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신학
성전신학 1강
2015-11-26 19:53:00
1. 하나님의 전 창조세계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이것을 우주성전이라 부른다. 세상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그 영광이 나타나는 곳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온 세상이 성전이 되게 하시는데 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창조세계를 떠나 다른 시공간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물이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그러므로 피조세계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오해이다. 창조세계는 근본적으로 선한 젓이다. 신약성경에서 세상이란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은 타락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향읋 가진 세상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세상이 타락한 것은 피조된 본질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방향성이 왜곡된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무대이며 대상이다. 이 세상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역무대나 사역대상도 없게 된다. 성경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 존재도 마찬가지다. 성경에서 육신이란 용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의 죄성을 지칭할 경우이다. 성경은 육체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중세 수도원의 금욕과 자기학대의 수행은 육체 자체를 성경이 정죄한다고 본 오해에 기인한다. 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다. 성경에서 영적이니 육적이니 라는 표현은 몸이 사용되는 방향이 어떠한가를 나타내는 것이지 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궁극적 소망이 몸의 부활인 것만 봐도 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은 인간 존재에 몸이 갖는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몸과 마찬가지로 세상의 문화도 좋은 것은 구속받아서 종말에도 연속될 것이다. 사람은 몸으로 부활하여 이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이다. 몸이 없다면 누릴 수 없는 즐거움이 많다. 세상과 몸을 경시하는 한국교회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반성경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2. 그동안 창세기 독법은 주로 세상과 인류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창조의 시기와 방법에 몰두해왔다. 그러나 지난 백여년 어간에 영미 구약학계에서는 고대근동의 신화가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매우 유사한 것을 발견하였고 창세기의 메시지는 창조의 시기와 방법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창세기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왜, 무슨 목적으로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는지를 말하려는 것이다. 고대근동의 창조신화들에 비추어 보면 창세기는 하나님이 온 우주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드셨음을 말하고 있다. 고대근동의 창조신화에서 신들은 신전을 만들 때, 6일동안 만들고 제7일에는 신전에 들어가서 안식을 하는 일정한 패턴을 보여준다. 여기서 안식한다는 것은 성전이 완성된 다음에 신이 성전에 거하며 주인노릇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창세기 창조 이야기도 동일한 패턴으로 하나님은 6일동안 세상을 만들고 제7일에는 안식하였다고 말한다. 고대근동의 신화와 병행관계에서 보면 여기서 안식의 의미는 하나님이 우주성전을 만드신 후, 그 만드신 우주성전을 다스리는 왕으로 취임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솔로몬도 성전을 지을 때 7년에 걸쳐 짓었고 초막절 잔치 제7일에 성전을 봉헌하였다. 성막도 우주성전의 3중구조를 상징하고 있는데 지성소가 하나님이 계신 하늘을, 성소는 가시적 하늘을 그리고 성막뜰은 가시적 땅을 가리킨다. 성막을 장식하는 3색 실도 창색은 하늘을, 자색은 구름을, 홍색은 태양을 상징하면서 성소의 재료 자체가 우주성전인 창조세계를 반영하고 있다. 성경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우주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막은 우주성전을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후에 하나님이 축복을 하신 것처럼 성막을 완성한 후에 모세의 축복기도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든 세상과 모세가 만든 성막이 서로 대응됨을 의미한다. 창세기 기사와 고대근동 신화가 유사하다는 점은 그 둘이 동일한 신학적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그것은 성경의 성전에는 이방종교에서 흔한 형상화된 우상이 없으며 이스라엘의 신은 고대근동의 다신교가 아니라 유일신교라는 점이다. 이방의 신들이 인간이 투사되어 확장된 신이라면 이스라엘의 신은 인간과 전적으로 다른 창조의 신이었다. 이렇게 고대근동의 신화와 창세기 이야기는 서로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다.
3. 히브리문학에서 인클루지오(Inclusio)구조는 중심에 있는 것을 강조하는 문학기법이다. 성경 내러티브의 상당수가 인클루지오 구조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창세기11장1-9의 바벨탑 사건 이야기는 인클루지오 구조로 되어 있는데 그 중심은 하나님이 내려오시는 5절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하나님은 세상과 무한한 질적 차이를 가진 분이시지만 세상에 내려와 개입하시며 판결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을 관통하는 성전 내러티브도 인클루지오 구조를 가지고 있다. 맨 밖에서 창세기 1-3장의 우주성전에 대응되는 것이 계시록 21-22장의 우주성전이라면 그 안에서 이스라엘의 지상성전인 성막, 성전과 신약의 지상성전인 교회가 서로 대응된다. 그리고 그 가운데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위치한다. 이런 내러티브 구조에서 주된 강조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완성되는 우주성전이다. 하나님의 우주창조는 하나님의 성전의 창조이다. 우주성전의 축소판이 에덴 성전이다. 거기서 아담은 제사장적 존재로 지어졌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왕들이 자기 통치구역의 표시로 자기 동상들을 세워놓는 것과 관련된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은 땅을 다스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다. 우주성전의 축소판인 에덴동산이 인간의 다스림으로 확장되어 온 우주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상창조의 목적이다.
4. 에덴이 과연 하나님의 성전인가? 고대근동 신화에서 신들은 반드시 강을 끼고 신전을 짓는다. 에덴동산에도 강이 4개가 발원하여 흐른다. 고대 이집트 신화에서도 진흙으로 신상을 만들어 사람들이 숨을 불어넣은 후에 신전에 안치한다. 창세기 이야기에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신화가 반영되어 있다. 성경은 고대 신화를 사용하여 에덴동산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말하고 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며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는 곳이다. 모세가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면했듯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범죄하기 전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했다. 아담은 에덴성전을 잘 관리하여 온 세상으로 확대시키는 제사장적 직무를 가진 존재였다. 에덴동산이 우주적 성전으로 확장되는 것이 바로 창조목적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범죄함으로 창조목적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것을 다시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구약에서는 성막과 성전으로 나타났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문화전체의 구원, 곧 문화 전체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나타나게 함으로써 온 세상이 성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성전안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듯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이 세상문화 전체가 성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문화활동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된다. 그것은 세상 문화에 저항하는 삶이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하여 대안/대조/대항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길을 실제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고 하나님의 뜻을 실제로 추구해나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성전신학적 관점의 선교이다.
성전신학 2강
2015-12-03 16:18:22
1. 하나님의 창조는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비록 타락하여 오염되었지만 창조세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복하고 갱신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의 궁극적 목적이다. 아담의 범죄로 최초의 성전인 에덴성전이 파괴되고 사탄이 득세하였지만 하나님은 성전을 다시 회복하신다. 그러므로 아담의 범죄이후 구약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타락한 세상의 회복을 위한 씨앗이었으며 망가진 에덴 성전을 대신하는 새로운 성전을 세우는 사람들이었다. 아담은 에덴성전에서 제사장적 역할을 하였던 최초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노아와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에덴성전의 모티브를 발견하게 된다. 이들은 아담과 같이 제사장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노아에게 성전이 방주로 상징되었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성전이었다. 특히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이 후일 솔로몬 성전터가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2. 야곱은 밧단아람으로 가는 도중에 벧엘에서 꿈을 꾸는데, 그의 신현체험은 고대 메소포타미앙의 지구라트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지구라트는 메소포타미아의 거대 신전건축물인데 그 꼭대기에는 신들의 방이 있고 그위에는 하늘로 향하는 사닥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야곱의 벧엘 꿈 이야기는 이런 신화적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러므로 벧엘의 꿈 자체는 성전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야곱은 꿈에서 깨어난 후 벧엘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바벨론 포로기에 유대인들이 쓴 해설 성경인 탈굼(targum)은 야곱의 신현체험은 하늘 보좌에 그 얼굴이 새겨진 야곱의 얼굴을 천사들이 보려고 오르락내리락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야곱의 신세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는 천상의 보죄에 얼굴이 새겨진 고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은 포로기 이스라엘이 자신들을 야곱에 비견한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예수님도 요한복음1장51절에서 야곱의 신현체험 이야기를 인용하여 자신이 천상적 존재임을 암시하였다. 야곱이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것을 전통적으로 야곱의 끈질긴 기도라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얍복강 사건은 가나안 성전에 들어가기전에 성전을 지키는 수호천사와 야곱이 씨름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수호천사를 이겨야만 성전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에덴 성전을 그룹천사가 지키듯이 가나안 성전을 지키는 문지기 천사가 야곱이 싸름한 천사였다. 그러므로 얍복강 사건은 야곱이 성전으로 돌아오는 사건이며 성전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야곱의 삶을 통해서 나타난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
3. 모세는 구약에서 성막을 건축한 대표적 인물이다. 모세는 시내산 꼭대기에서 율법과 성막 설계도를 받았는데 이 산 꼭대기는 오직 모세만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산 중턱에는 장로들이, 산 아래는 백성들이 접근할 수 있었다. 시내산의 이런 3중 구조는 성막의 3중구조(지성소, 성소, 뜰)를 반영하면서 시내산 자체가 성막구조를 예표하고 있다. 성막을 짓는 모세는 아담적 제사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아담은 하나님과 얼굴을 대면하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그 얼굴에 광채가 났는데 이는 그가 타락 이전의 아담의 지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세 얼굴의 광채는 변화산에서 나타난 예수 얼굴의 광채, 부활한 예수의 광채, 그리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는 예수의 광채와 연관된다. 모세의 성막선축은 이스라엘을 통해 성전을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준다.
4. 드디어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건축한다. 성전 건축 기사에는 이전의 성전모티브가 집약되어 나타난다. 특히 사무엘하 7장12절에서 하나님은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예언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에 의해 이루어졌고 궁극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 역대하 36장23절에는 바사왕 고레스의 조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고레스는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세상만국을 주셨고 자기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하셨다고 말했다. 이 조서의 말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대사명(마태28:18-20)의 말씀과 유사하다. 이 두 구절의 병행관계를 고려하면 예수님의 지상명령, 즉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주고 그들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은 지상성전인 교회를 건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사명은 성전을 건축하고 세상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하는 일을 의미한다. 바로 이 일을 위햐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주전 538년 바빌론 포로귀환 후 현실은 암담했고 먹고살기에 급급한 이스라엘은 20년간 성전재건을 착수하지 못했다. 학개의 책망으로 주전516년 성전건축이 시작되었고 이 성전은 예수 시대에 헤롯에 의해 대규모로 증축되었다. 이방 이두메 지역 출신인 헤롯대왕은 자신의 왕적 정통성을 확보할 목적으로 성전 증축을 단행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정화사건은 사실 성전의 파괴를 선언한 상징행위였다. 그것은 이제 건물로서의 성전기능이 시효가 만료된 것과 사무엘7장12절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될 것을 암시한 것이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진정한 참 성전이 건축된 것이다.
성전신학 3강
2015-12-20 18:46:14
1. 예수는 하나님의 진정한 성전이시다. 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참 성전이 되시는가? 유대인들은 예수를 고소하여 이르기를 성전을 헐고 다시 짓는 자라고 하였다. 이 고소의 내용은 성전이라는 주제가 예수와 유대인들간의 첨예한 갈등으로 등장했음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가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상징적 행위를 했을 때 유대인들은 무슨 권세로 그런 행위를 하느냐고 반문했던 것이다. 예수의 성전행위는 사실상 성전의 기능을 중단시키는 행위였으며 결국 성전을 심판하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2.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중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무엘하 7장12-16의 나단의 신탁 이야기를 반영한 것이다.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지을 것이라는 나단의 예언은 일차적으로는 솔로몬을 통해 이루어지지만 그 궁극적인 성취를 이루신 분은 예수다. 예수는 성전을 짓는 자일 뿐 아니라 성전 그 자체이다. 예수는 스스로 성전이면서 또한 자신을 대속제물로 바쳐 성전을 짓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지상성전인 교회의 모통이돌 혹은 교회의 머리가 되었다.
3. 마태복음 28장 18-20절의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에게 수여한 대사명(The Great Commission)은 역대하 36장 23절의 고레스의 조서 명령을 반영한다. 이 본문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a)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b)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c)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a')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b')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c')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이 두본문의 병행에서 성전건축은 소위 선교명령에 대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선교란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요 성전을 온 세상으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이 사명은 원래 아담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아담의 실패이후에 이스라엘에게 다시 주어진 것이었고 이제 그 사명이 이스라엘의 대표로 오신 예수로 말미암아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성전신학 4강
2015-12-20 19:05:43
1. 교회의 사명은 성전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선교사명이다. 참 성전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지상에 세워진 교회가 그 경계를 우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바로 선교이다. 그러므로 선교란 단순히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을 드리는 삶의 제사이며 나아가 문화전체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한 예수가 교회에 부여한 대사명의 내용이다. 성령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지상성전이 되었다. 복음서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이라면 사도행전은 성령의 강림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성전으로 지어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강력한 이방선교의 역사는 성전이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가는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으로 확대되어갖는 역사임을 보여준다.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러 오신 사건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약속하고 성령을 기다리라고 명하신 것이다.
2. 오순절 성령강림이 "불의 혀"와 같은 모습을 취한 것은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이 불 가운데서 시내산에 강림하신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시내산의 꼭대기에는 모세만이 올라갈 수 있었고 장로들은 산중턱까지 그리고 백성들은 산기슭에만 접근이 가능했는데, 시내산의 이런 삼중구조는 성막의 지성소,성소, 마당의 삼중구조를 반영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강림하신 시내산은 일정의 성전이었던 것이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신학적 의미는 3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로 방언사건은 언어가 통일됨으로 바벨의 저주가 역전된 사건이었다. 인간분열의 원인이 말이 안통한 것이었는데 언어가 통일된 오순절 방언 사건은 하나님의 구속은혜로 재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둘째로 제2성전기 유대교에서 유대인들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인 오순절에 처음으로 율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시간은 새 계명을 수여한 날의 의미를 갖는다. 이 새 계명은 옛계명과 달리 믿음의 법 혹은 사랑의 법, 그리스도의 법으로 표현되는데, 이 법의 성취는 성령이 오심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셋째로 오순절은 첫추수의 절기였다. 오순절 성령강림후 성령에 취한 베드로의 모습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없었는데 이제 베드로는 추수할 일꾼으로 세워졌으며 그에게 예수가 약속하신 천국열쇠가 주어진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게 된 것이니 성령은 성전을 세우시는 분이다.
3.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3:8-16, 고후6:16) 바울이 세운 교회중에서 바울이 가장 만족하고 친밀하게 지낸 교회는 빌립보 교회였는데 바바울이 이들을 하나님이 성전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바울은 가장 골치아프고 어지러운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한다.(고전3장9절) 여기서 하나님의 밭은 최초의 성전인 에덴 동산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서 하나님의 집이란 표현과 동일하게 성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집의 터를 닦아두는 지혜로운 건축자로 비유한다.(고전3장10절) 이 말은 출애굽기35장1-2절에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막 만드는 지혜가 주어진 장면을 연상케 하는 바, 바울의 이런 표현 역시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닦아둔 터 위에 집을 세우는 재료로 금, 은,보석, 나무, 풀, 짚 등을 열거하는데 이것은 역대상29장2-3절의 성전건축에 쓰이는 각종 재료를 연상케 한다. 결국 바울의 이런 모든 표현은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3장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강조한다.
4. 성령이 오심으로 교회가 세워졌다. 창세기1장28절의 소위 문화명령은 에덴성전의 제사장이었던 아담 공동체에게 주어진 성전확장의 사명이었다. 아담이 이 사명에 실패한 후에 아담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등장한 것이 구신약 교회였다. 하나님의 참형상인 예수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기 위해 성령을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이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일돌로 삼아서 성전을 건축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신약의 지상성전인 교회인 것이다. 예수는 성령을 파송하셨고 성령의 임재는 곧 예수의 임재였다. 예수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교화와 항상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는 자신이 지상에서 행하셨던 하나님나라 사역을 이제 성령을 통해 교회와 함께 계속해 나가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예수의 지상사역을 이어받은 교회는 예수처럼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며 하나님나라의 도리를 가르쳐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이 교회를 통하여 이루어져 가는 것, 이것이 교회가 하나님나라 선교를 감당하는 일이고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다.
5. 요한계시록은 예수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지상성전과 천상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반복하여 묘사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시간적 순서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초림과 재림이 7번 반복되면서 발전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면 19장이 재림을 묘사한 것이라면 20장은 다시 초림 사건을 묘사한 것이다. 19-20장을 시작적 순서로 봄으로써 그동안 천년왕국설이 등장한 것인데 사실 요한계시록은 천년왕국을 말하지 않는다. 20장 1-3절에서 사탄이 결박된 것은 땅에서 일어난 일을 묘사한 것이고 4-6절에서 신자들이 왕노릇하는 장면은 동시간대에 하늘에서 일어난 일을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탄의 결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마태복음12장6-8절)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6. 결국 요한계시록은 승리한 교회인 천상성전과 전투하는 교회인 지상성전을 하나님의 교회로 보고 초림과 재림 사이의 동일한 시간대에 이 두 성전에서 일어날 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동 시간대에 지상성전과 천상성전이 진행되다가 최종적으로 이 두 성전은 만나서 하나가 된다. 천상성전(새 예루살렘)은 내려오고(요한계시록 21장2절) 지상성전은 올라가서 공중에서 만나서(살전4장 17절) 하나가 되어 지상으로 내려오게 된다. 지상성전이 전투하는 교회라는 말은 성전건축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제사를 드리는 싸움이란 의미이다. 우주성전이 완성되기 전에 지상성전이 이렇게 세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것이 역사의 의미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건축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마귀와 싸우는 한판 처절한 씨름이다. 그러나 이 싸움은 반드시 승리로 끝나고 우리에겐 죽음이나 아픔이나 슬픔이 없는 나라가 약속되어 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구름같이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 (히브리서12장1절) 계시록 22장은 지상의 상황이 모두 끝나고 우주로 확장된 에덴성전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 우주성전에 만국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간다. 구속받은 교회와 함께 지상의 문화도 구속을 받아서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