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 죽음과 언약적 부활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 죽음
2016-03-20 21:46:44
1.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모든 죄인을 위한 대속적 죽음이라고 이해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구약적 맥락에서 보지 못하는 단견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세상이 오셨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이스라엘과의 연관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2. 먼저 이스라엘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로서 또 그 약속을 이룰 민족으로서 형성되고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근본적인 약속은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한 조건은 아브라함의 후손 즉 이스라엘이 여호화의 도에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될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며 나아가 천하만민이 이스라엘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이었다.
3.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와 그의 후손 이스라엘에게 이런 약속을 하신 이유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아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그러나 그 권세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원형으로서 아담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다스릴 왕을 세워진 존재였다. 아담을 지으신 후에 주어진 선악과 금령은 바로 아담의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담의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한 것이고 그 결과는 언약배반에 따른 죽음이었다. 이 죽음은 미리 경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에 아담에게 즉각적인 죽음이 선고되지 않고 유예됨으로써 하나님은 아담을 통한 인류의 번성을 허락하셨는데 이는 아담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보여준다.
4.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니까 창세기 아담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는가에 대한 배경을 이루는 이야기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지연된 하나님의 창조계획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 이스라엘을 통해 다시 이루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사명은 아담이 실패한 지점에서 출발하여 아담처럼 불순종하지 않고 순종함으로써 당초 아담을 통해 천하에 미쳐야 했던 하나님의 복이 이스라엘을 통하여 천하만민에게 미치게 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과 이유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은 아담에게 주어졌던 선악과 금령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고 그들을 통해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야 했던 것이다.
5.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순종의 역사라기 보다는 불순종의 역사였다. 그들은 아담이 실패한 지점에서 새롭게 출발했지만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달리 순종하지 못했고 그들 역시 아담처럼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의 언약배반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셔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세우셨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에도 불구하고 언약에 신실하셔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해결하실 언약적 열심을 드러내셨으니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이다. 이스라엘의 문제점은 이스라엘을 바르게 다스려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게 만들 다윗같은 왕이 부재한다는데 있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순종할 뿐더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그들도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만드는 역할을 할 자로 세워졌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듯이 다윗 외에는 그런 왕이 부재하였고 심지어 다윗도 하나님 앞에 자기 수치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6. 이런 상황 속에서 중간기 유대교에서는 다윗의 뒤르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기대의 이면에는 메시아에 대한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시기 이전에 먼저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나라가 가까왔다고 하신 선포는 곧 자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오신 자임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의 첫 시작인 마태복음의 서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소개한 것이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 온 자 이며 또한 다윗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신 자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7. 언약 배반의 결과는 언약을 배반한 언약 상대방의 죽음이다. 아담의 언약배반으로 아담이 대표하는 인류전체는 전멸당해야만 했다. 노아 홍수 사건은 이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인류는 살아 남았고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담에게 하셨던 동일한 약속을 주셨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후손 역시 언약을 배반했고 이스라엘 또한 언약 배반에 대한 형벌로 죽임을 당해야 할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빌론 포로 그리고 포로귀환 이후에도 끝나지 않은 로마의 지배는 이스라엘이 거의 죽은 자와 같은 처지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예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 곧 왕으로 오신 것이다.
8. 하나님은 아담을 통해 이루시려던 계힉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택하셨듯이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시려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예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내신 것이다. 이제 역사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를 통해 아담의 불순종과 이스라엘의 불순종의 문제를 근본적이고 전격적으로 해결하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런 작정은 아담과 이스라엘의 불순종 이후에 갑자기 나타난 계획이 아니라 이미 창조시에 하나님의 창조 계획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을 대신한 두번쩨 아담으로 또 이스라엘을 대표한 이스라엘의 왕으로이스라엘 가운데 오신 것이다.
9.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을 대신하고 이스라엘을 대표했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언약적 죽음을 죽어야만 한다. 아담이 죽어야 했던 그 죽음을, 이스라엘이 당해야 했던 그 죽음을, 아담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죽음은 아담과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으로 인한 언약적 죽음이었던 것이다. 언약을 배반하면 배반한 언약 상대방이 죽어야만 한다. 그래야먄 그 언약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언약 배반에 대한 댓가로서의 언약적 죽음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요 형벌이다. 아담이 대표한 인류에게 내려져야 하는 형벌과 이스라엘에게 부어져야 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마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언약의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제 옛 언약으 폐기되고 새 언약이 세워졌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가리켜 새 언약의 피라고 말한 것이다.
10.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적 죽음이라는 것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그것은 파기된 옛 언약을 끝내는 죽음이고 동시에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이다. 그 죽음은 언약배반에 대한 형벌적 죽음이요, 동시에 언약적 신실함을 보여준 순종의 죽임이었다. 형벌적 죽음으로 옛 언약의 언약 배반의 문제가 해결되고,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옛 언약의 갱신으로서 새 언약이 세워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언약적 죽음은 아담과 이스라엘이 죽었어야 할 형벌의 죽음이었으며 예수의 죽음은 아담과 이스라엘이 행했어야 할 순종의 죽음이었다. 옛 언약의 언약상배방이 이스라엘이었다면 이제 새 언약의 언약 상대방은 이방인으로 확장된 새 이스라엘이다. 그리고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는 새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리고 계신다. 이렇게 예수의 언약적 즉음으로 옛 언약은 근본적이고 전격적으로 갱신됨으로 새 언약이 세워진 것이고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자마다 새 언약 안으로 들어와 새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적 부활
2016-03-27 19:02:30
1.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적 죽음이었다면 그의 부활 역시 언약적 부활인 것이다. 여기서 언약적이란 말은 언약적 관계로 말미암은 혹은 언약 관계에 터를 둔 행동이나 사건이란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언약배반에 따른 언약적 저주로서의 죽임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언약적 충성으로서의 순종적 죽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진 이 두 가지 언약적 성격으 모두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적 문제를 해결하는 성격의 제사였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제사들을 포괄하는 제사로서 이스라엘의 언약배반으로 야기된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제사였다. 구약의 속제죄-속건제-번제-화목제의 정신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모두 성취된 것이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그런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2. 하나님은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시되 성령의 능력으로 그를 다시 살리셨다. 그리고 그를 살리심으로 예수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시며 하나님의 진정한 아들이심을 온 세상에 선포하셨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이라는 언약적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반응으로 주어진 것이 바로 예수의 부활인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신실하신 언약적 행동을 기뻐하셨으며 그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 그를 다시 살리시는 언약적 행동을 하신 것이다.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인간에게 신실한 행동을 요구하시며 신실한 행동을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그것에 합당한 언약적 행동으로 반응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의 신실한 행동을 기뻐하심으로 그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기에 예수는 죽었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예수는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왕으로 오신 이를 거부하고 그들 죽였지만 하나님은 예수를 다시 살리심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진정한 그리고 영원한 왕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이다.
3. 그러니까 예수의 부활은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선포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일뿐만 아니라 이방인의 왕도 되신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돌아오셨지만 그가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도 포함된 것이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선포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예수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소식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하면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면서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에 헬라인에게라고 말한 것이다.
4. 복음은 예수가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공적인 선포이다. 그렇기에 이 선포는 듣는 모든 자들에게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그의 다스림에 순종하라고 요구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요 그의 왕되심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곧 왕이신 예수에게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인 자신의 사명이 바로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들이 믿고 순종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가 이제 그들에게도 왕이시라고 선포하면서 그들의 왕이신 예수에게 순종을 요구한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복음 전파였다. 그러므로 복음전파는 대단히 정치적인 메시지였다. 사실 복음은 로마의 황제가 유일한 왕으로 인정되는 세계 속에 진정한 왕은 예수라는 선포였다. 그것은 기쁘고 복된 소식이었지만 그 소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제 로마의 황제가 아닌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했고, 이것은 로마 세계에서 고난과 핍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5. 바울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예수가 왕이라는 이 선포속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는 말이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오랜 언약적 약속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언약이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을 통해 예수를 왕으로 선포하심으로써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이 나타났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행동이 나타났고 이 행동은 듣는 자들의 합당한 반응으로서의 믿음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믿음이한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에 대한 언약적 반응인 것이다. 바로 이 믿음으로 믿는 자는 믿음에 이르게 된다. 앞의 믿음이 언약적 반응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믿음이라면 뒤의 믿음은 믿는 자를 의롭다 여기시는 곧 옳다고 여기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일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말한 것이다. 믿는 자 곧 의인이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왕이신 예수의 통치에 순종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런 자가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 자 곧 의인인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 그가 의인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2014-11-19 17:21:36
창세기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은 단순히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넘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 존재로 출발했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누구인가는 바로 이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된 존재라는 것, 이것이 성경의 인간관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인간관은 하나님을 전제한다. 하나님이 없이는 인간은 누구인지 설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 세계를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주어진 이 다스림의 권세는 주어진 것이고 위임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은 그 권세를 위임하신 분, 곧 하나님의 뜻에 맞게 그 권세를 사용해야 할 의무가 있기 마련이다. 이 의무를 명시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 금령이다. 선약과 금령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 권세를 사용하여야 할 것을 가르친다. 인간은 이 금령을 통하여 순종을 배워야만 했다. 그 금령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인간에게 자유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이 선악과 금령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양이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하나님께 순종할 때만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선약과 금령에 덧붙여진 것은 만일 불순종하면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였다. 이것은 단순한 위협이나 형벌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그 인간은 존재할 가치를 상실한다는 엄중한 경고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죽음은 형벌이기 이전에창조된 존재 의미의 상실이었다. 노아의 홍수로 인한 인류의 전멸은 이 진리를 엄중하게 보여준다. 성경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피조 세계에 죽음이 들어왔다고 말하여 이 불순종을 죄라고 명명하였다. 누구도 예외없이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그 존재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결국 이 불순종 곧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로 작정하신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처음부터 특별한 관계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서도 그렇다. 이 창조목적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고 인간은 그 권세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사용할 의무를 요구하셨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앞에서 권리와 의무를 가진 언약적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가진 언약적 존재로 출발한 것이다. 그리고 선약과 금령에 덧붙여진 경고는 바로 언약 배반에 따른 필연적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이런 언약관계는 이후에 성경 역사에서 다양한 형태의 언약으로 다시 확인된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이나 이후의 본격적 언약인 시내산 언약의 경우는 모두 당시 고대 근동의 잘 알려진 종주권 조악의 방식을 사용하여 체결되고 있는데 이들 언약은 모두 피의 맹서로 맺어진 것으로서 언약 배반의 결과는 죽음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대표적인 언약들이 창조시에 하나님과 인간이 본래적으로 가진 언약적 관계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본다면 이스라엘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나타났지만 사실 이스라엘 뿐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언약백성인 것이고 이스라엘은 다만 모든 인류를 대표한 하나의 샘플로서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선택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의 역사인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스라엘만의 역사가 아니라 모든 인류와 상관되는 중요한 역사가 되는 것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제사제도에서 나타난 동물희생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던 이스라엘이 언약 배반의 결과가 반드시 죽음이란 것을 잘 보여주는데 이는 창조시에 불순종한 인간에게 죽음이 임했던것을 상기시켜주는 것이며 동시에 그 죽음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 것인가를 암시하는 예표이기도 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간의 죄의 문제와 죄의 결과로서의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한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하나님이 스스로 사람이 되시는 것이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 이 분이 바로 역사 가운데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스스로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언약 당사자인 사람을 대표하여 또 대신하여 언약 배반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죄없는 인간이 출현하였으니 이 분이 바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 곧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노아홍수 사건이 보여주듯이 불순종한 인간은 모두 존재의미를 상실하였고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바로 인류를 대표하고 대신한 죽음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인류는 언약 배반으로 인한 언약적 책임을 벗게되었고 언약 배반의 결과인 죽음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인류를 지배한 사망의 권세가 깨뜨려진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대속적이었듯이 그의 부활 역사 대속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된 것이고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하나님의 자기 희생이며 자기 형상과 모양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지배가 종식됨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성취될 것에 대한 위대한 선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