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하나님나라의 도래

메르시어 2023. 5. 9. 01:49

하나님나라와 구원

2015-04-08 22:29:29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특징 중 하나는 죄의 보편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아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이스라엘 가운데 예수의 첫 활동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선포로 시작된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죄의 범위와 깊이 그리고 심각성에 대한 예수의 판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절은 마태복음 5:21-22절이다. ("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이 들어가게 되리라")여기서 예수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죄에 대한 수량적 개념을 철폐하고 그 대신 질적 개념으로 대체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이와 같이 예수의 모든 설교는 인간이 모든 성품이 악하고 죄인이며 하나님 앞에서 빚진 자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음을 보게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구원에 대한 가르침은 누가복음 18:9-14에 잘 드라나 있는데 여기서 세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은 자신의 의로운 행위때문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바란데 있다. 이런 사상은 유대주의 구원론에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유대주의 관점에서는 회개하는 죄인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지만 이미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여 불명예스러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복음 17:7-10의 종의 상급 비유나 마태복음 20:1-16의 포도원 품꾼 비유는 모두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죄사함은 구원의 소극적 측면에 해당하는 것이고 적극적 측면에서는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산상수훈 전체에서는 하나님나라의 일원으로 참여한 사람의 신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또 다른 특징은 구원이 메시아이신 예수의 오심과 사역을 통하여 성취되었다는 점이다.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아 예언이 자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여기서 메시아의 오심으로 시작된 구원은 "주의 은혜의 해"로 요약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가난하여 종으로 팔린 이스라엘 사람들이 빚이 탕감되고 종에서 해방되며 자기들의 소유를 되찾는 "희년 " 혹은 "양의 뿔의 해"를 의미하였는데.(렘25:39, 겔46:17)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시작된 메시아적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요한에 대한 예수의 답변(마 11:4-6)은 메시아적 구원이 현재적이며 성취중에 있지만 기대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예수가 선포한 구원은 인간의 죄와 무능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여러 명령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세례 요한의 명령(눅14:26-27), 자기 부인과 용서의 명령(마18:1-5), 마지막 심판에 대한 묘사(마25:31-46) 등은 구원의 조건으로 인간의 도덕적 행위를 강조하는 듯한 구절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을 선포하는 직설법(Indicative)과 인간에게 행위를 요청하는 명령법(Imperative)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주기도문의 첫 세 청원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천국 구원의 선물이라는 사실이 준명히 시사하고 있다. 이 세 청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의 실현과 그의 자녀들이 순종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의도하고 있다. 또한 산상수훈에서 마태복음 5:13-16의 위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준다. "빛과 소금"이라는 제자들의 정체성이 선언된 이후에 여러 계명과 명령들이 나온다는 것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선한 행실은 그들이 천국 구원에 참여한 결과임을 의미할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의 채무자와 채권자의 비유도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활동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임을 보여준다. 이상의 고찰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구원에 관한 복음서의 명령형들은 직설법의 선언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와 교회

2015-04-08 23:19:30


   교회라는 단어는 신약성서의 에클레시아이다. 에클레시아는 구약의 카할에서 그 성서적 기원을 찾울 수 있는데 카할은 모임 혹은 모이는 행위 자체를 의미한다. 이 히브리 카할을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로 변역한 것인데 에클레시아는 밖으로(에크) 불러냄(클레시스)의 뜻을 담고 있다. 신약성서에서 에클레시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의 집회나 공동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마태복음 15:24은 예수의 사역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된 것 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의 일차적인 선교 대상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의미이지 이방인은 배제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 예수는 사역의 대상에서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았고 지역도 제한하지 않았다. 복음서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을 제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제자는 열두 제자에 국한되지 않는다. 열두 제자들 외에도 예수를 따르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복음서는 이들을 제자라고 부른다.(마5:1,3,10 : 눅6:20-23) 하나님나라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지상 사역이 시공간의 제약을 받는 이상 그의 사역의 목표도 주어진 역사 상황 가운데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나라의 새로운 백성들, 곧 교회에 대한 계획을 갖고 계셨고 먼저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 열두 제자들의 토대 위에 참 이스라엘 곧 교회를 세우실 의도를 밝히셨다.(마16:18)

 

  예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16:18)라고 하셨을 때  "세우다" 는 동사의 의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의미한다.(렘12:16: 18:9, 24:6, 31:4, 42:10, 암9:11) 그러므로 예수님이 내 교회를 세운다고 선언하신 것은 구약의 이스라엘에 대응하는 참 이스라엘을 세운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내 교회"라는 명시적 표현은 교회의 주인이 마땅히 그리스도이심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교회를 세우시는 토대인 "이 반석"은 베드로가 열두 제자의 대표격으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기 때문에 이 반석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한 제자들의 믿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기초는 믿음이 고백이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되 제자들의 믿음의 고백이라는 기초위에 세우시는 것이다. 또한 "내 교회를 세우리라"는 표현은 앞으로 세울 것이라는 미래의 사건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에는 교회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때 구체적으로 가시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님나라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동일시했지만 피터 쿠즈믹은 중세 가톨릭교회가 범했던 심각한 실수가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동일시한 것이고 그래서 중세 가톨릭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통치가 곧 교회의 통치로 왜곡되었다고 말한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는 동일하다는 주장과 교회와 하나님나라는 별개라는 주장은 모두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나온다. 교회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서 그 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ㅁ 백성들이다. 하지만 하나님나라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능동적인 통치 혹은 하나님이 왕권을  행사하며 다스리시는 나라이지 그 나라의 백성들과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나라에 속한 공동체이지 하나님나라 자체는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와 동일하지 않으며 교회보다 선행되고 더 포괄적이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또한 구별되어야 한다.  예수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나라는 사람들에게 반응하도록 도전하였고 그 도전에 반응한 제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렇게 메시아와 새로운 관계를 맺게된 메시아 공동체는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었고 그들로 참 이스라엘인 교회가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이 세상에 이미 시작된 하나님나라로 말미암은 필연적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나라는 그 나라의 백성을 창조한다.

 

  그 다음에 생각할 것은 하나님나라와 관계속에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세우거나 하나님나라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증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증거한다. 이것은 예수님이 열두제자들과 70인 제자들에게 주신 임무에 의하여 설명된다. 교회의 증언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유발하고 그들을 사탄의 권세에서 해방하여 하나님나라로 들어오게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인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능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도구로서 역할을 한다. 1

 

 

각주 1

증인이나 도구라는 개념보다는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구현하고 드러내는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

  1. 증인이나 도구라는 개념보다는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에 구현하고 드러내는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실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당하다. [본문으로]

하나님나라와 기도

2015-04-16 19:13:42


   구약성서에서 기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샤알" (청하다, 원하다, 강요하다, 신10:2,삿5:25,삼상12:13, 욥31:30), "팔랄"(기도하다, 청하다, 중재하다, 창20:7) "이슈타하바" (굽히다, 머리를 숙이다, 무릎을 꿇다), "할랄"( 노래하다, 축복하다, 선포하다)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구약성서에서 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그 관계속에서 다양한 기도의 형태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시편은 감사, 찬양, 탄원, 저주, 부르짖음, 하소연 중재, 질문 등등 기도의 이 다양한 차원을 잘 보여준다. 신약성서에서 기도에 해당하는 가장 일반적인 헬라어는 :프로슈코마이" (기도하다, 간청하다, 탄원하다) 인데 이 용어는 하나님과 만나는 모든 형태의 행위를 의미한다. 그 외에 "데오마이"(부족한 무엇을 청하다), "데에시스"(도움을 청하다), "아이테오"(무엇을 얻기를 요구하다) 등도 시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출발하며 그 관계에서의 교제를 누리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일방적이 아니라 항상 쌍방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말씀을 드리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레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기울여 듣는 것을 포함하여야 한다. 기도에서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나의 뜻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하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따라서 기도를 통하여 변화되어야 하는 상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기도하는 기도자 자신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자발적인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를 구하여야 하며 또한 그 뜻에 순종하기를 구하여야  한다. 그럴 때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다. 주기도문은 기도의 주제가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하나님의 백성이 존재하는 이유임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