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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예언자들

메르시어 2023. 5. 9. 02:22

이스라엘의 예언자들

2015-05-01 14:48:57


   예언의 본질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볼 때 이스라엘 예언자의 원형은 모세라고 할 수 있다. 예언의 본질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과 그 속에서의 올바른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언은 앞 일을 말하지만 사실 그 초점은 현재에 있다. 그리고 예언에서 말하는 미래의 일도 갑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미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전에 예고되었던 것으로서 과거에 주어진 약속과 율법에 기반하여 있다. 그러므로 예언의 기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이며,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과 거기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과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오늘날로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특별한 체험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런 체험들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드러나는 수단이라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예언자들에게 후대로 갈 수록 이런 특별한 체험들이 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사야를 예로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나타난 이사야의 체험은 하나님의 임재를 개닫는 중재수단으로서 체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체험의 핵심적인 국면은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는 그 말씀 자체에 있다. 결론적으로 예언자들의 주된 관심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어떤 체험을 했는냐가 아니라 그들이 받은 말씀의 내용에 있었다.

 

   예언자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정치와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었다. 왕정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거룩한 전쟁의 열렬한 수호자로서 전쟁을 앞두고 이스라엘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왕정기 이후부터는 많은 예언자들은 엘리야 엘리사와 같이 권력의 외부에 처하게 되며 당시 사회의 주변부에서 살아가면서 권력체제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자들이 되었다. 또 다른 예언자들은 나단과 같이 주어진 사회 체제 내부에서 활동하면서 비교적 온전하고 순리적인 변화를 추구하기도 하였다.

어느 경우가 되었던 예언자들은 사회를 도피하여 물러난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물려받은 신앙 전통을 보존하고 예언의 말씀들을 소중하게 간직했던 자들이었다.

 

   구약성경에 보존된 예언서들은 모두 주전 8세기 이후 활동한 예언자들의 문서로서 이 예언자들을 문서 예언자(writing prophets) 혹은 고전 예언자(classical prophets)라고 부른다. 그런데 왜 주전 8세기 이후의 예언자들은 이전 시기의 예언자들인 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같은 이들과 달리 그들의 이름으로 기록된 문서들이 존재하게 된 것일까? 아모스로 시작되는 문서 예언자들의 새로운 전통은 이전의 예언자들과 다른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전의 예언자들의 예언이 주로 특별한 영적 체험과 결합된 반면에 이들은 그런 현상을 그다지 담고 있지 않으면 그런 경험을 수반하더라도 그들의 관심사는 그런 경험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8세기 이전 예언자들과는 달리 아모스 이후 문서 예언자들은 이전 전통과의 단절 그리고 이전에 살았던 삶과의 급격한 단절이 그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아모스이후 문서 예언자들인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에게 공통되는 점이 그들의 예언이 특정 왕조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예언의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멸망하기 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된다는 점에서 그 예언들이 기록되고 보존되어 후대에 전달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과연 남조와 북조가 각각 멸망한 후에 후대의 사람들은 민족의 멸망 이전에 선포된 예언자들의 말들을 기억하고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의 이름으로 전해진 예언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기록하여 후대에 전달하게 되었을 것이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그의 책 예언자들의 메시지에서 8세기 예언자들이 직면하게 된 새로운 현실을 다음 4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1. 이전 부터 지속되어 오던 바알신앙과의 혼합으로 인하여 8세기에 이르러는 여호와 신앙이 급격하게 퇴조하게 되었다. 2. 왕정기 이후 여호와 신앙으로 부터 자율을 획득한 세속 국가가 출현하였다. 3.국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유롭던 소농들은 세금과 군역의 의무 속에서 자유로운 지위를 잃게되었으며 농촌의 자급자족 능력은 저하되고 국가가 주도는 유통망에 절대 의존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농촌의 부는 점점 도시로 집중되고 경제 중심이 농촌과 지파중심의 구질서에서 국가와 도시중심의 새질서로 이동하게 되었다. 4.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협하는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초강대국이 출현하였고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적인 위기가 문서 예언자들이 등장하는 시기였다. 앗수르 위기와 관련된 예언자는 호세아, 아모스, 미가, 이사야 등이 있으며 바벨론 위기와 관련해서는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이 있다.

 

   이러한 변화된 상황속에서 문서 예언자들이 전하였던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그 규례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회복이었다. 그들은 아무리 강대국들이 강하고 이스라엘을 위협한다 하여도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므로 오직 그만 의지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촉구하였다. 이스라엘의 왕들은 위기의 문제를 국가 동맹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지만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여호와를 의지함로써만 그 문제가 해결될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에게 국제정치는 독자적인 세속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었다. 그러기에 8세기 예언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새로운 현상이 이방나라들에 대한 예언(열방예언)인데 이 열방예언의 촛점은 열방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시므로 열방을 의지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8세기 이래 남북 이스라엘에는 빈부격차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문서예언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의 관점에서 이런 현실의 불의를 지적하고 있다. 당시 사회에 가득하던 불의의 본질은 단순한 사회경제적, 정치적 불의가 아니라 탐욕으로 인하여 언약을 파괴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이웃을 억압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인 공평과 정의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었다. 주전 8세기 이래 여호와 신앙은 제사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문제 그리고 열강들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이스라엘 문서 예언자들은 근본적으로 오래된 전통에 뿌리를 두고 당시의 백성들이 지키지 않은지 오래되었고 심지어 기억조차 못하는 규례들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고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또. 가까운 미래에 하나님의  새로운 행하심을 내다보고 열강이 아무리 강력해도 그들은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일 뿐이므로 심판을 선포하는 가운데서도 여호와께서 행하실 구원을 향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이를 통해 그들을 연단하시며 깨끗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심판과 구원은 서로 다른 두 성격의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의 양면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문서 예언자들

2015-05-23 17:01:38


     구약 성경의 모든 예언서들은 모두 주전 8세기 이후 활동한 예언자들인데 이 예언자들을 가리켜 문서 예언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왜 주전 8세기 이래 예언자들은 이전 시기 예언자들(사무엘, 엘리야, 엘리사 등)과 달리 그들의 이름으로 전해지는 책들이 존재하게 된 것인가? 최초의 문서예언자는 북왕국 여로보암2세 치세에서 예언한 아모스였다. 아모스는 이전의 예언자들과는 달리 여로보암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북왕국 자체가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갈 것을 선포한다. 이렇게 아모스의 예언에는 이전 예언자들과 달리 일개 왕조가 아니라 민족 전체의 운명이 달린 문제가 선포되는데 이것은 아모스 이후의 문서 예언자들인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에서도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들의 선포는 당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멸망하는 일이 일어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린다는 점에서 이들의 선포가 기록되어 보전되어 후대에 전달될 필요가 생기게 된다. 이를 보건데, 이 예언자들의 선포가 지닌 급진적이고 되돌이킬 수 없는 비타협적 특징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말씀 전달과 보존 형식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예언자들의 선포가 지닌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내용, 그리고 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예언자들의 선포에 대한 재인식 등이 예언자들의 이름으로 전해진 예언들을 모으고 편집하고 전달하게 하였을 것이다.

 

    아모스 이후의 문서 예언자들은 이전 예언자들과는 달리 한 왕이나 왕조에 대한 심판을 넘어 민족 전체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였는데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이것은 문서예언자들이 등장하는 주전 8세기는 남북 이스라엘의 정치,사회적 상황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변화된 사회가 변화된 말씀 선포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이 시기 예언자들이 직면한 새로운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이전부터 지속되어 오던 바알신앙과의 혼합으로 말미암아  8세기에 이르러는 여호와 신앙이 급격하게 퇴조하게 되었으며 국가의 틀이 견고해 지면서 국가는 점점 여호와 신앙으로 부터 자율을 확득하게 되었다. 둘째 세금과 제반 공공의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자유롭던 소농들은 점차 자유로운 지위를 잃게되었으며 농촌의 자급자족 능력은 현격히 저하되고 농촌의 부가 점차 도시로 집중되면서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평등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8세기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차원의 문제였다. 셋째 이스라엘의 존립을 위협하는 초강대국이 출현하였다. 앗수르의 디글랏빌레셀 3세 이래 북왕국과 남왕국은 날로 약화되었고앗수르 이래 초강대국은 바벨론으로 이어지면서 이스라엘의 존립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강대국들의 침략으로 인한 국가적인 위기가 문서예언자들이 등장한 시기였다. 앗수르 위기와 관련해서는 호세아, 아모스, 미가, 이사야 등이 있으며 바빌론 위기시에는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이 있다.

 

     이러한 변화된 현실속에서 예언자들이 추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그 규례를 따라 살아가는 삶의 회복이었다. 아무리 강대국이 강성하고 이스라엘을 위협한다 하여도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예언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의뢰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들에게 국제정치는 독자적인 세속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이었다. 그런 점에서 8세기 문서예언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새롭게 나타난 열방예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울러 문세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거룩한 영역으로 포함시킨 것은 사회경제적인 삶의 현실에 대한 내용이다. 예언자들은 8세기 이래 남북 이스라엘에 두드러지게 등장한 빈부격차와 사회경제적 불의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삶을 반영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그들은 단지 사회적 정의를 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점에서 그러한 사회적 불의를 지적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사회경제적 불의의 본질은 단순히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라 탐욕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괴한 것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을 억압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지 않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인 공평과 정의를 저버린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주전 8세기 이후 시대에 여호와 신앙은 가난한 이웃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또 열강들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이런 문제들로 첨예화되었다.

 

    이 문서 예언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심판에 대한 것이 압도적이지만 심판의 말씀과 아울러 구원의 말씀도 포함하고 있다. 심판은 예고대로 철저히 완벽하게 이루어질 것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사실 심판에 앞서 심판의 사자들을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선포된 멸망 너머로 소망을 두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심판과 구원은 전혀 다른 성격의 두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의 양면인 것이다. 게르하르트 폰 라트는 이 문서 예언자들의 선포의 공통적인 특징을 다음 두가지로 꼽고 있는데 첫째는 예언자들의 선포는 근본적으로 오래된 거룩한 전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당대의 백성들이 지키지 않으지 오래되었고 이제는 기억조차 못하는 규례들일지라도 그것이 여전히 구속력이 있고 조금도 약화되지 않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음을 예언자들의 선포는 확인하고 있다. 두번째로 예언자들의 선포는 심판이 압도적이지만 심판을 넘어서 미래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나타내고 있다. 열강은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일 뿐이고 심판 이후에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행하실 것인데 그 일은 심지어 이전 일들을 능가하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다. 그래서 문서 예언자들은 모두 극심한 심판을 예고하면서도 구원을 향한 새로운 시작을 알렸다. 

 

이사야서의 메시지

2015-05-24 19:54:17


     이사야서는 남왕국 유대왕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에 이르는 주전 8세기 중후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사야 사역의 전반부인 웃시야 요담이 다스리던 시대는 유다의 번성기로서 군사적으로도 튼튼하고 경제적으로도 농업과 무역이 번성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아하스 시대에 이르러는 앗수르의 세력이 고대 중동 전 지역에 팽창함에 따라 남왕국의 정세도 불안해졌다. 북왕국과 아람은 앗수르에 대항하기로 결정하고 남왕국에 연합을 제안하였는데 아하스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북왕국과 아람은 연합하여 남왕국을 침공하였는데 이 전쟁이 수리아-에브라임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아하스는 앗수르의 원조를 요청하였고 그 결과 북왕국과 아람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유다도 앗수르의 조공국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어지는 히스기야 시대에 남왕국은 애굽과 바벨론의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세력에서 벗어나려고 하였고 이로 인해 유다는 앗수르의 대대적인 침공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인하여 앗수르는 많은 사상자를 남긴채 본국으로 퇴각하게 된다. 히스기야 시대의 이 기적적인 사건은 남왕국의 존립이 강대국의 군사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달린 것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사야는 웃시야, 요담이 다스리던 평화롭고 부유한 시대에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다. 이사야가 바라보는 현실은 겉으로 보이는 현실이나 사람들이 인식하는 현실과 달랐다. 비록 부국강병과 평화의 노래가 울려퍼지지만 이사야가 바라보는 그 시대는 억압과 착취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과 눈물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대로 시대를 보았던 사람이며 하나님이 이르신 말씀에 근거하여 시대를 바라보았던 사람이었다. 이사야 1-12장은 주로 이 시대에 선포된 말씀들로서 심판에 대한 말씀이 주조를 이룬다. 13-23장에는 열방 예언이 나타나고 24-27장은 온 세상에 임할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을 다루고 있다. 다시 28-33장은 이사야가 사역하던 구체적인 현실로 돌아와서 히스기야 시대, 유다의 여러 죄악들을 고발하고 그에 따른 심판을 선언한다. 34-35장은 24-27장과 비슷하게 온 세상에 임할 심판과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말씀이 다시 나타난다. 36-39장은 히스기야 시대 앗수르의 침공을 배경으로 39장에서 앗수르의 시대는 끝나고 이후 바벨론 시대로 넘어간다. 1-39장이 주로 심판의 말씀이었다면 40-55장은 전적으로 회복과 위로, 구원의 말씀이 선포된다. 그래서 40장 이후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바벨론에 끌려간 이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으로 이해된다. (이런 이유로 40장 이후는 이사야가 아닌 다른 예언자의 사역을 기록한 제2 이사야서라고 부르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56-66장에는 다시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강력한 고발과 책망이 나타난다. 그러나 1-39장과는 달리 그에 대한 심판으로 포로됨이 선포되지는 않는데 그러므로 이 본문은 포로에서 돌아온 후 본토에서 살아가지만 여전히 죄악을 저지르는 백성을 향한 책망의 말씀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본문은 회복을 경험했으나 변화가 없는 삶, 오히려 더 악화된 일상으로 말미암아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위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죄를 짓는 것은 단지 성품이 악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호와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 없을 때 그래서 뷸의한 이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스스로 챙기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드는 그 때 사람들은 정의를 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악을 행하게 된다. 이 본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약속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친히 행하실 것이며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영광의 날이 도래할 것을 강력히 증거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사야는 1-39장까지 주로 심판의 말씀 그리고 40-66장은 주로 회복과 구원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보면 심판에서 회복으로 방향이 설정되어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죄악으로 인해 그 백성들을 심판하실 것이지만 이것은 그 백성을 진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고치고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국 그 백성을 구원하고 회복하심으로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관자이심을 드러내신다는 것이 이사야 예언의 핵심 메시지일 것이다.

 

     이사야 예언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이 공평과 정의이다. 정의가 하나님과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를 의미한다면 공평은 외모나 뇌물에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내려지는 판결이나 재판을 의미한다. 이사야는 성전안의 예배가 성전 밖의 삶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 밖의 일상에서 행하는 공평과 정의가 성전 안의 예배를 타당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이사야 1:10-17) 문제는 이스라엘이 공평과 정의의 삶을 살지 않으면서 더 많은 제사와 제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공평과 정의는 인간적인 윤리 덕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공평과 정의를 강조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공평과 정의를 저버린 이스라엘은 멸망하지만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 더욱 드러난다. 열방 예언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뿐 아니라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망하지만 하나님의 세상 통치는 망하지도 쇠하지도 않는다. 이스라엘의 강성함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멸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세상 통치는 강력하게 선포되는 것이다. 

 

    회복과 구원이 선포되는 40-55장에는 여호와의 종을 노래하는 네개의 본문이 나타난다. 여호와의 종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입은 자로서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사역을 감당하며 온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자로 소개된다.(42장 1-4절) 그러나 이 종이 실제 행한 일은 무익하다 싶을 정도로 성과가 없이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종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열방을 하님께 돌이키는 이방의 빛으로 부름을 받은 자이다. 겉으로는 무익해 보이고 헛수고처럼 보이는 사역을 하였지만 이 종의 사역과 삶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으로 깊고 놀라운 뜻을 지니고 있다.(49장 1-6절) 이종은 학자의 혀와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연약한 이들을 도우며 어떤 어려움이 있고 모욕과 수치를 당하더라도 뒤로 물러가거나 체념하지 않는다.(50장 4-9절) 그리고 이 종은 극심한 고난을 당하는데 놀랍게도 이 종이 당하는 슬픔과 질병은 모두 범죄한 우리가 당해야 하는 것을 대신 짊어진 것이었다.(52장 13절-53장 12절) 여호와의 종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존재이지만 그의 사역은 무익한 듯 보이고 그의 삶은 조롱과 수치를 당하다가 마침내 죽음으로 끝난다. 이 여호와의 종은 신약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었으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모범으로 이해되었다.

 

     이사야서 곳곳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이 어떤 모습이 될것인지에 대해 묘사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열방 가운데 칼이 보습으로 창이 낫으로 바뀌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 예언되고 있다.(2장 2-5절) 그리고 이새의 줄기에서 나올 새로운 다윗에게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임하며 그는 공의와 성실로 백성을 다스릴 것이다. 그 결과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어노는 세상, 여호와를 아닌 지식이 가득한 세상,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어도 해를 받지 않는 그런 세상이 될 것이다.(11장 1-10절) 이사야는 이러한 세상을 가리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다른 공간이나 어떤 특별한 시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며  풍성하고 즐거운 삶이 현실이 되는 세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이 이루실 영광스러운 미래이면서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교회가 열심으로 추구하며 만들어가야 할 현실이기도 하다. 

예레미야서의 메시지

2015-05-24 21:32:02


    예레미야는 아나돗 지방 제사장 가문 출신이었다. 아나돗은 솔로몬 즉위시에 반대파를 지지한 연고로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축출되었던 제사장 아비아달의 고향이었다. 예레미야가 아나돗 출신이라는 것은 그가 중심부 인물이 아니라 주변부에 존재하던 제사장 가문 출신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유다 왕 요시야 13년(주전 626년)부터 시드기야 왕 11년(주전 587년말) 예루살렘 함락시 까지 예언사역을 하였다. 요시야는 말씀에 근거한 개혁을 시도한 왕이었고 예레미야도 그를 일러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변호하며 공평과 정의를 행하였다고 평가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을 떠나고 이방 신을 향하여 불의와 불법을 행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래서 요시야 이후의 이스라엘은 멸망을 향해 질주하는 기관차와 같았다. 요시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위에 오르지만 애굽은 그를 포로로 끌어가고 요시야의 다른 아들 여호야김을 왕위에 세웠다. 주전 605년 여호야김 4년에 바벨론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애굽에 승리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세력을 행사하게 된다. 여호야김 사후에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올랐지만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포로로 잡아가고 요사야의 또 다른 아들인 시드기야를 유다 왕위에 세웠다. 그러나 시드시야가 바벨론에 저항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전 587년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결국 유다는 멸망하게 된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점점 기울어지다가 결국 멸망하는 이런 시기를 살면서 유다 민족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과 멸망의 날을 선포하였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심판과 멸망을 전하였기에 예레미야의 삶은 이미 고난이 예견된 것이었으니 그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로 말미암아 고난을 겪어야 했다.

 

     예레미야서에는 여호야김 4년 느부갓네살 원년의 시간이 반복되어 언급되는데 이 해는 갈그미스 전투를 통해 팔레스타인의 패권이 애굽에서 바벨론으로 결정적으로 넘어간 시기였다. 그러니까 여호야김 4년은 유다의 운명을 결정할 바벨론이 등장함으로써 이제 유다의 멸망이 기정사실화된 시기였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던 예레미야의 선포는 여호야김 4년을 기점으로 그들에게 다가올 심판에 대한 예고로 변화한다. 예레미야 후반부인 46장-51장에는 다른 문서예언과 마찬가지로 열방 예언이 등장하고 마지막 52장에는 예레미야가 예고하고 선포했던 대로 다윗 왕국이 몰락하고 성전이 파괴된 사실이 담담히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와 왕국을 뽑고 파괴하며 또 건설하는 자로 부르셨다.(1장 10절) 예레미야가 뽑고 파괴해야 했던 중요한 대상은 바로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언약이라는 두개의 기둥이었다. 유다는 성전을 여호와의 집이라 부르며 귀한 물건과 제사를 드렸지만 그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 탐욕을 부리며 거짓을 행하는 일상을 살았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법을 떠난 자들에게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고 선포하였다. 예레미야가 도전한 다른 것은 다윗 언약이었다. 유다는 다윗 언약을 따라서 하나님이 다윗왕조와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시리라 믿었지만 이런 믿음은 오히려 그들의 삶의 변화를 지연시키고 죄를 반복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다윗언약의 의미는 다윗의 행실을 따르는 삶에 있으며 그 삶의 핵심은 공평과 정의의 삶이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공평과 정의를 떠난 이스라엘에게 다윗 언약은 무의미함을 선포한 것이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굳게 믿는 성전과 다윗 언약이 무너지고 파괴되고 말 것을 확실히 선포하였다. 모든 그릇된 것들이 무너지고 착각하던 것들이 파괴될 때에 비로서 새로운 것이 세워지고 심어질 수 있다. 예레미야의 선포는 여호와 신앙이야 말로 모든 기존의 확고한 것들을 일거에 부정하고 뒤업는 사고를 뿌리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나라의 멸망은 멸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의 출발이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이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참으로 예레미야는 긴 세월에 걸쳐 고난에 가득한 사역을 한결같이 감당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도우시되 그를 곤경으로부터 건져내시는 것이 아니라 예레미야를 놋성벽처럼 단단하게 하셔서 어떤 곤경과 모욕도 견디어 내게 하신다. 하나님의 보호와 함께 하심을 체험하는 삶을 살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곤경과 고난 가운데 살아가야 했던 예언자가 바로 예레미야였다. 그래서 예레미야서에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처절한 고백들이 많이 나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가 된 예레미야이지만 그는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신앙을 고백하거나 불평을 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에례미야가 단지 수동적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반응하는 삶을 살았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레미야의 삶은예언자의 자유와 하나님의 강권하심을 모두 다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예레미야에게는 하나님의 강권하심에 붙잡힌 수동적 삶과 동시에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동적 삶이 드러나난다. 여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그 말씀을 전하고 살며 고난을 감수해갔던 한 사람의 삶과 고백이 훗날 신앙공동체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승된 것이 바로 예레미야서이다.

에스겔서의 메시지

2015-05-25 20:50:17


      이사야와 예레미야가 유다 땅에 살면서 다가올 멸망을 예고했다면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였다. 에스겔의 사역 목표는 포로지의 유다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허황된 기대를 깨뜨리면서 동시에 예루살렘의 멸망이 유다의 끝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전하는 것이었다.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었는데 아마도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갈 때에 함께 끌려갔을 것이다. 그는 서른살 되던 해 4월 5일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게 된다. 이 때는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혀 온지 5년째 되던 해 주전 593년으로서 아직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이었다. 에스겔은 유다 땅이 아닌 포로로 끌려간 갈대아 땅에 거주하고 있었지만 그곳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이 나타난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었다해도 하나님의 능력이 약화되거나 쇠퇴한 것은 아니며 사람은 포로가 될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은 포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에스겔서는 대체로 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연대는 여호야긴이 포로로 끌려간 해를 기준으로 정해져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을 통해 다윗의 후예의 포로된 현실을 적나나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여호야긴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결국 여호야긴을 기준으로 한 연대는 이스라엘의 심판과 희망을 동시에 담고 있고 볼 수 있다. 에스겔의 사역은 주전 593년(여호야긴 유배 5년)에 시작되어 주전 571년(여호야긴 유배 27년)까지 이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어졌다. 에스겔 1-24장은 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 말씀이 그리고 25-32장에는 열방에 임할 심판 말씀이 주로 나타난다. 그런데 33장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이 포로지에 알려진 후에는 에스겔의 선포는 예루살렘이 회복될 미래에 집중된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은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는데 에스겔이 그발 강가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임재는 바로 예루살렘을 떠난 하나님의 영광이 이방 땅에 나타난 것이었다.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줄 알았던 이방 땅에서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을 목도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을 떠나 이스라엘이 유배중인 바벨론으로 옮겨가셨음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것(겔 10장) 그리고 그 영광이 다시 예루살렘 성전을 돌아가는 것(겔43장 5절)은 에스겔서의 큰 전환을 반영하고 있다. 에스겔서는 1-24장까지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 심판을 선포하는데 대단히 특유한 상징적 행위들과 비유를 통해 그들의 죄악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24장에서는 에스겔의 아내가 죽는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의 최종적인 멸망이 상징적으로 선포되는데 예루살렘의 멸망은 에스겔 사역의 중요한 기점을 이루고 있다.

 

    25-32장에서는 이사야 예레미야와 마찬가지로 열방 예언이 나타나는데 이런 예언들은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나라들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으며 여호와께서 온 나라를 그 뜻에 따라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준다. 강대국 바벨론의 힘에 억눌려 포로 신세가 된 유배지의 이스라엘에게 선포된 열방 예언은 하나님이 힘이 없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신 것임을 의미할 것이다. 33장에서 에루살렘이 멸망당했다는 연락을 받은 후 에스겔의 메시지는 심판에서 회복을 향한 소망으로 바뀐다. 망하기 전에는 망하지 않는다는 헛된 희망을 버릴 것을 선포했다면 망한 후에는 절망하지 말고 오히려 새롭게 주어질 희망을 바라보라고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33-48장에서는 에스겔의 환상 가운데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그 모습은 성전의 회복으로 부터 시작하여 성전으로 말미암아 온 땅에 풍성함이 넘쳐나는 것으로 묘사된다.

 

     에스겔서 메시지의 특징은 제의와 일상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스겔서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 제의적인 정결을 지키는 것 그리고 이웃을 학대하거나 이자를 받지 않는 것을 모두 공평과 정의라는 제목 아래 포괄하고 있는데 이것은 에스겔서가 "거룩"을 제의적인 차원과 사회윤리적인 차원으로 분리하지 않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행실로 말미암아 땅이 더렵혀진다는 언급(겔36장 17절)이나 공평한 저울과 추에 대한 언급(겔45장 10절) 등은 에스겔서에서 제사에 대한 관심과 일상의 윤리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언제나 이스라엘의 비극은 일상과 제사가 분리된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할 때 필연적으로 일상의 삶이 붕괴되었듯이 일상의 삶이 붕괴는 실제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신다는 뜻인 "여호와 삼마"로 끝맺는데 놀랍게도 이 표현이 가리키는 곳은 성전이 아니라 "속된 땅"이라고 불리는 영역이다. 이곳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차출된 사람들이 거하는 곳이며 이스라엘의 수도이고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일상 생활을 대표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여호와는 성전이 아니라 이 성읍, 일상의 땅에 계신다. 에스겔에게 일상은 여호와가 거하시는 공간이 된다. 일상의 모든 영역이 하나님의 임재의 현장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에스겔이 전하는 예루살렘의 회복에 대한 환상의 절정인 것이다. 

다니엘서의 메시지

2015-05-25 21:46:32


     포로에서 돌아온 포로 후기 시대는 그야말로 꿈과 이상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귀환한 이스라엘은 지난 역사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돌아온 땅에서 하나님이 행하실 새로운 일들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만만치 않았고 때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으로 인하여 극심한 박해에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시기는 알렉산더 이후 헬레니즘이 당시 세계를 휩쓸던 주전 3세기와 2세기였다. 이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자기들끼리 사는 것이 아니라 헬레니즘의 물결속에 함께 살아야 했고 이렇게 변화된 세상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며 모색하여야 했다. 그들은 예언자들을 통해 약속된 미래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 임할 것인지를 고민하며 소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외세에 종속된 현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인해 밀어 닥치는 가혹한 핍박, 그 핍박 가운데 일어나는 신앙의 변절과 배교의 상황 속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던 이스라엘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다. 여기서 묵시문학이 등장하는데 이른바 신구약 중간기의 후기에 해당하는 주전 2세기-1세기는 묵시문학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묵시 문학은 하나님이 우주 전체를 자신의 뜻 아래 두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비록 땅 위에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의 뜻과 계획 가운데 진행하고 있음을 종말론적으로드러낸다. 그래서 묵시문학은 지금 존재하는 세상이 곧 끝나고 초자연적인 방법으로 완전히 다른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를 가지고 있다.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그 날" 역시 하나님이 행하실 결정적인 날과 시대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종말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언자적 종말론은 우리가 사는 이 땅과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질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선포한 약속에 대한 기대가 현실의 극심한 장벽과 핍박에 부딪히면서 묵시문학의 종말론이 태동하였다. 이런 점에서 묵시문학은 포로기 이후 유대인 공동체가 예언자들의 약속을 종말론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묵시 문학의 핵심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의 고난 속에서 믿음으로 인내할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다. 

    다니엘서는 포로기 이후 나타난 묵시문학의 대표적 작품으로서 그 기록 연대가 주전 6세기가 아니라 주전 2세기 중반 안타오커스 에피파네스의 극심한 박해 이후에 기록되었고 이미 일어난 사건을 앞으로 일어날 사건으로 예고하는 "사후 예언"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데 동의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다니엘 7장 이후의 종말에 대한 환상이 다루는 중심적인 내용은 주전 2세기 중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극심한 박해를 배경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 다니엘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임하는 극심한 박해가 이미 하나님이 예고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사건임을 분명히 말한다. 사후 예언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하나님의 손길과 뜻을 따른 행하심으로 해석하려는 것인데 이는 이미 이루어진 역사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진행되는 역사 또 그렇게 진행될 역사 예고로 풀이하면서 고난중에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공동체를 격려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시대 구분과 시간 계산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며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미리 보여줌으로 땅위에 있는 성도들이 현재의 환란과 시험을 견디게 하려는 목적을 지닌 것이다.

 

      다니엘서는 1-6장에서 다니엘을 3인칭으로 한 이야기가 나오고 7-12장에서는 다니엘을 1인칭으로 한 다니엘의 환상이 나온다. 전자가 다니엘의 삶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라면 후자의 환상은 묵시 문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성서는 70인경의 전통을 따라서 다니엘서를 예언서에 포함시키고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다니엘서가 성문서에 놓여있다. 히브리 성경에서 다니엘서가 성문서에 포함된다는 점은 다니엘서가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한 예언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성문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주제로 삶에 대한 교육, 인생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문서들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지혜서와 시편이다. 그렇다면 다니엘서 역시 성문서로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묵상과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다니엘은 요셉이나 에스더와 같이 이방 땅에서 여호와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주제를 반영한다. 결국 다니엘서는 전반부에서 이방 땅에서 시련과 시험을 당하면서도 토라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다니엘의 삶을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모범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끝날에 이루어질 일들이라는 묵시문학적 소재를 가지고 위기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인내하며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