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민수기의 내러티브

메르시어 2023. 5. 11. 16:45

민수기의 내러티브

2016-04-16 14:31:13


민수기 1장

민수기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둘째 해 둘째 달 첫 날에 시작된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온지 13개월째 되는 날이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출애굽 한지 3개월되던 날이고(출19:1) 성막을 완공한 날이 툴째해 첫째 달 초하루(출40:17)이니까 민수기는 성막을 완공한 후 한 달이 지난 시점이다. 그러니까 레위기의 기록은 성막 준공 후 약 한 달 기간에 주어진 각종 규례들이라고 볼 수 있다. 성막이 완공되고 레위기의 규례들이 주어진 후에 이제 이스라엘은 약 10개월 동안 머물렀던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으로 행진할 준비를 하고 있다. 출애굽 후 언약을 맺고 성막을 짓고 언약의 규례가 주어진 것은 모두 가나안에서의 삶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목표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며 가나안에서 언약적 삶을 살아내는 것이었다. 이것이 출애굽의 이유며 언약을 맺은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이제 당연히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향하는 채비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채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싸움에 나갈 만한 자들을 계수하고 그들을 지파별로 조직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을 주시마고 약속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전쟁을 통해 그 땅을 얻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의 순종과 관계없이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 약속을 믿고 순종해야지만 이뤄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나라의 불변하는 진리를  본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진리다. 레위인은 계수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의 임무는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막과 모든 기구들을 관리하고 운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인은 증거의 장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회중에게 여호와의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민수기 2장

각 지파별 진 배치가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 지고 있다.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각 지파의 진들이 배치된다. 출애굽기에서 성막이 지어지고 레위기에서 각종 언약규례가 주어진 것은 일종의 내적인 준비였다면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의 지파별 군사조직과 진영 배치 그리고 지휘관들의 선발은 외적준비에 해당한 것이다. 내적인 준비가 먼저 끝나고 외적인 준비가 이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진배치가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된 것도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라는 내적인 원리가 외적 조직에도 반영된 것이다.

 

민수기 3/4장

제사장과 레위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성막에서 봉사하는 일을 맡은 제사장 그리고 제사장을 돕는 역할을 하는 레위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중보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언약에 봉사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가 맺은 언약이다. 성막 봉사에 전적으로 드려진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신한 지파였다. 그래서 레위지파를 계수할 때는 일 개월 이상된 남자를 계수했고 이들이 이스라엘 전 공동체의 장남들을 대신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지파가 여호와께 드려진 것은 곧 이스라엘 전체가 여호와께 드려진 것을 의미했다. 레위지파는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 자손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역할이 주어지고 있다. 성막에 봉사할 자로 삼십오세 이상 오십세까지의 남자가 계수된다.

 

민수기 5/6장

이 이야기는 앞장의 이야기와 상관이 없이 이야기의 흐름을 끊는 듯한 느낌이 난다. 그러나 민수기의 저자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앞 이야기와 밀접하게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앞 장들에서는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기 위한 외적인 준비를 한 것이라면 5/6장에서는 그런 외적 준비의 내적 원리가 무엇인가를 다시금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모든 것의 토대이고 원리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진영 안의 부정을 처리하고 죄 값의 처리, 아내의 간통에 대한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 등에 대한 언급은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특별히 여기서 소개된 나실인 제도는 매우 획기적인 제도인데 그것은 여자를 포함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오직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에게도 차별없이 주어진 제도가 나실인 제도이다. 그리고 나실인 제도는 철저하게 자발적이라는 점이 톡특하다, 자발적이라는 점에서는 의무적인 봉사였던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 더 뛰어난 제도가 나실인 제도였다. 나실인 제도는 자발적인 서원으로 이루어지지만 일단 서원을 한 후에는 그것은 엄격하게 지켜져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 서원은 여호와께 드린 서원이며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에 기반한 서원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한 모든 외적인 준비는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라는 내적 원리에 기반한 것임을 나실인 제도는 잘 보여준다.  나실인 제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얼마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헌신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헌신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아론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에 신실한  이스라엘 자손에세 축복할 때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마고 약속하신 것이다.

 

민수기 7장

다시 이야기는 외적인 준비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각 지파별로 우두머리가 선발된 후에 각 지파들의 우두머리가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하루에 한 지파씩 12일에 걸쳐 12지파가 헌물을 드리고 있는데 이 헌물은 레위인에게 주어지고 그들이 맡은 직임에 따라서 회막봉사에 쓰여진다.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이렇게 힘을 써서 헌물을 드리지 않으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성막 봉사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실제적인 성막 봉사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는 것이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막 봉사의 실체는 이스라엘 공동체요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여 성막 봉사를 하는 역할을 맡았을 뿐이다. 각 지파별로 정성껏 헌물이 드려진 후에 여호와께서는 증거궤 위 속죄소 위의 두 그룹사이에서 모세에세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장소를 이렇게 정밀하게 지정하여 묘사한 것은 여기가 처음인데 이것은 성막이 완공된 후에 여호와께서 지성소에 임재하여 계셨음을 의미할 것이다. 이렇게 각 지파별로 헌물이 드려진 때는 성막이 완공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이었다. 그러니 성막이 완공된 후에 여호와께서는 지성소에 임재하시며 이스라엘 공동체가 정성껏 드린 헌물을 받으신 것이다.

 

민수기 8장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공동체의 헌물을 받으신 후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일곱 등잔을 등잔대 앞으로 비추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등잔대는 금 한덩어리를 쳐서 밑판에서 그 꽃까지 쳐서 만들 것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다. 등잔대가 비추는 것은 등잔대 앞에 놓은 진설병 상이었는데 진설병 상에 놓인 열두덩이의 떡은 이스라엘 공동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금 한덩어리를 쳐서 만든 등잔대 역시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설병과 등잔대는 모두 성소에 놓이는데 지성소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라면 성소는 이스라엘이 임재하는 곳이다. 이렇게 서로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각각 지성소와 성소에 임재하여 성막 안에서 언약적 만남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공동체의 헌물을 받으신 하나님이 지성소에 임재하신 후에 이어서 성소에 놓여진 일곱 등잔이 등잔대 앞 곧 진설병 상을 비추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 12지파가 합심하여 헌물을 드리듯이 이스라엘이 언제나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할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공동체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레위인을 세우는 정결의례도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신하는 지파로서 레위인의 헌신은 곧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헌신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레위인의 헌신에 대한 규례는 곧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에 대한 규례라고 볼 수 있고, 이것 역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공동체적 언약이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 9장

성막이 출애굽 후 다음해 첫째 달 초하루에 준공되었으니 이스라엘은 모두 기쁨으로 그 달 10일에 두번째 유월절과 14일부터 7일간 무교절을 지켰을 것이다. 성막을 세운 날에 낮에는 구름이 성막을 덮었고 밤이 되면 볼모양 같은 것이 성막 위에 있었다. 성막을 덮은 이 구름이 이제 이스라엘의 행진을 인도하게 된다.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를 때는 이스라엘 자손이 행진했고 구름이 머무르는 곳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다. 첫번째 유월절 이후에 여호와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왔듯이 이제 두번째 유월절 이후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으로 향하는 것이다.

 

민수기 10장

유월절 둘째해 둘째 달 스무날에 구름이 증거의 성막에서 떠오르매 드디어  이스라엘 자손은 오래 머물던 시내산을 떠나 가나안으로 출발한다. 이제 이스라엘의 날짜의 기준은 애굽에서 나온 유월절을 기준으로 제시되는데 이는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이 바로 유월절이기 때문이다. 유월절이 없다면 이스라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이 이스라엘의 목적은 아니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출애굽이 없이는 이스라엘이 없지만 가나안이 없이는 출애굽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나팔을 만들라 하시고 나팔소리로 이스라엘의 행진을 지휘하게 하시는데 이 나팔을 부는 사람은 모세도 아니고 각 지파의 우두머리도 아니며 오직 제사장이 나팔을 분다. 그 나팔은 이스라엘 회중을 향해서도 불지만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할 때도 분다. 그러니 제사장은 회중을 향해서도 나팔을 불고 여호와를 향해서도 나팔을 부는 것이다. 제사장이 회중을 향해 나팔을 부는 것은 제사장이 여호와를 대신해서 나팔을 부는 것이며 이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인도하시는 분이 여호와이심을 의미할 것이다.  또 제사장이 여호와를 향해 나팔을 부는 것은 회중을 대표해서 여호와께 부는 나팔일 것이다. 이렇게 서로를 향해 나팔을 부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대단히 쌍방적임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회중에게 나팔을 부실 뿐만 아이라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향해 나팔을 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나팔을 부심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나팔을 불 때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대적에게서 구원하신다. 광야 길을 출발하면서 모세는 광야의 지리에 익숙한 호밥의 도움을 기대했지만 정작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이는 호밥이 아니라 여호와를 상징하는 언약궤였다. 제사장이 멘 언약궤는 행진의 맨 앞에 이스라엘 앞서 가며 그들을 인도하고 그들의 쉴 곳을 찾았다. 언약궤가 떠날 때 이스라엘도 떠났고 언약궤가 쉴 때 이스라엘도 멈추어 진을 치고 쉰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언약궤가 앞서갈 때 여호와께서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라고 기도했고, 언약궤가 멈추어  설 때는 이스라엘 가운데 여호와께서 돌아와 임하시길 기도한 것이다.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늘 함께 하는 언약궤는 여호와께는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언제나 신실하신 분이심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민수기 11장

메추라기 사건으로 인한 여호와의 진노는 그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단지 만나에 싫증 난 이스라엘이 고기를 구한 사건이 아니었다. 차라리 그런 인간적인 식욕의 문제라면 하나님은 진노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이스라엘의 상황을 동정하고 그들의 식욕을 채워주셨을 것이다. 문제는 그들이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고 말하면서 심지어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는가라고 불평하고 원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한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회중의 원망으로 인해 모세도 마음이 괴로웠고 무거운 짐을 홀로 져야 하는 고통으로 여호와께 원망을 했지만 모세의 원망과 회중의 원망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모세의 원망이 지극히 인간적인 원망이었다면 회중의 원망은 언약을 배반한 원망이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의 원망에는 귀기울이시고 기꺼이 대안을 제시해주셨지만 화중들에게는 크게 진노하신 것이다.

 

민수기 12장

모세에게 인간적으로 가장 가까운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가나안을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동체 안에 문제들이 속출하고 있고 이것은 모세에게 큰 골치거리였을 것이다. 그들이 모세를 비방하는 요점은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도 말씀하신다는 것인데 이런 생각은 아마도 11장에서 모세의 원망에 대한 대안으로 하나님이 70장로들에게도 모세에게 부어주셨던 영을 부어주신 사건으로 인한 것인 듯 하다. 모세에게만 주어지던 하나님의 영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어지는 것을 본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독보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이 문제에도 직접 개입하셔서 모세가 특별한 위치에 있는 하나님의 종임을 확증하여 주신다. 모세에 대한 도전은 여호와를 멸시한 것으로 간주되었는데 이는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독보적인 지도자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민수기 13장

이제 가나안 땅에 접근하였고 그 땅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여호수아와 갈렙 외의 나머지 정탐꾼들의 보고는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그들의 보고 요지는 그 땅은 좋은 땅이지만 그 거주민은 강하고 그 성읍은 견고하기 때문에 그들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갈렙은  그들과 달리 이스라엘이 능히 이길 것이라고 말한다. 똑같이 정탐을 하고 왔는데 어떻게 이렇게 정반대의 의견이 나올 수 있는가? 그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일 것이다.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다른 자들은 그 약속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갈렙이 본 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다른 자들이 본 것은 가나안 거주민들의 강함이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치 않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행한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이 정말 실감이 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민수기 14장

정탐꾼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회중들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했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또 애굽 이야기를 꺼냈다. 차리리 애굽 땅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며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다고 말한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며 애굽으로 돌아가겠다는 회중들의 말은 출애굽 이후 여호와께서 행하신 모든 역사를 부정하는 말이며 여호와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언약을 맺으신 목적을 부인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언약에 대한 전면적인 배반이며 언약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시며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는 것인데 지금 이스라엘의 말과 행동은 이 모든 것을 부인하는 도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을 전염병으로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백성을 세우시겠다고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제 존재해야 할 이유를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을 간곡하게 설득했고 하나님은 모세의 설득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이신다.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한 요지는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었다. 이스라엘의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모세의 호소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약에 불신실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기로 작정하신다. 그러나 이제 출애굽 1세대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여호와의 약속을 믿지 않고 여호와를 멸시한 출애굽1세대는 약속의 땅을 보지못할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40년동안 방황하다가 광야에서 죽을 것이다. 40년이라는 잔혹한 광야의 시간이 이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시간은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2세대가 준비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애굽을 알지 못하는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이며 출애굽 1세대의 실패를 목도한 자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실 것이다. 이 사건은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함께 언약에 불신실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엄중한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약속하실지라도 그 약속을 누리는 자는 오직 그 약속을 믿는 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이는 믿음도 없지만, 약속은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며 믿음을 통하여 성취된다는 진리를 이 사건은 잘 보여준다.

 

민수기 15장

정탐꾼 사건으로 이스라엘은 일대 위기에 처했으며 출애굽1세대에게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선고가 내려졌다. 그런데 15장의 분위기는 14장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15장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경우는 상정하고 제사법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좌절하고 절망에 빠졌을 출애굽1세대에게 15장은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자신들은 가나안에 못들어 가지만 15장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자식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출애굽2세대들에게 순종을 교육해야 한다. 그것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출애굽1세대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다,. 자식들이 자신들과 같은 실패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출애굽2세대에게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옷단 귀에 술을 만들어 그 술을 볼 때마다 방종한 이스라엘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이 사실을 이스라엘은 잊지 말고 마음에 새겨야 한다. 그럴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답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민수기 16/17/18/19장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이 당을 지어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다. 12장에서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를 대적한 이후 대규모의 반역이 조직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정탐꾼 사건 이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불만, 그리고 레위인들이 제사장을 돕는 자신들의 보조적 역할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듯 하다. 흥미로운 것은 13절과14절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이 각각 나오는데 앞의 것은 애굽을 가리키고 뒤의 것은 가나안을 가리킨다는 점이다. 모세와 아론을 대적한 자들은 모세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끌어낸 것에도 불만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도 모세의 책임으로 뒤집어 씌우고 있다. 여호와께는 이 반역 사건에 즉각 개입하시어 그들을 엄중하게 징벌하심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 잡으신다. 이어지는 아론의 지팡이 이적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를 엄격하게 구별하시며 제사장을 회중의 대표로 세워 여호와께 나오게 하셨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18장에서도 제사장과 레위인의 책임과 권리를 다시금 자세하게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정탐꾼 사건, 모세와 아론에 대한 반역으로 인해 이스라엘 회중들은 여호와께 죄를 지었으며 많은 자들이 죽었고, 이로 인해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진은 더럽혀졌다. 그래서 부정해진 진을 정결하게 하기 위해 제사가 드려지는데 그것은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 그 피를 제사장이 손가락에 찍어 회막 앞을 향헤 일곱번 뿌린 후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 전체를 불사르는 것이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암송아지의 재를 간직했다가 부정을 씻는 물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민수기 20장

20장은 미리암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아론이 죽음으로 끝나는데 이것은 많은 세월이 흘렀고 출애굽1세대가 광야에서 거의 소멸되었음을 암시한다. 13장에서 출애굽1세대가 가데스에 이르고 거기서 정탐꾼 사건이 벌어졌는데 20장에서 출애굽2세대는 다시 가데스에 이르렀다. 출애굽1세대가 소멸되는 40년동안 출애굽2세대가 준비된 것이고 이렇게 준비된 출애굽2세대는 다시 그들의 부모 세대가 실패했던 가데스로 돌아온 것이다. 물 문제로 다시 불평이 터져 나왔는데 불평을 한 자들이 출애굽1세대가 아니고 2세대라서 그런지 광야의 고난스런 삶은 불평하지만 애굽이 좋았다던지 애굽으로 돌아가자든지 하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말만 나오지 않는다면 물로 인한 그들의 원망은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여호와께서는 이들의 원망에 진노하지 않으시고 모세와 아론에게 반석에게 명령하여 물을 내게 하여  그들이 마시게 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모세는 회중들을 향해 분노하며 패역한 그들에게 물을 내어 마시게 하여 그들을 살게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투로 말한다. 아마도 모세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크게 낙심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출애굽1세대의 실패를 보고도 여전히 나아진게 없는 2세대를 보고 절망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모세와 아론의 분노는 인간적으로 이해할 만 하다. 그러나 그들의 말과 태도에 대한 여호와의 평가는 달랐다. 여호와가 보시기에 그들의 태도는 여호와를 믿지 않은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여호와의 평가에 비추어 상상해보면 아마도 모세는 과연 여호와께서 이런 패역한 자들을 이끌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것인가? 과연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실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모세가 보기에 출애굽2세대도 여전히 그들의 부모 세대와 다를 바 없이 패역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모세와 아론의 이런 태도는 여호와를 믿지 않는 것이요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드러내지 않고 가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회중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일 자격이 없다고 판결하셨다. 여호수아와 갑렙은 가나안에 들어가지만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두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실한 반응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신실함이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믿음을 요구하며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믿음을 통해 성취된다는 엄중한 진리가 여기에 나타나있다.

 

민수기 21장

정탐꾼 사건으로 14장에서 출애굽1세대가 패배했던 호르마에서 출애굽2세대는 여호와께 서원함으로써 대승을 거둔다. 애돔을 지나가지 못함으로 이스라엘은 홍해 길을 따라 애돔을 우회하고 있는데 이 길에서 다시 원망이 터져나왔다. 그런데 이번 원망에는 여호와께서 단호하게 징벌하심으로 불뱀에 물려 많은 자들이 죽임을 당하게 된다.  20장의 원망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여호와의 엄중한 징벌이 21장에서는 나타난 이유는 아마도 그 원망이 다르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20장에서도 애굽 이야기가 나왔지만 주된 불만은 광야에서 물이 없는 것이었는데, 21장에서는 애굽 이야기가 나오면서 광야에서 죽게하려고 애굽에서 인도해 냈다고 모세를 원망한 것이다. 이런 원망은 여호와의 출애굽 역사를 모독하는 말이며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을 부정한 말이었다. 이스라엘이 에돔을 우회하여 가는 중에 자기 땅을 지나가지 못하게 막는 아모리 족속과의 싸움이 벌어졌고 대승을 거두게 된다. 이스라엘은 아모리 족속의 땅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여 먼저 공격함으로써 싸음이 벌어졌고 이스라엘은 뜻하지 않게 아모리 족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민수기 22/23/24장

드디어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이는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 편이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다. 아모리 족속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있지 모압 땅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모압 왕은 모압 평지에 진친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이미 아모리 족속의 패배를 보았기에 모압 왕은 전쟁보다는 주술적인 힘을 빌어 이스라엘을 물리치려고 한 것 같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당시 미디안의 유명한 주술사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개입하심으로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 커녕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예언을 하게된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는 발락의 집요한 요구와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발람의 예언이 3번이나 반복되는데 이는 하나님이 복주신 이스라엘을 누구라도 저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다. 발람의 이야기가 3개 장에 걸쳐 길게 기록된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지키시며 그 누구의 저주도 막으신다는 분명한 진리를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한 그들을 저주하거나 막을 자가 없음을 발람 이야기를 잘 보여준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언제나 문제는 이스라엘의 내적인 불순종의 문제였지 외적인 환경이나 장벽이 아니었다.

 

민수기 25장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 가담하므로 여호와게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다. 앞에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막으시고 오히려 축복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타났다면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언약 배반이 나타난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방신에게 절한 일은 출애굽1세대가 황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일 못지않게 심각한 언약배반이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으로 백성의 수령들괴 가담한 자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만사천명이 염병으로 죽는 끔직한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출애굽2세대를 진멸하시거나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데 이는 그들의 배도가 자발적이라기 보다는 발람의 유혹에 빠진 것임을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 제사장 비느하스가 시므리와 고스비를 죽이는 일이 발생하는데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질투심으로 질투함으로써 여호와의 노를 돌이켜 이스라엘로 진멸을 당하지 않게 했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사용된 질투라는 용어는 이미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이 주어질 때 사용된 용어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의 배타성과 유일성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에게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을 주신다는 약속으로서 평화의 언약을 하신다.  이것은 바느하스의 행위에서 보듯이 제사장의 직분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언약을 중보하여 평화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임을 의미한다.

 

민수기 26/27장

바알브올 사건 후에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출애굽2세대의 두번째 모병조사를 명하신다.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는 바알브올 사건에도 불구하고 출애굽2세대를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려는 것이다. 모병조사의 일차적 목적은 각 지파별로 전쟁에 나갈 만한 20세 이상의 남자를 계수하는 것이었으며 이차적으로는 이 계수를 따라서 가나안 땅을 나누어줌을 기업을 삼게하려는 것이었다. 계수한 자들 중에는 출애굽1세대는 여호수와와 갈렵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남지 않았으니 그들은 모두 40년의 혹독한 세월동안 광야에서 소멸된 것이다. 이제 출애굽2세대를 이끌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모세가 아니라 여호수아다. 모세의 지도권이 여호수아에게 이양된 것이다. 그러나 모세의 지도권은 여호수와와 엘르아살 두 사람에게 이양된 것같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모세처럼 여호와께 직접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 엘르아살을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이후에는 언약의 중보자로서 대제사장의 역할이 강화되고 있다.

 

민수기 28/29/30장

이어서 제사에 대한 규례가 주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레위기에서 주어진 것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제사를 절기별로 구분하여 매일드리는 제사, 초하루에 드리는 제사 그리고 3대 절기를 따라 드리는 제사로 구분하여 제사규례가 주어지는 점이 독특하다. 이런 제사규레는 물론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 할 것이므로 이런 규례가 주어진 것은 이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 들어가서 언약적 삶을 신실하게 사는 것이 중요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바로 신실한 언약적 삶을 위한 공간으로서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바알브올 사건 이후에 제사규례가 다시 자세히 주어진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임을 잘 보여준다. 이어서 서원에 대한 규례가 주어지는데 제사규례가 의무적이라면 서원규례는 자발적인 것이었다. 제사규례와 함께 서원규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매즌 언약관계를 전제하고 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그런데 제사규례뿐 아니라 서원규례가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는 의무적인 면 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면도 함께 있는 매우 역동적이고 쌍방적인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서원은 자발적이고 의무적이 아니지만 일단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서원이 자발적인 것인만큼 서원을 지킬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 있는 경우에는 서원을 지키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이 제사규례와 다른  특징이다.

 

민수기 31장

이야기는 다시 25장의 바알브올 사건으로 이어져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이 주어진다. 바알브올 사건의 핵심은 미디안 사람들이 발람이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으로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을 대적하여 전쟁을 벌렸고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이고 미디안의 다섯 왕과 함께 브올을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다. 여기서 우리는 25장에서 31장으로 이어지는 바알브올 사건 이야기 사이에 26장-30장의 이야기를 위치시킨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26-30장 이야기의 핵심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하는 일 그리고 그 땅에서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바알브올 사건 이야기와 대조를 이루는 이야기다. 왜냐하면 바알브올 사건은 출애굽2세대가 범죄함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진멸을 당할 수 있었던 위기였던 반면에 26-30장의 이야기는 바알브올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전자가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충성을 보여준다면 후자는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보여주다.. 결국 민수기는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배반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오래 참으심과 자비뿐 아니라, 바알브올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일도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따른 징벌은 이스라엘을 포기하고 진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언약에 신실한 자로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언약적 자비와 공의로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비도 하나님의 공의도 모두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민수기 32장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요단 동편 지역에서 살겠다고 한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의 제안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들은 가나안 전투에 다른 지파와 참여하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했고 모세는 이것을 받아들였다. 여기서 모세가 이 문제를 하나님께 여쭈었다든지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판단하셨다든지 하는 언급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어부지리로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하게 되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마고 약속한 땅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두지판 반이 요단동편에서 살겠다고 결심한 것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의 그런 결심의 배경은 단지 동편 땅이 자기들이 가축을 기르며 살기에 가나안보다 적합한 땅으로 보였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약속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비록 그들이 가나안 전투에 다른 지파들과 함께 참여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동편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땅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땅을 선택하는 짓이었다. 모세는 이들의 타협안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모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모세가 그 타협안을 받아들인 것은 가나안 전투라는 중차대한 일을 앞두고 공동체의 분열을 막기위한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만일 그들이 가나안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에도 그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배분된 가나안 땅이 주어질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언약에 신실한 나라를 이루라는 것이고 그들을 통해 이방에 빛을 비추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땅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땅에서 어떻게 언약적으로 신실한 삶을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요단 동편에서 살겠다는 두 지파 반의 결심은 비록 하나님이 막지는 않으셨지만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한 어리석은 짓이라고 보아야 한다.

 

민수기 33장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광야 노정이 회고되고 있다. 첫째 달 열 다섯 날에 애굽의 라암셋을 떠난 후 40여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다. 이것은 출애굽1세대는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소멸되었고 가나안이 들어갈 출애굽2세대가 준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출애굽2세대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명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이다. 이스라엘은 그 땅의 원주민을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우상을 다 깨뜨리고 산당을 헐어야 한다. 만일 그들이 그 땅의 원주민을 다 몰아내지 않고 남겨둔다면 그들이 이스라엘의 눈에 가시와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될 것임이 경고되었다.

 

민수기 34/35/36장

이제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가나안 땅의 경계가 자세히 묘사되고 있으며 그 땅을 분배한 책임을 밭은 자도자들이 세워지고 있다. 레위인들에게는 기업이 분배되지 않으므로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은 그들이 분배받은 땅을 떼어서 레위지파가 거주할 성읍과 그 성읍 주변의 초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레위지파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를 대신하여 여호와를 섬기는 일이 바쳐진 자들이기 때문이다,.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레위인의 존재는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가 여호와께 바쳐진 존재임을 표상하고 있다. 레위인들에게 주어진 성읍은 모두 48성읍인데 그 중에 6성읍은 도파성으로 지정되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도피함으로써 억울한  피가 가나안 땅에 흘려지는 것을 막으려는 제도였다. 도피성은 3성읍은 가나안 땅에 나머지 3성읍은 요단 동편지역에 두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여호와께서는 2지판 반이 요단동편에서 사는 것을 추인하시는 듯 하다. 36장에는 27장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제기했던 땅 분배의 문제이 이어진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땅을 분배받은 여자가 다른 지파에게 시집을 갈 경우 그 지파가 가진 기업이 줄어든다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땅을 분배받은 여자는 지파내에서 결혼을 하는 것을 일단락된다. 땅의 분배 문제, 레위지파의 문제, 도피성의 문제, 이런 것들의 목적은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공동체를 잘 유지하고 언약적 삶을 잘 살기위한 기반을 갖추는 것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민수기에 나타난 땅에 대한 관심은 땅 자체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그 땅에서의 언약적 삶에 대한 관심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그런 삶을 살게 하기위해 그 땅이 주어진 것이며, 그들이 그 땅에서 신실한 삶을 살 때 그들은 제사장 나라가 되고 강대한 나라가 되어 이방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 천하만민이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이스라엘을 택하셨으며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광야에서 인도하여 가나안 땅으로 이끄시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