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의 내러티브
레위기의 내러티브
2016-01-29 00:52:32
레위기 1장
성막이 준공되고 이제 성막 안에서 이루어질 제사에 대한 규례가 주어지고 있다. 성막이 언약적 삶을 시각화한 것이라면 성막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제사제도는 언약적 삶의 내용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이 번제이다. 번제는 다른 제사와 달리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이며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반복하여 나온는데 이것은 그만큼 번제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의미일 것이다. 번제는 누구든지 하나님에게 드릴 수 있는 제사였는데 의무적으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원하는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제사였던 것 같다. 그래서 번제는 숫소, 양, 염소로 드릴 수 있고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비둘기로도 드릴 수 있었다. 번제의 특징은 제물을 남김없이 불살라 드린다는 점에 있다. 아마도 이것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완전한 헌신과 순종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번제를 유독 기뻐하시는 이유는 아마도 번제가 가진 전적인 자발성 그리고 헌신과 순종의 태도일 것이다. 제사가 언약적 삶을 형상화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언약 백성이 자원함으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삶을 가장 기뻐하신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번제는 언약적 삶에서 자발적인 헌신과 순종이 매우 중요하고 이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레위기 2장
구약의 제사 중에서 동물이 아닌 곡식으로 드리는 유일한 제사가 소제이다. 소제는 곡식 가루로 드리는 제사인데 일부만 불에 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음식으로 주어진다. 소제는 보통 독자적으로 드려지기 보다는 다른 동물 제사에 덧붙여져 드려진다. 소제는 곡식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경제적인 부담없이 일상적으로 드릴 수 있는 제사였으며 다른 제사에 덧붙여 제사드리는 사림의 감사와 정성을 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실용적으로는 제사장들의 일상의 음식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레위기 3장
이어서 화목제 규례가 잠시 나타나는데 화목제도 번제와 마찬가지고 자발적인 제사인 것 같다 .번제와 다른 점은 내장의 기름만 불태우고 나머지 고기는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번제에서는 새도 제물로 사용이 허락되지만 화목제는 소나 양이나 염소로 국한된다. 왜냐하면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은 사람은 화목제를 드리긴 어려웠을 것이고 화목제는 의무적이 아닌 자발적인 제사였다.
레위기 4장
속죄제의 경우는 누구든지 여호와의 계명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을 때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는 제사였다. 속죄제의 경우는 그 제물이 죄의 경중에 따라서 다르게 정해졌는데 제사장과 회중 전체가 죄를 범한 경우는의 경우는 수송아지로, 족장이 범죄한 경우는 숫염소로, 그리고 평민의 경우는 암염소로 정해졌다. 이 제사가 의무적인 만큼 번제나 화목제와 달리 제물의 선택에 자유가 없고 제물은 미리 정해져 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속죄제는 상당한 재정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속죄제도 화목제와 마찬가지로 내장의 기름만 불사르는데 다른 점은 피를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속죄한 속죄 제물, 즉 중대한 범죄의 속죄제물은 먹지 못하고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으로 가져가 소각해 버린다는 점이다. 또 특이한 점은 번제나 화목제는 동물의 피를 번제단 맡에 흘렸지만 제사장이나 전체 회중의 속죄제는 피를 가지고 성소 안으로 들어가 지성소 휘장에 뿌리고 분향단 뿔에 바른다는 점이다. 속죄제 규례에 나타난 전체적인 모습은 죄의 심각성과 위험성을 드러내며 더불어 특히 불태워진 기름외에 나머지 전체가 진영 밖에 버려진다는 것은 죄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며 언약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이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레위기 5장
속죄제 규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앞에서 속죄제 제물은 소나 염소로 정해졌지만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자들을 위한 예외적인 배려가 주어진다. 그 힘이 미치지 못할 경우 비둘기로도 드릴 수 있고 심지어 곡식으로도 속죄제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속죄제는 범죄한 자라면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드려야 하기 때문에 힘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비둘기나 곡식도 허용된 것이다. 그러나 허용되었다고 해서 죄지은 자가 자기 마음대로 정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아마도 제사장이 형편을 고려하여 판단했을 것이다. 속죄제에 동물 희생물이 아닌 곡식도 제물로 허락되었다는 점은 구약 제사를 전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흘림으로 환원하는 것이 무리한 생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죄가 대표적으로 몇가지 나열되는데 주목할 점은 속죄제는 먼저 그 죄를 깨닫고 잘못했노라고 자복하고 나서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일이 속죄제사에 선행되는 것을 보면 죄의 용서에서 죄의 자각과 고백이 제사 자체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속건제에 대한 언급이 잠시 등장하는데 누구든지 여호와의 성물에 대해 부지중에 범죄한 경우에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그런데 이 경우 속건제로 성물에 대해 손실을 끼친 금액에 상당한 제물을 드려야 하며 거기에 오분의 일을 보상으로 더해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니까 속건제는 자신의 잘못으로 금전적인 피해를 입힌 경우에 그 피해를 보상하는 의미로 드리는 제사인 것이다. 속죄제와 달리 그 피해가 보상되지 않으면 그의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속죄제는 금전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은 범죄의 경우 드리는 제사라면 속건제는 금전적인 피해를 입힌 경우에 드리는 제사로 볼 수 있다.
레위기 6장
속건제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여호와의 성물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그 피해 당사자에게 피해 상당액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보상을 한 후에 피해를 끼친 금액에 상당하는 가치를 가진 제물을 제사장에게 주어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그러니까 남에게 피해를 입한 경우에는 여호와의 성물에 범죄한 경우보다도 더 엄격하게 보상을 하고 난 후에애 속건제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 속건 제사에 나타난 언약적 삶의 모습은 피해 당사자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없이는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먼저 피해 당사자에게 진정한 용서를 구한 후에야 하나님 앞에 사죄를 청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번제에 대한 추가적인 규례가 주어지는데 번제단의 불은 항상 피워서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번제단의 불을 항상 피운다는 것은 제사 행위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할 것인데 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계는 언제나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할 것이다. 이어서 소제에 대한 추가적인 규례가 주어지는데 소제는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드리는 제사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아마도 소제가 다른 제사에 덧붙여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일 것이고 실용적으로는 제사장들의 일용하는 양식으로 주어져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사장이 먹고 남은 소제물은 다른 사람이 먹어서는 안되고 온전히 불살라야 한다. 이어서 속죄제에 대한 추가적 규례가 주어지는데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 속죄하게 한 속죄제 제물은 먹을 수 없지만( 진영 밖으로 가지고 나아서 불살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속죄 제물은 제사장이 먹을 수 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속죄제물, 온 회중의 속죄제물과 같이 피를 성소로 가지고 들어가야 하는 중대한 범죄의 속죄제물은 제사장도 먹을 수 없지만 족장이나 평민의 죄와 같이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지 않는 속죄제물의 경우는 제사장이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언약 공동체를 대표하는 제사장이나 언약 공동체 전체의 범죄는 다른 개인적 범죄와 구별하여 심각하게 간주됨을 보여준다.
레위기 7장
속건제에 대한 추가 규례가 주어진다. 속건 제물은 화목제와 마찬가지로 내장의 기름만 불사르고 나머지 고기는 먹을 수 있지만 화목제와 다른 점은 다른 백성은 먹지 못하고 오직 제사장만 먹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어서 화목제에 대한 추가 규례가 주어지는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의 경우는 무교병과 무교전병 그리고 구운 과자 등이 함께 드려지고 심지어 유교병도 드릴 수 있다. 이때 전체 예물 중에서 하나씩 여호와께 거제로 올려 드리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에게 들려진다. 물론 제사인들도 함께 먹을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이렇게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물의 경우는 드리는 그 날에 다 먹어야지 조금이락 이튿날 아침까지 남겨두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하면 그 예물이 예물답지 못하고 도리어 가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자발적으로 드린 예물이라면 식탁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다 베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감사외에 서원이나 자원하는 경우에도 화목제가 드려지는데 이것 역시 화목제가 가진 고도의 자발성을 잘 보여준다. 이렇게 화목제 규례의 전체적인 모습은 하나님과 언약 공동체가 한 식탁에 둘러 앉아 기쁨으로 참여하고 즐거워하는 언약적 삶의 공동체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피와 기름은 먹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피와 기름은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8장
레위기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후에 어떻게 언약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언약적 삶의 규례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거룩한 삶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하나님의 언약 상대방인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 여기서 거룩이란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 곧 언약적 신실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요구되는 거룩도 언약적 신실함이다. 언약은 언약의 쌍방이 언약에 신실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언약은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시지만 문제는 항상 이스라엘이 그렇지 못하다는데 있다. 이 언약을 통하서 하나님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언약에 신실할 때 그들의 삶 가운에 그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나라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나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이 중요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제사장을 세우는 의식이 거행되고 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먼저 회중을 모으고 그들 앞에서 위임식을 행하는 것은 제사장이 회중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임을 의미한다. 제사장은 회중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며 제사직무를 봉사하는 자로 세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외 회중을 대표하는 제사장 직무가 필요한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실용적인 이유만도 아니고 제사장이 특별히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이 공동체적 언약임을 의미한다. 제사장 제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존재하는 언약의 공동체성을 잘 보여준다. 오직 회중을 대표하는 제사장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언제나 공동체로서 하나님앞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인이 제사를 드릴 때도 그 제사는 언제나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드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제사장이 특별히 거룩한 존재이거나 그럴만한 자격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므로 언약공동체란 언약맺은 각 개체의 집합체나 조직체가 아니다. 각 개인은 언약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언약 공동체에서 배제되는 것은 곧 언약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과 동일시되었다. 제사장 위임식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속죄제-번제-화목제의 순서로 드려진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관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속죄제가 먼저 드려진 것은 언약관계에서 가장 먼저 처리되어야 할 것은 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그 다음에 드려지는 번제는 죄의 문제가 처리된 후에 하나님은 언약백성의 전적인 헌신과 의탁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드려지는 화목제는 이렇게 죄의 문제가 처리되고 헌신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적 샬롬을 함께 누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특히 위임식 화목제에서 화목제물의 피를 제사장의 귓부리, 엄지 손가락 그리고 엄지 발가락에 바르는 것은 이미 시내산 언약에서 보듯이(출애굽기 24장에서 언약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 제물의 피를 반은 제단에 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린 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생명을 담보한 엄중하고 심각한 관계 맺음임을 의미할 것이다.
레위기 9장
드디어 최초의 대제사장 아론이 세워졌고 이제 아론이 제사장으로서 직접 백성들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역시 제사의 순서는 제사장 위임식 제사와 마찬가지로 속죄제-번제-화목제의 순서이다. 온 회중이 모여서 드리는 최초의 공동체 제사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제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살랐다. 제사장 위임식 때가 아니라 온 회중의 회목제 제사 가운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난 것은 역시 여호와의 언약 상대방은 제사장이 아니라 이스라엘 온 회중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들과의 화목제 제사 가운데 여호와께서 친히 임재하시어 그 잔치에 참여하신 것이다.
레위기 10장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들의 잘못은 여호와게서 명하신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한 것이었다. 사소해 보이는 잘못이지만 그 결과는 엄중한 죽음이었다. 모세는 이 사건이 제사장들에게 여호와의 거룩함을 나타낸 것이고 온 백성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 사건은 여호와의 거룩함과 영광 앞에서는 어떤 잘못이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엄중한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해 제사장이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사건은 공동체를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제사장의 직임이 얼마나 중대한 것이지를 잘 드러낸다. 제사장은 성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는 것이 금지된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모세를 통해 주어진 모든 규례를 백성에게 가르치는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론이 속죄제 제물을 먹지 않고 불태워 버린 일이 비록 제사 규례를 어긴 것이지만 용납된 것은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에 대한 아론의 슬픔을 인정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레위기 11장
정한 생물과 부정한 생물에 대한 규례가 주어진다. 정한 생물은 먹을 수 있고 접촉이 허락되지만 부정한 생물은 먹어서 안되고 접촉도 금지되었다. 여기서 정, 부정의 의미는 물론 위생적 의미가 아니라 제의적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정 부정을 가르는 판단 기준은 일률적으로 정하기는 어렵다. 대체로 종의 구별이 분명하냐 아니냐는 것이 기준이 된것 같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아무튼 정/ 부정의 기준은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생물에 대한 정, 부정을 구별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44-45절에 제시된다. 그것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상적으로 만나는 생물들을 통해 가르쳐 주시려고 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생물들을 일상적으로 접촉하고 먹을 때마다 자신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실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이런 규례를 통해 이스라엘이 언약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늘 기억하고 거룩한 삶에 예민하게 주의하는 훈련을 시키시려고 한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내셨다. 여호와는 거룩하시므로 여호와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 이것이 레위기 정결규례의 정신일 것이다.
레위기 12-15장
여자가 임신하여 아이를 낳은 경우도 부정하게 간주된다. 일정 기간이 지나 산혈이 깨끗하게 된 후에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야 비로서 정결하게 된다. 아마도 이 기간은 산모가 외부와 접촉을 피하며 몸이 회복되는데 필요한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규례는 상당히 실용적인 목적도 겸하고 있었던 것 같다. 13장에서는 피부병에 관련된 자세한 규례가 주어진다. 피부병이 생기면 제사장에게 정, 부정의 판정을 받아야 한다. 부정한 피부병으로 판정된 경우느 일정 기간 진영 밖에서 살아야 한다. 이것은 아마도 피부병의 전염을 막기 위한 조처였을 것이다. 피부병이 나으면 진으로 돌아올 수 있는데 이 때에도 제사장의 판정을 받고 속건제와 번제를 드려 정결함을 받은 후에야 올 수 있다. 피부병 아니라 집에 생기는 공팜이의 경우도 제사장이 정, 부정을 판정한다. 부정으로 판정된 경우는 집을 헐고 그 집의 모든 흙도 부정한 곳으로 내어가야 한다. 몸에 유출병이 있는 경우도 부정으로 간주된다. 이렇게 예민하게 정, 부정을 분별하는 것은 부정으로 인해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으로 그들이 부정한 중에서 죽지 않게 하려함이다. 이런 모든 규례는 실용적이거나 위생적인 목적도 겸하였겠지만 이런 정결규례의 내면에 흐르는 근본적인 정신은 언약백성 다운 삶, 곧 거룩한 삶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정하신 정결규례를 따라서 삶으로서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늘 기억하고 거룩한 백성으로서 언약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배우고 훈련하였을 것이다. 레위기가 보여주는 거룩한 삶이란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언약백성인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예민하게 사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출애굽기 19장에서 언약을 맺은 후에 출애굽기 후반부 전부와 레위기는 언약적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규례들로 가득차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언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언약적 삶이다. 왜냐하면 언약의 목적은 언약적 삶, 곧 거룩한 삶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16장
지성소에는 제사장이라도 아무 때나 들어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일년에 한 번 일곱째 달 십일, 곧 대속죄일에만 대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다. 이 날에 이스라엘의 모든 죄가 여호와 앞에서 정결해 질 것이다., 여기서 특히 여호와 앞에서란 말이 강조되는 것은 죄의 개념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에서 나오는 것임을 보여준다. 이 속죄 규례는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킬 규례임이 반복하여 강조되고 있는데 이는 죄의 문제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에서 반드시 처리되어야만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임을 의미할 것이다. 대속죄일에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속죄 제사에서 아사셀 염소가 등장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속죄제와 다른 점이다. 염소 두마리를 준비해서 한마리는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 염소로 속죄를 한 것이다다. 이것은 속죄행위를 이중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대속죄일에 이스라엘의 죄가 근본적으로 제거됨을 확인해 주려는 것이다. 특히 아사셀 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죄를 지고 진영을 떠나 접근하기 어려운 광야로 보내지는데, 아사셀 염소는 다시는 진영으로 돌아올 수 없게 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죄와 불의가 다시는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지 못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대속죄일 규례는 이스라엘의 언약적 삶에서 죄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하고 또 속죄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여준다.
레위기 17장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은 제사 짐승을 잡을 때 반드시 성막에서만 잡아야 한다. 그리고 먼저 여호와께 화목제로 드려야한다. 아마도 이런 규례는 성막이 있기 전에 이스라엘이 애굽의 풍속을 본받아 사사로이 제사를 드렸던 잘못된 관습을 철폐하려는 것인 듯 하다. 이 규례 또한 영원히 지켜얄 규례로 선포됨면서 만밀 이 규례를 범할 경우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진다는 엄중한 경고가 덧붙여진다. 이 규례는이스라엘의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은 오직 한 분 여호와시라는 십계명의 첫계명의 정신에 기초한 규례일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고 엄중하게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도 매우 엄중한 경고와 함께 주어진다. 피를 먹는 자도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다.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모든 생명은 여호와의 것인데 피는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사에서 피가 흘려지는 것은 그 생명이 생명의 주인인 여호와께 드려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사에서 피가 죄를 속하는 상징물로 사용된 것은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레위기 18장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애굽 땅의 풍속도 가나안 땅의 풍속도 따르지 말고 오직 여호와의 법도를 따르며 여호와의 규례를 지켜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백성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이나 가나안의 풍속을 멀리하고 여호와의 규례를 따라야 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여호와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이어서 성적 범죄를 금지하는 규례들이 주어지는데 이런 성적 죄악들은 아마도 장차 이스라엘이 들어가 살게 될 가나안 땅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죄악들이었을 것이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그 땅도 더러워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악을 벌하시며 쫒아내시고 그 땅도 그 주민을 토하여 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며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고 장차 가나안 땅을 그들이게 유업으로 주시는 것은 바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살게하시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사명은 바로 이것이며 여기에 바로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가 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들도 가나안 땅에서 쫒겨나게 될 것이다.
레위기 19장
어떤 규례를 명하시면서 반복하여 후렴구처럼 등장하는 말이 바로 "나는 여호와이니라"라는 말씀이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 동일한 말씀을 수없이 반복하시는 것일까? 반복되는 것은 그만큼 그 말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명하시는 규례에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백성이기 때문이다. 또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떤 규례를 명하시는 것은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기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나라에서 규례나 계명이란 도덕이나 윤리적 차원이기 전에 언약적 차원인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로부터 모든 규례와 계명이 흘러나오며 그 규례와 명령에 순종해야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규례와 계명을 주시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백성 답게 살게하시려는 것이며 이스라엘에 그 규례와 계명에 순종해야 하는 것 또한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백성 답게 살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규례와 계명을 윤리나 도덕이 아니라 언약법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언약법을 통해 언약관계는 유지되고 발전되는 것이고 만일 언약법을 어길 경우 그 언약은 후퇴하거나 심지어 파기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어지는 모든 규례 역시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때 그곳에서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규례요 계명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결코 가나안 풍습을 따라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스라엘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 과목을 심으면 삼년동안은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길 것이고 사년 째 과실은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으라고 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가나안 족속의 죄악을 미워하시며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악에 참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시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모든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요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이기 때문이다.
레위기 20장
여기서도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에 참여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죄악에 참여하는 자는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서 반드시 제거하여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중에서 끊으실 것이며 공동체는 그들을 죽여서 공동체에서 악을 제거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해야 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모든 규례와 계명을 지켜 행해야만 그들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이 그들을 토하지 않을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가나안 족속의 모든 풍습을 가증히 여기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의 풍속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만민 중에서 구별하시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거룩해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하시므로 이스라엘도 여호와께 거룩해야 한다. 여기서 레위기의 핵심 단어인 거룩의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거룩은 도덕이나 윤리의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 개념이다. 즉 거룩하다는 것은 이미 맺어진 관계에 합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며 그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 신실한 행동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소유로 삼으시려고 만민 중에서 구별하신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거룩하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별하셨다면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을 구별해야 하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의 제1계명이 의미하는 바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오직 여호와만을 경배하고 신뢰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호와이니라"는 반복되는 말씀은 "내가 너를 구별하여 대했으니 너도 나를 구별하여 대하라"는 말씀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언약 상대방을 향한 언약적 신실함이다.
레위기 21장
이어서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 대한 규례가 주어진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하야 하고 그들의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왜야하면 그들은 여호와께 여호와의 화제를 드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제사장들의 거룩은 백성들의 거룩과 무관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족의 죽음이나 자신들의 결혼 문제에 관해 다른 백성들 보다도 구별되어야 한다. 육체의 흠이 있는 자도 제사장 노릇을 할 수 없다. 놀라운 것은 여호와가 거룩하니 이스라엘도 거룩하라는 명령에서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적극적 거룩의 선언이 나온다는 점이다. 여호와의 거룩은 이스라엘을 거룩을 요구하는 동시에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레위기 22장
제사장을 성물을 먹을 때도 스스로 구별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제사장은 다른 백성들과 달리 성물을 먹는 특권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만큼 자신을 더 구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영환자나 유출병자 시체의 부정에 접촉된 자나 설정한 자는 정결하게 된 후에 성물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자신을 더럽히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제사장의 식솔들이나 돈으로 산 종들도 성물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성물이 제사장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생게를 같이하는 식구들에게도 허락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물이 거룩한 것이므로 아무나 먹을 수 없지만 동시에 성물은 제사장들의 일상적인 음식으로 주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흠이 없는 온전한 것으로 제물을 드려야 할 것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여호와께 드리는 것은 성물이기 때문이다. 흠이 있는 제물은 기쁘게 받으심이 되지 못한다. 이스라엘이 이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 계명을 주신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적 충성을 요구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나님이 명하신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하여 거룩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이유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이 언약관계를 위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레위기 23장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규례는 출애굽기 23장과 34장에서 간단히 언급되었는데 여기서 자세하게 다시 주어진다. 그런데 3대 절기 규례가 주어지는 첫머리에 안식일 규례가 언급되는 것은 3대 절기도 안식일의 법정신에 근거하고 있음을 암시할 것이다. 이 3대 절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본격적으로 지켜야 할 규례였다. 그것은 유월절과 이어진 무교절 및 초실절, 그 다음에 초실절로부터 일곱 안식일이 나난 다음 날인 오순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7월에 있는 대속죄일과 장막절이다. 먼저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은 모두 이스라엘 달력의 1월에 시작되는 절기로서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였다. 먼저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출발이 바로 애굽에서의 해방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며 이어지는 무교절은 해방된 이스라엘의 구별된 삶을 그리고 초실절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첫 은혜를 의미할 것이다. 이런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한 해를 시작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의 근거와 삶의 출발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에 있다는 것을 마음에 되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절기인 오순절은 이스라엘의 첫번째 밀추수가 시작되는 절기로서 이것은 장막절이 거둘 마지막 밀 추수의 예표이자 보장으로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기였을 것이다. 마지막 장막절은 7월 10일의 대속죄일이 지난 후 15일부터 일주일간 누리는 축제였다. 이것은 한 해의 모든 추수를 마감하고 하나님이 한 해 동안 베푸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절기였을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 절기에 이스라엘이 일주일간 집을 떠나 장막에서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를 지날 때 장막에서 살던 시절을 잊지 않고 기억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장막 생활을 하던 때에 은혜를 베푸셨듯이 여호와는 이제 가나안에서도 해마다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장막절의 일주일간 장막 생활을 통해 이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신실하게 살 것을 다짐하는 절기였을 것이다.
레위기 24장
지금까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모든 규례와 율법의 토대는 언약에 기초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기에 이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성소에서 매일 켜는 등잔불이나 매 안식일마다 진열해야 하는 열두덩이의 떡은 하나님의 언약공동체로서의 이스러엘의 현존을 상징한다. 등잔불을 켤때마다 진설병을 진열할 때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임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마다 진설하는 떡을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어진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한 사건과 범죄한 자를 처리하는 일은 이스라엘이 언약공동체임을 잘 보여준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득한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훼손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그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언약공동체 전체의 문제였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언약공동체가 범죄한 자를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은 그의 죄가 언약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죄였으며 그 죄를 언약공동체 전체가 나서서 처리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24장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규례가 개인이 아니라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이며 이스라엘 전체가 함께 순종해야 할 규례인 것을 잘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레위기 25장
이어서 안식년과 희년 규례가 주어진다. 이 모든 규례는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지켜야 하는 것으로 미리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써 가나안 족속들이 만들었던 세상, 곧 가나안 땅을 더럽혔던 사회가 아닌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림을 나타나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구원하셨으며 광야에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안식일 계명은 안식년 계명으로 확장된다. 제7년 안식년에는 파종하거나 수확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한 해를 농사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고대 근동사회에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루하루 죽어라고 일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는 그런 고단한 세세상에서 안식일을 지킬 뿐 아니라 안식년을 지킨다는 것은 자신들의 생계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다는 분명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라는 이스라엘의 걱정에 대해 여섯째 해에 그 소출이 삼년 동안 쓰기에 족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그렇듯이 안식년도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 해이다. 사람이나 동물뿐 아니라 땅도 안식하는 것이다. 수고로이 일해야 하는 세상에서 안식일과 안식년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의 실제를 보여주고 체험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안식년은 나아가 희년으로 확대된다. 일곱 안식년 다음 해인 오십년 째 해 대속죄일에 뿔나팔 소리와 함께 희년이 시작되며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가 공포된다. 희년도 물로 안식년이므로 파종하거나 거두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희년이 있는 해는 안식년을 연속으로 두 번을 지켜야 하는 셈이다. 희년에 공포되는 자유는 경제적 억압으로부터 풀려나는 아주 실질적인 자유다. 이 해에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은 각각 자기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희년 규례는 가난한 자들을 새롭게 시작하게 해주는 제도이며 가난이 대물림되어 신분사회로 고착되지 않게 해준다. 그래서 희년 제도는 이스라엘의 언약공동체가 해체되지 않도록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희년제도와 함께 이스라엘 공동체를 유지시켜주는 제도가 고엘 제도였다. 형제가 가난하여 토지를 팔았거나 몸을 팔았을 경우 가까운 친족이 그의 기업을 무르는 의무를 지우는 것이 고엘제도였다. 희년제도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차원에서 경제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면 고엘제도는 지파나 친족의 차원에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제도였다. 희년제도와 고엘제도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레위기 26장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규례와 계명은 단순히 권고 사항이 아니라 언약백성의 의무이다. 규례와 계명은 언약관계를 규율하는 법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준행하지 않는 것은 곧 언약을 배반한 것으로 간주된다. 하나님이 규례와 계명의 준행 여부에 따라 복과 저주를 정하신 것은 단순한 상벌 개념이 아니라 언약 상대방인 이스라엘의 언약적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반응으로 주어진 것이다.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적 신실함을 요구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이스라엘도 거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함은 언약적 축복으로 혹은 언약적 저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시면서 그 축복의 절정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 중에 행하심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청종하지 않고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않고 규례를 멸시하며 법도를 싫어하여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곧 언약배반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적 저주를 퍼부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는 단순한 형벌이 아니라 언약적 저주이다. 언약적 저주라는 말은 그 저주가 언약관계로 인한 저주라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 저주의 목적은 이스라엘이 죄를 회개하고 언약관계로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주이다. 하나님의 저주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저주이다. 그래서 저주의 목록 사이마다 반복하여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않으면"이란 말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은 반드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심으로 그들을 내버리지 않고 아주 멸하지 아니하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폐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그리고 그 언약에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레위기 27장
레위기의 마지막 장이 서원에 관한 규례로 끝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레위기는 하나님이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게 명하시는 온갖 종류의 규례와 계명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서원이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자기 마음의 소원을 따라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에게 약속을 드리는 제도였다. 사람을 비롯해서 가축이나 토지도 서원하여 여호와께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서원한 것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모세가 정한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수 있었다. 서원제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관계가 일방적이고 의무적인 것만이 아니라 쌍방적이고 자발적인 차원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는 레위기의 마지막 구절은 레위기가 무엇인지를 한마디로 요약해준다. 레위기는 한마디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이 살아가야할 언약적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는 이스라엘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들에게 멍에를 씌우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정으로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특권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