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본질과 사명- 배덕만
교회의 본질과 사명- 배덕만
2016-07-10 18:58:18
1. 한국 개신교는 1994년에 천만 교인의 교세를 자랑했다. 당시에 카톨릭 교인수는 고작 200만 정도였다.
20세기 교회사에서 한국교회의 폭발적 성장은 교회사의 이변으로 평가되었다. 그러나 이런 양적 성장은 이제 과거의 추억이 되어버렸다. 최근의 통계에 의하면 개신교인수가 800만이고 카툴릭이 600만이라고 한다. 개신교는 교세가 줄었는데 카톨릭은 크게 증가한 것이다. 문제는 800만이라는 개신교 교세 통계에 상당한 거품이 있다는 것이다. 800만 개신교인수에 교회에 나가지 않는 가나안 교인이 200만 정도 포함되었을 것이고 나머지 600만 중에서 이단종파 200만명을 빼면 아마도 실제 개신교인수는 300만 정도로 추측된다. 20년 어간에 교세가 카톨릭은 3배로 증가한 반면에 개신교는 3분의1로 감소한 것이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위기인가? 그러나 지난 30년동안 개신교의 양적 성장은 진정한 부흥이라기 보다는 비정상적인 팽창이었다. 개신교의 교세가 위축된 지금이야말로 신자다운 신자들로 교회가 재구성될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구약의 이스라엘이고 신약의 교회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교회는 모두 제국의 주변부에 있던 소수의 무리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바로 이 소수의 주변부 무리들을 통해서 이뤄지게 하셨다. 이 소수의 주변부 무리들은 제국의 한복판에서 하나님나라를 꿈꾸고 세워나갔지만 하나님나라는 한번도 제국의 종교였던 적이 없고 오직 소수의 종교로 존재했다. 오히려 4세기 이후의 크리스텐돔 체제는 교회사에서 타락한 시대였고 수치스러운 시대였다.
2. 신약교회가 세워지는 장면이 나타난 사도행전 2장은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신약교회의 출발이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시작했다는 사실은 교회의 주인이 목사나 성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진리를 증거한다. 우리는 교회의 주인이 목사나 성도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체험함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고대의 키프리아누스는 교회의 교회됨을 주교나 감독의 존재 여부로 보았는데 이것은 교회 타락의 징조였다. 개신교도 교회의 주된 표지를 말씀과 성례로 보았는데 이것은 결국 말씀과 성례를 집행할 수 있는 목사를 전제하는 것이므로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여전히 2세기 키프리아누스의 교회관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의 '형제들 교회'는 교권구조를 반대하고 성직자 제도를 부인하며 평신도가 교회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의 주인은 목사도 아니고 평신도도 아니고 오직 성령이시다. 한국 교회는 어느 순간엔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렸다. 교회 세습은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버린 사실을 증거하는 배교적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교회의 분열은 사람들이 교회의 주인 노릇을 한 결과이고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는다는 증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도구가 없기에 우리는 교회를 지켜야 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하나님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맛볼 수 있도록 보여주는 유일하게 허락된 기관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으로 터진 방언 사건은 '하나님의 큰 일'을 선포하였는데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란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신 일이었다. (행2:36) 예수가 주이시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 바로 방언의 목적이고 성령의 역사였다. 그러므로 방언의 진정한 은사는 알아듣지 못할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는 방언의 진정한 은사가 사라졌다. 한국교회에서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라는 선포가 사라진 것이다. 십자가의 복음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선포위에 기초하고 이 선포에서 출발하였다.
3. 이렇게 출발한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떡을 떼고 모이기를 힘썻는데 그 결과 그들은 서로 주머니를 털어 물질을 공유하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게 되었다. 교회 안에 가난한 자나 굶는 자가 없어진 것이다. 교회와 세상이 다른 점은 기도나 이적이 아니라 주머니를 터는 것이다. 세상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초대 교회 공동체의 첫번째 실험은 물질을 공유하는 것이었다. 초대 교회는 헌금을 공동체의 가난한 자를 위해 사용했다. 사도들은 이것을 예수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제자들로 구성된 예수 공동체는 가난했지만 모든 것을 공유한 공동체였다. 사도들은 예수 공동체를 본떠서 초대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굶주리는 자가 없게 했다. 성령의 임재로 공동체 안에는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자가 없게 되었으니 성령은 유무상통하는 공동체를 이뤄가신 것이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죽음은 공동체를 깨뜨리고 나아가 성령을 속인 죄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그들의 죄는 공동체를 세우시는 성령을 속이고 공동체를 깨뜨리는 것이었다. 구약의 황금송아지 사건의 핵심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섬긴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황금 송아지로 만든데 있었다. 한국교회의 문제의 핵심은 맘몬을 하나님으로 섬긴다는데 있다. 돈이 세상의 주인이 되었고 이 돈으로 한국교회는 타락하게 되었다. 맘몬을 거부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다. 교회는 돈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고 교회가 투쟁해야 할 전선이다. 교회의 사명은 찬송과 기도가 아니라 돈과의 전쟁을 통한 진정한 공동체 형성이다. 공동체 안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4. 이렇게 최초의 교회가 형성된 후에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때 앉은뱅이 거지를 일으킨 사건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런 이적이 그들이 성령을 받고 난 다음에 일어난 사건임을 주목해야 한다. 성령을 받기 전에는 그들의 눈에 앉은뱅이 거지가 안보였지만 성령이 임하자 그들에게 하나님의 눈이 열리고 그동안 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거지가 보였던 것이다.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오감으로 세상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심장으로 세상을 볼 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 성전 문 앞에 내던져진 앉은뱅이 거지는 자기 잘못이나 무능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구걸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철저한 사회적 약자였다. 세상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겨우 먹고살 수 있게 해주는 일, 여기까지일 뿐이다. 누구도 이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없고 성전에 들어가 우리 이웃이 되게 할 수 없었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는 무서운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의 사명은 사람을 회복시키는 것이고 그들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포용하고 세워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한 영적 싸움이다. 하나님은 이 일에 헌신된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하나님은 이 일이 헌신된 자가 준비되고 결단하길 고대하신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이런 헌신된 자들을 통해 일어난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힐 때 우리는 모세가 되고 베르로가 되고 요한이 되고 바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