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모세 오경 이야기

메르시어 2023. 5. 9. 02:03

창세기: 아브라함 이야기

2015-04-11 21:27:24


   하나님은 바벨론의 우르에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 내신다. 당대 문화와 힘의 중시지이던 바벨론으로 부터 변방의 가나안으로 불러내셔서 제국의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도시의 번영이 아니라 유목하여 떠도는 한 사람과 그 후손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시작하신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들은 이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생을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살아간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제국의 중심인 바벨론에서 불러낸 민족의 조상 이야기라면 출애굽은 또 다른 세계의 중심은 애굽에서 불러낸 민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바벨탑 사건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셈의 족보인데 이 족보 이야기는 긴 세월이 흘러감을 보여준다. 이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흘러가는 긴 세월 속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나타난다. 셈의 족보는 데라를 거쳐 아브라함에게 이어진다. 셈으로 부터 흘러오던 세월과 역사는 이제 아브라함에게서 그 의미를 찾게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브라함의 순종은 창세기의 원역사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이라는 두가지 약속을 하시는데 이 약속은 이후에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복이 된다는 의미는 땅의 모든 민족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과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민적, 비벨탑을 짓고 죄된 본성으로 헤메던 모든 민족에게 복주시고 구원화시는 통로가 되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열방을 위한 순종으로의 선택이요 부르심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데라는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중도에 하란에 머물러 살다가 죽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떠나게 된다. 아마도 데라의 이주는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아모리족의 대이동과 맞물린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란에 도착하여 더 이상 이동하기를 포기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가나안으로 갔고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았다. 결국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약속을 붙드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땅의 모든 백성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하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는 단지 그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백성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은 약속의 성취를 완전히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기다리며 살았다. 이삭이 야곱에게 주는 축복이나 벧엘의 야곱에게 주신 약속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동일하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은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으며 요셉에게 당부하고 요셉도 이 약속을 믿고 자신의 뼈를 가나안으로 가지고 갈 것을 당부한다. 이것은 창세기 전체가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라는 주제를 가진다고 볼 수 있고 이것이 출애굽기를 비롯한 다른 오경의 책들과 연결되는 점일 것이다.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붙들고 위태로운 현실을 견디는 믿음의 세원을 통하여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이 요셉의 유언으로 끝난다는 점은 창세기가 약속을 기다리는 책이란 점을 부각시켜 준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 성취는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평생 그 약속을 붙들고 그 성취를 기다리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이런 점들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가. 믿음의 핵심은 약속이다. 약속을 받은 순간 그 약속은 이미 성취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땅과 자손, 그리고 열방에 미치는 복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창세기 18장 18-19절은 이 약속의 의미를 보여준다.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여 함이니라" 창18:18-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 곧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는 것은 공평과 정의를 행할 사람이 필요한 까닭이고, 땅을 주시는 것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고 이루어 갈 공간이 필요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살 때 열방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은 천하 열방을 위하여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특권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을 행하는 삶인 것이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 공평과 정의는1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으로 소개된다.(시33:5, 89:14, 97:2, 99:4) 아울러 공평과 정의는 다윗의 뒤를 이을 왕의 통치 원칙이라는 점에서 메시아의 통치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닮는 삶이요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삶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씨와 땅의 약속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씨가 땅에서 공평과정의를 행하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로 연결된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공평과 정의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삶이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약속은 한 민족에 대한 약속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큰 일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요셉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요셉을 통하여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기근에서 구원을 받고 번성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애굽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의 약속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열방에 미치는 복의 약속이 요셉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삶의 결과요 열매를 보여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알았기에 자신의 억울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살 때 그로 말미암아 열망이 구원을 경험한다는 진리를 요셉의 생애는 잘 보여준다.

각주 1

공평(미쉬파트)는 법적 제도적 측면의 정의라고 볼 수 있고 정의(쩨다카)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정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는 사회윤리나 사회정의라는 공적인 개념이전에 여호와의 통치 원칙인 것이다.

  1. 공평(미쉬파트)는 법적 제도적 측면의 정의라고 볼 수 있고 정의(쩨다카)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정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는 사회윤리나 사회정의라는 공적인 개념이전에 여호와의 통치 원칙인 것이다. [본문으로]

출애굽기: 해방과 자유

2015-04-16 19:23:51


애굽에서 해방

  출애굽기의 시작은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 가혹하고 극심한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이스라엘의 브르짖음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그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셨던 언약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기억하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그동안 잊어버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우신 구원 행동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건지시려고 하나님은 한 사람 모세를 부르신다. 출애굽 과정이 모세가 차지하는 역할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것은 모세 개인의 위대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아주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그저 개인의 위대함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 무엇이며 그를 통해 열방이 복을 받게되는 하나님의 약속을 말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이며 그의 순종과 삶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인도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애굽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약속을 기억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사역이었다.

  7일간의 창조 이야기가 문학적 패턴을 따라서 서술되었듯이 애굽에 내린 열가지 재앙 이야기도 문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패턴을 보여준다. 이러한  패턴을 통해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영역을 주관하시고 장악하고 계심이 증거되고 있다. 그리고 열번째 재앙은  이전의 재앙 이야기와 분리되어 서술되고 있다는 점에서 재앙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열번째 재앙인 유월절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며 그들의 해방을 기리는 날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열가지 재앙을 비롯해 하나님이 홍해르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증거하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드는데 그 의미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언약과 율법

 

  출애굽기 18장까지가 애굽에서 노예 생활과 애굽을 떠나 광야를 거쳐 시내산에 이르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면 19장 부터는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을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무엇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고 노예에서 해방된 백성들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은 은혜를 받기 위해 지켜야 할 것싱 아니라 은혜를 받아 자유케 된 후 하나님의 통치 아래사는 영광스러운 삶의 길을 걸어가게 하는 지침들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서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위대한 구원을 언약의 전제로 하고 있다. 율법은 조건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로 한 것이고 다만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주어진 것이다. 십계명(20장1-17절) 이후에 20장 22절부터 23장 33절까지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보다 세부적인 지침과 명령들을 소개하는데 이 부분을 가리켜 언약법 혹은 언약법전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십계명의 원칙을 세부적으로 적용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막

 

   율법이 주어진 이후에는 성막 이야기가 나오는데 25장부터 31장 11절까지는 성막과 그 안에 비치되는 물품들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지침이 주어지고 35장 4절부터 39장까지는 그러한 지침을 따라 실제로 성막과 물품을 만드는 내용이 이어진다. 성막 이야기에 이렇게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내용이 반복되는 것은 성막 제도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 것이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착오없이 지어졌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성막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마참내 성막이 완성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임하였고 성막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이후로 이스라엘의 진로를 인도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특별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막은 단순히 하나님의 앰재만이 아니라 그것에서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만나시며 제사제도를 통해 이스라엘을 용납하시고 음혜를 베푸시는 장소였다. 성막은 거룩성과 초월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임재를 언약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금송아지 사건

 

   성막 이야기의 한 가운데인 32장-34장에는 금송아지 사건이 놓여있다. 금송아지 사건의 핵심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든 것이다. 우리를 위한 신, 우리의 목적과 바램을 이루어주는 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론에게 요구한 내용의 본질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나서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한 신이라고 예배하면서 여호와의 축제를 지키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이들은 여호와를 섬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눈으로 보고 얘배할 수 있는 여호와의 형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자신을 위한 신,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위한  신,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신, 이것이 바로 금송아지 형상의 의미였다. 성막 이야기 한 가운데 금송아지 사건이 놓임으로써 성막과 금송아지가 확연하게 대조되고 있다. 성막이 하나님이 제정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이라면 금송아지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하나님 예배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예배 방식이 확연히 대조되고 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지만 어떤 형상으로 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막제도를 세우셨지만 금송아지라는 종교제도는 배척하신다.

레위기: 거룩과 거룩한 삶

2015-04-16 19:24:14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자유를 주셨고 시내산에 도착한 후에는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규례들을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심을 알려주는 성막을 세우게 하셨는데 당연히 그 다음에 다루어질 이야기는 이 성막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갈 것인가 하는 것인데 이 내용을 다루는 것이 레위기이다.  레위기의 히브리말 제목은 "봐이이크라"인데 이 말의 의미는 "부르셨다"란 뜻으로서 레위기를 시작하는 첫 문장의 첫 단어이다. 하나님은 성막에서 모세를 부르셨고 모세에게 이제 성막에서 드려져야 할 제사와 규례들에 대해 말씀하신다. 레위기는 오경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는 레위기가 오경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창세기가 출애굽 사건의 배경으로서 출애굽 이전의 과거 이야기이라면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하여야 할 미래의 삶에 대한 모세의 고별설교를 다루고 있는 미래의 이야기이다. 

  이런 점에서 창세기와 신명기는 오경의 출애굽기,레위기, 민수기와 구별되는 위치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는 애굽시절과 출애굽, 광야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이 형성되고 하나님이 그들과 언약을 맺는 언약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기 19장에서 시내산에 도착하고 민수기 10장 11절에서 비로서 시내산을 떠나는데 그렇다면 출애굽기 19장부터 민수기 10장 10절까지의 이야기(시내산 본문)가 전부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과 관련된 내용들인 셈이다. 이렇게 보면 오경의 핵심이 시내산 본문이고 시내산 본문의 가운데 위치한 레위기가 시내산 본문의 중심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의 근본이 오경이고 오경의 핵심이 레위기라면 레위기는 구약의 핵심중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1 그런 점에서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나아와 구약의 핵심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에수님이 레위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출애굽기 6장 6-7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목적이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라는 관계를 맺으려는 것임을 알려준다. "내 백성-너희 하나님"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나라의 삶,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규례들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이 행하고 지켜야 할 삶의 내용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 규례를 지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이며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레위기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규례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2레위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거처로서 마련하신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의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삶이 성막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들의 모든 삶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따로 구분된 삶을 가리키는 핵심적 인 용어가 "거룩"이다.3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의 기본적 의미는 따로 떼어둠, 구별함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특정한 목적을 위해 따로 떼어두거나 구별해두면 그 물건은 거룩한 물건이 된다. 그러므로 거룩은 그 물건 안에 원래 들어있는 어떤 성질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위해 구별됨으로 거룩해진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거룩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이 원래 거룩한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은 내재적이지 않고 관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관계된 사람들, 물건들, 행동들, 장소들, 시간들이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하여 거룩해진다. 4그래서 레위기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라"고 말하는 것이다.5 그런 점에서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한 삶의 근본에는 구별된 삶이 놓여있으며 이 삶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세상과 "다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거룩을 주제로 가진 레위기는 16장을 경계로 하여 이전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제사를 통하여 나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하고 있고6 이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한다고 볼 수 있다.7 특히 후자의 이야기는 거룩한 삶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흔히 성결법전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자원하는 마음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를 따라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원으로 드리는 제사들로는 번제, 소제, 화목제가 있고 의무적으로 드리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이러한 제사 규례들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자신을 살피며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제사규례를 마무리하는 16장에는 속죄일 규례가 나오는데 이 날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악을 정결케하는 날이다. 속죄일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은 새롭게 되어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은혜와 힘을 얻게 된다.

 

  성결법전이라 불리는 17장 이후의 내용은 제사와 예배영역만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올바른 관계들도 거룩에 포함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하심처럼 이스라엘도 거룩하라는 명령으로 시작되는 19장은 삶의 다양한  국면들이 하나님을 본받는 거룩한 삶과 관계된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부모를 경외하며, 헛된 신들을 섬기지 않고, 화목제 제사를 바르게 드리고,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것, 이웃의 품삭을 제 때 주는 것, 불의한 판결을 하지 않는 것, 이웃을 돌보는 것, 노인을 공경하는 일,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 저울을 속이지 않는 일, 등이 모두 거룩한 삶의 내용이다. 이를 보면 거룩은 단지 제의적인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모든 생활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나타는 이스라엘 절기의 기본은 주일마다 반복되는 안식일이다. 안식일에 사람들은 하루를 일하지 않고 쉬면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쉼을 누린다. 이러한 안식일의 정신은 매년마다 반복되는 절기들에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으며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에도 이어진다. 7년 안식년이 일곱번 자난 다음해인 50년째 되는 해는 희년(Jubilee)으로 선포된다. 희년이 되면 자유가 선포되고 모든 이스라엘은 조건없이 원래의 땅을 되찾고, 원래의 가족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러한 희년 규례의 근본정신은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레25:23)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점이다.(레25:55) 땅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며 다만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잠시 맡은 자로 살아감을 보여주는 것이 희년법이다. 이러한 삶의 긴장이야말로 이스라엘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식의 본질이다. 애굽에서는 물론이고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은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들에게 땅이 분배되었지만 하나님은 땅의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 땅의 거류민임을 분명히 하신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그리고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거류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그네로 산 아브라함과 조상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과도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신앙의 본질적인 차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나그네와 거류민에 비유한 것은(벧전 2:11) 구약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할 것이다. 베드로전서의 이 비유를 구약적 맥락으로 이해한다면 그  표현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임시적이고 곧 죽음이후의 영원한 나라로 갈 것을 강조하는 의미이기 보다는 이 땅에서 우리가 지닌 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삶을 강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거류민과 나그네"라는 정체성을 이 세상살이의 덧없음으로만 풀이하는 것을 적절치 않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서의 땅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충성되이 열심이 희년정신을 실천하고 살아갈 때, 그리고 자신이 그 땅의 거류민임을 늘 기억하고 깨달을 때 자신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희년법을 훼손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베드로 전서에서 제어하라는 "육체의 정욕"이란 이 세상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이 땅에서 가능한 많은 것을 쌓으며 누리려는 욕심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의 희년법의 정신은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것이며, 이것이야 말로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자세이어야 할 것이다.

 

  레위기 1-16장의 제사규례에 대한 이야기는 16장의 속죄일 규례로 마무리되고 17-26장의 성결법전은 23-25장에 나타나는 절기규례로 마무리 된다.  그런데 이러한 희년은 50년째 속죄일에(7월 10일)에 시작된다. 희년이 선포되는 날은 일곱 안식년이 지난 해의 대속죄일이다. 이렇게 보면 레위기 전체가 속죄일과 희년으로 요약될 수 있고 또 희년이 속죄일에 선포된다는 것은 레위기의 모든 메시지가 결국 희년으로 종합된다고 볼 수 있다.8 그러므로 희년은 단지 사회적 차원의 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사는 거룩한 삶의 본질을 의미하는 법이다. 희년은 일곱 인식년 다음에 있고 일곱번의 안식년은 매주 안식일과 매년  절기를 통해 채워진다. 그러므로 하루와 한 주, 한 달, 한 해가 쌓여 나가는 일상의 삶이 희년의 근본이다. 일상의 날들이야 말로 희년의 참된 정신이 나타나야 하는 시간들이다. 하루의 삶속에서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 하나님께서 모든 백성에서 고르게 기업을 주셨다는 점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삶이 희년을 바라는 삶의 근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을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이 희년마다 새로 회복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 땅에서 그 자손들이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희년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곧 하나님나라를 상징한다.

각주 1

레위기 중에서도 거룩에 대해 가르치는 레위기 19장에 레위기의 중심이고 그렇다면 구약의 중심적 가르침은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2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규례와 레위기에서 말하는 제사규례는 모두 이스라엘의 삶의 규례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 두가지 규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각주 3

거룩(holiness)의 반대 개념은 속됨인데 이 의미는 부정적이라가 보다는 common, or Normal 의 의미로 볼 수 있다. Normal, common 한 사람, 물건, 시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은 내재적이지 않고 관계적이고 그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각주 4

거룩이 관계적이라면 그관계는 쌍방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거룩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이라면 하나님의 거룩또한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거룩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께는 거룩은 관계적이 아니고 내재적으로 보면서 그 거룩의 개념을 초월적인 절대타자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도 관계적으로 본다면 그 거룩은 이스라엘과의..

각주 5

거룩에 대한 요구의 근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는 요구의 근거가 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다는 것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의미이고 그러므로 언약의 상대방인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아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

각주 6

11-15장에는 정결에 대한 규례가 나타나는데 이는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공정하게 다루는 새로운 세상의 윤리를 보여준다.

각주 7

1-16장은 제자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파생된 거룩이라면 17-27장은 명령된 거룩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거룩의 두차원인 파생된 거룩에서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런 구조는 로마서 1-11장과 12-16장의 관계와 유사하다.

각주 8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삶은 종교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 삶의 전 영역에 해당하는 총체적인 거룩이다.

  1. 레위기 중에서도 거룩에 대해 가르치는 레위기 19장에 레위기의 중심이고 그렇다면 구약의 중심적 가르침은 "거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2.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규례와 레위기에서 말하는 제사규례는 모두 이스라엘의 삶의 규례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이 두가지 규례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본문으로]
  3. 거룩(holiness)의 반대 개념은 속됨인데 이 의미는 부정적이라가 보다는 common, or Normal 의 의미로 볼 수 있다. Normal, common 한 사람, 물건, 시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거룩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거룩은 내재적이지 않고 관계적이고 그 관계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본문으로]
  4. 거룩이 관계적이라면 그관계는 쌍방적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스라엘의 거룩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이라면 하나님의 거룩또한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거룩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하나님께는 거룩은 관계적이 아니고 내재적으로 보면서 그 거룩의 개념을 초월적인 절대타자로 규정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도 관계적으로 본다면 그 거룩은 이스라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을 의미하는 거룩이 될 것이다. [본문으로]
  5. 거룩에 대한 요구의 근거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다. 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이스라엘에게 거룩하라는 요구의 근거가 되는 것일까?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관계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신다는 것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의미이고 그러므로 언약의 상대방인 이스라엘에게도 언약에 충성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아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룩한 삶이란 언약적 삶 곧 언약법에 충실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문으로]
  6. 11-15장에는 정결에 대한 규례가 나타나는데 이는 일상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문제들을 공정하게 다루는 새로운 세상의 윤리를 보여준다. [본문으로]
  7. 1-16장은 제자로 하나님께 나아감으로 파생된 거룩이라면 17-27장은 명령된 거룩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거룩의 두차원인 파생된 거룩에서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이런 구조는 로마서 1-11장과 12-16장의 관계와 유사하다. [본문으로]
  8.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삶은 종교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 삶의 전 영역에 해당하는 총체적인 거룩이다. [본문으로]

민수기: 광야에서

2015-04-16 19:24:40


  히브리말 성경에서 민수기의 첫 단어는 "베미드바르"인데 그 뜻은 광야이다. 이 제목은 광야 길을 걸아가야 했던 이스라엘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제목이다. 광야는 하나님과 함께 걸아가는 길이면서 때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런 길이기도 하였다. 시내산에 이르러 언약을 맺고 성막을 건조하고 제사제도를 모두 받은 이스라엘은 드디어 가나안을 향해 광야 길을 떠난다. 길을 떠나기 전에 인구조사를 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구성원 각자가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자기가 맡은 몫을 감당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내산에서의 일들은 상당히 상세하게 서술되었지만 시내산을 떠나 가네스에 이르는 40년의 긴 세월은 10장 11절에서 20잘 13절까지 간략하게 다루어진다.

 

   40년 광야 시절의 이스라엘 하면 곧장 떠오르는 말이 불평이다. 시내산에서 성막을 세우고 하나님의 임재롤 경험한 후 출발한 희망창 여정이었지만 광야에서 직면하는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불평한다.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불평, 걸어가는 광야 길의 곤고함에 대한 불평에서 비롯되어 불평이 쌓이다 보니 모세의 지도력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약속의 땅에 대한 의심이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약속의 땅에 대한 악평과 두려움이 터져나왔고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차라리 새로운 지도자를 뽑아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까지 일어났다.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을 경험한 그들이었지만 불평과 두려움이 확산되면서 약속의 땅 가나안마저도 더이상 좋은 땅이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결국 불평한 출애굽 1세대는 40년 광야 길에서 전멸하게 되고 두번째 인구조사에서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남게 되었다. 땅이 약속되었을지라도 그 땅에 들어가는 일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되지 않은 자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고 그 땅이 두려워 불평하며 원망한 자들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들의 두려움과 불평은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심을 신뢰하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이스라엘의 불평과는 대조적으로 민수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뜻하는 많은 상징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임재는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잘 나타나는데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을 가운데 둘러싸고 열두 지파가 진을 친 모습으로 상징된다. 그리고 행진을 할 때도 성막은 이동식으로 운반되어 이스라엘과 함께 행군하였다. 이러한 상징은 글자 그대로 이스라엘의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진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는 눈으로 보이는 것이었고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유일한 준비는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심을 철저히 신뢰하는 것 뿐이었다. 이뿐 아니라 낮에는 구름이 성막을 덮고 저녁에는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하나님이 밤낮으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행군도 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면 출발하고 머무르면 진을 침으로써 이스라엘의 길 인도를 하나님이 직접하신다는 사실도 보여주었다.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이셨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공급하시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예언자 발람의 입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신 분이시다. 결국 광야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그 백성을 안으시고 인도하신 길이었다. 이스라엘은 땅이 비옥하냐 아니냐,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는냐 아니냐 로 살아가는 백성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백성임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이 바로 광야였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광야시절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신혼시절로 비유하기도 한다.(렘2:2)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생각한만큼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생각하면 불평과 두려움이 터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평하면 즉시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하였다. 이스라엘의 살 길은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멈추고 행징하는 것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 광야 시절은 이스라엘에게 엄중한 훈련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신명기: 모세의 고별 설교

2015-04-16 19:25:33


   신명기의 히브리말 제목은 "데바림"으로 "말씀들"이란 의미를가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고 시내산에서 이들과 언약을 맺으셨다. 이들과 맺은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으며 이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 있다. 신명기는 그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 선포된 "말씀들"이다. 출애굽 40년째 11월 1일로 시작되는 신명기는 가나안 땅을 눈 앞에 두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요단강 동편 모압평지에서 행한 고별 설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모세의 설교는 대략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번째 설교는 1장1절부터 4장 43절까지, 두번째는 4장 44절에서 28장 68절까지 그리고 세번째는 29장 1절부터 30잘 20절까지이다. 첫번째와 세번째 설교는 모두 "말씀"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고 가운데 설교는 "율법"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처음과 마지막 설교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원칙을 다루는 반면에 가운데 설교는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인 지침으로서 규례와 법도를 다루고 있으며 분량도 가장 많다.1

   첫번째 설교는 애굽에서 나와서 요단 동편 모압평지에 이르기까지의 지난 40년의 세월을 회고하고 있다. 지난 40년을 돌아보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삶을 잊지 말고 살 것을 촉구한다. 그러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큰 나라라고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열방 가운데 가장 위대한 나라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위대한 나라로 만드는 것은 이스라엘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기 때뮨에 이스라엘은 위대한 나라라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두번째 설교는 5장부터 본격적으로 십계명을 시작으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규례와 법도를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도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의 불순종과 실패를 되새기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법도를 지킬 것을 11장까지 이어서 강조한다. 그리고 12장 부터 26장까지 세부적인 규례와 법도가 주어진다. 이 규례와 법도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명심하고 순주해야 할 세부적인 것들인데 삶의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주어지고 있다. 그래서 이 부분(12장-26장)을 신명기 법전이라고 부른다. 신명기 법전의 기본적인 배경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한 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신12:1-14) 하나님께서 정하신 한 곳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중심으로 일상의 영역에서 규례를 따라 살아가는 삶이 이 법전에서 강조되고 있다.

 

   신명기 연구를 통해서 신명기의 전체 구조가 고대 근동의 국가간 조약체계와 비슷하다는 점이 발견되었다. 특히 주전 13-14세기경 힛타이트 제국의 조약문헌의 짜임새와 유사하며 또한 주전 7세기 에살핫돈의 조약문과도 유사한 것도 발견되었다. 고대 근동의 이 조약들은 대등한 두 당사자간의 조약이 아니라 주군이 그를 섬기는 봉신에게 부과하는 충성서약이었다. 정치적인 관계에서 쓰이던 이런 조약 체계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종교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봉신국가가 주군국사에세 충성을 다하듯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을 다해야 하고 다른 주군을 섬길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이러한 여호와 신앙을 간결하게 요약한 것이 흔히 "쉐마" 라고 부르는 신명기 6장 4-5절이다. 고대 근동의 조약과 신명기 조약의 차이점은 그 관계가 정복과 점령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과 선택 그리고 이스라엘의 자발적인 순종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단 조약관계로 표현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공적이고 법적인 차원을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죄는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관계적인 문제이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의 관계를 표명하는 이 언약이 깨어지는 것이 바로 죄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에게 가장 무거운 죄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이고 구약 율법이 우상숭배를 엄하게 처벌하는 이유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명령과 규례들은 단지 하나님만 향한 규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향한 규례도 포함되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터위에서 주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우솨의 관계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포함하고 이해하는 것이 구약 율법의 근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28-29장은 언약관계 파괴에 대한 저주가 실려있는데 축복보다 저주의 목럭이 훨씬 더 많이 나타나있다. 이 저주문들의 중요성은 이 내용들이 예언서들에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구약 예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예언은 앞 일을 말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신명기에는 "주 너의 하나님이 네게 주실 땅" 이라는 구절이 34번이나 나오는데, 이는 땅이 하나님이 언약관계를 통해 주시는 축복이요 약속의 실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땅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이며 여호와의 돌보심이 있는 땅이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그 땅의 농사조건이나 기후가 아니라 그 땅이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땅이요 또한 돌보시는 땅이라는 점이다. 신명기 율법은 바로 이 땅에서 지켜야 할 규례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땅을 약속하신 이유는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의와 공도를 이루며 살게 하시려는 것이 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을 누리는 것은 율법의 준수여부에 달려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더라도 만일 이스라엘이 율법에 불순종하면 그 땅에서 내어쫒기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땅으로 말미암아 구별된 백성이 아니라 그 땅에서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켜행함으로 구별되는 백성이다. 땅은 은혜이며 삶의 공간이지만 그 땅에서 합당한 삶을 잘지 않는다면 그 땅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구약 신앙에서 땅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특별하고 구별된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스스로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 살아가는 거룩한 삶을 명령하신다. 그래서 거룩에는 두가지 차원이 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거룩하시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심으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거룩한 삶을 갈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택하시고 베푸신 구원, 그들과 맺은 언약은 이스라엘의 근본이 되는 경험이다. 그래서 신명기는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로 끊임없이 이것을 상기시킨다. "들으라"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일을 듣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규례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듣는 것은 한번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계속 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계속적으로 깨닫고 계속적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명기가 우리에게 오늘날 일러주는 교훈이다. 

각주 1

. 처음과 마지막 설교가 가운데 설교를 앞뒤로 감싸고 있는 구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이 구체적인 규례와 지침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그러한 삶의 규칙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1. . 처음과 마지막 설교가 가운데 설교를 앞뒤로 감싸고 있는 구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이 구체적인 규례와 지침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며 동시에 이스라엘의 그러한 삶의 규칙은 바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