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미래- 김근주

메르시어 2023. 5. 12. 11:24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미래- 김근주

2016-07-09 18:02:48


1. 구약의 오경이 하나님나라의 근본 원리를 말했다면 구약의 역사서는 하나님나라 백성인 이스라엘이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의 근본 원리를 따라 살아가면서 성공하고 실패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그리고 욥기에서 아가서에 이르는 소위 지혜문서나 시가서는 하나님나라 백성들이 살아간 역사 속에서 그들이 가졌던 희노애락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사야로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구약의 예언서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구약의 예언서들의 일관된 주제는 심판의 선포였다. 이스라엘은 오경에 제시된 하나님나라의 원리를 따라 살지 않았고 불순종했으며 그 결과 멸망을 당하고 말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삶을 정죄하고 심판을 선포했다. 그러나 그들의 선포는 정죄와 심판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하나님의 구원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희망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구약 예언자들이 구원과 회복을 말하기 전에 먼저 정죄하고 심판을 선포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는 정죄와 심판의 선언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과 회복에 당연히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정죄와 심판이 없이 말하는 구원과 희망은 값싼 구원이거나 가짜 희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구약 예언자들이 선포했던 미래의 희망은 무엇인가? 미래의 희망에 대한 예언자들의 선포에는 "새롭다"는 단어가 반복되는데(예를 들면 이사야 42:9, 43:19, 48:6의 '새 일' 사65:17의 '새 하늘과 새 땅, 렘31:31-33의 '새 언약, 겔35:26-27의 '새 영' ' 새 마음') 이 "새로움"은 본질적으로 심판 이후에 임할 하나님의 행하심을 가리킨다.  "새로움'의 본질적 내용은 심판으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철저한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새롭게 회복하시는 영광스런 그 날이 이제 곧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 그런데 예언자는 이전의 출애굽 역사를 이 '새로움'의 모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특히 이사야 40-55장) 그 '새로움'은 이전과 다른 새로움이 아니라 이전과 공통되는 새로움이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가 선포한 새 언약 역시 이전에 주어진 울법이 사라지는 세상이 아니라 그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는 세상임을 보여주며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루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선포도 정확이 이에 맞닿아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의 새로운 날은 모든 역사가 사라지고 초월적인 그 어떤 세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이전의 역사와 단절된 다른 세상을 전하는 것도 아니다. 예언자들은 현실의 암담함에 눈감고 다가올 완전히 다른 세상을 꿈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무지 선이라곤 조금도 행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외쳤다. 거역을 거듭하며 멸망을 향해 치닫는 세상 안에 살아가면서 예언자들은 인간에 대한 절망과 체념에 빠져들지 않고 심판 이후에 임하게 되는 영광의 그 날, 새롭게 하시는 그 날을 바라보았다. 구약의 예언서가 심판과 심판 이후의 회복을 동시에 담고 있다는 점은 결코 간과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언서는 암담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품었던 희망을 반영한다. 진정한 희망은 과거를 미화하거나 감추는데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가득한 과거를 냉철하게 직시하고 날카롭게 비판할 때 생겨난다. 죄악과 그로 인한 참상을 정확히 깨닫게 될 때 심판 이후에 임할 회복과 소망이 구체화되는 것이다. 반성이 없는 미래는 장미빛 환상이며 현살도피일 뿐이다. 날선 비판은 영광스런 미래를 위한 필수적 과정이다.

 

3.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도 있었고, 이방 땅에서 내내 살아갔던 다아스포라 유대인도 있었던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을 생각하면 사무엘7장에 언급된 '다윗에게 하신 영원한 약속' 은 다윗으로 상징되는 인간 왕권의 지속에 초점이 있지 않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지속에 초점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사야 55장 3절은 다윗 언약을 이스라엘 공동체와 맺는 언약으로 표현하고 있다. 폰 라드는 이것을 다윗 언약의 민주화(democratizing)라고 말한다. 이사야(사11:1-10)는 이새의 뿌리에서 나는 가지, 즉 새로운 다윗을 통해 이루어질,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 노는 평화로운 미래를 전하고 있다. 이사야의 관련 구절들(사60:21; 61:3 ; 61:9 ; 65:23)은 이 새로운 다윗이 다윗의 후손으로서 개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새의 가지, 즉 새로운 다윗을 통한 약속은 '여호와께 복 받은 이들' 이라는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통해서 현실화되고 구체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폰 라드의 말대로 한 사람 다윗에게 한 약속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향한 약속으로 다시금 민주회되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 7장14절에 등장하는 '인자와 같은 이'는 개인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임이 드러난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통해 현실이 될 것임이 약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 예언자들이 전하는 미래의 약속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한 약속이다. 아브라함도 공동체를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회복한 다윗도 공동체적으로 이해되고 '인자 같은 이'도 그러하다. 이것은 구약이 근본적으로 공동체로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말씀임을 보여준다.

 

4. 유대 왕들에 대한 예레미야의 선언(렘22:1-5 ; 렘 22:13-20)이 의미하는 바는 다윗의 왕권이 그저 다윗의 후손에게 영영토록 보장되는 권세가 아니라 그 왕권을  통해 이뤄지는 '정의와 공의의 세상'임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가 없으리라는 경고에 이어 곧바로 다윗의 회복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렘23:5-6)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다가올 영광스런 미래는 '다윗의 의로운 가지'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 구채적인 내용은 '정의와 공의의 통치'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사야가 전하는 미래(사9:6-7)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권의 본질은 혈통적  세습이 아니라 정의와 공의로 다스려지는 세상이다. 정의와 공의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바로 다윗의 왕권이 가리키는 실제이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미래인 '다윗의 나라'는 어떤 개인에 대한 예언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그리고 '정의와 공의'가 하나님의 세상 통치의 근본 원칙이라는 점에서(시97:1-2) '정의와 공의의 세상'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언서는 다윗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기대하고 전했다. 그러므로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께서 구약의 약속과 기대를 이루신 분이라는 말은 구약이 약속하고 기대하는 세상,곧 하나님나라를 현실로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5. 예언자들이 전한 미래의 말씀에는 정의와 공의의 나라가 어떤 세상인지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무엇보다도 그 나라는 전쟁이 없는 세상이었다. 본문(사2:2-5 ; 미가4:1-5)은 예루살렘이 온 세상의 중심으로 굳게 설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온에서 선포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곳에서 왕으로 좌정하셨음을 의미한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왕의 판결을 듣기 위해 몰려왓던 열방은 하나님의 통치를 깨닫게 되자 자신들이 갖고 있던 칼과 창을 쳐서 보습과 낫으로 바꾸었다,. 여호와가 왕으로 다스리시는 새상이라면 더 이상 칼과 창은 필요없기 때문이다. 전쟁이 없는 세상이야말로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설명하는 단적인 표현이다. 온 열방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면 필연적으로 전쟁없는 세상이 될 것이다. 미가서가 말하는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와 자기 무화과 나무 아래 앉으며 두렵게 할 이가 없는 세상' 역시 전쟁없는 세상을 달리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 하나님이 왕으로 임하시는 세상은 전쟁없는 세상이다. 그 나라에는 억울함이나 압제나 갈등이나 경쟁이나 침략이나 방어가 전혀 없는 세상이다. 예언자들이 꿈꾼 세상은 하는 일없이 한가롭게 놀고 날아다니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각각 자신의 기업을 경작하며 다른 이를 침략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이사야 11장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가지로 표현된 새로운 다윗으로 상징되는 나라를 예고한다.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그는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으며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하는존재라고 할 수 있다. 6절 이하는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통치로 변화된 세상을 보여준다. 그 세상에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고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는 서로 상함도 해함도 없다. 이것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온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본문은 다가오는 평화의 나라를 예고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이런 평화의 왕국과 직결된다. 하나님을 믿으면 천국간다는 표현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알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세상을 갈망하고 꿈꾸고 마침내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열망하고 헌신하며 살아가게 된다.

 

6. 이사야가 말한 '거룩한  산'(사11:9) '새 하늘과 새 땅'(사65:17-25) 그리고 스가랴 8장이 말하는 세상이 바로 평화의 세상이다. 전쟁없는 세상, 서로 상함도 해함도 없는 세상, 약자들이 마음껏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그것이 바로 예언자들이 전한 다가오는 미래 하나님이 다르시는 세상이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새 언약의 세상도 이런 예언이 일상이 되고 현실이 되는 세상일 것이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정의와 공의가 현실이 되어 누구라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야 말로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영광스런 미래인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144000(계7:4-8)은 구원받은 개인들의 숫자가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상징한다. 구약에서 줄기차게 공동체의 회복을 예고하였듯이 신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역시 열두지파로 상징되는 새로운 공동체의 회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야기한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 믿으면 얻게 되는  구원은 압도적으로 내세 지향적이지만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다가올 영광의 미래는 내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언자들이 꿈꾸던 미래는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공동체다.  온 세상의 왕이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과 평화가 곳곳에 흘러 넘친다는 것은 예언자들에게 동의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복음의 진리는 공동체적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처움부터 끝까지 공적인 삶의 영역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공동체적 변화, 공적인 변화 없이 개인의 실존적 고백과 그에 입각한 구원 약속은 부족하고 미흡한 복음이 아니라 잘못된 복음이라고 해야 한다.어느새 우리네 교회는 일정한 교리와 신조를 지적으로 혹은 인격적으로 경험하고 고백하면 구원 얻는다고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렇게 믿고 고백할 때 '이미 의로워졌다고 선언'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교회는 조금도 의로워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이들로 가득해졌고, 더 이상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도 아니면서, 하나님께 영원한 의를 '전가'받은 집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과제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믿고 일상 속에서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살아가기를 요구한다.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그 나라를 소망하고 힘쓰는 자는 그 나라를 누리고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특강- 김근주

2019-07-11 20:02:10


서론

 

예수 그리스도와 예언

 

  이사야서는 시편과 더불어 신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의 책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연구하는 것은 신약 교회를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본문을 연구하는 것과 같다 이사야서는 구약과 신약의 접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은 이사야서의 개별 구절에 나타난 특정 이미지나 사건을 넘어 이사야서가 선포하고 제시하는 보다 큰 그림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신약의 구약 인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 전체 맥락에서 용례를 함께 검토할 필요가 있고, 이사야서를 인용한 예수의 선언 역시 이사야서와 구약 전체의 맥락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의 성취로서 예수를 말할 때 특정한 예언이나 사건의 성취가 예수를 통해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구약과 이사야서 전체를 통해 제시되고 선포되는 그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통해 이루어지고 나타난다고 말해야 한다.

 

 히브리 성경과 달리 기독교의 구약은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주후4세기 바티칸 사본에서 헬라어 구약본문을 오경-역사서-시와 지혜-예언서로 배열한 이후에, 이는 기독교 구약 배열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기독교 성경에서 예언서의 위치는 구약의 결론이며 신약의 예비다. 기독교 성경은 율법과 이스라엘의 역사 및 그들의 삶의 문제를 차례로 다룬 후에, 이스라엘이 실패한 역사를 살았음을 선언하고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선포한다. 그러나 예언서에는 심판 이후에 하나님이 의도하신 회복 및 회복에 대한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예언서가 구약의 마지막에 놓이면서 신약에서 제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길을 예비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회복과 기대의 결론이며 답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 보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언자들이 고발하는 이스라엘의 실패, 그들이 선포하는 다가올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기대를 충분히 알아야 한다.

 

이사야의 이름으로 전해진 책: 예언서의 형성

 

 예언자들의 선포가 이스라엘 역사 초기부터 문서 형태로 전해지지는 않았다. 사무엘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이 있지만 그 책이 사무엘을 통해 선포된 말씀을 중점적으로 모은 책은 아니다. 나단이나 갓, 아히야, 엘리사,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들이 두드러지게 활동한 시대에도 그들의 이름으로 전하는 책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모스로부터 시작된 이른바 문서예언은 일찍부터 학자들의 관심사였다. 아모스를 비롯한 구약의 예언자들은 근본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선포자였지 기록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들의 말씀이 최초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두 가지 정도의 설명이 있다. 첫째는 이전 예언자들의 선포는 구체적 상황을 전제하는 말씀이었던데 반해, 아모스 이래 예언자들의 선포는 특정한 시기나 사건을 넘어서는 보편성 및 하나님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가 담겼다는 급진성이 반영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기록으로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는 설명이다. 다른 설명은 아모스의 예언 직후 이스라엘이 망한 것은 아니므로 아모스를 알지 못하는 다음 세대에게 예언자의 말을 전할 필요가 있어서 그 말들을 기록하고 수집했다는 것이다. 아마도 예언서들의 수집과 형성에 영향을 미친 결정적 요인은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 특히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을 것이다. 충격적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지에 대한 응답으로 이러한 예언서의 수집과 형성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예언자들이 선포한 말씀들이 오늘날 우리가 지닌 형태의 예언서로 형성된 배경을 설명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일종의 학파를 이룬 예언자의 제자들이 예언자의 말을 기억하고 기록했으며, 그 내용을 다른 제자들에게 가르치면서 예언서가 확장되었다는 설명이다. 처음에는 아주 간략했던 메시지가 세대를 거듭하여 전해지면서 해설이나 주해 등이 더해졌고, 그래서 예언서들에서 후대의 시기를 반영하는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그들은 해석한다. 또 다른 설명은 서기관들의 편집설이다. 중요한 문서를 필사하는 사람들인 서기관들은 새로운 예언의 수집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이미 쓰인 본문을 정교하게 다듬고 미완성된 문서들에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내용을 덧붙이는 것이 주된 작업이었다. 그래서 특정한 예언자적 기원이 없는 문서들도 이런 과정에서 예언서들에 추가되는 경우가 생긴다. 이사야서가 형성될 때 실제로 어느 정도는 이 두 과정 모두 있었을 것이다. 이사야서가 오늘날의 모습을 갖춘 시기는 아마 바벨론 포로기 혹은 포로귀환 이후일 것이다. 이사야서의 형성 논의는 이사야서의 여러 부분이 각기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손길에 의해 형성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합쳐졌다고 여긴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이사야서의 각 부분을 나눠 생각하게 된다. 이에 의한 고전적인 주장은 1-39장은 주전 8세기 예루살렘 이사야와 관계가 있지만 40-55장은 바벨론 포로기를 살던 익명의 예언자가 기록했고 56-66장은 포로 귀환 이후 귀환공동체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가 40-55장을 제2이사야, 56-66장을 제3이사야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사야서의 기록과 형성에 대한 이런 논의는 숙고할만하다. 그러나 이사야서가 최초의 선포로부터 어떻게 오늘날의 완성된 모양에 이르게 되었는지 살펴볼 때는 반드시 완결된 최종 형태의 이사야서가 전하는 주제와 연결하여 숙고해야 한다. 과거에는 역사비평에 힙 입어 이사야서의 형성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오늘날은 최종 형태로서의 이사야서 연구가 압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