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하나님나라- 스캇 맥나이트
오늘날의 하나님나라- 스캇 맥나이트
2016-03-19 22:27:09
하나님나라 신학의 두가지 주제들 : 변혁과 해방
신약성서 학자들은 하나님나라를 하나의 견고한 현실로 정의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윤리와 정치신학에 초점을 맞추는 이들은 하나님나라를 홀로 내버려두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나라 비전은 첫째는 문화변혁적 하나님나라 비전이고 둘째는 해방을 추구하는 하나님나라 비전이다. 전자는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변혁시키는 것을 꾀하는데, 종종 변혁주의자들은 성서의 하나님나라 비전을 문화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축소하며 왜곡한다. 사회적 해방을 추구하는 후자의 경우 하나님나라는 신속하게 사회적 정의와 평화를 위한 행동주의와 결합되며 또한 그것을 제도화하기 위하여 정치적 차원에서 시행될 필요가 있는 경제이론과 단단하게 결합된다. 변혁모델이 시스템 내부로부터 작동한다면, 해방모델은 다소간 시스템에 맞서서 작동한다. 따라서 다수자들은 변혁모델로 향하고 소수자들이 해방모델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변혁 모델
1. 이 견해야 말로 미국과 유럽의 기독교적 사고의 유산이다. 오늘날 변혁적 관점이 사회복음적 이해를 통해 보완되고 수정되거나 때로는 해방신학으로으로 대체되고 있지만 변혁 모델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캘뱅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 이해로 시작되었다. 청교도들로 부터 시작된 미국 역사에서 이런 변혁모델에 기독교 우파와 좌파를 모두 지배해 왔다. 이런 변혁적 접근법의 가장 대표적 이론가는 아브라함 카이퍼다. 카이퍼가 어거스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칼뱅주의 전통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카이퍼가 그 전통으로 들어가는 좋은 입구인 것은 분명하다. 변혁적 전통에서 교회는 사회, 국가, 혹은 문화를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는다. 교회는 전체의 일부일 뿐이지만 교회의 임무는 법의 한계 안에서 그리고 훌륭한 기독교적 설득이란 조건 안에서 할 수 있는 한 문화를 기독교화하고 인간화하는 것이다. 변혁적 접근법 안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정치적 수단들을 통해 공적 영역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배후에는 하나님나라를 그리스도인 활동가들의 노력을 통해 사회와 문화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로 이해하는 하나님나라 신학이 있다.
2. 카이퍼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타락의 영향력에 맞서서 복음의 영향력을 위해 일할 것을 요구하는 문화명령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은 카이퍼의 유명한 영역주권 개념으로 이어지는데, 그것은 인간 삶의 각 영역들이 그 나름의 권리들과 규율들과 질서들을 갖고 있으며 각각의 문화적 영역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나름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하나님나라는 모든 창조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포괄적인 통치로 이해된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나라 안에 있는 하나의 요소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시화하기 위해 일하는 이들에 의해 인정되는 현실의 모든 영역을 포괄한다. 물론 제도적인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중요한 일부로 인정되지만 여전히 교회는 그 나라의 일부일 뿐이다. 여기서 교회라는 단어는 건물이나 제도가 됨으로써 성서가 말하는 우주적인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교회라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고 모든 이들이 좋아하는 중립적인 단어가 되었다. 결국 하나님나라는 일반은총에 대한 칼뱅주의적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게 된 것이다.
3. 개별적인 그리스인들이 주어진 영역 안에서 그리스도의 통치의 가시화를 위해 일할 때 그들은 하나님나라 안에 있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나라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적 접근법, 곧 콘스탄티누스적 접근법이 맨 위에 하나님을 두고, 그 아래 교회를 그리고 교회 아래 인간 삶의 모든 영역들이 위치했다면 세속주의적 접근법은 하나님과 교회를 종교라는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넣고 반면에 공적 영역에서는 각 영역들이 교회와 분리되어 나름의 일을 감당하도록 만들었다. 카이퍼식 문화변혁적 접근법은 맨 위에 하나님을 두고 그 아래 교회를 포함한 서로 분리된 각각의 영역들을 위치시킨다. 문화와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개입에 관한 변혁 이론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그것이 콘스탄티누스적 모델을 향한 지속적인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지나치게 정치적 과정에 개입하게 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4. 카이퍼가 캘뱅주의 전통에서 나온 변혁적 접근법을 제공했다면 리처드 니버는 또 다른 접근법을 제공한다. 니버는 변혁주의자들은 근본적으로 단순히 인간적인 사건들의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극적인 상호작용인 역사 안에서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역사의 전개가 세상을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소망의 현장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것이 문화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문화는 하나님의 영광 안에서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해 변화된 인간의 삶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람을 회심시키고 회심한 사람이 문화에 영향을 주어 그것을 하나님나라 현실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니버는 그리스도의 나라는 우주적이고, 구속도 우주적이며 그리고 구속에 대한 추구는 모든 인간이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를 향하도록 이끈다고 말한다. 이런 니버식 접근법의 특징은 복음과 신학과 윤리는 문화적 형태로 변화됨으로써 문화에 대해, 그리고 문화를 위해 의미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니버의 말대로 하자면 하나님나라는 변혁된 문화다. 이것은 우리가 카이퍼에게서 발견하는 그 어떤 것보다 더 멀리 나가는 주장이다. 니버에게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일반은총과 인간의 성취가 되었다.
해방 모델
1. 금세기에 고전적인 변혁모델을 수정하여 나타난 것이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이 염두에 두고 있는 변혁의 방식은 안에서 밖으로, 그리고 아래서 위를 향하는 급진적인 것이었으며 경제와 권력의 소유에 관한 변혁이었다. 지금 해방신학은 북미와 유럽에서 은밀하지만 지대한 영향을 가져올 의미를 지닌채 성장하고 있으며 하나님나라란 단어의 의미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해방신학을 이해하려면 사회복음의 창시자인 월터 라우센부쉬로부터 시작해서 위르겐 몰트만 그리고 구스타보 구티에레즈를 살펴보아야 한다. 구원에 대한 인식은 라우센부쉬에 의해 공적 영역에서의 사회적이고 조직적인 것으로 바뀌었으며 몰트만의 해방신학에서 구원은 모든 압제적인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광범위한 인식을 낳았다. 그리고 구티에레즈에게서 해방과 구원과 하나님나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한 참된 마르크스주의의 공헌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거기서 새로운 구원은 자본주의 권력에 맞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혁명을 포함한다. 해방신학에서 하나님나라 신학의 초점은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로서의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에 대한 변혁으로부터 우리 시대의 압제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해방과 권리 획득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 신학은 선한 사람들이 공적영역에서 선한 일을 하는 것과 특히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압제적이고 조직화된 세력에 맞서 불의를 철폐하고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행동주의적 노력의 결합이 되었다.
2. 오늘날 미국 기독교계 주류이 특징을 이루는 해방신학은 그 에너지를 라우센부쉬로부터 끌어왔다. 라우센부쉬에게 죄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며 구원 역시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었다. 라우센부쉬에게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사회적 도덕적 비전의 시행을 통해 변화된 세속사회의 현실이었다. 그는 변혁주의적 접근법에서 말하는 개인구원과 개인적 영향력이 맞서 사회적 기독교와 사회복음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가 가난한 자들의 경제적 해방이 초점을 맞추면서 지향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큰 구조, 곧 사회구원이었다. 그래서 라우센부쉬는 하나님나라는 개인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삶을 변혁해서 천국의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라우센부쉬의 중요성은 하나님나라라는 표현을 가난하고 주변화된 사람들을위해 공적 영역에서 행하는 사회적 행동과 연결시켰다는 점에 있다. 나중에 해방신학은 구원을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면서 이런 기조를 더욱 강화시켰다. 사회복음에 대한 추구는 반드시는 아니겠지만, 거의 불가피하게 교회의 희생을 수반한다. 존 요더는 사회복음의 강조점은 계속해서 우리의 관심을 교회로부터 그리고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것으로부터 떼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즉 사회복음은 세상을 교회로 부르는 대신(사실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이다) 세상이 교회를 권해 세상의 진보를 돕도록 만든다.
3. 위르겐 몰트만은 우리를 위해 고난받고 몸소 우리의 고통과 죄책과 수치 안으로 들어오시는 그리스도의 의미를 이해하며 신앙과 신학의 새로운 토대를 발견했다. 그는 이런 통찰을 바탕으로 그의 책 희망의 신학에서 사회적 비전에 대한 강력한 표현을 만들어냈는데, 그것은 첫째, 하나님의 약속, 둘째,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으로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 셋째 하나님나라의 사명으로서 인간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다. 몰트만은 모든 종말론적 신학은 정치신학, 즉 사회적으로 비판적인 신학의 형태가 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러가지 점에서 몰트만은 정치신학으로서의 해방신학의 중요성을 옹호하는 유럽의 대변인이 되었다. 그는 카이퍼보다 훨씬 더 경제에 초점을 맞우었지만 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방법에 관한 한 여전히 해방 모델보다는 변혁적 모델에 더 가깝다. 50년 남짓한 기간에 카이퍼와 라우센부쉬를 훌쩍 넘어서 몰트만에 이르러 하나님나라는 압제적 지배권력에 대한 예언자적 비판이고 사회정의와 평화에 대한 격렬한 추구가 되었다. 몰트만에게 교회는 예수의 길, 즉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고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 사회 속에서 일하는 길을 따르기로 헌신한 자들의 교제로 간주된다. 그에게 하나님의 일은 온 세상을 해방시켜 자유, 정의, 평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며 교회의 과업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그런 활동을 분별하고 협력하는 것이다.
4. 변혁모델에서 하나님나라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였지만 교회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일의 중추부였다. 해방신학자들도 변혁모델과 동일하게 우주적 하나님나라와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수용했지만 그들은 결과적으로 거기서 교회의 중심성을 벗겨내고 하나님나라 신학을 공적 해방으로 바꾼다. 이런 일을 가장 강력하게 수행한 사람이 바로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이다. 그는 몰트만보다 더욱 날카로운 마르크스주의의 면도날을 휘두른다. 구티에레즈에게 문화 변혁 모델은 파괴되고 그 자리에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신학의 해석학이 자리잡게 된다. 그는 하나님나라 신학에 라우센부쉬가 말했던 약자에 대한 경제적 온정주의와 몰트만의 사회정의를 뛰어넘어 해방이라는 주제를 도입했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이라는 메시지 대신 만인을 위한 정의와 평화 사회를 위해 기존의 권력들에 맞서 일어나는 가난한 자들의 봉기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구티에레즈에게 해방은 하나님나라 일이며 해방은 구원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와 사회적 현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기본적인 공간임을 의미한다. 그에게 교회는 과격하게 탈 중심화된다. 교회는 가난한 자들에 의한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와 평화와 힘을 위한 투쟁에 참여하도록 세상 속으로 소한된다. 다시 말해 구티에레즈는 교회의 사명을, 나아가 결과적으로는 교회의 정체성 일부를 형성하는 책무를 세상에 부여한 것이다. 여기서 구원과 하나님나라는 공적영역에서 해방하고 구속하고 화해시키는 사회적 행동이다. 그 속에서 개인구원의 필요와 교회의 자리는 점차적으로 축소되었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우주적 인식도 점차저으로 경제적, 정치적 이론들에 의해 소멸되었다.
5. 하나님나라에 대한 해방신학적 접근법은 다양한 상황 속에서 압제 당하고 있는 이들의 해방을 통한 사회적 정의와 평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하여 오늘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일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 근본적으로 가난한 자들의 구조와 압제 당하는 자들의 해방과 관련되어 있으며, 그 기본적인 에너지가 주로 정치력과 사회적 행동에 맞춰지는 공적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이런 흐름들이 강둑 안에 머문다면 교회와 사회에 유익을 제공하리라 생각하지만, 만일 그것이 강둑을 넘어서 범람하게 되면 하나님나라는 고작해야 복음이 결여된 정치적 행동의 영역으로 식민지화 될 것이며 그로 인해 교회는 이 세상서 갖는 자기 소명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중요한 존재가 되고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가능성에 대해 흥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운동이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결국 복음과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서투른 이해를 감추기 위한 부끄러운 운동에 불과하다. 해방신학적 접근법은 이 세상의 제도 안에서 작동하는 불의를 제거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교회를 탈 중심화시키고 있다. 해방신학의 틀을 형성하는 이야기는 하나님나라는 우주적이며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에 대해 말한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교회와는 상관없이 하나님나라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나라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공적 영역에서 행하는 선한 일이 되고 교회의 일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라는 경계선 안에서 행하는 사적인 일이 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유혹- 스캇 맥나이트
2016-03-07 00:10:48
1. 오늘날 하나님나라 신학은 콘스탄티누스의 유혹, 즉 국가를 설득해 그 힘을 교회의 힘과 결합해 자신들의 목적을 제도와 법률로 성취하려는 유혹에 직면해 있다.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주와 통치주시라면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이로써 성서를 통해 알려진 하나님의 뜻은 모든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게 된다. 이런 논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라고 여기게 만드는 유혹을 대표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그 뜻을 알리고자하는 그들의 책임감에는 순응과 강제 혹은 강압적 설득의 유혹이 수반된다. 종종 크리스텐덤 혹은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불리는 그 제국은 국가를 교회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결합하여 국가의 권력을 사용해 교회의 목표를 법제화하고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을 억압하기에 이른다. 예컨데 청교도들은 영국의 콘스탄티누스주의 때문에 도망쳤으나 자기들이 버리고 떠나온 크리스텐덤을 식민지에서 재현했다. 정부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을 법제화하고 그것을 통해 기독교적 신념들을 시행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콘스탄티누스주의이다. 기독교 좌파와 우파는 모두 동일하게 정치적 선동과 다수결 원칙을 통해 대중에게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관점에 동의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2. 교회사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자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곤 했다. 16세기 종교개혁은 세 가지 다른 양상으로 나갔는데 루터는 독일에 대한 로마카톨릭의 지배를 무너뜨리고 오늘날 우리가 루터파 교회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냈고, 칼빈은 다른 방식으로 오늘 우리가 개혁파라고 부르는 것을 만들어냈다. 세 번째 그룹은 재세례파인데 이들은 카톨릭교회 안에 있는 콘스탄티누스주의의 유산과 싸웠을 뿐 아니라 루터파나 개혁파 교회 안의 있는 새로운 콘스탄티누스주의와도 맞섰다. 루터파와 개혁파는 그 어느쪽도 콘스탄티누스적 유혹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재세례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벗어났고 양심의 자유라는 원칙에 따라 교회와 국가 사이에 분리벽을 세웠다. 다시 말해 재세례파는 루터파와 개혁파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해 가진 이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재세례파는 카톨릭 교회는 물론 그들이 동료 프로테스탄트로 부터도 콘스탄티누스적 박해를 경험했다. 미국에서는 18세기 로저 윌리암스,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미국의 창설자들에 의해 국가와 교회를 분리시키는 법률들이 제정되었다. 이런 접근법은 로저 윌리암스의 재세례파적 비전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교회와 국가의 이런 분리는 재세례파적 원리에 따른 것인데 이런 분리 이론은 성서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된 뜻이라는 기독교적 믿음과 상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금세기 보수적 복음주의자로 존경받는 칼 헨리는 그리스도인들이 공적영역에서 성서의 모든 원리를 법으로 정할 이유를 갖고 있는가? 설령 그들이 다수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한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것은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가 그로부터 거의 30년후에 하게 될 주장이기도 하다. 헌터는 복음주의자들이 그들이 목표를 이루기에 충분한 정치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어쩌면 그들의 접근법 전체를 자신이 신실한 증인이라 부르는 것으로 재고해야 할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미국 복음주의 계열의 역사학자인 랜디 발머는 미국종교의 역사에서 내린 결론은 종교는 언제나 권력의 중심부가 아니라 사회의 주변부에서 최고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정당 혹은 정치적 영향력에 대한 추구와 동일시한다면 궁극적으로 고난을 겪는 것은 바로 그 신앙이라고 지적하면서 타협은 정치에서는 유효할 수 있지만 신앙의 영역에서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다.
3. 현대 세계에서 세속적 사고가 나타나는 현상은 교회와 국가가 이전보다 덜 결합되어 있고 콘스탄티누스주의가 쇠퇴했으며 교회가 덜 강력한 존재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한편으로 하르낙과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과 인간 영혼에 관한 문제로 축소시켰고 그 결과 복음은 독일의 문화와 도덕과 사생활로 변형시켰다. 그는 교회를 국가에서 몰아내어 영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른 한편에서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의 일반은총 개념에 기초해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성서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을 뜻을 따라 문화를 형성시키고자 했다. 기독교인들이 점차 다수가 아닌 사회가 되어 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저항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내며 또한 정치적 수단을 통해 문화와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역량을 결집해 투표와 정책을 통해 보다 기독교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영향을 끼치려고 하는 것은 여전히 국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기독교적 믿음을 강요하는 콘스탄티누스주의이다. 그것은 단지 종교적 우파나 좌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견해를 공공의 장소로 가져가는 그리고 행동을 통해 그것을 공공정책이나 법률로 만들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한다. 그 비전이 얼마나 훌륭하든 혹은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하찮든 상관없이 이것은 분명히 콘스탄티누스적 아류이다. 종교적 좌파든 우파든 그들의 단일한 전략은 정치적 수단을 사용해 미국의 문화와 정부에 영향을 주어 그것들이 기독교 신앙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려는 것이다. 아아러니칼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공적영역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위해 사회적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하나님나라 일이라고 부르면서 콘스탄티누스주의와 손을 잡는다. 국가로 하여금 기독교의 주장을 뒷받침하게 하는 것은 교회가 국가에 최종적 권위를 넘겨주었음을 의미한다.
4. 기독교의 영향력이 줄어들수록 기독교가 사회적 현실과는 아무런 혹은 별 상관없는 영적종교로 머물고 싶은 유혹이 점점 커진다. 미국의 근본주의는 문화와 국가로부터 자신만의 고립된 영토 안으로 철수했고 그 결과 그들은 미국의 문화를 형성하는 일과 전혀 상관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들이 접근법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들이 궁극적으로 미국에 영향을 미치게하려는 것이었다. 근본주의자들에게 하나님나라는 내세를 의미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공동선을 위한 노력은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어느면에서 근본주의는 사회복음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러자 뉴욕의 목회자이자 신학자였던 월터 라우센부쉬는 복음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이 사회적 이슈들에 보이는 무관심에 반발하면서 사회복음이라 부르는 것을 창안했다. 사회복음은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구원하여 이 세상에 평화와 정의의 나라를 선도하자는 것이다. 라우센부쉬에 다르면 사회를 선하게 변혁시키지 못하는 기독교는 예수가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는 뿌리깊은 사회적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데 열정적으로 집중하였다. 사회복음 안에서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도덕적 비전이 되었다. 사실 사회복음의 접근법 중 많은 부분이 죄로부터의 개인적 구속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포기했고 대신 죄을 조직적 불의로 여기는 사회정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나라 비전은 현대화 혹은 세속화되었고 결국 현대적 자유주의가 돠거나 정의, 평화, 평등, 경제적 안정 혹은 시민의 권리에 대한 점진적 추구가 되었다. 사회복음은 좌파의 콘스탄티누스주의다. 또 한편.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근본주의가 문화와 단절되어 있는 것에 지쳤고 기독교적 비전을 따라 문화와 국가에 영향을 주는 기독교적 현존이라는 오래된 카이퍼적 신념에 찬성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1947년 칼 헨리는 경종을 울리면서 미국의 신복음주의자들에게 근본주의가 고집하고 있는 "문화로부터의 분리"와 결별하라고 요구핬다. 그는 그리스도들에게 문화에 개입하고 정치에 참여하며 최고의 기관들에서 교육을 받으라고 요구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그의 접근법은 카이퍼의 그것과 같았다. 그에게 하나님나라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의 하나님의 인격적인 통치이자 일반은총으로 나타나는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의 통치였다. 그리고 그 나라의 모습은 미래에 영원한 하나님나라에서 온전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영향력 이론의 신복음주의적 부흥은 부분적으로 콘스탄티누스주의의 또 다른 표명이었다.
5. 다양한 신앙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사회정의, 평화, 핵확산 및 전쟁 종식 등과 같은 목표들을 위해 손을 잡았다. 기독교 좌파와 로마카톨릭 그리고 유대교, 몰론교까지 포함된 이런 종교적 연합이 만들어낸 것은 시민종교다. 그런 연합의 결과로 새로운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분모를 찾아내 각각의 윤리체계를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하나의 새로운 윤리체계를 만들어 냈는데, 이것은 서로 다른 믿음을 지닌 이들로 부터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종교적 주장이라는 겉모양을 취한 정치윤리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이것은 시민종교이다. 시민종교는 종독성이 강한 종교적 혼합이며 시민적 콘스탄티누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사람들은 교회와 국가를 혼합하고 제국과 신앙을 혼합하며 국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신앙을 강요하도록 요구하는 콘스탄티누스적 유혹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시민종교는 오직 어떤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느 한 종교에만 구별되게 존재하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대신 협력을 위한 공통의 기반을 추구하여 작동한다. 그 과정에서 시민종교는 서로 대립하는 정치적 견해들을 배제하고 일련의 기독교적 신앙들을 하나의 정치적 강령으로 바꾼다. 그후에 시민종교는 신앙을 정치에 종속시키고 교회를 국가의 도구로 삼는다. 시민종교의 위험성은 기독교 좌파와 우파 모두에게 해당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오직 공동선을 위해 신앙의 핵심적 차원들을 부정하여 정치적 강령을 얻어낼 수 있는 연합을 형성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6.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에 의해 형성된 해방신학은 사회복음의 사회적 경제적 구속을 마르크스주의 사상과 결합시켜 그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었다. 해방신학에서 구원은 자유시장에 맞선 사회적 혁명과 가난한 자들을 위한 정의의 수립이 된다. 본질적으로 여러 형태의 해방신학들 안에서 구원은 억입으로부터 특히 빈곤과 배제로부터의 사회적 해방이 된다. 해방신학에 수반되었던 여러가지 현상들 중 가장 놀라운 것은 교회가 중심에서 물러나고 그 대신 국가가 중심이 된 것이었다. 해방신학에서 하나님나라는 평화, 정의, 경제적 평등이 되었다. 그래서 사회정의와 사회적 경제적 인종적 해방을 발견하는 모든 곳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스키니진 스타일에게 하나님나라 일이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선한 사람들이 공적 영역에서 공동선을 위해 행하는 선한 일들을 의미한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런 식의 비전은 주로 특권층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는 미국적 상황에서 나타난 사회복음이자 해방신학이다. 그것의 특징은 박애인데, 그것은 특권을 지닌 부유한 자들이 사회적 구속의 한 형태로서 가난한 자들에게 기부 형식으로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박애는 개선하고자 하는 바로 그 불의를 퍼뜨리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기부다. 이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콘스탄티누스주의에 불과하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런 식의 비전에서 모든 에너지는 정치적 과정에 집중된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나라가 표현되는 중심적 장소로 간주되기 보다는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