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나라와 정치
하나님나라와 정치
2015-04-29 15:50:51
사전적 의미에서 정치란 통치자나 정치가가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게를 조정하거나 통체하여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 또는 개인이나 집단이 이익과 권력을 얻거나 늘이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으로 활동하는 일이라고 규정된다.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를 "사회를 위한 가치의 권위있는 분배(politics as 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of society)"라고 정의했는데 이 정의에 따르면 정치한 가치있는 것들을 법에 합당하고 권위있게 배분하며 결정하는 과정 또한 개인이나 집단들 사이의 이해 관계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행위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정치는 "배분" "국가" "권력" 이라는 세가지 측면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활동인 것이다. 결국 정치의 목적은 사회정의 실현을 통하여 행복한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치란 인간의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고 우리 삶에서 정치와 무관한 영역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면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치를 통제할 가능성이 줄어들고 민주주의가 훼손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의 정치적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교회의 정치적 역할을 고찰하려면 먼저 교회의 본질과 역할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신앙공동체로서 교회의 본질적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이 증언하는 선교적 과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선교적 과제는 개인의 영혼 구원과 함께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실천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란 개인의 영혼구원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는 실존 전체에 대한 구원이다. 에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인간 실존 전체에 대한 구원이라면 이미 그 구원속에는 세상의 모든 영역과 관련된 교회의 역할이 암시되고 있으며 거기에는 당연히 정치 영역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삶속에서 실천하며 나아가 그 복음을 공공의 진리로 선포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복음을 공공의 진리(the Gospel as public truth)라고 규정한 레슬리 뉴비긴은 그리스도인의 실재는 세상속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복음 이야기를 해석하며 옛 세계의 질서 속에서 새창조를 구현하기 위하여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단순히 인간의 영혼 구원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내용이다.
교회의 정치적 역할과 관련하여 또 생각할 점은 국가와 종교의 관계이다. 오늘날 국가와 종교의 관계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 정교분리의 원칙이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태동하여 18세기 들어 근대국가가 출현하면서 종교과 정치의 역할은 분리되어 왔다. 1791년 미국 헌법 수정 제1종(First Amendment) 에 최초로 실정법으로 명시되었으며 우리나라 헌법도 제20조에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정교분리란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을 의미하며 그 목적은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려는데 있다. 그래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국교의 부인, 국가에 의한 특정 종교의 우대나 차별 금지, 국가의 종교활동 금지를 주요 내용으로 한다. 그동안 로마서 13장 1-7절 그리고 베드로전서 2장 13-17절은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지지하는 본문으로 많이 오용되어 왔다. 로마서 본문에서 바울은 존경해야 할 사람(정치 지배자)을 존경해야 하지만 그들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자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다. 이 본문은 당시의 지배권력에 대해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지침을 제시한 것이지 국가 질서를 정당화하는 보편적인 신학을 제시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본문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권위에 대한 복종을 권면하면서도 황제도 사람이므로 황제 역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정치적 권위에 대한 복종은 주님을 위한 것이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의 정치적 역할은 무엇인가?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지만 그것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세상상 권세가 하나님께로 부터 왔다는 것은 그것의 신성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만일 세상권세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다면 그 정당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정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의무이며 그 복종은 굴종이 아니라 자발적인 복종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의한 국가 권력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은 저항해야 하며 교회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실현되도록 비판적 통찰을 통한 예언자적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가 이런 역할을 감당하려면 먼저 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교화가 교회답게 존재할 때 그 교회는 강력한 정치 역할을 할 수 있다. 정치의 본질이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사회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속에 담겨있다. 하나님나라의 가치인 사랑과 정의, 평등과 화평이 이 땅에서 이뤄질 때 사회정의도 실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정치 역할을 통하여 예언자의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기독교와 정치
2015-04-29 15:37:32
기독교와 정치란 주제는 기독교화된 정치나 정치의 기독교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기독교의 상호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정치신학은 복음의 정치적 해석이나 복음의 정치적 차원을 인식하려는 것이다. 교회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하며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주장은 신앙과 정치를 이분법적 도식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신앙을 현실로 부터 물러난 명상적 태도를 갖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현실에 저항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며 묵종하고 순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치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사랑의 행위이고 정치적 항의와 투신 행위는 가장 정의로운 행동이다.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하며 회피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기만적인 신앙이지만 불의한 현실에 저항하는 행동이야 말로 옳은 신앙이다.
성경에는 정치 참여를 반대하는 듯이 보이는 구절들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정치적 먁략과 관련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출발인 출애굽 사건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정치적 압재로 부터 해방시킨 정치적 사건이었다. 출애굽의 전 과정은 애굽의 왕권과의 대결과 투쟁이었으며 히브리 노예들이 해방되어 자유의 대안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 서술이다.출애굽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이후의 역사들도 하나님의 정의를 구현하는 정치적 맥락에서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성경은 정치적 맥락과 역사를 가지고 기록된 정치적 책이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정의를 이 세상에 구현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는 한 기독교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정치신학
2017-04-06 17:38:35
1. 폴 틸리히는 신학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 대답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말하는 상황이란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었다. 틸리히는 유한성에 갇힌 인간의 비본래적 실존은 비존재의 위협 아래 있는 상황으로 보고 여기에 신학이 답변을 해야된다고 보고 변증법적 신학을 전개했다. 정치신학은 기독교 복음을 정치화하려는게 아니고 복음의 정치적 차원을 해명하고자하는 의도로 출발했다. 정치신학의 다양한 형태들(종교사회주의, 사회복음, 해방신학, 여성신학)의 공통점은 인간의 진정한 상황을 개인의 실존이 아니라 사회로 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의도는 신학이 기능화되고나 도구화되어 이념적 수단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사회주의 이념과 기독교를 결합시키려는 중국의 삼자교회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바르트는 이런 점을 경계하여 신학의 과제는 교회에 봉사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물론 바르트의 제자중 바르트 좌파인 헬무트 골비처는 바르트는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2. 정치신학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요하네스 밥티스트 메츠인데 그는 1965년 스승인 칼 라너와 함께 그리스도인과 마르크스주의자의 대화에 참여하여 "정치신학이란 표현을 여러번 사용했다. 이미 희망의 신학에서 정치신학적 통찰을 보여준 몰트만은 메츠의 정치신학에 적극 동조한다. 고가르첸과 게제만에게 배운 여성 신학자 도르테 죌레도 유럽의 정치신학 운동에 가담한다. 정치신학에 영향을 준 것이 세속화신학인데 반 뷰렌은 세속화 신학이란 복음의 세속적 의미를 규명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성과 속의 구별이 무의미해진 현대사회에서 세속의 삶에서 영적인 의미를 포착하려는 것이 세속화 신학의 의도이다. 이런 세속화 신학에 영향을 준 것이 성인된 세상에서 기독교의 비종교적 해석을 강조한 본회퍼의 후기신학이다. 본회퍼의 영향을 받아 세속화 신학을 추구한 사람들로 우리는 신에게 솔직히의 저자 로빈슨, 세속도시의 저자 하비 콕스 등을 들 수 있다. 세속화 신학외에 정치신학의 등장에 영향을 끼친 신학으로 우리는 신죽음의 신학이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신학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의 선교신학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선교라는 전통적인 선교개념을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라는 새로운 선교개념으로 바꾸어서 하나님이 세상 속에서 행하는 모든 주권적 행위를 하나님의 선교라고 정의했다. 그리하여 선교의 과제는 개종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일로 재해석되었다.
3. 정치신학이란 단지 정치에 대한 신학적 연구나 신학과 교회의 정치화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 속에서 교회의 사명을 강조하며 정치적 영역을 포함하는 사회 제반 영역에 대한 교회와 기독교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청하고 실천하는 신학을 가리킨다. 달리 말해 정치신학이란 죄와 불의가 가득한 세계속에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신학적 노력을 말한다. 메츠에 의하면 정치신학은 두 가지 과제를 가지고 있는데 첫 째는 기독교 신앙의 사유화를 수정하는데 있다. 메츠는 계몽주의와 마르크스 주의의 비판에 맞서 기독교신학은 신앙을 개인의 사적인 문제로 퇴각하였다고 지적하며 기독교의 메시지를 사적이고 내면적인 영역으로 축소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정치신학의 과제라고 말한다. 둘째로는 기독교 메시지에 담긴 공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을 드러내는데 있다. 메츠는 성서의 메시아적, 종말론적 약속들이 가진 역사적, 사회적 현실을 비판하고 해방하는 기능을 되살리는 것이 정치신학의 과제라고 말한다. 메츠에 의하면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 기독교역사에서 발견되는 두가지 잘못된 관계구도를 지적한다. 첫째 구도는 로마제국 이후 서구의 국가종교에서 볼 수 있는 사회와 종교가 일치된 구도이다. 이 구도에서 교회는 사회체제에 동화되고 사회질서를 유지해주는 시녀와 같은 기능을 하고 이리하여 교회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세력과 하나가 되어 힘없는 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일을 직간접적으로 방조한다. 둘째 구도는 교회가 사회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고 인간 내면의 영역, 이른 바 종교의 영역으로 퇴각하여 사회현실에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분리의 구도이다. 이 구도에서 사회의 세속적 영역, 물질적 영역은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된 영역으로 간주된다. 메츠는 이 두가지 관계 구도는 시민종교(civil religion)의 중요한 특징을 구성한다고 말한다. 시민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종교의 기능을 내적영역으로 제한하는 동시에 시민사회의 질서를 유 지하는 종교적 제도로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메츠에 의하면 기독교는 본래 메시아적 종교로서 희망을 잃어버린 시민종교에 대립한다. 기독교는 기존세계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는 새로운 삶의 세게를 세우고자 하는 약속의 종교요 희망의 종교이며 따라서 메시아적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죄와 불의와 죽음이 가득한 현실 사회를 변화시키고 그것을 해방하는 기능을 한다.
4. 몰트만은 자신의 정치신학의 뿌리는 희망의 신학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희망은 세계의 불의한 현실에 안주하거나 타협하지 않고 대립하여 이 약속된 미래를 앞당겨 오기 때문이다.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은 희망하는 미래를 현재의 고난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희망의 실천에 관한 이론이기 때문에 이 희망은 희망의 윤리로 발전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희망의 신학에서 윤리학이 교의학의 부록이나 신앙의 한 귀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가 그 안에서 의미있게 되는 메시아적 컨텍스트를 가지고 있음을 해명하려고 했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서해석학의 중심 과제는 과거의 이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된 미래를 향해 역사적 현실의 변화와 해방을 추구하는데 있다. 따라서 성서의 본문들은 세계의 역사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나라를 향해 변화되는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래서 몰트만은 신학적 해석학은 역사적 해석학, 정치적 해석학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몰트만의 정치신학은 무엇보다 정치와 종교 간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고자 한다. 몰트만이 보기에 아우슈비츠 사건의 이면에는 원인은 루터의 두 왕국설에 있다. 두 왕국설은 하나님나라와 세속의 나라를 분리함으로써 종교를 세속의 정치와 관계없는 사적인 일로 변질시켰으며 종교를 개인의 내면성과 교회의 영역으로 위축시킴으로써 정치는 세속화되고 사회는 양심을 강실한 정체에 맡겨져 버렸다는 것이다. 몰트만의 정치신학의 둘째 목적은 종교를 통한 정치권력의 신격화와 정당화를 깨뜨리고 정치권력의 세속성을 드러내는데 있다. 몰트만의 정치신학의 셋째 목적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다스리는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세우는데 있다. 그는 정치신학의 모든 신학적 진술들은 하나님나라를 이 땅위에 세우는데 그 초점을 맞추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의 파송 의식과 실천을 자극해야 한다고 말한다.
5. 쾰른의 여성신학자 좰레는 불트만 신학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서 자신의 정치신학을 전개한다. 그의 신학은 불트만의 실존신학에서 정치신학으로 다시 여성신학으로 발전해 나간다. 죌레에 의하면 실존신학은 역사적-비평적 방법, 변증법적 신학, 실존촐학을 구성요소로 하고 정치신학은 실존신학을 구성하는 이 세가지 요소에 대한 비판과 함께 형성된다. 이런 점에서 정치신학은 실존신학을 넘어선다. 죌레의 정치신학의 뿌리는 그의 신비신학에서 발견된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비주의는 개인화된 영성과 몰역사적이고 탈속적인 경향을 보여준데 반해 죌레는 신비주의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연합 속에서 아직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의 공동체를 보여주며 이 공동체를 향한 저항과 개혁운동의 원동력이 된다. 죌레는 기독교의 신바와 저항은 먼저 자아의 감옥에서의 해방에서 시작하여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때 우리는 세계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게되고 하나님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죌레는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은 개인적은 금욕, 금식, 고행을 넘어 사회양극화를 초래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잘못된 경제 질서에 저항하는 영성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6. 정치신학은 크게 라가츠, 쿠퍼, 불룸하르트로 대표되는 종교사회주의와 월터 라우센부쉬로 대표되는 사회복음의 신학으로 대별된다. 기본적으로 정치신학은 시민적 기독교 운동이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신학이 아니다. 몰트만, 죌레, 메츠가 주도하는 정치신학은 교회가 세상으로 들어가서 인간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구조라면 요더,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교회중심적 정치신학을 제시한다. 즉 정치적 성격을 가진 교회 자체가 세상과 구별된 정치를 보여줄 때 현실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교회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교회됨이 일차적 정치적 목표이며 이것을 통해 이차적으로 세상도 변화된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
2017-04-12 16:39:38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
- 바르트의 시기별 저작을 중심으로
1. 들어가는 말
칼 바르트는 ‘변증법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20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임에도 그의 신학은 미국이나 한국에서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 이유는 그의 신학이 자본주의 윤리를 위협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 윤리를 지향하고 있고, 또 자유주의 신학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말하는 신학자일 뿐, 역사성을 배제한 신학을 전개한 학자라는 편견과는 달리 바르트는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조합 설립에도 관여했고 종교사회주의자 운동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에도 가입해 활동했다. 히틀러와 나치에게도 반대하여 독일의 그리스도인들과도 반목할 정도로 각종 정치적 사안에 목소리를 냈다.
독일 신학자인 프랑크 옐레(Frank Jehle)는 칼 바르트가 자신의 윤리적이고 정치적 입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며, "칼 바르트는 단지 위대한 신학자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20세기의 정치윤리학자 중 가장 깊이 성찰할 만한 의미가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고 밝힌다. 따라서 본 글에서 바르트의 정치신학이 그의 생애의 각 단계마다 어떻게 작품과 강연을 통해 드러났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생애별로 보는 바르트의 정치신학
2.1. 초핑기아(Zofingia) 협회 활동(1904)과 정치 신학적 사고
1886년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난 바르트는 기독교 사회주의와 경건주의적인 분위기를 가진 집안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바르트의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은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조금씩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베른에서 신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제출한 논문인 <고대 인도의 종교적 특징>에서 국가보다 종교를 우위에 두는 생각을 드러냈다. 베다인 종교의 특징이 카스트 제도라 인정하면서 힌두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극명하게 인식하였다. 그는 로마서 3:22의 인간은 모두 죄인이고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16세기 예수회의 선교방침에 카스트 제도와 같은 반인권적 경향이 예배에서 표출됨으로서 계급적 차별을 자행했다는 신학적 비판을 신랄하게 하고 있다. 이 논문은 이후에 성숙하게 될 바르트의 사회-정치적 사상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1904년 바르트는 스위스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학생조합인 초핑기아 협회의 베른 지부 회원이 되었다. 초핑기아 협회는 비판적 연대라는 인식을 가지고 교회와 신학을 아우르면서 스위스의 지적이고 정치적인 사상을 대변하고 있었다. 바르트는 1906년 1월 20일 이 협회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논문을 가지고 <초핑기아와 사회적 질문>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이 논문에서 그는 협회에 가입비용과 이후의 제반 비용이 필요 이상으로 과도한 탓에 일정 계층 이상의 사람들만 가입하는 병폐를 낳는다고 비판하면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가입할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더불어 스위스에서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현실과 독일의 군국주의와 러시아의 폭력정치도 거론하며 비판하였다. 그는 누가복음 10:28 이하를 언급하면서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신성과 인류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였다.
2.2. 자펜빌(Safenwil)에서 목회와 정치적 활동(1911-1921)
1911년 25세의 바르트는 아르가우 지역의 자펜빌에 목회자로 부임했다. 그는 그곳에서 대략 10년 동안 목회했는데 이 기간은 유럽의 혁명적 격변기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의 출현으로 극심한 착취와 인권에 반하는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임에도 당시 교회에서는 여전히 영적인 구원관에 머물면서 현상유지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신학교와 초핑기아 활동을 통해 라가츠(Leonhard Ragaz)와 쿠터(Hermann Kutter) 그리고 블룸하르트(C. F. Blumhardt) 등의 종교사회학적 영향을 받음으로써 노동자를 억압하는 반인간적인 사회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바르트가 목회한 자펜빌 교회의 교인들 다수는 가난한 직물 노동자였다. 그들은 추가 수당 없이 하루 12시간씩 일해야 했고, 일을 마치고도 빨래를 받아가 집에서도 새벽까지 일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들의 임금은 현저히 낮았으며 지각을 하면 2시간 정도의 임금을 벌금으로 내야했다. 노동자들의 협상요구를 거절한 사용자측에 대항해 노조가 설립되었지만 해고에 대한 위협과 집회 장소를 제공하지 않아 활동이 위축되기도 했다.
바르트는 1911년 12월 17일에 자펜빌의 노동조합 연맹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회운동>이라는 강연을 했다. 이 주제는 교회와 신학의 정치적 실천과의 관련성에 관한 질문“이었다. 자페빌의 노동자들과 고용주간의 계급투쟁이라는 현실적 문제에 직면한 바르트가 ”교회의 발언과 활동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을 갖는 분명한 실천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이 시점이었다. 그는 “지금 예수는 사회운동이며 사회는 예수”라고 말하면서 예수와 노동자 운동을 동일시했다. 그가 제시하는 예수는 노동자로서 “예수 인격의 본래적인 내용은 사회운동”이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는 사회현실을 전복하려는 투쟁을 신학적으로 연결하고자 예수를 사회운동과 결부시켰다.
그렇게 바르트는 기독교를 관념적으로만 바라보기보다는 현실참여의 문제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복음으로 보았다. 즉 19세기와 20세기의 사회운동은 예수와 함께 역사 속으로 들어간 성령의 능력에 의해 직접적으로 추진된 것이다. 사실 성령론(pneumatology)은 1915년에서 1921년까지의 바르트를 새로운 신학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목회자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기에 이러한 강연을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자펜빌의 상황에 빨리 적응한 것을 알 수 있다.
1913년 자펜빌의 노동조합은 바르트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나 확고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지 못하고 목회자로서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바르트는 즉각적인 확답을 주지는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목양을 해야 하는 목회자의 입장과 운동가로서의 위치가 주는 긴장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제안은 바르트 자신의 신학과 정치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시대의 긴급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서에서 찾으려 했으나 성서는 직접적인 답을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하나님의 말씀에 천착하게 되었고 그것이 새로운 출구를 마련해 주었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는 자본주의와 군국주의가 판치는 세계사적 전환기에서 사회와 교회를 바로 세우는 사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판단했다.
드디어 1915년 1월 26일에 바르트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하였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펜빌에서 세 곳의 노동조합을 세웠고 노동자들의 투쟁을 조직하고 그들을 교육시켰다. 그는 노동자들을 이론적으로 무장시키기 위해 자신이 사회주의 서적들을 깊이 연구하면서 노동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런 결과로 자펜빌의 지도층에 의해 “자펜빌의 빨갱이 목사”로 불려 지기도 했다.
2.3. <로마서주석 1판(1919)>, <로마서주석 2판(1922)>에서 정치신학
자펜빌에서 목회를 하던 바르트는 1991년에 <로마서>를 출판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의 결별을 선언하였다. 자신의 스승인 하르낙(Adolf von Harnack)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독일 사회민주당이 전쟁을 찬성하는 것을 보고난 1914년의 심경변화 이후의 일이었다. 이제 바르트는 자신만의 신학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자펜빌에서의 목회 경험과 정치적 노동운동으로 인해 교회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책임과 신학의 정치적 역할을 숙고한 그는 “정치적인 것을 내포하는 신학”을 사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마서 주석 1판>에서 바르트는 인간이 자의적으로 선포한 자유라는 허구의 이데올로기와 그 실천이 참된 자유와 양립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를 정치적으로 비판한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과의 관계는 부정적이 되었으나 그렇기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날 수 없다고 본다.
바르트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의 부정적인 관계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종교적 소유의 대상이 되지만 결코 인간의 소유물이 되지는 않으신다. 그러자 인간은 하나님과 동일화하려는 힘들을 만들어내고 결국 그 힘에 예속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바르트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이해를 정치적인 맥락에서 바꾸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그릇된 관계로 인한 영향은 정치적 귀결을 초래하며, 그것은 사회 안에서 경험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여기에서 말한 정치적 귀결은 자본주의, 국가 그리고 군국주의를 말한다. 바르트는 자본주의는 물질적 소유가 힘으로 나타난 제도로서 바르트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비판한다. 자본의 절대화가 노동자를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고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바르트는 마태복음 19:24에서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그는 교회가 이러한 불의한 자본 중심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한 정의와 연대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사회민주주의는 예수와 일치하며,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사회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또한 국가에 대해서도 바르트는 부정적이었다. 그는 국가의 존재가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부정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국가 자체를 악으로 규정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로마서주석 1판>에서 바르트가 보는 국가는 계급으로 구조 지어진 체제이다. 국가는 여러 제도를 통해 가진 자들이 아래 계급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정치적 행동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착취는 자본주의의 지배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체제가 주는 사회 내부의 불화는 국가의 정치적 불화를 촉진하면서 군국주의를 부상시킨다. 국내적으로는 국민을 억압하고 국외적으로는 전쟁정치를 촉발하면서 폭력국가의 본질을 드러낸다. 바르트에 따르면 제1차 세계대전은 폭력국가들 사이의 폭력정치로서 어떠한 정당성도 가지지 못한다.
<로마서주석 1편>에서 살펴본 바르트의 정치신학은 “하나님이 인간과 사회를 객관적으로 움직이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현실과 세계를 성찰한다는 것은 기독교가 갖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함의를 사회와 정치의 구조를 혁신하는데 활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바르트는 ‘하나님의 혁명’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당시의 상황에서 말하자면 정치적 참여를 의미한다. 그와 같은 정치적 참여가 목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것은 앞서 말한 인간의 소외가 회복되는 자유와 평화의 나라이다. 바르트는 그 나라의 체제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 생각했다.
<로마서주석 2편>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인간에 관계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위기로 다가온다고 보았다. 이것은 실존적 차원에서 관계를 바라보는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은 ‘질적으로 무한한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일명 ‘위기신학’으로 불리는 바르트의 핵심적인 신학의 내용은 인간의 현존질서를 긍정하는 것과 동시에 그것을 부정하는 하나님의 부정이 결국에는 하나님의 긍정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로마서주석 2편>에서도 바르트는 ‘하나님의 혁명’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를 위한 시위의 정치로 저항과 개혁을 말한다. 그러나 바르트는 개혁정치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기존질서를 부정하는 것은 새로운 긍정성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로마서주석 2편>에서 바르트의 개혁사상을 관철되지 못했다. 더구나 인간과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과의 질적 차이가 낳은 변증법적 신학은 정치적 행동을 정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점에서 바르트는 정치적 혁명주의에도 반대했고 이데올로기화된 종교사회주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인 것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사태적합적(sachlich)”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바르트가 정치에 무관심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는 “비이데올로기적이고 철저히 사태 그 자체에 뿌리박힌 정치”를 지향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로마서주석 2판>의 신학을 판넨베르크가 “하나님의 나라를 역사 밖의 게토 지역으로 추방시켜버린 신학”으로서 결국 역사 상실을 초래했다고 말한 것이나, 이 문제를 바르트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사고방식을 채택한 결과라고 보면서 자연계시에 반발한 바르트의 신학이 세계와 역사의 지평에 대한 논의에서 차지할 자리는 없다고 보는 학자도 정당하지 않다.
2.3. <오늘의 신학적 실존(1933)>과 ‘바르멘 신학 선언’에서 정치신학
1932년 사회당에 가입한 바르트는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자 <오늘의 신학적 실존>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히틀러와 나치에 저항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일깨우는 이 책자는 독일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바르트는 독일교회가 히틀러의 독재를 지지하는 일에 전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본래의 사명인 신학적인 실존에서 벗어나 그 명령권 안에 들어간 것이 잘못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나치화된 조직과 아리안 조항의 배격을 주장하면서 교회가 감당해야 할 신학적인 실존의 자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했고, 이것은 독일의 ‘고백교회’ 탄생의 기초가 되었다. 1934년 5월 30일과 31일, 바르멘에서 열린 ‘고백교회’ 총회에서 바르트ㅢ 주도하에 작성된 ‘바르멘 선언’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바르멘 신학선언’을 통해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과 교회의 선포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하였다. 그는 이 이외의 다른 이념이나 제도나 인간에게 신적인 위치를 부여하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하며, 히틀러와 국가 사회주의 이념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덧입히려는 독일 그리스도인 연맹을 비판하였다. 바르트의 이러한 선언은 거짓 이론과 싸워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놓여 있었던 당시 독일 교회에 던진 예언자적 외침이었다.
‘바르멘 신학선언’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이에 날카롭게 반응하였던 선언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를 매우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바르트의 신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강조하기 때문이었다. 바르트는 하나님께서는 항상 오늘 이 자리에서 새롭게 활동하시는 분이시라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특정한 이론이나 체계로 굳어진 하나님이 아닌, 언제나 새로운 일들을 행하시며 오늘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 손에는 성경을, 또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지금 하나님께서 어디에서 일하시고 계시는지를 파악해야 한다.”라는 그의 유명한 명언은 이러한 바르트의 신학 정신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히틀러의 독재라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바르트는 사회 속에서 말씀하시고 활동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재발견한 신학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열광적인 반응과 일의 진행과는 별도로 바르트는 “마치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신학만을 하는 것이 오늘날 중요하다”고 의견을 표함으로써 교회가 사회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냐는 의구심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바르트는 “교회에 위탁된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듣고 그 말씀을 교회와 사회에 바르게 선포하고 증언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르트가 말한 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시대를 향해 선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바르트의 의도는 교회의 선포에는 이미 정치적인 성격을 이미 내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순수한 선포와 가르침은 정치적인 상관관계에서 이해해야 한다.
2.4. <교회교의학(1935)>과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에서 정치신학
‘바르멘 신학 선언’이 하나님의 활동을 세상의 모든 문화적 활동이나 정치적 이념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키고 성경과 교회 속에만 그 가능성을 제한시켰던 것이 지나친 신학적 협소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을 통해 이 세상 가운데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폭넓게 바라보게 되었다.
1933년부터 집필하기 시작한 교회교의학은 단지 ‘교회를 위한 신학’만이 아니라 신학의 정치적 함의를 포함하고 있다. 즉 <교회교의학>은 교의학으로 그리고 윤리학으로 정치적 사안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과 정치참여를 통해 상황과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이런 “정치적 실천의 이정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 구성요소가 된 것은 1935년에 나온 <교회교의학>의 출간 때부터였다. 이 저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현실성에 대한 사회적 개념”을 통해서 하나님이 실재적으로 세계를 변혁하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교회교의학>이 그리스도론과 함께 화해론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르트가 그의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사회성과 인간의 사회성”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활동을 “하나님의 혁명”으로 지칭하면서 그것을 인간의 혁명과 연결하고자 하였다. 인간조건의 상황혁신의 지향은 이러한 하나님의 혁명에 기댄다. 하나님의 혁명과 인간조건의 혁신 사이의 “유비 이론”이 혁명을 가져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돌입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돌입 사건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면서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건이 되기도 한다. 또한 세상과 하나님의 화해 활동은 단순히 정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을 함축한다. 왜냐하면 화해는 인간의 모순을 폭로하고 제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탁월한 변혁이자 혁명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치를 만들어 간다. 단네만에 따르면 화해자 예수 그리스도는 사회의 위기에 대한 희망이고 하나님의 화해 활동은 그가 역사 속으로 돌입하게 된 것은 정치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자본으로 인한 인간의 소외가 자본주의의 폐해임을 점차 인식하게 된 바르트에게 현실은 여전히 화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사회였다. 여기에서 바르트는 구체적으로 인간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치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를 숙고했다. 그래서 바르트는 시민의 연대성과 사회의 노동질서를 좀 더 인간적으로 조직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회적 민주주의”라는 제3의 길을 구상했다. 이와 같은 화해가 이루어진 사회를 위한 투쟁을 통해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혁명을 현실에서 이루어간다고 바르트는 믿었고 실천했다.
2.5.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1946)>
바르트는 교회와 국가를 공통적으로 공동체로 바라보면서 각각의 정의를 내린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부름 받아 모인 사람들의 집단으로서 그리스도인 공동체인 반면 국가도 하나의 ‘시민 공동체’로 불려 지는데 국가는 “인간을 위한 정치, 인간의 자유와 사회의 정의, 평등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1919)에서 국가가 교회의 상충의 관점을 탈피하여 교회와 국가의 유비를 강조하면서 두 체제가 다르지 않다고 판단한다.
바르트는 루터처럼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지 않는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교회와 국가는 상관성이 있다. 하나님이 세우신 두 개의 기관으로서 교회와 국가는 서로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래서 교회는 국가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국가는 교회의 말씀 선포와 하나님 나라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국가와 복음이 상관없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시민 공동체인 국가를 위해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기도는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가장 적극적인 참여이다.
3. 나가는 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바르트의 정치적 유산은 여러 신학자들(Dannemann, Marquardt 등)이 주장하듯이 이론적인 신학이 아니라 몸으로 자신의 신학의 내용을 실천하려고 애쓴 행동에서 나왔다. 신정통주의 신학자라는 평판에만 기대지 않고 인간을 억압하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고 하나님 나라 신학을 ‘하나님 나라의 정치신학’으로 발전시켜 실제화하려 노력했던 바르트는 행동하는 신학자였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바르트는 신학과 정치라고 답했다 고 한다. 그가 말하는 정치는 하나님의 혁명의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런 정치신학의 면모는 해방신학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프랑스의 신학자 자크 엘륄도 바르트 신학의 영향을 받아 현대 기술사회를 고발하고 현실정치에도 참여하는 등의 사회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이 말해주듯이 기독교는 단순히 인간의 내면을 위로하는 종교만이 아니다. 기독교 복음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해를 통해 인간과 더불어 세상을 변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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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Jehle Frank., 『편안한 침묵보다는 불편한 외침을』 (Lieber unangenehm laut als angenehm leise: Der Theologe Karl Barth und die Plotik 1906-1968), 이용주 역, 서울: 새물결플러스, 2016(1999).
4. 김균진, 『현대신학사상: 20세기 현대 신학자들의 삶과 사상』, 새물결플러스, 2014.
5. 오영석,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 연구”, 『한신논문집』 13 (1996), pp.25-69.
6. 김애영, “K. 바르트 신학의 정치사회적 해석: F.W. 마르쿠바르트를 중심으로”, 박사학위논 문, 서울: 이화여자대학교, 1989.
7. 이상헌, “칼 바르트의 정치신학 이해”, 석사학위논문, 서울: 한신대학교,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