이미 일어났다. 
(2)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신실한 자들이 마지막 칭의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예수를 통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각 개인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편입되는 최초의 칭의가 필요하다. 
(3) 유대인은 "율법의 행위"를 근거로 마지막 칭의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는데, 바울은 이제 "믿음"을 근거로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칭의가 일어남을 알게 되었다.

5)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에게 "율법의 행위"를 요구한 것은, "율법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 이전 시대에 하나님 백성을 규정했던 표지를 "믿음"이 온 시대의 하나님 백성에게 요구한 사건이었다.

6)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마지막 칭의"가 있다. 기본틀은 유대교와 같다. 그런데 "그냥 율법의 행위"가 아닌 "성령이 내주하셔서 율법을 마음판에 기록하셔서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는 행위"로 의롭게 될 것이다.

[사족]

평어체로 쓴 점 양해 부탁 드립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하고, 새 관점 지지자로서 아직 새 관점에 대한 소개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급하게 두서 없이 쓴 글이란 점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칭의 논쟁보다는 칭의에 관한 묵상이 필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칭의는 논쟁거리가 아니라, 은혜롭고 생명을 주는 내용이니까요. 앞으로는 이런 딱딱한 글은 지양할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