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일터신학- 폴 스티븐스
하나님나라와 일터신학- 폴 스티븐스
2016-01-26 01:44:56
1.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이에 대한 백성의 반응이다.
이 나라는 이미 임하였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여기 존재하나 미래에 도래할 나라다.
2. 하나님나라의 구속적 통치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경제적,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우주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통치이다.
3. 하나님나라의 사역이란
세속의 일도 아니고 종교적인 일도 아니며
세상에 하나님나라가 도래하도록 하는 활동이다.
4 하나님나라의 일과 세속의 일은 어떻게 구별되는가?
동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가?
수단: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고 사람에게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내는가?
목표: 하나님의아름다운 통치가 이 세상에 뚫고 들어오게 함
최종 목적: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연속될 내적, 외적 가치를 가짐
하나님나라는 세상에 샬롬과 인류의 발전을 이끌어 낸다
5. 하나님나라 기업은 존재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수익은 인체의 피와 같아서 불가피하나 생명 자체가 아니듯이 수익은 기업의
목표가 아니다.
하나님나라 기업은 영혼구원이 아니라 전인 구원을 지향해야 한다.
6.하나님나라의 실천으로서의 권한 이양(EMPOWERMENT)
권력 가부장적(OVERPOWERING) 민주주의적(POWER SHARING)
이기주의적(POWER HUNGER) 을 넘어서야 한다.
권한 이양(EMPOWERMENT)은
성도를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구비(EQUIPPING)케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평가는 좋은 설교가 아니라 성도를 구비시키는데 있다.(엡4:12)
요약 추기
1.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이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은 단순히 영혼 구원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영역을 포괄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왕으로서 다스리는 통치를 의미합니다. 명목상 혹은 개념상의 지배가 아니라 역동적인 통치입니다. 제 조국인 캐나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통치합니다. 그녀에게는 화려한 왕궁이 있고 또 고급 롤즈로이즈를 몰고다니며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캐나다를 통치하고 있지만 그러나 명목상으로만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엘리자베스 여왕의 그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저 먼 하늘에서는 세상을 통치하시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삶 속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으로는 통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왔습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는 세상의 현실 한 가운데서 이미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실현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종말에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완성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두 시제의 긴장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이런 생각을 전달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마치 소금이 고기 속에 스며드는 것과 같습니다. 빵을 부풀게 하는 이스트와도 같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미 출범하였으며, 종말의 완성을 향해 이 세상 한 복판으로 계속 스며들고 있고, 세상을 변혁시키고 있는 실재입니다.
3. 한편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형입니다. 교회의 역할은 하나님 나라를 섬기고 확장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교회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을 새롭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에게 너의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만찬 자리에서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굉장한 선포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죄인들을 품고 그들과 함께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격적입니다. 예수님은 종교의 짐이 너무 무거워 피곤한 사람들은 자신에게 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회적인 부분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온 표징을 가르쳐주시면서, 눈먼자가 보고 듣지 못한 자가 듣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된다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정치적인 변혁도 포함합니다. 예수님은 당시 불의하고 부패한 유대교 성전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경제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가셔서 경제적인 회심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혁명이 삭개오의 집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장차 새롭게 도래할 세상에서의 일입니다. 또한 장차 도래할 세상에서 완성될 일이 지금 여기서 미리 시연되는 것을 말합니다
.
4. kingdom work에 대해서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말할 것은 일이란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업가들, 가정주부, 의사, 공무원, 교사 등등이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이 세상적인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온 우주를 합리적으로 경영하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위임하신 일들을 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끔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저에게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자신이 세상적인 일을 버리고 주님의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전에 하던 일은 무었이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을 구분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일은, 그 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직업을 전환할 때 하나님의 어떤 일을 하다가 하나님의 다른 일을 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교회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회 사역만 전임사역이 아니라 모든 직업이 다 전임 사역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종교적인 일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5. 하나님의 나라의 일이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모든 선한 일의 동기는 이웃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시작합니다.
나아가 선한 일이란 이웃을 실제적으로 돕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결과로 남깁니다. 어떤 종교적인 일들은 겉보기에는 기독교적이라고 보이지만 그 속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결여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종교적인 특성이 반영된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동기가 무엇이냐를 분명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곧 일을 할 때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시작하고 그것이 끝까지 가느냐가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 나라 일은 사람을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고 그에게서 가장 최선의 것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선한 일이란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다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목표는 이 땅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아름답고 선한 통치를 이끌어 내는 겁니다. 제 멘토는 퀘이커 교인인 엘튼 큐바였습니다. 그분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로 교회이고 어딜 가든 교회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직업의 영역에서 교회의 본분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11시에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시간에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도래했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 예배당만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채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위해 여러분 각자를 꼭 필요한 자리에 배치시킵니다. 여러분이 직업의 영역에서 각자 하는 일들은 어떤 선교사도 사역자도 대신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가 이 땅에서 이루어져가는 방식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하나님의 샬롬을 세상 가운데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임한 곳에는 정의가 실현되고 빈곤에 제거되며 인권이 향샹됩니다.
6. 기업 중에 킹덤 컴패니라고 부르는 곳들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킹덤 컴패니는 기업 전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겁니다. 제 친구 중 자동차 회사를 운영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자동차를 만든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그 직장에는 그리스도인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는 비 기독교인들을 통해서도 실현될 수 있습니다. 기업은 당연히 수익이 있어야 삽니다. 그러나 수입만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보와 확장이라는 더 큰 가치가 있습니다. 킹덤 컴패니가 되려면 막대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주주들을 통해서도 이뤄져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일터, 공동체, 도시, 국가에 대한 사역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창조된 모든 만물을 위한 사역이 전부 포함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그 안에 이런 모든 사역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부를 창출하고, 빈곤을 없애고, 사람들에게 건강을 가져다 주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샬롬을 막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새로운 초월적 가치들을 이 땅에 가져오는 겁니다.
7. 끝으로 하나님 나라 사역은 목회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 백성들이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목회자의 도우미가 아니라 그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목회자에 대한 평가는 그가 얼마나 좋은 설교를 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사람들을 잘 돕고 있느냐로 평가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목회자의 사역은 교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일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일터의 영성
2016-01-28 01:36:53
1. 영성이란 말은 20세기 중반부터 사용된 표현인데 지금까지도 합의된 정의가 없고 합의할 의도도 없는 매우 애매모호한 표현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영성이 의미하는 바가 인간 영혼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 철학의 이원론에 의하면 육체는 영혼의 감옥으로서 인간의 육체적 요소가 평가절하되어 왔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영혼 구원이 아니라 인간구원이다. 성경은 인간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몸(soma)이란 육체와 영혼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이다. 결국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영혼이 아니라 몸으로 완성되는 것이고 따라서 일터와 일의 구원도 몸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적 영성은 영혼의 영성도 아니고 육체의 영성도 아니며 오직 몸의 영성이다.
2. 이렇게 볼 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이란 성령을 따라 사는 구체적인 삶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의 능력으로 영과 육으로 살아가는 삶, 이것이 기독교 영성이며 그 핵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터 영성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일터에서 재화와 서비스로 현실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터에서 성령에 의지하고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는 삶이 물질세계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이것이 일터 영성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터에서 늘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게 귀을 기울이고 반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적 영성은 관조적 삶도 아니고 활동적인 삶도 아니다. 관조적인 삶이나 활동적인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이 중요하다. 성령은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일을 바르고 제대로 수행하는 능력도 주신다. 성막을 만드는 브살렐에게 지혜의 영이 주어진 것이나 초대교회 일곱집사를 뽑는 기준이 성령충만한 사람이었다는 사례는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3. 성령은 종교적인 일과 세상의 일 모두에 관여하신다. 일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종교적인 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전방위적이고 총체적으로 작용한다. 믿음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믿음으로 사는 삶 역시 성령의 능력이다. 루터는 성령의 역사를 주로 영혼의 구원에 국한시켰고 오순절파는 주로 종교적 체험에 국한시킨 반면에 칼빈은 성령충만을 성도의 일상적 삶으로 확장하였다. 일터에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일터에서 사랑의 봉사로 일하기를 소망하며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간절히 구하며 성령의 임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라 걷는 일이 중요하다.(갈5:16-23) 성령을 따르는 것은 의지적이고 의도적이며 구체적인 일이다.
4. 성령의 인도는 우리에게 세상적 가치로 가득한 일터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일터는 전방위적으로 영적 갈등이 일어나는 곳이며 영적전투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일터야 말로 전신갑주를 입고 싸우라는 성경의 권면이 적용되는 곳이다.(엡6:10-18) 성령의 사람은 불가피하게 갈등을 겪지만 일터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영적 성숙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일터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도이다. 기도는 일터에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것이고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위이다. 기도함으로 우리는 일터의 의미를 발견하고 일을 기쁘고 바르게 수행할 능력을 얻게 된다. 일터에서 갈등은 기도를 필요로 한다.
5. 일의 궁극적 목적은 안식이다. 인식은 단순히 일을 하기 위해 충전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부터 소명을 확인하는 기회이고 하나님을 묵상하고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다. 안식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쉼으로 표현되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 의탁의 행동이다. 하나님 안에서 쉼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안식이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일로부터 떠나서 안식을 누려야 한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켜준다.
6. 공동체로 존재하는 그리스도는 공동체로 존재하는 교회를 세우셨다. 성도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성도는 교회로 존재할 뿐이다. 일터에서도 성도 간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구조적인 죄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 공동체에서 해결책을 찾는 것보다 문제를 공감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같은 직업과 직장에서 믿음의 동역자들을 찾고 공감하며 함께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와 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적 싸움터인 일터에서 성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성자 하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힘입어 기도하고 안식하고 연대하며 일해야 한다.
일터와 일의 의미
2016-01-14 12:38:20
일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이유
일과 신앙이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일과 신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먼저 일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일을 하시러 오셨다. 본회퍼는 성육신 사건은 하나님의 현실과 우리의 현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된 사건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과 다른 곳이 아니라 동일한 일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일터는 예수 그리스도가 일하시는 일터의 연장선상에 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을 일터로 보내신다. 그러므로 일터는 하나님의 소명의 장소이다. 일상의 모든 영역이 사역지이듯이(고전7:17-20) 하나님나라를 세상에서 실현하는 공간이 일터이다. 결국 우리의 일터가 하나님의 일터인 것이다.
일과 신앙이 하나가 되는 방식- 윤리적 삶의 방식
1.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객관적 필요가 채워지는 곳이라고 정의하면서 시장의 교환기능이 바로 사랑이고 복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직하고 객관적인 교환이 이루어지는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아담 스미스가 말한 시장의 원리는 일터에도 적용된다. 우리의 일터는 수요와 공급이라는 객관적 필요가 채워지는 곳이고 이 교환 기능을 통해 사랑과 복지가 실현되는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실천 계명일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우리를 사랑한 것 같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고(요15:12) 그분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다.(막10:45) 일은 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수단이고 방편이며 일터는 바로 사랑의 계명이 실천되는 공간이다. 사람에게 일은 창조시 부터 주어졌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 땅의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맡기셨다.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것은 지배하고 억압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을 창조의 질서와 목적에 따라 보존하고 보호하라는 의미이다. 만물의 생명과 존재를 긍정하고 축복하고 보호하는 것이 창조시에 사람에게 주어진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그리고 만물에 대한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일이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세상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통해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일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일은 우리 몸을 화목제물로 바치는 예배이다.(로마서12:1) 우리는 일을 할 때 주께 하듯 해야 한다.(골3:23) 또한 우리는 일을 통하여 인간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이것은 타락한 세상을 고치는 치유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하는 목적을 일에 대한 보상에 두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봉사에 두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이웃의 유익을 구하고 이웃의 생명을 살리는 것을 일의 목적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일의 목적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 경쟁이 아닌 사랑을 통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일을 통해 가장 큰 정서적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가장 큰 기쁨은 타자를 위한 봉사에서 얻는 것이다.(빌4:1) 공동체가 함께 기뻐함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릴 수 있다.(빌2ㅣ24-30) 우리는 각자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는 일을 하도록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종말론적 일터 신앙
2016-01-08 15:48:07
왜 일과 신앙이 일치되어야 하는가?
1) 문화명령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이기 때문이다. 창세기1:27-28의 소위 문화명령은 우리의 일상적 일이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알려준다.
2) 선교적 차원
선교적 차원에서도 일과 신앙의 일치가 필요하다. 그동안 일과 선교는 분리되어 왔거나 일이 선교의 수단 정도로 이해되어 왔지만, 이제는 일 자체가 선교라는 생각으로 바뀌고 있다. 선교의 수단으로서의 비즈니스를 다루는 것은 기독교 선교사역을 협소하게 보는 관점이다. 비즈니스도 본질적으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러므로 비즈니스 자체도 선교라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비즈니스는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므로(고전10:31) 선교를 단지 종교적 영역으로 국한해서는 안된다.
일터에서 구현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윤리적 삶의 방식
1) 성경적 윤리
신앙과 일상의 삶의 일치를 위해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계시된 윤리적 비전을 연구하고 실천해야 한다. 윤리란 단순한 도덕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크리스토퍼 라이 트는 그의 책 구약윤리에서 구약의 윤리적 비전을 신학적, 사회적, 경제적 영역에서 제시한다. 리처드 헤이스도 그의 책 신약윤리에서 신약의 윤리적 비전을 십자가, 공동체, 새창조라는 다차원적 관점에서 설명한다. 윤리적 삶의 방식은 우리를 복 있는 삶으로 초대한다. 일터에서 이루어지는 기독교적 경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모든 주권이 있는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기업이 하나님과 사람을 탁월하게 섬기기 위한 가치창출 활동에 성경적 원리를 적용해 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경영에서 가장 출발점이 직원을 존중하는 것이다. 직원존중은 일터문화를 바꾸고 기업의 행동양식을 바꾼다.
2) 종말론적 윤리
계시록21:1-5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에 누릴 복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일의 결국, 즉 종말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일상의 지향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알게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참된 복과 신앙을 지켜내는 삶을 권면하는 요한계시록은 종말과 현재, 하늘과 땅 동시에에 존재하는 부조화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두 가지 대답을 제시한다. 첫째는 종말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하늘의 관점에서 지상을 바라보며 살라고 말한다. 둘째, 종말과 현재 사이에, 하늘과 지상 사이에 존재하는 연속성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권한다. 요한계시록은 현재와 종말, 땅과 하늘이 연결되어 있는 초월성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현재 이 땅에서 우리가 행 한 일들이 종말에 하늘에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갖는 연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윤리이다 종말론적 윤리란 미래적 관점으로 오늘을 사는 것이다. 일의 결국을 알고 현재의 지향점을 찾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종말이 아니라 현재이고 하늘이 아니라 땅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땅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의 일상의 방향성을 어떻게 정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종말을 알아야 하고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종말과 하늘이 지금 땅에서 우리의 현재적 삶의 결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무엇을 얼마나 성취하는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크든 작든 우리의 일상의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느냐가 중요하다. 일의 장소(situation)나 강도(intensity)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의 방향direction)이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이 지향하는 방향을 소명의 벡터(vocational vector)라고 부른다. 결론적으로 종말론적 일터 신앙이란 타인의 성공을 통한 나의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며 영원한 기쁨을 위한 오늘의 씨뿌림이며, 종말론적 관점으로 오늘을 결정하는 것이며, 모든 창조질서의 회복과 치유를 추구하는 것이며, 반복되는 일상 속에 작은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그렇게 살 때 이 시간, 이 공간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주 안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고전15: 58)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심판이나 멸망이 아니라 창조의 회복이며 완성(consummation)이다. 종말은 미래적인 것만도(전천년설, 비관론)현재적인 것만도(후천년설 낙관론) 아니며 미래적이면서 동시에 현재적인 것이다.(개시된 종말론,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 하나님나라 종말론) 종말론적 윤리란 종말이 현재의 우리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윤리란 삶으로 표현된 종말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에베소서 4:25-32은 이런 종말론적 삶의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일과 일의 구원
2016-01-21 13:40:28
신앙의 세속화
신앙의 세속화란 신앙이 사적영역으로 간주되어 세상의 공적 영역에서 종교가 배제된 현상을 말한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계몽주의로 인해 일에 대한 소명의식이 소멸되면서 일이 신앙과 분리되어 일 자체가 독립적 가치를 갖게 됨으로 발생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구원이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개인의 믿음의 결단으로 이루어진다는 종교개혁의 신념으로 인해 가속화되었다. 이제 가치는 교회가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 인간들이 가치의 생산자가 됨으로써 가치에 대한 전통적 관념이 붕괴된 것이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럽 사회의 이런 변화를 지적했다. 니체는 무신론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제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고 사람을 통제하던 시대는 지나갔고 인간이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주체임을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신이 아니라 스스로의 삷을 결정하고 가치를 창출하는 권력의지를 가진 인간으로서의 초인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세속화는 물신주의를 초래했고 돈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세상을 만들어냈다. 일의 중심에 돈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과학과 숫자만이 객관적 진리라는 신화가 도입되고 실용주의와 실증주의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인간은 1,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면서 인간 이성에 대한 낙관주의의 붕괴를 경험하였다. 그 결과 전통적인 가치와 목적에 대한 관심이 다시 대두되고 신앙의 세속화로 인한 보편적 가치의 부재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기 시했다.
일과 하나님
기독교의 창조 신앙은 창조세계의 의미와 목적을 전제하며 나아가 창조의 내재적 가치와 소명을 인정하는 것이다. 세계와 인간의 창조 그 자체가 소명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 존재 자체가 하나의 소명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이미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내포한 것이고 문화명령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창조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면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일은 인간에서 부여된 과업이고 소명이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일이 가진 내재적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구원의 궁극적 대상은 대상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일을 위해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의 구원의 목적은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는 존재로 회복시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일을 함을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의 소유자이며 경영자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통해 이 세계를 경영하시길 계획하셨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세계 경영이 이루어도록 작정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상의 일터는 일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이며 선교지인(이사야60:1) 셈이다.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이 능력있게 구현되며(고전4:20) 하나님의 정의,공의, 자비와 같은 성품이 실현되는 것이다.(미가6:8) 그래서 찰스 링마는 "선교는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고 믿음의 공동체를 건설함으로써 세상을 보호하고 유지하고 변혁시키는 하나님의 모든 활동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죄인인 사람을 회개시켜여 의롭게 만드는 하나님의 회복사역이다. 십자가는 타락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회복의 사건이다. 회개와 치유를 통해 타락한 인간은 안간다운 존재로 회복된다.(누가복음 4:18) 하나님은 회개하고 의롭게 된 의인의 일을 통해 일을 구원하신다. 일의 구원이란 일이라는 사물의 세계를 인간의 세계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성령은 우리를 죄악에서 해방시키시고(로마서 8:1-2) 진리 분별의 지혜를 주시며(요14:17) 성령의 열매인 성품의 변화를 통해 일이 변화되게 하신다.(갈5:23-24) 그리고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신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일터는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세계이다. 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일터 사람들을 바라보며 인간 관계 안으로 담대히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일을 통해서 인간 관계를 구원하신다. 사람을 잃지 말고 차라리 일을 잃는것이 낫다. 직장에서 성품과 관계성이 우리 신앙을 표현해준다. 직장에서 신앙은 비종교적인 언어와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탁월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 탁월하게 일하길 원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탁월하게 일을 수행해야 한다. 탁월함은 타인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탁월함을 명하시는 하나님은 능력과 은사도 주신다. 그러나 시행착오와 오랜 연마없이 탁월함은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은 본질적으로 새 창조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도 창의적으로 일해야 한다. 새로운 일터를 만들고 새로운 시장을 발굴하며 남들이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추구해야 한다. 창의성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하나님의 지속적인 창조에 참여하는 길이다.(마25:14-30) 새 피조물인 그리스도인은 새 관점으로 일을 바라보며 인전한 길이 아닌 모험의 길, 경쟁이 아닌 나눔과 채움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죄로 오염된 문화와 타락한 일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많은 인내와 수고를 요구한다. 일에 스며든 죄와 싸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소명이다. 일의 죄악된 구조와 타락한 목표를 바꾸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개혁은 정복이나 투쟁이 아니라 사랑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본질과 비본질을 잘 분별하며 장기적은 관점으로 인내하고 수고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일터에서 객관적인 사물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동역하도록 부름받은 존재이다.
교회와 일터
2016-02-19 22:22:44
1. 탈교회와 현상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한국에도 전체 교인의 11%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가나안 굥니이라고 한다. 미국에도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도심지역에서 젊은층들에게 더욱 심각하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다양하다. 목회자에 대한 불만, 교인들간의 갈등, 일상의 삶과의 단절 등등 여러 이유가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그들에게 교회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점이다.1 역사적으로 교회안에는 끈질긴 이원론적 성향이 있었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 아퀴나스의 은헤의 세계과 이성의 세계 그리고 루터의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의 왕국이 그것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성의 세계와 종교의 세계를 대비시킴으로 종교를 보편세계의 한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더구나 종교개혁의 이신칭의 교리는 구원이 교회가 아니라 인간 개인에게 달렸음을 강조함으로써 인간 이성을 교회의 통제로부터 해방시켰다. 그 결과 교회는 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후퇴하여 사적영역으로 축소되었으며 사람들은 개인의 구원에 몰두하고 신앙의 일상적 삶에는 무관심해졌다.
2. 세상은 교회의 대적이 아니라 구원의 대상이다. 교회는 성도의 일터를 통해 세상과 접촉한다. 성도의 일터는 교회의 선교대상이다. 교회가 직접 운동을 통해 세상에 개입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성도를 양육하여 성도를 통해 세상에 개입하여야 한다.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인정한다면 교회는 온세상에 그리스도가 세상의 주이심을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세상을 통치하시는데 하나님과 이웃사랑이 율법의 핵심이다. 성도는 일터에서 이웃사랑으로 일함으로써 하나님의 세계경영에 참여한다.
3. 교회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해야한다. 인간을 이롭게 하는 세상은 거부하지 말고 수용하되 자율적인 인간 이성의 일탈을 감시하고 경고해야 한다. 무엇보다고 교회는 성도를 양육하여 그들이 일터에서 이웃사랑으로 일하도록 구비시켜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을 훈련하여 일터로 파견하는 것이다. 일터는 교회의 선교대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들의 일터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현하여 일터의 성도들을 상담하고 신학적 지침을 주어야 한다. 독일의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정치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고백하고 정치를 통한 교회의 대사회적 영향략의 증대를 강조했다. 영국의 상원의원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는 평생을 바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한 법 제장을 위해 투쟁했다. 윌버포스와 앙겔라 메르켈은 교회의 역할이 성도를 구비시켜 그들이 세상에 나가 하나님나라 일을 하도록 하는 것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온 세상의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전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세상의 일터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을 통해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주이심을 선포하고 증거하도록 해야 한다.
각주 1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구원이 개인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로 이루어지진다는 개인구원 사상은 교회관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구원이 개인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로 이루어지진다는 개인구원 사상은 교회관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본문으로]
돈과 그리스도인의 삶
2016-02-26 01:38:24
1. 돈은 중요하며 인체의 피와 같은 것이다.1 기독교는 돈의 문제를 피하지 말고 정면 대응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 이방인 교회들이 가난한 유대인 교회를 위하여 돈을 모아 도운 것은 돈을 바르게 사용한 좋은 사례이다. 돈을 사용하여 교회의 일치를 이룬 것이다. 이것은 돈으로 하나님나라를 섬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나님나라를 섬기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대체로 돈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돈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2. 돈에 대해 성경은 두가지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돈은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도 잇고 하나님의 저주가 될 수 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하나님이 물질의 세계도 창조하셨다면 돈도 하나님의 선한 창조가 될 수 있다. 부 자체가 죄악은 아니다 부를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고 즐거워하는 것은 비난받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고 즐기고 감사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하나님의 축복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돈에 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쾌락주의와 도덕주의의 양 극단의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어느 지점이 균형점인지 정답은 없다. 근본적인 원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것이고 이 목적을 위해 돈이 사용된다면 그 돈은 선하게 쓰여지는 것이고 하나님나라를 섬기는 중요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각주 1
돈과 관련해 생각할 근본적인 질문 3가지 인데 첫제는 돈이란 무엇인가? 둘째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셋째 어떻게 돈을 시용할 것인가? 이다.
- 돈과 관련해 생각할 근본적인 질문 3가지 인데 첫제는 돈이란 무엇인가? 둘째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셋째 어떻게 돈을 시용할 것인가? 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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