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의 내러티브
출애굽기의 내러티브
2015-11-06 02:00:42
출애굽기 1장
출애굽기는 애굽에 들어간 야곱과 그 아들들의 이름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들은 70명에 불과했지만 이제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약속하신대로 그 후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티끌과 같이 많아진 것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애굽의 바로조차도 이스라엘이 번성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누구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출애굽기 2장
구약 성경을 통틀어 아브라함의 자손 중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던 모세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고 있다. 그가 살아남아 바로의 딸의 아들이 된 것이나 그가 바로의 낯을 피해 미디안으로 도망간 것이나 하나같이 모세의 삶이 드라마틱하게 묘사되고 있다. 모세가 미디안에서 나은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은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미디안에서 떠돌아야 하는 자신의 삶을 한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기약 없는 나그네 생활을 하는 동안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었다. 모세가 미디안 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준비되는 시간은 또한 고난 중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찾는 시간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셨다는 말은 하나님이 그 언약을 잊고 계시다가 이스라엘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비로소 생각이 나셨다는 의미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이스라엘이 부르짖는 그 때가 바로 하나님이 언약적 행동을 하실 때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번성하며 또한 애굽의 압제로 부르짖는 바로 그 때를 기다리셨던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이 편안하게 애굽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애굽에서 나올 생각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고 모세의 말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이 고난 가운데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출애굽기 3장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으며 모세도 미디안의 나그네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으로 준비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일은 모세를 애굽에 보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모세를 부르신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다. 그리고 분명하게 모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시는데 그것은 그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켜 ‘내 백성’이라고 지칭하시는데 이것은 매우 언약적인 표현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향하여 이런 표현을 하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조상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이제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출애굽은 단순히 고난당하는 이스라엘에게 자유와 해방을 준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인 것이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야훼(Yahweh)라고 대답하신다. 이 의미는 “나는 나이다”(I AM WHO I AM) 이란 의미이다. 이 단어를 한글 성경은 “ 스스로 있는 자”라고 의역을 했지만 이것은 문맥을 무시한 분명한 오역이다. 이어지는 15,16절은 14절의 야훼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듯이 또한 이스라엘 자손의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이름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모세를 처음 만날 때 6절에서 자신에 대해 이미 하신 말씀을 반복하신 것이다.
출애굽기 4장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의 조상의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타났다는 말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모세가 이것을 걱정했기에 3장13절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은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모세와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세우시려고 설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이루는데 인간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게 된다. 하나님의 뜻과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지만 그 성취는 반드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인간을 통하여 역사 가운데 성취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의 눈높이에 맞추어 그를 설득하시는 모습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언약에 신실한 사람을 찾으시는 분이신지를 실감하게 된다. 26절에서 언약이 표징으로 주어진 할례의 문제로 모세가 위기에 처하는 사건이 잠시 언급되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모세에게 얼마나 언약적 신실함이 요구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출애굽기 5장
드디어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섰다. 모세가 바로에게 요구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내어보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의 백성이 아니라 여호와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애굽에서 바로를 섬길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여호와를 섬기게 될 것이다. 이에 대한 바로의 대답은 자신은 여호와가 누군지 알지 못하므로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겠다는 것이다. 바로의 대답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여호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바로가 모세의 요구를 따라서 이스라엘을 보낼 리 만무한 것이다. 그래서 바로는 혹독한 댓가를 치루면서 여호와가 누구이신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뼈저리게 배우게 될 것이다. 모세와 아론의 요구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당하는 학대는 더욱 가중되었다. 외적으로만 보면 상황이 해결된 기미는 보이지 않고 더욱 악화된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백성이 학대를 당하게 하시는가? 어찌하여 자신을 보내셨는가? 라고 반문하면 주께서도 주의 백성을 구원하지 아니하신다고 불평하였다.
출애굽기 6장
모세의 짧은 불평에 대해 하나님은 1-11절에 걸쳐 길게 대답을 하신다. 그 대답의 핵심은 “나는 여호와” 라는 것이다. 여호와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반드시 이스라엘을 애굽의 무거운 짐 밑에서 빼내시며 속량하실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은 인도하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직 여호와가 누구이신 줄 잘 알지 못하지만, 여호와가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실 때 알게 될 것이다.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애굽의 압제 아래 고통을 받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애굽에는 비록 고통스러워도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고 거주할 집이 있지만 광야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애굽을 떠나 광야로 나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가가 위해서는 그들은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알아야만 했다. 여호와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알리시는 사건들이었다.
출애굽기 7장~11장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표징과 이적을 애굽에서 많이 행하실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것이다. 그 때에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도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알게 될 것이다. 계속되는 재앙들은 그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행하신 것임이 부인할 수 없게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은 계속되는 재앙을 통하여 애굽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여호와가 누구이신지를 알려주고 계신 것이다. 특히 다섯 번째 재앙부터는 애굽인과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나타남으로써 이 재앙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행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진술은 이 여러 재앙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 재앙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의 마음을 꺾어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는 그들은 생존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광야로 절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의 마음을 굴복시키는데 열 가지 재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여호와가 누구신지를 알리기 위하여 열 가지 재앙이 필요했던 것이다.
출애굽기 12장
마지막 재앙인 유월절 재앙은 애굽에 대한 결정적인 심판 사건인 동시에 이스라엘에게는 결정인 구원의 사건이었다. 유월절 재앙이 일어난 아빕월이 이스라엘 해의 첫 달이 된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본격적인 출발이 바로 출애굽 사건임을 보여준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중심적인 사건으로서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서 반복되어 회고되고 인용된다. 유월절 재앙에서 하나님은 애굽 땅에 있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처음 난 것을 다 죽이시고 애굽의 신을 심판하심으로 자신이 여호와이심을 증거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않음으로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 이스라엘로 하여금 알게 하실 것이다. 그런데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한 것은 유월절 재앙뿐 아니라 이미 다섯 번째 재앙인 가축의 죽음에서부터 나타났다. 그런데 유월절 재앙의 독특한 점은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가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하는 표징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린 양의 피에 무슨 특별한 효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구원의 표징으로 정하셨다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일지라도 만일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는다면 죽임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의 피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구원의 표징이고 이스라엘이 그 표징에 순종하는 것이다. 만일 애굽 사람일지라도 이 구원의 표징을 알고 그대로 따랐다면 그들도 죽임을 면했을 것이다. 이것은 앞서 일곱 번째 재앙인 우박재앙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피한 애굽인들이 그 재앙을 면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유월절 재앙을 끝으로 이스라엘은 드디어 애굽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므로 유월절 재앙은 곧 출애굽이요 이스라엘의 해방을 의미하는 구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로 삼아 대대로 영원한 규례로 지키라고 명하신다. 그 유월절 규례는 아빕월 14일 해 질 때에 각 가족대로 양을 잡고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고기를 구워먹으며 21일까지 이레 동안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는 것이다. 이 유월절 규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대대손손 출애굽 역사를 기억하고 그 의미를 반추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유월절 규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본격적인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역사상 첫 발을 내딛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방사람이나 거류인아니 타국 품꾼은 유월절 식사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타국인이라도 할례를 받은 후에는 본토인과 같이 유월절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고 있는데 이 점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혈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있음을 보여준다.
출애굽기 13장
유월절 규례에 더하여 새로운 규례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초태생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치라는 규례였다. 왜냐하면 모든 초태생은 여호와께 속한 소유물이기 때문이다. 유월절 재앙은 애굽의 모든 초태생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라는 표징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죽임을 면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모돈 초태생이 여호와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린 양의 피라는 표징을 통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것으로 삼았다는 의미가 된다. 한 가정의 장자는 그 가정을 대표하는 자이고 이스라엘의 온 장자들은 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장자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말은 곧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출애굽 사건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사건이 아니라 이제 더 이상 바로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사건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목적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이었다. 이 초태생 규례는 유월절과 별도로 이스라엘이 대대로 지켜야 할 규례였다. 그러므로 유월절 규례가 출애굽 사건을 기념한다면 초태생 규례는 출애굽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규례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와 함께 초태생 규례를 이스라엘 대대로 손의 기호와 미간의 표가 되게 하라고 명하셨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애굽을 떠나 광야로 들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지름길인 블레셋 길이 아니라 둘러가는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부딪혀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다. 출애굽 길에 모세는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오는데 이는 장차 하나님이 반드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것인데 그때 자신의 유골을 가지고 나가라고 한 요셉의 명령을 기억하였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팔려갔던 요셉이 이제 비록 유골이 되었지만 다시 약속으로 땅으로 향하는 이 장면은 하나님이 얼마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광야로 나갈 때 그들만 나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도 함께 가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 앞장서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므로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런 생생한 인도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은 결코 죽음이 기다리는 광야로 나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출애굽기 14장
홍해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출애굽은 드디어 완성된다.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이 그랬듯이 홍해사건 역시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게 하는 사건이었다. 바로의 군대가 가까이 왔을 때 이스라엘 자손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모세에게 어찌하게 자기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고 원망을 했던 것을 볼 때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광야로 가는 것은 광야로 인도하시는 여호와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해 사건이 애굽에게는 결정적인 심판이었다면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여호와 곧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심을 역력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또 여호와의 종 모세를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출애굽기 15장
홍해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의 입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여호와가 그들에게 힘과 노래와 구원이 되시는 분이심을 고백하였으니 이런 고백은 여호와의 능력을 생생하게 체험한 결과 나온 고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 중에 여호와와 같은 신이 없으며 여호와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한 만한 위엄을 가진 신도, 그런 기이한 일을 하는 신도 없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다신교의 세계 속에서 이스라엘은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가 다른 신들과는 비교불가능한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광야에서 우려하던 물 문제가 현실적으로 대두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다시 모세를 원망했다. 홍해 사건의 위대한 경험도 현실의 먹고 마시는 문제 앞에서 무기력하게 된 것을 보면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출애굽기 16장
이어지는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도 역시 먹는 문제였다. 광야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절실한 문제는 역시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애굽에서의 삶은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먹고 마시는 문제는 충족될 수 있었다. 그러나 광야에서는 먹고 마시는 문제는 이스라엘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먹는 문제 앞에서 이스라엘은 또 모세를 원망했다. 이스라엘에게 광야 생활은 끊임없이 믿음을 요구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광야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여호와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음을 그들은 처절하게 배워야 했다. 애굽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광야에서는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약속하시면서 그들이 배불리 먹게 될 때 내가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배부르게 떡과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배불리 먹이실 것이며 그들이 먹고 배부를 때 과연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는 언약에 신실하신 믿을 만한 분이심을 알게 될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그러하셨듯이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도 그러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안식일 규례를 지킬 것을 명하셨다. 그것은 매일 먹을 것만 거두라는 것과 제 칠일에는 거두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안식일 규례가 만나를 먹는 것과 연관되어 주어진 것은 안식일 규례의 법정신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생존하는 유일한 길은 만나였고 그 만나는 이스라엘이 수고하고 일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만나와 관련되어 주어진 안식일 규례의 법정신은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광야에서 특별히 이스라엘은 이 안식일 규례의 의미를 생생하게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17장
이번에도 또 물 문제가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므리바의 경우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은 자신들과 가축들이 목말라 죽게 되었다고 모세를 원망하며 심지어 모세에게 돌을 던져 죽일 기세였다. 이런 심각한 상황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여호와가 자기들을 떠나버리고 광야에 자기들만 남겨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까지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이어지는 아멜렉과의 전쟁 사건은 이스라엘의 이런 의심을 일거에 불식시키기에 충분하였다. 한 번도 전쟁을 해본 적이 없는 이스라엘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승리는 이상한 승리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군사력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음으로써 이긴 것이기 때문이다. 아말렉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맛사와 므리바의 의심이 전적으로 기우였으며 신실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확인하게 되었을 것이다.
출애굽기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를 방문한 시점은 19장에서 이스라엘이 시내산 앞에 진을 친 후였다. 또 모세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로 백성들을 재판하는 것을 보아도 이때는 이미 이스라엘이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을 받은 후인 것 같다. 그런데도 18장이 19장보다 앞서 기록이 된 것은 아마도 19장 이후 본격적으로 서술되는 시내산 언약의 길고 중요한 이야기들 사이에 하나의 에피소드인 이드로의 방문 이야기를 끼워 넣는 것이 적당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또 이드로 방문 이야기가 17장 다음에 놓인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이방의 제사장인 이드로의 태도와 아멜렉의 태도를 대조해 놓으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17장에서 아멜렉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했다면 이드로는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신 분이라고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9장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개월이 되던 날 그들은 시내광야에 이르렀고 그 산 앞에 장막을 쳤다. 이제 이 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만나시려고 강림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첫 대면의 모습은 매우 엄격하였다. 여호와께서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산에 오르거나 경계를 침범하는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또한 여호와의 강림은 연기와 지진과 불이 동반되는 두려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런 묘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상당한 거리감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라는 중대한 메시지를 말씀하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마치 독수리가 날개로 업어 오듯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일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 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따라 행하신 신실하신 언약적 행동이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 신실하신 행동을 분명히 체험하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신실하게 행동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일방적인 것인 동시에 또한 쌍방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동은 이스라엘의 신실한 반응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신실한 행동을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을 잘 듣고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보배로운 소유가 될 것이고 제사장나라가 되며 열방과 구별된 백성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했다"고 말씀하신(창18:19) 의미일 것이다. 그래야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게 될 것(창18:18)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것은 아브라함을 택하신 목적, 즉 열방 중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발한 소유, 제사장 나라, 구별된 백성이 됨으로, 그들을 통하여 세상에 복을 주시려는 일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출애굽기 20장
하나님이 두려운 위엄으로 시내산에 강림하신 이유는 이스라엘을 만나 그들과 언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이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을 이스라엘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셨지만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이스라엘을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하신다. 출애굽의 역사를 생생하게 체험한 이스라엘은 이제 자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이 바로 자신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출애굽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지키신 것이며 또한 자신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충만하게 드러내신 것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행동이었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십계명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실함을 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신실하게 언약을 지켜 행하셨으므로 이제 이스라엘도 그에 합당한 언약적 신실함으로 응답할 책임이 있게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한 삶의 준칙으로서 이제 십계명이 주어지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삶이 펼쳐질 공간으로서 가나안 땅이 약속된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의 범죄와 그로 인한 노아의 홍수 사건이후에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씨와 땅의 약속을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려는 것이었고 그들을 통하여 장차 세계 만민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이루지 못했던 것을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것이다.
출애굽기 21장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체의 목전에서 십계명을 주신 후에 모세를 따로 불러서 세부법을 주셨는데 이 세부법은 십계명을 어떻게 삶의 구체적인 상황으로 가져올 것인지를 보여준 하나의 샘플을 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적인 삶이란 결코 자명하거나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법이 살의 구체적인 정황 속에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예민하고 사려 깊은 연구 필요함을 이 세부법은 잘 보여준다. 예를 들면 안식일 계명은 히브리 종을 사면 제7년에는 자유인으로 해방시켜주는 것으로 적용되고 있다. 그리고 살인에 대한 계명도 살인의 고의성 여부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어야 하며 짐승이 사람을 죽인 경우도 고려되고 있다.
출애굽기 22장
도둑질의 계명의 경우도 다양한 상황에 따라서 다르게 적용되고 있으며 배상의 문제도 다양하게 고려되고 있다. 도둑을 죽인 경우에는 도둑질 계명과 살인 계명이 복합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간음 계명도 처녀를 꾀어 동침한 경우, 무당에 대한 문제, 짐승과 행음하는 문제까지 확장되어 고려되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법적인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예민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일을 제대로 하려면 십계명의 법정신에 대한 바르고 깊은 이해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출애굽기 23장
안식일 계명은 다시 안식년 계명으로 확대 적용되며 나아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의 근본 법정신으로 이어지고 있다. 세부법을 마무리 하면서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일이 경고로 주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산을 부수고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섬겨야 한다. 만일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고 그들의 신들을 섬긴다면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올무가 되며 이스라엘은 그 땅에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하시며 또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오직 여호와만 섬기고 그 뜻에 순종하는 백성으로 살게 하시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하여 천하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만일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이런 소명을 깨닫고 감당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이스라엘이라도 멸하시며 그들에게 약속한 땅이라도 빼앗을 것이다.
출애굽기 24장
이제 공적으로 언약예식이 치뤄지고 있다. 언약의 핵심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이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시금 그것을 전했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응답하여 이루되 여호와의 말씀하신 모든 것을 준행하겠다고 하였다. 언약의 핵심은 언약법이고 언약법의 준수임을 이 장면은 분명히 보여준다. 그래서 모세는 여호와 모든 말씀을 기록하였다. 언약예식에서 제단은 분명히 언약의 한 편은 하나님을 상징할 것이며 열두 기둥은 언약의 다른 한편인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할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의 양 당사자가 되어 언약을 맺는 것이다.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피를 가지고 반은 제단에 뿌리고 반은 열두기둥이 아닌 백성들에게 뿌렸다. 제단과 백성들에게 피를 뿌렸다는 것은 이 언약이 생명을 걸고 맺는 엄숙한 언약임을 의미할 것이다. 이스엘만 생명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언약에 신실하실 것을 생명을 걸고 참여하신다. 그래서 모세는 이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했다. 언약의 피를 뿌릴 때에서 모세는 다시 한번 여호와의 모든 말슴과 그의 모든 율례가 기록된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고 그들이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준행하겠다는 대답을 확인한 후에 피를 뿌렸다.
출애굽기 25장
언약을 맺은 직후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시는 것을 보면 언약과 성막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 8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막을 지으라고 하신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에 거할 성소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지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막은 언약을 맺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라는 언약의 양 당사자가 함께 거하는 언약의 장소인 것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언약을 맺었기에 이제 함께 거하는 언약적 동거를 해야 한다. 언약은 바로 이 언약적 동거를 위하여 체결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실 것이다. 성막의 모든 설계와 구성이 전적으로 하나님편에서 이루어졌지만 그 설계대로 성막을 실제로 짓는 일은 이스라엘 편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게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스라엘은 그 계획을 실천하는 관계하는 잔리가 이 성막 건축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런데 성막 건축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 두가지는 증거판이 들어갈 증거궤이고 다른 하나는 진설병 상과 등잔대였다. 전자는 지성소에 놓이는 기구로서 하나님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성소에 놓이는 기구로서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이것을 보아도 성막이란 언약의 두 당사자를 위한 집이요 언약의 두 당사자가 만나는 장소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이스라엘을 만나시고 거기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할 모든 일을 이르실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증거"라는 말이 등장한다. 언약법을 기록한 판을 증거판이라고 하고 그 증거판을 넣어둘 궤를 증거궤라고 부르는 것이다. 물론 이 증거란 말은 언약을 증거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니까 언약법을 기록한 판이나 그 것을 넣어두는 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을 맺었음을 증거하는 증거물이라는 의미이다. 나아가 성막도 증거막이라고 부르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성막 자체가 언약을 증거하는 장막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성막과 그 안에의 모든 기구들을 만들게 하신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가시화한 것이요 또한 그 언약관계를 일상적으로 기억하고 체험하도록 일상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출애굽기 26-31장
하나님을 상징하는 기구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기구들을 만든 후에는 이 기구들이 놓일 공간인 지성소와 성소를 가리는 성막을 만드는 일이 주어진다. 그 다음엔 성막의 뜰에 놓일 제단을 만들고 성막의 뜰을 구분하는 경계가 만들어 진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입을 옷에 대한 상세한 규례가 주어지고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는 규례도 주어진다. 그리고 제사장 위임식에서는 속죄제와 번제 그리고 화목제가 드려진다. 그것은 제사장이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제사이다. 성막을 만드는 일에 더하여 제사장 과 제사 규례가 주어지는 것은 제사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핵심적인 일임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다. 언약의 증거막인 성막에서 행하는 주된 일이 제사라는 것은 제사 역시 언약과 밀접하게 관련된 언약적 행동임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사는 언약을 회복, 유지 발전 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것은 31장 말미에서 하나님은 상막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안식일을 엄격히 지킬 것을 명하신다. 그리고 안식일을 범하는 자는 그 백성중에서 생명이 끊어질 것이 경고된다. 성막이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의 공간이라면 안식일은 언약을 증거 증거의 시간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식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대대의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신다. 성막도 그렇고 안식일도 그렇고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이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성막이나 안식일 그 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하다는 것은 윤리적 도적적 차원이 아니라 언약적 차원이다. 이스라엘이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적 요구에 순종함으로 그 언약적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다.
출애굽기 32장
이스라엘이 애굽을 나온 후 최대의 위기가 발생했다. 그것도 언약을 맺은 직후에 일어난 일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을 만들 것을 지시하는 그 시간에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이 만들고자 한 신은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이 아니라 자신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지금까지 그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경험했는데 모세가 부재함으로 그 경험을 상살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황금 송아지로 형상화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언약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고 결국 언약을 배반한 행동이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은 이방의 잡신들과 구별되시는 분으로서 형상화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이방족속들이 신을 섬기는 방식으로 우상을 만드는 것을 엄격히 금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애굽의 풍습을 따라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섬기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패하였다고 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이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들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다고 지적하신다. 한마디로 그들은 불순종하는 백성, 목이 뻣뻣한 족속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로 하여금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모세의 간구로 인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않으신다. 모세의 간구의 핵심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 대한 호소였다. 비록 이스라엘은 언약을 배반함으로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영원히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을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 모세의 간구의 핵심이었다. 과연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으로서 모세의 호소를 용납하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가 징벌의 면제는 아니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백성 중에 삼천명을 죽이게 하시고 또한 스스로 백성들을 치심으로 그들을 정화시키셨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징벌은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언약공동체의 정화를 위한 언약적 징벌인 것이다.
출애굽기 33장
금 송아지 사건으로 인해 파괴된 언약은 아직 회복되지 못했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가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낸 백성이라고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진멸하지 않기로 뜻을 돌이키셨기에 그들에게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들이 그 땅을 얻도록 사자를 앞서 보내 가나안 족속을 쫒아 내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과 함께 올라가지 않으신다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불숭종하는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오들에게 복이 아니라 화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약을 배반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에서 진멸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정탐꾼 사건으로 인해 출애굽1세대는 광야에서 소멸되고 말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을 파기된 언약이 회복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이 진멸은 면했지만 언약을 회복되지 못했다. 그래서 모세는 다시 한번 이 문제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린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세의 간청을 들어주시어 그들과 함께 가실 것을 승락하신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올려보내지 마시라고 간구한다. 왜냐하면 여호와가 함게 하시지 않는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가는 것은 무의미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며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모든 일들의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언약적 삶을 살게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될 때 이스라엘이 거할 약속의 땅이 하나님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존재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드는 중차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애굽기 34장
하나님이 모세에게 돌판을 다시 만들어 오하고 하시고 그 판에 있던 말을 다시 친히 서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언약이 본격적으로 회복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언약의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적 자비와 은혜의 결과였다. 그런데 돌판을 새로 쓰는 것이 언약 회복의 핵심인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언약의 파괴가 언약법을 범한데 있었듯이 언약의 화복 역사 언약법을 지키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이어지는 10절이하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언약법읅 지키는 언약적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다시금 강조하여 가르치신 것이다. 모세가 돌판 둘을 만들어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여호와께서 강림하시어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셨다. 선포된 내용은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하나님, 인자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었다. 바로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기에 파괴된 언약이 다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 말슴을 듣자 마자 땅에 급히 엎드려 경배하면서 비록 이스라엘이 불숭종하는 백성이지만 그 악과 죄를 사하시며 이스라엘을 버리지 말고 동행해주시기를 간구했던 것이다. 결국 궁극적으로 호소하고 의지할 것은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하심뿐이다. 여호와의 언약적 신실함을 이스라엘의 언약적 불충성을 넘어서는 신실하심이다. 그러나 불충성을 용인하시는 신실하심이 아니라 불충성을 고치시는 신실하심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자와 진실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35장
성막을 만드는 일에도 안식일 규례를 엄중히 지킬 것을 명하고 있다. 성막이 언약을 시각화, 일상화한 것이라면 성막의 핵심은 언약법일 것이다. 그러니 성막을 만들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성막울 만드는 의미가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성막을 만들면서 강조되는 것이 마음에 원하는 자, 마음에 감동을 받은 자들의 자원하는 예물이 드려진 것, 그리고 남녀를 불문한 이스라엘 공동체 전원의 참여이다. 성막을 만드는 일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전적인 참여 그리고 자발적인 참여가 강조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암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공동체성과 자발성일 것이다. 공동체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나라는 이루어진자는 것은 만고 불면의 진리인 것이다. 성막의 모든 설계도는 하나님에게서 나왔지만 그것을 만드는 일은 이스라엘에게 맡겨진 것도 하나님나라의 큰 원리일 것이다.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신 주인이시지만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일은 인간에게 맡기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성막의 설계도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설계대로 만들 수 있는 지혜와 능력도 주셨다. 그래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성막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재료를 준비하는 일에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했지만 성막을 직접 제작하는 일에는 선택된 지혜로운 자들이 주도적으로 일을 한 것이다.
출애굽기 36장
성막을 만드는 모든 과정들이 상세하게 다시 나열되고 있는데 이는 26장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동일한 내용이 이렇게 다시 길게 반복되는 것은 성막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철저하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성막이 구약적 하나님나라의 상징이라면 성막을 만드는 과정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듯에 순종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것은 성막의 제작과정이 보여주듯이 하나님이 계시하신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정교하고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출애굽기 37장
성막의 외적 구조물들이 만들어진 후에 성막 안에 들어갈 물건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창조 순서와 비슷하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도 공간을 먼저 만들고 그안에 들어갈 내용물들을 만들었듯이 성막 제작도 유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지는 물건은 증거판이 들어갈 언약궤 혹은 증거궤 그리고 증거궤를 덮는 속죄소이다. 언약궤가 가장 먼저 만들어 지는 것은 성막 물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놓여지는데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공간이고 그렇다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물품이 된 것인가?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못하도록 엄중하게 명하셨다.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시각화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궤 그리고 언약궤 안에 들어가는 증거판을 통해서 자신을 형상화하도록 명하셨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자신을 언약궤를 통해 형상화하신 것인가?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성경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방식은 언제나 간접적이고 관계적이다. 만물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 표현된다.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원형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하실 때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분으로 나타내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성막에서 언약궤로 형상화된 것은 하나님은 자신을 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신 것이니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 다음에 성소에 들어갈 물품이 진설병상, 등잔대, 그리고 분향단이다. 지성소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면 성소는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 상대방인 이스라엘 공동체를 상징할 것이고 성소안에 들어가는 물품들도 이스라엘 공동체와 관련되었을 것이다. 특히 진설병 12개가 진열되는 진설병 상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고 한덩이에서 나와 7개의 가지를 가진 순금 등잔대도 7의 완전수로 표현된 이스라엘 공동체의 하나됨을 상징할 것이다.
출애굽기 38-39장
성막뜰에 놓여지는 물건인 번제단과 물두멍이 만들어지고 성막 울타리와 울타리를 감싸는 포장이 만들어진 후에 마지막으로 제사장이 입는 옷이 만들어진다. 특이한 것은 에봇 어깨에 다는 호마노라는 보석에 이스라에 아들들의 이름이 새겨진 것과 에봇 가슴에는 12개의 보석을 달고 각 보석들에 이스라엘 12자파의 이름을 새겼다는 점이다. 이것은 분명히 제사장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사장 옷을 만드는 일을 끝으로 성막 제작의 모든 일이 마무리 되었다는 것은 성막에서 이루어질 중요한 일이 바로 제사드리는 일임을 암시한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마친 것을 확인한 후에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축복하였다.
출애굽기 40장
성막을 봉헌하는 일은 정확하게 첫째 초하루로 지정되고 이스라엘은 둘째 해 첫째 달 초하루에 성막을 세우게 된다. 하나님이 성막을 첫째 달 초하루에 세우라고 명하신 이유는 무엇일꺄? 그 날은 유월절날이고 무교적이 시작되는 날로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처음으로 기념하는 날이다. 바로 그 날에 성막이 세워진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성막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시각화하고 일상화한 것이라면 성막을 세운다는 것은 바로 유월절 곧 출애굽의 목적이 성취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키신 것은 바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언약적 삶을 함께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성막을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에 세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성막이 세워지자 드디어 구름이 성막에 덮히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 지금까지 여호와의 영광에 가까이하는 일은 오직 모세에게만 허락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히 금지되었는데 이제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게 임함으로써 이스라엘 공동체 가운데 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막에 구름의 형태로 임한 여호와의 영광은 늘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로 임하여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적 동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임재르 이렇게 충만하게 가까이 대면한 적이 없었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끝]
출애굽기: 해방과 자유
2015-04-16 19:23:51
애굽에서 해방
출애굽기의 시작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가혹하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브르짖음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그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셨던 언약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동안 잊어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 행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건지시려고 하나님은 한 사람 모세를 부르신다. 출애굽 과정이 모세가 차지하는 역할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 개인의 위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그저 개인의 위대함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무엇이며 그를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이며 그의 순종과 삶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인도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약속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사역이었다.
7일간의 창조 이야기가 문학적 패턴을 따라서 서술되었듯이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 이야기도 문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패턴을 보여준다. 이러한 패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고 장악하고 계심이 증거되고 있다. 그리고 열번째 재앙은 이전의 재앙 이야기와 분리되어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열번째 재앙인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며 그들의 해방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열가지 재앙을 비롯해 하나님이 홍해르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증거하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언약과 율법
출애굽기 18장까지가 애굽에서 노예 생활과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시내산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면 19장 부터는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무엇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고 노예에서 해방된 백성들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은 은혜를 받기 위해 지켜야 할 것싱 아니라 은혜를 받아 자유케 된 후 하나님의 통치 아래사는 영광스러운 삶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지침들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서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위대한 구원을 언약의 전제로 하고 있다. 율법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로 한 것이고 다만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십계명(20장1-17절) 이후에 20장 22절부터 23장 33절까지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보다 세부적인 지침과 명령들을 소개하는데 이 부분을 가리켜 언약법 혹은 언약법전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십계명의 원칙을 세부적으로 적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막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는 성막 이야기가 나오는데 25장부터 31장 11절까지는 성막과 그 안에 비치되는 물품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지침이 주어지고 35장 4절부터 39장까지는 그러한 지침을 따라 실제로 성막과 물품을 만드는 내용이 이어진다. 성막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내용이 반복되는 것은 성막 제도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착오없이 지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성막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마참내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하였고 성막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이후로 이스라엘의 진로를 인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특별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막은 단순히 하나님의 앰재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만나시며 제사제도를 통해 이스라엘을 용납하시고 음혜를 베푸시는 장소였다. 성막은 거룩성과 초월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임재를 언약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금송아지 사건
성막 이야기의 한 가운데인 32장-34장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놓여있다. 금송아지 사건의 핵심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든 것이다. 우리를 위한 신, 우리의 목적과 바램을 이루어주는 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에게 요구한 내용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예배하면서 여호와의 축제를 지키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이들은 여호와를 섬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얘배할 수 있는 여호와의 형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한 신,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신,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신, 이것이 바로 금송아지 형상의 의미였다. 성막 이야기 한 가운데 금송아지 사건이 놓임으로써 성막과 금송아지가 확연하게 대조되고 있다. 성막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라면 금송아지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하나님 예배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예배 방식이 확연히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지만 어떤 형상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막제도를 세우셨지만 금송아지라는 종교제도는 배척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