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메르시어 2023. 5. 8. 18:42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2015-03-27 02:05:51


  중세로 부터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을 해왔는데 이것을 "신존재 증명"아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가 누구이신지를 선포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주관적이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증명해서 보여줄 수가 없다. 무신론자들은 신은 인간이 만든 개념일 뿐이며 인간의 허무와 무기력을 메우려고 만든 허구이며 권력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종교는 근거가 없는 주관적이 믿음에 불과하하지만 무신론은 객관적이고 과학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신화를 심어주었다.

 

  그렇다면 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무신론자들이 의존하는 것이 실증주의이다. 실증주의한 사람의 감각이나 지식으로 그 존재가 분명히 밝혀진 것만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서 이전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것의 존재가 밝혀진 것이 많다. 그렇다면 이전에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 몰랐던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단지 존재를 몰랐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후에 더 과학이 발전하면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의 존재도 또 밝혀질 것이다. 이것이 실증주의의 허점이다. 실증주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조사해서 알수 있다는 거짓된 전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존재하는지 완벽하게 알 수 있으려면 무신론자 자신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신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무신론도 객관적인 과학이 아니라  주관적 믿음이며 또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그러나 유신론과 무신론은 양립할 수 없다. 하나가 참이라면 다른 하나는 거짓일 수 밖에 없다. 어느 것이 참인지는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유신론과 무신론이수반하는 세계관 중에 어떤 세계관이 더 유의미하고 합리적이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설명해주는가 하는 점이다. 첫째로 무신론자들은 우주의 기원에 대해 우연발생만을 주장할 뿐 어떤 증거나 실험 결과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정교한 우주가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믿지만 우연이라는 것은 어떤 것의 원인으로 작용할 수 없는 모호한 것을 가리키는 관념일 뿐이다. 이런 우연발생론은 무신론자들이 의존하는 경험론이나 실증론, 과학적 중거주의에도 완전히 어긋난다. 둘째로 모든 인간에게는 보편적으로 타당하게 받아들이는 윤리적 규범이 있는데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은보편적인 윤리의 기초를 세우려면 어떤 절대자, 즉 신적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무신론이란 믿음으로는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내재하는 보편 윤리의 기원을 설명하지 못한다. 셋째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압도적인 생각은 천부인권설이다. 천부인권설은 인간보다 휄씬 우위의 존재가 인간에게 존엄성을 부여했다는 주장인데 이것은 결국 그들이 인정하든 아니든 신적 존재를 전제한 주장이다. 성경은 사람은 다른 존재와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존귀한 존재라고 말하는데 천부인권설은 성경의 가르침과 통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때 사람이 다른 존재보다 존엄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이 세상에서 신을 배제하면 그것으로부터 많은 결과들이 파생된다. 객관적 진리나 절대 윤리라는 것도 없어지고 인생의 궁극적 의미나 영원한 소망같은 것도 무의미해 진다. 유신론이든 무신론이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객관적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유신론이 무신론보다는 사람과 세상을 설명하는데 더 합리적이고 유의미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이 아무리 과학성과 합리성을 내세운다고 할지라고 그들의 이론은 사상누각에 지나지 않는다. 극한 핍박과 박해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던 증인들로 가득한 기독교 역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다. 이 확신이야 말로 우리의 삶에 지치지 않는동력을 제공해주고 빛 바래지 않는 소망을 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2015-03-28 07:24:19


   한국 교회의 주류는 번영과 건강의 복음을 추구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원하는 것들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안락을 위한 신이 되어버렸다. 교회는 세상의 영향을 깊이 받으면서 세속화되었다. 이 모든 것의 근본 원인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신자가 하는 행동들을 하나님에 대하서 그가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결핍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중심에서 인간 중심적인 신앙으로 이끈다. 이것은 사실상 우상 숭배로 가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거기서 온갖 문제들이 발생하고 기독교가 타락해 가는 것이다. 우리에게 영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영생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달렸다(요17:3)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호6:6)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생각대로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가 가장 추구해야 할 것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의 인격과 성품이 어떤지, 그의 계획과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는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은 자연적인 영역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알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칸트는 신적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신은 사람의 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므로 감각에 근거해서 신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깊이를 완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노력하라고 요청한다. 성경은 우리가 지식과 능력이 뛰어나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지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초월적 존재이신 하나님을 그런 방식으로 알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보여주셔야만 알 수 있다. 이처럼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만큼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물에 대해 아는 것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진 상대방을 아는 것은 다르다. 사물을 아는 것은 사물에 대한 외적인 정보를 아는 것이지만 인격적인  상대방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이렇게 앎에는 두 종류의 앎이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에 대해 적용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많이 알 수 있지만 정작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그랬듯이 우리도 성경이나 종교적 행위 그리고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모를 수 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과 비슷하며, 외적인 지식을 넘어 하나님의 성품과 생각을 알고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반지성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지식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신을 믿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정직하게 탐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객관적으로 아는 것을 바탕으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참된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는 세가지 단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얻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계획과 뜻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들은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들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속에서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니다. 그분은 실체를 가진 인격이시고 구체적인 성품과 특성이 있는 존재이시며 어떤 것에 대한 선호가 분명하고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계획적으로 일을 추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어설프거나 잘못된 지식은 위험하다. 그것은 잘못된 하나님 상을 만들어 내고 우리를 우상숭배로 이끌기 때문이다. 두번째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실제로 체험하는 것이다. 성경은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라고 권한다.(시편34:8)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는 지식을 알지라도 삶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심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아직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심을 충분히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개관적 지식은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속에서 실제로 체험되는 것이 중요하다.

 

  세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의 삶 속에서 순종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과 인격적인 관계속에서 체험을 통한 앎은, 하나님을 아는 그 지식에 우리 자신을 전폭적으로 던지는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실제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정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한다(요일2:4) 하나님에 대해서 잘 알고 그분의 속성을 인격적으로 체험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보기 전에는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순종의 행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지식과 체험 그리고 실제적인 삶이라는 세요소를 다 포함하는 전인격적인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바로 하나님을 이렇게 전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자라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책상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얻게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 속에서 몸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 이해하지 못할 일들, 힘들고 번거로운 일드로 가득찬 우리의 일상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전인격적으로 알고 이해하게 되는 체험의 현장이다. 우리의 삶의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잔실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심을 이해하고 체험하여 살아있는 내 지식으로 만드는 현장이 되는 것이다. 삶을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면 우리는 인생의 난관들을 훨씬 더 긍정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시며 우리가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만나주신다고 약속하셨다.(렘29:12-14)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그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생이다.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2015-04-03 21:06:35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계시한다.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는 구분하자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한 계시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계시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전통적으로는 각각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과 공유적 속성으로 구분한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그것이 존재에 대한 것이든 성품에 대한 것이든 하나님과 피조세계 및 사람과의 긴밀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관계를 떠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첫째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독립적인(Aseity) 존재라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주시라는 계시에서 따라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피조세계가 존재하기 이전에도 계셨으며 창조된 어떤 존재에도 의존하지 않는다.(시편 90:2)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무엇이든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이 없다. 만물이 그에게서 낳고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있다.(로마서 11:35-36)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원하시는 대로 이루신다.(115:3)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시는데 피조물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가 없으시다.(사도행전 17:24-25)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은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피조물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면 창조 행위를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경륜은 하나님의 통치가 사람의 순종을 통하여 온 세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특별한 존재로 창조하셨고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하셨다는 점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 영광을 위하여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이사야 43:7) 이 말은 하나님이 무언가 부족해서 사람에게 받으려고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귀한 것이고 우리의 순종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은 우리의 전체성을 밝혀주면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가치 있고 의미 있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y)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분이며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말한다.(102:26-27) 변한다는 것은 지금의 상태가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사람은 언제나 더 나아 질수도 더 나빠질 수도 있는, 변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고 완전한 분이기 때문에 불변하신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말은 단순히 변화가 없다는 의미 이상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신 모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시고 모든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자신이 작정하시고 계획하신 일을 한 치 오차도 없이 실수 없이 다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미하고 그래서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이 후회하신 경우(6:6), 계획을 취소하신 경우(32:9-14, 38:1-6, 요나 3:4,10))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구절들이 하나님의 불변성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모습을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보이신다고 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작정과 계획을 바꾸신 적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변성은 단순히 변화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람과 피조세계에 대하여 신실하신 분이시며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분이라고 고백한다,(시편139:7-10)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은 세상에 없다. 하나님은 공간의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가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편재성은 단순히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신 분이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어느 특정한 장소나 공간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은 만유에 충만하신 분이시므로 우리는 어디서든 언제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약에서 구약적 성전 개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 신자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놀라운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의 보편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시간, 장소, 물건이 거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하는 모든 시간. 장소, 물건이 거룩하게 된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이지 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다. 편재하신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만나주시며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하셨다.(28:19-20) 이 약속은 엄청난 돈과 권력을 자긴 것 보다 성도들에게 더 큰 축복과 위로가 된다.

 

  네 번째는 하나님은 영(Spirituality)이라는 점이다. 사람은 영과 육을 동시에 가진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오직 영이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은 그분이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서 그분이 사람이나 다른 피조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이시라고 해서 비인격적이거나 비실체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분명히 존재하시는 영적 실체이시며 또한 인격적인 영으로서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말씀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며 우리의 희로애락을 공감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과는 다른 영적 존재이시지만 동시에 사람과 관계를 하시는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하나님이 인격적이시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하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의 수준에 맞추어 사람과 관계를 하시는 것이다. 십계명의 제2계명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전제위에 서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형상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순간 하나님은 왜곡되며 또한 하나님에 대한 예배도 왜곡된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015-04-03 21:07:42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지혜란 최선을 목적을 선택하고 그 목적이 이르는 최선의 길을 택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지혜로운 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런 존재가 누구인가? 바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가장 지혜로우신 분이시며 또한 모든 지혜의 원천이시다.(12:13)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창조에 나타나 있다.(3:19) 우주와 생태계 그리고 생명의 조화를 보면 경이로움을 금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람이 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의 산물이다. 그러나 창조에 나타난 지혜보다 우리에게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시다. 하나님은 창조하셨을 아니라 창조하신 만물을 다스리시며 창조 시에 계획하신 창조의 목적으로 이끄신다. 그래서 죄에 빠진 사람을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방법으로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충족되었으니, 여기에 사람을 구워하시는 하나님의 지혜가 충만하게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라고 말하며(고전1:18,24)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오묘함에 감탄한다.( 11:33) 또한 지혜로우신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 가운데 개입하셔서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8:28) 선을 이룬다는 것은 비록 모든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결과에 이르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지혜로우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임을 보여준다.(119:98-100) 성도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그 계명을 지켜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111:10)

 

   둘째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의 기본 개념은 구별된다는 것이다. 거룩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하나는 존재론적 거룩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 거룩이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존재론적 의미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신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한다.(15:11)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지성소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은 파조물이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해서 안 됨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배해야 함을 의미한다. 윤리적의 거룩은 하나님은 죄와 관계가 없으신 분이며(34:12) 완전히 의로우신 분이시란 의미이다.(요일1:5) 하나님의 뜻은 윤리와 도덕의 표준이 되시며 하나님이 정하신 모든 계명은 의롭다(119:160)

 

   셋째로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에 신실하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그들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것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언약에 신실하신 분으로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약 백성에게 신실함으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로 세우시고(9:15) 그 언약 안에서 신실하시다.(10:23)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존하고 있다.(살전5:23-24)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그 죄를 용서해주신다.(요일1:9)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선언은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나타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심판, 공의와 사랑,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실함에서 나온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격스럽게 노래한다.(8:38-39)

 

   네 번째로 하나님은 평화의 하나님이시다.(고후13:11) 하나님은 평화 그 자체이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평화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도피는 필연적으로 평화의 파괴를 가져온다. 세상의 분열, 대립, 갈등은 평화의 하나님의 부재하심으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하나님은 파괴된 평화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회복하신다.(55:12, 29:11, 14:27, 8:6, 살후 3:16)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을 화복시키기 위하여 보낸 메시아를 평화의 왕으로 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9:6, 1:20)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시키셨다.(2:14-16) 평화의 전제 조건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고.(3:25, 5:10-11,2:14) 하나님과의 화해로 사람 간에도 평화를 이루게 되며(3:28, 4:1-4) 평화의 복음은 세상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평화의 직분을 맡기셨다.(고후5:18-19) 그러나 평화의 직분을 전도에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 세상과 온 피조세계로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peacemaker)이다.(5:9)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2015-04-03 22:06:2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름으로 시작되는 주도문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잘 보여준다하나님은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늘에 계신 분이시며 동시에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신 분이시다하나님은 우리와 관계하실 때 이 두 가지 면을 모두 보여주신다하나님에 대한 가장 근본 계시인 창조주 또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보여준다하나님은 창조주이시므로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신 분이시지만 동시에 자신의 피조물에게 다가오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 하나님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알려주시는 만큼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하는 하나님은 지극히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기오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는 사리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한한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무한한 창조주라는 사실은 언제나 기억되어야 한다. 그러나 초월성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신론에 빠지게 된다. 이신론의 하나님은 역사에서 떨어져 계시며 세상의 움직이는 원리만 제시할 뿐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신론의 하나님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이신론은 결국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간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확보하려고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피조세계나 역사와 무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초월자로서 피조세계와 역사를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계시지만 겸손한 사람, 회개하는 사람과 함께 하신다고 말한다.(57:15) 하나님은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피조 세계에 현존하신다. 만물이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한다.(17:27-28) 세상의 창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내재성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저 먼 곳에서 세상과 무관하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다스리신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이 세상 역사에 깊이 개입하신 결정적 사건이다. 하나님의 내재성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은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시고 보존하고 유지하시는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만아 하나님의 관심 대상이 아니고 비기독교인 역시 하나님이 자기 형상으로 창조하신 존재이므로 관심을 가지고 돌보신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원하고 그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다. 하나님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만물도 보존하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연만물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실 때 기적적인 방식으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체적인 사람이나 사건을 통하여 일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순종은 물론 심지어 불순종도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 비기독교인들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그러므로 필요하다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면 공동의 목적을 위하여 그들과도 협력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내재성이 지나치게 강조되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직접 행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여 사람이 꼭두각시로 전락되어 자율성을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책임이 사람에게는 없고 하나님께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개입은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데 순종은 자율성을 전제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율성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에 그 자율성을 망치는 방식으로 개입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인간 행동의 일차적인 책임은 인간 자신에게 있다. 또한 하나님의 내재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나님을 너무나 친근하게 여기는 나머지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만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균형 있게 붙잡아야 한다.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면 하나님을 왜곡하게 된다. 이 균형 있는 강조는 우리의 예배와 기도에도 균형을 가져온다. 우리가 예배와 기도에서 하나님의 멋진 두 모습을 모두 담아낼 때 우리의 일상의 삶도 균형 있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은혜

2015-04-11 20:56:41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을 찾으신다.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있는지 모르실리가 없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아담을 찾으시고 아담에게 물으신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의 눈 높이에 자신을 맞추어 사람을 상대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남자 여자 그리고 뱀의 순서로 물으신 하나님은 이제 역순으로 그들을 심판하신다. 이러한 심판 선언은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책망하시고 심판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계시한다. 여기서 열거된 심판의 내용은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이 그들이 사는 현실적 삶의 어려움과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 본문이 지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아마도 인간이 유한함에 대한 것이다. 모든 사람은 수고로이 일하다가 궁극적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아담과 하와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 그리고 가인에 대한 징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죄악은 나날이 전파되고 확장된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고 근심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땅 위에 지어진 모든 사람을 진멸하기로 작정하셨고 그것이 바로 온 땅에 임하는 홍수였다. 노아 홍수 사건은 철저히 죄에 대한 심판이었는데 그 죄의 핵심은 사람들이 서로의 관계를 파괴하고 서로에게 가하는 폭력이었다. 그러나 홍수후에 남은 노아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은 다시금 복을 주시고 생육하며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첫번째 창조시에 하신 말씀과 거의 동일하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 사건이후에 두번째 창조,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노아 홍수라는 거대한 심판을 경험한 인간들의 대응은 하늘에 까지 이르는 바벨탑을 쌓는 것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맞선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원역사(1-11장)는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그것은 이렇게 범죄하며 끊임없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이 땅위에 하나님의 대행자로 지음을 받았으나 도리어 하나님을 대항하고 서로의 관계를 파괴하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의 대답을 창세기 12장 이후 전개되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에서 발견하게 된다. 

 

 인간의 불순종과 왜곡에도 불구하고 그 지으신 세상과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진실하시다. 하나님은 범죄한 첫사람의 수치를 가려주시려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으며 하나님 앞에서 쫒겨나 유리방황하는 가인에게도 그를 보호하는 표를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에게도 불 수 있다. 노아를 일러 의인이하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떠난 세대에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한 자임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이다. 노아를 통하여 세상은 존족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었다. 바벨탐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이 흩어지게 하심으로 그들로 다시시작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은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은혜를 베푸신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섭리

2015-05-03 01:45:13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존재하지만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이신론(Deism)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우주가 움직이도록 정해놓으셨고 우주의 운행과 세상의 역사에는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운명론인데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세상의 미래는 이미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두가지 생각을 모두 반대한다. 성경은 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이시며 동시에 주권자라고 말한다는데, 이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창조 세계를 그냥 내버려주시는 분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고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섭리(Providence)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창조물과 협력하면서 창조세계를 보전하고 자신의 목적대로 통치하시는 지속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섭리의 범위는 우주적이다. 무생물, 생물, 자연, 역사, 인간 등 하나님의 섭리가 미치지 않는 영역은 없으며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이후 지금까지 다스리고 계신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하나님의 섭리에세 배제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서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세상을 섭리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섭리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첫째는 보존(preservation)인데. 이것은 피조세계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도록 그 존재를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의 활동이다. 만물이 존재를 지속하는 것은 하나님의 보존 활동때문이다. 만물은 그  존재의 지속을 그 존재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세상이 죄로 오염되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여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종말의 때까지 세상을 보존하신다. 그리고 종말은 세상의 소멸이 아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도달하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의미한다.

 

   섭리의 두번째 차원은 통치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향한 자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고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우주와 자연이 어떤 질서와 법칙대로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그 질서와 법칙에 매이지 않고 필요하다면 그 질서와 법칙을 초월하여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역사의 흐름과 국가의 흥망성쇠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역사 가운데 나타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 이면에는 하나님의 통치의 손길이 미친다는 것이다. 인간은 역사의 흠름과 사건들의 원인과 결과를 놓고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지만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커녕 개별 사건들의 궁극적인 인과관계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 역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모든 사건들이 하나님의 승인과 인정하에 일어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섭리하신다는 것은 그 어떤 역사적 사건들도 하나님의 섭리밖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악행으로 수많은 불행한 사건들을 자초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일들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일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성취해 나가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이 피조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피조물의 어떤  선택이나 행동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모든 결과를 미리 정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인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존재로 만드셨다.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묻고 심판하실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의 판단과 행동에 적절히 반응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활용하시고 또 그것에 상응하시면서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람에게 죄우되지 않지만 사람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다스림을 나타내시는데 사람의 악행과 불순종에 대하여는 진노와 거스림으로 나타나고 사람의 선행과 순종에 대하서는 기뻐하심으로 나타난다. 특별히 하나님은 신자들의 자발적 순종을 원하시며 그들의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세상이 나타내시길 기뻐하신다. 그러나 불신자들의 악행이나 불순종조차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탁월성이요 신비이다.