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진수- 한완상
복음의 진수- 한완상
2016-12-08 20:51:26
'샬롬', 그것은 복음의 진수
저는 '샬롬'을 시대정신이자 복음의 진수로 봅니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복음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샬롬'이 일관되게 전개됩니다.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 "아름답다"고 하시잖아요. 하나님의 감탄을 불러일으킬 만큼 창조의 본질서는 아름다웠어요.
첫째 날부터 "좋다"고 말씀하시지만, 그중에서도 여섯 번째 날에 "대단히 좋다"고 하시잖아요. 뭐가 대단히 좋으셨을까요? 하나님은 창조 마지막에 인간과 동물에게 식물을 먹거리로 주십니다. 동물에게도 그렇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도 채식하라고 명령하시거든요. 여기에 정말 깊은 뜻이 있어요.
동물이나 사람이나 먹거리를 마련하는 게 가장 시급한 것이죠. 그러나 먹거리를 마련하면서 다른 존재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하시거든요. 풀은 피가 나지 않아요. 풀은 뜯어먹으면 그만큼 또 그 자리에 자랍니다. 생명을 해하지 않고, 피를 흘리지 않으면서 먹거리를 해결하는 선물을 창조 여섯째 날 주시고 "참 좋다"라고 하셨죠. 피 흘림 없이 먹거리를 마련하니까 평안하잖아요.
아프리카 동물의 세계를 보세요. 초식동물들은 코끼리나 토끼나 서로 경계하지 않아요. 서로 옆에 있어도 별다른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육식동물이 나타나면 아수라장이 됩니다. 심지어 육식동물들은 자기들끼리도 긴장 관계에 있어요. 가장 센 사자가 갑질을 하죠. 다윈은 그것을 양육강식, 적자생존이라고 했는데 요즘 세상을 빗대어 말하면 '을육갑식'이에요.
이게 정글이죠. 지금 한국 상황 아닙니까? 보통 자본주의 시장을 정글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는 국가 자체가 정글이에요. 우리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잖아요. 왜 헬입니까? 바로 '을육갑식' 세상이라 그렇죠. 을에게는 이게 지옥이지 뭡니까?
동물의 세계를 보면 물을 찾아서 동물들이 이동하는데 사자는 꼭 물가를 지키고 있어요. 그러니까 초식동물들이 물을 마시면서도 사자가 오지 않는지, 하이에나가 근처에 있지 않은지 살펴봐요. 동물들이 긴장하는 모습을 보면 그건 평화가 아니에요. 설사 근처에 사자가 없더라도 그런 긴장 상태는 샬롬이라고 할 수 없지요.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동물들이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긴장 상태에 있는 그런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하신 거 아니거든요.
원초적인 창조의 아름다움은 '샬롬'입니다. 샬롬은 갑질하는 강자 때문에 긴장 상태에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전한 평화'가 샬롬입니다. 하나님께서 감탄하신 그 모습이죠. 그런데 인간의 죄악으로 폭력, 탐욕, 독선이 들어오면서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고 전쟁이 일어나고 피가 강처럼 흘러내려요.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항상 원초적 창조 세계의 샬롬을 그리워합니다. 이사야 11장 9절이 대표적이죠. 이사야는 종말론적 아름다움, 다시 말해 창조의 원질서를 회복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자가 풀을 뜯는다." 소가 고기를 뜯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불행은 강한 사람들의 교만과 횡포에서 옵니다. 그러니까 강한 사람이 체질을 바꿔야죠. 사자가 풀을 뜯어야 합니다. 약자가 먹는 음식을 함께 먹음으로 육식 체질을 채식 체질로 바꾸는 것이 창조의 원뜻이고 샬롬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공의와 평화를 꿈꿨던 모든 선지자들의 외침 아닙니까.
자신들의 패권을 위해 싸우는 거대한 세력이 한반도에서 부딪치는 오늘에도 우리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길은 '샬롬'입니다. 갑들이 을의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로 가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언제나 선지자들의 외침은 강자를 향하고 있어요. 청와대를 향하고 있단 말입니다.
백남기 선생이나, 세월호 유가족이나 다 약자 아닙니까. 그들을 누가 쓰러뜨리나요. 누가 사자 같이 으르렁 거리면서 약자를 포식하느냐는 말이에요. 선지자가 누구를 향해 외치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자 여물 먹이기 운동'을 해야 합니다. <뉴스앤조이>가 그 이름대로 기쁨의 소식을 전하려면 그런 운동을 강력하게 펼치세요.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입니다.
원수와 평화 이루기 전까지 '진정한 평화'는 없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펼쳤던 사역도 역시 샬롬에 방점이 찍혀 있어요. 산상수훈의 팔복 중에서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입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임이요"라고 하셨잖아요.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요?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다. 역시 창조의 원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에서도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죠.
제자들이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강조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시잖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누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누구인지 다시 설명을 하신 거지요. 그는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에요. 이웃 사랑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펼치신 하나님 운동은 원수 사랑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전쟁은 누구와 합니까? 이웃과 하지 않잖아요. 원수와 하는 겁니다. 이웃은 나와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에 전쟁 할 일이 없죠. 그런데 원수는 나의 이해관계와 대척되는 사람이에요. 그런 원수와 평화를 이루기 전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면에서 정말 현실주의자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방법은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에요.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너희를 죽이려고 하는 원수의 악한 마음과 악한 구조를 원천적으로 해체하라." 어떻게 그 악한 마음과 구조를 해체할 수 있나요? 그 힘은 원수를 화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원수를 부끄럽게 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도 잘 이해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운동 원리를 사도들이 잘 계승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와 사마리아가 원수 같이 지냈어요. 다 같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니까 넓은 의미에서 마땅히 형제가 되어야 하는데,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은 형제 같이 지냈단 말이에요. 갈릴리 북쪽에 사는 사람이 절기에 따라 예루살렘에 가야 할 때 사마리아로 가면 빨리 갈 수 있는데도 한참 돌아서 가거든요. 원수의 땅이니까 그 땅만 밟아도 불결하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항상 사마리아로 다니시는 거예요. 잘못된 경계의 벽을 무너뜨리시면서요. 그러니까 인간의 탐욕과 교만으로 만들어진 원수 사이를 메우시면서 "진짜 이웃 사랑하려면 원수 사랑을 하라"고 가르치신 거죠. 원수 사랑할 수 있는 큰마음을 가지면 이웃 사랑은 저절로 되는 겁니다. 우리 상황도 그렇습니다. 북한을 향해 빨갱이라 하고, 북한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저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우리가 경상도 사람, 전라도 사람 사랑하는 것은 더 쉬울 것 아닙니까.
이렇게 가르치시니까 비로소 제자들이 알아듣기는 하는데 뭔가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사마리아 사람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이 원수 아닙니까. "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은 말로만 사랑을 말하지만 너희가 원수라고 욕하는 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에게 테러를 당해서 다 죽어 가는 유대인을 선제적으로 사랑했다." 그러니까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가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 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답인 거죠.
얼마나 급진적인 해석입니까? 이웃 사랑이 아니라 원수 사랑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게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입니다. 참 아쉽게도 제자들을 끝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특히 더 그렇지만 공관복음서에서 제자들은 전체적으로 정말 자격이 없는 사람들로 부각되고 있었어요.
수제자라 하는 베드로도 때로는 정답을 말하는데, 바로 그 다음 순간 엉뚱한 대답을 해서 예수님에게 "사탄아 물러가라"는 큰 꾸지람을 듣지 않습니까. 십자가 사건이 임박하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기 시작했는데 제자들은 "메시아가 왜 죽습니까?"라고 말해요. 다 못 알아듣는 중에서도 가장 모범적으로 이해를 못한 제자가 바로 베드로예요.
"너희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백마를 타고 와서 로마제국을 칼로 제압하는 메시아지만 내가 가는 길은 죽는 메시아가 되는 것이다." 칼로 저 악한 제국을 제압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그 만연한 악 앞에서 의연히 죽는 것으로 구원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데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습니다.
한국교회, "사탄아 물러가라"는 예수님 외침 묵상해야
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저에게는 복음서가 감동 자체로 다가옵니다. 복음서가 쓰인 시기는 서기 50년대죠. 그러니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리더십이 초대교회에서 이미 갖춰진 때입니다. 사도들 권위가 상당했을 시기인데도 이 복음서를 쓰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바보스럽고 유치했는지를 다 드러내잖아요. 세 번 예수님 모른다고 했던 사건, 예수님 잡히셨을 때 제자들이 다 도망갔던 정황들…. 그래서 저는 이 복음서가 아주 정직한 문건이며 감동적 메시지라고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던 그 말씀도 그렇지요. 두고두고 오는 세대에 이 무거운 말씀을 남겨 두셨어요. 이 구절을 묵상하면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한국교회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천둥 같이 울리는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한국교회를 보시면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실 것 같아요.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이룩한 것이 아니라 갑질하는 세상의 못된 육식동물들과 결탁해서 교회를 너무 크게 만들었어요.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우리가 가장 깊이 묵상해야 할 말씀이 "사탄아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외침이라고 생각해요.
예수님이 베드로를 꾸짖으시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십자가를 지는 길은 세상 관점으로 보면 죽는 길이지만, 사실은 십자가야말로 사는 길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죠. 부활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비움의 신학(kenosis)'을 천명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철저히 비우십니다. 타 종교에서도 '비움'을 이야기합니다만 제게는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움은 무섭게 갑질하는 원수 앞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죽어 가는 비움이죠. 왜 죽습니까? 칼로 맞서지 않고 끝까지 원수 사랑의 힘으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면 갑들에게는 맞아 죽더라도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되고 결국엔 갑질하던 저들도 변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발선(發善)'이라고 하고 싶어요. 우리는 '발악(發惡)'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악이 막 뻗쳐 나오는 상태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선한 모습과 영향력을 '발(發)'해야지요. 원수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발선으로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쳐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몸으로 실천하시죠. 그 모습이 복음서 곳곳에 나타나고 사도들의 사역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나라는 처절한 몸부림 가운데 임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본격적으로 수난을 겪으시게 됩니다. 각각의 복음서가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고, 특별히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질적으로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예수님의 수난은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의 수난 기록을 빠뜨린 외경은 그래서 복음서의 권위를 갖지 못하는 것이죠. 가령 도마복음이 대표적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님 수난의 시작이 바로 겟세마네 동산부터인데 이 겟세마네에서의 기도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서가 널리 활용되던 당시 적어도 두 개의 담론이 초대교회를 위협하고 있었어요. 하나는 영지주의입니다.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 영향을 많이 받은 담론이기 때문에 상당히 수준 높은, 말하자면 당시의 엘리트들이 주로 빠졌던 사상입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영혼이 본질이고 현상은 껍데기"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어떻게 되느냐? 몸은 없어지고 영혼만 남아서 영원히 불멸한다는 건데요. 이 영지주의가 얼마나 강한지 보세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마저 죽고 나면 몸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 남아서 하나님과 영원히 천당에서 '영생 복락'한다고 믿잖아요. 그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나라가 아니에요. 얼마나 세속적인 종교적 표현입니까? 한편으로는 플라톤주의(Platonism)의 분파일 뿐인 거죠.
초대교회를 괴롭혔던 또 하나의 사상은 '가현설(Docetism)'이라는 건데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영혼'으로 존재하시고, 우리에게 보이신 몸은 그렇게 보일 뿐이지 실재는 아니라는 거예요. 가현설을 믿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난이 실제로 고통스럽지 않았다고 보는 거죠.
예수님의 고난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고통이 진짜 아픔 자체였기 때문이죠. 예수님이 나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고난당했다는 고백 또한 예수님의 수난과 고난이 진짜로 아픈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닙니까. 수난의 시작인 겟세마네 기도를 보세요. 피와 땀을 흘리면서 기도하시잖아요. 추상적인 영혼의 기도가 아닌 처절한 몸부림의 기도입니다. 영지주의와 가현설이 주장하는 것처럼 영혼이 본질이고 몸은 비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피와 땀을 흘리는 겟세마네의 기도, 여기에 담겨 있는 하늘나라의 본질. 그것은 우리가 관념이 아닌 몸으로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고통당하고 있을 때 함께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을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내가 그 고통을 함께 당하는 것이지요.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그저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라 피와 땀을 흘리는 기도를 드려야죠. 겟세마네 기도로 영지주의적인 신앙을 극복해야 합니다.
겟세마네 기도가 끝나고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다와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옵니다.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칼로 베어 버리지요. 그때 예수님이 준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리라." 지금도 그렇습니다. 한반도 주변에서 부딪치는 제국들을 보세요. 한결같이 국력을 칼 만드는 데 소모하고 있잖아요. 폴 케네디 같은 학자도 말했듯이 무기 만드는 데 국력을 집중하는 제국은 필히 망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회과학적 인식을 가지고 예언하신 겁니다. "칼로 세우는 나라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다."
그때까지도 베드로는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칼로 원수를 무너뜨리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나라를 세울 것인가? 예수님은 그에 대한 답을 고난 실천, 몸으로 몸소 대답하셨죠. 영어 표현을 빌리자면 vulnerability라고 하지요. '취약성'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인간적이고 약한 모습을 골고다 언덕에서 보여 주십니다. 온갖 욕설과 수모를 당하시고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셨어요.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으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도 고통의 자리에 서게 되었을 때 인간으로서 몸과 마음이 무너지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들어도 너무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나도 아프다.' 예수님은 가장 인간적이고 약한 모습을 십자가에서 친히 보이셨어요.
로마 백부장 바꿔 놓은 예수의 '비움', 하나님나라 원동력
이렇게 원수의 폭력 앞에서 힘없이 무너지는 것 같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보세요. 예수님의 비움이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산헤드린 법이 아닌 로마법에 의해 처형을 당했기 때문에 로마 군인이 사형을 집행합니다. 사형의 감독관이 지금으로 말하면 중대장급인 로마의 백부장이었습니다.
백부장은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초등교육부터 장교가 되기까지 수많은 교육과정을 거쳤을 텐데 그때마다 '황제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로마의 신앙을 배웠을 것 아닙니까? 그게 로마의 종교지요. 황제는 신이자 메시아이기 때문에 도전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알고 있던 이 백부장이 몇 시간 동안 예수의 처형을 직접 감독하면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지요.
그는 너무나도 큰 충격에 휩싸입니다. '30대 중반의 갈릴리 청년이 저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으로 죽을 수 있는가.' 특히 예수님이 죽으시기 바로 전에 하셨던 기도를 들어 보세요. "하나님,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백부장 입장에서 보면, 예수의 기도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이기도 하지요. 그래서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의 목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 이 백부장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옵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믿었던 로마 황제는 가짜다'라는 충격적인 뜻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에서는 "그는 의인이었다"라고 하지요. 법률적으로 보면 '그는 무죄다'라고 고백한 것이거든요. 무죄라니요. 이 사람 지금 큰일 날 소리를 하는 겁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으로 사형선고 받은 사람을 사형집행인이 무죄라고 하는 건 반체제 발언입니다. 그러니까 이 백부장의 고백은 추상적인 고백이 아닙니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용기 있는 고백입니다. 이게 바로 복음의 힘이고 구원의 힘이지요.
예수님은 결국 권력에 의해 비참하게 죽으면서도 권력을 행사한 주체를 항복시킵니다. 그 원동력이 무엇입니까? '비움'입니다. 기독교를 위대하게 만들고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게 만드는 힘이죠.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비움이야말로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일으키는 동력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너무 추상적이고 쉽게 이해합니다. 한국교회가 예수의 고통과 고난, 비움보다는 '내 죄를 대신 지고 돌아가셨다'는 대속적 신앙만 너무 관념적으로 강조하고 있어요. 예수님이 보여 주신 비움의 본을 따르지 않고서 교리적인 고백만으로 우리에게 구원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 차원, 그것도 개인 영혼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구조와 문화, 체제를 다 감동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팍스로마나 무너뜨린 성육신
로마 백부장이 했던 "이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고백은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진짜 신의 아들이 아니라 가짜라는 고백이자 로마를 무너뜨리는 고백입니다.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최근 봤던 영화가 생각나요. '부활(Risen, 2016)'이라는 영화인데 정말 좋습니다. 백부장 상관인 로마의 호민관이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때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시신이 없어졌잖아요. 그러자 빌라도가 시신을 찾으라는 명령을 내리죠. 바로 그 호민관에게 그 일을 맡깁니다. 호민관은 백부장에게 상황 보고를 받고 예수의 시신을 제자들이 훔쳐 갔다고 판단하지요. 그래서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내는 줄거리입니다. 그 과정에서 호민관도 백부장처럼 회개를 합니다. 독자들께서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영화는 로마 권력이 예수님 앞에 어떻게 무릎 꿇는지 잘 묘사합니다. 그 호민관은 부활의 예수님을 믿게 돼요. 비움(kenosis)의 복음은 자기 자신을 죽기까지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새 역사를 만듭니다. 복음이 말하는 '부활'은 한 개인의 역사일 뿐 아니라 사회구조, 문화, 체제를 다 바꾸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사도행전의 줄거리입니다.
사도행전으로 가기 전에 먼저 요한복음을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특별히 요한복음만 다른 공관복음서와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점이 다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도 있어요. 초반에 로고스 이야기가 나오고 영에 대한 강조가 있다 보니까 플라톤과 영지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주장하곤 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20장과 21장을 보세요. 부활한 예수가 숨어서 불안에 떠는 제자들을 찾아가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건 요한복음에만 나와요.
예수가 죽은 후에 제자들은 너무 상심해 있었죠. 자신들 운명도 예수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숨었어요. 예수의 시신이 사라지니까 자신들이 그 누명을 쓸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얼마나 위축되어 있는 상황이겠습니까? 요한복음 20장을 보면 문을 꽉 닫고 숨어 있는 그들에게 예수님이 쓱 나타나시죠. 어디서 들어오셨는지도 모르게 '유령처럼' 들어오셨지요.(웃음)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를 보는 우리 인식을 확 바꿔야 합니다. 많은 기독교 신자가 영혼 구원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부활하신 예수님도 영혼일 거라고 오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몸의 실체는 없고 유령 같이 생각하는 것이죠. 절대로 그렇지 않지요. 그 후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모습은 실체적인 '몸의 부활'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처음 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샬롬이 있을지어다"입니다. 이 말씀을 세 번 반복합니다. 지금 이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샬롬이었어요. '우리도 십자가 처형을 당할 수 있다' 생각하면서 벌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이 샬롬의 인사와 격려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목동들이 들었던 천사들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부활한 예수님의 첫마디가 샬롬이었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천사의 노래도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였어요.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하자면, 땅의 샬롬 없이 하늘의 영광은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 땅의 역사 현실에서 평화가 없다면 하늘의 영광도 없습니다. 성육신의 핵심 메시지는 땅의 평화지요. 왜 그 땅에 평화가 필요합니까? 땅의 현실이 을육갑식의 처절한 폭력의 현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를 비롯한 제국들도 평화를 작살냈기 때문이지요.
말로는 '팍스로마나'지만 그것은 거짓 평화였죠. 패권 다툼을 하는 제국들은 가는 곳마다 신무기를 배치하고 무기 장사를 합니다. 강력한 군대로 세계 질서를 구성하지 않습니까. 지금 미국도 엇비슷합니다. 그런 역사 현실에서 샬롬이 없으면 하늘의 영광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신 '성육신'의 이유가 바로 진정한 평화를 이루기 위함 아니겠습니까.
이 성육신 메시지가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의 고백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내가 잉태한 이 그리스도는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이 세상의 갑질하는 자들을 빈손으로 쫓아낼 것이라'라는 마리아의 고백보다 성육신의 의미를 더 잘 드러낼 수 없습니다.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에서 마리아의 고백과 궤를 같이하는 메시지가 목동들이 들었던 천사들의 노래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인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으신다
도마 이야기도 보세요. 도마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경험론자이면서 실증주의자입니다. 세련되고 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죠. 좋은 대학에서 공부를 많이 해 가지고 이성적으로 설득하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사람이에요. 자기는 실증주의자니까 만지기 전에는 못 믿겠다고 하죠.
그런 말을 하는 도마에게 예수님이 오십니다. "너 왜 못 믿어?"라고 나무라지 않으시죠. "도마야, 여기를 만져 봐." 앞서 말했던 예수님의 취약성(vulnerability)을 증거로 보여 주시는 겁니다. 아직도 아물지 않은, 아픔이 남아 있는 그 상처를 보여 주시죠. 우리 예수님이 이런 분이에요. 무조건 믿으라고 하지 않으세요. "나는 예수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더 자비롭게 대하실 것 같아요.
제가 망명 시절에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어떤 수업에서 학생들이 열댓 명 있었는데 각자 소개를 하는 시간이었어요. 저도 소개를 했죠. 그런데 서른 살 중반의 한 청년이 "나는 무신론자입니다"라고 소개를 하더라고요. 무신론자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다고 하는 겁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대단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신학교에 가려면 교회 추천이 있어야 하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정말 맞는 이야기에요. 신을 믿지 않으니까 신을 가르치는 신학교에 온 거죠. 이 정도의 포용력과 정신을 가지고 있으니 유니언신학교에 폴 틸리히, 라인홀드 니버, 본회퍼 같은 사람이 오는구나 싶었지요.
예수님은 의심하면서 오는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스럽게 생각하실까요? "나를 만져 봐." 그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입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썩을 몸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은 다 흙으로 돌아갈 몸이고요. 예수님이 가졌던 몸은 질적으로 달랐지요. 사도 바울은 이 새로운 몸에 대한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어서 '영의 몸'이라고 했어요. 바로 '영의 몸'이라는 말 때문에 바울이 플라톤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의 몸'을 설명하면서 "썩지 않는 몸"이라고 했거든요. 하지만 여전히 '몸'이에요. 몸은 역사 변혁의 살아 있는 주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닫힌 공간에 쑥 들어오신 걸 보면 지금 우리의 몸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톰 라이트는 이것을 지금보다 '더 견고한(solid) 몸'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래서 역사를 변혁할 수 있는 더 강력한 힘이면서 더 영광스러운 실체적 힘입니다.
유령은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부활한 예수는 '샬롬'을 이야기하시죠. 의심하는 실증주의자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십니다. 도마 같은 사람에게는 의심한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이 "만져 봐라"고 하시니까 도마가 보기만 하고 만지지는 않았습니다. 만질 필요가 도무지 없었기 때문이지요. 옆구리도 보고 손목도 보고…. 그 자리에서 부활하신 사랑의 예수 앞에서 꼬꾸라졌습니다.
이 경험론자가 예수님의 몸을 보고 나서 고백합니다. 가현설적 부활, 영지주의적 영혼이 아닌 부활하신 예수의 '몸'을 보고 고백하잖아요. "당신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통해 도마는 실증주의적 한계를 극복했고 나아가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성향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인 '몸의 부활'
사도신경에 역사적 예수의 기술이 없다는 점을 제가 아쉽게 생각하고 평소에도 많이 이야기하지만. 후반부에 나오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은 좋아합니다. 몸의 부활이라는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영광의 몸으로 다시 부활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교 핵심 아닙니까. 이 몸은 시공간을 초월하면서도 시공간 안에서 역사를 변혁하는 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이 영광의 몸을 가지고 창조의 궁극적 질서를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을 포함한 예수의 제자들이 절대로 플라톤적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까지 제자들과 함께하시면서 부활한 몸의 구체성, 실체성을 충분히 보여 주시죠. 그 다음에 제자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부활하신 예수의 현존이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그러니까 로마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핍박에도 두려움 없이 교회를 세웁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스데반 집사의 죽음입니다. 산헤드린의 율법주의자들은 이를 악물고 스데반에게 돌을 던졌습니다. 그들의 얼굴을 상상해 보세요. 악을 쓰면서 돌을 던졌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스데반은 돌을 맞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보며 평온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스데반이 하늘에 예수님이 "서 있다"고 말하지요. 왜 예수님은 서 계셨을까요? 사도신경에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라고 했는데 말이에요. "앉아 있다"는 말은 권위의 표현이거든요. 그런데 스데반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은 서 계셨어요. 왜일까요? 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돌에 맞아 죽는 스데반을 바라보시면서 앉아 계실 수가 없는 거예요. 스데반의 고통을 예수님도 이해하고 계시니까요. 벌떡 일어서서 응원하시는 겁니다. "내 아들, 스데반아! 힘을 내라." 그 모습을 보며 스데반은 돌을 맞으면서도 평온한 모습을 하고 죽었지요.
검사처럼 스데반을 바라보던 청년 사울은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얼마 후에 다메섹(다마스쿠스)으로 가던 길에서 고꾸라졌지요. 제 생각에 다메섹에서 그렇게 고꾸라질 수 있었던 것은 스데반의 죽는 모습을 보고 '율법을 믿으면서 저렇게 평온한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다메섹에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예수가 하늘에서 나를 보고 계시다"는 스데반의 고백이 생각났을 겁니다. 스데반이 믿는 예수는 부활 승천하시고 하늘에 서 계신데 이 땅과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소통'이 되는 겁니다. 이 철저한 율법주의자 사울에게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장면이지요. 스데반을 보면서 유대 종교가 사람을 구속하고 핍박하는 종교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죠.
바울은 그 후 죽기까지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나라 운동을 전개합니다. 사도 바울이 오네시모를 위해 빌레몬에게 보낸 편지를 보세요. 노예를 형제로 받아들이라는 사도 바울 메시지가 얼마나 급진적이고 감동적입니까! 예수가 펼친 하나님나라 운동을 바울은 계승할 뿐 아니라 힘써 실천했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관념적인 이신칭의 개념으로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노예해방을 확실하게 설득시키는 모습이 있는데 말이에요.
대단한 분입니다. 일부 신학계에서 바울을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과 무관한 사람으로, 심지어 왜곡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은 잘못됐다고 봐요. 반대로 바울 메시지를 오로지 개인 구원 차원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큰 잘못입니다.
재림 기다리는 신앙 아니라, 종말론적 운동 참여하는 신앙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두고 우리 한국교회가 샬롬과 비움의 신학, 그리고 예수의 '몸의 부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창세기의 창조 질서가 인간의 죄로 훼손됐지만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다시 회복되어 갑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을 보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거든요.
우리는 죽으면 하늘나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서를 보세요. 구원의 종착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 기도하지요. 복음이 말하는 영생은 영혼만이 하늘나라 올라가 그곳에서 영생 복락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입으신 그 썩지 않을 영광의 몸을 우리도 입고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나라를 누리는 것입니다.
톰 라이트가 이 부분에 좋은 통찰력을 주지요. 우리는 보통 '죽음 이후(Life after death)'만 이야기하는데 라이트는 '죽음 이후, 그 이후(Life after life after death)'를 이야기합니다. 몸은 사라지고 영혼만 영생 복락 하는 것이 아니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면 지금과 다른 새로운 역사가 펼쳐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표현으로는 "눈물이 없는 곳"이죠. 당연합니다. 갑질하는 놈들이 없는데 왜 억울한 눈물이 나오겠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신 그 말씀, "참 좋다"는 탄성이 다시 나오는 겁니다.
여기서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이야기가 흥미로워요. 크로산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때 우리들도 썩지 않는 부활의 몸을 입고서 예수님과 함께 만물을 새로 창조하는 역사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신나겠어요? 정권을 잡아서 새로운 헌법을 세우고 나라를 일으키는 것 이상으로 영광스럽고 신나는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것을 '협력적 종말(collaborative eschaton)'이라고 불러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협력해서 새 창조를 이룬다고 주장합니다.
이 썩어 빠진 세상을 비탄하며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종말론적 운동에 나서기를 기대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서기를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그게 '협력적 종말'이라는 건데 제가 볼 때는 크로산이 톰 라이트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아요. 라이트는 크로산이 신앙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웃음) 저는 톰 라이트, 크로산 모두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자. 이제 우리가 왜 사드를 반대해야 하는가 답이 나오지요.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샬롬을 이 땅에 세우는 종말론적 하나님나라 운동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기도를 보세요. 주기도문이야말로 하나님나라 운동의 대표적인 요약 선언문이에요.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용할 양식, 죄 용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는 것. 그 시험과 악이 도대체 뭘까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훼손하는 짓, 그러니까 갑질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지요.
부활의 몸과 이 땅에 도래하는 새 하늘, 새 땅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알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옆에 있던 강도에게 말씀하신 '낙원'에 대해서도 톰 라이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것은 종착역이 아닌, 말하자면 잠시 쉼을 얻는 임시 휴게소와 같은 파라다이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우리도 예수님의 몸과 같은 단단한, 썩지 않는 영광의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됩니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믿음의 사람들도 부활의 몸을 입고 우리와 함께 이 어둡고 썩어 빠진 세상을 대청소하면서 재창조한다는 것 아닙니까! 얼마나 신날까요.
톰 라이트의 최신 책이 바로 이 희망에 대한 것인데요. 부활, 승천, 재림의 변혁적 기대입니다. 신학적으로 복잡한 이야기이고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우리 돌아가신 부모님, 먼저 세상을 떠난 우리 형제, 자매들과 부활의 몸을 입고 함께 재창조의 주역이 될 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름다운 창조의 동역자로 불러 주십니다. 얼마나 신나요.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지요. 이것이 우리의 참신앙이요 희망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