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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톰 라이트

메르시어 2023. 5. 12. 11:13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톰 라이트

2016-06-01 22:15:59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

 

프롤로그 :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의 지위

 

1. 최근 들어 교회의 사명과 공동생활에서 성경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 대한 이런 논쟁을 교회와 세상 안의 더 광범위한 이슈들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특정한 성경구절이나 주제에 대한 토론은 물론이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논의조차도 마치 귀먹은 자들 사이의 동문서답에 불과함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언제나 기독교 교회의 삶의 중심이었다. 예수님도 구약성경에 지대한 영향을 받으셨고 초대교회 신자들도 구약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성취하셨는지 연구하고 이해하며 설명하려고 했다. 초기 기독교 문헌들이 본격적으로 수집된 것은 2세기 초 무렵이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헌을 경외감을 갖고 대했으며 여기에 구약성경과 비슷한 지위를 부여했다. 2세기 말에는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나타나 성경을 연구하고 주해했으며 그들은 유대인들의 성경인 구약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근래에 쓴 그리스어 문헌도 성경으로 간주했다.

 

중세 교회 안에 생긴 전통에 대항하기 위해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택한 전략은 성경에 의지함으로써 교회의 근거를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종교개혁에 기반을 두어 생겨난 교회들은 모두 초기 기독교 교부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의 핵심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신들의 믿음과 삶과 신학에 성경이 중심을 차지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여하튼 어떤 기독교 교회도 성경을 단순히 어떤 문제를 논의할 때 참고하는 책 정도로 여겼던 적은 없으며 교회의 탄생 때부터 성경은 예배생활에서 핵심적 지위를 차지했다.

 

2. 그러나 성경은 단순히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자신의 본질과 사명에 충실한 교회라면 항상 하나님의 세상을 향해 열려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화는 성경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문제들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데 나는 복잡하게 서로 맞물린 채, 상호 작용하는 다섯 영역, 곧 문화, 정치, 철학, 신학, 윤리학을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가 이 영역들의 상황을 알고 나면 왜 성경을 사용하는 일이 세상의 인정을 받는 것은 고사하고 교회에서 조차 전체적인 승인과 동의를 이끌어내는데 그토록 어려운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경과 문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문화 사이의 상호 작용은 적어도 서양 사회 안에 불확실성의 분위기를 심어놓았는데 이런 현상은 다음 세 가지 영역에서 쉽게 발견된다.

첫째,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위대하고 오래된 이야기들이 반대에 부딪히고 해체되었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상당히 비중 있는 개별적인 이야기도 제공하지만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정경적 구성 전체로 보면 하나의 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모더니즘은 이런 거대 담론 자체를 거부하며 다른 거대 담론과 마차가지로 성경의 이야기도 누군가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들었다.

 둘째, 진리라는 개념이 공격당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진리를 말하는데 하나는 역사적 사실을 의미하는 진리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사실 여부와 상관없는 다른 차원의 진실이다. 모더니즘 후기를 지배하던 과제는 모든 현상에서 사실을 추출함으로써 인간 담론의 점점 더 많은 영역들을 첫 번째 종류의 진리 속으로 밀어 넣어 압축시키려던 시도였다. 하지만 이런 모더니즘의 시도가 적어도 역사학과 사회학 같은 분야에서 그 정도를 넘어서자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를 정반대의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이 최신 사상은 모든 진리 심지어 실험으로 증명된다고 여겨지는 과학적 사실들조차도 결국은 권력 대결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진리라는 모든 주장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100년 전의 니체의 주장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그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고 하는 모든 진술들이 내가 그것을 보는 방식 혹은 그것을 바라보는 내게 적합한 방식의 다양한 변종들로 간주되고 만다. 우리가 말하는 실체란 객관적 실체가 아니며 한 사회가 그것을 바라보는 상대적인 방식일 뿐임을 주장하는 이 개념은 전제적인 진리 이해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사회적 구성의 관점에서 보면 성경의 주장들을 특정한 시각 그리고 상당히 상대적이며 상황적인 시각으로 축소할 수 있으며 너에게 진리인 것이 나에게는 진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입장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전환은 이제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그 자체가 우리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이고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되어버렸을 정도다.

셋째, 우리는 개인적 정체성의 위기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예전과 같이 쉽게 대답할 수 없게 되었다. 개인은 더 이상 자기 운명의 주인이자 영혼의 지휘자가 아니며 스스로 속을 들여다볼 때 발견하는 것이라고는 충동의 파도뿐이다. 관찰행위 자체가 그 관찰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가 우리 모습을 거울로 들여다볼 때 일어나는 일과 걱정스럽게도 잘 맞아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성경의 선포를 마음과 생각 속에 붙들고 그에 합당하게 살고자 최선을 다하는 일은 오늘날 문화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재의 주류 문화는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뿐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모든 고정된 관점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적인 지적 분위기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는 것, 실체를 이해하는 것,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 전부가 늪에 빠질 위기에 처해있다. 이런 인식론적 회의주의가 지배하는 사고방식은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항상 들이마시고 있는 문화적 공기다. 이런 식으로 세상과 자신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이 곧 삶의 방식이 되어버렸다. 이런 사고의 모든 층위는 일반적으로 성경 읽기에, 구체적으로 교회에서의 성경 사용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어떻게 이 모든 상황을 헤치고 나와 하나님의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안에서 기독교적이고 성경적인 온전함을 가지고 살 것인가? 이 길을 찾는 것이 내가 소망하는 것이다, 

 

성경과 정치

분명히 문화는 정치라는 두 번째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정치에 관한 질문을 외면할 수 없다. 오늘날 서구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해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중요한 선거에 투표하기 보다는 리얼리티TV쇼에 그들의 표를 던진다. 진정한 토론을 억압하고 좌파와 우파라는 획일화된 분류를 강요하는 정치체제는 정당들과 논평자들 그리고 투표자들을 오도하고 있다. 이른 바 정치적 도덕성의 지평도 줄어들었다. 유대인 대학살과 핵폭탄은 지난 50년 동안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구 사회의 모든 도덕적 정치적 논쟁들은 무엇이 틀렸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그것을 바로잡는 법은 전혀 알 수 없는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서 발생했다. 이러한 세상 한가운데서 성경을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성경의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 이야기, 해방과 왕국 이야기, 바벨론 유배와 귀환 이야기, 그리고 예수님의 우주적 주장에 대한 이야기, 요약하자면 하나님나라 이야기가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울림을 만들어 냄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몽주의 이래로 200년 동안이나 성경은 정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책이라는 명제는 자명하게 여겨오는 가운데, 교회는 오늘날의 절박한 정치적인 이슈들을 다루기 위해 성경을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성경과 철학

사람들이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는 각 사회가 맞추고자하는 거대한 퍼즐의 저변에 깔려있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사물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세상 전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세상은 단일체인가 아니면 물질과 정신으로 분리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가? 악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합당하게 사는 것인가? 이것들이 서양철학이 다루어왔던 고전적 질문들 중 일부다 계몽주의는 마지막 두 질문에 나름의 답을 제공했다. 악의 문제는 특히 17세기 종교전쟁과 1755년에 발생했던 리스본 지진을 계기로 첨예하게 부각된 참이었다. 계몽주의가 제시한 새로운 관점이란 세상을 하나님의 영역과 물질적 영역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었다. 위층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아래층은 순전히 인과율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가정하면 하나님은 매일 물질세계를 가동하는 책임을 지거나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여하지 않게 된다. 계몽주의는 하나님을 공식에서 빼버림으로써 그분을 물질세계에 얽매이지 않는 그래서 현재에는 영적 위안을, 미래를 위해서는 영적 소망만을 제공하는 존재로 축소시킨 것이다. 그 결과 세상은 하나님의 품에서 전적으로 인간의 수준으로 넘어온다. 이런 이분법적 세계 이해를 기반으로 하여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자들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수준으로 자연계를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계몽주의의 약속은 실패했다.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지역들마저도 내분에 휩싸였다. 당면한 문제에 대해 소위 이성적인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들 중에는 구소련의 강제수용소나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같은 끔직한 것도 있었다. 계몽주의를 토대로 한 가장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은 세계적인 제국이 되어버렸고 수많은 국가들이 가난한 상황에도 미국은 매 순간 더 부유해지는 모순에 처해있다 이 모든 현존하는 문제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저항운동으로서뿐 아니라 그 자체로 일종의 철학으로 싹터서 자라나게 하는 비옥한 토양을 이루었다. 그 결과 20세기 철학은 거대 담론적 질문에서 돌아서서 한편으로 분석철학으로 또 다른 편으로는 실존주의로 후퇴했다. 하지만 실체는 무시된 채 이미지만이 전부로 여겨지는 가상현실 속에서 굳이 언어 논리에 맞는 이야기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매 순간 나라는 존재 자체를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데 실존적 진정성을 추구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 주류 문화에서 이미 절대적 진리의 객관성을 추구하는 이런 예전 사고방식이 신빙성을 잃었는데도 모더니즘적 사고가 성경 연구에, 신학대학과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는 방식 속에, 그리고 계속 고전들로 여겨지는 많은 책들 속에 뚜렷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인식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 모든 현상들이 이미 벌어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 성경에 대해 이야기 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다.

 

성경과 신학

지난 두 세대 동안 성경 자체에 대해, 다시 말해서 성경 텍스트가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진지한 저술을 남긴 조직신학자나 철학적 신학자가 거의 한 명도 없었다. 종종 조직신학자들은 초기 기독교 신앙에 대한 글을 쓰면서 성서학은 몇몇 그리스 어근을 바로잡아 주는 작업에 지나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면 자신들이 찾고자하는 신학적 아이디어들을 성경 본문에서 발견해낸 성서학자들만이 중요하다는 듯이 굴었다. 성서학자들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도구와 방법을 사용하여 성경에 관한 사실들을 알려주고 조직신학자들은 이 사실들을 해석한다는 식의 옛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아무도 없다. 사실 현대 신학의 상당한 부분에서 성경은 하나의 자료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중요하고 풍성하고 고무적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문제투성이고 곤혹스러운 자료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기독교신학이 어떻게 성경의 권위 아래에 놓일 수 있는지, 동시에 신학이 성경의 권위에 대해 어떤 이론적인 설명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경과 윤리

성경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상당한 양의 토론은 바로 이 윤리의 영역에 집중되어 있다. 윤리에 대한 질문이야말로 지금까지 다룬 모든 영역들을 하나로 엮는 요인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윤리적 질문이 앞서 언급한 문화, 정치, 철학, 신학으로 만들어진 벽에 부딪혀 튕겨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전쟁과 평화에 대한 논쟁이나 성과 젠더에 관한 논쟁이 그것이다. 이 모든 논쟁이 성경과 연관성이 있을까? 있다면 도대체 어떤 연관성을 가질까?

 

3. 우리가 이 다섯 영역의 도전에 직면하여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인의 성경읽기가 압력에 짓눌려 이런저런 모양으로 변형되어서는 안 된다. 외부의 압박 속에서 자신 안으로 움츠러드는 오늘날의 기독교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이 남긴 비유들은 돌파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1세기 유대교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가 낡은 사고를 깨뜨리고 새롭게 하나님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다른 방식의 생각과 기도와 삶을 착안하는 참신한 식견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해석학적 공간을 창조했다. 같은 방식으로 성경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살아서 역동적으로 힘을 발휘하고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을 새롭게 읽고 가르치는 작업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신선한 관점들을 받고 그것으로 현대문화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다루고 비판할 수 있을 것이란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진지한 토론을 하면서 마치 성경구절만 들이대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로마서13장을 가지고 군사 활동을 정당화한다든지 로마서1장을 근거로 동성애 행위를 금지한다든지 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런 식으로 편의를 따라 성경을 읽는 것은 해당 성경구절의 의미와 맥락에 관해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심각하고 진지한 논쟁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 저변에 깔린 중요한 질문, 즉 성경의 권위가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성경을 적절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 어떻게 성경이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가?에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이런 논쟁들은 전통과 이성에 관련하여 성경의 권위를 따졌던 16세기 논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이 다룰 내용을 다시 16세기 논쟁으로 뛰어드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극단적인 혼란을 초래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구분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거나 현재의 질문들과 전혀 일치점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21세기에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특히 새로운 압박과 도전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성경을 지혜롭고 성숙하게 읽고 가르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각자가 깊이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지혜를 활용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현재 우리의 질문들이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했던 것과 동일하다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미지의 바닷가에 서 있다.

 

그러나 직면한 문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논쟁이 다만 얄팍하고 하찮은 수준에서 그치고 마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우리 모두는 상대방에 대한 근본주의니 급진적이니 하는 인신공격과 비방에 그치는 입씨름에 익숙하다 못해 질려있다. 우리 모두는 연좌라는 전술의 수렁에도 깊이 빠져 있다. 성경을 편향된 방향으로 몰아붙일 때도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개인구원이나 이신칭의 교리에 과도한 강조점과 중요성을 부여한 나머지 바울 구원론의 다른 차원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예이다. 반면에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성경은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틀렸다는 식으로 성경의 편향적 사용이라는 경향성이 대담하고 도전적으로 표출된다. 우리가 성경에서 새로운 지혜를 구하고 찾으려 한다면 이 모든 그릇된 경향을 찾아 적합한 이름을 달고 그것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제거해야 한다.

 

성경적 권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다룬 권위 있는 몇몇 저술들이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이 저작들을 통해 우리는 성경이 무엇이지, 성경을 어떻게 문화적이고 지적인 기민함과 정직성을 가지고 읽을 수 있는지, 교회의 삶과 사명 완수에 있어서 어떻게 성경이 자신의 역할을 다할 것인지 하는 질문 전반에 관한 활기차고 진지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연구들은 전형적인 모더니즘적 논쟁 방식에서 비롯된 비생산적인 양자택일적 사고를 지양하는 동시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공하는 고민스러운 해체작업도 거부한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로부터 벗어나 창조적이고 지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들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 책은 새롭게 떠오르는 이런 경향과의 암묵적이고 상호보완적인 대화 속에 자리하고 있다

 

 

1장 성경의 권위는 어디로부터인가?

 

49 성경의 권위란 하나님 자신의 권위나, 예수님의 권위가 성경에 위임되어 중재됨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서 성경의 권위가 기독교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성경의 권위는 성경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의 권위라는 뜻으로 이해할 때만 진정한 기독교적 의미를 갖게 된다.

 

50 이야기라는 성경의 내적 특성은 흔히 우리가 권위라는 단어로 부터 떠올리는 것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52 그러나 이야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즉 이야기는 권력과 권위를 행사한다.

 

54 우리가 성경의 권위에 호소할 때 우리는 성경 저자들 스스로가 주장하는 더 큰 맥락 곧 하나님 자신의 권위라는 더 큰 맥락 안에 성경을 위치시켜야 한다. 56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권위는 피조물 전체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특히 교회에 대한 구체적인 성경의 권위는 방금 말한 더 크고 본질적인 권위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57 하나님이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이루시는데 성경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성경의 역할을 구원과 재창조를 이루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제한하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해설 정도로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성경은 지금도 계속 진행 중인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역동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라는 말에서 충분히 성경적이고 균형잡힌 의미를 발견하려면 오직 이런 기초 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일하실 때 사용하는 수단으로 주어졌다.

 

59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은 세상에 부재하는 군주가 아니라 반대로 세상을 사랑하는 분이자 세상의 심판자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명이라는 개념 속에서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예수님과 성령을 통해 흘러나와 모든 피조물의 치료와 회복이라는 목표를 향하고 있다는 개념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63 성경의 역할이란 주제는 다음 세 가지 사항과 연결된다. 첫째 그리스도인이 경배하는 하나님의 주된 속성이 말씀하시는 분, 즉 자신이 창조한 인간과 언어로 소통하는 분이라는 점. 둘째,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통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생각하게 함으로써 작용한다는 점이다. 셋쩨, 우리가 경배하는 하나님은 세상을 정복하는 자신의 능력 곧 예수님의 부활에서 드러난 그분의 능력을 우리 모두에게 제공한다는 점이다.

 

 

2장 하나님나라 백성 이스라엘과 성경

 

66 의심할 수 없는 악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고 자기 백성들을 구할 것이며 피조물 전체에 대한 자기 목적을 완성하실 것임을 인정한다는 의미다.

67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나님이 행하신 핵심적인 과업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도구가 되기는 커녕 그 문제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구약과 유대사상에서 울려퍼지는 주된 두 가지 질문은 이스라엘은 도대체 어떻게 구원될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떻게 세상 전체가 바로잡힐 것인가하는 물음이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성경의 역할은 과거에 무엇이었고 또 현재는 무엇인가?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이해한다면 권위를 가진 성경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68 이스라엘의 삶에서 성경이 차지하는 역할은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바로 이 사실을 통해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세상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스라엘을 통해 성취하도록 성경을 통해 준비시키신 것이다. 73 성경 저자들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야기하는 목적은 이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세상 안에서 여호와의 목적을 이루라고 부름받은 백성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용기를 고취하려는 것이었다. 74 성경의 권위는 선포되고 기록된 자신의 말씀을 수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을 위해 하시는 주권적인 역사다.


 

3장 예수와 성경

 

78 역사적 맥락에서의 예수 이해는 예수의 사역을 성경 이야기의 절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79 예수 자신도 자신의 사명을 이렇게 이해했다. 80 그러므로 예수가 누구인지는 모두 성경의 내용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예수는 성경이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참 이스라엘이었다. 예수는 성경 이야기의 전체 줄거리가 자신의 사역을 통해 마침내 결실을 맺고 있음을 믿었다. 81  우리가 예수가 스스로를 성경 이야기의 완성자로 의식했다는 맥락에서 벗어난다면 우리에게 예수의 사역들은 매우 혼란스럽게 된다.


 

4장 사도시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86 사도들은 예수 이야기를 구약의 언약 이야기의 완성이자 실현으로 받아들였으며 이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말했다. 87 나아가 그들은 이 복음이 교회를 탄생시키고 교회의 사명과 삶을 형성할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이라고 이해했다. 88 초대교회가 믿었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의 이야기, 특히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서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과 완성을 이룩한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세상에 대해서는 진실을 제시했고 교회에 대해서는 사명의 기초와 행동의 원동력을 제공했다.  89 바울 설교의 핵심은 구약 이야기가 예수 안에서 절정에 도달했고 완성되었으며 그것을 선포하는 행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90 성경의 권위에 대한 기독교 신학의 뿌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에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예수 안에서 절정에 도달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91 하나님의 이러한 말씀이야 말로 교회의 사명과 교회의 일상생활의 중심이었다.


92 신약저자들은 자신의 글이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수단의 일부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그 목적을 위해 글을 썻다. 95 그런데 그들은 구약의 어떤 부분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현재적 삶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는데  96 그 이유는 성경 이야기기 이미 절정에 도달했는데, 구약의 대부분은 그 이야기의 발단과 전개의 앞부분에 속해있기 때문이었다. 97  초기 기독교신자들은 구약시대와 자신의 시대 시이에 존재하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어떤 방식으로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바울이 보기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약속을 성취하는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무너뜨림으로서 땅의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단일한 새 백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모세의 율법 중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명백히 차별하는 규례들은 이제 제쳐놓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98 새 언약이 예수 안에서 성령에 의해 시작되었으므로 이제 초기 신자들은 어떤 부분에서 새 언약이 기존 언약의 연속적 갱신인지, 또 어떤 부분에서 옛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언약인지 파악해야 했다. 언약의 갱신이라는 개념이 새로운 해석학적 긴장을 야기한 것이다.


100  신약의 저자들은 신학적이고 실제적인 성찰 가운데 깊이 뿌리 내린 깨달음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그들은 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로 요약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새 언약, 즉 새 창조의 프로젝트는 불가피하게도 새로운 방식으로 개시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1 예수와 바울의 사역 속에는 예수의 성취와 함께 이스라엘 이야기가 결정적 국면을 맞으며 연극의 새로운 막이 열렸다는 언급이 줄기차게 계속되어 왔다. 이는 마르키온이나 이와 신학적으로 유사한 루터의 사상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다. 종교개혁 사상가들은 구약의 시민법과 의식법들은 폐지되었지만 도덕법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았는데 이런 견해는 구약의 유대인들에게는 근대의 서구적 구분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것임을 망각한 처사다.

 

103 신약성경은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삶의 권위가 되었던 말씀, 그들에게 충만한 생명을 가져다준 말씀을 글로 표현한 것이었다. 105 초기교회에서 신약성경은 그  자체로 새 언약의 계약서로 인식되었다. 이 새롭게 계시된 언약은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 나갈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함으로써, 이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형성되고 개혁되고 변화될 수 있도록 만든다.


 

5장 2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기독교 역사와 성경


108 성경은 하나님나라를 선포할 뿐 아니라 그 나라를 구체적으로 살아낼 수 있는 수단과 자원을 교회에 제공했으며 초기 기독교가 직면한 각종 질문과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도 성경에서 나왔다. 109 초기 기독교는 외부인들에게 스스로의 입장을 설명하거나 자신이 가진 풍성함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성경에 일차적으로 의지하고 호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게되었다. 110  성경에 호소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조적인 차원에서나 세부적인 사항에서 하나님과 세상과 인류에 대한 이른바 새롭게 혁신된 유대교적 견해에 동의함을 의미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이야기에 뿌리를 내린 사람들로 여겼다. 즉 자신들을 이스라엘의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시 창조된 백성이자 이 정체성에 근거해 참된 인간성을 구현하도록 부름받은 자로 여겼다. 그들은 창조주와 언약의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론적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영지주의와 거기서 파생된 플라톤적 이원론 그리고 그리스 로마세계에 편만했던 이교사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야만 했다.

 

111 교회는 예수 시대로부터 당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해서 드러냈다. 이 주장에 의하면 초기교회는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인데, 그 이유는 메시아 예수에 의해 변화되었을 뿐 아니라 여전히 유대교 조상과 연결되어 세상을 바꾸는 동일한 소명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이다. 113 성경의 정경화과정은 단순한 책  선별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차원의 이야기 즉 이야기 전개의 큰 틀을 설계하는 작업이었으며, 이 틀이야말로 하나님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이해하게 하고 그들에게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114  초기교회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지탱해준 것이 바로 정경이었으며, 나아가 교회로 하여금 비기독교 세상이 놀랄만큼 철저한 거룩함을 이루는 일에 헌신하게 만든 것도 바로 정경이었다.

 

115 성경 이야기기 지닌 유대적 요소를 견지하는 것은 교회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향후 몇 세기 동안 교회는 점점 자신과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대교적, 이스라엘적 요소를 잃어버렸다. 그러면서 성경의 권위에 대한 개념도 이야기의 맥락에서 벗어났고, 하나님나라의 차원과도 분리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타난 전통에서 성경을 하나님나라가 세상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역동적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 116 그리하여 성경은 윤리적 차원을 도출하고 새로운 현상을 평가할 때 이용하는 참고서 혹은 지침서로 혹은 경건생활을 위한 영적 독서 교재로 취급되었다.


116 오리게네스 이후 몇몇 신학자들은 알레고리를 성경 이해의 주된 기술로 삼았다. 119 알레고리적 해석 안에는 교회가 성경과 함께 성경의 권위 아래 살아야 한다고 고집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지만 다른 차원에서 보자면 면  성경 자체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는데 실패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측면도 있다. 120 알레고리적 해석은 성경에서 내러티브적 요소를 제거하고 비유대적인 방식으로 성경을 읽도록 부추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는 더 많은 것을 상실할 위험성을 항상 안고 있었다. 알레고리적 주해는 성경에서 내러티브의 중요성과 우선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근본적 경향의 한 증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121 초기 성경 해석자들이 제시했던 알레고리적 주해는 중세 내내 계속되었고 또 상당히 정제되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알레고리적 주해로부터 중세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체계적 방법론이 "네 개의 의미"인데, 그것은 성경 텍스트를 네 개의 다른 층위의 의미, 즉 문자적, 알레고리적, 신비적, 도덕적 의미로 구분하는 것이었다.    122 이런 의미의 체계를 고안했던 신학자들은 성경이 일견 파악하기 어렵고 부조리하게 느껴지는 때에 성경에 의해 그리고 성경 아래 사는 것이 교회의 의무이고 부르심이라는 신념을 실천하려는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으며 신앙의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여 일관된 의미를 얻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정작 성경 자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125 중세 교회 안에서 성경의 네가지 의미가 중요해질수록  성경과 나란히 전통도 평행적 권위를 지닌다는 주장이 더불어 강화되었고 따라서 전통을 발전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교회의 권위도 점점 더 강조되었다. 16세기경에 이르러서는 전통은 성경의 필수적인 보충서로서, 성경을 해석하는 해석학적인 틀로 여겨졌다.     126 "오직 성경으로"라는 종교개혁자들의 슬로건은 그들이 경험한 중세의 타락에 대한 항변이었다. 127 그리하여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교회의 전통과 대립시켰으며 교회가 보유한 네가지 의미 중 문자적 의미의 회복을 도모했으며 다른 세가지 의미들의 무질서한 발전을 문자적 의미가 확립되는데 해로운 요소로 간주했다.    129 종교개혁자들에게 문자적 의미란 텍스트의 원저자가 의도한 뜻을 가리킨다. 130 종교개혁자들에게 문자적이란 단어는 비유적에 대립하는 문자적이 아니라 중세의 네가지 의미중 다른 세가지에 대조되는 문자적 의미라는 점이다. 만일 이런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성경해석이 있다면 이런 해석은 결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다.

 

131 비록 종교개혁자들이 비성경적 전통을 또 하나의 권위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초기 기독교 교부들의 권위에 호소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장이 중세 이전의 권위있는 성경해석과 연속선상에 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132 이 점은 종교개혁자들 자신도 성경과 전통의 양극화가 초래한 곤경으로부터 멀리는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이 강조했던 내용은 고작 이전에 존재하던 것 중 최선의 것과 자신들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성경 자체와 교회가 성경을 읽으면서 말해왔던 전통들이 조화롭게 통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종교개혁자들의 비판에 대응하고자 로마가 1546년에 소집한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경과 전통을 동일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천명했다. 400년 후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역사 성경과 전통은 동일한 신적인 샘물에서 흘러나와 하나로 합류되고 동일한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고 선언한다. 반면에 종교개혁자들은 어떤 전통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은 오직 성경뿐이라는 견해를 취해왔다. 133 권위에 대한 이런 개념 이해는 종교개혁자들이나 그 반대자들 모두 권위를 일차적으로 권위적인 판결을 받기 위해 가는 장소라는 개념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이런 개념 변경 내지 축소는 어떻게 성경이 하나님의 역동적 구원의 능력을 지니는가하는 물음에 답하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134 성경 자체를 두고보면 극히 중요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자들이 신경써서 강조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성경이 하나님, 이스라엘, 예수, 세상에 관한 거대 담론적 내러티브라는  사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날까지 그 진행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에 있을 궁극적 회복을 기다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과 세상에 관한 거대담론적 이야기가 예수님의 죽음에서 극적인 전환을 맞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통찰을 더 발전시켜 성경의 이야기가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진행되는 하나님나라 이야기, 곧 그 후반부에서 우리 자신도 합류하게 되는 이야기라는 강력한 개념에 도달하는데 그다지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35 복음서 해석을 예로 들면, 종교개혁자들은 복음서를 예수의 교훈을 모아놓은 저장 창고로만 여길 뿐, 그 외의 다른 것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이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마무리 되긴 하지만, 이 사건들이 앞서 있던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는 통합되지 못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중요한 지적들을 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논의의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만약 종교개혁자들이 오늘날 우리 시대로 돌아온다면 절대로 자신들의 생각과 해석이 모두 맞으니 우리가 그들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우리에게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성경이 세상 속에서 교회를 통해 자신의 일을 펼치도록 하라고 말할 것이다. 136 나아가 그들은 우리가 가진 모든 도구를 동원해 성경이 인도하는대로 따라 가라고 독려할 것이며 성경 자체가 장려하는 한 종교개혁 전통을 포함한 모든 전통들에 이의를 제기할 준비도 하라고 충고할 것이다.


 

 6장 계몽주의의 도전


145 그리스도인으로서 근대적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이 애매모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계몽주의의 주장 어떤 것을 거절하고 어떤 것을 수용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146 지난 200년간 성경에 대해 쓰인 책 중 대다수는 계몽주의에 대한 반발이든지 수용이든지 아니면 중간지점의 타협이든지였다. 147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역사주의적 성서학이 특별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것은 성경을 역사적 관점에서 읽어 성경이 본래 의도한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충실한 성경해석은 필연적으로 기독교의 핵심주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킬 수 밖에 없음을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149 우리는 역사학의 필수불가결성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텍스트의 해석이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그 텍스트가 본래적으로 의미하는 바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의 독립성을 인정해서는 안된다. 이성을 상당한 정도로 절대화하는 이런 계몽주의적 견해는 기독교의 핵심적 신조들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경멸했다.

 

159 성경의 권위를 인정한다면 절대 우리는 성경의 의미를 알고 있고 그래서 더 이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각 세대의 교회는 새로운 힘을 가지고 새로운 노력을 기울여서 성경을 더 충만한 분량에까지 이르해고자 또한 성경을 따라서 더 철저허게 살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라면 그동안 소중히 간직한 전통을 거스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160 성경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특정한 종류의 후기 계몽주의적 서구 세계관에 가두어버린 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165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자는 나의 제안 속에는 전근대적 해석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에 대한 반대를 포함한다. 내 제안의 핵심은 진지한 역사적 연구를 위해서는 모더니즘의 한계를 벗어나 더 멀리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성경에 대한 모더니즘적 비판의 상당부분이 실은 해석자가 자신의 이질적인 세계관을 텍스트에 투사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167 포스트모더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계몽주의 자체의 해체였다. 이런 사상적 경향에 따라 성경 텍스트에 대해서도 온갖 종류의 참신한 해석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모두 성경 안에서 억압을 위한 무기로 의심되는 성경구절들을 찾아내어 고발했으며 애초에 성경이 기록되는 과정에서 근본적으로 악한 의도가 있다고 의심되는 텍스트도 찾아내려고 했다. 169 이런 해체주의적 해석들은 텍스트가 해석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제시했지만 그로 인해 정경 내에서 일부 텍스트가 제거되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170 포스트모더니즘이 서구의 성경해석에 미친 영향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종말론적 주장과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해법을 멸시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173 내러티브적인 동시에 비판적 실재론에 입각한 성경해석이야 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수렁을 빠져나와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안이다. 교회가 이런 해석방법을 통해 성경을 다시 생명력있게 다시 읽는 일은 무엇보다 급박한 과제이다. 왜냐하면 현 세대를 지배하는 거대 제국은 자신의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 의지를 지속적으로 강요하는데, 오늘날 문화전쟁에서 급진적 입장을 떠들어대는 자들은 목소리만 클 뿐, 이 제국주의적 움직임을 막는데는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174 오늘날 교회의 권위를 말할 때 흔히 강조되는 것이 경험의 중요성이다. 176  그러나 경험은 성경의 권위를 구성하는 요소가 될 수 없다. 경험은 권위의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도 미끄러운 개념이다. 실로 경험에 대한 강조는 오늘말 서구 전역에서 발견되는 경험위주의 다원주의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77 우리가 다뤄야 할 더 깊은 문제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경험 자체가 바로 성경의 권위에 순복해야 하는 대상이며 성경의 권위가 발휘되는 정황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경험을 권위로 여기는 것은 권위라는 단어 자체가 해체됨을 시인하는 것이다. 우상숭배적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도전을 약화시키는 이런 권위의 해체야 말로 바로 계몽주의가 추구한 반기독교적 목표였으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속에서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만약 경험 자체가 권위의 근원이라면 더 이상 우리는 우리 밖에서 우리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신학과 기독교적 삶 자체가 우상이 되어 버리고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이 만든 거짓으로 바뀌게 된다. 178 경험의 긍정적 측면은 경험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맥락을 구성한다는데 있다. 그러나 이때 경험은 절대로 하나님의 권위가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현상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경험을 말할 때 우리는 세상 뿐 아니라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악의 존재도 고려해야 한다. 바로 이 악의 존재때문에 우리는 경험이란 주관성의 공간 안에 있으면서도 바로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아야 한다.


 

7장 오늘날의 잘못된 성경해석들


190 최근 북미에서 나타나는 성경해석에 대한 좌파와 우파의 논쟁의 양극화 현상은 문화적으로 이미 규정된 성경 전쟁에서 생겨났다. 성경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견해는 성경에 대한 모든 해석은 다수의 가능한 해석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 입장에 의하면 텍스트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해석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오류다. 나는 비판적 실재론적 해석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충분히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진정한 역사적 이해에 대한 정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191 비록 고대 문헌이 우리와는 아주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텍스트라고 해도, 우리가 그 텍스트이 저자와 지속적이고도 정직한 대화를 시작한다면 역사적인 측면에서 더 나은 해석이 나올 것임을 분명하다. 192 진정한 역사는 가능하다. 진정한 역사학자들은 항상 이 일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역사를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과 과거에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연구라는 두 가지 요소로 볼 때, 역사라는 영역은 적절한 도구를 사용하여 조사되어야 할 하나님의 세상의 일부분이다. 진정한 역사는 진정한 신학과 통합되어야 하며 진정한 신학은 역사학자들의 임무 안에 존재하는 타당성과 긴박성을 더욱 강조하며 재촉할 것이다. 기독교 좌우파의 양극단의 잘못된 해석들에 대한 치료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으로부터 빠져나올 방법의 모색은 긴급하면서도 어려운 도전이다.


 

8장 어떻게 제자리로 돌아올 것인가?

 

196 성경의 권위라는 표현에 대한 통합적인 견해가 시급히 필요하다. 이런 통합적 견해에는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로서 성령의 역할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그 비전의 중심에는 하나님나라가 궁극의 목표로서 자리잡고 있어야 하며 교회는 하나님나라 이미지의 중심부에 위치해야 한다. 197 성경의 권위라는 압축된 개념은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전능한 구원 계획의 그림에서 나온다. 이 구원 계획은 예수님에 의해 극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성경을 읽는 공동체로 정의되는 집단인 교회가 성령의 이끌림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으로 실현될 수 있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하기 위해서는 세상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198 우리가 성경을 읽는 목적은 우리가 이미 맡은 배역을 실현하며, 참가하고 있는 이야기를 새롭게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다. 더불어 이 이야기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그래서 그 목적지에 비추어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들고갈 복음이한 바로 살아있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악의 세력을 쳐부수고 새 창조의 일을 시작하셨다는 선언이다. 199 이 궁극적 목적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능력과 기록되고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결합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기독교 역사를 통틀어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설명하고 적용함으로써 모든 일이 진행됐다. 따라서 성경의 권위는 우주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에서부터 개인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나라가 성취된다는 목적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성경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권위를 가졌음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가 교회생활을 재정비하여 교회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교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그분의 역사인 동시에 모든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순복하라고 촉구하는 그분의 도전임을 발견할 수 있다.

 

201 전통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의미는 교회가 과거에 성경으로부터 어떻게 성경을 읽었으며 어떻게 성경을 따라 살았는지에 대해 주의 깊고 겸손하게 하지만 무비판적인 태도는 지양하며 경청함을 뜻한다. 202 전통과 더불어 살며 전통에 비추어 성경을 읽는 과정이 시작된 것은 기독교 역사의 아주 초창기부터이다. 203  그러나 전통과 더불어 살 때 직면하게 되는 도전은 전통과 성경이라는 두 개의 흐름을 하나로 합류시키는 일이 아니다. 전통은 전통으로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전통은 우리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전통보다는 성경이 더 좋은 안내자이다. 이성의 역할은 자의적이거나 변덕스러운 텍스트 해석을 배제하고 텍스트의 어휘론적, 컨텍스트적, 역사적 차원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것이다.또 이성은 생물학과 고고학, 물리학과 천문학 등의 분야에서 이뤄진 엄청난 발견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또 환영함을 의미한다. 물론 현대 과학의 성과에 개방적이라고 해서 무신론적이고 이성주의적 과학의 압력에 굴복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성은 성경과 전통을 대체할 수도 없고 그것들로부터 독립된 근원이 될 수도 없다. 이성은 우리 자신의 목소리의 공허한 메아리라기 보다 성경과 전통에 귀 기울이는데 필수불가결한 보조장치이며 도구인 것이다.

 

206 우리에게는 성경에 대한 다층적인 견해가 필요하다. 우리는 성경의 장르, 배경, 문학적 스타일 등의 핵심적 중요성을 인식할 뿐 아니라 이런 요소들이 텍스트 해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207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지점은 구약과 신약의 중대한 차이점이 무엇인지 또 이러한 차이가 왜 존재하는지,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고 의미하지 않는 바는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해석의 모델에 따르면 성경 전체의 드라마는 창조-타락-이스라엘-예수-교회라는 5개의 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이것이 성경 자체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드라마의 다섯 단계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 5막으로 이뤄진 드라마 중에서 우리 위치가 어딘지, 각 막에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208 성경 및 성경과 우리의 관련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 텍스트의 의미를 조명해주는, 전체를 포괄하는 이야기에 비추어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을 시간을 초월한 진리의 집합이나 경건 생활을 위한 연료 정도로 축소하는 태도는 성경 자체에 지극히 불성실한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이 5막이라는 해석 모델 전체는 성경의 권위가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한 다층적 견해의 핵심이 된다. 다섯번 째 막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의 네개의 막들과 모호한 관계를 지니는데 이는 과거의 막들에 대해 불성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여 지나간 막들을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존중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맡은 순간들에 충실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이전 막들과의 직접적 연관성이 유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연속성은 동시에 불연속성도 암시한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순간에는 진정으로 새로운 것들, 즉 지금까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여 전체를 질적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에 흘러간 것들에 철저하게 충실해야 하며 동시에 앞으로 올 것들에 대해 생동감있게 열려 있어야 한다. 212 예수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는 이스라엘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인 네번 째 막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 네번째 막은 우리가 등장하는 다섯번째 막의 기초가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등장하는 다섯번째 막의 주된 임무는 예수 이야기를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 그리고 창조주가 자신이 만든 세상을 구원하는 이야기의 초점으로 선포하고 전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번째 막을 산다는 것은 이전의 모든 막들의 내용을 전제하는 것이며 우리의 역할이 이 이야기가 최종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매개 역할을 하는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213 이것은 우리가 신약과 맺는 관계는 구약과 맺는 관계와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은 거룩한 성경을 구성하는 중요하고 포기될 수 없는 일부이며 신약은 우리가 위치한 이 다섯번째 막의 설립 헌장이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이상 우리는 예수의 이야기를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으로 또한 우리 이야기의 토대로 선포하는데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214 신약을 여전히 끝나지 않고 열려있는 막으로 그리하여 앞으로도 지속될 연극의 다섯번째 막으로 보는 태도와, 신약에 대체될 수 없는 텍스트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자세는 진정한 기독교 제자도의 핵심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매개로 하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 산다는 것의 의미다.

 

216  지금부터 나는 성경의 권위, 즉 성경을 통해 발휘되는 하나님의 권위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본래 의도된 대로 역동적으로 작용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선교사명을 감당하도록 교회에 힘을 북돋우고 또 이 사명에 따라 교회 생활을 재정비하는지에 대해 적극적인 제안을 하고자 한다. 217 먼저 우리는 컨텍스트를 온전히 고려하여 성경을 읽어야 한다. 각각의 단어는 그 단어가 위치한 성경 구절 내에서, 각각의 성경구벌은 그것을 담고 있는 성경의 장 안에서, 각각의 장은 그것이 속한 책 속에서, 각각의 책은 그 책이 쓰인 역사적, 문화적, 정경적 배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18 하지만 성경의 컨텍스트와 더불어 성경을 읽는 독자인 우리가  처한 컨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경이 놓인 컨텍스트를 이해하는 동시에 성경의 독자인 우리의 컨텍스트를 면밀히 이해하는 것, 이렇게 컨텍스트를 온전히 이해하며 성경을 읽으려는 프로젝트는 절대 마무리될 수 없는 작업이다. 220 사실 컨텍스트를 충분히 고려하는 해석은 텍스트와 독자가 지난 충만한 인간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성육신적 성경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사례연구 1 - 안식일

 

안식일 계명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을 형성한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개의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바로 창조와 출애굽 사건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준수를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들 중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신약 시대로 오면 모든 것이 다 변한다. 바울은 음식법과 할례법의 무효화르 주장했고 안식일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안에서 지켜야 할 계명의 목록에서도 안식일 준수를 아예 빼버린다. 복음서에서도 예수님은 안식일 규정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듯 묘사된다.


하나님이 엿새동안 하늘과 땅을 창조하는 일을 마치시고 그 다음 날 인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이 진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존 윌튼은 고대 근동의 자료에 대한 세밀한 연구를 통해 고대인들에게 어떤 신이 엿새동안 무엇을 창조했다면 그것은 신이 스스로가 거할 장소인 성전을 만든 것을 의미하고 일곱째 날 작업을 멈추고 휴식을 했다는 것은 신이 자신이 만든 집에 들어가 그것을 주거지로 정하고 그것에서 쉬며 기쁨과 충만함을 누린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말한다. 이런 월튼의 통찰은 창세기의 인식일 제도에 대한 참신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안식일은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의미이며, 하늘과 땅을 자신의 거처로 정하고 만족스러워한다는 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