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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 이동영

메르시어 2023. 5. 11. 16:00

삼위일체론- 이동영

2016-02-21 19:13:36


1. 칼 라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삼위일체 교리는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실제적인 일신론자들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삼위일체 교리에는 유독 신비라는 딱지가 붙어있다. 사실 교리치고 신비가 아닌 것이 없다. 신비라는 단어가 이해할 수 없다거나 몰라도 된다는 의미가 될 수 없다. 삼위일체 교리는 교리중의 교리요 기독교의 심장과도 같은 교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몰라도 되는 교리가 아니다. 이 교리를 모른다면 우리는 우리의 예배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해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반드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2.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모두 유일신 종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삼위로 계시며 일체를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전제군주적인 신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의 교제 가운데 일치를 이루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교리를 이해하는데 문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한 분이 되신다고 생각하는데서 발생한다. 세 분 하나님이 한 분이 되신다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결국 양태론적 설명으로 귀결되고 만다. 고대의 사벨리우스 주의가 대표적인 양태론 이단이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각각 고유하고 주체적인 인격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다. 이 세 분이 한 분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이루신다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의 핵심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되심의 교리지 한 분되심의 교리가 아니다.

 

3. 그렇다면 어떻게 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되시는가? 세 분 하나님은 교제,  본질, 사역 가운데 일치를 이루시는 가운데 하나가 되신다.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나 이슬람교는 창조를 유일신의 단독적 사역으로 생각하는 전제군주적 신관을 가지고 있고 그 결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에 대한 철저하고 일방적인 복종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창조사역을 삼위 하나님의 공동사역으로 이해한다. 즉 창조자이신  성부가 창조의 중보자이신 성자를 통해 창조의 능력이신 성령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창세기 1장과 요한복음 1장은 창조가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임을 증거한다. 창조뿐만 아니라 구원사역이나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섭리사역도 마친가지로 삼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하늘에 홀로 있는 고독한 신도 아니고 전제군주적인 독재자도 아니다. 기독교의 신은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계신 하나님이시다.

 

4. 세 분으로 계신 하나님은 사랑의 교제, 본질, 사역 가운데 일치를 이루고 계신다. 동방교부들은 삼위 하나님이 하나가 되시는 것을 페리-코레시스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신학적으로 이 단어는 상호 침투 혹은 상호 내주라는 말로 번역되지만 원래 이 단어는 방빙 돈다는 "페리"와 춤이라는 "코레시스"의 합성어로서 여러 사람이 함께 빙빙 돌면서 춤을 추는 윤무 혹은 원무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페리코레시스란  여러 사람이이 서로 손을 잡고 빙빙 돌면서 추는 춤을 가리킨다.  춤은 대단히 역동적이며 자유롭다. 그리고 함께 추는 춤은 서로 춤 사위가 다르지만 대단히 조화롭다. 그러니까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표현하는 페리코레시스는 윤무의 모습을 가지고 삼위 하나님의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 하나되심을 표현한 것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정적이거나 배타적이거나 고독한 분이 아니시다. 각 사람의 춤이 역동적이고 자유로운 가운데 조화를 이루듯이 기독교의 하나님은 무한한 역동성과 자유 가운데 조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5.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말은 사람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본받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각자의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생각에 겸손히 귀를 기울이고 남을 자신보다 낫게 여겨야 한다. 생각이 다르다고 공동체를 이루 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다. 대화하고 소통을 위해 노력하면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사도산경에서 성도의 교통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기독교는 소통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유일한 종교이다. 소통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도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소통하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조화롭고 아름다운 사람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바빙크의 삼위일체론(1)- 이동영

2016-02-23 00:30:29


  1. 칼 라너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기전달이 가능하고 하나님의 자기전달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성육신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의 핵심이라고 했다. 칼라너의 이런 말은 현대 신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사실 이런 하나님의 자기전달 사상은 이미 바빙크가 그의 기독론에서 갈파한 것이지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바빙크는 그의 교의학에서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기전달이고 하나님의 신비이며 하나님의 이런 자기전달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게 된다고 말했다.  현대 신학자인 몰트만은 창조를 삼위일체적을 설명했는데 이것 역시  바빙크가 이미 그의 삼위일체적 창조론에서 언급한 것이다. 바빙크는 그의 창조론에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단일신으로서 홀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창조주이신 아버지가 창조의 중보자인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의 능력이신 성령 안에서 만물을 창조했다고 말했다. 기독교의 창조론은 단일신의 독자적 창조가 아니라 삼위하나님의 공동사역이다. 바빙크는 만물이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들 안에서 존재를 부여받으며 성령 안에서 생명을 호흡한다고 말했다. 이는 마치 동방신학자들이 성령이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시고 아들 안에서 형상을 부여받는다고 한 고백을 연상시킨다. 바빙크의 위대한 점은 그가 개혁파 정통신학을 계승하되 그것을 창조적으로 종합했다는데 있다. 바빙크는 동방의 삼위일체론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을 섭렵하고 양자를 중재하고 양자의 장점을 종합하려 했다.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현대신학은 이 점에서 너무 양자택일적이거나 동방적 관점에 충실하여 서방의 관점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지만 바빙크는 양자의 장단점을 잘 평가하고 중재하고 있다.

   2. 바빙크는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3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본질이란 단어는 무슨 의미인가? 둘째, 위격이란 단어는 무슨 의미인가?  셋째, 본질과 위격의 관계는 무엇인가?  바빙크는 신적 본질은 추상적, 보편적 개념이 아니며 또한 위격의 밖에 있는 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위격의 밖에 삼위를 구성하는 본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은 삼위 안에, 삼위의 하나되심에 있다고 강조한다. 만일 본질을 삼위 밖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로 이해하게 되면 그것은 4위일체가 되고 만다. 본질은 삼위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현대의 동방신학자들이 동방교희의 전통으로 강조하는 점이지만 이미 19세기에 바빙크가 한 말이다. 이것은 바빙크가 동방신학에도 정통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삼위를 떠나서 본질을 사유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신적본질은 위격들 안에 있기 때문이다. 신적 본질은 위격들을 생성하는 독립된 실체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됨이 신적 본질이므로 신적 본질은 각 위격 안에 존재한다. 삼위는 하나의 신적 본질, 하나의 신적 능력을 가진 하나의 하나님이시다. 삼위는 실체상 하나이지만 위격상 한 분은 아니다. 그러므로 삼위의 하나되심을 한 분되심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삼위(Tres)가 한 분(unus)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unum)가 되시는 것이다. 삼위일체(Trinitas) 교리는 삼위의 한 분되심의 교리가 아니라 삼위의 하나되심의 교리다. 하나의 실체를 한 분으로 보면 안되고 하나로 보아야 한다.

 

  3. 동방교부들은 삼위일체론을 삼위 하나님에서 출발하여 삼위 하나님이 일체가 되시는 방식으로 설명했다. 이런 식의 접근은 하나님의 삼위를 먼저 강조하다보니 삼신론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개념이 갑바도기아 교부들이 사용한 페리코레시스라는 개념이다. 그들은 이 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삼위되심과 일체되심이 동시에 존재하다고 설명함으로써 삼신론이라는 비판을 방어했다. 물로 그들이 페리코레시스란 단어 자체를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그 개념은 분명히 사용했다. 그러나 페리코레시스란 개념이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바빙크의 어거스틴 인용을 보면 어거스틴의 삼위일론에도 이미 페리코레시스란 개념이 등장한다. 사실 어거스틴 이전에는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 교리가 거의 대동소이했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부터 서방교회에서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한 본질에서 삼위되심을 설명하는 전통이 생겼다.

 

  4. 몰트만은 신학이 인문학의 여왕이라면 그 여왕이 머리에 쓴 금관이 삼위일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의 정체성은 삼위일체론과 더불어 일어서고 넘어진다고 말했다. 삼위일체 교리가 무너지면 기독론도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의로운 한 선지자의 죽음이 될 뿐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는 신론으로 번역된 복음이라고까지 말한다.  기됵교의 예배의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잘 모르는 것은 예배의 대상을 잘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삼위일체 교리는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을 잘 설명해준다. 유대교와 같은 유일신 전통에서는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설명하기 매우 어렵다. 그래서 제 2성전기에 유대교 신학자 필로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중간적 존재를 상정하기도 했다. 실제로 유대교는 철저한 전제군주적 유일신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이해 못한다. 초대교회의 기독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는데, 이것은 초대교회 신자들도 유대인이었는데 유일신론자들인 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게 되었고 나아가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다.

 

  5. 삼위일체교리는 사변적, 철학적,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구체적인 구원의 경험으로부터 형성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에 대한 초대교회의 고백이 그들의 구원 경험으로부터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유대교 전통에서 인간의 구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였고 그 결과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성령에 대한 고백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이후 초대교회는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대했는데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 체험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 안에서 교회 공동체 안에 임재하심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는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고 하나님이신 예수의 임재를 매개하는 성령 역시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신성에 대한 고백은 초대교회의 구원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는 바로 이 구원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에 대한 철학적 사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구원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한 송영과 찬송 그리고 교회 예전의 세례와 축도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삼위일체 교리는 초대교회가 이미 예배 속에서 기도, 찬양, 경배를 통해 체험한 신관을 나중에 체계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교리만아 아니라 기독론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 교리도 초대교회가 예배 안에서 예수의 신성과 인성을 경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한 경험으로 부터 형성된 것이다. 모든 교리는 예배로 부터 나온 것이며 신학의 자리는 교회이고 예배이다. 모든 신학은 예배의 산물이며 신학의 목적은 예배와 송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배의 찬양과 기도와 경배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험해야 한다. 사실 삼위일체 교리뿐 아니라 모든 교리는 예배 속에서 경험되어야만 한다.

 

바빙크의 삼위일체론(2)- 이동영

2016-03-01 01:48:00


1.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전체 기독교가 서고 넘어진다. 삼위일체 교리는 모든 교리의 뿌리이며 새 언약의 실체이고 기독교의 심장이다. 그리스도인의 경배와 찬양과 기도의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지 전제군주적 유일신이 아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사변이 아니라 예배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존재의 신비가 아니라 경륜의 신비를 규명하기 위해 개진된 것이다.초대교회는 구원 경험을 통해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확신했고 예배 가운데 삼위 하나님께 경배하며 기도와 찬송을 올려드렸다. 그러니까 초대교회가 예배 속에서 경배하고 찬양하던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설명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사변이나 사색의 언어가 아니라 예배와 찬양 그리고 기도의 언어로 체험되고 습득되어야 한다. 모든 교리는 예베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든 교리는 예배 속에서 기도와 찬양과 경배 가운데 체험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교리는 예배 경험에 대한 해설이다.

 

2. 동방의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삼위되심에서 출발하여 삼위의 하나되심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면  서방은 아우구스티누스 이래로 한 하나님의 본질에서 출발하여 이 한 본질이 삼위로 존재하심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오늘날 삼위일체론은 동방 교회의 방식이 대세를 이루고 동방 전통으로 서방 전통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동방 전통과 서방 전통이 양자택일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임을 강조하였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가 동서방이 모두 삼위에서 출발하며 삼위의 하나되심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 이해가 다르다는 말은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 이전에는 틀린 말이다. 오늘날 동방 전통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하나님의 한 본질로부터 삼위를 설명하는 서방교회의 전통은 양태론을 피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양태론을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동방교회의 전통에서 종속론이나 삼신론의 위험을 감지했고(물론 동방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삼위가 페리코레시스를 통해 하나되심을 설명했지만) 그래서 하나님의 한 본질로부터 시작하여 삼위를 설명하는 방식을 도입한 것이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의 방식은 양태론의 위험이 있고 그래서 그는 이 위험을 방어하기 위해 전유교리를 제시했다. 전유교리란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창조, 구속, 성화의 사역을 공유하지 않고 전유한다는 교리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유교리를 통해 양태론을 피하고 삼위의 위격적 구별을 설명하려고 했다.

 

3.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설로는 동방에서 아리우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역동적 전제군주론과 서방에서 사벨리우스가 주장한 양태론적 전제군주론이다. 역동적 전제군주론은 보통 종속론이나 삼신론 이단이라고도 불리우는데 그 주된 주장은 성부만 하나님이시고 성자와 성령은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와 성령의 창조이전에 성부는 아버지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셨다고 주장한다. 성부는 아버지가 아니었던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성부의 신성만을 인정하고 성자와 성령을 성부에게 종속시키므로 종속론 이단 이라고도 한다.다른 한편 서방에서 등장한 양태론 이단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성부, 성자, 성령의 세가지 양태(tres modi)로 등장한다는 주징이다. 한 분 동일한 하나님이 창조사역에서는 성부로, 구원 사역에서는 성자로, 성화사역에서는 성령으로 역할만 바꿔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역동적 전제군주론은 동방에서 일찌기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당했지만 서방의 양태론 이단은 정통의 이름으로 가르쳐지고 서방 교회에 상당한 뿌리를 내렸다. 이 두 이단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전제군주론이라는 점이다.

 

4. 알렉산드리아 교회에서 벌어진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 논쟁에서 아리우스파는 삼위의 다른 본질(hetero usios)를 주장한데 반해 아타나스우스는 삼위의 동일 본질(homo usios)를 주장했다. 동방교회의 다수가 아리우스를 지지했고 아타나시우스는 소수파였다. 중도적 입장을 가진 유사파가 있었는데 그들은 삼위의 유사 본질(homoi ousios)을 제안했지만 정서적으로는 아리우스파에 가까웠다. 삼위의 동일본질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는 양태론자라는 의심을 받았고 실제 서방의 양태론자들이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주후325년에 니케아에서 최초의 공의회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승리하고 아리우스파는 이단으로 정죄받는데 이는 유사본질을 주장한 중도파가 아타나스우스 편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타나시우스에게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동일본질을 적용하고 삼위를 구별하는데는 유사본질을 적용할 것을 제안했고 아타나스우스가 이 제안을 받아들임으로 그는 유사파의 지지를 얻게 된 것이다. 아타나시우스의 동일본질 교리는 위대한 교리이다. 왜냐하면 동일본질 교리는 삼위 하나님이 동일 본질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심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교리는 치열한 투쟁 그리고 많은 사람의 기도와 눈물의 산물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5. 삼위일체의 내적 구성교리 역시 치열한 논쟁의 산물이다. 동서방이 모인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성부(Pater)는 유일한 신성의 원천(fons deitatis)으로 간주되었다. 성자(Filius)는 신성의 원천이신 성부로부터 영원한 출생(generatio)의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성령(Spiritur)은 신성의 원천이신 성부로부터 영원한 발출(processio)의 방식으로 존재하신다.  아들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은 시간의 국면이 아니라 창세전의 영원의 국면이다. 성부로부터 성자는 영원히 나오시고 성령은 영원히 발출하시므로 성자와 성령이 없이 성부만 계시던 적은 없다. 하나님은 영원전 부터 항상 삼위로 계셨다.  성부는 신성의 원천이시고 아들은 출생의 방식으로 신성을 성부와 공유하며 성령은 발출의 방식으로 신성을 성부와 공유하신다. 그래서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는 동일한 신적 본질(homo usios)을 가진 한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필리오케(filioque)논쟁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주후1054년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한다. 필리오케 교리는 서방교회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것인데 그는 동방교회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의 전통에서 성부를  신성의 원천으로 주장하는데 성부 종속론의 위험이 있음을 간파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령이 성부와 함께 성자로부터 발출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도는 동방교회의 아리우스적인 종속론적 전통을 교정해 보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성부가 삼위일체의 내적질서의 수위권을 가지고 있는데 필리오케를 넣으면 성령이 성자와 동등한 위치에 있지 못하게 되며 나아가 성부와 더불어 성자도 신성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성부가 신성의 유일한 원천이 된다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이 합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필리오케 논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삼위의 동일본질을 논하면서 성부와 성자, 성부와 성령의 관계에만 주된 관심을 가졌고, 성자와 성령의 관계를 제대로 규정하지 못함으로써 후대에 발생한 논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송영의 삼위일체론(13-16장)- 이동영

2019-07-17 00:28:42


송영의 삼위일체론 13-16

 

13장 삼위일체의 내()적 구성에 관한 교리

 

삼위일체의 내()적 구성에 관한 교리는 동방의 카파도기아 교부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정립되었고 이후 동방과 서방에서 삼위일체의 내재적 구성의 원리에 대한 공교회의 교리로 받아들여졌다. 이 교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성부는 기원이 없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성자와 성령의 기원이시고 이 양자의 신성의 원천이시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며,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 분이시다

 

성부, 영원한 신성의 원천이시며 삼위의 통일성의 원리

성부는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1 위격의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신성의 원천으로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을 영원히 나오시게 하신 분이시다. 1위격의 하나님을 성부라고 부르는 것은 성자와의 관계 속에서 그렇게 명명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라는 호칭은 각각 서로가 서로를 전제한다고 할 수 있다. 영원한 신성의 원천이신 성부는 성자를 영원히 낳으시고 성령을 영원히 내쉬신다. 그러므로 성부의 위격은 성자와 성령이 지니신 신성의 원천이며 삼위일체의 일치성과 동일성의 원리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동일본질을 소유하는 까닭은 신성의 원천인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성자는 출생의 방식으로 성령은 발출의 방식으로 성부의 신성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성자의 출생과 성령의 발출을 이 두 위격들의 유일한 기원이신 성부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상호관계성의 원리를 세 위격들 바깥에 존재하는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이라는 매우 철학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 정초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바빙크는 신적인 본질은 세 위격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동의 본질, 즉 성부로부터 성자와 성령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동일한 신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삼위의 통일성(단일성)의 원리를 성부의 위격으로 보지 않고 삼위 바깥의 한 분 하나님의 본질로 설정하게 되면 삼위 하나님의 상호간의 관계와 사귐에 대한 사유는 한 분 하나님의 본질의 다양한 나타남의 방식이라는 신플라톤주의적인 사색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그 최악의 결과가 바로 사벨리우스주의, 곧 양태론이다.

 

성부로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다. 2위격의 하나님이 성자로 불리는 까닭은 그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자라는 호칭은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명명된 것이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한 출생의 방식으로 성부가 소유하신 신성의 본질을 공유함으로써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다. 성자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성자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성부에 의해서 창조된 분이 아니라는 뜻이다. 성부가 어떤 특정한 시점에 존재하신 분이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분이신 것처럼 성자도 어떤 한 특정한 시점에서 출생하신 분이 아니시다. 성자는 시작과 끝이 없으신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시기에 존재에 있어 성자 역시 시작과 끝을 가진 피조물이 아니다. 아리우스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성자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첫 번째로 창조된 완전한 피조물이란 의미에서 아들로 불린다고 주장했는데, 이런 주장이 용인될 경우 성자는 성부와 동일본질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 중에 으뜸가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자가 십자가에서 이룬 대속의 사건은 온 세상을 위한 구속의 사건이 아니라 한 의로운 인간 예언자의 죽음이 되고 말 것이다.

 

성부로부터 성령의 영원한 발출

3위격의 하나님이신 성령은 신성의 원천이신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 분이시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신 분, 즉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성부의 영원한 숨결로 내쉬어진 분이시기에 성부와의 관계 속에서 성령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성령을 의미하는 라틴어 스피리투스’, 그리스어 프뉴마’, 히브리어 루아흐는 모두 호흡, 입김, 숨결, 바람이라는 뜻이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발출(내쉬어짐)의 방식으로 성부가 소유하신 신성의 본질을 공유하심으로 성부와 동일본질을 가진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성부와 성자가 동일본질이고, 성부와 성령이 동일본질이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동일본질이시다. 성령이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했다는 것은 성령이 어떤 한 특정한 시점에 성부로부터 발출한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성부로부터 발출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는 성령을 발출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며 성령 또한 성부로부터 발출되지 않으신 적이 없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되신 분이시기에, 존재에 있어 어떤 특정한 시점을 가지는 피조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신성을 소유하신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결론과 요약

삼위 중에 성부만이 가지는 존재방식, 즉 비공유적 속성, 곧 성부됨의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비출생성 및 신성의 원천성이다. 비출생성 및 신성의 원천성은 성부가 성자나 성령이 함께 공유하는 속성일 수 없다.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한 출생을 통해,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한 발출을 통해 성부의 신성을 공유하신다. 그러므로 성부는 삼위의 통일성(일치성)의 원리이며 기반이시다. 성자됨의 속성, 즉 출생성은 삼위 중에 오직 성자만의 존재방식, 즉 성자의 비공유적 속성이다. 성자는 이런 출생의 속성을 성령과 공유하지 않는다. 성령됨의 속성, 즉 발출성은 삼위 중에 오직 성령만의 존재방식, 곧 성령만이 소유하는 비공유적 속성이다. 성령은 이런 발출의 속성을 성자와 함께 공유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비공유적 속성으로 구분되며, 동시에 동일한 신성을 공유함으로 동일본질을 가지신 한 하나님으로 일치(통일)되신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라는 표현은 숫자적인 단일성으로 이해돼서는 안 되고 신성의 동일성 즉 본질의 동일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빙크는 신성의 본질을 세 위격들 밖에 존재하는 추상적 보편개념으로서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삼위가 소유하는 신성의 본질은 세 위격(개별 실체)들 바깥에 또 하나의 독립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 위격들 안에 있는 하나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위격에 있어 세 분이시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이시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이신 하나님이 아니라 동일한 본질을 소유하신 한 하나님 즉 동일한 하나님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14장 성부, 성자, 성령은 누구신가?

 

성부는 누구신가?

1위격의 하나님이신 창조주 하나님이 성부이신 까닭은 그가 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원 속에서 성자를 영원히 낳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라는 호칭은 각각 서로를 전제하고 있다. 카파도기아 교부인 카이사레아의 바실리오스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한 본질이며 성부와 성자의 호칭은 관계적 호칭이지, 양자가 서로 다른 본질이기에 붙여진 이름이 아님을 명백하게 가르쳤다. 동방 교부인 고백자 막시무스도 성부라는 호칭은 본질 또는 사역의 이름이 아니라 성자, 곧 아들과의 관계 속에서 명명된 이름이라고 가르쳤다. 여기서 성부가 아들을 낳으셨다고 해서 성부를 일방적으로 남성적 표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특정한 성에 고착시켜 이해하는 것은 그리스 신화적 사고를 하나님 이해에 투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자웅동체인가? 이런 생물학적 논리에 근거한 발생론적 사고를 신론에 투영하는 것은 대단한 이교적이고 위험하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이 성부로부터 성자의 출생을 고백한 것은 생물학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성경계시에 의존해서 사유한 결과였다.

 

성자는 누구신가?

2위격의 하나님이 성자이신 까닭은 그가 성부로부터 영원히 출생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자 호칭 역시 성부와 관계 속에서 불리는 관계적 호칭이다. 아들은 출생의 방식으로 아버지의 영원한 신성을 아버지와 함께 공유하고 계신다. 아들은 자신의 신성과 존재를 아버지로부터 받지만 신성의 원천을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신성의 원천은 오직 성부에게만 귀속되는 비공유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이 신성의 원천을 성부와 공유한다면 삼위일체 안에 두 개의 신성의 원천을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동방교회가 성령의 발출문제를 놓고 서방교회의 필리오케(Filioque: 또한 아들로부터) 주장을 단호하게 반대했던 이유. 성령이 성부로부터 발출하실 뿐만 아니라 성자로부터도(필리오케) 발출하신다면 삼위일체 내부에 암암리에 두 개의 신성의 원천을 설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 동방교회의 비판이었다. 그러나 서방교회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의 원문에 필리오케라는 문구를 훗날에 첨가한 것은 삼위 내부에 두 개의 신성의 원천을 설정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성령은 누구신가?

3위격의 하나님이 성령이라고 불리어지는 이유는 그가 영원 속에서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신적인 능력일 뿐 아니라 인격적 실체라는 것은 동서방의 공동 고백이다. 그러나 성령의 인격적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성경에서 도출해 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성령이 너무 겸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성령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자신의 권능을 통해 오직 성부와 성자만을 드러내시고 정작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은 단 한 번도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셨다. 성령은 성부의 창조사역에서 창조의 영이셨지만 창조주이신 성부를 돋보이게 하시고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은 숨기셨다. 또한 성령은 성자의 성육신, 시험과 사역과 고난과 죽음과 부활 가운데 능력으로 함께 역사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령은 구원의 역사에서 구세주이신 성자를 돋보이게 하시고 자신의 인격적 정체성은 숨기신 분이다. 이렇게 창조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 성령의 성품을 고찰할 때, 우리는 성령이 지극히 겸손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심을 깨닫게 된다. 더구나 성령이란 호칭도 성부나 성자에 비해 인격적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표현해주지 못한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도 성부의 창조사역이나 성자의 구원사역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현시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성령은 성자와 비교해볼 때 신자들과 약한 인격적 관계에 있다. 성령님의 이런 독특한 성품으로 인해 고대의 양태론자인 사벨리우스는 성령의 인격성을 부인하고 성령을 단지 하나님의 능력의 가시적 표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신학자 슐라이어마허도 성령을 단지 교회공동체의 집단적 자의식으로서의 교회의 영일뿐이라고 정의하고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성령이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회는 처음부터 성령이 인격적 하나님이심을 고백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할 수 없으며 신자가 성부와 성자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영원히 발출하시지만 아들로부터 발출하지는 않는다. 만약 성령이 아들로부터도 발출한다면 아들은 제2의 성부로 오해될 수도 있다. 그래서 동방교회는 성령은 오직 성부로부터만 발출하시지 아들로부터도 발출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바빙크와 몰트만이 잘 지적했듯이 아들을 말씀(로고스)로 규정할 때 성령이 성부 및 성자와 가진 관계가 잘 규정될 수 있다. 성부는 그의 영원한 말씀(성자)를 그의 성령을 영원히 내쉬는 가운데 하신다. 말씀을 하시는 것과 성령이 내쉬어지는 것은 나뉠 수 없고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말씀과 성령은 함께 그리고 동시에 성부로부터 나오시기 때문에, 말씀과 성령은 동등하시고 양자 간에 서열을 정할 수 없다. 성령은 아들처럼 신성과 본질을 성부로부터 받으시기에 성령은 피조물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동일본질을 소유하시는 한 하나님 즉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

 

15장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

 

삼위일체 교리는 신학적 사변이 아니라 예배(송영)으로부터 형성된 것이다.

이 교리의 배후에는 초기 교회공동체의 구원의 경험이 엄존한다. 초기 교회 성도들의 구원의 경험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삼위로 고백하게 했으며 그들의 예배 속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경배되고 묵상되고 찬양되었다. 이런 초기 교회의 구원의 경험을 신학적 논리를 따라 정리하고 해석을 가한 것이 삼위일체 교리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의 예배야말로 삼위일체 교리의 근원이며 모태라고 할 수 있다. 교부 프로프레스 아퀴타투스는 예배의 법이 신앙의 법을 앞선다고 말하며 예배가 신학이나 교리의 모태임을 천명했다. 삼위일체 교리를 사변하는 것보다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더 낫다는 이 단순한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서 삼위일체론과 관련해 심각한 문제는 이 교리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나름대로 시도되고 있지만, 이 교리가 정작 교회의 예배(예전) 속에서 실천되지 않는다는데 있다.

 

16장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개념과 그 신학사적 배경

 

내재적 삼위일체

내재적 삼위일체란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의 신비를 묘사하는 삼위일체를 말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영원 전부터 홀로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내적 신비를 규정하는 교리다. 우리는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와 더불어 자기 자신 속에 계신 하나님, 즉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 곧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자기 자신 속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었는지를 질문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창조, 타락, 구속의 구원 역사가 펼쳐지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결코 인식될 수 없었던 감추어진 삼위일체다. 전통적으로 내재적 삼위일체는 두 가지 사역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는 성부로부터 성자의 영원한 출생이며 둘째는 성부로부터 성령의 영원한 발출이다. 성자의 영원한 출생과 성령의 영원한 발출에 있어 성부는 신성의 기원 없는 기원이시며 원리 없는 원리이시다.

경륜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란 창조와 구원의 역사 속에서 드러난(계시된)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밖을 향하여 행하신 삼위일체의 사역이라고 말했다. 경륜적 삼위일체는 이 세상의 구원과 관련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사역하시는지를 질문한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자기 자신 안에 계시는 하나님을 말한다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을 말한다. 삼위일체 교리의 뿌리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아니라 경륜적 삼위일체에 놓여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 경륜 안에서 자가 자신을 삼위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경륜적 삼위일체의 사역은 성부의 창조, 성자의 구원, 성령의 성화로 구성된다. 그러나 세 위격의 사역 속에는 매번 한 분의 인격이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나누어지지 않는 협력 속에서 세 위격이 활동한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각 위격의 어떤 행위도 고립적이지 않으며, 다른 위격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교리의 신학사적 배경

삼위일체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로 구분하는 전통은 초기 교회의 교부들로부터 중세의 교부들을 거쳐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발견된다. 처음에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양태론에 대항한 초기교회의 투쟁 속에서 특별히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구분되었다. 2세기에 활동한 리옹의 이레나이우스는 구원사에 있어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구분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세 명의 카파도기아 교부들은 신학 전체를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에 대한 이론이라고 간주했으며 하나님의 삼위일체 안에 내재와 경륜 사이의 구분을 설정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안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 즉 하나님의 내적 본질과 밖을 향한 삼위일체의 사역, 즉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구분하여 가르쳤다.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구분은 루터와 칼뱅으로 대변되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삼위일체의 안을 향한 사역보다는 밖을 향한 사역에 더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로부터 삼위일체를 인식하기를 원했다. 물론 그들이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를 인정하고 수용했지만 그들은 이 세상을 향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관심을 집중했다. 개혁자들에게 있어 삼위일체론은 하나님 없는 자들에 대한 오직 은총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신론으로 번역해 놓은 것이었다.

 

결론

고전적 신학은 내재적 삼위일체 속에서 자기 자신 속에 계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내적 신비를 취급했고 경륜적 삼위일체 속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 즉 구원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사역을 취급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사이의 고전적 구분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본질적 우위성을 강조했고, 그것과 더불어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자유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강조한 측면이 있다. 그러다보니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념성과 추상성이 경륜적 삼위일체 이해에 짙은 암영을 드리우게 되었다. 그 결과 삼위일체 교리는 초기 교회의 구원의 경험이라는 교리 형성의 원래의 삶의 자리로부터 이탈하여 삼위하나님의 내적 존재의 신비를 추상적으로 논구하는 난해한 사변으로 전락하게 된 측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