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공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2016-10-11 00:11:00
공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
1. 창세기 18장 19절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키게 하려 함이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도를 지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공의(righteousness)와 정의(justice)를 행하는 것이다. 여기서 공의라고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쩨다카(tsedakah)이고 정의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미쉬파트(mishpat)이다. 그런데 이 두 단어는 모두 언약이란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그 언약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공적인 언약이고 이차적으로는 일차적인 언약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이스라엘의 언약 공동체 안에서 각 구성원 간의 언약관계라고 할 수 있다.
2. 쩨다카는 바로 이 언약 관계에서 비롯되는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언약 상대방을 향하여 그 언약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 이것이 바로 쩨다카 즉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쩨다카를 행한다는 것은 언약적 의무에 충실하거나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다. 언약에 신실하거나, 충실하거나, 진실할 때 그는 공의를 행하는 것이며 그는 의로운 자가 되는 것이다. 그 반대로 언약에 불신실하거나 언약을 배반할 때 그는 공의를 저버리는 것이며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스라엘을 향하여 공의를 행하시는 분, 즉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의 의는 영원불변하며 그는 언제나 의로우신 분이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하여 공의를 저버리고 언약을 배반하였으며 이스라엘은 불의한 백성이었다. 구약의 율법은 바로 쩨다카를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언약 상대방인 이스라엘에게도 의를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에 신실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곧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3. 율법은 바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언약적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단순한 법이나 윤리 도덕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적 관계로부터 비롯된 언약법이다. 이스라엘이 이 언약법을 준수할 때, 이스라엘은 언약적 의무를 다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의롭다는 판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이스라엘이 쩨다카를 행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 관계가 유지되고 발전된다. 그러나 반대로 이스라엘이 언약법을 어길 때 그것은 언약을 배반하는 것이며, 당연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훼손되거나 파괴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향한 쩨다카를 행하지 못한 역사였다. 그러니 공의란 단순히 올바른 관계가 아니라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관계적 의무이다. 쩨다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뿐 아니라 그 언약관계로 형성된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구성원 간에도 해당된다. 그러므로 율법의 규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성원 간의 관계에서 어떻게 쩨다카를 행할 것인가를 자세히 규정하고 있다. 십계명을 예로 든다면 1-4계명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에서 쩨다카를 규정하고 있다면 5-10계명은 이스라엘 공동체 안 상호관계에서 요구되는 쩨다카가 무엇인지를 규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4. 신약에서는 율법의 대강령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랑으로 포괄적으로 표현된 단어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언약에 신실하게 행하는 것, 즉 쩨다카를 행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니 사랑이란 추상적인 정서가 아니라 상대를 향하여 구체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신약성경은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는 엄중한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 사랑은 거짓이 되어 버리게 된다. 이는 쩨다카는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뿐 아니라 그 언약관계로 형성된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 구성원 간에도 해당됨을 의미한다.
5. 신약에서 이신칭의로 요약되는 교리도 언약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복음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선언에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것을 단순히 법정에서 무죄선고를 받는 법정적 의로만 이해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복음에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난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복음의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쩨다카를 행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부르심이 바로 하나님의 쩨다카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십자가 은혜를 믿고 감사하는 것,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쩨다카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에게 마땅히 요구되는 언약적 반응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행하여야 할 쩨다카이다. 복음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쩨다카라면 믿음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쩨다카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의미라고 보아야 한다.
6. 그 다음에 미쉬파트는 일차적으로 재판이란 개념을 갖는데 이것은 불의한 자를 처벌하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구약에서 통치자들의 통치 행위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통치 행위가 재판, 판결이었다. 물론 재판이나 판결을 할 때 그 판단 기준은 율법이었다. 그러니 재판이란 율법을 어긴 자를 처벌하고 율법을 준행한 자를 보호하는 판결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미쉬파트 곧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이스라엘의 왕도 공의와 정의로 다스릴 것이 요구된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며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제사보다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시온은 정의와 공의로 구속을 받을 것이며 시온은 정의와 공의가 충만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정의와 공의로 하나님의 나라를 보존하실 것이다.(이사야 9:7)
7. 이렇게 성경에는 공의와 정의가 짝을 이루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공의와 정의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공의가 언약 상대방을 향하여 언약적 의무로서의 율법을 행하는 것이라면 정의는 율법에 근거하여 재판을 하고 그에 따라 형벌과 구원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가 공동체적, 사회 구조적으로 적용되고 실현되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쉬파트는 주로 통치자, 재판관들에게 요구되는 언약적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쩨다카를 행한다면 그 결과는 반드시 그 공동체 안에 미쉬파트가 구현되어야 한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쩨다카를 행하시며 또한 온 세상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은 미쉬파트를 행하신다. 공의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향하여 요구되는 언약적 의무라면 정의는 공동체를 다스리는 통치자, 재판관, 권세자들에게 요구되는 언약적 의무일 것이다.
8. 하나님은 바로 이 공의(쩨다카)와 정의(미쉬파트)를 행하게 하시려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선택하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오늘날도 이 원리는 불변하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사람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길이며 그리스도인들이 이것을 행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먼저 구하라고 명하신 바,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