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로마서와 하나님 나라』-안용성

메르시어 2023. 5. 9. 12:41

로마서와 하나님 나라-안용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천국은 같은 말이 아니다.

 

 

1부 하나님 나라의 복음

 

1장 복음이란 무엇인가?

 

1. 십자가 속죄의 복음

 

그동안 복음(the Gospel)” 하면 그것은 곧 십자가의 속죄를 가리키는 것이었고, 그것이 로마서에 담긴 바울의 복음이라 여겨져 왔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종말 심판의 법정을 상정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속죄를 믿는 순간 미래의 종말 심판의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고 천국에 가게 될 구원이 미리 결정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복음을 말할 때 그것이 정말 십자가의 속죄를 가리키는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 복음이 성경 전체를 대표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신학적이고 현실적인 한계들이 십자가 속죄의 복음에서 발견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않는 현상,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교회 안에만 머물고 일상과 직업 현장의 삶에서는 별다른 차이점이 나타나지 않는 오늘의 현실이 십자가 속죄 복음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 믿음과 삶의 분리

십자가 속죄 복음은 믿음과 삶을 단절시킨다. 십자가의 복음은 종말 심판의 법정에서 어떻게 유죄판결을 면할 것인가?” 또는 죽은 후에 어떻게 천국에 갈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이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는 관심이 아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삶의 문제에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우리를 율법으로 회귀시킨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복음이 가르쳐주지 않으니 그 답을 찾기 위해 율법을 붙잡고 씨름하는 상황이 반복되며,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유로워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 교회와 세상의 분리

십자가 속죄의 복음에 따를 때 믿음이란 곧 십자가 속죄의 교리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 믿음은 철저히 개인적이고 내면적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속죄의 복음은 신앙의 사사화, 내면화를 부추긴다. 이때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오랫동안 교회가 정치는 세상의 일이라고 치부하면서 기독교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십자가 복음을 따르면 복음화역시 협소한 개념으로 정의되어 기독교화와 동의어가 된다. 개인을 복음화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십자가 속죄의 교리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고, 사회를 복음화 하는 것은 그 사회에 십자가 속죄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아지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화란 정말 이와 같은 기독교화를 말하는 것일까? 한국 사회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화되었다.

 

. 신학적 한계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나의 죄로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가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므로 나의 죄는 해결되었다. 이런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부활이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인지 모호하게 되어버린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인간의 궁극적인 비극을 죄의 문제에서 찾고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십자가 죽음을 제시하기에 부활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하더라도 십자가가 우선이고 부활은 십자가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부수적 기능에 머물고 마는 것이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복음서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록하면서 십자가의 속죄보다는 누가 왜 예수를 죽였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한다. 이처럼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바울 서신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고, 복음서는 주변화 되는 현상을 일으킨다.

 

2. 하나님 나라의 복음

 

.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십자가의 속죄인가?

신약성경의 134개 용례 가운데 복음을 명확하게 십자가의 속죄로 규정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다는 것이다.

 

1) 고린도전서 15:1-5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을 정리하면,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 장사되심 부활 부활 현현이다. 그동안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심을 십자가속죄의 의미 곧 예수님이 우리가 지은 죄의 형벌을 대신하신 대리적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 속에는 죄의 세 가지 의미 즉 죄의 지배, 우리가 죄의 지배를 허용함, 그 열매로 나타나는 악행들이라는 의미가 모두 들어 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속죄는 주로 세 번째 의미와 관련된다. 십자가는 복음을 구성하는 사건의 전부가 아니라 한 부분이며, 십자가의 속죄 역시 십자가 사건의 유일무이한 의미가 아니라 여러 의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기에 고린도전서 15장이 복음을 십자가의 속죄로 정의한다고 단정할 수 없다.

 

2) 고린도전서 1:17

여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십자가의 도란 무엇을 말할까? 이 본문에서 십자가는 십자가의 속죄를 말하기보다는 그 외적인 약함과 어리석음을 통해 하나님의 진정한 능력과 지혜를 드러내는 소재다. 십자가는 십자가 - 부활 - 예수님의 주 되심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 복음의 한 부분을 구성한다.

 

3) 에베소서 2:17 (2:11-17)

여기서 전하시고로 번역된 그리스어가 바로 유앙겔리조마이로서 예수님이 평안의 복음을 전하셨다는 뜻이다. 에베소서 2:11-16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이 화목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여기서 십자가의 기능은 우리가 지은 죄에 따르는 형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막힌 담을 허무는 것으로 설명된다.

 

위 세 가지 본문 외에는 성경에서 복음을 십자가와 연결하는 예를 찾기 힘들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본문 중 어느 것도 명백하게 또는 필연적으로 복음을 십자가의 속죄로 정의하지 않는다.

 

. 누가복음-사도행전의 하나님 나라 복음

복음이 수식어와 함께 나오는 사례는 누가복음-사도행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데, 이런 용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복음이란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것이다. 4:43, 8:1, 16:16, 8:12에서 볼 수 있듯이 복음이란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 마태복음의 하나님 나라 복음

4:23, 9:35, 24:14에서 그 나라의 복음이라고 번역된 어구는 개역개정에서 천국 복음으로 번역한다. 마태복음이 말하는 천국하늘나라하늘에 있는 나라또는 천당이라는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실수를 예방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신성 사문자”)하늘을 대신 넣는 방법이다. 이로써 천국이 하늘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다른 표현임을 확인하게 된다.

 

. 마가복음의 하나님 나라 복음

마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어구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실은 병행구를 통해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는 여러 문맥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 마가복음 1:14-15가 대표적인 사례다.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이 잡힌 후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이야기를 기록한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선포를 기록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도 알려준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다.

 

. 구약의 하나님 나라 복음

복음이란 문자적으로 좋은 소식”(good news)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가 왜 좋은 소식일까? 이사야 40-55장은 유대인들의 포로생활이 끝나갈 무렵에 선포된 예언이다. 이사야서 52:7에서 좋은 소식을 전하다”, 40:9에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다에 해당하는 단어는 70인역에서 유앙겔리조마이로 번역되었다. 이 두 구절이 말하는 좋은 소식이나 아름다운 소식복음이란 무엇일까? 이사야 52:7에 따르면 복음이란 평화를 공포하고 구원을 공포하는 것으로서,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라는 선포로 집약된다. 이사야 40:9-10에서도 복음이란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셔서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는 선포로 귀결된다. 하나님이 오셔서 다스리신다는 선포,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3. 하나님 나라, 믿음, 구원

 

공간복음서와 이사야서의 본문을 통해 복음이란 곧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그리고 복음을 하나님 나라로 이해할 때, 우리의 믿음과 구원의 정의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자.

 

. 하나님 나라 = 하나님의 주 되심

하나님 나라를 많은 사람은 죽은 후에 가는 곳이라는 어떤 특별한 공간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어떤 특정한 공간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 국가의 3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이다. 영토와 주권을 소유하는 주체가 바로 국민이기 때문이다. 그럼 과거 왕정시대의 국가는 어떨까? “나라를 뜻하는 히브리어는 마믈라카말쿠트”, 그리스어는 바실레이아. 그런데 이 단어들은 모두 을 뜻하는 단어, 즉 히브리어 멜레크와 그리스어 바실류스로부터 파생되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나라의 사전적 의미는 왕 됨”, “주 됨”, “다스림이다. “나라라는 말이 왜 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을까? 그것은 왕정시대에 국가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존재가 바로 왕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란 하나님의 왕 되심”, “하나님의 주 되심하나님의 다스리심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영토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 되심이다. 그곳이 어디냐?” 보다는 누가 주님이시냐에 더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기쁜 소식이다.

 

. 믿음, 회개, 구원

복음의 내용이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의 주 되심이라면 그에 따라 구원”, “믿음등의 중요한 용어들이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에 따를 때 믿음이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인인 나를 대신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내 죄가 해결된다는 교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는 소식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 되심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실제로 나의 주님이 되시게끔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하나님에 관한 사실이나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한다. 1:15에서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촉구하신다. 하나님의 주 되심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니면서 우리의 주인노릇을 하는 그 무엇인가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회개다. 그럼 구원이라 무엇일까? 하나님이 나의 왕, 나의 주님이 되시고 나는 그분의 백성이 되어 있는 관계, 그 상태가 바로 구원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므로 우리에게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주 되심이 온전히 이루어지 않는다.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에 하나님의 주 되심이 온전히 이루어지고 우리의 구원도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 천국은 하나님 날의 한 양상으로서 완성태와 연관된다. 천국이란 초월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일컫는다. 우리가 죽은 후에 저 천국에서야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 믿음과 삶, 교회와 세상의 단절 극복

우리의 믿음과 구원을 하나님 나라 복음에 따라 정의할 때, 믿음과 삶은 분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이라 곧 하나님이 주님이 되시는 삶이기 때문이다. 믿은 후에 믿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믿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신앙의 영역이 된다. 따라서 교회와 세상을 나누는 경계선이 신앙과 비신앙을 가르는 경계선이 될 수 없다.

 

. 과정으로서의 믿음과 구원

믿음과 구원이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는 것이라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과정일 수밖에 없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그 순간 믿음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믿음의 시작일 뿐이다. 예수님의 주 되심이 이제 시작되었다. 구원이란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일은 도덕적 선행이나 영성적 수행을 통해 무엇을 성취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친히 구원을 이루시도록 우리 자신을 계속하여 내어드리는 것뿐이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주 되신 하나님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대면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한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4. 구약성경의 하나님 나라

 

. 창조 : 하나님은 온 창조세계의 주님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바로 그 하나님이 모든 창조세계의 주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후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명하신다. 이는 사람을 위해 에덴의 완전한 복락을 예비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라고 사람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이런 요구가 제안되는 방식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이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언약을 제안하신 방식과 같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완전한 자유(하나님의 주 되심을 따르거나 거부할 자유)를 주셨다.

 

. 율법과 이스라엘 역사 :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출애굽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다. 모든 율법의 요약은 십계명이고 십계명의 핵심은 제1계명이다. 왜 제1계명에서 긍정문으로 오직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부정문으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만 섬기라는 명령보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명령이 우리의 신앙을 더 구체적으로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신이란 누구였을까? 그 신은 파라오라고 할 수 있다. 파라오는 현실에서 그 능력을 입증하고 있는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앞날이 불확실한 광야보다는 파라오의 고기 가마 옆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그 가나안에는 바알이라는 다른 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 대신 애굽, 앗수르, 바벨론으로 이어지는 제국에 의지하여 생존과 번영을 도모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파라오, 바알, 강대국을 섬기는 삶으로부터 회개하고 하나님의 주 되심을 드러내라고 요구하셨다. 그렇게 하나님의 주 되심을 거부하고 다른 신을 따르던 이스라엘은 결국 그들이 그렇게 의존하던 강대국들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사야는 포로들이 고토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며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하나님의 주 되심을 선포한다. 바벨론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씀은 앞서 확인한 이사야 40:9-1052:7에 기록되어 있다.

 

. 지혜 : 여호와를 경외함

잠언 1:7은 지혜를 정의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경외하다는 말은 두려워한다는 뜻이다. 두려워하기 때문에 의존하게 되고, 의존할수록 그 대상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된다. 우리 삶의 모든 문제, 그리고 그로 인한 불안과 염려가 어디서 비롯되는가? 하나님 아닌 다른 대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 아닌가? 때로는 돈이, 때로는 어떤 사람이, 때로는 어떤 상황이 우리를 불안하고 곤고하게 한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오직 한 분은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의 주 되심을 다시 붙잡으라. 그것이 진정한 지혜다.

 

.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는 방법

구약성경은 모세와 여호수아와 사사들을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직접 다스리심을 보여준다. 왕정이 수립된 후에는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대행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왕을 대표하는 인물은 다윗이다. 나단의 신탁과 시편2편의 즉위시는 왕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한다. 왕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이 다스리지만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많은 왕이 하나님의 주 되심을 거부하고 예언자들의 회개 촉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다윗의 혈통을 이은 다윗 왕조가 사라졌다. 즉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땅에 실현할 매개가 없어지고, 예언자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상태가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런 역사적 배경에서 묵시문학이 등장한다. 묵시문학을 특징짓는 종말론을 묵시종말론이라 한다. 묵시종말론은 이스라엘 왕조가 하나님의 주 되심을 대행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이제 하나님 자신이 친히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예고한다.(7:13-14)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 묵시종말론의 토대 위에 세워졌다.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도 이 묵시종말론과 연결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확인한 것처럼 묵시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는 다양한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지 묵시종말론의 좁은 맥락에 머물지 말고 구약성경 전체의 큰 흐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장 로마서의 복음

 

1. 로마서의 하나님나라 복음

 

바울은 복음을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로 정의한다. 바울에게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선포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가리켜 그 아들의 복음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서두에서 바울은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예언자들이 전한 복음이란 하나님이 오셔서 다스린다는 소식, 곧 하나님나라가 올 것이란 약속이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바로 그 복음, 곧 예언자들이 약속한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1세기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소식은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그리스 제국이 아니라 또는 로마 제국과 그 제국들의 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님이 되신다는 소식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그 소식은 기쁜 소식, 즉 복음이었다. 복음의 이런 의미는 바울이나 예수님이 창안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기록된 것으로서 1세기 유대인들은 당연히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 하나님의 주되심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이다. 바울이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때 이는 하나님의 주되심이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되심이 어떻게 예수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바울은 그의 아들인 예수가 누구인지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로 그의 아들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분이시다. 이는 예수가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의 후손 곧 메시아이심을 가리킨다. 결국 바울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메시아(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둘째로 바울은 예수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나라의 왕이 되셨다는 의미다. 바울은 이 두 가지 설명을 요약하여 예수 그리스도(메시아) 우리 주()”라고 말한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 서두에서 말하는 복음은 예수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심으로 하나님의 통치권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는 말로 요약된다. 본래 하나님나라의 통치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그 나라의 통치자가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그 계기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 이것이 로마서의 복음이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부활-주 되심이라는 내러티브로 구성된다. 이 내러티브의 최종 목표는 주 되심이고 그렇다면 십자가와 부활은 예수의 주 되심을 목표로 하는 사건들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통치자,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이 바로 로마서 복음의 핵심이기에 우리는 로마서의 복음도 하나님나라 복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복음서의 하나님나라 복음과 로마서의 하나님나라 복음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두 복음의 차이는 예수가 차지하는 위치에서 비롯된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주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자, 즉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바울서신을 비롯한 신약의 다른 책들에서는 예수가 하나님나라의 주님으로 선포된다. 즉 예수는 복음서에서 선포하시는 분(proclaimer)이고 바울서신과 다른 책들에서는 선포되는 분(the proclaimed)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은 이렇게 예수가 선포하는 분에서 선포되는 분으로 바뀐 결정적 계기가 십자가와 부활임을 보여준다.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이 십자가와 부활을 경험하며 예수가 진정 메시아이며 하나님나라의 주님이심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은 복음서에 기록된 여러 가지 예수 사건 가운데 십자가 이후의 사건들을 강조한다. 바울이 제시한 복음 내러티브에 예수의 공생애가 빠진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공생애 기간에 예수는 주로 하나님나라의 선포자였고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의 주님으로 선포된 것은 부활이후였다. 무엇보다 바울이 예수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경험하고 나서부터였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와 바울서신은 모두 일관되게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말한다.

 

2. 믿음의 재정의

 

김세윤은 자신의 책 칭의와 성화에서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나라 복음임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하지만 정작 믿음의 정의에서는 하나님나라 복음의 패러다임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다시 십자가 속죄의 복음으로 돌아가는 인상을 준다. 김세윤이 정의한 믿음은 다음 몇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먼저 우리가 십자가 속죄를 믿으면 2)그 믿음이 그리스도와 연합됨을 실제로 발생시켜 우리가 그의 죽음과 부활의 덕을 입을 수 있게 된다. 3)그리고 그 믿음은 예수가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4) 이렇게 믿음을 나타낸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5)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예수의 주되심을 실제로 내보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주어진다.

 

김세윤은 십자가 속죄를 믿는 사람은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 고백은 예수를 실제로 나의 존재와 삶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고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이 고백은 사탄의 주권을 부정하고 배격하며 예수를 의지하며 그 통치에만 순종하겠다는 서약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속죄를 믿으면 정말 이런 고백이 나올까?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과 예수가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은 별개의 사실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란을 대신하여 죽는다고 해서 죽은 사람이 그 사람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예수의 십자가 속죄를 믿으면 그를 주님으로 고백하게 된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예수의 주 되심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믿음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김세윤은 믿는 사람들은 예수의 주되심을 삶으로 드러내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주되심을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믿는 자의 책임이라는 서술은 믿음의 정확한 정의가 아니다. 삶은 믿음에 따르는 의무가 아니라 예수의 주되심에 따르는 삶 그 자체가 예수를 믿는 것이다. 믿음은 예수의 주되심으로 다시 정의되어야 한다.

 

김세윤은 하나님나라 복음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도 믿음을 규정하는 방식은 여전히 십자가 속죄의 복음에 머물고 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믿음을 규정하는 방식은 믿음을 어떤 사실에 관한 인정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저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살아나셨다는 사실, 그리고 예수가 우리의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그친다. 이렇게 믿음을 사실에 대한 인정으로 간주할 때, 예수의 주되심을 고백하는 것과 예수의 주되심에 따라 사는 것이 분리된다.

 

3. 행위와 구원

 

믿음이란 단지 사실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맺는 관계임을 잘 보여주는 것이 로마서의 수미상관을 이루는 믿음의 순종이라는 어구이다. 전통적으로 이 어구는 믿음이 먼저고 순종을 그 결과로 따라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에 근거하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순종의 삶과 동일한 것이다. 로마서는 믿음과 순종을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믿음 뒤에 행위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 그 자체 안에 행위가 포함된다.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다. 그동안 바울이 행위 없는 구원을 말했다고 생각해온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은 바울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왜냐하면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할 때, 그 믿음은 본질적으로 행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2장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르고, 참고 선을 행한 사람에게는 영생이 주어진다. 구원과 심판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는 행위심판론 혹은 행위구원론이 아닌가? 그런데 바울은 이어지는 3장에서 하나님의 의가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났다고 선언하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로마서2장과 3장에서 서로 모순된 진술을 하는 것일까? 그동안 로마서 해석자들은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해왔는데 그 해결책들의 공통점은 로마서3장에 담신 것이 진정한 바울의 신학이고 2장은 단지 단순한 이론적 가능성이거나 반박하기 위한 반대자의 생각 혹은 실현 불가능하여 폐기된 방법으로 치부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해석자들은 로마서2장의 가치를 부정해왔고 그 결과 사실상 로마서2장은 읽지 않아도 되는 본문처럼 여겨왔다.

 

그런데 그동안 잃어버린 것은 로마서2장만이 아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행위를 중시하며 구원과 행위를 필연적으로 연관시키는 본문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구절들 대부분을 마치 성경에 없는 것처럼 다루어왔다. 이렇게 행위를 강조하는 본문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가운데 신약성경의 중심으로 간주되어 온 것이 바울의 이신칭의론이다. 그리고 이신칭의 사상은 구원과 행위가 무관하다는 생각의 근거가 되어 왔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하나는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이다. 바울은 육체의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경고한다.(5:21)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그리스도인에게 두 가지 삶의 길을 제시하면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3)라고 경고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가 주되시는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권연경은 로마서에 등장하는 행위심판 사상이 공평하신 하나님에 관한 구약성경과 유대교 전통에 속한 것이며 바울의 은혜사상을 담는 틀, 혹은 바울의 복음적 사고가 뿌리는 내리고 있는 터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점은 권연경은 자신이 관찰한 결과들을 믿음과의 관련 속에서 하나로 종합할 수 있는 체계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못했다. 권연경은 기독교 보수진영으로부터 행위구원론자라는 공격을 받았는데 그는 그것이 행위구원론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행위구원론과 어떻게 다른가? 행위구원론이 아니면서도 행위와 구원의 필연적인 연관 관계를 드러낼 수 있는 설명체계는 무엇일까? 로마서2장의 행위심판론과 3장의 이신칭의론을 모두 바울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양자를 조화시키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행위구원론이란 우리의 행위가 업적으로 쌓여 그 업적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그 자체가 매우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업적에 대한 객관적 기준을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은 모두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행위구원론은 논리적으로도 성경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행위와 구원은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너무나도 명백한 논리적 비약이다. 행위와 구원 사이에는 다양한 논리 관계가 존재할 수 있다. 행위가 원인이 되고 구원이 결과가 되는 논리관계가 부정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행위와 구원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관계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는 행위와 구원이 절대 무관하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경이 가르쳐주는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복음에 기초해서 볼 때 행위와 구원 사이에는 행위구원론의 인과관계와는 다른 그러나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한다. 바울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둘 것이라고 말하고(6:8) 그리고 다음 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두 절은 서로 병행 구절로서 선을 행하는 것이 곧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과 같은 의미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이룬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바울은 다시 그것을 가리켜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선을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주되심을 이룬다는 말과 같은 표현이다. 하나님의 주되심은 선한 행위의 열매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표지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되심이 반드시 행위의 열매로 나타난다면 행위와 구원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행위가 없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고 믿음이 없다면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위가 없다면 구원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4. 하나님나라 복음과 십자가 속죄의 복음

 

그렇다면 하나님나라 복음은 우리가 전통적으로 복음으로 여겨온 십자가의 속죄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언약에 관해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 복음은 언약의 틀 속에 있다. 언약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성립하게 한다. 언약은 언약의 주체인 쌍방 간에 맺어지며 쌍방은 언약에 따른 권리와 의무를 지게 된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신으로서 그들을 구원하고 그들의 생존과 행복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직 하나님만을 신으로 인정하고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맺는 언약이 무엇인지를 가장 포괄적이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언약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곧 언약은 언제나 하나님이 먼저 제안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약을 제안하시기 전에 이미 언약의 의무 사항을 모두 지키신다. 하나님이 자신의 의무를 먼저 전부 행하신 후에 이스라엘에게 언약백성이 되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하나님나라 복음과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맺는 관계도 언약의 역사라는 맥락에서 적절히 설명될 수 있다. 1)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인데 2)그들은 하나님을 떠나 죄의 노예가 되었다. 3)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돌아오셔서 그들을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다. 4) 이리하여 언약관계가 회복되고 주님의 영원한 통치가 이뤄진다.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언약의 역사인데 이것은 하나님나라 복음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런 언약의 역사 가운데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둘째와 셋째 단계에 해당한다. 이는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언약 역사의 일부일 뿐 전부는 아님을 의미한다. 즉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하나님나라 복음의 일부로서 하나님나라 복음에 포함된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은 우리가 모두 죄인이라는 정죄로 시작하며, 이런 정죄에는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적이고 무서운 분으로 소개된다. 그런데 우리가 십자가 속죄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하나님이 절대적인 은혜의 하나님으로 바뀐다. 무서운 하나님이 갑자가 무조건적인 은혜의 하나님으로 바뀜으로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십자가 속죄의 복음이 이렇게 급하고 당황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 복음이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역사를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전도용 소책자인 사영리에는 이런 언약의 역사가 나름대로 반영되어 있다. 1영리는 하나님과 우리의 언약관계, 즉 사랑의 관계로 시작되었음을, 2영리는 인간이 죄를 지어 하나님을 떠난 사실을, 그리고 제3영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죄가 해결되었음을, 4영리는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를 말한다. 그런데 사영리의 강조점은 십자가 속죄를 담은 제2영리와 제3영리에 찍혀 있다. 1영리는 인간의 죄악을 설명하기 위한 배경 정도로 간단히 다뤄진다. 그리고 제4영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끝나기 때문에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영리는 성경이 말하는 언약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사영리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보완하면 하나님나라 복음을 온전히 전달하는 영적 원리로 거듭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제1영리를 배경으로 두지 말고 전경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그래서 복음을 제시할 때 죄인이라는 율법적 정죄로 시작하지 말고 인류와 하나님은 본래 친밀한 언약관계로 맺어졌다는 사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보완되어야 할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의 삶이다. 영접은 믿음의 시작일 뿐 영접으로 믿음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음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주되심이 온전히 이뤄지는 상태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런 궁극적인 상태를 향해 변화해가는 과정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사영리에 보완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고려다. 사영리의 모든 내용은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 외에 또 다른 요소를 설정하는 삼각 구도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한다. 그 다른 요소는 바로 사탄이다. 우리의 숭배를 받기 위해 하나님과 겨루는 존재로서의 사탄은 성경에서 이 세대, , 사망, 육체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나타난다.

 

3장 이 세대와 하나님 나라

 

성경은 여러 부분에서 하나님 나라를 그에 대립하는 다른 지배 체제와 대조하여 보여준다. 이런 대조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재임이 잘 드러난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하나님 나라를 그런 방식으로 대조하며 보여준다.

 

1.죄의 지배

 

성경에서 많은 경우 하나님 나라는 “OOO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우리의 섬김을 받기 위해 하나님과 겨루는, 하나님 아닌 어떤 존재가 항상 전제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촉구하신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다른 신을 떠나야 한다. 다른 신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만 섬긴다는 것은 단지 종교적 선택의 문제만은 아니다. 로마서에서는 우리의 숭배를 받기 위해 하나님과 겨루는 존재, 즉 십계명이 다른 신이라 부르는 존재가 몇 개의 다른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특히 롬 5, 7장에서)이 세대(12). 로마서 전체의 구조를 살펴보면 바울이 죄의 지배에 관해 지대한 관심을 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로마서의 신학-윤리적 논의는 로마서 1:16-17의 주제문부터 시작해 총 4부로 구성된다. 그 가운데 제1부의 첫 단락(1:18-3:20)은 죄의 지배와 그에 따른 심판의 보편성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또한 죄의 지배에 관한 논의는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를 서술하는 제2(5-8)에서 심화한다. 로마서 5-8장은 하나님 나라와 죄의 지배를 대조하며 그 중간에 끼인 그리스도인의 실존 문제를 다룬다. 또한 제4(12:1-15:13)는 제2부에 담긴 삶의 원리를 발전시킨다. 특히 제4부의 전반부(12-13)는 하나님 백성의 윤리적 삶을 이 세대(죄의 지배)와 하나님의 뜻의 분별이라는 견지에서 설명한다.

 

이처럼 로마서에 죄의 지배에 관한 논의가 많이 담겨 있다는 사실은 로마서의 주제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임을 반증한다. 이는 로마서의 구조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바울은 로마서 1:16-17에서 주제문을 제시한 후 가장 먼저 죄의 지배에 관해 논함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절박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18-3:20). 특히 로마서의 제2(5-8)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죄의 지배를 대조하면서 무려 열다섯 가지에 이르는 다양한 통치 용어들을 활용한다. 죄의 지배를 이렇게 세밀하고 비중 있게 다루는 것은 로마서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분명하게 서술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죄의 지배를 바로 알지 못하고서는 하나님 나라 역시 바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로마서 5:19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차이는 하나님의 주 되심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로마서 5장은 그것을 불순종과 순종으로 대조한다. 로마서가 믿음과 순종을 동일시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왕 되심(바실류오)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에 순종하는(휘파쿠오) 것이기도 하다.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양자는 종과 대조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묘사하는 개념이다. “속량은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모습을 설명해준다.

 

2. 죄의 지배의 기원과 해결

 

죄의 지배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로마서 5:12은 아담으로부터 죄의 지배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란 무엇인가? “라는 말은 먼저 우리를 지배하는, 우리에게 왕노릇하고 주인노릇하는 죄의 세력을 가리킨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는 우리가 짓는 죄 곧 범죄를 뜻하기도 한다. 범죄는 하나님의 주되심을 거부하고 죄의 지배를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가 저지르는 악한 행위들이다. 전자가 근본적인 범죄라면 후자는 근본적인 범죄의 열매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하면 범죄의 열매로서의 악한 행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로마서는 죄를 범죄뿐 아니라 죄의 세력으로, 그리고 열매로 나타나는 악행뿐 아니라 우리가 자신을 죄의 지배에 넘겨주는 더 근본적인 범죄로 서술한다.

 

에덴동산에는 죄가 없었지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죄의 지배를 선택했다. 그리고 로마서 5장은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와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고 말한다(5:12,14). 모든 사람을 죽음의 운명 아래 놓이게 한 것이 아담이라면 아담의 범죄를 해결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로마서 5:19에서 아담과 그리스도는 불순종과 순종의 구도에서 대조된다. 로마서에서 믿음과 순종은 동의어로 사용된다(1:5; 10:16; 16:26).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결정적으로 드러낸 사건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다.

 

3. 그리스도인의 실존: “이미아직

 

하나님 나라와 죄의 지배가 보여주는 대조는 두 통치 체제의 대조이면서 동시에 두 시대의 대조이기도 하다. 바울은 두 시대의 대조를 묵시종말론의 토대 위에서 전개한다. 묵시종말론은 역사를 이 세대”(this age)오는 세대”(the age to come)의 두 시기로 나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시점으로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가 곧 이 세대. 그리고 오는 세대는 그들의 시점에서 아직 오지 않은 시대, 즉 앞으로 올 시대다. “이 세대는 사탄의 지배가 힘이 있는 세대이다. 그리고 오는 세대란 곧 하나님 나라다. 이때 두 세대를 나누는 분기점은 인자의 도래다. 인자의 오심과 함께 이 세대가 끝나고 오는 세대곧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 종말은 한마디로 이 세대가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대가 끝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파괴되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세계에 악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이 세대 즉 사탄의 세력이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진다. 그 끝과 시작의 분기점에 인자의 도래가 자리한다. “인자”(人子)란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문자 그대로 사람의 아들을 가리킨다. 묵시종말론에서 기준이 되는 인자도 일차적으로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용어가 구약의 묵시문학서인 다니엘 7:13의 독특한 맥락으로 인해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다니엘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누군가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장면을 보았다. 다니엘이 자세히 보니 그는 사람의 아들 같이”, 즉 그냥 사람 같이 생긴 인물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인물이 특별한 형상이 아니라 보통 사람과 같은 평범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장면이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 부르시는 그 인자의 출처다. 구약성경에서 인자는 관사 없이 사용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 하실 때는 관사가 붙는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신다. 이는 예수님이 내가 다니엘서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의 아들, 즉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묵시종말론의 주인공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 오는 사건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종말의 때를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신약성경의 종말론이며,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역사관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이 세대는 끝나지 않고 여전히 힘을 떨치고 있는 듯하다. 어찌 된 일일까?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 나라가 이미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대가 아직끝나지 않은 채 지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이미”(already)아직”(not yet)의 긴장 속에 있다. 이 세대는 언제 끝나는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끝날 것이다. 신약성경은 그 사건을 가리켜 파루시아라 부르는데, 주님이 다시 오시는 파루시아의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이 세대를 함께 경험하며 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아직의 긴장 속에 살아가는 존재다.

 

4. 이 세대란 무엇인가?

 

이 세대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가리키는 용어다. 또한 이 세대란 어떤 기간일 뿐 아니라 그 기간 동안 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통치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 통치자들은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이 세대공중의 권세 잡은 자곧 사탄을 의미한다. 이처럼 이 세대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를 가리킨다. 하지만 동시에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의 통치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란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로서 로마의 권력자들과 유대의 지배층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성경은 이 세대 동안 세상을 다스리는 현실 세계의 통치자들을 가리켜서도 이 세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세대라는 말은 이 세대의 통치자들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 이 세대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틀어 이 세대로 지칭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세대는 이 세대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가리키기도 한다.

 

신약성경에서 이 세대라는 말은 이처럼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 세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사탄이 현실 세계를 뛰어넘어 저 멀리 초월 세계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심층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사탄은 존재한다. 그러나 신화적인 언어로 그려진 그 모습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탄은 저 멀리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심층에서 현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사탄의 신화적인 그림에 갇히지 말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관한 경험과 분석을 반영하여 사탄에 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 사탄은 숙주가 필요하다. 사탄은 사탄의 지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비로소 실제적인 힘을 가지게 된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이 사탄과 하나님이 대등한 존재인 것처럼 느끼면서 거기에 굴복하며 살아간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 되심을 거부하고 사탄을, 다른 신을, 죄의 지배를 따를 때 그것들이 하나님과 동등한 힘을 가진 존재로 경험되는 것이다. 사탄을, 다른 신을, 죄의 지배를 이 세상에 끌어들이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다. 이렇게 사탄은 현실의 심층에서 움직이기에 이 세대란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이면서 동시에 현실 세계의 통치자들과도 연결된다. 현실의 심층에서 움직이는 악의 현실은 하나님이 아닌 악이 실재하며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관해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 나라와 대립하는 그 악의 존재에 관해서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다른 신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섬길 수 있다.

 

5. 파라오의 질서

 

그렇다면 성경은 이렇게 현실의 심층에서 움직이는 사탄의 활동을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 보여줄까? 우리는 출애굽기에서 그런 방식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노역량을 늘린 파라오의 조치에 놀란 이스라엘의 작업반장들은 분노하고 절망하여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은 것일까 안 믿은 것일까? 하나님께 모세와 아론에게 벌을 내려달라고 비는 모습을 보니 하나님을 믿기는 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하나님을 믿었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고난을 끊으시고 파라오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시길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파라오가 지배하는 현실 그 자체는 움직일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질서는 파라오를 정점으로 돌아가는 질서, 온 세상의 지배자인 파라오를 중심으로 하는 질서다. 이때 하나님마저 그 질서의 일부로 치부된다. 그러니 그들의 기도는 파라오에게 인정받아 성공하고, 파라오의 눈 밖에 나지 않고 편안하게 살며, 그 질서 속에서 경쟁에 이겨 출세하기를 바라는 간구에 머물 수밖에 없다. 파라오의 질서 속에서 잘되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기도는 파라오의 질서 속의 경쟁에서 남보다 앞서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아닌가? 이것이 바로 사탄이 현실의 심층에서 현실을 움직이는 방식이다. 파라오의 질서에서 사탄은 교회의 적대자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으로 가장하여 나타나기 쉽다. 사탄이 사탄 복장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파라오의 질서는 우리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재물은 우리의 섬김을 받으려고 하나님과 겨루는 존재, 즉 사탄이다. 이 전지전능함을 자랑하며 최고의 가치가 되어 있는, 자본이 욕망을 통해 사람을 지배하는 오늘의 현실이 이 말씀을 뒷받침한다. 오늘날 돈의 절대적인 위력에 조금 밀려나긴 했지만 돈과 함께 파라오의 질서를 잘 특징짓는 것이 바로 권력욕이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신 예수님께 나타나 자신에게 엎드려 절하면 천하만국을 주겠다고 말하며 시험했다. 이 구절에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사탄에게 절해야 한다는 경험적 지혜가 암시되어 있다. 한편 이처럼 파라오의 질서가 돈과 권력을 통해 작동하니 권력과 돈이 사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돈과 권력 자체가 사탄은 아니다. 단지 사탄이 돈과 권력을 이용해 파라오의 질서를 구축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중립적인 도구로서의 돈과 권력을 파라오의 질서로서의 그것들과 구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6. 파라오의 질서를 식별하기

 

파라오의 질서는 현실의 심층에 존재하는 영적인 스시템이지 눈에 보이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로마서 제4부는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영적 예배에 관한 권면으로 시작해서(12:1),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드리는 종말의 예배를 서술하며 끝난다(15:7-13). 윤리적 권면을 다루는 로마서 제4부 전체가 예배라는 주제로 수미상관을 이루는 것이다. 범위를 조금 좁혀 로마서 제4부의 전반부만 떼어놓고 보면, 이 세대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권면으로 시작해서(12:2), 이 세대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선포로 끝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3:11-14). 물론 로마서 13:11-14이 세대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종말에 관해서만 말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했듯이 종말이란 곧 이 세대의 종말이므로 종말을 언급하는 것은 곧 이 세대를 언급하는 것과 같다. 범위를 넓혀 로마서 전체는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주제로 수미상관을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본문으로 더 들어가 보면 로마서 제4부의 전반부인 로마서 12-13장은 이 세대로 수미상관을 이룰 뿐 아니라, 교차대칭 구조를 이루고 있다. 로마서 제4부의 전반부는 이 세대, 곧 파라오의 질서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권면으로 시작한 후 그 분별의 원칙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먼저 하나님의 뜻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사랑에 대한 권면이 로마서 12:3-1313:8-10이 대칭을 이룬다. 로마서 12:14-2113:1-7은 파라오의 질서를 식별하는 원칙을 보여주는데, 원수와 국가에 대한 태도를 사례로 들어 이것은 아니다라는 식의 부정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파라오의 질서란 무엇일까? “파라오의 질서하면 보통 사람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나에게 피해를 입힌 가해자들이다. 또 거시적으로는 우리나라와 대립각을 세우는 적성 국가를 파라오의 질서라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로마서는 원수들도 사람일 뿐 그들이 곧 파라오의 질서는 아니라고 말한다. 신약성경 시대 유대인들이 파라오의 질서하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로마 제국이었을 것이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그런 독자들을 향해 로마 제국도 하나의 정치 체제일 뿐 그 자체가 파라오의 질서는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파라오의 질서는 저 멀리 초월 세계에 있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있다. 그러나 파라오의 질서는 현실의 심층에서 작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표면적인 현실 그 자체를 파라오의 질서와 동일시하면 안 된다. 누가복음 17:20-21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너희 마음속에있다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 안에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현실을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님 나라는 현실 속에 있지만 표면적인 현실이 하나님 나라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현실의 심층에 있다. 파라오의 질서가 존재하는 바로 그 층 위에 말이다.

 

 

2부 하나님 나라 복음의 전개

 

4장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의

 

1. 로마서의 중심 문제와 주제

로마서의 많은 부분은 이신칭의와 거의 관련이 없다.

. 로마서 개괄

주제문 : 하나님 나라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다(1:16~27).

1부 누가 어떻게 언약 백성인가?(1:8~4:25)
· 죄의 지배와 심판: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1:18~3:20)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의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 결과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의롭게 된다.
· 하나님의 의: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통해 모든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심(3:21~31)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한 자격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유대인 측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가 지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해답은 4장에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들이 아니라 약속의 자손들 곧,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 아브라함 언약의 성격과 우리의 믿음(4:1~25)

2부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5~8)
· 영광의 소망과 성령의 이끄심(5:1~11)
2부의 본문은 의롭게 된 언약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다루면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 가는 그리스도인이 견지해야할 삶의 원리를 보여준다.
· 죄의 지배의 기원과 은혜의 통치: 아담과 그리스도(5:12~21)
죄의 지배가 되돌아가려는 관성이 우리 실존에 강하게 작용한다.
· 죄의 지배와 하나님의 주되심 사이(6~7)
이에 대해 바울은 우리가 이미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으니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말자고 촉구 한다(6:1~7).
· 영광의 소망과 성령의 이끄심(8)
로마서의 제2부를 마무리하는 로마서8장은 5:1~11과 수미상관을 이루며 영광의 소망을 향해 성령 에 이끌려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여주고, 하나님이 끝내 우리를 지키시리라는 확신을 피 력한다.

3부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어떻게 되는가?(9~11)
아브라함의 실제 자손인 유대인은 어떻게 되는가? 유대인의 본래 언약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말인 가? 아니면 유대인은 이제 언약에서 제외되는가? 바울은 앞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이 질문을 로마서 제3부인 9~11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룬다.

4부 언약 백성의 삶의 실제(12:1~15:13)
· 죄의 지배와 하나님의 주 되심 사이(12~13)

교리적인 내용과(1~3)
· 공동체 내의 차이와 하나 됨(14:1~15:13)

윤리적인 내용(4), 2부에서 이미 윤리적인 가르침이 시작

. 로마서의 중심 문제와 주제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직접 다루는 본문은 로마서 3:21~31이고 그 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내용은 로마서에 한 번 더 나올 뿐이다. 어떻든 이신칭의가 로마서 전체의 주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1) 중심 문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로마서를 읽다 보면 반복하여 제기되는 하나의 질문이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가 로마서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해결하고자 한 과제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뛰어넘는 보편적인 교회를 수립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신칭의의 가르침은 우리가 죽은 후에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아니라 이방인이 유대인과 동일한 자격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있음을 옹호하는 논거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전통적으로 이신칭의라는 명제를 읽을 때 율법의예수 그리스도의라는 두 수식어를 빼고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라고 요약해 왔다. 그리고 여기서 행위란 윤리를, 믿음이란 교리를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해 왔다. 그래서 이신칭의란 곧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교리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뜻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 속에서 이신칭의는 로마서 전체의 내용과 어울리지 않는 명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이 명제를 다른 방식으로 방점을 율법예수 그리스도에 둔다면 ,즉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롭게 된다면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위한 공평한 길이 될 수 있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를 말한 바울이 의도한 본래의 목적에 더 가깝다.

2) 로마서의 주제: 하나님의 의
로마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의란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신실하심이 구체화된 하나님의 의로운 구원 행위를 가리킨다.

3) 하나님의 의와 이신칭의
로마서3:26에 따르면 하나님이 자기의 의를 계시하신 목적은 한편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드러내기 위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함이다. 이때 후자가 바로 이신칭의에 해당한다. 즉 이신칭의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된 두 가지 목적 가운데 하나로서 하나님의 의라는 주제에 자연스럽게 포함된다.

 

2. 하나님과 그 백성의 언약

. 언약의 개념들: 신실함과 의로움
엄밀하게 말하면 신실함(. 에매트; . 피스티스)은 언약의 요구 사항이고 의로움은 언약의 결과이므로 양자는 구별된다. 그러나 두 개념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정의해주는 관계에 있으므로 로마서에서 의로움과 신실함은 동의어처럼 사용된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시다는 뜻이기에 하나님이 신실하시다는 말은 곧 그분이 의로우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된다. 따라서 로마서에서 두 용어나 두 개념 중 하나가 나올 때는 나머지 용어나 개념도 함께 염두에 두고 본문을 대해야 한다.

. 로마서의 주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언약은 하나님이 주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관계를 형성한다. 그 관계를 한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의 주 되심곧 하나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로마서에 담긴 복음의 내용이기도 하다. 로마서의 주제문을 구성하는 세 문장은 모두 복음에 관한 것이다. 로마서의 주제는 복음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복음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의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언약에 따라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님노릇을 잘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의로운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가 언약의 구성원에 관한 것이라면 이것은 언약의 본질적인 내용에 관련된다. 로마서 3:21-31에서 속죄와 함께 속량을 언급한다. 속량이란 노예의 주인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죄의 지배로부터 하나님 나라로 주권이 이전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에 관한 로마서의 논의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논의에 포함된다.

 

로마서 제3-4부는 제1-2부로부터 이어진다. 로마서 제3부는 제1부의 마지막 부분(4)에서 이어지는 질문, 즉 언약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루고, 4부는 제2부에서 제시한 언약 백성의 삶의 원리를 실천적으로 구체화한다.

 

3. 바울 신학의 옛 관점과 새 관점

. 유대교에 관한 이해
옛 관점: 유대교는 율법에 따른 윤리적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반면, 바울은 그에 반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구원의 길로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 상징하는 유대교의 모습은 역사 연구의 결과라기보다는 바울의 복음에 관한 이해로부터 거꾸로 유추된 것이었다. 바울 당시의 유대교는 율법 준수를 통해 구원받으려 하는 율법주의 종교였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새 관점: 새 관점의 대표자로 알려진 제임스 던톰 라이트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지로서의 율법이 갖는 배타적 기능에 주목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이 율법의 행위란 율법의 준수라는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서 자신들을 이방인과 구별하는 분리적 기능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율법의 행위란 율법을 유대인의 정체성의 외적 표지로, 또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나누는 경계 표지로 사용하는 것을 가리키며 바울은 유대인들의 그런 배타적 선민의식에 대항해 싸웠다는 것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과 종종 대립각을 세우셨다. 예수님이 율법을 부정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항상 그 이슈는 안식일 규정과 정결법 두 가지뿐이었다. 바울은 율법 문제로 유대주의자들과 충돌할 때 그 이슈는 주로 할례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음식 규정과 절기 준수 문제가 쟁점이 될 때도 있었다. 여기서 정결법, 안식일, 할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윤리적인 행위를 규정하기보다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일과 관련된다.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하는 경계 표지로서 기능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것은 윤리적인 행위가 구원과 관계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에 대한 부정이었다. 바울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구원의 특권을 부정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이 똑같은 자격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지금까지 새 관점을 통해 로마서의 중심 문제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임이 드러남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로마서의 주제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 옛 관점과 새 관점을 넘어서
바울은 율법의 분리 기능뿐 아니라 윤리적 기능에 대해서도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또한 율법은 죄를 드러내는 데는 뛰어나지만 정작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다고도 했다. 따라서 바울이 율법의 분리 기능만을 문제 삼았다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렇듯 새 관점 학파의 주장에도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옛 관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 옛 관점과 새 관점을 함께 뛰어넘을 수 있는 정반합의 대안이 필요하다. 두 관점의 장점을 함께 품을 수 있는 더 큰 패러다임이 필요하고, 그것이 하나님 나라 복음의 패러다임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로마서 제1-4부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패러다임이다.

 

4. 로마서의 주제문(1:16~17)


도입문: 왜냐하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1:16a).

주제문1: 왜냐하면 복음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모든 믿는 사람에게,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1:16b).

주제문2: 왜냐하면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기 때문이다. 신실함으로부터 신 실함으로(1:17a).

인용문: 이는 의인은 신실함으로 살리라기록된 바와 같다(1:17b).

. 로마서의 주제: 하나님 나라의 복음
바울은 이렇게 짧은 구절 안에 복음을 세 번이나 연이어 반복해 말함으로써, 복음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주되심을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
복음이란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소식이다. 이 구원은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 곧 하나님의 의의 계시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로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당시 유대인의 기준으로 보든 그리스인의 기준으로 보든 십자가는 부끄러운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 주제문1의 수식어구
주제문1의 후반부는 구원의 능력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 구원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모든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는 로마서의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보편적인 교회를 세우는 일과 연관된다.

. 주제문2의 수식어구와 인용문
로마서는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에 관한 내용은 많지 않다. 오히려 로마서의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냐, 또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에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복음이다. 의인은 신실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신실함으로 살아간다. 의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고 신실하게 살아감으로써 거기에 응답하는 것이다. 주제문2의 구절(1:17b)을 다음과 같이 다시 옮길 수 있다. 하나님의 신실함으로부터 우리의 신실함으로 즉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신실함으로부터 기원하여 우리의 신실함을 목표로 계시되는 것이다. 주제문2를 다시 정리해보면, 복음, 곧 예수 사건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부터 기원하여 우리의 신실함을 목표로 계시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당신의 의로우심을 예수사건을 통해 계시하신다. 그런데 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계시의 목표는 우리의 신실함이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우리가 신실함으로 응답할 때 예수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여기서 우리의 신실함은 하나님의 신실한 구원 행동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믿음과 그 후에 이어지는 우리의 신실한 삶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우리가 응답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셔서 우리 안에서 친히 당신의 주 되심을 이루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져오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5장 이신칭의

 

의롭게 됨

 

로마서를 하나님 나라 관점으로 보고 하나님의 의를 중요시 하더라도 이신칭의 즉 예수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우리의 의를 계시하심(3:21-22)도 간과해선 안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파멸이 없다는 것이다. 3:24-25에서는 십자가는 속죄일 뿐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속량”, 즉 속전을 지불하고 노예를 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의롭게 된다는 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바로 이 속량 곧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있다. 죄의 지배로부터 이 속량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속죄,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이어진다.

 

2. 율법의 행위

 

새 관점에서는 이들 유대인들이 율법을 정체성의 의식표지로 사용해 자신을 이방인과 구별하려는 것, 즉 유대인들이 율법을 배타적 선민의식에 따라 사용함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2장에 안디옥 사건 즉 안디옥교회를 방문한 베드로는 이방성도들과 한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예루살렘교회 유대성도들이 오니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나니, 크게 실망한 바울이 베드로에게 엄중히 항의하며 이방인 신자들에 대한 유대인 신자들의 태도를 바로 잡은 일이 있었다. 2:17에서 바울은 이 율법의 소유를 자랑하기만 할 뿐 정작 율법을 지키지는 않는다고 비판했다. 즉 실제로 율법대로 행하지도 않으면서 외식만 하는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외면적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 즉 율법에 따라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이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이신칭의의 명제인데 여기서 율법의 행위란 율법의 윤리적 조항들을 준수하는 선한 행위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자신을 이방인과 구별하기 위해 율법을 경계표지로 사용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면 된다. 3:20a까지는 경계표시라면, b부터는 윤리적 추가 기능으로 죄를 죄로 여기도록 돋보기로 죄를 확대해 보여준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율법이 죄의 실체를 폭로하지만 정작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은 없다는 사실이다. 3:20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정체성의 표지로서 율법의 기능과 율법의 윤리적 무능성을 함께 포함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맺은 언약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언약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롬2:17-25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의 백성임을 자랑하기만 할 뿐 정작 그 율법을 지키지는 않는다고 지적한다. 7:7-25에서 오히려 율법이 죄의 지배의 도구가 되어버린다고 한탄한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이제 유대인들에게도 신실함의 길이 될 수 없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2:36 “피스티스 예수 크리스투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직역할 수 있다. 전자는 우리의 신앙적 결단을, 후자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둘 다를 선택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한다기보다 예수의 십자가가 우리를 의롭게 한다고 말해야 맞을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의를 드러내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그의 피 안에 있는 신실하심을 통해 속죄소로 내주셨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표현되었다.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이 주도하신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성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이스라엘은 불신실하여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따르기에 바빴지만, 언제나 당신의 백성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떠난 백성에게 다시 돌아오셔서 그들을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심으로써 변함없는 신실하심을 보여주셨다. 그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표현되었다.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통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의로움의 조건을 우리 스스로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한 번 주도적으로 우리를 그 언약으로 부르심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의 은혜의 선행성(priority)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이다. 5:1-10에서 의롭게 됨의 기초가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피, 그의 아들의 죽으심 등 다르게 표현하나 다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본문의 피스티스예수님을 믿는 믿음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으로 해석할 때 더 매끄럽다.

 

4. 우리의 믿음

 

이신칭의가 우리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이라고 해서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과 관계없이 십자가에서 이미 의롭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한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원 사건,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 복음 사건은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다.

 

4:3 아브라함이 그렇게 하나님의 언약 제안을 받아들인 것을 가리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즉 그가 하나님의 언약 제안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언약이 체결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언약을 제안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우리에게 그 나라의 백성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으신다. 그 제안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삼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우리는 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언약 관계에 들어가게 된다.

 

43,5,17절에 아브라함의 믿음이란 하나님에 관한 어떤 사실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는 것이다.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에 있다. 로마서의 주제가 이신칭의라면 우리는 구원의 선물에 주목하게 된다. 정작 바울이 이야기하는 관심은 선물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이 옳으시다는 데 주의를 집중한다.

 

그리스도의 믿음도 아브라함과 동일하게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그 내러티브의 사실성 여부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그 모든 사실의 주체이신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향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언약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면 그 언약에 계속해서 머물러야 한다. 그렇게 언약을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 즉 신실함이다.

 

찰스 탈버트바울에 의하면이라는 도입어구로 시작하여 부정문 형식으로 7가지의 믿음의 명제들을 설명한다.

1) 믿음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 그 믿음이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하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단지 하나님이 이루신 그 구원을 받아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2) 믿음은 업적이 아니다

우리가 무언가 행한 것 전혀 없이, 철저히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이루어놓으신 구원으로 우리를 초대하실 때 우리는 단지 그 언약 제안을 받아들일 뿐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다. 믿음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 조건이 되지 못하고, 그저 의로워짐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로워짐을 경험하는 것이다.

3) 믿음이란 교리 조항들을 믿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대상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의 인격이다. 믿음이란 지성적 용어가 아니라 종교적관계적 용어임을 의미한다. 10:9-10, 이 구절의 해석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교리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4) 믿음이란 행동이냐 태도냐 감정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믿음은 어떤 종교적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업적이 되어 버린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원에 대한 응답으로 이루어진다면 감정이나 행동이나 태도는 모두 믿음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 될 수 있다.

5) 믿음이란 일회적 사건이 아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뿐 아니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계속해간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응답으로 시작되고 끝난다. 즉 칭의 성화 모두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6)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부분적 응답이 아니다

믿음은 우리의 전인격을 통한 응답이다. 사랑의 관계의 연인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역시 서로를 알아가면서 맞추고 순종에 이르는 과정을 겪는다. 믿음이란 은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뿐 아니라 은혜의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7) 믿음이란 단지 예수님을 따르기로 하는 나의 결정이 아니다

믿음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이다. 사랑에 빠지기 위해 작든 크든, 안에서든 밖에서든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믿는 것도 우리 마음대로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조차도 은혜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1:29)

 

6장 영광의 소망

 

1. “이미아직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은 구원의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말이지 완성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시작되었으나, 파라오의 질서가 아직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이미구원의 길에 들었으나 아직그 여정의 종착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실존인 바,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로마서의 제2부인 로마서 5-8장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본문 가운데 하나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와 죄의 지배 사이에 놓여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고 죄의 지배는 패망이 결정되었으나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이 있다. 그런 상황에 놓인 우리를 향해 죄의 지배로 돌아가지 말라고 반복해 촉구한다. 그런 삶 가운데 우리의 목표는 장래 구원의 완성과 함께 이루어질 영광에 대한 소망이다. 성령은 그 삶을 친히 이끄신다.

 

로마서 제2부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는 어휘들 중 하나인 평화란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이루어가야 할 과정이다. 평화란 모든 창조세계가 각기 제자리에 놓여 서로 온전한 관계를 형성하는 상태를 말한다. 구원이란 그 첫 창조의 온전함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로마서는 그것을 평화라는 말에 함축한다. 구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해가는 과정, 영화”(glorification)의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칭의와 성화 다음에 오는 과정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의 전 과정이 영화의 과정이다. 우리의 구원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여전히 소망가운데 있고, 지금도 우리에게는 환난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내하며 이 모든 환난을 이겨내고 꿋꿋이 가나안을 향해 나아간다. 오직 성령의 힘에 의지해서다.

 

바울은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죽었다고 말하며 그런데 왜 죽은 그 존재로 돌아가려 하느냐?”고 반문한다. 그는 왜 이미를 강조할까? 그것은 아직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십자가와 부활과 주 되심으로 이어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건을 통해 죄의 지배가 이미 패망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아직의 현실적 위력이 여전히 너무나 크기에 우리는 이미이루어진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소망의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엄연한 아직의 현실에서 이미의 신앙에 기초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이란 단지 인간적인 불굴의 의지나 낙관적인 태도가 아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가능한 것은 성령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도우심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주제 안에 포괄된다. 존 바클레이는 그의 책 바울과 하나님의 선물에서, 당시 유대교는 다양성과 복합성을 지닌 종교로서, 새 관점을 대표하는 샌더스가 말한 언약적 율법주의로 획일화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와 동시에 새 관점을 보완하는 답도 제시하는데, 샌더스가 말한 대로 당시 유대교도 은혜의 종교였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런데 문제는 은혜를 말하되 그 은혜라는 말의 의미를 저마다 다른 뜻으로 사용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새 관점 학파의 오류는 자신들이 상정한 은혜의 특정 개념을 바울 당시 유대교에 적용하여 일반화한 것이다. 왜곡된 은혜 개념을 바로잡음으로써 바클레이는 은혜가 다면적인 개념임을 발견했다. 그는 여섯 가지로 은혜 개념을 정리하는데, 앞의 세 가지는 바울에게서도 분명히 나타나지만, 네 번째 개념은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마지막 두 가지는 바울의 은혜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1) 비상응성(incongruity) : 이는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받는 사람의 자격이나 가치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은혜다. 그런 비상응성의 원칙이 가장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다. 이는 바울의 신학에서도 매우 두드러지는 은혜의 개념이다.(4:4-5)

2) 선행성(priority) : 이는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하거나, 은혜를 기대하며 무슨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구원의 선물을 베푸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9:11의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3) 초충만성(super-abundance) : 이는 아낌없이 풍성하게 베푸는 것이 은혜임을 말한다.(5:15-17)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아담으로 말미암은 죽음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넘치도록 풍성하다.

4) 효과성(efficacy) : 은혜가 은혜 받는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바클레이에 따르면, 은혜의 효과성개념은 바울에게서 제한적으로만 나타난다. 은혜의 효과성을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게 되면 결과적으로 인간의 책임을 도외시하게 된다. 하지만 바울은 인간의 책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8:13)

5) 단일성(singularity) : 하나님이 우리를 오직 은혜로만 대하지 벌하지는 않으신다는 의미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원하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심판하는 하나님이시다.

6) 비순환성(non-circularity) : 바클레이 책이 가장 크게 이바지한 부분이다. 은혜가 보답을 기대하지 않고 거저 베풀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은혜의 개념은 오늘날 널리 퍼져 있다. 본회퍼값싼 은혜라는 말로 지적한 개신교인들의 문제가 바로 이 은혜의 개념이다. 바클레이는 이런 은혜의 비순환성이 바울 서신은 물론 성경과 관련한 문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당시 문화에서 은혜란 반드시 보답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었다.

 

로마서 5:206:1-14로 이어지고, 로마서 5:216:15-7:6로 이어진다. 많은 해석자가 로마서 6:1을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비아냥거림으로 본다. 그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바울의 주장이 윤리적 방종을 조장할 뿐이라며 비웃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 2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특권으로 여기고 그 특권에 안주하려 했다. 따라서 로마서 6:1에 제기된 질문은 은혜를 부정하는 사람들보다는 은혜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의 태도를 빗댄 것일 가능성이 더 크다. 또 하나는 율법의 지배와 대조되는 은혜의 통치. 은혜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은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것이 모든 규범에서 벗어나 방종한 삶을 살아도 된다는 것인가? “은혜의 통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가리키는 다른 표현이다. 즉 은혜 아래에 있다는 말은 방종을 허용하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과 다른 삶의 원리 곧 은혜의 규범을 따라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는 순종의 삶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본래 죄의 종이자 사망의 종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하심으로써 우리는 은혜에 빚진 자가 되었다. 은혜는 빚이다.(8:14-16)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직접 하나님께 갚아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 사랑의 형태로 하나님의 은혜를 갚기 원하신다. 마태복음 18:23-35에 기록된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보답은 우리가 진 빚의 50만 분의 1도 안 되는, 비교할 수 없이 보잘것없는 양이다. 그마저도 이웃에게 갚으면 된다.

 

3. 창조세계의 구원

 

하나님 나라 복음에서 구원이란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공간은 창조세계 전체다. 영혼뿐 아니라, 육체에도,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도, 교회뿐 아니라 교회 밖에도, 그리고 인간 세계뿐 아니라 자연 세계에도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 자연 세계도 인간과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로마서는 평화라 말한다. 평화란 모든 피조물이 각기 제자리에 놓여 서로 간에 그리고 하나님과 원만한 관계를 이루는 상태를 가리킨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란 창조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이 세대의 종말이다. 죄의 지배가 맞을 종말, 파라오의 질서가 맞닥뜨릴 종말이다. 이 세대의 통치가 종식되고 온전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많은 사람이 빠져 있는 근본적인 오해는 인간이 창조의 궁극적 목적이고 모든 창조세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창세기 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심히 좋았다고 말한다. 창조된 모든 것이 샬롬을 이루는 상태를 보시고 심히 좋다고 평가하신 것이다. 자연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은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가진다. 다만 사람은 하나님의 주 되심의 표징으로서 창조세계에 하나님 나라를 이룰 책임을 맡았을 뿐이다.

 

4.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영리는 하나님과 인간이라는 두 항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데, 이런 구도 속에서는 하나님의 주권과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공존하기 어렵다. 죄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주 되심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유다.(6:18) 로마서 6장은 우리가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8장은 우리가 종이 아니라 양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종과 자녀의 차이는 자유에 있다. 종과 달리 자녀에게는 상속권이 있다. 구원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동 상속자로서 왕의 신분을 누리게 될 것이다.(8:17) 로마서 6장에서 이라는 상징어는 그 자체의 의미에 초점이 있다기보다는, “누가 주님이냐?” 하는 질문을 부각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이로써 로마서가 말하는 속량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속량은 주인만 바뀐 또 다른 종살이가 아니라 노예 상태 자체로부터의 해방을, 곧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란 우리의 구원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이며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구원이 완성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5:2) 로마서 8:21은 그것을 하나님과 같은 완전한 자유 즉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으로 서술한다. 그것은 타락 이전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리던 완전한 자유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셨다. 그 결과는 자유의 회복으로 나타난다.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에덴의 완전한 자유를 회복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성장은 곧 자유의 성장이다.

 

많은 사람이 내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여긴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율법에 얽매인 삶을 살아간다. 교회에 오래 다닐수록 율법의 무게가 더해지면 진정한 나다움과 개성은 없어지고 거룩한종교인의 모습만 시간이 쌓이는 만큼 더 강화된다. 자유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자유 없는 율법을 강요한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를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의 지배를 더 강화한다.(7) 신앙생활이란 내 뜻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내 뜻대로 하는 것도 아니다. 신앙생활이란 오히려 내 뜻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참 자아가 바로 세워지고 내 뜻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될 때 우리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주 되심이 온전히 이루어질 때 우리는 예수님의 발치에 내려앉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5:17)

 

5. 구원의 확신

 

이상의 논의들을 거쳐 로마서 제2부의 모든 논의가 수렴되는 궁극의 주제는 구원의 확신이다. 감동적인 어조로 펼쳐지는 로마서 8장의 마지막 단락은 기독교 신학에서 성도의 견인또는 성도의 인내라 불리는 교리의 근거가 되었다. 성도의 견인이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지키시는 은혜로 인해 끝까지 견디어 결국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교리다. 바울은 하나님이 유대인들도 구원으로부터 잘라내셨는데, 이방인이라고 그냥 봐주시겠느냐고 분명히 경고한다. 육체를 따라 사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5:21) 하나님이 은혜로 이끄시지만 우리 스스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걷지 않으면 광야에서 죽는다. 이스라엘은 그 척박한 광야를 걷고 또 걸어야 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이 전장에 나가 적군과 맞서야 했다. 하나님이 전적으로 이끄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험한 광야 길을 제 발로 걷고 또 걸을 때,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주 되심에 전적으로 내어드릴 때 임하는 은혜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신자는 천국행 티켓만 예약해놓으면 다 되었다고 안심해도 될까? 아니다. 우리의 구원이란 가나안을 향해 가면서 광야 길을 걷는 것과 같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3:12)” 구원은 죽은 후에 구원 열차 타고 천국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구원의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것이다. 이 걸어감 또는 달려감에는 긴장이 있다. “아직구원의 완성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에 현실적인 불확실성이 남아 있고 그로 인한 긴장이 발생한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그 긴장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하나의 시스템에 가두고 통제하려 한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기보다 천국행 티켓을 손안에 넣고 그 티켓에 확실성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여 안도감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태도다. 로마서는 우리가 구원에서 떨어져 나갈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말한다. 서로 모순일까?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그런데 그 확실성은 견고한 교리적 시스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교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믿음은 어떤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사실의 주체이신 하나님과 친밀한 언약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정의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가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인정하고 그 주 되심 안에 살아가는 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다.(8:31-39)

 

나가는 말 : 다시 십자가로!

 

지금까지의 논의 과정을 통해 분명해진 것은 무엇보다 로마서에 담긴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신구약을 관통하는 하나의 복음 곧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담겨 있을 뿐이다. 믿음이란 십자가와 부활과 예수님의 주 되심이라는 일련의 사실들을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주 되심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과 모든 순간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삶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주 되심을 살아내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신앙의 영역이다. 하나님의 주 되심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이 나의 주 됨을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또는 권력을, 또는 명성을, 또는 그 무엇이든 하나님과 그것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현실의 표면과 심층이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는 파라오의 질서를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다. 신앙적, 영적 통찰뿐 아니라, 사회와 문화와 인간과 자연을 구조적으로, 분석적으로, 심리적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세밀한 통찰이 함께 필요하다. 하나님 나라의 실천은 성서학과 신학뿐 아니라 다양한 세속 학문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다. “하나님의나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주 되심에 모든 것을 내어드릴 뿐이다. 오직 은혜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에 관한 이해가 지엽적인 속죄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더 근본적인 속량의 차원으로 나아가 그 복합적인 의미가 모두 드러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온전성이 회복되고 십자가는 복음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십자가! 그것은 화려한 사탄의 능력과 지혜가 하나님의 아들이 보인 무력함과 어리석음에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 아니라 동시에 무덤을 깨고 나오는 출구이기도 하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