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삼위일체- 프레드 샌더스

메르시어 2023. 5. 12. 12:11

삼위일체- 프레드 샌더스

2016-11-01 16:37:29


 

 서론

대략 1970년 이후로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가 도래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삼위일체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은 이미 2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초 계몽주의에 반발해 낭만주의가 등장하던 시기에 삼위일체론이 현대적 방식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삼위일체가 현대로 나아가는 길을 예비했던 것은 낭만주의적 교리였다.  삼위일체는 세계사, 인간의 경험, 과거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획기적인 낭만주의적 개념의  빛 안에서 재해석되었고 이 개념들은 현대의 삼위일체론의 틀을 형성하는 중심적인 힘이 되었다.

 

헤겔(1770-1831)

 '역사의 우연적 사실들은 결코 이성의 필연적 진리들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레싱(1729-1781)의 말대로 계몽주의는 역사와 이성 사이에 넓은 간격을 벌려놓았다.  헤겔(1770-1831)은 자신의 철학적 종합이란 기획을 통해( 계몽주의가 대립시켰던) 이성과 역사를 화해시키는 과제를 떠맡았다. 헤겔은 이성이 역사적인 것을 포괄하는 방식으로 이성의 정의를 확장했다. 헤겔은 이성이 세계의 법칙이므로 세계사에서 사건들은 (이성을 따라) 합리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체계 전체를 '정신적 실체'라는 궁극적 실재에 근거시키고 그 위에 자신의 형이상학적 사변을 구축했다. 헤겔은 관념(이성)은 궁극적으로 현실적인 것으로서 세계사의 과정 안에서 문화와 시대와 철학 그리고 예술과 음악과 언어들을 발생시키면서 스스를 발전시키며 구체적인 현실이 된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자신의 철학적 종합을 습관적으로 삼위일체적인 용어로 상술했다. 헤겔에게 삼위일체는 보편적인 진리(이성)과 우연한 사실(역사) 사이의 딜레마라는 계몽주의적 진퇴양난에 빠진 교리가 아니라 오히려 양자 사이의 통일의 원리가 되었고 이성이 역사 안에서 자신을 소통시키는 문법이 되었다. 헤겔이 교회의 삼위일체 교리를 궁극적인 진리로 주장했던 변증가였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을 말하기 위해 삼위일체란 용어를 빌려쓴 무신론자였는가?  이에 대한 해석자들의 의견은 엇갈리지만 분명한 것은 현대의 삼위일체론에 대한 헤겔의 영향은 너무나 엄청난 것으로서 결코 무시될 수 없다는 점이다. 헤겔의 영향으로 인해 현대 삼위일체론은 세계과정의 역동에 근거하게 되었다.

 

 슐라이어마허(1768-1834)

삼위일체론을 생동시키고 그것에 현대적 의미를 부여한 두 번째 주요 범주는 경험이다. 낭만주의가 시작될 무렵에 많은 사람들은 진리가 유의미한 것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개인적인 경험의 범위 안에 다가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진리를 경험과 관계없는 참된 사실의 어던 객체로 묘사했던 계몽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진리가 경험의 문제여야 한다는 요청 그체가 삼위일체론을 집적적으로 도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요청은 곧바로 삼위일체론이 현대에 어떻게 진술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핵신적인 요소가 되었다. 슐라이어마허(1768-1834)는 경험이라는 범주의 선두에 선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주저인 기독교 신앙에서 감위일체론을 본문에 첨가된 부록처럼 다루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기독교는 그 안의 모든 내용이 나사렛 예수가 성취한 구속과 관계된다는 사실에 의해 다른 신앙들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그의 신학은 전적으로 구속에 대한 지식에 집중되고, 이 지식은 구속을 받은 사람의 자의식의 내용을 뜻한다. 그리고 신학자의 과제는 구속받는 것에 대한 기독교적 자의식을 풀어내어 분명하게 진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삼위일체론은 그것이 구속 안에 직접 함축되어 있지 못하다는 이유에서 그의 기독교 체계 안에 적절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삼위일체론은 구속과 직접 연결될 수 없었기에 슐라이어마허는 차라리 그것을 기독교 신앙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핵심의 바깥에 두었다.

 

칼 바르트(1886-1968)

칼 바르트(1886-1968)가 삼위일체 신학에 끼친 영향은 방대하며 신학적인 풍토에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냈다. 1931년에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이 자신의 교회교의학의 기초와 중심이 될 것이라고 공표했을 때, 그는 자유주의적 개신교의 비삼위일체적 흐름에 의도적으로 저항하는 중이었다.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옹호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위험에 빠졌던 과거를 복원라는 신학의 한 형태였다. 비판적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낭만주의의 광범위한 문화적 반응의 관점에서 복원의 모티프는 중세적인 원천들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가운데 영감을 발견했던 모든 창조적인 예술 안에서 발견된다.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특별히 기독론 및 계시론과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바르트는 우리의 하나님 이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계시에 근거해애 한다고 요청한다. 부언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대로 보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 바르트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사실로부터 풀어간다. 하나님은 이미 자신 안에서 삼위일체시고 계시 안에서도 삼위일체의 존재는 조금도 감해지지 않으며 계시의 결과에사도 마찬가지로 조금도 덜 삼위일체적이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자신의 신학체계의 전면에 배치하고 그것을 자신의 교의학의 중심적은 주제들과 관계되도록 했다. 그리하여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신앙의 구조 안의 본래 자리로 회복시켰다. 바르트의 세 가지 주요한 신학적 기여는, 계시간격(역사적 계시사건과 하나님 자긴의 영원한 존재 사이의 간격) 을 메운 것, 계시개념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을 전개한 것, 삼위일체론을 해석학적 열쇠로 사용한 것이다. 바르트처럼 삼위일체론을 계시의 사실과 직접적 함축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바르트는 신학의 자유주의적 흐름 가운데서 그리고 역사와 경험을 기독교 사상의 조건을 지배하는 결정적인 범주로 삼았던 시대 속에서 삼위일체론을 현대 신학이 주목해야 하는 의제로 복원시킨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다.

 

 칼 라너(1904-1984)

 칼 라너(1904-1984)는 삼위일체론을 현대적으로 서술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들 중 한 명이다. 라너의 전체적인 신학적 기획은 신험적 토마스주의하고 불릴 수 있는데, 그것은 경험과 역사를 종합을 강조한다. 라너는 궁극적 진리가 두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낸다고 말하는데, 진리는 첫째는 모든 가능한 경험의 초월적 조건으로서, 둘째는 만날 수 있는 실제적, 역사적 실재로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라너는 이 진술을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들은 모든 시대에 언제 어디서나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든지 숙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인간적 삶의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신비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인간성은 육체적인 동시에 역사적으로 현실적이기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초월적 개방성은 세계사 안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역사적 실체와 부합해야 한다. 바로 그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의 사역은 교회와 성례전 안에서 지속적으로 현존한다. 그 둘(역사와경험이 만날 때 구원이 현재한다. 하나님은 경험 그 자체 안에서, 그리고 특수한 역사 안에서 자신을 전달하신다. ' 이렇게 경험과 역사의 흐름을 종합하려는 라너의 신학은 그의 삼위일체론 안에서 생명력을 얻는다. 라너는 삼위일체를 그 자체로만 고려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구원의 경륜 안에서 현시되는 아들과 성령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아들과 성령의 그 두 가지 사명을 통해 삼위일체가 세계사 안에서 나타나고 그것들은 영원한 삼위일체 그 자체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로부터 오는 사명과 함께 아들과 성령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성한다. 하지만 라너는 이 땅의 복음 이야기에서 만나는 삼위일체(경륜적 삼위일체)와 영원한 삼위일체(내재적 삼위일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구분도 없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 자체로서의 삼위일체와 구원사의 삼위일체 사이엔 아무런 간격도 불일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너는 이것을 자신의 근본 공리로 삼았고 해석자들은 이것을 '라너의 규칙'이라고 불렀다. 곧 '경륜적 삼위일체가 곧 내재적 삼위일체고 내재적 삼위일체가 곧 경륜적 삼위일체다.' 라너는 이 공리는 일관성있게 적용하여 성육신한 삼위일체의 위격은 영원한 아들일 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바로 그 유일무이한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라너는 이 공리를 성령에 적용하여 구원의 경륜 안에서 성령이 현존하는 것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서 갖는 성령의 내재적-신적 역할의 분명하고 직접적인 확장이라고 말한다.

 

 위르겐 몰트만(1926-)

헤겔의 유산이 삼위일체 신학 안에서 전개되는 방식은 위르겐 몰트만(1926-)에게서 분명해진다. 위르겐 몰트만은 헤겔의 가장 창조적이고 영향력있는 옹호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급진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이 역사 안에서 자신을 포기하신 사건으로 설명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역사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삼위일체론이 꼭 필요한 개념적인 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몰트만은 십자가 신학은 삼위일체론이 되어야 하고 삼위일체론은 십자가 신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몰트만의 손에서 삼위일체론은 (세계를)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안에서 고난당하신다는 고난의 신학이 되었다. 구원에 대한 이런 설명은 헤겔이 말한 '소외를 통한 구원'의 또 다른 설명이다.  몰트만은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을 존재(being)의 영역과 생성(becoming)의 영역을 대조시키는 일련의 노력으로 묘사하면서 이런(존재와 생성 간의)  분리는 기독교로 하여금 세계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런 분리는 존재의 영역에 안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영원한 내재적 삼위일체만을 강조함으로써 유한의 조건 아래서 그리고 생성의 과정 중에서 세계와 함께하는 경륜적 삼위일체(현실적인 삼위일체)에 대해서는 환영만을 보여주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몰트만은 삼위일체론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개방성 즉 현실적 관계에 대한 개방성의 선언으로 이해한다. 나아가 몰트만은 하나님의 일체성에 대한 고전적인 설명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런 설명은 역사와 반대되는 쪽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일체성을 구원의 역사 안에서 세 위격이 페리코레시스적인 교제를 통해 이루는 일체성으로 설명한다.  그는 삼위의 일체성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의 완성에 대한 종말론적 질문이라고 말한다. 삼위일체의 연합에 대한 몰트만의 서술은 그를 혁신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으로 인도했다.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1928-2014)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역사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종말론적이다. 그는 종말론의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균형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는데 개방된 미래를 향한 지향과  결정적, 궁극적 결론을 향한 지향 사이의 균형이었다, 몰트만의 동시대인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1928-2014) 는 후자의 지향이 지니는 우선성을 훨씬 더 강조했다. 판넨베르크에게 성서적 종말론의 논점은 그것이 만물을 최종적인 완성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존재 자체를 역사적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존재가 진실로 완성이라는 최종 상태를 향한 도상에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판넨베르크 사상의 중심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삼위일체론은 종말론적 존재론의 긴장으로부터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조직신학에서 오직 세계가 하나님나라 안에서 완성될 때, 하나님의 사랑은 목표에 도달하고 신론은 결론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판넨베르크는 세계사 안으로 보내진 아들과 성령의 사명이 하나님이 자신의 나라를 건립하시는 중심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적 완성은 세계사의 과정 안에서 아들과 성령의 종말론적 사역을 통한 구속사의 완성 그리고 미래에 있을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통해 이뤄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판넨베르크는 역사를 통한 신적 생성이라는 개념, 다시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역사의 결과이고 단지 종말론적 완성에 의해서만 현실성을 획득하는 것처럼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역사 가운데 그런 신적 생성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종말론적 완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항상 영원부터 영원까지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결정되는 자리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세계에 들어오심으로써 저기 자신을 실현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실현을 행하실 수 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실현하려는 자는 실현될 미래 존재가 지금 이미 동일한 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영원한 하나님이 세계사의 과정 안에서 행하시는 일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는 자기 실현으로 맹 ㅜ잘 묘사될 수 있다.

 

 캐서린 모리 라쿠냐(1952-1997)

비록 슐라이어 마허는 삼위일체론을 기독교 신앙 핵심의 바깥에 두었지만 그의 기독교적 경험의 교리는 삼위일체론이 동면에서 깨어나 재등장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케서린 모리 라쿠냐(1952-1997)는 삼위일체론은 궁극적으로 기독교인의 삶에 급진적인 결과를 갖는 실천적인 교리였는데, 점차 그 교리가 본래 지녔던 구원론적, 송영적 입장에서 멀어졌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론은 처음에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가 어떻게 구속사 안에서 계시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으로 등장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삼위일체론은  점차 자기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되었고, 그 결과 삼위일체 신학은 사변화되어서 기독교인의 경험과 무관한 것이 되었으며 결국 구원론과 아무런 내적 관련도 없는 신론을 출현시켰다는 것이다. 라쿠냐에 따르면 현대 삼위일체론이 직면하는 중심적 도전은 신론을 구원론에 대하 연결시키는 일이다. 그는 삼위일체론은 신학이 구원론과 분리될 수 없으며 그 역도 사실임을 제시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 사이의 구별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 의제를 수행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계와 관계하시는 방식에 대한 보다 큰 견해를 제시했는데, 이 견해 안에는 경륜적 삼위일체도 내재적 삼위일체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존재의 신비를 시간, 공간, 역사, 인격성 안에서 구체적으로 깨닫는 구속사가 있을 뿐이다. 라쿠냐에게 삼위일체론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삶,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에게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에 대한 사고는 선택의 범위 밖에 있다. 흔히 내재적 삼위일체라고 하는 것은 단지 경륜적 삼위일체 안에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의 신비로 인식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라쿠냐는 하나님의 자존성이란 일종의 철학적 신화로 표출될 뿐이며 자신 안에 폐쇄된 어떤 하나님, 또는 배타적으로 자신에게만 관계되는 어떤 삼윈조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결론

야로슬라브 펠리칸(1923-2006)은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 교리사에서 현대라는기간은 긴 기독교 역사에서 논란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고 간주되어 온 교리들이 그 자체로 의문시되었던 시대라고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교리들에는 계시개념, 그리스도의 유일무이성, 성서의 권위, 죽음이후의 삶에 대한 기대, 심지어 하나님의 초월성 자체 등이 포함된다." 믈론 삼위일체론도 이런 식으로 정의되면서 현대라는 기간동안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그러나 19세기가 동터올 때 기독교 신학은 전통적은 교리인 삼위일체론을 역사나 경험과 같은 현대적인 범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사와 경험이라는 현대적 범주는 종종 삼위일체론을 왜곡시키는 영향을 끼쳐서 그 형식은 위대한 전통애 부합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성서의 계시에 충실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대적 범주들은 예견하지 못했던 발전과 정교화의 큰 기회를 삼위일체론에 재공했다. 현대 이전의 신학은 삼위일체론적인 소재들을 역사와 경험이라는 의미 깊은 용어로 묵상하지 않았지만, 삼위일체론의 현대적 형태들은 이전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새론운 소재들에 빛을 비추어주었다. 삼위일체론에 대한 광범위한 교의학적 흥분은 20세기 후반의 신학적 토론에 신선한 활기를 주었고 이 추세가 누그러들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삼위일체 신학이 계속 토론되고 발전된다면 신학자들은 이 고전적 교리를 분명하게 표현해서 현대적 삼위일체헌의 기확을 더 잘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수행 방식은 삼위일체 교리를 전래된 전문용어들 안에 불투명한 돌덩이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투명하고 인간적 경험에 투명하고, 성서적 기초에도 투명한 것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