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
산상수훈
2016-11-02 22:34:58
1. 산상수훈은 이렇게 시작된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태5:1절)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5장2절). 이 장면은 출애굽기 19장 17-18절을 연상하게 한다.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여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이 장면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광야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기 위하여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장면이다. 그리고 나서 20장에서는 언약법으로서 십계명이 주어진다.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만나러 시내산에 강림하셨듯이 이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는 산에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그들에게 산상수훈을 베푸신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산상수훈이 구약의 십계명에 해당하는 언약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십계명이 옛 언약의 언약법으로서 주어졌다면 산상수훈은 새 언약의 언약법으로서 주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언약법이 수여될 때에 하나님은 백성들이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두렵고 떨리는 모습으로 임재하셨다면 이제 신약의 언약법인 산상수훈이 수여될 때 하나님은 예수라는 이스라엘과 똑 같은 인간이 되시어 매우 친밀하게 다가오신 것이다.
2. 옛 언약인 시내산 언약의 뿌리는 아브라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씨와 땅의 약속을 주셨다.(창12:2 ; 창14:16-17)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생명을 건 언약의 형태로 보증하시고 아브라함에게도 할례를 명하심으로 그 언약에 생명을 걸고 참여하도록 하셨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생명과 아브라함의 생명을 담보하는 피의 언약이 되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아브라함과만 맺은 언약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하고도 맺은 언약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도 할례를 행함으로 이 언약에 참여하게 되었다.(창17:9-10)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통하여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창18:18) 그렇다면 어떻게 아브라함의 씨를 통하여 천하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여호와의 도를 행함으로 다시 말하면 의와 공도를 행함으로 이루어진다(창18:19).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게 될 때 그들은 이방을 비추는 등불이 될 것이고 이방이 그들을 보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주어진 것이 바로 언약법으로서의 율법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행할 때 이방족속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출19:6절)
3. 그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온 세상을 위한 우주적인 경륜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족신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시고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의 뿌리는 하나님의 세상 창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그러나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청지기인 사람은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순종함으로 세상을 다스려야 할 책임을 가진 존재인 것이다. 비로 이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선악과 금령이다. 하나님은 선악과 금령을 주심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해야 할 존재인 것을 가르쳐 주려 하셨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은 실패하였다.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바로 사람이 언약적인 조재로 창조되었고 선약과 금령은 일종의 언약법적 성격을 가진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래서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 기록된 창조 이야기는 아브라함 언약의 의미와 필요성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 언약은 바로 아담이 실패했던 언약을 회복하기 위한 언약인 것이다. 그렇기에 아브라함 언약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온 세상 천하만민을 위한 언약으로 제시된다.
4. 아브라함 언약이 아담 언약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서 등장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거대한 민족을 이루고 애굽에서 해방된 이후에 광야 시내산에서 시내산 언약이 맺어지는데 시내산 언약은 바로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로서 맺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서 말하는 옛 언약이다. 그러나 이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시내산 언약은 거의 파괴되다시피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고토로 돌아왔어도 독립된 나라로 회복하지 못하고 신약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역사에 등장한 주전1세기는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하고 이스라엘을 독립된 강대한 나라로 회복할 왕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정점에 달해있던 시기였다. 바로 이런 시기에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통하여 하나님이 공적으로 인정하시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직후에 성령에게 이끌리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이야기는 가깝게는 이스라엘의 실패를 회복하시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의 모습을, 멀게는 아담의 실패를 회복하시는 두번째 아담의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의 사명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회복하시는 것임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5. 산상수훈은 이 광야 시험 직후에 주어진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산상수훈을 새 언약의 언약법으로 본다면 지금 하나님은 예수를 통해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법을 수여하시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 사람들을 항햔 새 언약법을 수여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는 지금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아담 언약과 시내산 언약을 회복하기 위한 언약인 새 언약을 세우고 계신 것이다. 시내산 언약에서도 제일 먼저 언약법으로서 십계명이 주어졌듯이 새 언약에서도 제일 먼저 언약법으로서 산상수훈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산상수훈 이후에 나타나는 예수의 공생에의 이적과 교훈들은 모두 예수가 산상수훈으로 시작하신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계시적 사건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공적 삶을 통하여 새 언약의 중보자로서 옛 언약을 갱신하고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을 회복하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이런 새 언약의 중보 사역은 언제 끝난 것인가? 그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으심으로써 새 언약의 중보사역은 완성된다. 아브라함 언약도 그렇고 시내산 언약도 그렇고 언약에는 언약 쌍방 당사자가 피를 흘림으로써 그 언약이 최종적으로 성립되었다. 아브라함 언약에서는 쪼갠 짐승 사이로 타는 횃불이 지나가고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함으로써 언약 쌍방이 피를 흘리는 것이 상징되었고 시내산 언약에서는 짐승의 피를 제단과 이스라엘에게 뿌림으로써 언약 쌍방이 피를 흘리는 예식이 행해졌다. 마찬가지로 새 언약에서도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림으로써 그 언약은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피흘리심이고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피흠림이다. 왜냐하면 신인이신 예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는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을 향하여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언약의 중보자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복음서는 언약의 중보자인 예수가 새 언약을 수립하고 자신의 죽음으로 그 언약을 성취하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고 그렇다면 산상수훈은 바로 이 새 언약의 언약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