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고

아브라함의 생애

메르시어 2023. 5. 9. 01:43

아브라함의 생애

2015-04-04 20:54:42


   아브라함은 성경 이야기에서 우뚝 선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소개된다. 노아홍수 사건이후 새롭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경륜의 주인공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셨고 그를 통하여 창조 경륜을 새롭게 진행하여 가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약속하신 것은 복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겠다는 것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했다. 이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알고 또 믿고 있었을까?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한 이후에 하나님은 반복하여 약속하신 복이 무엇인지를 계시하여 주시고 그 약속을 확증하여 주신다.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미 여호와로 나타나는데 사실 이 이름은 훨씬 후대인 출애굽기에 가서야 모세에게 계시된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여호와란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그 하나님이 바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그런 행동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에 근거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경우는 이미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그 사건에 근거하여 어떤 명령을 하신데 반해 아브라함의 경우는 가나안으로 가라는 명령을 먼저하시고 이어서 약속을 주셨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 점은 아브라함에게는 아스라엘 보다 더욱 믿음이 요구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을하셨고 물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는 그런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보다도 그 약속을 지키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가 더욱 요구되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세겜 땅에 도착하였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 땅을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실 것을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땅의 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내를 빼앗기는 위기를 만니지만 오히려 그 위기를 통해 아브라함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날 때에도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그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롯이 떤난 후에 다시금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확인시켜 주신다. 이어지는 롯의 수난 사건들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을 떠난 것은 곧 복을 떠난 것임을 이야기 해준다. 

 

  그러나 15장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이 자식이 없으므로 다메섹 사람 엘리아셀이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아브라함이 바록 하나님을 믿었지만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현실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 사이에서 씨름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씨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내 집에서 길린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씨의 약속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에대하여 계시가 한단계 발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이런 것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꺼번에 모든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라  세월을 두고 주신 것을 보게 된다. 그 세월들 가운데 아브라함은 현실과 약속 사이에서 씨름하고 갈등하였을 것이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의 실제가 무엇인지를 보게된다.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믿었고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는 말이 여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곧 하나님을 향하여 아브라함이 옳게 행한 것으로 여기신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다시 땅의 약속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자기가 이 땅을 소유할 줄 어떻게 아느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씨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면 땅의 약속은 어떻게 이루어지느냐는 질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질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하는 것이고 납득하는 것임을 보게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질문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응답해 주시고 설명하고 설득하신다. 그러나 땅의 약속에 대한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매우 독특하다. 하나님은 자신을 상징하는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게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기 생명을 걸고 그 약속을 이루시겠다는 엄중한 맹세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근본은 약속이전에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임을 보게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땅의 약속이 성취되는 방식을 아브라함에게 설명하여 주신다. 또 계시가 한단계 더 주어진 것이다. 그 방식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사백년을 자말 것이고 그 후에야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 약속대로 땅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씨의 약속과 달리 땅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4대 자손에 가서야 이루어질 먼 훗날의 일이었다. 아브라함은 결코 그 약속이 실현되는 것을 볼 수 없으며 다만 믿음으로 기다려야 할 일이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씨의 약속과 달리 땅의 약속에 대한 질문에는 하나님의 목숨을 걸는 맹세의식을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응답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16장에서 벌어진 이스마엘 사건은 믿음의 문제가 현실에서 결코 녹녹치 않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자가 상속자가 되리라고 설명하여 주셨지만 문제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언제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의 첩으로 선택한 사래의 생각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으로만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자신을 통해 아브라함의 씨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여전히 믿음은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씨름할 수 밖에 없음을 보게된다. 드디어 17장에서 아브라함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는데 그 첫 일성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이었다. 이는 약속을 능히 이루실 전능하신 하나님에 걸맞는 완전한 믿음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이미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셨는데 17장에는 언약이란 말이 쏟아져 나오듯이 등장하고 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씨가 번성하여 민족들이 나오고 왕들이 나온다는 것이며 그 언약은 아브라함뿐 아니라 대대 후손 사아에 세우는 영원한 언약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셨듯이 대대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한 단계 더 진전되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번성하는 것의 목적이 무엇인가의 문제이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엄청난 씨의 약속을 하신 것인가? 하나님은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실 뿐 아니라 그 약속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신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시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에게 무엇이 되는가?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언약관계의 핵심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하신 언약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언약의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할례의 흔적을 볼 때마다 자기 정체성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반복하여 기억해야만 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어서 하나님의 씨의 약속이 성취되는 최종적인 방식을 계시하여 주시는데 그것은 사라를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식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이때는 이미 아브라함이 나이 99세로서 현실적으로는 자식을 나을 수 있는 인간적 가능성이 사라진 때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엎드려 웃었고 마음속으로 백세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현실적인 대안은 이스마엘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호하게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실 뿐 아니라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 정히시고 그와 그의 후손과도 영원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식낳을 소망이 모두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신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란 현실속에서 약속을 바로보고 싸우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하다고 하시며 아브라함게 그에 걸맞는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씨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을 내년 이맘 때로 정하여 주신다. 그리고 드디어 사라가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낳아주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하셨다. 성경은 이 일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한 것일까? 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시험의 목적은 아브라함을 역경에 몰아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믿음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으로 끌어올리시려는 것이었다. 전능한 하나님에게는 완전한 믿음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시험을 통하여 완전한 믿음을 아브라함에게 요구하신 것이다. 이 시험을 통과하여 아브라함은 드디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믿음의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 수준이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넘어 하나님 그분 자신에 대한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이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 그분에 대한 신뢰인 것을 아는 믿음에 도달한 것이다.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바로 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첫 사람 아듬에게 요구하셨던 믿음이고 아담은 선악과 금령을 통하여 이 믿음에 도달했어야만 했다. 아브라함은  바로 아담이 실패했던 지점을 통과했고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경륜은 아담이 아닌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바로 아브라함이 도달한 그런 수준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을 향하여 니게 이제야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이고 무조건적인 신뢰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가 보았듯이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이런 수준의 믿음에 도달한 것은 아니었다. 약속과 현실 사에에서 아브라함은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고 씨름했으며 결국은 평생에 걸친 믿음의 여정끝에 약속을 넘어 약속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핵심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독자도 아끼지 않은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시며 지극히 중요한 계시를 더하시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민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창조 경륜은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막벨라 굴을 매장지로 사서 사라를 장사하였고 아브라함 역시 막벨라 굴에 장사되었다. 헷 족속에서 산 밭 거기에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장사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비록 눈으로 보지 못하였지만 자기가 죽은 후 4대만에 자기 후손들이 이 땅을 유업으로 받을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자기 매장지를 정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고 약속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시였다.

 

아브라함 이야기

2015-04-11 21:27:24


   하나님은 바벨론의 우르에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불러 내신다. 당대 문화와 힘의 중시지이던 바벨론으로 부터 변방의 가나안으로 불러내셔서 제국의 힘이 아니라 한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다. 도시의 번영이 아니라 유목하여 떠도는 한 사람과 그 후손을 통하여 온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시작하신다. 하나님이 부르신 그들은 이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평생을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살아간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제국의 중심인 바벨론에서 불러낸 민족의 조상 이야기라면 출애굽은 또 다른 세계의 중심은 애굽에서 불러낸 민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바벨탑 사건이후 이어지는 내용은 셈의 족보인데 이 족보 이야기는 긴 세월이 흘러감을 보여준다. 이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흘러가는 긴 세월 속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시는 일들이 이루어지고 나타난다. 셈의 족보는 데라를 거쳐 아브라함에게 이어진다. 셈으로 부터 흘러오던 세월과 역사는 이제 아브라함에게서 그 의미를 찾게된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브라함의 순종은 창세기의 원역사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이라는 두가지 약속을 하시는데 이 약속은 이후에 계속 반복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복이 된다는 의미는 땅의 모든 민족이 그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종과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민적, 비벨탑을 짓고 죄된 본성으로 헤메던 모든 민족에게 복주시고 구원화시는 통로가 되었다.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열방을 위한 순종으로의 선택이요 부르심이다. 

 

  창세기에 의하면 데라는 아브라함과 사라 그리고 롯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하였지만 중도에 하란에 머물러 살다가 죽는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란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으로 떠나게 된다. 아마도 데라의 이주는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아모리족의 대이동과 맞물린 이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란에 도착하여 더 이상 이동하기를 포기하고 그곳에 정착하여 살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약속을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가나안으로 갔고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았다. 결국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약속을 붙드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의 역사는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땅의 모든 백성에게 복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하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는 단지 그들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의 백성의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은 약속의 성취를 완전히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약속을 붙들고 그 약속을 기다리며 살았다. 이삭이 야곱에게 주는 축복이나 벧엘의 야곱에게 주신 약속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동일하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은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으며 요셉에게 당부하고 요셉도 이 약속을 믿고 자신의 뼈를 가나안으로 가지고 갈 것을 당부한다. 이것은 창세기 전체가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라는 주제를 가진다고 볼 수 있고 이것이 출애굽기를 비롯한 다른 오경의 책들과 연결되는 점일 것이다.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위태로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믿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약속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을 붙들고 위태로운 현실을 견디는 믿음의 세원을 통하여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세기의 마지막이 요셉의 유언으로 끝난다는 점은 창세기가 약속을 기다리는 책이란 점을 부각시켜 준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 성취는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평생 그 약속을 붙들고 그 성취를 기다리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이런 점들은 믿음의 본질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가. 믿음의 핵심은 약속이다. 약속을 받은 순간 그 약속은 이미 성취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땅과 자손, 그리고 열방에 미치는 복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창세기 18장 18-19절은 이 약속의 의미를 보여준다. "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여 함이니라" 창18:18-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그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 곧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녀를 주시는 것은 공평과 정의를 행할 사람이 필요한 까닭이고, 땅을 주시는 것은 공평과 정의를 행하고 이루어 갈 공간이 필요한 까닭이라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의와 공도를 행하는 삶을 살 때 열방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은 천하 열방을 위하여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으로 부름을 받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특권은 하나님의 규례와 법을 행하는 삶인 것이다.

 

   구약의 여러 곳에서 공평과 정의는1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으로 소개된다.(시33:5, 89:14, 97:2, 99:4) 아울러 공평과 정의는 다윗의 뒤를 이을 왕의 통치 원칙이라는 점에서 메시아의 통치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삶은 하나님을 닮는 삶이요 하나님나라를 이루는 삶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씨와 땅의 약속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씨가 땅에서 공평과정의를 행하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로 연결된다. 결국 아브라함은 하나님나라를 이루도록 하나님께 부름받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공평과 정의의 삶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이며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서 구현하는 삶이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약속은 한 민족에 대한 약속만이 아니라 온 세상에 임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큰 일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요셉 이야기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요셉을 통하여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요셉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이 기근에서 구원을 받고 번성할 수 있었으며 수많은 애굽 백성들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씨의 약속 그리고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열방에 미치는 복의 약속이 요셉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을 본다. 그러므로 요셉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삶의 결과요 열매를 보여준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알았기에 자신의 억울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견딜 수 있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며 살 때 그로 말미암아 열망이 구원을 경험한다는 진리를 요셉의 생애는 잘 보여준다.

각주 1

공평(미쉬파트)는 법적 제도적 측면의 정의라고 볼 수 있고 정의(쩨다카)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정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는 사회윤리나 사회정의라는 공적인 개념이전에 여호와의 통치 원칙인 것이다.

  1. 공평(미쉬파트)는 법적 제도적 측면의 정의라고 볼 수 있고 정의(쩨다카)는 사람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정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공평과 정의는 사회윤리나 사회정의라는 공적인 개념이전에 여호와의 통치 원칙인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