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언약과 새 언약
옛 언약과 새 언약
2015-04-01 03:48:55
언약이란 말은 보통 영어로는 covenant 라고 하지만 testament 로 쓰기도 하는데 testament라는 단어는 성경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은 구약 성경이나 신약성경을 막론하고 그 중심에 언약 사상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언약이란 무엇인가? 언약이 성경의 중심사상이라면 우리는 언약 사상을 창조로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야 한다. 창세기 1-2장은 성경의 언약 사상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신 후에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맡기시려고 사람을 자기 형상으로 지으셨다. 이어지는 선약과 금령은 사람이 어떻게 만물을 다스려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신의 창조목적이 무엇인지를 나타내셨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런 가정은 불필요하겠지만 만일 하나님이 천지를 직접 다스리셨다면 사람도 필요없었을 것이고 문제도 복잡해 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세계를 다스리기를 작정하셨고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통 하나님나라 하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역으로 말하는데 이는 피상적인 이해이고 창조 이야기에 의하면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의 순종을 통해서 나타나는 나라라고 말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란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이라고 할 수있다.
성경의 언약 사상은 바로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만물을 다스리기를 작정하셨다. 이것이 창조목적이다. 하나님은 이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에게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은 창조목적을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일을 하여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하신 요구이고 그러므로 사람의 의무가 된다. 이 의무를 저버리게 되면 사람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 이것이 바로 창조목적이고 이 창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은 특별히 자기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것이며 또한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신 것이다. 바로 이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맺어신 하나님과 사람간의 관계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언약 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언약이란 단순히 하나님과 사람이 맺는 관계가 아니라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맺는 관계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언약은 단순한 관계맺음이 아니라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고 또한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이 점이 언약 사상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언약은 전통적으로 이해하듯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문제는 선악과 사건이 보여주듯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은데 있다. 순종은 강요될 수 없고 언제나 자발적이어야 한다. 특히 그 주체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라면 더구나 그러할 것이다. 강요되는 순종은 복종이나 굴종이지 더이상 순종일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순종을 요구하셨고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를 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의무는 무겁거나 괴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려고만 하면 얼마든지 기쁘게 넉넉히 질 수 있는 의무였다. 사람에게 순종이 요구된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의 존재 이유도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을 통틀어 사람의 순종이 늘 중요하고 부각되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율법은 단순히 사람에게 죄를 깨닫게 한다거나 사람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순종해야 할, 그리고 그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사람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자신의 창조 목적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한 언약에 언제나 신실하시다. 참혹한 노아홍수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일일까? 불순종함으로 창조목적을 떠난 사람은 그 존재 목적을 상실하였다. 하나님에게 창조 목적을 떠나서, 사람 고유의 존재 의미는 물론, 다른 피조물의 존재 의미도 있을 수 없다. 다스릴 사람이 없는데 다스림을 받을 피조물도 존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도 저주를 받았고 홍수로 사람뿐 아니라 다른 생물도 멸절을 당한 것이다. (창세기 6장 6-7절) 그러므로 노아홍수 사건은 하나님이 사람을 포기하시거나 창조목적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이제 노아를 통해서 새롭게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의 필연적 결과인 것이다. 노아 홍수 직후에 하나님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이는 사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 부터 악함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창세기 8:21) 이 대목은 일견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존재이므로 아예 사람을 내버려둔다는 듯한 의미로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창조목적을 이루시려 홍수로 온 땅을 멸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하나님은 사람을 포기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람의 불순종이고 그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았다. 그렇다면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겠다는 이면에는 사람의 불순종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깊은 의지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만물을 홍수로 멸절한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이나, 홍수후의 이러한 자비로운 약속이 하나님의 대조적인 속성에서 각각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동일하게 창조 목적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하심에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하시려는 것이었다.(창세기 12:3) 천하만민은 불순종함으로 안하여 하나님의 복을 잃어버렸는데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복을 얻게하시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고 이스라엘을 형성하신 목적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누려야 할 진정한 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창조목적을 떠나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창조목적을 따라서 존재하는 것, 그래서 온 세계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얻을 복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되는 것인가? 그것이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구절이 창세기 22장 17-18절인데 이 대목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직후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크게 번성하며 아브라함의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며 또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라는 말씀이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의 혈통인 이스라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당초에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대로 천하만민에게 해당되는 약속일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복이란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씨로 말미암은 복인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출애굽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역사 가운데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은 가장 중요한 사건이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듯이 이스라엘의 출애굽 역시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언제나 자신이 지으신 온 세계였고 그 세계에 임하는 하나님나라, 곧 창조목적이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 후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기 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그들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모든 민족중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며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였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은 천하만민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을 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그 언약의 목적은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해서 천하만민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내산 언약에서 등장한 율법은 바로 이스라엘이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 전개된 이스라엘의 역사는 불순종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방제국에 의해 차례로 멸망하여 버렸고 이후에 한번도 회복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해 천하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획은 좌절된 것인가?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 유대 백성은 정치적으로 페르시아,수리아,헬라를 거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문제가 불순종에 있음을 알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고 애를 썻지만 오히려 형식과 위선에 빠질 뿐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유일한 소망은 이스라엘의 회복이었고 이것이 그들이 기다라는 하나님나라였으며 메시아는 바로 그 나라를 이루어 줄, 다윗의 뒤를 잇는 위대한 왕이었다. 이런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 구약성경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한다면 신약성경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소개되고 있다. 창조 이야기에는 이전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는 이전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며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떠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는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의 연속이며 또한 절정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을 위하여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며 이스라엘 역사가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직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은 진행중이었다.
그렇다면 왜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소개하는 것인가?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오신 분이심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만 주어졌던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게도 주어졌다. 그런데 유독 아브라함과 다윗이 거론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 보인 순종때문일 것이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합한 사람으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회자된다. 이는 그들이 보인 순종의 삶으로 인한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의 순종을 통해 성취된다. 그래서 약속은 반드시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오신 분이시며 또한 그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오신 분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로서 오신 분이며, 다윗의 뒤를 잇는 영원한 왕으로서 오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이스라엘의 한 구성원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오신 분으로서 참 이스라엘이 되신 분이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도달했고 이스라엘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집약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셨던 순종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하여 만민에게 복을 주시려던 계획이 참 이스라엘인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첫 일성이 하나님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라는 선포였던 것이다. 왜 하나님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나라는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임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 그것이 바로 창조목적이고 하나님나라이다.
여기서 옛 언약이라함은 구약을 대표하는 시내산 언약일 것이고 새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피의 언약일 것이다. 옛 언약에서 언약의 상대방이 이스라엘이었듯이 새 언약에서도 언약의 상대방은 이스라엘인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옛 언약과 새 언약은 무슨 관계인가? 이 질문은 구약과 신약의 상관관계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통적인 이해는 옛 언약을 그림자라면 새언약은 실체이고 옛 언약이 약속이라면 새언약은 그 약속의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두 언약의 유기적 관계를 간과하고 있다. 전통적인 이해에 따르면 옛언약은 지나간 것이고 폐기된 것이고 오직 새언약만이 중요하고 의미가 있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창조 이야기와 이스라엘 이야기에서 보듯이 옛언약과 새언약의 관계는 그림자와 실체 혹은 약속과 성취의 관계가 아니라 새언약은 옛 언약의 이어지는 이야기로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두 언약은 이스라엘 이야기 안에서 서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이야기는 아직 끝난 얘기가 아니고 옛 언약과 새 언약안에서 진행중인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날까까지 이어질 것인데 그날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완성되는 날이며 하나님나라가 충만하게 임하는 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