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통해 보는 우주창조의 역사-우종학
과학을 통해 보는 우주창조의 역사-우종학
2016-06-04 16:59:54
과학을 통해 보는 우주창조의 역사
우종학 교수(서울대학교)
서론: 성서와 자연(신학과 과학), 두 가지 책의 전통
기독교의 전통은 우리에게 주어진 두가지 책을 함께 읽는 것이다. 첫째는 특별계시인 성경으로 창조주가 누구인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려준다. 두번째는 일반은총의 영역에서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자연이라는 책이다. 자연은 하나님이 우주를 어떻게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지 창조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를 보여준다. 자연이라는 책에는 성경에 담겨져 있지 않은 많은 내용들이 포함된다. 가령, 성경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선포하지만,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창조하고 섭리하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반면,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한 과정과 방법을 세세히 담고 있다. 물론 인류는 아직 자연이라는 책을 완벽하게 다 읽어내지 못했으며 창조는 여전히 수많은 신비를 담고 있다. 하지만 자연에 담긴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읽어가며 배우는 일은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과 함께 흥미진진하고 감사한 일이다. 성경과 자연, 이 두 책의 저자는 한분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두 책은 서로 모순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 과학과 기독교가 서로 모순되는 듯한 다양한 현상이 생기는 이유는 사실, 성경과 자연 이 두 책을 잘못 읽었거나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과정이다. 근대과학이 탄생하기 전 인류는 자연을 읽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서 천동설처럼 철저히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이는 대로 자연을 읽을 수 밖에 없는 한계를 가졌다. 자연이라는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던 고대나 중세에는 자연보다는 성경을 통해서 창조의 역사를 이해하는 경향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가령 천치창조가 언제 일어난 사건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창세기 족보를 해석해서 창조 연대를 추정할 수 밖에 없었고, 지구가 운동을 하는지 정지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의 답을 성경에서 찾기도 했다. 자연이라는 책에서 읽어내야 할 내용을 성경에 기대어 찾다보니 창조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불완전하고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점은 창조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불완전하였다고 해서 창조주를 믿는 신앙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근대과학의 태동 이후, 과학이 자연을 읽는 표준적인 방법으로 자리잡으면서 창조 역사는 보다 면밀하게 밝혀진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과학은 자연현상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하나의 설명체계라 할 수 있다. 경험적 데이타와 합리적 추론을 사용하는 과학 방법론은 자연을 가장 효과적으로 읽어내는 성공적 방법으로 자리잡았으며 자연을 읽고 해석해 낸 결과물이 바로 과학의 내용이다. 즉, 과학은 자연을 읽고 이해하는 과정이다.
저자 | 창조주 | ||||
창조 | |||||
두 가지 책 | 성경 (특별계시) |
자연 (일반계시) |
|||
성령 | |||||
책 읽기 | 성경 해석 (신앙, 신학) |
과학 (자연에 대한 해석) |
물론 단순히 눈에 보이는 대로 자연을 읽는 것은 오류를 낳는다.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을 우리는 매일 목격하지만 사실 태양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자전한다. 과학이 자연을 완벽하게 밝혀낼 수는 있을지는 의문이다. 과학은 분명한 한계를 갖기 때문이다. 과학은 자연이라는 실재에 대해 점점 더 다가가지만, 자연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읽어낼 수는 없다. 그래서 과학은 자연에 대한 영원한 근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 역사에 대해 놀라운 비밀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유용한 도구다.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밝혀내는 축복을 입은 일반은총의 학문이다. 과학을 통해 자연이라는 책에 낱낱이 기록된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을 하나하나 밝혀가는 과정은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배워가는 경이로운 과정이다.
과학이 자연이라는 책을 읽는 과정이라면 신학은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과정이다. 나의 성경해석을 성경 자체와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과학과 신학 모두 해석의 과정이며 창조주와 창조를 이해하기 위한 독립된 그러나 상보적인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은 창조주가 누구인지 who의 문제에 집중하는 반면 과학은 창조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how의 문제에 초점을 둔다. 과학과 신학은 다루는 대상도 다르고 학문의 규칙에도 차이가 있지만 기독교의 관점에 보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두가지 축이며 이 둘을 연결하는 과학-신학은 창조를 이해하는 종합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본론: 현대과학을 통해 보는 우주창조
자연을 읽는 과학적 방법의 발전으로 창조역사에 대한 인류의 이해는 역동적 변화과정을 거쳐왔다. 우주창조와 관련하여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일곱 가지 과정을 살펴보자.
1. 고대근동의 우주관: 자연을 읽는 방법이 제한되었던 고대에는 지구인의 관점에서 보이는 대로 우주를 이해했다. 창세기의 배경인 고대근동지역에서는 편평하고 정적인 지구(땅)가 바다에 둘러쌓여 있으며 해와 달과 별들이 궁창(하늘)에 박혀있는 모습이 상식이었다. 우주가 광대한 크기를 가졌다거나 우주가 장구한 시간동안 변해왔다는 동적인 개념은 찾아보기 어렵고 즉각적이고 정적인 형태로 천지가 창조되었다는 관점이 주를 이루었다(creatio de novo). 과학이 조금씩 발전하며 지구가 편평하지 않고 둥글며, 대기권 밖 먼 거리에 별들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지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정적인(변하지 않는) 존재라는 개념은 근대과학 이전 시대의 일반적인 믿음이었다.
2. 16-17세기의 지동설-천동설 논쟁: 근대과학이 시작되는 시점의 지동설 논쟁은 자연을 보다 정교하게 읽어가면서 고대의 우주관을 무너뜨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지구인의 입장에서 지구는 움직이지 않는다는 단순한 관찰은, 밤하늘 화성과 목성 등 행성들의 운동을 면밀히 살핀 과학적인 데이타에 의해 대체되었고, 자연이 아니라 성경에 의존하여 천동설을 주장했던 견해(예: 시편 104편 5절)는 성경 해석의 오류였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지동설-천동설 논쟁은 성경을 그 목적에 맞게 보다 정확히 해석하고 동시에 자연을 보다 정확히 읽고 이해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억할 점은 성경 여러 곳에는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움직이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이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했던 루터나 칼빈의 성경해석은 이미 폐기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의 권위나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동설-천동설의 논쟁은 창조주가 아닌 창조의 방법에 관련된 논쟁이었고 천체의 운동과 같은 과학적 결론은 성경이 아닌 과학을 통해 결론지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드러낸 사건이다.
3. 18-19세기의 지구의 연대 논쟁: 17세기를 지나 지질학이 발전하면서 지구 역사에 대한 관점도 점점 변한다. 자연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중세까지는 창세기의 족보계산을 통해 천지창조가 기원전 4000년 경에 있었다는 견해가 주류였으며 이는 제임스 어셔 주교가 쓴 창세기 주석을 통해 현재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18-19세기에 지질학이 발전하면서 지구의 연대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이 제기된다. 새로 등장한 다양한 지질학적 증거들, 가령 수십~수백킬로미터의 암석층, 화산활동과 용암층 등은 지구가 6천년 전에 창조되었다는 젊은 지구론과는 양립할 수 없는 증거들이다. 19세기 중반이 되면 지구의 연대는 최소 수백만 년이라는 견해가 지질학계의 주류 결론으로 자리잡게 되고 20세기가 되면 핵물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방사성 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이 개발되어 암석의 연대를 측정하게 된다. 빙하층과 대륙의 이동과 같은 독립적인 증거들을 통해 지구는 매우 오래된 기간동안 생성되었음이 확실해지면서 지구가 최근에 생성되었다는 믿음은 폐기되고 지구연대에 대한 논쟁은 막을 내렸다. 지질학 뿐만아니라 천문학을 통해서도 달에서 가져온 암석이나 지구에 떨어지는 운석 등의 과학적 증거들을 통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가 약 50억년 전에 생성된 것으로 알려진다.
4. 20세기 초 우주의 크기 논쟁(외부은하 논쟁): 20세기 초 천문학계에는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의 세계 너머에 또 다른 우주가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 불거졌다. 구름덩어리처럼 보여서 성운(nebular)이라고 불렸던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거리측정이 이루어지면서 안드로메다는 수천 억 개의 별로 이루어진 또 하나의 섬우주(island universe), 즉 은하(galaxy)라는 것이 1920년대에 알려졌다. 태양계가 속해있는 우리은하는 수십만 광년(1광년은 빛의 속도로 1년동안 간 거리를 지칭한다)의 크기이고 안드로메다 은하는 우리은하로부터 260만 광년 떨어진 거리에 있다. 국부은하그룹이라 불리는 우리동네는 300만 광년의 크기 안에 수십 개의 은하들이 모여있음이 차차 밝혀진다. 19세기까지 생각했던 우주의 크기는 20세기 초 대논쟁 이후 광대한 크기로 확장되었다. 현재 천문학자들은 허블우주망원경을 비롯한 최첨단의 관측기기들을 통해 100억 광년이 넘는 거리에 위치한 은하들을 발견하고 연구하고 있으며 우주의 크기는 빛의 속도로 100억년을 가야 하는 크기보다 더 크다고 알려져 있다. 천문학의 발달은 물리적 우주의 크기가 고대나 중세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광대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5. 20세기 초 우주팽창의 발견: 20세기의 위대한 발견 중의 하나는 우주의 크기가 더 커지고 있다는 우주팽창의 발견이다.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동적인 존재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일반상대성이론이 가리키는 팽창하는 우주를 거부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 허블과 르메트르는 은하들의 거리와 속도를 측정하여 멀리있는 은하가 가까운 은하에 비해 더 빠르게 멀어진다는 허블의 법칙을 발견하였다. 허블의 법칙은 은하와 은하 사이의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즉, 우주가 팽창함을 보여주는 관측적 증거였다. 19세기까지 우주를 정적인 개념으로 보았던 관점은 우주팽창의 발견으로 급격하게 변했고 시간에 따라 우주가 변한다는 동적인 우주 개념은 현대천문학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축이다. 시간에 따라 변한다는 동적인 개념은 19세기 중반에 제기된 생물진화 이론과 궤를 같이 한다. 생물진화 이론은 생물의 창조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거나 생물의 역사가 정적인 것이 아니라 긴 시간동안의 변화를 통해 종이 분화되는 방식으로 창조되었다는 동적인 개념(진화)과 궤를 같이 한다.
6. 20세기 중후반 대폭발이론: 우주팽창의 발견은 과거에는 우주의 크기가 작았고 결국 먼 과거의 어느 시점에 우주가 시작되었다는 결론을 낳았다. 소위 빅뱅(big bang) 혹은 대폭발이라고 불리는 우주의 시작은 유한한 우주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과학적 논거가 되었으며 빅뱅의 흔적이라 불리는 우주배경복사가 1965년에 우연히 발견되고 1992년에는 나사 코비위성의 정밀한 관측결과가 발표되면서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균일한 배경복사가 발견된다는 등방성이 확증되면서 표준우주론(standard cosmology)으로 자리잡는다. 표준우주론은 우주의 나이를 138억년으로 측정하였고, 우주의 팽창, 우주배경복사, 수소와 헬륨의 원소비율과 같은 엄밀한 증거들을 갖고 있다. 표준우주론은 천문학 다른 분야의 독립적인 연구들, 가령, 핵물리와 관련된 별의 구조와 진화, 은하의 생성과 진화, 거리측정 등 다양한 연구들과 더불어 일관된 방식으로 동적이고 장구한 우주의 역사를 제시한다.
7. 빅뱅 자체에 대한 논쟁: 정적인 우주가 아니라 장구한 시간동안 우주가 변해왔다는 동적인 우주 개념은 현재 표준우주론의 기초가 되는 반면, 138억년 전 빅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엄밀한 과학적 이해가 제한되어 있다. 특이점(singularity)이라 불리는 빅뱅의 시점은 현대물리학으로는 정의하기 어렵다. 우주 나이가 38만년보다 작았던 시점은 빛이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직접적 관측이 불가능하며 이론물리학적 접근을 통해 연구할 수 밖에 없는 영역이다. 더군다나 우주의 나이가 1초보다 훨씬 작았던 기간(우주의나이 1/1043 초 미만)은 플랑크시간이라 불리며 양자역학의 한계로 인해 현재 과학지식으로는 탐구가 거의 불가능하다. 과학자들은 양자역학의 진공에너지 등의 설명으로 빅뱅 자체를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관측적 검증이 어려운 이론적 접근이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다중우주론, 초끈 이론 등의 다양한 연구는 아직은 엄밀한 과학적 결론으로 보기 어렵다.
과학을 통해 밝혀진 창조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자연이라는 책을 면밀히 읽어가며 과학이 밝혀 온 창조의 역사는 근대과학 이전 시대의 사람들이 이해했던 내용과는 매우 이질적이다. 그래서 때로는 과학 내용 자체가 창조신앙과 대립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오해를 낳는다. 하지만 자연이라는 책은 창조주가 인류에게 준 일반은총이며 그 책을 읽어낸 과학은 원칙적으로 창조의 역사를 드러낸다. 그동안 주로 성서에 기대어 창조의 역사를 제한되게 이해했던 과거와는 달리 우리는 과학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보다 세밀히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우주창조를 밝혀낸 과학이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하여 던지는 새로운 관점들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우주의 광대함이 주는 경이로움이다. 별이나 은하까지의 거리를 재는 거리측정 역사는 천문학의 역사 자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하다. 건축 측량법과 유사한 삼각 연주시차(trigonometric parallax)법으로 십만 광년 떨어진 별들의 거리는 GAIA등의 위성을 통해 직접 측정할 수 있게 되었고 수백만 광년 이상 거리에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 등 가까운 은하들의 거리도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된다. 정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신뢰할 수 있는 초신성을 이용한 방법은 수십억 광년 거리에 있는 은하까지 거리를 측정하게 해준다. 현대천문학은 우주의 크기가 백억 광년 이상되며 천억 개 가량의 은하들이 우주에 존재한다고 알려준다. 각각의 은하들은 평균적으로 천억 개 가량의 별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각각의 별들은 태양처럼 목성이나 지구와 같은 행성들을 거느리고 있으리라 추정된다. 시편 19편을 쓴 기자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고백했지만 현대천문학을 통해 우리는 광대한 우주와 그 안에 담긴 세계를 보며 우주보다 더 큰 창조주의 위대함을 찬양할 수 있다. 광대한 우주의 거시세계는 창조주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둘째, 우주는 시작되었다. 현대천문학은 우주가 무한히 오래 전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어느 시점에 시작된 유한한 존재임을 암시한다. 여전히 빅뱅 자체에 대한 논란이 있고 빅뱅 이전의 다중우주에 관한 이론적인 시나리오들이 있지만 관측되는 우주의 증거들은 138억 년 전에 우주가 탄생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대폭발 우주론을 철학적 혹은 신학적으로 해석해보면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라는 창조교리에 잘 드러맞는다. 과학이 밝힌 빅뱅이 바로 무로부터 유를 창조한 신의 창조의 출발점이라는 해석이다. 물론 대폭발 우주론이 기독교의 창조교리를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빅뱅과 창조에 대한 이해는 자연을 읽어낸 과학의 결과와 성서를 읽어낸 신학의 결과를 두 축으로 하여 창조의 역사를 상보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셋째, 우주는 규칙적이다. 과학을 통해 밝힌 창조과정은 자연법칙에 기초한 인과과정을 따르는 역사다. 자연세계가 과학이라는 수학적 언어로 아름답게 기술된다는 것 자체, 즉 우주가 매우 수학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창조세계가 신의 성품을 반영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변덕스런 신들과 달리 성서는 하나님을 동일하고 신실하고 약속을 지키는 신으로 기술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을 닮은 창조세계를 창조하셨으며 그 세계는 신과 인간의 언약관계처럼 자연법칙을 통해 섭리되는 세계다. 과학은 자연세계의 본성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신학은 창조주의 성품에서 자연세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다. 과학과 신학은 창조세계와 창조주를 함께 이해하는 상호보완적 작업이다.
넷째, 우주는 오래되었다. 고대나 중세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창조는 6천년 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창조가 즉각적이고 순간적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우주창조의 역사는 백억 년 이상의 시간을 거친 긴 과정이었으며 팽창하는 우주와 같이 다양한 변화를 거친 동적인 과정이었다. 별들을 창조하여 별의 내부에서 탄소와 산소처럼 생물의 기반이 되는 원소를 조성하셨고 우주역사의 후반에 태양과 지구를 만들어 인류가 살수 있는 터전을 준비했으며 긴 생물의 역사를 통해 인간을 창조하신 그 긴 과정은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인내의 과정이었다. 마술사처럼 즉각적이고 순간적으로도 인류를 창조할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은 그대신 장구한 시간 속에 인내하시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하나하나 섭리하셨다. 이 긴 과정을 통해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우주의 본성을 이해하고 사유할 수 있는 놀라운 창조물이다.
다섯째, 계속되는 창조(creatio continua). 백억 년이 넘는 우주 역사동안 우주의 구성물들이 하나하나 창조되었고 46억년의 지구 역사를 통해 다양한 생물들이 창조되었다는 과학적 결론은 창조는 1회적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자연을 면밀히 밝혀낸 과학의 발전을 통해 계속되는 창조라는 개념은 과학과 신학의 대화에 빠질 수 없는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개념을 범재신론이나 과정신학의 관점으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다. 6일간의 첫 창조가 진정한 의미의 창조이며 그 이후의 과정은 섭리로 봐야한다는 주장은 우주창조의 긴 과정을 볼 때 설득력이 떨어진다. 전통적인 기독교의 관점에서 계속적 창조를 이해하는 방식은 하나님이 내재성을 통해 계속 창조의 역사를 이어간다고 보는 것이다. 빅뱅의 시점은 현재의 모든 에너지-밀도가 만들어진 무로부터 유를 만들어 낸 초월적 창조였다면 그 이후 창조과정은 에너지와 물질이 서로 바뀌면서 옷을 갈아입으며 새로움이 창조되는 내재적 과정이었다. 과학은 경험적인 증거들을 통해 우주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작업이며 이는 신의 내재적 창조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마크 해리스가 <창조의 본성>에서 지적하듯, 계속되는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과학이 밝힌 인과관계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창조가 아니라 이신론의 영역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빅뱅 이후에 모든 자연과정이 우연과 무목적인 과정이며 신의 섭리와 상관없다고 여길 수 밖에 없게 된다. 계속되는 창조는 시간의 과정 안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며 이는 우리의 삶을 성령이 인도하듯이, 자연세계의 계속되는 창조는 성령의 일하심을 통해 내재적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결론: 과학-신학의 대화는 창조주를 발견하는 또 하나의 길이다.
성서와 자연은 하나님과 창조세계를 이해하는 두 가지 책이다. 자연을 읽어내는 해석방법이 제한적이었던 고대나 중세와는 달리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과학을 통해 창조 역사에 대해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자연 책과 성경 책의 내용이 서로 모순되어 보이는 충돌점들이 종종 발생했으나 이는 자연을 해석한 내용, 즉 과학의 불완전성과 성경을 해석한 내용, 즉 우리의 성경해석의 불완전성에서 발생하는 충돌이며 근본적으로 성서와 자연은 모순될 수 없다.
해석의 불완점함으로 생기는 충돌은 진화-창조 논쟁과 같은 부작용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창조를 고백하는 관점을 창조론이라고 넓게 정의할 때, 창조의 방법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는 입장들을 창조론의 다양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면 1) 젊은 지구 창조론 2) 오랜 지구 창조론 3) 진화적 창조론이다. 세 가지로 견해가 나누어지는 이유는 첫째, 성서 해석에 대한 입장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며 둘째, 자연에 대한 해석, 즉 과학을 수용하는 정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젊은 지구창조론의 성서해석은 보다 경직된 문자적 해석이며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와 창세기의 족보계산을 통해 천지창조가 약 만년 전에 이루어졌다고 본다. 즉 지구의 연대나 우주의 나이를 성경 본문의 문자적 해석을 통해 만년으로 주장한다. 이 입장은 근대과학의 결과, 즉 지질학이나 천문학의 발전과정에서 자연이라는 책을 보다 면밀히 읽어낸 과학의 내용을 거의 수용하지 않는다.
WHO? | 창조 | |||||||
HOW? | 젊은 지구 창조론 | 오랜 지구 창조론 | 진화적 창조론 | |||||
책 읽기 | 성경 해석 (신앙, 신학) |
과학 (자연에 대한 해석) |
두번째 입장인 오랜 지구 창조론과 진화적 창조론은 젊은 지구 창조론과는 달리 창세기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성경이 주어진 목적에 맞게 성경의 저자가 의미한 내용들에 더 주목한다. 창세기는 창조 연대를 직접 알려주지 않으며 지구 연대 등 과학적인 설명을 담은 과학교과서가 아니라 창조주에 초점이 맞추어진 신학적 메세지로 읽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오랜 지구 창조론과 진화적 창조론은 과학을 창조방법과 과정을 보여주는 유용한 도구로 여긴다. 지질학이나 천문학의 결과가 하나님의 창조방법과 창조의 연대를 알려준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면 오랜 지구 창조론과 진화적 창조론의 차이는 생물의 창조방법에 관해서 하나님이 진화라는 기작을 사용했는지 혹은 즉각적이고 특별한 방법을 사용했는지에 대해 견해차이를 보인다. 오랜 지구적 창조론의 성경해석에 따르면 신이 진화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보는 반면 진화적 창조론의 성경해석은 성경이 진화라는 방법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과학의 결과를 수용하는 면에 있어서도 오랜 지구적 창조론은 진화생물학의 결과들을 거부하지만 진화적 창조론은 진화생물학의 결과들을 수용한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젊은 지구 창조론만이 기독교적 창조론이라는 오해를 넘어서야 한다. 젊은 지구 창조론, 오랜 지구 창조론, 진화적 창조론 세 가지를 창조론의 큰 틀에서 비교하면서 성서와 자연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지 신학과 과학의 공동 작업을 통해서 창조의 방법과 과정을 보다 체계적이고 면밀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과학과 신학의 대화를 통해 창조주와 창조세계를 보다 깊이 이해하는 일은 한국교회에 큰 유익을 줄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과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과학에 대한 신학적 조명이 없다면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과학이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과학의 내용들 중에는 언뜻 보기에 성경과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많다.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창조의 역사로 이해할 것인지 잘 설명해주지 않으면 신앙의 걸림돌이 된다. 혹은 하나님의 창조를 드러내는 과학을 송두리째 버리고 과학이 주는 신앙의 유익을 전혀 누릴 수 없게 된다.
둘째, 창조신앙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이해를 추구하는 면에서 필요하다. 현대인은 고대나 중세시대와 다르게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며 많은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거나 신앙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과학과 신앙의 관계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는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의 공격에 맞서는 전략으로 과학이 틀렸음을 보이는 창조과학식의 방식을 취했다. 하지만 과학계에서 이미 결론이 난 내용들을 비전문가들이 반박하며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효과가 미미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과학이 무신론의 증거라는 과학주의에 대한 올바른 대응책은 과학이 오히려 창조주의 역사를 드러낸다고 해석하고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자와 신학자의 면밀한 대화와 연구가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교회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과학-신학의 대화에 전문성을 가진 과학자와 신학자를 길러내야 한다.
셋째, 과학은 하나님에 관해 배울 수 있는 풍성한 길을 제공한다. 창조주의 손길이 담긴 자연세계를 보면 성경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 많은 양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고 찬양할 수 있다. 시편 기자가 상상도 못한 우주의 구석구석에 대해 배우고 백억 년이 넘는 역동적인 과정을 통해 오래 참으시며 창조의 역사를 펼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다. 과학과 신학을 연결하는 과학-신학의 작업은 우리의 신학과 신앙을 풍성하게 한다.
과학자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하여 우주창조를 보고 배우지만 신학은 과학자가 이해한 우주창조가 누구의 작품이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려준다. 창조를 보는 과학과 신학이라는 두가지 도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면모를 배우고 찬양할 수 있는 시대에 이미 들어와 있다. 분명한 한계를 지닌 과학이지만 과학을 통해 보는 우주창조는 창조주를 면밀히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