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영성
일상의 영성
2015-11-07 18:31:28
일상의 영성
[1] 일상생활에 담긴 세계관
1. 일상으로 구성된 삶
1-1. 우리의 삶은 일상적인 일들로 구성되어 있다. 먹고 마시고 놀고 잠자고 쉬고 공부하고 일하고 옷 입고, 쇼핑하고, 화장하고, 씻고, 음악이나 영화를 즐기고, 친구를 만나고, 여행하고, 취미활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자녀를 낳고 기르고, 결혼하고, 아프고, 죽고, 성관계를 하고, 가족을 이루고. 등등 이런 많은 일상의 일들이 우리 삶을 구성하고 있다.
1-2. 그러나 실제로 미세하게 들어가 보면 동일한 활동이라도 생각하는 것이나 실제 모습이 차이기 많이 난다. 사람마다, 문화마다, 지역마다, 종교마다, 공동체마다 다르다. 교육의 방법, 음식에 대한 규례, 옷을 입는 일,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 스포츠에 대한 선호 등 일상생활에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다양한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2. 다양한 세계관이 반영된 일상
2-1.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일상의 활동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에는 한국인의 가치관 한국문화의 영향이 들어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세대별로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각 세대가 다를 것이고 보수적이나 진보적인 사상적 차이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2-2.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의 일상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담겨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고후5:17)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면(롬12:2) 우리의 일상 활동 속에는 기독교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일상의 영성의 중요성
1.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동참
1-1. 우리는 에덴이라는 땅에 일상을 살도록(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해지도록) 창조되었다. 일상을 잘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인간 창조목적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이다. 우리는 어떤 특별한 일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공간에서 일상의 삶을 잘 잘도록 만들어졌다. 일상은 열등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본질에 속한 것이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일상이 왜곡되어 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상의 창조적 가치와 일상을 살도록 하신 하나님의 뜻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1-2. 인간은 일상의 삶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적인 일을(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는 일) 계승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이것을 문화명령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창조는 완전하였지만 인간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창조였다.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세상을 다스리고 땅을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계획 안에 이미 들어가 있었다. 그러므로 인간창조의 목적인 문화명령 안에는 일상의 삶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일상을 충실하게 사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창조성을 잘 발휘하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
2-1. 우리 주님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 같은 일상생활을 하셨다. 3년의 공적 사역 이전에 예수님은 3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일상적인 삶을 사셨다. 이런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굳이 30년의 세월동안 이런 소모적인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묵묵하게 이런 삶을 사셨고 이것은 일상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도 일상을 잘 사셨다면 우리가 일상을 무시하거나 대충 살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2-2. 또한 예수님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나라의 교훈을 주셨다.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것들은 성전이나 하늘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어떤 거룩하고 기이한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일상에서 볼 수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겨자씨, 농사일, 소금, 데나리온, 품삯 등등, 심지어 교회에서 가장 거룩하고 시행하고 있는 성만찬에서 사용한 것도 일상의 먹거리였던 떡과 포도주였다. 예수님은 거창하고 거룩한 문제뿐 아니라 일상의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충돌하셨다. 안식일에 음식을 먹는 문제, 병자를 고치는 문제, 죄인이나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문제로 대립하셨다. 예수님에게 일상은 하나님나라와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나라와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3. 종말론적 비전의 현재화
3-1.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종말에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 현재 세상과 전혀 다른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날 신학자들은 종말에 나타날 하나님나라가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닌 전혀 다른 시공간이 아니라 동일한 시공간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다만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죄의 영향으로 변질되고 타락함으로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신 모습을 상실했기 때문에 현 세상이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값비싸고 좋은 옷이 조금 더렵혀졌다고 해서 그 옷을 버리는 사람이 없듯이 하나님이 아름답게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세상을 하나님이 버리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는 종말에 누리게 될 하나님나라에서 우리는 여전히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일상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3-2. 천국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구약 성경의 구절들(이사야65:25 ; 스가랴 14:20-21)은 천국에서도 일상의 삶이 지속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요한계시록과 또 다른 묘사다. 요한계시록이 의도하는 것이 천국의 아름다움과 행복한 모습이라면 이사야와 스가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일상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다. 스가랴서는 그 때에는 세속과 거룩의 구분이 사라지고 삶의 모든 것이 다 거룩한 것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의 요소가 제거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지 일상의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천국이라고 해서 일상적인 생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천국에서도 아름답고 조화로운 일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3-3. 우리가 이런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하나님나라를 맛 본 사람으로서 그런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을 종말의 현재화라고 한다. 종말에도 우리가 거룩하게 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현재 바라고 꿈꾸는 궁극적인 천국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일상에서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질 것을 꿈꾸면서 지금 이 세상에서도 거룩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삶은 미래의 천국에 대한 우리의 소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4. 일상과 신앙
4-1. 신앙생활은 말 그대로 생활이다. 생활의 현장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우리의 일상은 우리의 신앙이 실천되어야 할 현장인 것이다. 일상을 떠나서 우리의 신앙이 실천될 장은 없다. 이 점에 대하 바울은 명확하게 말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린도전서10:31) ”먹든지 마시든지“는 우리의 일상생활을 대표하는 예로서 언급된 것이다. 주목할 것은 여기서 바울은 정교적인 활동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지금 우리의 일상생활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현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4-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간의 최고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을 먹고 마시는 것으로 대표되는 일상의 삶과 연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일상의 활동을 하나님의 뜻대로 재구성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된다.(롬12:1)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배우고 가르치며 그렇게 실천해야 한다.
[일상의 중요성과 변화의 필요성
1.음식
브리야 사르댕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알려 달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보겠다.” 이 말은 음식이 사람을 규정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말한다. 그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는지에 그 사람의 가치관이 반영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엄격한 음식법을 가지고 있으며 초기 선교사들은 술과 담배를 금했다. 육식가 채식, 패스트푸드와 슬로우 푸드, 과식과 소식, 로컬 푸드와 수입음식 어느 것을 먹을 것인가? 어떤 것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먹어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일지 마땅히 생각해야 한다.
2. 의복
옷을 보면 그 사람에 대해 알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입는 옷이 그 사람의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아미쉬 공동체는 여자들은 몸 전체를 가리는 옷을 입으며 남자들로 농부와 같은 옷을 입는다. 머리치장이나 화장은 금기시 된다. 보수적인 교회들도 선정적인 옷차림이나 화려한 옷을 금기시한다. 이처럼 어떤 옷을 입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고 우리의 가치관을 반영한다. 사치스런 옷과 검소한 옷, 화려한 채색의 옷과 무채색의 옷, 가죽재료 옷, 천연 옷감이나 합성 옷감, 노출하는 옷과 노출을 가리는 옷, 유행을 따른 옷 등등.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떤 옷을 어떻게 입어야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일까?
3. 집
3-1. 건축가들은 집이 우리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반대로 집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어떤 형태의 집에 사느냐에 따라 성격, 가족 관계 ,이웃관계, 다른 계층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특히 주택의 형태가 다양화되는 현대에는 더욱이 주책의 형태에 따라 개인의 삶과 사회의 모습이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개인주택이냐 공동주택이냐, 아파트형 대규모 주택이냐 소규모 공동주택이냐, 서로 소통하고 공동체 의식이 있는 마을이냐 고립되고 파편화된 개인주택이냐?
3-2. 우리나라는 인구의 60%가 아파트에서 사는 매우 독특한 아파트 공화국이다. 아파트는 집값을 상승시키고, 공동체를 파괴하며, 건설업체만 배불리는 주범이 되었다. 혹시 아파트의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점점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무관심한 세상이 되어가는 것인 아닐까? 건축가들에 의하면 주거의 형태는 결코 가치중립적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관을 보여주기도 하고 우리의 삶을 재구성하는 영향력이 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형태의 집에 살아야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산 제물이 될 수 있을까?
4. 쇼핑
4-1. 어떤 사람이 일정 기간 동안 쇼핑한 물건들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의 모습과 가치관을 알 수 있다, 자동차, 카메라, 오디오, 전자기기, 옷, 구두, 화장품, 여행상품, 맛 집, 뮤지컬 관람 등등 다양한 쇼핑 품목들이 있다. 사람이 물건을 안사고 안 쓰고 살 수는 없다. 그런데 물건이 매우 다양해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관에 따라서 쇼핑의 행태가 매우 달라지기도 한다.
4-2. 복음주의자들의 로잔언약에서는 검소한 생활양식을 권장한다. 1980년 검소한 생활방식에 대한 국제협의회는 검소한 생활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 검소한 삶은 개인의 삶, 의복, 주택, 여행, 교회 건물에서 낭비를 포기하고 사치를 반대하는 삶이다.” 소비를 어떻게 하느냐 것이 우리의 가치관을 보여준다. 세속 사회의 영향을 아무런 생각 없이 수용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나라의 가치관으로 쇼핑을 재구성하는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할 문제다. 어떤 물건을 얼마만큼 사고 소비하는 것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일까?
5. 대중문화
대중 매체를 얼마나 보고 어떤 프로그램이나 기사를 보는지를 알면 그 사람의 삶에 대해 알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자주 보는 것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현대에서 TV를 비롯한 방송 매체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오늘날 방송매체 문화에서는 이미지와 유명인이 가족, 학교, 교회를 대신해 취향, 가치, 사고의 결정권자로 자리 매김한 상태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세속적 가치관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무엇을 얼마나 볼 것인지를 살펴야 한다. 대중 매체를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일까?
6.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대는 역사상 가장 멍청한 세대라는 말이 있다. 디지털 시대는 생각의 깊이가 낮고 논리성이나 공감성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우리는 현대의 디지털 기기들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피상성을 부추기는 현대 문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우리 시대의 흐름을 성찰하고 고민하고 대안을 모색하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지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일상의 영성이 중요한 이유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1. 성숙한 신앙과 일상
성숙한 신앙은 일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믿음이 좋다는 것은 단지 좁은 의미의 영적인 활동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는 모든 활동을 통해서 판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는 성숙한 신자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의 소소한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하고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개인적 공동체적 고민과 모색이 필요하다.
2.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이 시대의 풍조를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고 있지 않은지 스스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우리가 일상의 문제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리고 이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일률적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반영한 일상의 삶이 어떤 것인지 그 답을 찾는 작업을 포기할 수는 없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우리는 일상의 문제들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나아가 실천해야 한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진짜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이고 이런 사람들이 모여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 나가는 공동체가 진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가는 교회 공동체일 것이다.
내 몸 사용 안내서-게리 토마스
2015-12-22 17:00:00
1. 몸은 영혼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은 몸이라는 외피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그동안 영혼의 성장만 강조해다 보니 훈련되지 않은 몸이 영적 성장을 더디게 하거나 심지어 해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건강해야 하는 이유는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기 위해서이다. (딤후2:20-21) 건강하지 못한 생활습관에 계속 굴복하고 포기하는 것은 은혜에 합당한 삶이 아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했다.(빌립보1:27) 우리의 신체 단련은 주로 동기의 문제이다. 내 몸을 하나님을 섬기는 도구로 보면 거기서 새로운 동기가 생겨나, 욕망과 게으름에 맞서 몸을 더 잘 관리할 수 있다. 운동이 꾸준한 공부, 기도, 경건의 시간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몸이 게으름과 과식의 굴레를 벗어나면 영혼은 새로운 활력과 기쁨으로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다. 육체와 영혼의 상호 연관성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의 몸이 건강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임재에 점차 둔감해질 수 있듯이, 몸을 잘 볼보면 하나님이 주시려는 은혜를 받기 위한 좋은 준비가 된다. 건강하고 강인한 몸이야 말로 활기찬 영혼이 살기에 가장 적합한 집이다. 거룩한 생활을 가꾸려면 몸의 건강이 필수적이다. 건강과 활력은 생활의 개선이며 영적 훈련이다. 이것은 예배의 일부이며 삶속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복종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3. 나태와 과식으로 인한 불건강의 뿌리는 사실 영적인데 있다. 과식과 게으름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 사탄의 은밀한 공격이며, 그 자체가 죄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의 영적 능력을 앗아간다. 건강을 지키는 것은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통로를 지키는 것과 같다. 몸을 돌보는 일은 생활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도와 순종의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며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식품제조업자들은 우리를 특정 종류의 음식에 거의 중독되게 만드는 지방, 당분, 염분의 완벽한 배합율을 찾아냈다. 그들은 음식을 가공하고 이 모든 요소를 공격적으로 조작하여 제품에 대한 수요를 극대화한다. 우리의 건강이 비참하게 무너져야 식품제조업자들은 돈을 번다. 우리가 그런 식품을 계속 먹으며 건강만 나빠지는게 아니라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도 장애가 된다. 교회는 이런 현실을 의식적으로 경고해야 하고 성경적이고 실제적인 지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건강을 지키려면 우리를 대적하는 모든 신체적, 영적, 문화적 유혹에 맞서 싸워야 한다.
땅과의 화해 -프레드 반슨, 노먼 위즈바
2015-11-07 18:37:18
1장 삼라만상, 하나님의 창조물
1. 창조주를 믿는다면서 창조주가 만드신 피조물을 경시하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이 서로 화해하고 하나님과도 화해하길 바라신다는 것을 모른다. 예수의 삶과 사역의 의미를 성찰했던 초대교회는 놀랍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우주적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창조물과 화해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 이유는 소크라테스에게 있다. 소크라테스는 육체와 질병과 부패와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뿐더러 경쟁과 낙담과 고통의 원천이므로 영원한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불멸의 영혼에 소망을 두고 몸을 경시해왔다. 하지만 이것은 반기독교적 이해방식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물질세계가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부정하며 성육신까지 부정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몸을 증오하지 않는다. 화해를 이룬 몸의 부활이 바로 복음이다.
2.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과 화해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는 생태학적 기억상실때문이다. 이것은 생활양식 때문에 걸리는 기억상실의 일종인데, 이 병의 근본원인은 인간과 땅이 실제로 분리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범죄이후 인간과 땅은 물리적으로 또 실존적으로 분리되었다. 첫째, 인간은 땅과 물리적으로 분리되었다. 농촌보다 도시에 사람이 더 많이 사는데, 도시인들은 자신이 자연 덕분에 산다는 것을 모를 뿐더러 자연에 대한 책임감도 희박하다. 생태계 전체가 위기에 처한 것은 자연파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 반복하는 도시인들의 일상생활 때문이다. 땅과 점점 분리되고 땅의 생명력을 모르면 사람들과도 점차 단절되고 땅을 그저 자원으로 여기듯 사람도 경제 발전의 땔감으로 여기게 된다. 둘째, 인간은 땅과 실존적으로 분리되었다. 피조물의 도움이 없이는 인간은 생활할 수 없는데, 인간은 피조물의 필요성을 가르쳐주는 실질적인 관계를 잃어버렸다. 창조물이 없다면 우리도 없다 인간에게 창조물은 하루라도 없으면 안될 활력과 기쁨의 원천이다. 창세기는 이원론적 사고와 생태학적 기억상실이 얼마나 해로운지 보여주며 더불어 사는 충만한 삶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화해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사는 피조물임을, 우리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화해의 사역을 맡기셨다. 화해의 사역은 만물과 화해하신 그리스도가 시작하셨다. 그분은 피조물의 모든 몸과 화해하신다 . 화해의 사역은 땅과 화해하면서 끊임없이 땅으로 돌아간다.
2장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우리에게는 생태학적 기억상실이라는 시각장애가 있다. 우리는 예수가 이미 화해를 이루신 창조물 전체를 보지 못하고, 우리가 만물을 해치고 있다는 것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다. 인간은 흙에서 왔지만 인간과 땅의 관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우리는 인간의 생활방식 때문에 생태계가 파괴되었다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일은 땅을 가까이 하는 일과도 밀접하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 순종해야 땅과의 평화도 이뤄진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은 땅 가운데 오셨고 그 가운데서 일하셨다. 땅을 예수님의 이야기 전체에서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 성육신의 신비다. 땅과 화해한다는 것은 땅을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일부로 여기고 하나님이 땅에 계속 임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땅을 가까이 하고 땅에 머물며 변화되어야 한다. 복음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새로운 에덴이며 망가진 에덴으로 들이닥치는 하늘나라를 가리킨다. 그 나라가 임하면 사람들은 모두 화해할 것이며 그들이 딛고 사는 땅과도 화해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나라는 영지주의자들의 나라로 남을 것이다. 우리는 새 땅을 바라보면서 그 땅의 첫 이삭을 거두기 위해 일해야 한다. 우리는 종말을 의식하면서 땅과 화해를 힘써야 한다. 땅과 화해하려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에 합당한 기술과 습관, 생활방식을 익혀야 한다.
3장 로마의 로고스, 그리스도의 로고스
하나님은 성육신하여 이 땅에 내려오셨고 이 땅에서 일하시고 죽으시며 부활하셨다. 구원이란 현세를 빠져나가 이 땅을 초월한 비물질적인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현세와 화해하여 늘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을 알고 맛보고 친밀하게 누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보면 천국에서 실현된 지상의 삶이 보인다. 하나님의 로고스는 비옥하고 기름진 세상을 만든다. 피조물의 생명력이 충만하도록 피조물이 땅과 비옥하고 풍부하며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특징이다. 예수님의 로고스는 로마의 로고스를 위협하였다. 그분은 팍스 로마나의 거짓을 폭로하시며 로마를 만든 착취와 폭력을 단호하게 반대하셨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착취와 폭력을 그치고 서로 돌보고 화해하게 만드셨다. 그리스도의 로고스는 로마뿐 아니라 폭력으로 번영을 이루는 온갖 형태의 경제질서와 정치질서를 위협하신다. 화해는 상명하복이나 기계적 혹은 추상적 과정으로 이룰 수 없다. 화해는 실재로 몸을 맞대고 더불어 살아야 이룰 수 있는 직분이자 재능이다. 화해의 기반은 실재하는 로고스다.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뿐 아니라 천지를 창조한다는 것을 알면 화해의 직분은 땅에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땅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는 생활을 해야 한다. 땅을 일구고 가꾸고 일에 전념하면 땅을 치유하고 생명을 불어넣는 기술과 습관을 익힐 수 있다. 그러므로 농사는 땅과 가가워지는 훈련을 가장 잘 보여준다. 또한 농사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노동이다.
4장 현대의 식량체계는 환상이다.
현대인은 수고없이 먹을거리를 얻는다. 석유에 의존하는 현대의 식량체계는 석유와 기계가 사람의 할 일을 대신했고 그 결과 눈부신 식량체계라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의 식량체계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맞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석유에 의존해서 식량을 생산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이다. 1940년대 농업의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대기는 오염되었고 먹을거리의 질은 계속 낮아졌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현대의 농업은 근본적으로 실패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러한 식량체계에서 벗어나 새롭게 하나님나라를 본받는 생활방식을 창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만들어가는 사회적 현실이다. 먹을거리와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이 농업에서 비롯되는데 하나님나라의 풍성함을 일으키는 농업은 어떤 것일까? 현대농업처럼 생태계와 생물, 인간의 몸을 파괴해야 풍요를 얻을 수 있다면, 그런 풍요는 허울만의 풍요일뿐 아니라 집단 강도짓이다. 우리는 풍요의 신기루를 벗어나, 먹을거리를 당연히 여기지 말고 하나님의 선물로 여겨야 한다. 전세계 농업전문가들 사이에선 자연으로부터 농사를 배우자는 운동이 널리 번지고 있다. 먹을거리를 생산하면서도 하나님이 맡겨주신 땅을 보살피고 보호해야 한다.
밥상교제를 통해 우리는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방식과 굶주린 사람들까지 생각해야 한다. 식량은 정의의 문제다.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밥상을 내주어야 한다. 밥상교제는 교화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증언이다. 교회는 성만찬의 상상력을 넓혀 그리스도의 전례를 제단에만 가두지 말고 하나님의 친교를 세상으로 땅으로 뻗어나가게 해야 한다.
5장 성만찬은 예배당에 가둘 수 없다.
예수님이 식사를 중시하신 이유는 식사를 통하여 먹을거리를 기르고 준비하고 나눔으로 모든 피조물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먹는 값싼 음식의 실제 가격은 아주 비싸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찌든 땅, 오염되고 고갈된 물, 수많은 화석연료, 함부로 취급받는 동물과 농장 노동자들, 갑의 황포에 짓눌리는 판매업자들, 잘못된 식생활로 인한 질병비용 등.. 값싼 식품을 찾는 욕망이 생명들을 파괴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음식에 관한 한 역사상 가장 무지한 세대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만찬을 통해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고 그분을 증언하는 삶으로 나아간다. 성만찬을 종교의식으로 제한하면 그리스도인들이 둘러 모이는 방상은 예배당 안에 갇힌다. 성만찬의 밥상교제는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다. 땅과 화해하려면 땅을 가까이 해야 한다. 만물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한 유기적 통일체다. 인간은 만물중의 하나일뿐, 만물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만물을 살피고 존중하며 만물에 대해 공부하고 만물에 대하여 신실하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인 먹을거리를 저열하게 만드는 생산과 소비생활을 하면서 식사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식사시도가 진실하다면 우리의 존재는 복음이 될 것이다.
6장 빈곤퇴치를 넘어서
초교파 기독교 기관인 에코는 1981년 설립된 열대농업 훈련센터로서 180개국의 특히 개발도상국의 개발 활동가들을 교육한다. 에코의 목적은 개발도상국의 공동체 지도자들과 연대해 악조건에서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가정들의 기아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는 것이다. 에코의 글로벌 농장은 인간이 다가올 재난을 이겨낼 뿐 아니라 오히려 번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이다. 그들은 처음부터 자연에 깃들어 있던, 인간이 발견하여 나누기를 기다리는 만물의 풍성함을 사람들이 누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노벨 수상자, 아마르티아 센은 그의 1981년 작품 "빈곤과 기아"에서 기아는 식량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불공정한 분배의 문제라는 것을 증명했다. 에코는 생산량을 높이는 소규모 영농기술을 기르치는데 집중하고 있는데, 이는 소농을 도우며 국가의 식량안보를 보장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록펠러와 포드재단의 지원을 받은 녹생혁명은 세계 기아를 종식시키기 위해 시작된 가장 큰 사업이었다. 그러나 이 녹색혁명은 자연을 앞질러 더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욕망과 화학으로 풍요를 이루겠다는 환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수퍼작물들은 수확량을 늘렸지만 생태계는 점점 파괴되고 있다. 신업화된 농업기술로는 지역농업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 농업생태학(재생농업)만이 해법이 될 수 있으며 에코는 지난 30년 동안 이런 일을 해왔다. 세계적인 기아 문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신화를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이제는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배고픔을 면할 뿐 아니라 잘 살 수 있는지를 말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모두가 앙망하는 성만찬의 큰 잔치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밥상에서 맛볼 수 있다.
쉼 그리고 놀이
2015-11-07 18:38:18
1강. 쉼과 안식
1. 현대는 일중독의 사회이다. 사회적으로 편만한 욕심, 노동시간에 대한 제도적 미비와 새행상의 문제점, 지나친 경쟁 등인 우리 사회를 일중독으로 만들고 있다. 일중독자의 특징은 일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의 성과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며 일을 통해서만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그리고 일의 성과를 가지고 남을 평가하려고 한다. 일중독은 우상숭배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무엇보다 일을 최우선에 놓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나님과의 관계도 일을 통해서 맺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려고 하며 일을 통해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2. 구약성경에서 쉼은 강제성을 띤 규례였다. 일주일에 하루, 매7년마다 일년 그리고 매50년째는 희년으로 규정되었고 이 규례를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그리고 자연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쉼은 창조의 한 부분이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것은 모든 창조물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단순히 무노동 무동작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물들이 하나님이 만드신 공동체와 더불어 즐기고 누리는 축제의 시간이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을 희년의 성취로 선언하셨고,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에게 쉼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인간에게 이런 안식을 주기 위해서 예수님은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사역은 바로 이런 안식을 지향하고 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하나님나라가 완전하게 이루어질 때 모든 해방이 성취되고 우리 모두는 완전하고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4.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가 완전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제한적이나마 안식을 누리기 위해 힘써야 한다. 안식을 우리기 위해서는 우리를 얽어매는 것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쉼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안식의 계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내 힘으로 무엇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참된 쉼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개인적, 사회적, 교회적 차원의 노력을 해야 한다.
2강 놀이란 무엇인가?
1. 놀이는 보편적이고 세계적인 현상이다. 동물들도 놀이를 하고 놀이는 인간성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존 폭스는 그의 책 The Ball에서 놀이는 창조성과 혁신의 핵심이자 인간이 느끼는 최상의 환희와 쾌락의 원천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본징적인 요소라고 말한다. 놀이가 기쁨을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창조도 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조를 기뻐하심으로 만물과 천지를 지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일과 놀이는 분리되지 않는다. 인간에게 일과 놀이가 분리된 것은 타락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즐겁게 놀기를 원하신다. 구약의 절기들은 일종의 공동체적 축제였다. 예수님도 먹고 마시고 즐기는 자리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가나의 혼인잔치나 세리나 죄인들의 초청잔치에 기꺼이 참여하셨다.
2. 일과 놀이는 활동 자체에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나 목적으로 그 활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구별된다. 일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 불가피하게 해야 하는 것인 반면에 놀이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자발적인 활동이다. 놀이의 목적은 즐거움, 재미, 기쁨이다. 그런 면에서 놀이는 소비적이고 소비하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놀이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지만 그 효과가 놀이의 목적은 아니다. 놀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외에 다른 목적을 가지지 않는다. 일은 사람을 소진시킨다. 그래서 회복이 필요하고 그 회복을 위해서 쉼과 놀이가 필요하다. 일은 비자발적이고 의무적이며 남을 평가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놀이는 자발적이고 사람을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도 놀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바 던은 예배는 거룩한 시간 낭비이며 거룩한 놀이라고 말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즐기며 인간과 더불어 줄거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예배를 일과 의무로 느낀다면 그것은 예배의 본질을 잃어버린 것이다.
3. 일과 놀이가 통합될 수는 없을까? 어떤 사람은 아이들은 일과 놀이를 하나로 경험하는데 어른이 되면서 일과 놀이가 분리된다고 말한다. 분명히 하나님에게는 일과 놀이는 분리되지 않았을 것이다. 월터옹은 하나님에게 노동은 언제나 즐겁고 자발적이고 자유롭다는 점에서 언제나 놀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에게 창조나 구원 사역은 고된 것이 아니고 즐겁고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일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 창조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타락이후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노동에 고통이라는 형벌을 더하셨다. 이제 인간은 일은 수고롭고 고된 것이 되었으며 일하지 않고는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타락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일과 놀이는 분리되었고 쉽게 통합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은혜로 일과 놀이의 통합을 경험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제한적이지만 이 땅에서 일과 놀이의 통합된 맛을 미리 맛보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은혜로 일과 놀이의 통합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노동을 고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일의 구속을 위한 시도이며 일과 놀이를 통합하려는 시도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훈련, 그리고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말론적인 구속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노력을 통해서 일과 놀이가 통합되는 하나님나라를 미리 맛보기를 원하신다. 종말에 세상이 회복되면 하나님의 창조 의도대로 일과 놀이가 하나로 완전히 통합될 것이다.
4. 놀이는 사람에게 재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쉼과 자유를 준다. 비록 놀이가 즐거움외에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지 않지만 놀이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놀이는 의도하지 않는 효과를 제공한다. 놀이는 건강과 사회성 증진에 중대한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 두뇌의 성장과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놀이하는 존재이므로 다양한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러나 모든 놀이가 다 긍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에게 심각한 폐해를 끼치는 활동을 제외하면 성경은 그 어떤 놀이도 그 자체로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에게 놀이는 위험성도 가지고 있다. 놀이에 사람이 중독되거나 놀이가 지나친 경쟁심이나 과시욕을 부추킬 수 있다.
5. 그렇다면 바른 놀이 문화란 무엇인가? 현대인은 놀이를 병적으로 추구하지만 사실은 잘 놀지 못한다. 그들은 현대의 오락산업이 제공해자눈 것에만 매여서 활동하는 스스로 활동하는 놀이가 아니라 남이 활동하는 놀이를 구경하고 있다. 놀이는 본질적으로 창조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한다.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참여해야 하고 마음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서로 대면하여 놀아야 한다. 놀이산업에서 제공해주는 어떤 수단이나 도구에 매이지 말고 스스로 도구를 만들어 놀아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놀이산업에서 해방된 놀이, 돈 안들도고 노는 놀이 문화를 만들 수 있다.
6. 놀이는 예배와도 관련된다. 우리의 예배는 축제적인 요소가 있다. 축제란 즐겁게 노는 것을 전제한다. 예배하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복을 누리고 즐겁게 노는 것과 같다. 또한 놀이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성취하는 창조적이고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믿음의 삶과 연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서 창조적인 놀이를 통해 창조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세상의 틀을 따라서 살지말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서 창조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은 기존의 틀을 깨는 것일 수도 있고 세상이 규정하는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창조적으로 놀이를 만들어 즐겁게 사는 것처럼 우리도 삶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하면서 즐겁게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연구하고 노력해야 한다.
공정여행, 당신의 휴가는 정의로운가?-패멀라 노위카
2015-11-07 18:38:56
관광. 여행산업의 현실
1. 여행 산업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투어리즘 컨선의 발표에 의하면 개발도상국의 1/3이 여행산업으로 주수입을 얻고 있고 최빈국 가운데 49개국은 여행산업이 외화의 주 수입원이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부유한 엘리트들의 전유물이었던 20세기의 여행과 관광은 점점 더 대중화되었다. 본격적으로 값싼 여행이 가능해지고 관광이 유행하게 된 것은 석유소비를 늘려야 했던 석유산업의 요구로 민간 항공 여행길이 열리게 된 20세기 후반부터였다. 무역과 착취 그리고 식민화라는 역사적인 뿌리와 소비주의의 부상이 근대 대중관광의 형성에 한몫을 했다.
2. 사람들은 보통 관광산업이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광객이 쓰는 돈의 대부분은 관광전문 여행업자, 항공사, 호텔, 수입음식업자들을 통해 그 지역을 떠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광 개발을 하면 다수 세계국가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반 민중 노동자나 비정부기구는 여행 산업이 지역 경제에 발전적 이익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경제적 이득이 이상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혀 흘러 들어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관광지 개발은 지역 토착민을 내몰고 지역문화를 타락시키며 지역경제와 사회구조를 왜곡할 수 있다. 여행관광 산업이 수익보다 지역공동체와 진정한 환경적 책임을 우선시하면서 적절하게 관리된다면 가난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권력균형이 상당한 변화가 필요하며 목소리가 없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과 협의하고 그 협의를 실행에 옮길 정치적, 사업적 엘리트들의 결단이 필요하다. 더 많은 관광객=부유한 지역공동체라는 단순한 공식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3.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휴가는 세속적인 보상이자 구원이다. 천국에 가까이 가고 싶어하는 바람을 가장 합리적으로 구현한 것이 휴가다. 여행산업은 온갖 종류의 이미지를 동원해 관광객들이 소비할 수 있는 천국이라는 상품을 만들어 낸다. 천국 같은 휴가라는 환상에 현실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피터 번스가 지적한 것처럼 지역사람들과 관광객은 서로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내고 일시적 관계를 맺는다. 관광객들은 자신들이 일자리와 약간의 문화적 교류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유익한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관광은 현지 문화에도 영향을 미친다. 현지의 문화규범과 어긋나는 관광객들의 생활약식이나 태도, 소비습관은 지역공동체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관광은 진정한 현지 문화를 추구하지만 관광산업은 진정성의 환영을 만들어 냄으로써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가상의 경험을 강화한다. 바로 관광 자체가 진짜 문화를 경험할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이다.
4.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 현지 거주민들과 맺는 관계나 범세계적 공동재에 미치는 영향을 볼 때 관광은 식민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지중해의 휴양 섬 스르디니아의 주지사 레나토 소루는 관광산업을 19세기나 20세기 초반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유사 식민지적 착취의 한 형태라고 말했다. 많은 관광객들은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관광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더 부유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법적 임금보다 적거나 기본생활비에 미치지 못하는 돈을 주는 것을 정당화한다. 여행업자들이 엄청난 수익을 남기며 상품을 팔 수 있는 것은 가난하고 취약한 나라 사람들을 착취하는 노동 관행 덕분이다. 관광은 환경, 삶, 문화를 희생시켜 가면서 경제 개발을 추진하고 야생동물 보호구역과 생태관광구역을 만들기 위해 대대로 내려오는 땅까지 병합시키는 정치적 활동이다. 정부관료와 사업가들은 관광이 수입을 창출하고 외화를 버는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믿지만 그런 전제는 지역 사람들의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결과를 가져온다.
5. 전 세계적 관광산업은 유엔 전문기구를 통해 목소리를 낼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타적 의도를 확산시키기 위해 홍보할동을 계속한다. 관광산업은 그 나라의 전반적인 거시경제의 정책방침과 상관없이 단독으로 발달하지 않는다. 국가는 민간부분 투자를 촉진하시키기 위한 광범위한 개발전략과 국가 재정 계획을 통해 관광 산업에 기여한다. 이 과정에서 환경에 대한 고려는 포기되고 대규모의 인권침해가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관광모델이 지닌 해악 중 하나이며 여행, 관광 산업이 너무도 자주 내세우는 빈곤완화라는 정치적 허울 뒤에 감취진 현실이다.
대안적인 관광. 여행산업
1. 새로운 관광산업 모델에서는 개발로 영향을 받게 될 현지 주민 대표자가 협의과정에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시민사회 대표자들은 필수적으로 지역 정치인이나 중앙정치인을 상대로 관광산업에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관광 개발 계획이 그 지역의 문화적 사회적 규범과 통합되어 지역민에 의해 공동체적으로 주도되어야 한다. 세계적인 관광산업의 관행을 바꾸기 위해서는 약산의 생태 휴가나 자발적인 실천규범을 갖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가치있는 대안이라도 강제력이 없는 몇가지 행동규칙만 가지고는 규제나 변화를 이끌어 내기란 힘들다. 엄중하고 영향력있는 강제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관광은 "서비스교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포함되지 않아야 한다. 이 협정으로부터 이익을 가장 많이 챙기는 이는 바로 다국적 기업들이다. 이 협정하에서는 지방정부도 중앙정부도 경제를 잘 운영하고 환경을 보호할 수 있는 결정 능력이 없다.
2.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관광산업에서 인권은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인권이 보호되고 강화될 수 있는 한가지 방법은 공정하게 진행되는 윤리적인 관광을 하고 공정무역인증기구(FLO)의 권고에 기초한 모델을 이용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런 사안들을 다루고 있다. 어떤 여행상품인가? 어떤 집단이 수혜자로 상정되는가? 공정무역의 정당한 가격은 얼마인가? 어떻게 장기적 관계를 맺기 위해 애쓸 것인가? 어느 범위가지 공정무역으로 인증할 것인가? 환경무넺를 어떻게 포함시킬 것인가? 공정무역 인증 관광은 민간영역, 공공영역, 정부와 비정부기구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대안적인 관광을 위해 관광객은 공정여행을 요구해야 한다. 공정여행은 관광기업들의 홍보 문구대로 그들이 내세우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돈을 쓰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여행 관광산업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여행객들의 관심있는 로비가 필요하다. 여행사업자들에게 기회주의적인 홍보 마케팅이 아니라 공정무역의 원칙을 채택하고 실제적으로 적용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3. 세계여행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희생으로 부유한 사람들의 이익을 늘려주는 마지막 보루다. 여행자로서 우리가 이제 그만이라고 외칠 때가지 우리의 휴가는 어디서든지 불평등과 착취를 가져올 것이다. 공정여행을 위한 새로운 규약은 다음과 같이 제시될 수 있다. 모든 수준의 지역공동체들과 협의하라. 관광 프로젝트에 반대할 수 있는 공동체의 권리를 소중히 여겨라. 노동권과 노동법규를 적용하라. 문화적 사회적으로 관광에 크게 의존하는 공동체를 지원하라. 프로젝트에 딸려 오는 대규모 기반시설을 거부하라. 다국적 기업들을 엄격하게 규제하라.
몸의 신학
2015-12-22 17:16:49
1.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몸의 구원도 필요하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영혼이냐 육체냐의 선택이 아니라 영혼과 몸의 건강한 결합이다. 영혼과 몸이 분리되면 더이상 인간이 아니다. 영혼과몸 어느쪽이 더 가치있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영육이원론은 육체를 경시하거나 금욕주의적 경향을 부주켜 왔다. 특히 중세의 수도원 운동에서 이런 경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났다. 몸은 단순히 영혼의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독립적인 가치가 있다. 몸의 소중함과 가치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몸은 영혼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물이다. 그러므로 영혼 뿐 아니라 몸에 대한 바른 지식과 인식이 필요하다.
2. 몸의 중요성은 신학적으로도 설명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30년을 이 세상에서 사셨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영혼의 부활이 아니라 몸을 다시 입고 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며 기독교의 궁극적 소망 또한 모든 신자들이 몸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창조, 성육신, 부활은 모두 몸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란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영육의 구원이다.
3. 영혼과 몸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호 긴밀한 영향을 미친다. 기도는 영적일 뿐 아니라 또한 육체적 활동이기도 하다. 영혼의 활동이 육체에 영향을 주듯이 육신의 활동 또한 영혼에 영향을 미친다. 히브리적 인간관은 영육이원론이 아니라 영육일체론이다. 인간의 어떤 문제에 영적인 해법만 제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영육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인간의 문제들에는 영혼외의 다른 차원들, 신체적, 경제적, 심리적 차원들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자살율과 주택의 채광율, 혹은 운동부족과 우울증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총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종교라면 인간에 대한 총제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사역은 총체적 사역이 되어야 한다.
4. 성경은 몸의 거룩을 강조하는데 여기서 거룩의 의미는 단순히 성적인 순결만이 아니다. 몸을 온전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일까? (살전5:23) 성경은 몸을 경시하지 않는다. 성경은 몸은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의 것이고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말한다. 몸의 거룩함은 건강한 몸, 활동력이 있는 몸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이 몸으로 영광을 돌리는 일이다. 영혼관리나 몸 관리는 같은 차원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영혼만이 아니라 영육의 차원이다. 우리는 영육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는 영혼을 건강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한1서의 삼중축복문은 이런 총체적 시각을 보여준다.
5. 그러므로 우리는 건강하고 온전하고 활동력있는 몸을 방해하는 모든 습관을 고쳐야 한다. 죄가 영혼의 질병이듯이 몸의 질병 역시 죄의 결과이다. 질병은 육체의 죄이다. 건강 관리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이 몸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몸의 상태가 중요하다. 남이 보는 내 몸이 아니라 내가 느끼는 내 몸이 중요하다. 딤전 4:8은 육체적 훈련의 유익을 인정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몸의 우상화나 건강염려증과 같은 몸의 세속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과도한 욕심, 스트레스를 피하고 편안한 마음, 적절한 식습관, 적절한 운동, 적당한 휴식, 정기적인 건강검진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개인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에서 서로 권면하고 서로 세워주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
음식과 먹는 것
015-12-23 14:54:22
1강. 음식과 먹는 것의 의미
1.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최초의 복 중 하나가 먹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식물에게 양분을 주어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하시고, 동물들에게 다양한 먹을거리를 주어 양육하신다. 그리고 이모든 것을 인간에게 주어 풍성하게 먹고 즐길 수 있게 하신다. 그러므로 먹을거리와 먹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자 축복이다. 음식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기능적인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을 통하여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구원의 은혜도 먹는 것으로 표상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이 주신 가장 큰 복을 기념하는 성찬식도 먹고 마시는 것으로 표상된다.
2. 먹는 것은 근본적으로 생명을 유지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금식과 같은 먹거리의 결핍은 인간의 한계와 의존성을 깨닫게 해주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고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떡으로 묘사하셨는데 이것은 모두 먹는 일이 인간의 영과 육에 모두 중대한 일임일 보여준다. 구약의 음식규례는 무엇을 먹는가 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구별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먹는 것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언약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쳐 주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성령에 충만한 공동체가 형성되고 그들이 함께 모여 떡을 떼었는데 함께 먹는 일은 참된 공동체의 표지이기도 하다.
3. 음식(food)과 먹는 것(eating)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생산한 음식을 먹고 그들에게 의존하게 되며 또한 음식물을 생산하는 자연의 모든 요소들과도 관계를맺고 의존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만물과 관계를 맺게 된다. 음식과 먹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고 공동체적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게 해준다. 인간은 다른 사람들이나 자연과 함께 공존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이며 모두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먹는 것을 가지고 해악을 끼치는 일이야 말로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관계를 깨뜨리는 가장 큰 사회악이 아닐 수 없다.
4. 음식(food)과 먹는 행위(eating)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며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로 이끌어 준다. 예수님도 세리나 죄인들과 자주 식탁교제를 하셨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먹는 것을 통해서 신분과 종족(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분하려는 잘못된 전통을 전복하는 일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에 함께 먹는 일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성령이 충만하여 참된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이것은 함께 먹는 일로 가시화되었다. 자기의 것을 혼자서 먹던 사람들이 자기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 함께 먹는 사람들로 변화된 것이다. 예수님의 죽기전에 마지막으,로 한 일이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5. 유대사회에서 함께 먹는다는 것은 진정한 가족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음식을 먹는 행위는 생명을 나누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런 행위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가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리나 죄인들 더불어 먹고 마심으로 이것을 잘 보여주었으며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통해서도 제자들과의 하나됨을 나타나셨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먹고 마시는 행위, 특히 성찬에 참여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선교적 행위였다. 그들은 함게 먹고 마시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했고 자신들의 선교사명을 상기하였다.
2강 먹는 것의 타락
1. 먹는 것은 인간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탄은 먹는 것을 통하여 인간을 타락시켰다. 최초의 타락이후에도 먹는 것은 지속적으로 타락의 끄나풀이 되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먹는 문제로 불평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으며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풍요의 신 바알 숭배에 빠져들었다.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시도도 먹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먹는 문제로 인해 공동체가 망가지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 식탐은 먹는 것의 타락의 대표적인 현상중 하나이다. 먹는 것을 절제하지 못하는 식탐은 성령을 따르지 못하고 육신의 정욕을 따르는 것으로 간주된다. 식탐은 과식으로 혹은 건강에 않좋은 음식을 맛있다고 먹는 일 혹은 과도한 식도락 등으로 나타난다. 식탐은 또한 먹는 일의 공동체성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식탁에서 배제하고 탐욕으로 자기 먹을 것을 혼자 쌓아둔다. 결국 식탐은 먹을 일의 공동체성과 관계성을 점점 상실하게 만든다.
3. 음식물의 대량생산과 대량유통도 먹는 일의 타락 현상이다. 대규모 기업농으로 인해 소농들의 입지가 줄어들고 결국 농촌공동체가 파괴된다. 대규모 생산을 위한 단일 경작시스템과 과도한 농약사용으로 인해 토양의 능력이 망가지고 있다. 대규모 기업농에서는 유전자 조작된 농산물, 노동착취, 비인간적인 동물사육, 환경오염 등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대량생산은 필연적으로 대량유통을 필요로 한다.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음식물의 유통거리나 기한이 늘어나게 되고 음식물의 질과 영양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또한 대량생산과 원거리 유통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분리시켜 소비자는 먹거리의 중요성과 먹는 일의 사회성에 대해 무지하게 된다.
4. 패스트 푸드도 먹는 것의 타락현상중 하나이다. 우리는 패스트푸드에 들어가는 먹거리의 정체(원산지, 가공상대, 보존상태, 감미료 등( 를 알 수 없다. 패스트푸드에는 먹거리에 대한 감사나 먹는 일의 관계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대규모로 생산되는 패스트푸드로 인해 소규모 생산자들의 입지는 좁아지고 대량생산을 위한 비윤리적 경작이나 사육이 조장된다. 대규모 패스트푸드 업체에 재료를 저가로 납품하는 농부들은 수익이 줄어들고 친환경적인 생산도 불가능해진다.
5. 육류의 과생산 과소비도 문제다. 1파운드의 소고기를 생산하는데 20파운드의 곡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또한 축산업은 이산화탄소, 메탄, 이산화질소 등 전세계 온실가스의 18%를 배출한다고 한다. 옥수수 1칼로리를 생산하는데 화석연료 에너지가 2.2칼로리가 들어가는데 소고기 단백질 1칼로리를 생산하는데 화석연료가 40칼로리나 필요하다. 육류의 생산과 유통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3강. 먹는 것의 구속
1. 대량생산으로 인해 먹거리가 풍성해지면서 우리는 먹거리의 중요성과 관계성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그러나 먹거리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를 통해 주어진 것이고 무엇보다도 먹거리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며 또한 우리에게 먹거리 생산해주는 사람과 자연만물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먹는 것에 대한 구속은 먹거리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을 갖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2. 음식에 대한 일차적인 표현이 감사라면 두번째 표현은 나눔이다. 세계식량 사무관이었던 장 지글러는 왜 세계의 절반이 굶주리는가?라는 책에서 세계 식량 부족의 문제는 생산량의 문제가 아니라 분배의 불균형이라고 지적했다. 음식으로 다른 사람을 환대하고 음식이 부족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며 굶주리는 사람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일도 먹는 것의 사회적 차원의 구속이다.
3. 먹는 것의 구속의 세번째 차원은 먹는 것에 대한 절제이다. 배가 고프다고 해서 반드시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다. 배고픔은 하나의 감각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배고픔이 우리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물며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맛에 끌려서 혹은 습관적으로 먹는 일은 식탐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먹는 것과 음식에 대한 절제가 필요하다. 식품업자들은 우리가 더 많이 더 자주 먹도록 식품을 개발하고 유혹한다. 금식의 자치가 회복될 필요가 있다. 과식을 피하고 육식을 절제하며 긴식 습관을 조절해야 한다.
4. 좋은 먹거리 건강한 먹거리를 골라서 소비하는 일이 중요하다. 좀 비사더라도 제대로 생산된 제품을 소비해야 한다. 유기농 식품아니 공정무역 제품을 고려해야 하고 근거리 먹거리나 제철 농산물을 소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단순 소비자에서 소규모 생산자로서 변화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 먹거리를 직접 생산하게 되면 안전하고 좋은 먹거리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고 인간과 자연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말농장이나 텃밭가꾸기 운동이 필요하다.
일상적 삶으로서의 소명(부르심)
2016-10-03 16:06:48
일상적 삶으로서의 소명(부르심)
1.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우리가 선한 일을 하도록 창조하셨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도록 우리를 구원하신다.(엡1:11-12; 20)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대화에서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막12:28-31). 우리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선순위로 이해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삶으로서의 예배가 아닌 예배지상주의는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루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소명의 목적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했다. 결국 소명의 목적은 이웃을 섬기는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2. 종교개혁이후 소명은 직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기 시작했으며 급기야는 직업을 소명과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졌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소명은 직업보다 더 큰 범주다. 소명은 직업으로 축소될 수 없다. 성경이 말하는 소명은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과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세상으로의 부르심이며 삶의 현장으로의 부르심이다. 그러니 소명을 직업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소명의 포괄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영웅적 소명관도 문제다. 영웅중심의 역사관으로 인해 우리는 성경을 위대한 인물 중심으로 읽을 위험이 있다. 영웅 중심의 역사관은 역사에서 소시민을 배제하며 소시민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을 만들어 낸다. 성경의 인물들은 신앙의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자기 시대에 감당했을 뿐이다. 영웅적 소명관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상관없는 허황된 꿈을 꾸게 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작은 일들을 잘 감당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만든다.
3. 소명은 다중적이고 다차원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역은 다중적이며 세상에서 우리 역할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양한 관계, 다양한 일들, 다양한 위치에서 이웃을 섬겨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웅적 소명의식에서 벗어나 일상에서 다중적 소명의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부모로서, 주부로서, 직장인으로서, 교회에서, 성경적 원리를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 삶의 모든 방면에서 하찮고 무가치한 일은 없다. 일상적 삶이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혁명은 일상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삶의 원리들을 실천할 때 일어난다. 우리가 일상에서 믿음으로 소명의 삶을 살아갈 때 진정한 혁명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