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태복음 6:33)

메르시어 2023. 5. 11. 17:14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태복음 6:33)

2016-05-13 21:50:44


    하나님의 의(tzedakah)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중심 주제인데,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근거한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을 지칭하는 전문 단어다. 그러므로 언약을 떠나서 하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은 블가능하다. 레위기의 중심 주제인 거룩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 레위기의 중심 메시지인데, 여기서의 거룩도 언약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므로 이스라엘도 언약에 신실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일차적인 의미이다.  이렇게 "의" 혹은 "거룩"이란 단어의 일차적 용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근거한다. 여기서 파생된 용례가 도덕적 윤리적인 의미를 갖는데,  예를 들면 의로운 행동이나 말, 의로운 사람 같은 경우에 여기서 의라는 것은 옳은 혹은 선한 행위를 가리키고 거룩한 삶, 거룩하다와 같은 경우에 거룩은 윤리적이나 도덕적 구별됨, 탁월함을 의미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파생적 용례는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일차적인 용례인 언약적 신실함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옳음, 선함, 윤리적, 도덕적 탁월함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근거한 언약법인 율법에 기준하여 판단된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로서의 율법이 그런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자신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에게도 의를 요구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이다.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의로우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의인 것이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의인으로 간주된다.  우리는 신약에서 사용하는 이런 "의"라는 개념이 구약과는 다른 개념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유대인들인 신약 저자들이 "의"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들은 당연히 구약에서 면면히 이어온 언약적 신실함이란 개념을 전제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6장33절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먼저 산상수훈의 맥락에서 찾아보아야 한다. 지금 이 말씀이 등장하는 문맥에서 주된 교훈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염려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런 염려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방인들의 염려일 뿐이고,  하늘 아버지가 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불필요한 염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는 그런 염려를 하지말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고 말한다.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이렇게 대조되어 있다. 이런 문맥 속에서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가리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여기서도 하나님의 의라는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은 언약백성인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신실하셨듯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된 신약의 이스라엘에게도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를 책임지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로 이방인처럼 염려하지 말고 자기 백성의 생존을 책임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 이것이 바로 그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신실하심으로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다스리시는 나라다. 그러니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도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과 다른 의미가 아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그리고 그 의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의지하고 추구해야 할 일이다. 먹고 사는 염려는 인간으로서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산상수훈은 그것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려는 것과  같으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염려하지 않으려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신실하심으로 다스림을 받는 그 나라의 백성임을 깊이 자각할 때 우리는 세상의 먹고사는 염려에서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살하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언약적 신실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