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하나님의 자계시(self-revelation) 방식

메르시어 2023. 5. 11. 15:31

하나님의 자계시(self-revelation) 방식

2016-01-29 17:19:23


   하나님은 스스로를 우리에게 어떻게 드러내시는가?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 이 말은 하나님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계시가 없다면 우리의 상상으로 왜곡된 신관을 가질 수 밖에 없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우상을 숭배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말이다. 성경이 시작되는 첫 구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그리고 가장 근본적인 자계시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그분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니까 이 최초의 자계시는 하나님은 천지만물의 창조주로서 피조물과 창조주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계신 분으로 드러낸 것이다.  이 최초의 자계시는 하나님이  만물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가라는 관계론적 관점으로 주어졌다..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자계시는 철저하게 관계론적으로 주어진다. 성경은 관계론적이 아닌 존재론인 관점으로  하나님을 계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존재론적 관점으로 계시한다면  그  계시는 우리에게 이해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은 인간과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제나 성경은 하나님을 관계론적 관점으로 계시한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기사 역시 하나님에 대한 관계론적 자계시이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인간을  자기 형상과 모양으로 지으셨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인간과 어떤 관계에 있는 분이신가라는 관계론적 관점으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만물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시고 인간을 통하여 다스리기로 작정하심으로 인간을 지으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하나님이 누구신가하는 것이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하나님은 인간의 원형이시다. 하나님이 만물의 왕이시라면 인간은 그 왕권을 대리하는 존재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속에서 계시되고 있고 인간 존재의 정체성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설파한대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하고는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며 또한 인간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고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지 못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분명한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라고 소개하신다. 그리고 이 이름은 이스라엘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이스라엘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이시듯이 모세가 장차 애굽에서 인도하여낼 이스라엘 백성들과도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그리고 나아가 그 언약에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의미를 가진 이름인 것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관계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언약관계를 떠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나아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의 일관된 증언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며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에 신실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이스라엘에게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에 신실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자신들의 고통스런 역사를 만들어 내었기 때문이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 때가 차매 이스라엘 백성을 애급에서 건져내셨다. 그리고 그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셨다. 언약을 맺으면서 십계명이 함께 주어졌는데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은 하나님의 자계시와 관련된 계명이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첫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되 하나님의 자계시에 따라서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엄중한 경고였다. 둘째 계명도 첫계명과 관련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론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지 않으시고 오직 언약이라는 관계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하는 둘째 명령 역시 첫 명령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계시에 충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라는 언약적 요구였 것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은 이후에 즉시 발생한 황금 송아지 사건은 이스라엘이 십계명의 첫 두계명을 직접적으로 위반한  사건이었다. 그들은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기려고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섬기되 하나님의 자계시가 아닌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 것이었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숭배한 결과가 된 것이다.

 

   언약을 맺은 이후에 성막을 지으라는 명령이 즉각 주어지는데 성막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시각화하고 일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언약은 단 일회적으로 맺어진 시간이었지만 그 사건을 일상적으로 체험하고 기억하기 위한 방편으로 성막이 주어진 것이다. 성막은 이스라엘의 진영 가운데 위치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적 삶을 함께 살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성막안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 안에 십계명 돌판을 담아둔 언약궤가 놓였고 동시에 성소에는 이스라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건들이 배치된 것이다. 그러니까 성막은 언약의 양 당사자인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함께 언약적 동거를 하면서  일상적으로 대면하는 장소를 의미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하나님이 언약궤라는 형태로 헝상화되었고 하나님이 그렇게 형상화도록 명하셨다는 점이다. 이것은 십계명과 전면적으로 모슨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언약궤라는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것을 허용하셨다. 십계명에서 금한 형상화는 하나님을 피조물들 중의 어느 하나로 비견하여 형상화하지 말라는 것이었지 모든 형상화 자체를 금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의 임재를 언약궤로 형상화하신 것 역시 이미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 이전의 방식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분으로 계시하시는 관계론적인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언약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의 자계시와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자계시가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신 것이라면 최종적인 자계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주로 계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계시된다. 그러나 이 최종적이고 완전한 계시 역시 구약에서 일관되게 사용된 언약이란 개념을 떠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건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 및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에 따라서 그 언약에 신실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었다. 그리고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역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최대치로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은 창조주로서 그리고 언약주로서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이며 또한 언약적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최종적 그리고 완전한 자계시 역시 하나님은 창조주이며 또한 언약주라는 관계론적 관점에서 주어진 계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