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의 여정- 박대영
묵상의 여정- 박대영
2015-10-24 23:12:52
프롤로그
묵상은 여정이다. 항상 현재진행형인 여정이다.
시간과 공간 속의 여정이며 관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는 여정이다.
목표가 있는 여정이며, 과정이 목표만큼이나 중요한 여정이다.
묵상은 소통이다. 관계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소통이다. 나를 이 여정에 부르신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나의 소통이다. 왕이신 하나님과 백성인 나, 남편이신 하나님과 아내인 나, 목자이신 하나님과 양인 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자녀인 나 사이의 묵상이다.
묵상은 선배들의 전통인 렉티오 디비나(Lectio Divina)의 네 단계를 모두 포함한다. 그것은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단계인 렉티오(lectio 읽기),읽은 말씀을 기억하고 되새기며 상상하고 그 지평을 확장하는 메디타티오(meditatio, 묵상),묵상한 것을 토대로 하나님과 대화하는 기도의 단계인 오라타오(oratio, 기도),그 묵상한 말씀이 일상의 삶이 되게 하는 콘템플라티오(contemplatio, 관상)으로 구성된다.
묵상은 개인적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적 작업이다.하나님의 말씀은 개인을 향한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를 행한 메시지다. 개인에게 라도 하나님나라 공동체의 한 개인을 향한 메시지이다.
따라서 묵상은 나만의 고독에서만 아니라 공동체와 더불어 듣는 일이다.
묵상은 명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인격체와의 대화다.
묵상의 대상은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다.
묵상은 고난 속의 희열이다.
1부 묵상 여정으로의 초대
1.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여정
하나님은 사람을 찾우시며 부르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 나선 이 여정을 중단없이 지속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나와의 친밀한 사람의 관계보다 내게 더 바라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 자유만이 사랑의 관계를 낳을 수 있으니 그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가 거절당할 수 있는 위험한 결정이었으며 하나님의 자유가 거절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결정이었다. 인간 창조는 하나님이 위험을 무릅쓴 사랑으로 내린 결단의 결과였다. 묵상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그토록 바라셨던 사랑의 소통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매 순간, 먼저 손 매밀고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스런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희망이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여정은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으며 심지어 가장 낮은 인간보다 더 아래로 내려와 그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써 또 다시 자기를 버리는 사람을 보여주셨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여정은 끝없는 자기버림과 자기부인의 여정이다. 묵상을 통한 창조주와의 교제느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정보를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대면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성품과 삶을 변모시키는 변혁적이고 급진적인 일이다.
2. 나를 찾아떠나는 여정
창조와 성육신과 십자가는 우리와의 교제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부인이자 자기비하였고 자기를 내어줌이었다. 묵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수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누구라고 정의하시는 그분 말씀을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시작된다. 모순저인 자기 정체에 대한 진정어린 수용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갈망도 배고픔도 없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모순적인 자기 조건과 대면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하나님을 읽는 일이기 전에 나를 읽는 일이며 하나님께 내가 읽히는 일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묵상은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고통스런 과정이다. 별로 달갑지 않은 자기외의 만남은 우리 자신을 절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절망이 자기 포기가 아닌 자발적인 자기비움으로 나아가는 단 하나의 처방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로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모순적인 정의를 기억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은 날마다 원점으로 돌아와 그런 나와 대면하는 용기와 모험에서 시작된다.
3. 낯섦을 회복하는 여정
무엇보다도 위험한 건 바로 신앙에 길들여짐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던 교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 시대의 사람들의 경건한 고백이요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이들의 지적인 몸부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신앙의 습관이나 형식이 익숙해지면 신앙의 신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몇개의 깔끔한 공식으로 정리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는데 있다. 불확정성과 불확실성 속에 역동적인 반응을 생명으로 하는 신앙의 신비 앞에서 이런 자기 충족적 순응주의는 치명적인 태도다. 묵상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나를 찾아나가는 여정이라면 그것은 자아통제력의 상실, 즉 길들여짐에서 벗어나는 여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묵상은 내 신앙과 지식과 관계를 포함하여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삶의 조건을 낯설게 보고 재해석하는 일이다. 익숙함의 두번째 결과는 타자성의 상실, 즉 길들임이다. 이는 상대방을 길들인다는 뜻이다. 신앙에 있어서 타자성의 상실은 자아통제력의 상실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신앙에 있어서 타자는 하나님이요 성경이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이요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이런 것들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대상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2부 묵상 여정의 준비
4. 묵상 여정의 길잡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안에서만 자유롭다. 그래서 묵상은 명상도 아니고 공상도 아니다. 묵상은 나 자신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나를 둘러싼 숱한 관계들을 새롭게 보는 일이다. 그 새로운 재해석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것을 기록한 성경이다. 성경만이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며,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인생이 진행되는 방식, 그리고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묵상의 대상은 성경이자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이 역사하신 사건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고 그 인간의 모습 속에 투영된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묵상은 내 언어가 통하고 내 생각과 말로 창조되어 온 나의 나라를 전복한다. 또한 묵상은 전적으로 낯선 하나님의 세상, 즉 창조와 구원의 세상이 펼쳐져 있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하나님의 나라와 그 통치자에 대한 정보가 아니다. 그것은 그 나라 왕의 임재방식이자 통치방식이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순종하는 자에게만 그 나라는 실현된다. 말씀을 묵상하면, 한 치 앞도 못보는 내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책임지고 칭송받는 고단한 삶을 중단할 수 있게 된다. 묵상은 모든 대상을 나를 위해 사용하고 나의 논리와 이념을 위해 봉사하도록 환원하고 객체화하던 삶을 멈추게 한다. 내 자아의 어둡고 좁고 음습한 창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거대하고 광활하고 신비하고 낯선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일, 그것이 묵상이다. 묵상의 목적은 우리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며,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작동하게 하는데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는 비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 언어를 통해 공동체 안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 된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5. 묵상 여정의 동반자: 공동체
"나는 나다"(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신 하나님 말고는 아무도 자가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 나라는 존재는 오로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삶의 조건이나 관계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이웃이, 나의 공동체가, 내가 맺고 있는 무수한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내 존재의 근거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성경 묵상의 여정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과 성령과 공동체다. 성경이 묵상 여전의 지도이고 나침반이라면, 성령과 공동체는 그 여정의 동반자이다. 지도를 읽는 독법을 제시해주는 선생이요, 사실상 운명 공동체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읽기 전에 우리는 공동체에 의해 읽혀져야 한다. 그들이 우리 자신을 읽고 영향을 미치도록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우리 안에 마련해야 한다. 공동체는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신 또 다른 책이다. 성경은 이미 성경저자들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을 통과한 그들의 간증이고 고백이다. 성경이 나 자신을 읽게하는 것이 성경묵상이라면, 그 성경을 읽은 공동체가 나를 읽고 질책하고 격려하도록 맡기는 것 역시 성경 묵상이다.
6. 묵상 여정의 동반자: 성령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사람이고 성경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급기야 아들을 통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고, 승천하신 지금도 아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으로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것은 결국 성경을 듣는 것이다. 성령없는 성경운동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두 극단을 낳는다. 성경없는 성령 운동 역시 은사주의와 이에 반발하는 경직된 구속사 운동이라는 두 극단으로 치달았다. 이렇듯 예수님과 성령의 음성을 듣느 일, 즉 성령의 내적 증거를 찾고 그것을 확신하는 일은 다름 아닌 분별의 작업이다. 그것은 우선 마음의 문제이자 동시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예민한 영적 기술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는 일, 즉 성령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특정한 방법이 아니라 사실상 '관계'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동안 그분과 동행하면서 쌓아온 관계 위에서 창조적으로 판단하고, 관계 속에 녹아든 감으로 결정하고, 관계가 열어준 상상력으로 현실 너머를 보고 관계가 뒷받침해 준 저력으로 광야의 삶을 감행하길 원하시는 것이다. 묵상은 성령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것은 내 소리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내 소리를 분별하는 일이다. 더 침묵하고 더 고독해지는 것이다. 성령께서 자기 목소리를 담아 두신 공동체의 소리를 내 소리로 누르지 않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 걷는 일이다.
7. 묵상 여정의 장: 광야(1)
묵상은 하나님이 하나님되게 하시고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잘 지키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배우고 경험할수록 그분을 더 알아가고 나 자신을 더 잘 알아가게 된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 피조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으로 존재를 누릴 수 있는 의존적인 관계적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그것은 인간 안에는 스스로 극복하여 생존할 수 없는 커다란 '혼돈'이 내재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인간은 완벽하고 완성된 존재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존재로서 완성을 향한 목표를 뭎고 있는 존재로 지음받은 것이다. 그 '혼돈'이 인간을 인간되게 한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새창조의 핵심은 삶의 조건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창조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곧 고난받는다는 뜻이다. 시공의 제약 속에서 살면서 고난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첫 인간의 죄를 되풀이하는 것이다. 묵상은 바로 이 혼돈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묵상은 우리 앞에 시시각각 갖가지 형태로 찾아오는 혼돈의 실체를 파악하고 인정하고 직면하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나라 사역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안에 혼돈이 점점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점점 내 안에서 온전히 왕노릇하실 수 있게 된다.
8. 묵상 여정의 장: 광야(2)
광야는 가능성의 장소이고 선택의 장소이다. 광야의 혹독한 현실은 말씀 묵상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가 되기도 하지만, 아무 것도 기댈 수 없는 그 팍팍한 땅이 말씀 묵상으로 도약할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광야는 내가 묵상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임을 가르쳐 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에서 내가 살고 있다는 것도 알려준다. 광야는 우리의 닟익은 신학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하나님을 낯설고 충격적으로 볼 수 있게 해준다. 광야에서 우리는 내가 통체하거나 조정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으며,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광야는 나와 하나님과 내 삶의 조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교정해준다. 묵상의 배경이 될 뿐 아니라 묵상이 실현되는 곳은 바로 광야다. 우리가 사는 곳 자체가 혼돈 가득한 광야다. 광야는 지나친 비관도, 지나친 낙관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묵상은 이 광야의 현실에 뿌리박은 묵상이어야 한다. 이 암담한 현실을 회피하고 모면하기 위한 묵상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를 말씀으로 재평가하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묵상이 되어야 한다.
9. 묵상 여정의 기술: 기도
말은 원래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도록 주신 것이다. 스탠리 그랜츠는 기도를 '하나님을 삶의 중심적 실체로 보고 그분을 인격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더 이상 역사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심으로 보지 않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그 언어를 잃어버렸고 하나님과 소통하는 법도 잊어버렸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먼저 나를 찾아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그 말씀에 응답하고 참여하고 교제하고 맡기는 전 과정이다.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 즉 호모 페카토르이다. 기도는 영적 존재인 인간이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도구다. 기도는 하나님을 상대하는 묘책이 아니라 그분을 상대하는 일 자체다. 기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거나 내게 처한 상황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개혁하고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러니 기도는 우선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일이 아니라 항상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나의 필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요(뜻)을 듣고 대답하는 일이다. 말씀 묵상은 기도로 준비되어야 한다. 기도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실현되기를 비는 일일뿐 아니라, 그 실현에 자신이 참여하게 해 달라고 비는 일이다. 참여하는 기도는 큰 모험을 감수해야 하는 믿음의 행위다. 기도의 자리는 인간이 자신을 인간으로 인정하는 지점이며 자신의 생존과 보존과 진전을 창조주께 맡기는 자리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먼저 아시고 나를 찾아주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보다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갈망에 근거한다.
10. 묵상 여정의 모체
묵상에서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다. 성실이다. 묵상은 본질적으로 내가 무언가를 해 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반손을 내미는 행위이다. 즁단없는 진득한 묵상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훈련된 몸이다. 몸의 기억이다. 몸으로 하는 묵상이다. 묵상은 몸으로 한다. 근육이 기억하는 딱 그만큼이 내 신앙이다. 몸의 기억은 관념의 기억보다 앞서고 또 오래간다. 묵상이 온 몸으로 밀고 나가는 사랑의 행위가 되지 못한 다면 그 묵상은 점점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지 못하다록 방해할 것이다. 온 몸의 묵상은 나와 묵상을 분리시키지 않는다. 묵상 행위와 묵상의 삶을 떼어 놓지 않는다. 온 몸으로의 묵상은 확실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으로 인해, 불확실한 현실의 바다로 배를 띄우는 일과 같다. 그래서 묵상은 내가 나를 만들지 않고, 내가 갈 길을 정하지 않고, 순풍이든 역풍이든 성령의 바람이 부는 대로 그분의 말씀의 조류가 나아가도록 나를 맡길 수 있게 해준다.
3부 묵상 여정의 성격
12. 묵상 여정의 기쁨(1)
묵상은 놀이다. 하나님 놀이다. 공동체 놀이다. 존재의 놀이다. 하나님을 즐기는 일이고 관계를 증기는 일이고 존재를 즐기는 일이다. 인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도록 지음을 받은 존재들이다. 그 기쁨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이 그 도리를 다할 때 누릴 수 있다. 그 도리를 다하기로 한 약조가 언약이고 그 도리가 율법이고 그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의이며 그 도리를 다할 때 찾아오는 것이 샬롬이자 안식이고 그 도리를 다한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웰빙이 복이다. 언약의 파트너들은 서로가 서로를 향해 자신을 즐기도록 내어 주어야 한다. 묵상은 자신의 도리에 대한 기억이며, 언약의 파트너들에 대한 성찰이요, 마땅한 도리에 대한 행동이다. 기억과 성찰과 행동 속에서 인간은 창조의 질서를 따라 가눌 수 없는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묵상은 이 태초의 웃음을 회복하고 완성하는 일이다. 묵상은 우리를 지금 이 기쁨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묵상을 통해 하나님을 누리는 기쁨은 이 세상에서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주며 하늘가는 우리의 길 앞에 놓인 죄의 권능을 깨뜨리는 열쇠가 된다. 죄를 이기는 길은 묵상의 즐거움을 통해 여호와를 즐기고, 공동체를 즐기고, 자연을 즐기는 것뿐이다. 이 즐거움을 맛봄으로써 궁그적인 즐거움을 사모하는 것뿐이다. 묵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일이며, 그 즐거움으로 인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게 하는 일이다. 묵상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만남이고 교제이기 때문이다.
13. 묵상 여정의 기쁨(2)
묵상은 기쁨과 즐거움과 행복을 준다. 묵상이 기쁨이고 행복인 것은 선구안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인 결핍, 부족, 아픔, 절망 등의 소위 부정적인 요인들이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피지 않고 그 본래의 의도대로 작용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묵상은 엄연한 실재인 그 혼돈이 우리 안에서 넘지 말아야 할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해준다. 묵상은 모험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이끈다. 익숙한 언어와 강요된 꿈이 주는 거짓 위안과 조작된 기쁨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날 것으로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광야로 우리를 이끈다.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하고 탐구하고 탐색할 때 하나님은 불안해하시지 않고 도리어 좋아하신다. 그것이 우리가 참된 기쁨, 진정한 행복, 온전한 즐거움을 얻는 길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묵상은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곳은 불안과 불편과 우울의 땅아 아니라 예기치 않은 새창조의 기쁨이 기다리는 땅이다. 묵상이 없으면 우리는 늘 예측 가능한 땅, 내가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땅, 그래서 결과가 빤히 내다보이는 땅만을 선택하게 된다. 거기엔 내게 길들여진 기쁨만 있을 뿐,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없다.
14. 묵상 여정의 기쁨(3)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함께 놀기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 역시 하나님의 놀이였다. 놀이는 그분 본성의 일부일 것이다. 삼위 하나님의 기브신 연합은 그 자체로 놀이다. 놀이의 파트너를하나 더 늘리기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고 그 안에 인간을 두셨다. 창조와 구속을 통한 새 창조는 모두 이 놀이의 대상을 늘려가는 과정이요, 그 구속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놀이이며, 그 놀이가 진행되는 놀이터는 바로 세상과 인간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피조세계와 더불어 잘 노는 관계를 맺고 살기를 바라셨다. 또 인간이 다른 안간과 잘 노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셨다. 이렇듯 놀이가 의무보다, 문화보다, 문명보다 더 먼저 있었다. 놀아가 사라진 세상엔 일만 남았다. 원래 즐거우면서도 생산적이고 그 자체로 예술이며 리듬과 조화가 있는 놀이로서의 노동은 사라져 버렸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자기 자신과도 잘 놀지 못하고 타인과도 놀 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분명 죄다. 구속이란 인간을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피조물과 잘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존재이자 화목의 사람, 화평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놀이로서의 노동이 회복되고, 섬김과 사명으로서의 노동이 행해지는 곳이 천국이다. 놀이는 파괴적이다. 일을 전복시킨다. 필요성과 유용서을 타도한다. 시간에 쫒기고, 감독의 감시를 받고, 율법주의에 물든 모든 활동들을 무너뜨린다. 대신 창조의 리듬과 장단을 회복시킨다. 삼위 하나님이 세분이 한분처럼 잘 노시면서 희락 가운데 살고 계신 것처럼, 이제 누구와도 더불어 잘 사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교제 파트너로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구속을 통한 새 창조로 우리가 맞이할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나라인 것이다.
15. 묵상 여정의 장애물
말씀의 부재, 존재성의 부재, 진리의 부재, 공동체성의 부재, 삶의 부재, 소명의 부재, 이 모든 부재들은 삶의 의미와 방향의 상실을 가져왔다. 이것은 자신을 부르신 분과의 단절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다. 이것은 성속 이원론적 삶과 이신론적 하나님 상을 만들어 냈고, 스스로 자신들을 하나님나라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들은 삶의 현장에서 진행되는 거룩한 하나님나라 역사에 눈감은 채 허위와 위선의 담을 높게 쌓고 자신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는 이방인들이 되었다. 사탄이 만들어 낸 이런 부재의 환경은 그리스도인 스스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막강한 영적 장벽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믿음은 영적 상상력이다. 영적 상상력만 발휘한다면 그리고 그 상상을 현실이 되게 할 신실함과 담대함이 있다면 이런 외적 장애물들은 우리의 영적항해에 역풍이 아니라 순풍이 될 것이다. 영적 무관심, 그것은 사탄의 공격에 대한 인간의 가장 처참한 형태의 패배다. 다른 패배들은 모두 여기서 나온다. 무관심은 무지를 낳는다. 관심이 없으면 보고 있지만 볼 수 없고 듣고 있지만 들을 수 없다. 영적인 일에 대한 무관심과 무지는 무책임한 태도를 낳았다. 그리고 영적인 무책임이 영적인 무감각을 낳는다. 그것은 영적인 나태와 안일함이다. 그들에겐 마지막 날을 사는 의식, 즉 종말론적 긴장이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도 하나님을 안다고 말한다. 무감각은 무분별을 낳았다. 그들은 이성과 감성, 이성과 영성을 갈라 놓았다. 영적인 일에 대한 충만한 관심과 묵상에 대한 확신이 있더라도 그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만큼 중요하고 절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실천에 이를 수 없다.
17. 묵상 여정의 서사
인간으로서 우리의 경험은 그 자체로 서사적이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또 어디를 가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에게 말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고백이고 하나님의 생각의 표현이다. 하나님이 열어가신 역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이야시 속으로 초대하고 계신다. 묵상, 그것은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다. 하나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하는 지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이야기를 말하는 과정에서 이제야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게 된다. 묵상은 하나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되라는 초대에 응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삶으로 써 내려가라는 요청에 응답하는 일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 이야기와 세상의 이야기의 각축장이다. 이 세상에는 결국 두 이야기밖에 없다. 우리는 동시에 두 이야기를 살 수 없다. 신앙은 둘 중 어느한 이야기를 선택하여 자신의 운명을 거는 일이고 그 이야기의 완성을 위하여 살아가겠다고 작정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나라 이야기의 절정이다. 그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밞고 죽이는 세상, 오로지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영웅들의 세상, 자격과 조건을 갖춘 자만이 대접을 받는 질서가 만연한 세상의 이야기 대신에,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값없이 호의를 베푸는 은혜의 질서, 자비의 질서, 사랑의 질서로 진행되는 혁명적인 사랑의 사건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이야기만이 생명을 살리는 이야기이고 생명을 생명답게 하는 이야기임을 수용하고 그 이야기에 참여하겠다는 뜻이다. 묵상의 여정은 서사 형성의 여정이다.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를 하는 일이다.
18. 묵상 여정의 속도(1)
묵상의 여정은 신앙의 여정이다. 그 여정은 끝이 있지만 끝에 당도하는 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 여정은 얼마나 빨리 달렸는지를 묻지 않고 어떻게 달렸는지를 묻는다. 얼마나 멀리 왔는지를 묻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 달려왔는지를 묻는다. 과정의 총합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묻는다. 그러므로 묵상의 여정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내딛고 있는 걸음이다. 속도의 가장 큰 해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오늘을 빼앗아 간다는데 있다. 속도는 묵상을 앗아간다. 속도는 질문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행복하지를 묻지 않는다. 그것은 속도가 묵상의 공간인 내면의 고독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속도는 삶의 역설과 신비를 앗아간다. 속도는 에둘러 가는 길을 모르며 뒤돌아 가거나 멈추는 것은 실패이고 낙오라고 말한다. 속도는 영적 여정의 동반자를 앗아간다. 속도는 우리에게 앞서 가라고 부추키며 우리를 앞질로 가는 사람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속도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 경쟁해야 하는지, 왜 빨리 가야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속도는 이정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너무 빠른 속도는 우리에게 방향 감각을 잃게 만든다. 묵상 여정의 이정표는 성서와 성령과 성도다. 영적 여정에서 이정표를 무시하는 것을 정당화 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묵상의 여정은 조용한 지속이다. 조바심내지 않는 전진이다. 내 안에 길을 내고 결국 내가 길이되는 일이다. 느긋한 묵상의 여정은 감각적인 외부의 경험들을 내면에 들여 놓는 시간이다. 느긋한 묵상의 여정은 경주가 아니라 완주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느긋한 묵상의 여정에서 필요한 것은 비교가 아니라 비움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은 느긋한 여정이었다. 그것은 지연이 아니라 지속의 과정이었고 끝냄이 아니라 끊음의 여정이었고 돌아감이 아니라 돌아봄의 여정이었고 경주가 아니라 완주를 위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정의 주도권을 이스라엘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쥐고 계셨기 때문이다. 느긋한 묵상의 여정은 하나님의 속도에 맞추어 하나님과 함게 걷는 여정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속도와 리듬을 따라 걷는 것이다.
19. 묵상 여정의 속도(2)
성경 묵상은 성경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고 그 저자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궁극적인 저자이신 하나님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저자의 시선으로 삶과 자연과 세상을 읽고 나서야 우리는 그 시선으로 우리 시대를 읽을 수 있게 된다. 성경의 저자는 단순히 내게 말을 거는 정도나 그냥 알고 지내는 사이 정도에 그치고 싶어허지 않는다., 내 세계관을 자극하고 도전하고, 때로는 얼얼하게 때리고 찔러서 완전하 나를 뒤집어 놓겠다고 작정한 자다. 신앙의 여정에도 끝은 있지만 그것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정이다. 그 여정은 천천히 가고 또 같이 갈 때 오래갈 수 있다.내가 서두른다고 빨리 당도할 수 있는 여정이 아니라 결국 내가 그 여정으로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변해야 끝나는 여정이다.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하나님의 걸음에 맞추어 걸어가는 삶의 방식이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 역시 바꿔 놓을 것이다.
20. 묵상 여정의 속도(3)
디지털 문명에 포위된 현대 사회는 참다운 소통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요소인 고독을 잃어가고 있다. 와로운 것과 고독한 것은 같지 않다. 고독이란 타인이 침범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을 확보한 상태라면, 외로움을 도리어 타인의 삶에 침범하여 나의 불안과 갈증을 채우려고 하는 상태를 말한다. 고돈한 사람은 숱한 질문들을 용납하는 능력이 있다. 그런 능력 때문에 고독은 홀로 있는 것도 잘하지만 타인과 진정한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렇게 고돋은 나를 누군가와 연대하게 해주며 동시에 내가 집단주의적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막아준다. 고독해야 사람이다. 고독해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상대방에게 내 방식의 사랑을 건제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는 일이다. 말씀 묵상은 고독의 모판에서 형성되는 소통이다. 나와 하나님 간의 소통이요, 나와 이욱 간의 소통이다. 그것은 고독 속에서 천천히 내가 나 자신과 대면한 후에 가능한 소통이다. 고독한 공간은 바로 거룩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뤄지는 마음의 성소다. 하나니을 묵상하기 전에 자신을 묵상하는 마음이요 성취와 업적보다는 관계와 존재를 갈망하는 공간이다. 묵상은 듣는 일이다. 자기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느 일이다. 오직 고독의 모판에서만 참된 묵상, 하나님과의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
21. 묵상 여정의 신비
묵상 여정의 목표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여정이다. 바로 이 목표가 묵상 여정의 성격을가늠케 한다. 도로테 죌레의 말대로 묵상의 여정은 신비를 민주화하는 일이다. 묵상을 통해 일상은 무미건조하고 별것 아닌 것에서 신비한 것들로 가득 찬 공간으로 변한다. 인생이 몇 가지 공식으로 규명되거나 특정 교리 안에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한 신간과 공간이 만나는 지점이요 영원의 한 조각이며 영광의 섬광이라는 각성에 이르게 된다. 묵상은 신비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하고 거룩한 분노, 거룩한 회의, 거룩한 불만을 가져다 준다. 묵상의 여정은 사랑을 경험한 자의 겸비의 여정이며 비움의 여정이며 수용의 여정이다. 묵상의 여정은 모든 인간을 신비한 존재로 수용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보이는 사람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가는 과정이다. 묵상의 여정을 신비의 여정으로 본다면 묵상의 여정을 즐길 수 있는 가장 큰 준비물은 호기심과 질문이다. 묵상의 여정은 신비의 여정이다. 그것은 생명의 여정이다 끝없이 질문하고, 한계에 직면하고 그래서 경계를 넘고 지평을 확장하여 하나님의 사람의 높이와 길이와 넓이를 아는 일이다. 묵상의 여정이 신비의 여정이라고 할 때, 그것은 묵상의 대상이 갖는 신비로움뿐 아니라 묵상 자체가 갖는 신비로움을 염두에 둔 것이다.
22. 묵상 여정의 목표
묵상의 여정은 근본적으로 내면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격의 문제요 성품의 문제다. 그것은 또한 속도의 문제가 아리나 방향의 문제이고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이며 형식의 문제가 아이라 본질의 문제이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소통이요 교제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분명한 목적지를 향한 여정이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것이 목표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셔서 현재 진행되는 하나님 나라에서 당신의 통치를 실현토록 하시는 것이 당면한 목표다. 그러나 묵상의 여정은 순간순간 갈등의 여정이요, 선택의 여정이다. 씨름이 잇고 싸움이 있으며 머뭇거림이 있고 후회가 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내 밖을 향하는 여정이 아니라 내 안을 향하는 여정이다. 그것은 행함의 문제이기 이전에 존재의 문제이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 묵상여정의 목표라면, 그 여정은 우리가 스스로 끝낼 수 있는 여정이 아니다. 사랑의 여정은 날마다 나를 비워가는 여정이요, 나를 부정하는 여정이다.
4부 묵상 여정의 신학
23. 묵상 여정의 신학(1)
묵상의 여정은 창조의 여정이다.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그 보내신 목적에 따라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시는 여정인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이 인간과 세상을 향해 품으셨던 계획을 이뤄가시는 과정에 참여하는 것을 구원, 구속 혹은 새창조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묵상의 여정은 구원의 여정이다. 묵상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광야의 여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구원과 성경묵상을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구원과 하나님나라 관계 때문이다. 내가 받을 구원에 관해 말하기 전에 꼭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왜 이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이 나의 구원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신 목표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나 구속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그것은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고 시간을 통해 성취되어 가는 과정이다. 우리의 구원이 있기 이전에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 계획이 있었다. 구원은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일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실 때 그 통치에 순종으로 반응라고 그분의 약속에 믿음으로 화답하는 백성이 되는 것이 구원이다. 묵상의 여정은 이 하나님의 창조 계획인 하나님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 건설 계획을 첫 인간인 아담에세서 부터 구현하기 시작하셨다. 그분이 하나님나라를 세워가시는 방법은 언약이었다. 그것은 하나님나라가 철저하게 관계의 나라요,인격적인 나라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하나님나라의 세 주체인 하나님 자신과 인간과 땅 시이에 언약 관계를 멪으신다. 그리고 언약의 조건으로 율법을 주신다. 이 언약의 조건이 잘 지켜질 때 그들 사이에는 샬롬의 관계가 형성될 것이고 그들은 안식을 누릴 것이다. 언약의 강자가 약자에게 그럴 의무가 없는데도 호의를 베푸는 것을 헤세드라고 부른다. 또한 언약의 당사자들이 언약의 조건을 잘 지키는 것을 믿음 혹은 신실함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언약이 잘 유지되는 상태를 의라고 하며 언약의 조건을 따라서 신실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언약의 역사 내내 인간은 불순종했고 반역했고 변절했다. 언약관계의 자속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헤세드 때문이었다. 언약의 조건을 넘어선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하나님나라 건설 계획은 중단되거나 변경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메시아로 보내서 그의 대속적인 희생을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고 그 백성을 통해 새 이스라엘을 건설하신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 예수님이 대리 통치자로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이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을 통하여 그 말씀이 우리 삶에 실현됨으로써 우리가 왕이요 대제사장인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대신 행사하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된다는 뜻이다. 묵상의 여정은 이 하나님나라 백성으로 사는 일이며 대체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이다..
24. 묵상 여정의 신학(2)
하나님은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말은 단지 의사소통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능력을 지닌 독자적은 존재다. 인간의 역사는 말을 통한 창조의 역사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그 말을 양도하셨다. 인간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체현하여 그 말씀이 바라는 대로 샬롬의 나라, 생명의 나라, 빛의 나라를 창조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 말씀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경계선이아니라 자유를 허용한 출발점이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우리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도리어 우리가 무한대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자 지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율법은 계시의 수단이고 구원의 수단이다.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것은 예수님 외에 다른 생명을 얻는 수단으로서의 울법을 거절한 것일뿐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백성의 삶의 도리와 방식을 계시하는 수단이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는 순종의 대상으로서의 율법을 거부한 것은아니다.
25. 묵상 여정의 신학(3)
땅과 노동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을 유지하는 양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사는 길임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광야에서 마련하신 훈련 방법은 바로 만나와 안식일이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날마다 만나를 의지하여 살았던 광야의 삶을 오늘도 살고 있음을 인정하라는 뜻일 뿐 아니라 오늘 내게 있는 양식이 나를 살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양식을 주신 하나님이 생명의 시작과 끝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부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의 표징으로 할레를 명하신다. 할례가 가리키는 것은 생식능력의 제거를 상징한다. 지금 난지 8일째 되는 이 언약의 자식은 아비의 생식능력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태어났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할례와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그 정신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을 하지 않는 날인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바로 '시간의 할례'를 행하는 일이다. 시간을 거세하는 것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이다. 육신의 할례는 마음의 할례를 전제로 한다.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우리 자녀가 태어나고 언약이 지켜진다고 믿는 마음,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의 마음, 그것이 마음의 할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전 인류를 위한 할례 사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늘의 영광을 거세한 사건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은총을 믿고 감사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다. 말씀 묵상은 날마다 영적 할례 혹은 마음의 할례를 받는 일이다.
26. 묵상 여정의 신학(4)
하나님을 만끽하는(enjoy)하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다. 또한 인간을 만끽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아주 깊은 사람의 관계를 누리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은 그 사랑의 관계를 참으로 많은 메타포를 통해 표현하셨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집이고 성막이고 성전이다. 창세기의 에덴동산에서 요한계시록의 하늘의 예루살렘까지 성경은 집 이야기로 가득하다. 심지어 예수님을 통한 구속을 '새 집짓기'라고 부를 수도 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거하실 집이 되도록 재건축하고 리모델링하는 일이 구속이다. 말씀 묵상의 여정은 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가 내 안에서 실현되어 그분들이 편히 거하실 집이 되어가는 과정이요 큰 집인 하나님나라 건설에 참여하는 일이요, 그 집의 원형인 영원한 본향으로 순례의 길을 가는 과정이다. 출애굽기의 자세한 성막짓기는 성막 짓기가 단순한 집 짓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임재하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처소로 만드는 일임을 보여준다. 말씀 묵상은 하나님을 창조주의 자리로, 왕의 자리로 모시는 일이다. 묵상 없는 삶은 내가 창조주가 되고 왕이 되는 삶이다. 그런 삶에는 참다운 기쁨도, 해방도, 자유도 없다.
27. 묵상 여정의 신학(5)
모세의 죽음과 함께 광야 시대는 끝났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는 것은 불안정하고 불편한 떠돌이의 삶이 끝나고 안전하고 편리한 정착민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들이 이 복을 누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은 바로 이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아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 정복과 분배를 끝내고 다시 한 번 하나님과의 관계를 환기시킨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중요한 것은 토라에 복종하는 일이다. 토라는 단순한 법조문이 아니라 정신이며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방식이요 원리다. 토라는 하나님과 백성, 백성과 백성, 백성과 땅, 땅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성경 묵상은 하나님을 배우느 일이고 그 하나님나라를 체험하고 체득하는 일이다.
28. 묵상 여정의 신학(6)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을 생명의 시작이요 생명을 존재하게 하는 힘으로 보는 자들이며 생명을 지향하는 목표로 삼는 자들이다.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게 여기며 그와 견줄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믿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인간과 다르시다. 말씀 묵상은 그것을 인정하는 일이다.말씀 묵상 없이는 하나님이 하나님되실 수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분별하고, 하나님이 우리 삶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며, 우리의 한 분뿐인 주권자임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감사로 드리는 산 제사이다.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는 기억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다.
29. 묵상 여정의 신학(7)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왕으로 삼은 나라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인간 왕을 달라고 요구한다. 하나님이 왕으로 계시면 충분하다고 하는 사실을 그들은 잊어버렸다. 그들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 노예생활 하던 때로 돌아가겠다고 요구한 것과 같다. 하나님은 왕을 허락하시지만 여기서 이스라엘 왕의 사명이 분명히 제시된다. 그것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것이다. 묵상은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고 청종하는 일이다.
30. 묵상 여정의 신학(8)
성경은 이 세상이 지혜를 통해 창조되었다고 말한다. 지혜는 세상이 어땋게 만들어졌는지를 말해준다., 지혜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보여준다. 지혜를 얻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본래 의도하셨던 바대로 하나님의 언약의 파트너, 교제의 파트너, 통치의 대리인으로서 하나님나라의 조화와 질서와 샬롬을 구현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드러내는 영광의 사람이 되게하는 것이 말씀의 역할이요 지혜의 역할이다. 말씀을 묵상하며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지혜로운 세상 창조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와 같이 하나님의 대리통치를 보여주는 언어다. 피조물과는 분명히 구분되면서도 피조물에게 다가갈 수 있는 방식 가운데 하나가 지혜였다. 따라서 인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제혜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분으로 묘사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목적은 하나님이 계신 하늘의 세계와 지혜(예수)로 만드신 이 세상이 통일되는 것이다. 묵상의 여정은 바로 지혜의 창조에 참여하는 여정이다. 이 세상 끝까지 하나님의 창조 의도가 실현되도록 보냄받은 곳에서 지혜롭게 살고 지혜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여정이다. 말씀 묵상은 곧 지혜묵상이며 하나님나라 세계관 묵상이다. 우리 앞에는 오직 두 갈래 길만 있다. 지혜의 길과 지혜 없는 길. 묵상의 여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여 걸어가는 여정이요,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혜로워지는 여정이다. 묵상의 여정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며 걷는 여정이다. 세상의 빛으로서 우리의 행적을 보면서 세상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게 하는 여정이다.
에필로그
신앙의 길은 나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길을 걷는 일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일이다.
묵상은 바로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다.
그분의 뜻을 듣는 일이고 그분의 인도를 받는 일이며 그분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일이고 그분의 의도를 따라 새롭게 지어져 가는 일이다.
그분의 통치를 받는 일이고 그분을 즐기는 일이다.
신앙의 여정은 묵상의 여정을 통해 진행된다.
모든 여행은 떠남에서 시작된다. 묵상의 여정은 자신을 떠남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거리감을 발견하는 여행이다.
신앙은 떠나는 일이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지난 삶을 새롭게 보는 여행이다.
더 깊은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더 잘 떠날 수 있다.
여행은 불편함을 자청하는 일이며 안전감을 떠나는 일이다.
여행은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철학, 가치관, 상식에 도전하는 일이다.
그동안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었던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이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신앙의 여정이다.
묵상은 나를 있는 그대로의 나로 보게 해준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과 대면할 때 우리는 비로서 내가 누구인지, 어떤 나라를 꿈꾸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래서 헛된 안전감을 버리고 참된 평화와 평안을 갈망하게 된다.
정해진 길 위에 하나님은 없다.
불학실성과 불확정성의 공간, 경외와 경이의 경건으로만 지날 수 있는 공간,
길들여지지 않고 통제받지 않는 미답의 공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돌아감이 아니라 돌아봄을 지연이 아니라 지속을, 그만둠이 아니라 그침을, 경주가 아니라 완주를
추구하는 공간, 거기에 생명의 따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신앙여정은 말씀 묵상을 삶의 우선순위로 정할 때 그 종착지에 이를 수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이다. 여행은 과정이며 오늘 여기의 문제다. 여행은 현재를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라고 요구하지도, 현재가 연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악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이야말로 영원의 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나라는 분명 미래에 있지만 오늘 이미 임한 하나님나라에 살지 않으면 미래도 없다. 오늘 맛보지 못한 천국의 기쁨과 환희를 미래에서 맛보리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나라가 완전히 도래하기까지는 여기가 광야라는 사실을 여행은 가르쳐 준다. 광야는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광야는 믿음이 탄생하고 자유와 생명이 창조되는 공간이다. 혼돈과 무질서가 아니면 질서와 조화로움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고난 없이는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없다.
우리 자신의 한계와 만나지 않으면, 결코 한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지 않는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우리는 광야로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광야의 길을 걸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